하지만 꼭 눈치 없이 끼어드는 사람 때문에 이젠 침대가 아니라 소파도 겨우 애원해야 차려질 것 같았다.구승훈은 걸어가며 달래는 어투로 강하리에게 말했다.“왜 저런 여자랑 말을 섞어.”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뿌리쳤고 그는 그 틈에 바로 허리를 감아왔다.강하리가 몇 번 몸부림쳤지만 남자는 더 단단히 감쌀 뿐이었다.두 사람이 커플처럼 가까워진 것을 본 진시연은 엘리베이터 입구에 서서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최상층을 눌렀다.주해찬은 화장실에서 강하리가 간병인을 부르는 통화를 듣고 쓴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오늘 밤 강하리에게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강하리가 그를 단지 선배로 생각한다는 걸 잘 알았고 입 밖에 꺼내면 둘 사이가 더 어색해질 것만 같았다.하지만 오늘 구승훈이 강하리를 벽에 밀착해 키스하는 모습을 본 순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주해찬은 심호흡을 한 뒤 시선이 다리로 향했다.여전히 포기가 안 되었다.강하리가 그를 좋아하지 않으면 물러날 순 있어도 그녀의 곁에 남아있는 남자가 구승훈이라는 사실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갑자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주해찬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들어와요.”그는 대답하고 휠체어를 밀어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방문객을 본 그는 살짝 당황했다.강하리가 부른 간병인이 온 줄 알았는데 진시연일 줄이야.“무슨 일로 왔어?”진시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우연히 지나가다가 보러 왔지. 좀 어때? 다친 건 잘 회복하고 있어?”주해찬이 웃었다.“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진시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떠날 생각이 없었다.주해찬은 그녀가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진시연, 할 말 있으면 그냥 해.”진시연도 주해찬을 바라보며 더 말을 돌리지 않았다.“해찬 오빠, 강하리 좋아하지?”주해찬은 잠시 멈칫했다.“응. 비밀은 아니지만 너랑은 상관없
진시연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굳어버렸다.주해찬의 성격이 온화하고 그의 약점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막무가내로 찾아온 건데 주해찬이 받아들이기는커녕 되려 그녀를 협박할 줄은 몰랐다.진시연의 입꼬리가 살짝 굳어졌다.“해찬 오빠, 정말 강하리가 구승훈이랑 만나게 놔둘 거야?”주해찬은 정말 원치 않았지만 강하리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진시연, 오늘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진시연은 내키지 않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해찬이 강하리에게 손대지 않아도 할 사람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진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해찬 오빠, 생각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해.”주해찬은 진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소 우울한 웃음을 내뱉었다.솔직히 아주 잠깐 마음이 흔들린 건 사실이었다.인간의 욕심이란 원래 끝이 없으니까.그는 심호흡하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들고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차 안에서 강하리는 주해찬의 연락을 확인하자마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간병인 문제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주해찬이 이렇게 말했다.“하리야, 진시연 조심해.”강하리는 멈칫했다.“선배, 무슨 일 있어요?”주해찬이 피식 웃었다.“아무것도 아냐.”강하리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면 주해찬이 전화를 걸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선배...”“하리야.” 주해찬은 강하리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내가 너한테 한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것 때문에... 날 멀리하지도 말고. 알았지?”강하리의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가며 이윽고 입술을 다문 채 웃었다.“안 그래요.”“그럼 됐어.”주해찬의 목소리엔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전화를 끊은 강하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구승훈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주해찬이 또 오래?”정신을 차린 강하리가 답했다.“아니.”그녀는 문득 주해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주해찬과 멀어질 생각은 없었지만 그
별장 문 앞에는 정원이 있었고 불이 켜져 있지 않은 정원에 달빛이 환하게 비추자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안은 채 리시안셔스가 가득한 정원을 지나갔고 강하리는 묵묵히 꽃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이사 가자고 했던 곳이 바로 여기라는 걸 알 것 같았다.강하리는 왠지 모를 느낌이 들며 오랜만에 마음속 안정을 느꼈다.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니 남자의 서늘한 옆태엔 아직 미소가 살짝 남아 있었다.기억 속 구승훈은 잘 웃는 사람이 아니었고 항상 그녀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 아니면 설령 웃는다고 해도 무심한 조롱의 표정이었다.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녀를 볼 때면 항상 미소를 짓고 있었다.강하리가 시선을 거두며 구승훈의 어깨에 기대자 걸음을 멈춘 구승훈이 품 안에 안긴 강하리를 내려다보았다.“자기야, 이러면 나 못 참는데.”하지만 강하리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았다.“언제는 참은 것처럼 얘기하네.”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하지만 이러면 내가 당장 네 옷을 벗겨버릴 수도 있어.”강하리의 몸이 경직되자 구승훈은 웃으며 그녀를 안고 별장으로 들어갔다.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별장 안 가구와 인테리어는 그 익숙한 아파트로 돌아간 듯 러그부터 컵 하나까지 모두 똑같았다.전부 그녀가 직접 산 것이었지만 구승훈과 함께 가차 없이 버린 것들이기도 했다.그런데 지금 그 물건이 구승훈과 함께 눈앞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강하리는 깜짝 놀라서 잠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그땐 싫다고 했는데 아직 좋아해?”구승훈이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묻자 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좋아. 늘 좋아했어.”숨이 턱 막힌 구승훈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이미 잠겨 있었다.“자기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강하리의 손가락이 그의 옷깃을 감싸 쥐며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곧장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숨돌릴 틈도 주지 않은 채
둔탁한 아픔이 구승훈의 가슴을 강타했다.그는 몸을 숙여 강하리를 품에 꼭 안고 입맞춤했다.“미안해 자기야, 미안해.”강하리는 눈시울을 붉힌 채 그의 목덜미를 콱 물었다.구승훈이 거짓말을 했다는 분노를 모두 쏟아내듯 자비 없이 강하게 깨물었다.구승훈은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강하리가 깨물도록 내버려두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을 깨물고도 아직 미움이 풀리지 않은 듯 그의 어깨를 두 번 더 세게 치고 나서야 그를 놓아주었다.구승훈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시선이 붉어진 그녀의 눈가로 향했다.“아직도 화났어?”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고 그의 눈빛에는 아픔이 가득했다.“화 풀어, 응?”강하리는 붉어진 눈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앞으로 나한테 또 거짓말하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구승훈이 괜히 마음에 찔렸지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몸에 관한 것 빼고 다시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또 깨물 거야?”강하리가 그를 밀어냈다.“가죽이 너무 두꺼워서 물기도 힘들어.”구승훈의 입가에 마침내 작은 미소가 번졌다.“안 두꺼운 데 있는데 한번 물어볼래?”멈칫한 강하리는 그가 어디를 말하는 건지 깨닫고는 이내 얼굴을 붉혔고 구승훈은 웃으며 일어나 그녀의 옷을 정리해 주고는 그녀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내려줘, 나 혼자 걸을 수 있어.”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을까?”강하리가 구승훈을 밀어내자 혀를 찬 구승훈이 옆에 있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간 그는 옷장에서 미리 준비해 둔 강하리의 옷 한 벌을 꺼낸 뒤 문 옆에서 기다렸다.안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멈추고 나서야 구승훈은 문을 두드렸다.“강 대표님, 시중 들어드릴까?”“필요 없어!” 강하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고 구승훈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나온 강하리는 몸을 닦을 때가 되어서야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
“어디 다친 데는 없나 내가 잘 살펴봐 줄게.”강하리가 그 말의 뜻을 알아채기도 전에 구승훈이 큰 손으로 그녀의 목욕 타월을 낚아챘고 그녀가 깜짝 놀라는 사이 구승훈은 이미 타월을 민첩하게 열어젖혔다.순식간에 살결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구승훈이 제대로 보기도 전에 강하리가 옆에서 이불을 잡아당겼다.구승훈은 몸을 꽁꽁 가린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씰룩거릴 수밖에 없었다.“강 대표님, 내가 참다가 죽길 바라?”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속옷을 가져와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가서 씻기나 해.”구승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순식간에 검게 물든 눈동자를 번뜩이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기다려.”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강하리는 이불속에 감춘 손을 꽉 말아쥐며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개자식!”얼굴에 달아오르는 열기를 참으며 이불 속에서 옷을 입고 타월을 두른 뒤 드레스룸으로 향했다.잠옷을 찾아 입은 강하리는 잠시 안방을 돌아보았다.구승훈이 얼마나 준비했는지 모르겠지만 침실의 구조도 연성의 집과 똑같았다.심지어 침대 시트마저 그녀가 직접 산 것이었다.침울한 눈빛으로 침대 옆에 서 있던 강하리는 허리를 굽혀 침대 협탁 위에 놓인 사진을 집어 들었다.석연란이 몰래 찍은 사진 중 하나로 사진 속 남자는 그녀를 차에 밀어붙이고 있었다.강하리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별 사진을 다 꺼내놓는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구승훈이 뒤에서 다가와 그녀를 감싸 안았고 남자의 손이 거침없이 그녀의 가슴으로 향했다.잠시 어루만지던 그가 물었다.“다쳤어?”말을 마친 그의 손이 잠옷 옷깃 사이로 안을 파고들었다.“확인해 볼게.”말로는 확인한다면서 손으로는 거침없이 그녀의 잠옷을 찢고 다른 한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은 채 그대로 키스했다.강하리가 그의 입술을 깨물자 구승훈은 곧바로 몸을 뒤집어 그녀를 덮쳤다.안방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구승훈이 무의식적으로 침대 협탁을 열었다가 행동을 멈추었다.“안전한 날
구승훈은 강하리의 거부감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는 손을 뻗어 강하리의 턱을 잡고 강하리가 자신을 올려다보게 했다.“자기야, 나 밀어내지 마.” 강하리는 여전히 입술이 창백한 채 코끝이 시큰거렸다.그녀가 구승훈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나 다시 데려다줘.”구승훈은 그녀가 여기서 잠을 못 이룰 거라는 걸 알았기에 굳이 강요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강하리의 옷을 챙겨주러 갔다.두 사람이 별장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강하리가 묵묵히 앞서 걸어가자 구승훈은 말없이 뒤에서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따라갔다.잠시 후 그는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 강하리의 손을 잡았고 강하리는 멈칫했다.구승훈은 침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꿈 꿨어?”강하리의 입가가 파들 떨리며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야.”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을 떼어내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구승훈은 잠시 제자리에 서 있다가 곧바로 따라갔다.차 안의 공기엔 적막감이 돌았다.분명 올 때만 해도 두 사람 다 기분이 좋았는데 임신이라는 두 글자로 이렇게 됐다.강하리의 얼굴은 여전히 핏기 없이 창백했고 구승훈도 더 묻지 않았다.두 사람이 심씨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출장에서 막 돌아온 심준호를 만났다.심준호는 두 사람을 보고 살짝 놀라며 농담을 건네려던 찰나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발견했다.“삼촌.” 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저 먼저 올라갈게요.”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올라가서 좀 쉬어.”강하리가 올라간 뒤에야 심준호는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왜, 또 무슨 짓을 해서 하리 화나게 했어?”구승훈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내가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하면 믿겠어?”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렸고 구승훈은 돌아서서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슨 꿈을 꾸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꿈을 꾸며 연정이를 부르던 그녀는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렸다.아마... 연정이에게 무슨 일이
강하리는 코끝이 시큰거리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할머니.”백아영은 별다른 말 없이 강하리에게 연정이를 안겨주고 돌려보냈다.연정이를 품에 안고 나서야 강하리는 꿈속의 공포에서 깨어난 듯 안도감을 느꼈다.구승훈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 강하리가 침대에 앉아서 잠든 연정이를 바라보고 있었다.“폭발하는 꿈 꿨어?”그는 다가와 강하리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강하리는 계속 연정이만 바라보다가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나지막이 답했다.“응.”구승훈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잡았다.“자기야, 앞으로 정말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 모녀가 다시는 괴롭힘 당하지 않게 할 거야.”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고개만 끄덕였을 뿐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밤늦게 침대에 누웠지만 둘 다 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준봉은 심씨 가문 별장 입구에 일찍 차를 주차했다.“나가려고?” 심준호가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구승훈이 대답을 하고는 저쪽에서 연정이에게 밥을 먹이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일이 좀 있어서.”심준호도 식당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진씨 가문 두 어르신이 혼사를 결정한다는 소리가 들려. 나이가 있긴 하니까.”구승훈이 콧방귀를 뀌었다.“언제부터 진씨 가문에서 하리 혼사를 결정하게 된 거야? 심씨 가문은 내버려둘 건가?”심준호는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었다.“하리만 원하면 우린 간섭하지 않아.”그는 말을 마치고 구승훈의 어깨를 두드렸다.구승훈의 눈에는 여전히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하리는 원하지 않을 거야.”심준호는 미소를 지으며 강하리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하리야, 난 구승훈이 네가 자기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꼴을 못 보겠다. 진씨 가문에서 소개해 준 사람도 괜찮다며?”구승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삼촌, 할머님이 며칠 전에 결혼 얘기를 하시던데요.”“...”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다가가 고개를
진시연은 밖에서 걸어 들어오면서 말하다가 심준호를 보자마자 멈칫했다.억울함이 가득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얌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준호 삼촌.”심준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강하리 옆에 서서 진시연을 다소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앞서 강하리가 친자 확인 검사를 할 때 그는 마침 출장 중이라 곁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중에 친자 확인이 조작된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심준호는 준호 삼촌이라고 부르는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진시연은 심준호의 표정에 조금 당황했다.“준호 삼촌, 전...”“방금 뭐라고 했어?” 심준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고 진시연은 다소 억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못 본 척 담담하게 연정이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다.진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준호 삼촌, 전 그냥 하리 씨가 할머니를 뵈러 갔으면 좋겠어서.”하지만 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하리 때문에 네 할머니가 쓰러졌다고?”진시연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준호 삼촌, 할머니는 그냥 하리 씨가 너무 보고 싶었던 건데 하리 씨가 요즘 할머니 전화도 안 받아요.”말하면서 강하리가 또다시 화를 낼까 봐 두려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강하리는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휴지를 꺼내 연정이의 입을 닦아주기만 했다.진시연은 그 광경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들어오고부터 지금까지 강하리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진시연은 입술을 다물고 다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심씨 가문 아가씨는 만만치 않았다.강하리에게 향한 그녀의 시선이 다소 서늘했다.대체 왜 강하리는 이렇게도 운이 좋은 걸까!심씨 가문 아가씨이자 아빠의 친딸이기까지 했다.진시연은 가슴 속에 응어리진 분노를 억누르며 다시 말했다.“하리 씨, 그쪽 때문에 할머니가 이번에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한번 보러 가요, 네?”강하리의 입꼬리가 굳어지며 입을 열려고 할 때 심준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강하리 얼굴에 약간 어색함이 스쳤다. 하지만 백아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들어와 그녀의 옷을 갈아입혀 주며 넌지시 말할 뿐이었다.“너희 할아버지 말이야. 이렇게 즐거워하신 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역시 저 양반을 웃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시욱이 뿐인가봐.”강하리는 자연스럽게 백아영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할머니, 전 에비뉴 주얼리와 JM 그룹을 잘 운영하고 싶어요. 그리고 연정이도 잘 키우고 싶고요.”고요한 방 안이라서 그런지 강하리의 목소리는 유난히 담담하게 들렸다.창밖에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봤을 때, 마음 한편이 여전히 아파져 오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그에게 어떤 이유가 있었든,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강하리는 그때와 같은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아래층 거실은 여전히 왁자지껄했고 설날이 다가오며 곳곳에 명절 분위기가 감돌았다.심씨 가문은 정말 오랜만에 모두 함께 모여서 화목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한편, 심준호는 팔짱을 끼고 별장 밖에 서서 그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난 네가 다시는 안 올 줄 알았어.”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그때 심준호가 갑자기 다가와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너 대체 뭐 하는 짓이야?”그동안 심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화를 꾹꾹 참고 있었다.구승훈을 믿고 강하리를 맡겼는데 돌아온 건 이런 결과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지금까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심준호도 그를 감싸주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은 그저 가만히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난 하리가 갑자기 뛰어내릴 줄 몰랐어.”그는 원래 조금만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노진우가 여초천을 손에 넣기만 하면 임희주가 죽든 말든 그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만약 노진우가 실패한다면
진태형은 병원에서 강하리 곁을 밤새 지켰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꽃다발을 안은 채 이쪽으로 걸어오는 임명우와 마주치게 되었다.임명우는 진태형을 보고 살짝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었다.“진 장관님, 오랜만입니다.”진태형은 눈빛을 가라앉힌 채 임명우를 바라봤다.“하리를 보러 온 건가요?”임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강 대표님과는 업무적으로 조금 얽힌 부분이 있어서요. 입원하셨다는 말 듣고 병문안 왔습니다.”진태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렇군요. 하지만 임 대표님, 하리한테 마음을 두진 마셨으면 좋겠어요.”임명우는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진 장관님, 너무 깊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랑 강 대표님은 정말 업무적인 관계예요. 그리고 시연 씨랑도 몇 년 전에 헤어졌고요. 제가 정말 강 대표님을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잖아요?”진태형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하리한테 마음 두지 마세요. 충고가 아니라 경고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하리한테 손을 대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미소를 짓고 있던 임명우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누구든 진태형 앞에서는 결국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장관님.”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임명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시연 씨 말이 맞았어요. 진 장관님은 시연 씨한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거 말이에요. 당신은 강하리 씨랑 비교도 안 되는 존재라는 거죠. 그러니까 저도 이제 시연 씨 따위 필요 없어요.]문자를 보낸 그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M 국에 있는 진시연은 그 문자를 보자마자 분노에 휩싸여 핸드폰을 그대로 던져버렸다.구승훈과 강하리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당장 귀국하려 했었다. 하지만 떠나기 직전에 여초연이 그녀의 길을 막았다.하지만 진시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임명우의 문자를 받고 당황한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
요양원 주차장.심준호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진태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도 잘못이 있어요... 계속 하리가 구승훈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우리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심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요즘은 조시욱이 꽤 신경 써주더라고요.”진태형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 옛날 자신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심미현과의 약혼을 지키며 버텼던 것처럼, 강하리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만큼은 절대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오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진태형이 병실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구연정을 안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구연정은 강하리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후하고 불었다.“엄마, 아프지마...”강하리는 살며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안 아파, 우리 연정이 걱정하지 마.”구연정은 백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할머니 울었어.”강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백아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연정이는 어쩔 뻔했니?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강하리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백아영은 한숨을 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구연정이 환히 웃으며 진태형에게 달려갔다.진태형은 아이를 안고 병실을 둘러보다, 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가가 붉어졌다.“아빠, 나 괜찮아요.”“이게 괜찮은 거
손연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마침 행사 중이더라고. 쿠팡 연말 세일에서 로열 프리미엄 네덜란드 분유 있거든? 영양 흡수도 잘 되고 우리 소아과 아기들도 다 그거 먹어.”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손연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봤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병원 응급실에서는 생체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급히 달려온 구승재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핸드폰 화면엔 강하리의 연락처가 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 매번 손이 닿았다가도 다시 멈췄다.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준봉과 노진우도 속만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그제야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이 다시 의식을 찾은 건 해 질 무렵이었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강하리에겐... 알리지 마.”구승재는 목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 형수한테는 말 안 할게.”그제야 구승훈은 안도한 듯 눈을 감았지만 구승재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병원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를 아는 터라, 강하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빠져야만 했다.그날 밤, 노민준이 직접 차를 몰고 구승훈을 요양원으로 데려갔다.“네가 또 도망치면... 그땐 나도 강하리한테 전부 말할 수밖에 없어.”구승훈은 창밖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됐어.”노민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 한마디에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푹 쉬어.”병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구승훈의 머릿속엔 강하리가 조시욱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
청소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강 대표님, 아까 구 대표님이랑 병실 안에 계시던 남자분이랑 여기서 싸웠어요. 아마... 그중 누가 코피를 흘린 것 같더라고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에게 병실 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조용히 말했다.병실 안에 들어서자, 조시욱이 전화를 받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통화를 마쳤다.“오늘 일은, 미안해.”그는 웃으며 말하다가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가 침대로 옮겨주려 했지만 강하리가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잠시 후에 또 검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이대로 있을게요.”“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다 줄까?”그 말에 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조시욱 씨. 선배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누굴 다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안 돼 있고요. 그러니까 굳이 매일 오시거나 이렇게 곁에 계실 필요 없어요.”조시욱은 사실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처음 만난 그날 밤부터 이미 느꼈다.하지만 그날,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그녀를 두 눈으로 본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각오로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그게 궁금해졌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알고 싶어졌다.설령 그게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이라 해도,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내가 좀 성급했으면 미안. 진짜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선배 부탁이라서 온 것도 맞지만... 난 그냥, 친구로서 너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어릴 때부터 정 회장님이랑 우리 할아버지 사이도 꽤 각별하셨잖아. 집안끼리도 인연이 깊고.”조시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지금은, 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게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과거 놓고 새로운 시작도 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아?”잠시 정적이 흘렀고 강하리는 조용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불렀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어쩐지 너무나 낯설었다.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애써 눌러왔던 감정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심장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저릿했고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임희주가... 이렇게 이 사람을 돌본 건가? 그렇다면 지금쯤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더 이상 마음을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전 이제 검사를 받아야 해요. 구 대표님, 손 좀 놓아주세요.”“같이 가줄게.”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갈라지고 낮았다.“괜찮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그 말과 함께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휠체어 좀 부탁드릴게요.”간호사는 그제야 얼떨결에 제자리를 찾은 듯 다가와 그녀의 휠체어를 받았다.조시욱은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 손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구 대표님, 강 대표님 검사 예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간호사의 말이 이어지자, 구승훈은 천천히, 마치 억지로 손을 떼듯 그녀를 놓았다.강하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지던 기침이 터졌다. 거칠고 깊은 기침 소리, 그리고 피비린 냄새에 조시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너, 다쳤냐?”구승훈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그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지금 따라가서 뭐 하려고?”조시욱은 다급히 앞을 막아섰다.“넌 지금 상태부터 회복해야 해. 이러다 정말 쓰러진다고.”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그를 벽에 밀쳤다. 그러나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그의 입가엔 다시 피가 번졌다.조시욱은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약해 빠져선... 넌 내 상대도 안 돼.”
구승훈은 오늘 여기서 조시욱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조시욱이든, 주해찬이든 상관없었다. 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분명 그의 아내였으니까.“내가 자리를 피할까?”조시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제야 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아니요, 그냥 하던 얘기 마저 하시죠.”조시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강하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네 지목했던 그 여자, 국정원을 통해서 확인해 봤는데... 국제 쪽에서 활동하는 킬러였어. 주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움직이던 인물인데 이번에 국내에 들어왔다는 건 좀 의외더라.”강하리는 놀란 눈으로 조시욱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 여자가 진짜 직업 킬러였다니.“안현우가 고용한 건가요? 아니면... 임희주 쪽?”“아직 확실하진 않아. 근데 지금까지 조사로는 둘 다 그 여자랑 직접 연결된 흔적은 없어. 오히려 둘 다 접촉한 적이 없다는 쪽이 유력해.”조시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네 생각엔, 그 외에 또 누가 너를 죽이려 들었을 것 같아?”‘죽이려 든다’는 말에 강하리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사실 그날 자신을 진짜로 죽이려 했다면 안현우에게 넘기기 전에 이미 끝냈을 터였다.그렇다면 그 여자의 목적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조용히 말했다.“전, 적이 꽤 많아요. 임희주, 안현우는 물론이고... 심씨 집안, 여씨 자매, 진시연... 어쩌면 문씨나 구씨 가문에서도 누군가는 원하고 있었겠죠.”조시욱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래서 내가 네 주변에 사람 몇 명 붙여놨어. 걱정하지 마. 사생활 간섭 같은 건 없을 테니까. 혹시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 바로 다 뺄게.”“감사합니다.” 강하리는 짧게 대답했고 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근데 혹시 그거 알고 있어? 우리 할아버지랑 네 외할아버지, 전우였던 거?”강하리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자주 저희 집
노민준이 떠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좀 나아졌어?]하지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화면엔 전송 실패 알림이 떴다.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고 가슴 속 깊은 통증이 일며 피를 토했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구승재가 황급히 달려왔다.“형!”구승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등으로 피를 닦고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냐. 그리고... 여초천 병세 위중하다는 소문 퍼뜨려.”“형, 제발 이러다 진짜 형수님도 못 돌려놓고 큰어머님까지 막을 수 없게 될 거야!”“됐어. 내가 괜찮다는데 못 알아들어?”구승훈은 지친 얼굴로 키를 집어 들고 병실을 나섰고 구승재는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얼굴로 뒤를 쫓았다.“형!”하지만 그가 병원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구승훈의 차는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노민준도 뒤늦게 병실에서 뛰쳐나왔고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내버려둬. 저렇게 살다가 죽겠다는데 어쩌겠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구승재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편, 강하리는 구승재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분명히, 충분히 명확하게 말한 줄 알았다.“받아. 안 받으면 그 꼬맹이 울지도 몰라.”천아름은 옆에서 거울을 보며 입술을 정리하더니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내쉰 뒤, 전화를 받았고 구승재의 목소리는 확실히 맥이 빠져 있었다.“하리 누나.”이번엔 ‘형수님’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강하리는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지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세요?”“형이... 또 병원 쪽으로 가면 한 번만 말 좀 해주면 안 될까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 이제 구승훈 씨랑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 사람이 올 일도 없고 와도... 저는 안 볼 거예요. 제게 부탁하지 마시고 차라리 임희주 씨에게 부탁하세요.”“형수님...”구승재는
사실 그 남자는 임희주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입이 단단히 막힌 그녀의 눈엔 점점 절망이 차오르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눈물이 뚝 떨어진 그 순간, 남자의 입가에서 다시 비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배신할 때부터 알았어야지. 이런 꼴 당할 줄. 임희주, 감히 누굴 믿고 사모님을 배신했냐? 응?”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며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임희주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말하고 싶었다.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한 번만 기회만 더 달라고.하지만 남자는 그 비참한 눈빛조차 즐기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너 생각엔, 구승훈이 너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할 거 같냐?”그 말에 임희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순간의 정적. 이어지는 건, 저항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차가운 분위기에 날카로운 바늘이 살을 찢고 서늘한 약물이 천천히 몸속에 스며들었다.몸부림치던 동작은 어느새 멈췄고 그의 눈빛을 따라 움직이던 임희주의 시선도 점점 흐려졌다.여초연 곁에서 오래 지낸 그녀는, 지금 이 약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완전히 무너지진 않지만 식물인간처럼 의식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 그 약은, 그렇게 사람을 파괴했다.바늘을 뽑아낸 남자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딱 좋아. 테스트 겸 써보기엔 안성맞춤이지. 덕분에 새 약 연구도 진도 좀 나가겠네. 너한텐 마지막 명예다, 그렇게 알아.”병실 문이 다시 열렸고 하얀 가운에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그 남자는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꺼져 있던 복도 CCTV가 하나둘 다시 켜졌고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두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가볍게 경례하듯 인사를 건넸다.그 화면을 지켜보던 구승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이게, 대놓고 도발 아니고 뭐야.”구승훈도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승훈 씨, 어젯밤 그 시간대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창가 쪽으로 그림자가 스쳤습니다. 저희가 곧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