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이미 어느새 그녀를 깊은 골목으로 인도하고 있었다.바깥 상가의 번잡함도, 파티 때문에 높아졌던 소음도 해일처럼 사라진 듯했다.조용한 골목에서 임희주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어디로 가는 거예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구승훈의 사슬 같은 손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숨 막힐 듯한 질식과 무력감, 공포가 동시에 그녀를 덮쳤다.구승훈의 검은 눈동자엔 감추지 못한 형형한 살기가 일렁거렸다.임희주는 심장이 철렁했다.‘구승훈이 발작을 일으키는 건가?’아니,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오늘 밤에 오기 전에 구승훈은 완화 약물을 주사했으니까.하지만 구승훈의 이 모습은 분명 발작이 맞았다.그녀가 구승훈에게 손을 놓으면 증상을 완화해 주겠다고 말하려는데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이 더더욱 조여와 더 이상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임희주는 그때 처음으로 죽음이 이렇듯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그때 갑자기 저쪽에서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곧바로 구승재가 준봉과 함께 이쪽으로 달려왔다.구승훈의 표정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구승재와 준봉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구승훈은 여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그녀에게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손을 짓밟았다.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구승재가 눈치를 주자 준봉은 그제야 구승훈을 말리며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반면 구승재는 몸을 굽혀 임희주를 일으켜 세웠다.임희주의 눈에 비친 공포가 여실히 드러났다.“임 선생님, 괜찮아요? 병원에 데려다줄까요?”임희주는 목이 너무 뜨겁고 아파서 말 한마디도 못 한 채 멍하니 구승재만 바라보았다.구승재가 미간을 찌푸렸다.“형 상태가 또 심각해진 거죠? 어휴, 언제쯤 증상이 완화될지 모르겠네요. 이대로 가다간 임 선생님이 우리 형 옆에 있으면 시시각각 목숨이 위태롭지 않겠어요?”구승재는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말을 덧붙였다.“참, 시간 없으니까 병원 데려다줄 차 부를게요. 준봉이 혼자서 형 감당할 수 없을 테니 전 형한테 가볼게요.”말하며 구승재는 전화로 차를 부르고는 서둘러
강하리의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지고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구승훈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리지는 않았다.아무리 구석이라도 파티장이라 시끄러웠고 심준호가 몰래 녹음한 것이니 더더욱 그러했다.하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형...”구승재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형수님하고 화해하면 안 돼? 두 사람 이러지 마. 형수님은 형을 사랑하고 있어.”구승훈은 손가락으로 휴대폰 속 사진을 휙휙 넘겼다.하리의 웃는 얼굴, 연정이의 미소가 이젠 그에게 바랄 수 없는 사치가 되었다.“알아.” 그가 말했다.어떻게 강하리의 마음을 모를 수 있겠나.강하리는 그를 원망하지만 결국엔 너그럽게 감싸주었다.마음이 너무 여렸다.대체 왜 한심할 정도로 그렇게 여린 건지.그가 계속해서 상처를 주고 심지어 결혼식 때 그녀를 혼자 내버려두기까지 했어도 강하리는 여전히 그의 앞에서 마음이 약해지며 그를 안쓰럽게 여겼다.연성에서 돌아와 술집에 간 날, 그녀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받아들이기로.혼인 관계를 계속 이어갈지, 아니면 이혼을 선택할지 온전히 감당하려 했다.그래서 이기적이지만 그녀와 같은 호적에 남아있으려고 했다.그러면 모든 일이 해결되어도 강하리는 여전히 그녀의 아내이고 조금만 공을 들여 그녀를 달래기만 하면 다시 예전처럼 부부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강하리도 고통스러울 거라는 걸 간과했다.당연한 듯 그가 모든 짐을 짊어지고 강하리는 그저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이 그녀에게 어떠한 고통인지 몰랐다.거듭 임희주와 함께 나타나는 그의 모습을 볼 때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까.결국 남자는 그녀를 놓아주었다.“계속 이기적으로 행동할 순 없어.”크리스마스, 그의 생일.구승훈은 차창을 내렸고, 드물게 찾아온 내면의 평화를 느끼며 한참 동안 바깥에 흩날리는 눈송이를 바라보았다.‘하리야, 자기야, 잘 지내.’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 땅에 닿자마자
상대가 피식 웃었다.“그럼 임 선생님,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임희주는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마스크를 옆으로 던져 버리고 옆에 있는 보관함에서 여성용 담배 한 갑을 꺼냈다.달칵. 라이터 불빛이 차 안을 비추자 모자가 벗겨지면서 웨이브 머리가 흘러내렸다.천아름은 목을 가다듬고 휴대전화를 들었다.“누나.” 저쪽에서 구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됐어? 다친 데는 없지?”천아름은 새빨간 입술을 끌어올렸다.“아가, 날 뭐로 보는 거야.”구승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괜찮으면 됐어. 오늘 일은 고마워.”천아름은 담배를 들이마시고 부드럽게 숨을 내쉬었다.사람을 홀릴듯한 목소리가 들렸다.“구승재, 말로만?”구승재는 멈칫하며 문득 그날 밤 맞댔던 말랑한 입술이 떠올랐다.그날 천아름은 별을 보러 가자고 했는데 B시 같은 곳에서 별이 보일 리가 없다.하지만 시원한 밤바람과 반짝이는 불빛을 보니 정말 별을 본 것 같았다.그동안의 우울했던 기분도 한결 풀려갈 때쯤...“예뻐?”당시 천아름이 그의 귓가에 이렇게 물었다. 정말 술에 취했었는지, 아니면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넋을 잃었는지 천아름의 손가락이 갑자기 그의 입술에 닿았을 때까지도 그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입술이 다가와 있었다.살짝 닿았다가 이내 멀어졌지만 그날 밤 심장이 요동쳐 잠들 때까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그 후 며칠 동안 그는 다시 만나면 어색할 거란 생각에 천아름을 피해 다녔는데, 정작 다시 마주쳤을 때 천아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구승재는 문득 천아름이 그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그래서 다시 예전처럼 그녀를 대했다.오늘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 했는데 천아름이 먼저 말을 꺼냈다.“형한테 밥 사라고 할게.”정신을 차린 구승재가 말하자 전화기 너머 천아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왜, 내가 또 너한테 키스할까 봐?”
구승훈은 바지에 크림을 잔뜩 묻혀놓은 꼬마 녀석을 내려다보며 마음이 녹아내렸다.허리를 숙여 연정이를 안아 든 그가 크림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뽀뽀를 해줬다.가정부가 나와서 이 모습을 보고 웃으며 연정이가 먹던 케이크를 가져가더니 아이의 손을 닦아주었다.“대표님, 옷 갈아입고 오세요. 저녁 준비 곧 끝나요.”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시선이 방 곳곳을 훑어보았다.보고 싶은 사람이 보이지 않자 형언할 수 없는 실망감이 밀려왔다.가정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모님께선 저와 아가씨를 여기로 데려다주고 가셨어요. 아가씨랑 함께 생일 보내라고 말씀하셨어요.”구승훈이 입꼬리를 올리며 휴지로 연정이 얼굴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었다.“다른 말은 안 했나요?”가정부가 웃으며 답했다.“맛있는 음식 많이 하라고 하셨어요. 대표님 건강을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요.”“그래요?” 구승훈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그 사람 최근에... 주해찬과 자주 연락합니까?”가정부가 멈칫했다.“주해찬 씨는 해외로 가지 않았나요? 돌아왔어요?”구승훈의 입꼬리가 남몰래 올라갔다.서산 퍼스트 빌리지에 웬일로 사람 냄새가 났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저 멀리 별장의 불빛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쉬지 않고 울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자기야, 나와서 한잔해.”입술을 달싹이던 강하리는 사실 나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돌아가면 잠을 못 이룰 것 같아서 그냥 나갔다.술을 마신다고 하지만 손연지는 손에 음료를 들고 있고, 평소 술에서 손을 떼지 않던 천아름도 오늘은 음료만 홀짝이니 강하리가 웃으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천아름은 눈썹을 치켜뜬 채 그녀를 바라보며 음료를 손에 쥐어줬다.“자, 취하기 전엔 집에 안 가.”강하리가 손연지와 잔을 부딪쳤다.“대단하신 천아름 디자이너님께서 무슨 일이지?”손연지는 고개를 저었다.“며칠째 이러고 있어. 넌 어때? 구승훈이랑 아직도 그래? 그 개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강하리는 시선을
강하리가 웃었다.“싱글인 여자에게 커리어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 근데 우리 천아름 디자이너님을 모시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단 말이지.”주얼리 업계에서 천아름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유명했다.게다가 그녀 본인의 브랜드도 있었기에 그런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자신이 데려올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천아름은 잠시 침묵했다.“생각해 봐야겠어. 며칠 후에 대답해 줄게.”강하리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세 사람이 술집에서 나왔을 때는 자정이 가까워졌다.밖에는 여전히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가정부가 휴대폰으로 보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케이크 앞에서 구승훈은 연정이를 안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그녀는 조용히 대화창을 끄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여초연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임희주는 여초연보다 강하리의 연락이 먼저 올 줄은 몰랐다.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결국엔 받았다.“강하리 씨, 무슨 일이죠?”임희주의 목소리는 병원 앞 카페에서 말할 때처럼 언제든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유로움으로 가득했다.“임 선생님, 나와서 얘기 좀 해요.”강하리의 목소리도 임희주와 비슷하게 들렸지만 다른 점이라면 그녀에겐 고고함이 배어 있었다.그녀야말로 대결에서 이긴 승자 같았다.임희주는 이를 살짝 갈았다.그녀는 심씨 가문 아가씨고 진태형의 유일한 딸이다.구승훈이 없어도 여전히 B시 전체가 부러워하는 공주님이다.임희주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질투, 원망 같은 것들. 왜 상대는 태생부터 타고났는데 그녀는 자유조차 바랄 수 없는 것인지.하지만 뭐라 해도 지금 구승훈은 그녀의 곁에 있지 않나.“강하리 씨,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신 거죠? 구승훈 씨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 “아니, 당신 얘기요.”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지만 길거리에는 여전히 커플들이 오가고 있다.강하리는 길가에 있는 커피숍에 앉아 우유 한 잔을 주문했다.따뜻한 우유를
임희주의 입술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강하리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도와준다고?’임희주는 차갑게 비웃었다.“강하리 씨, 승훈 씨한테서 날 떼어놓으려는 건가요?”강하리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이미 그쪽이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요.”임희주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하지만 남에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 느낌이 무척 역겨웠다.“떠나고 싶은 건 맞는데 제가 왜 구승훈을 놔두고 그쪽을 믿겠어요?”강하리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믿지 않아도 돼요. 나도 강요할 생각 없으니까. 당신이랑 구승훈 사이도 딱히 관심 없어요. 하지만 날 건드리진 마요. 안 그럼 구승훈이 당신을 지켜줘도 난 여전히 당신을 이곳에서 발붙이지 못하게 할 수 있어요.”임희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강하리 씨, 구승훈 씨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당연히 알죠. 안 그럼 그쪽이 어떻게 구승훈 옆에 붙어 있겠어요? 하지만 임희주 씨, 생각 잘해요. 당신이 B시에서 멀쩡히 지낼 수 있는 건 단지 구승훈을 돕고 있다는 이유 하나뿐이에요. 그러니 얌전히 구승훈에게 협조해요. 안 그럼 여초연이나 구승훈이 움직이기 전에 나와 심씨 가문이 당신 절대 살아서 B시 못 나가게 할 테니까. 구승훈에게 순순히 협조하면 우리도 여초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도와줄게요. 생각 잘해봐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그제야 임희주는 강하리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내키지 않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강하리 씨,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모르겠어요? 지금 구승훈 씨 옆에 있는 사람은 저예요. 당신이 뭔데 사모님 행세를 하면서 날 협박해요?”강하리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가는데 뒤이어 임희주의 말이 들렸다.“나랑 구승훈 씨가 이미 잤다고 하면 믿겠어요?”강하리의 걸음이 우뚝 멈추고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애
주해찬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됐어, 들어가. 며칠 뒤 동창회에서 보자.”강하리는 주해찬이 떠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다가 뒤돌아 위층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현관에 연정이를 안고 서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연정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고, 구승훈은 불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연정이를 안고 있었다.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구승훈이 이 시간에 연정이를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그런데 구승훈은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방금 데이트하고 왔어?”그렇게 말하며 그의 시선이 강하리의 손에 들려 있는 가방으로 향했다.“내가 주는 선물은 안 받으면서 다른 사람이 주는 선물은 받네?”강하리는 구승훈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다가가 연정이를 안으려 했지만 구승훈이 피했다.“깨지 않게 내가 안고 들어갈게.”강하리가 그를 흘겨보았다.“굳이 한밤중에 데리고 올 필요는 없었어.”“아주머니가 요리하다 데어서 연정이를 돌보기 불편해.”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렸다.“많이 다치셨어?”“심각한 건 아니지만 며칠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연정이를 심씨 가문에 며칠만 맡겨두는 게 어때?”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구승훈이 들어오는 것을 꺼려하자 구승훈은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왜, 난 이제 강 대표님 집도 못 들어가나?”강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결국 문을 열었다.방 안의 불이 서서히 켜지고 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는 외투를 벗고 신발을 갈아 신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주해찬이 준 선물은 현관에 있는 캐비닛 위에 올려놓은 채.구승훈은 그것을 보고 손을 뻗어 가방을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강하리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현관에 서 있었다.“연정이 침대에 눕히고 그만 가.”하지만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슬리퍼 어디 있어?” 강하리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씩씩거리며 신발장에서 슬리퍼 한
익숙한 향기, 익숙한 체온, 익숙한 사람.강하리는 잠시 밀치는 것도 잊었다.구승훈은 그녀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조금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벌렸고, 구승훈은 그녀가 물러설 틈도 주지 않고 조급하게 파고들었다.강하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구승훈이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한 손으로 목뒤를 감싼 채 다른 한 손은 니트 안으로 집어넣은 뒤였다.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린 강하리는 순간적으로 몸부림을 쳤다.그런데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구승훈...”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 닿았고, 굳은살이 박인 손이 닿은 곳에서는 전율이 일었다.강하리의 몸이 순간 경직되고 구승훈은 그 틈에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남자는 그녀의 어깨 위로 얼굴을 파묻고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의 목덜미를 콱 물었다.강하리는 화를 내며 남자를 옆으로 밀쳐내고 일어나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구승훈, 미쳤어?”구승훈은 웃음을 터뜨렸다.“응.”그는 반박하지 않고 놀랍게도 그냥 인정했다.어쩌면 정말로 미쳐가고 있는지도 모른다.이혼 얘기를 꺼낼 때도 강하리 같은 여자에게 들이대는 남자가 있을 거란 생각은 했었다.하지만 막상 다른 남자와 웃고 떠들고 심지어 다른 남자의 선물까지 받는 그녀를 보며 그는 마음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강하리는 짧은 대답에 말문이 막혀 할 말을 잃었다.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늦었어. 이만 가.”그러고는 이내 한 마디를 덧붙였다.“앞으로는 여기 오지 마. 연정이 보고 싶으면 아주머니가 데리고 갈 거야.”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구승훈,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구승훈은 웃으며 일어나 강하리 앞에 섰다.“강하리, 임희주랑 나랑 있는 거 보면 조금도 질투 안 나?”강하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왜 질투하겠어?
강하리 얼굴에 약간 어색함이 스쳤다. 하지만 백아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들어와 그녀의 옷을 갈아입혀 주며 넌지시 말할 뿐이었다.“너희 할아버지 말이야. 이렇게 즐거워하신 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역시 저 양반을 웃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시욱이 뿐인가봐.”강하리는 자연스럽게 백아영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할머니, 전 에비뉴 주얼리와 JM 그룹을 잘 운영하고 싶어요. 그리고 연정이도 잘 키우고 싶고요.”고요한 방 안이라서 그런지 강하리의 목소리는 유난히 담담하게 들렸다.창밖에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봤을 때, 마음 한편이 여전히 아파져 오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그에게 어떤 이유가 있었든,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강하리는 그때와 같은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아래층 거실은 여전히 왁자지껄했고 설날이 다가오며 곳곳에 명절 분위기가 감돌았다.심씨 가문은 정말 오랜만에 모두 함께 모여서 화목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한편, 심준호는 팔짱을 끼고 별장 밖에 서서 그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난 네가 다시는 안 올 줄 알았어.”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그때 심준호가 갑자기 다가와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너 대체 뭐 하는 짓이야?”그동안 심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화를 꾹꾹 참고 있었다.구승훈을 믿고 강하리를 맡겼는데 돌아온 건 이런 결과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지금까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심준호도 그를 감싸주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은 그저 가만히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난 하리가 갑자기 뛰어내릴 줄 몰랐어.”그는 원래 조금만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노진우가 여초천을 손에 넣기만 하면 임희주가 죽든 말든 그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만약 노진우가 실패한다면
진태형은 병원에서 강하리 곁을 밤새 지켰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꽃다발을 안은 채 이쪽으로 걸어오는 임명우와 마주치게 되었다.임명우는 진태형을 보고 살짝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었다.“진 장관님, 오랜만입니다.”진태형은 눈빛을 가라앉힌 채 임명우를 바라봤다.“하리를 보러 온 건가요?”임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강 대표님과는 업무적으로 조금 얽힌 부분이 있어서요. 입원하셨다는 말 듣고 병문안 왔습니다.”진태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렇군요. 하지만 임 대표님, 하리한테 마음을 두진 마셨으면 좋겠어요.”임명우는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진 장관님, 너무 깊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랑 강 대표님은 정말 업무적인 관계예요. 그리고 시연 씨랑도 몇 년 전에 헤어졌고요. 제가 정말 강 대표님을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잖아요?”진태형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하리한테 마음 두지 마세요. 충고가 아니라 경고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하리한테 손을 대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미소를 짓고 있던 임명우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누구든 진태형 앞에서는 결국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장관님.”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임명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시연 씨 말이 맞았어요. 진 장관님은 시연 씨한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거 말이에요. 당신은 강하리 씨랑 비교도 안 되는 존재라는 거죠. 그러니까 저도 이제 시연 씨 따위 필요 없어요.]문자를 보낸 그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M 국에 있는 진시연은 그 문자를 보자마자 분노에 휩싸여 핸드폰을 그대로 던져버렸다.구승훈과 강하리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당장 귀국하려 했었다. 하지만 떠나기 직전에 여초연이 그녀의 길을 막았다.하지만 진시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임명우의 문자를 받고 당황한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
요양원 주차장.심준호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진태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도 잘못이 있어요... 계속 하리가 구승훈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우리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심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요즘은 조시욱이 꽤 신경 써주더라고요.”진태형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 옛날 자신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심미현과의 약혼을 지키며 버텼던 것처럼, 강하리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만큼은 절대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오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진태형이 병실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구연정을 안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구연정은 강하리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후하고 불었다.“엄마, 아프지마...”강하리는 살며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안 아파, 우리 연정이 걱정하지 마.”구연정은 백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할머니 울었어.”강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백아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연정이는 어쩔 뻔했니?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강하리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백아영은 한숨을 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구연정이 환히 웃으며 진태형에게 달려갔다.진태형은 아이를 안고 병실을 둘러보다, 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가가 붉어졌다.“아빠, 나 괜찮아요.”“이게 괜찮은 거
손연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마침 행사 중이더라고. 쿠팡 연말 세일에서 로열 프리미엄 네덜란드 분유 있거든? 영양 흡수도 잘 되고 우리 소아과 아기들도 다 그거 먹어.”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손연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봤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병원 응급실에서는 생체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급히 달려온 구승재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핸드폰 화면엔 강하리의 연락처가 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 매번 손이 닿았다가도 다시 멈췄다.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준봉과 노진우도 속만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그제야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이 다시 의식을 찾은 건 해 질 무렵이었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강하리에겐... 알리지 마.”구승재는 목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 형수한테는 말 안 할게.”그제야 구승훈은 안도한 듯 눈을 감았지만 구승재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병원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를 아는 터라, 강하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빠져야만 했다.그날 밤, 노민준이 직접 차를 몰고 구승훈을 요양원으로 데려갔다.“네가 또 도망치면... 그땐 나도 강하리한테 전부 말할 수밖에 없어.”구승훈은 창밖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됐어.”노민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 한마디에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푹 쉬어.”병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구승훈의 머릿속엔 강하리가 조시욱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
청소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강 대표님, 아까 구 대표님이랑 병실 안에 계시던 남자분이랑 여기서 싸웠어요. 아마... 그중 누가 코피를 흘린 것 같더라고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에게 병실 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조용히 말했다.병실 안에 들어서자, 조시욱이 전화를 받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통화를 마쳤다.“오늘 일은, 미안해.”그는 웃으며 말하다가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가 침대로 옮겨주려 했지만 강하리가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잠시 후에 또 검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이대로 있을게요.”“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다 줄까?”그 말에 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조시욱 씨. 선배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누굴 다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안 돼 있고요. 그러니까 굳이 매일 오시거나 이렇게 곁에 계실 필요 없어요.”조시욱은 사실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처음 만난 그날 밤부터 이미 느꼈다.하지만 그날,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그녀를 두 눈으로 본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각오로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그게 궁금해졌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알고 싶어졌다.설령 그게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이라 해도,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내가 좀 성급했으면 미안. 진짜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선배 부탁이라서 온 것도 맞지만... 난 그냥, 친구로서 너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어릴 때부터 정 회장님이랑 우리 할아버지 사이도 꽤 각별하셨잖아. 집안끼리도 인연이 깊고.”조시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지금은, 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게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과거 놓고 새로운 시작도 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아?”잠시 정적이 흘렀고 강하리는 조용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불렀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어쩐지 너무나 낯설었다.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애써 눌러왔던 감정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심장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저릿했고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임희주가... 이렇게 이 사람을 돌본 건가? 그렇다면 지금쯤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더 이상 마음을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전 이제 검사를 받아야 해요. 구 대표님, 손 좀 놓아주세요.”“같이 가줄게.”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갈라지고 낮았다.“괜찮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그 말과 함께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휠체어 좀 부탁드릴게요.”간호사는 그제야 얼떨결에 제자리를 찾은 듯 다가와 그녀의 휠체어를 받았다.조시욱은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 손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구 대표님, 강 대표님 검사 예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간호사의 말이 이어지자, 구승훈은 천천히, 마치 억지로 손을 떼듯 그녀를 놓았다.강하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지던 기침이 터졌다. 거칠고 깊은 기침 소리, 그리고 피비린 냄새에 조시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너, 다쳤냐?”구승훈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그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지금 따라가서 뭐 하려고?”조시욱은 다급히 앞을 막아섰다.“넌 지금 상태부터 회복해야 해. 이러다 정말 쓰러진다고.”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그를 벽에 밀쳤다. 그러나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그의 입가엔 다시 피가 번졌다.조시욱은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약해 빠져선... 넌 내 상대도 안 돼.”
구승훈은 오늘 여기서 조시욱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조시욱이든, 주해찬이든 상관없었다. 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분명 그의 아내였으니까.“내가 자리를 피할까?”조시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제야 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아니요, 그냥 하던 얘기 마저 하시죠.”조시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강하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네 지목했던 그 여자, 국정원을 통해서 확인해 봤는데... 국제 쪽에서 활동하는 킬러였어. 주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움직이던 인물인데 이번에 국내에 들어왔다는 건 좀 의외더라.”강하리는 놀란 눈으로 조시욱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 여자가 진짜 직업 킬러였다니.“안현우가 고용한 건가요? 아니면... 임희주 쪽?”“아직 확실하진 않아. 근데 지금까지 조사로는 둘 다 그 여자랑 직접 연결된 흔적은 없어. 오히려 둘 다 접촉한 적이 없다는 쪽이 유력해.”조시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네 생각엔, 그 외에 또 누가 너를 죽이려 들었을 것 같아?”‘죽이려 든다’는 말에 강하리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사실 그날 자신을 진짜로 죽이려 했다면 안현우에게 넘기기 전에 이미 끝냈을 터였다.그렇다면 그 여자의 목적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조용히 말했다.“전, 적이 꽤 많아요. 임희주, 안현우는 물론이고... 심씨 집안, 여씨 자매, 진시연... 어쩌면 문씨나 구씨 가문에서도 누군가는 원하고 있었겠죠.”조시욱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래서 내가 네 주변에 사람 몇 명 붙여놨어. 걱정하지 마. 사생활 간섭 같은 건 없을 테니까. 혹시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 바로 다 뺄게.”“감사합니다.” 강하리는 짧게 대답했고 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근데 혹시 그거 알고 있어? 우리 할아버지랑 네 외할아버지, 전우였던 거?”강하리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자주 저희 집
노민준이 떠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좀 나아졌어?]하지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화면엔 전송 실패 알림이 떴다.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고 가슴 속 깊은 통증이 일며 피를 토했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구승재가 황급히 달려왔다.“형!”구승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등으로 피를 닦고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냐. 그리고... 여초천 병세 위중하다는 소문 퍼뜨려.”“형, 제발 이러다 진짜 형수님도 못 돌려놓고 큰어머님까지 막을 수 없게 될 거야!”“됐어. 내가 괜찮다는데 못 알아들어?”구승훈은 지친 얼굴로 키를 집어 들고 병실을 나섰고 구승재는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얼굴로 뒤를 쫓았다.“형!”하지만 그가 병원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구승훈의 차는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노민준도 뒤늦게 병실에서 뛰쳐나왔고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내버려둬. 저렇게 살다가 죽겠다는데 어쩌겠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구승재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편, 강하리는 구승재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분명히, 충분히 명확하게 말한 줄 알았다.“받아. 안 받으면 그 꼬맹이 울지도 몰라.”천아름은 옆에서 거울을 보며 입술을 정리하더니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내쉰 뒤, 전화를 받았고 구승재의 목소리는 확실히 맥이 빠져 있었다.“하리 누나.”이번엔 ‘형수님’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강하리는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지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세요?”“형이... 또 병원 쪽으로 가면 한 번만 말 좀 해주면 안 될까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 이제 구승훈 씨랑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 사람이 올 일도 없고 와도... 저는 안 볼 거예요. 제게 부탁하지 마시고 차라리 임희주 씨에게 부탁하세요.”“형수님...”구승재는
사실 그 남자는 임희주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입이 단단히 막힌 그녀의 눈엔 점점 절망이 차오르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눈물이 뚝 떨어진 그 순간, 남자의 입가에서 다시 비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배신할 때부터 알았어야지. 이런 꼴 당할 줄. 임희주, 감히 누굴 믿고 사모님을 배신했냐? 응?”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며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임희주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말하고 싶었다.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한 번만 기회만 더 달라고.하지만 남자는 그 비참한 눈빛조차 즐기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너 생각엔, 구승훈이 너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할 거 같냐?”그 말에 임희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순간의 정적. 이어지는 건, 저항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차가운 분위기에 날카로운 바늘이 살을 찢고 서늘한 약물이 천천히 몸속에 스며들었다.몸부림치던 동작은 어느새 멈췄고 그의 눈빛을 따라 움직이던 임희주의 시선도 점점 흐려졌다.여초연 곁에서 오래 지낸 그녀는, 지금 이 약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완전히 무너지진 않지만 식물인간처럼 의식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 그 약은, 그렇게 사람을 파괴했다.바늘을 뽑아낸 남자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딱 좋아. 테스트 겸 써보기엔 안성맞춤이지. 덕분에 새 약 연구도 진도 좀 나가겠네. 너한텐 마지막 명예다, 그렇게 알아.”병실 문이 다시 열렸고 하얀 가운에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그 남자는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꺼져 있던 복도 CCTV가 하나둘 다시 켜졌고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두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가볍게 경례하듯 인사를 건넸다.그 화면을 지켜보던 구승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이게, 대놓고 도발 아니고 뭐야.”구승훈도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승훈 씨, 어젯밤 그 시간대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창가 쪽으로 그림자가 스쳤습니다. 저희가 곧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