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하는 한동안 침묵했다.채은은 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친구예요.” 채은은 건하의 과거를 파고들고 싶지 않아서 얼른 화제를 바꿨다.“실례가 안 된다면, 여동생분의 증상에 대해 여쭤봐도 될까요?” “피를 보면 견디지 못하고, 때때로 기억을 잃기도 해요. 참, 낯선 남성과 접촉하면 구토하거나 비명도 지릅니다.” 건하의 태도는 다소 냉담하고 거리감이 느껴졌다. 채은은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증상은 과도한 심리적 충격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커.’채은이 더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전에, 이춘미가 옷을 들고 다가왔다.“아가씨, 뜨거운 물이 준비됐어요. 이건 하린 아가씨의 옷인데, 체형이 비슷한 것 같으니 편히 갈아입으세요.”채은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그런데 씻고 나오니 몸이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거울 속 자신의 두 볼은 타오르는 듯 붉었고, 눈동자는 과하게 반짝였다.건하는 그녀의 상태를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쟀다. 그러고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열이 있네요.” 채은은 이미 어지럽고 몽롱한 상태였지만, 건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좋게 들렸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건하의 손길을 밀치며 말했다.“괜찮아요. 제 친구인 지안이에게 연락해 주시겠어요? 저를 데리러 올 거예요.” 발열로 인해 채은의 모습은 평소보다 더 부드럽고 어린아이처럼 보였다.건하는 무심한 듯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굽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채은은 어렴풋한 의식 속에서 따뜻한 온기를 따라가며 안정을 느꼈다.귓가에 도건하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아주머니, 제가 병원에 데려다줘야겠어요.” 채은이 깨어났을 때, 건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옆에서 진아가 안도한 듯 숨을 내쉬며 말했다. “채은아, 깼어? 배고프지 않아? 내가 죽을 좀 사 왔어.”채은
진성은 차가운 얼굴에 짜증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지금...]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은이 단호하게 말했다. “회의 중이라고요?”채은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달리 냉랭함이 서려 있었다.“부진성 씨, 당신을 계속 기다려줄 순 없어요. 이미 이혼하기로 했으면 깔끔하게 끝내자고요.” “다른 여자와 결혼 준비를 하면서도 이혼을 미루고 질질 끌면서 마치 대단한 애정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 좀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그녀는 다희의 은근한 탐색과 진성과의 불필요한 연결 고리에 완전히 질려버린 듯했다. 채은은 언제나 단호한 사람이었다. 사랑할 때는 모든 것을 걸고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끝냈다면 미련 없이 정리하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그렇기에 진성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진성이 이혼을 미루는 이유는 애정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모든 선택의 우선순위에서 채은은 언제나 가장 마지막이었으니까.진성은 핸드폰을 쥔 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며칠 전 채은을 집에 데려다줬던 남자를 떠올리자, 은근한 분노가 치밀었다.[그럴듯하게 말하지만, 결국엔 다른 남자가 생겨서 이렇게 단호하게 구는 거잖아.]채은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지만 태연히 말했다.“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어쩔 수 없죠. 하지만, 누가 봐도 새 연인을 찾는 속도로는 당신이 훨씬 빠르지 않았나요?”“가정 법원 앞에서 기다릴게요. 시간 안에 안 오면, 나중에 아무리 부탁해도 이혼해 주지 않을 거예요.” 채은은 진성에게 따질 기회를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바로 그때, 지안이 차를 몰고 와서 말했다.“채은아, 어디로 갈까?” 채은이 홀가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가정법원!”지안은 환호성을 질렀다. 20분 후.채은은 가정법원 입구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바로 그때, 건하에게서 온 메시지가 화면에 나타났다.[집
“정말 대단하네요.”지안은 한마디로 진성을 평가하며 속에 쌓인 울분을 내뱉었다. 채은은 지안이 화를 삭이지 못하는 걸 알기에 굳이 말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거침없는 말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진성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우리 어머니가 당신을 내쫓아서 크게 아팠다고?” ‘이제 와서 관심 있는 척이라도 하려는 건가?’ 채은은 가정법원 입구를 한 번 바라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채은이 냉담한 표정으로 진성을 쳐다보며 말했다.“그래요. 그러니까 부진성 씨, 정말 신경 쓰인다면 서류부터 빨리 정리해 주세요. 괜한 오해를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채은은 말을 끝내자마자 지안과 함께 자리를 떠났고, 진성에게 더 이상 대화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채은이 떠나자, 진성은 곧바로 다희에게 전화를 걸어 어제의 일을 물었다. 다희가 약간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그냥 채은 씨를 머물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채은 씨랑 잘 안 맞으셨는지, 일이 그렇게 되어버린 거예요.] 진성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며 다희의 말을 끊었다.“다희야, 그 집은 내가 서채은한테 준 거야.” 한편, 채은은 진성과 다희의 대화를 알지 못한 채, 핸드폰을 켰다.그러자 재준의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다. [채은 씨, 정 안 될 것 같으면 60만원도 괜찮아요!][그것도 아니면... 50만원으로도 조정 가능하고요!!] [채은 씨??][왜 답장이 없어요?] [돈은 문제가 아니라고요!!!]채은은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도씨 가문 본가.재준은 어두운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형님, 채은 씨가 저를 무시하는데 어쩌죠? 월세를 50만원까지 낮췄는데도 반응이 없어요! 50만원도 비싼 걸까요?” 건하가 장미 가지를 손질하며 태연하게 대답했다.“급할 거 없잖아.” 재준은 건하의 얼굴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살피며 턱을 괴고 물었다.“형님, 대체 무슨 속셈이에요? 분명 그 집은 형님 건데, 그냥 채은 씨한테 줘버리면 되잖아
진성의 반응에 주변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이내 한 사람이 망설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그게, 다희 누님이 떠나고 나서 형님이 한동안 의기소침했었잖아요. 그때 회사 고위층들도 형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요... 그런데 몇 가지 프로젝트가 들어오면서 상황이 나아졌었죠.”“그런데 그중 몇 개는 채은 씨가 형님의 아내라는 신분으로 직접 찾아온 거라고 들었어요. 아마 형이 싫어할까 봐 채은 씨가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모양이에요.” 채은은 학벌도 높지 않고 이런 일을 잘 알지도 못했다.그런데도 진성이 가장 싫어하는 ‘부진성 대표의 아내’라는 신분으로 프로젝트를 따냈다니. 아마 진성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그가 프로젝트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 아예 숨긴 채로 진행한 듯했다. 그것도 3년씩이나.진성은 어두운 그림자 속에 앉아 채은이 오늘 보여준 표정을 떠올렸다. 저녁.진성이 집에 도착했을 때, 다희는 소파에 앉아 장진화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주 친밀해 보였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진성이 들어오는 것을 본 장진화가 반갑게 말했다.“진성아, 와서 앉아봐라. 지금 다희랑 결혼식에 관해 얘기 중이었는데, 다희가 요즘 전통 결혼식이 유행이라네? 그래서 말인데, 엄마는 전통식이랑 서양식을 다 해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어머니, 잠시 위층에 올라가 계세요. 다희랑 할 말이 있어요.”“그래, 얘기들 해. 엄마는 이만 올라가 보마.” 장진화는 활짝 웃으며 자리를 떠났고, 진성의 몸에서 짙은 술 냄새가 나는 것을 느낀 집사는 그에게 차를 한 잔 가져다주고 물러났다.진성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다희를 바라보다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다희야, 내가 예비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다른 집을 마련해 드리는 건 어떨까?” 다희는 이 말을 듣고 잠시 당황한 듯 보였다.그녀는 진성의 옆으로 다가앉아 입술을 깨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진성 씨, 미안해요. 그 집이 채은 씨 명의인 줄 몰랐어요. 저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긴 거예요.
[엄마, 진성 씨는 서채은이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일도 없고, 학벌도 낮으니까요. 아마 빨리 이혼하고 싶어서 서채은이 순순히 나가도록 집을 준 것 같아요.]다희 어머니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그렇다 해도 말이 안 돼! 아무래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어. 부 서방, 아직도 그 여자한테 마음이 남은 거 아니야?!” 다희가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엄마, 무슨 말씀이세요. 진성 씨가 그 여자를 좋아할 리 없잖아요.] [그리고 진성 씨는 그 여자를 단 한 번도 건들지 않았다고요. 저를 기다리느라 어언 3년을 참아온 사람이에요.] “그건 알겠다만, 이 집 문제는 내가 나서서 해결할 거야. 넌 신경 쓸 거 없어.” 다희와의 전화를 끊은 후, 다희 어머니는 장진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진화는 전화를 받자마자 큰 충격을 받았다. “뭐라고요? 우리 진성이가 그 집을 서채은한테 줬다고요?”‘아이도 못 낳은 X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 집 재산을 가져간다는 거야?!’화가 난 장진화는 채은에게 전화를 걸려 했지만,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 채은에게 따지지 못한 장진화는 아들에게 직접 묻는 것이 망설여졌다.‘혹시라도 다희와의 결혼에 오해가 생기면 어쩌지?’ 한편, 며칠 동안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장진화와 달리, 채은은 자신의 새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예전에 놓았던 심리학 공부를 복습하며 차근차근 새로운 일에 적응해 갔다.월요일에 채은이 심리 상담 센터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찾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채은이 상담할 예정이었던 도하린마저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으니 말이다. 대신 심리 관련 동아리에서 활동을 도와달라며 종종 채은을 찾곤 했다.이후 채은이 상담 센터에 부임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예쁘고 우아한 선생님’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채은은 오랜만에 한가로움을 만끽하며 책을 읽고, 학생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중, 채은은 학생들의
재준은 웃음을 띠며 분위기를 풀어갔다.“채은 씨, 갑작스레 찾아와서 죄송해요.”품격 있는 태도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하는 건하의 눈빛에 순간적인 장난기가 스쳤다. “채은 언니, 안녕하세요.”하린은 눈웃음을 지으며 서양을 바라보았다.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 그 자체였다. “제 이름은 도하린이예요.” 채은은 맑고 활발한 하린의 모습에 마음을 놓았다.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오세요.”채은은 몸을 옆으로 비켜 길을 내주었다. “다들 이야기 나누고 계세요. 저는 요리를 좀 해 올게요.”재준은 손에 들고 있던 재료를 챙겨 능숙하게 주방으로 향했다. 채은은 재준을 막으려 했으나, 지안이 먼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재준 씨의 요리 실력이 훌륭한 건 잘 알지만, 오늘은 채은이가 주인공이잖아요. 그리고 벌써 재료 준비도 다 했으니, 오늘은 그냥 샤부샤부 먹어요!”지안은 진심으로 재준의 요리 실력을 칭찬하며 환하게 웃었다. 지난번에 맛본 검은 기러기 요리의 독특한 풍미가 아직도 잊히지 않기 때문이었다.샤부샤부라는 말에 재준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건하를 쳐다보았다. 건하는 심각한 결벽증으로 유명했고, 음식 냄새가 옷에 배는 것을 특히 싫어했다. 하지만 건하는 미소를 지으며 채은을 바라보았다. “손님은 주인이 정한 대로 해야죠. 샤부샤부도 좋습니다.” 재준은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 곧 샤부샤부가 끓기 시작했고, 집안에는 따뜻한 온기가 가득해졌다.모두 식탁에 둘러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즐겼다. “그런데요...”지안이 주스를 든 채 웃으며 말했다.“잘생긴 남자분, 지난번에 우리 채은이를 병원까지 데려다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재준 씨와 아는 사이인 줄은 몰랐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채은과 건하 사이를 번갈아 보며 웃는 지안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지안은 건하가 풍기는 우아함과 채은의 차분함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건하가 미소로 화답하며 짧게 답했다.“도건하입니다.
“채은 씨, A대학교에서 근무하신다고 들었어요.”건하는 태연하게 대화의 흐름을 바꾸며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그의 표정은 여유로웠고 같은 테이블의 사람들이 주고받는 수상쩍은 시선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옆에 있던 하린의 눈이 반짝였다.“언니, 우리 A대학교에서 근무하세요?” 하린은 기쁨을 숨기려 하지 않았는데, 채은의 단아한 분위기에 진심으로 반한 듯했다. 채은은 잠시 멈칫했지만, 하린의 밝고 진심 어린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심리 상담 센터에서 실습 중이에요.” “정말요? 저도 언니를 보러 가도 될까요?” 하린의 눈빛에는 설렘과 기대가 가득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오늘 처음 만난 채은이 왠지 모르게 친숙하게 느껴졌고,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채은은 그 말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정말 순수한 사람이구나. 마치 작은 사슴을 보고 있는 것 같아.’‘저 맑고 투명한 눈망울, 그리고 순진한 얼굴까지 사슴과 똑같단 말이지!’ “그래요, 나중에 놀러 와요.”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첫인상이 꽤 좋은 사람이니까 괜찮을 거야.’ “그럼 제 동생 좀 잘 부탁드릴게요.”건하가 온화한 미소를 띠며, 채은의 접시에 음식을 하나 더 올려주었다. 자기 접시에 추가된 소고기를 본 채은은 잠시 멈칫했고, 고개를 들어 건하의 깊은 눈동자에 깃든 장난기를 마주했다. ‘아무래도 내가 저 사람의 의도에 말려든 것 같아...’ 한편, 옆에 있던 지안은 눈을 번뜩이며 흥미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채은이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지?’ ‘하긴, 채은이는 예쁘고, 능력도 있는 데다가, 성격까지 좋잖아! 남자가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부진성 그 인간은 정말이지 복을 발로 차버린 거라고.’ 다섯 사람의 저녁 식사는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목적을 달성한 건하는 채은이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자 눈치 있게 하린과 재준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차 안에서 하린은 여전히 서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건하가 그런
채은은 자신을 걱정하는 지안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쉰 후, 차분히 설명했다.“지안아, 내가 이혼을 결심했다는 건 이미 부진성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는 뜻이야. 물론 평생 혼자 살겠다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 당장은 내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없을 뿐이야.”“그렇구나.”지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내심 의문이 생겼다. ‘저렇게 잘생기고 멋진 도 대표도 눈에 차지 않는다면, 도대체 부진성 같은 인간은 왜 좋아했던 거지?’ ...진아는 다음 날 출근해야 해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채은의 집을 정리한 후 돌아갔다.채은은 새벽 일찍 일어났다. 부씨 가문의 요구로 집안일과 시댁살이에 얽매였던 지난날을 떠올리자,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채은을 설레게 했다. A대학교는 채은의 새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걸어서 대학교 정문에 도착한 채은은 오랜만에 활기를 느끼며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하지만 그 순간, 귀를 찌를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채은! 네가 왜 여기 있어?!” 채은이 고개를 돌리자, 충격과 경멸이 뒤섞인 표정의 윤아가 서 있었다. 채은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를 무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윤아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고, 빠르게 다가와 채은의 앞을 막아섰다. “왜 무시해?! 묻잖아, 네가 왜 여기 있냐고! 우리 A대학교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학교로 보여?”윤아는 예전부터 채은을 무시하는 태도를 당연하게 여겼다. 결혼 전이나 후나, 심지어 이혼 후에도 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채은은 예전처럼 윤아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비켜.”채은은 가방끈을 매만지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어투에는 차가운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윤아는 그 말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자신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던 채은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서채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혼했다고 날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A대학교 같은 명문대에 너 같은 저학력 이
채은은 아무렇지 않은 듯 차창 쪽으로 몸을 살짝 움직였다. 계속해서 채은의 행동을 주시하던 건하는 그녀의 작은 움직임을 눈치챘고, 미소를 머금은 채 살며시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채은이 낯선 사람에게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익히 알았던 그는 곧 이해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도 대표님, 보떼로 가시나요?”운전기사는 백미러로 단정하고 단아한 옷차림의 채은이 건하와 자연스레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고는 은근히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보떼는 건하가 손님을 접대할 때 이용하는 단골 호텔로, 그의 전용 룸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곳이었다. 건하는 잠시 생각하더니 채은을 향해 물었다.“채은 씨, 추천해 주실 만한 곳이 있나요?” 채은은 잠시 멈칫하다가 답했다.“대표님께서 자주 가는 곳으로 가시죠. 예전에 도와주신 일도 있고, 오늘은 하린이도 저를 많이 도와줬으니, 제가 감사의 뜻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요.” 채은은 분명히 건하에게 신세를 졌다. 비록 건하의 도움이 그의 여동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채은은 하린의 치료를 돕기로 결심한 이상,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하도 채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고, 운전기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게 할게요. 기사님, 출발하시죠.”보떼는 N시의 초호화 호텔로, 최고급 소비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수천만 원이 넘는 식사비는 물론이며, 출입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부유층이나 명망 높은 인사들이었으니 말이다. 검은색 카이엔이 보떼 입구에 천천히 멈춰 섰다. N시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건하의 카이엔은 검소한 차량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연속된 숫자 7이 새겨진 번호판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했다. 입구에 서 있던 직원이 재빠르게 달려와 차 문을 열었고, 곧이어 로비 매니저도 허겁지겁 달려왔다.“도... 도 대표님,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방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데, 이번에도 하린 아가씨와 두 분이신가요?” 건하는 차에서 내리며 채은을 흘깃 보았다. 채은은 스스로 차 문을 열고 내리고
채은은 입술을 깨물며 거절하려 했으나, 하린이 먼 곳을 향해 기쁘게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오빠!” 채은이 고개를 들자, 한 남자가 차 문을 열고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깔끔한 맞춤 정장 차림의 건하는 평소의 부드러운 인상과 달리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고, 깊고 어두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채은은 왠지 모르게 머리끝이 저릿해졌지만, 건하의 시선을 견디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건하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이렇게 또 뵙네요.” 한편, 교무처에서 나온 부윤아는 손에 들고 있던 처분서를 구기며 이를 악물었고, 빠르게 학교 커뮤니티의 게시글을 훑으며 불쾌감과 억울함에 치를 떨었다. ‘서채은이 진짜 그 심리학과 선배라니!’ ‘감히 우리를 속여?!’윤아는 채은이 정말 심리학과의 전설적인 선배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이를 숨기고 있던 그녀의 행동에 분노가 치밀었다.‘그동안 잘도 숨겼겠다? 일부러 숨긴 게 분명해!’‘천박한 X, 오빠랑 이혼하고 벨루스 가든의 집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서, 곳곳에서 나한테 맞서면서 치욕을 안겨주고 있어! 이 처분서를 좀 보라고!!’‘우리한테 순종하던 서채은과 비교하면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아!’‘어림없지!’‘오빠한테 이 모든 걸 말해야겠어!”윤아는 복수의 결심을 굳히며 캠퍼스를 나서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채은과 건하의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윤아의 표정은 놀라움에서 분노로 번져갔다. ‘서채은 저 X... 벌써 새로운 남자를 만난 거야?!’윤아는 채은 일행 쪽으로 다가가 보려 했으나 거리가 꽤 멀어, 남자의 얼굴은 똑똑히 보지 못했다. ‘어라? 실루엣이 낯설지 않은데?’윤아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채은 쪽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연신 사진을 찍은 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생각했다.‘오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어!’‘이걸 오빠한테 보여주면 서채은을 완전히 끝장낼 수 있을 거야! 집도,
마치 채은의 감정을 알아차린 듯, 진도윤 교수가 그녀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리며 말했다.“돌아왔으니 됐어. 정말 잘했어.”고개를 들어 격려와 너그러움이 담긴 진도윤 교수의 눈길을 마주한 채은은 코끝이 찡해졌다. 진도윤 교수는 손을 거두며 주변의 흥분한 학생들과 충격에 빠진 윤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채은이는 확실히 내 학생이 맞네. 당시 심리학과가 채은이를 위해 무기한 휴학 허가서를 발급해 준 이유도, 이런 천재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채은이는 재학 중 최단기간에 전공 학점을 이수했고, 경찰, 정신병원, 심리 상담 센터 등과 협력해 심리학 분야에 수많은 실질적 기여를 했어.”“채은이가 졸업까지 남은 건 아주 작은 걸음일 뿐인데, 우리 심리학과의 천재가 심리 상담 센터의 상담사를 맡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 진도윤 교수의 말투에는 채은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이 가득했다.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모두 채은을 향해 강렬한 호기심과 존경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진도윤 교수는 말을 끝낸 뒤, 단호한 표정으로 윤아를 쳐다보며 말했다.“그렇지 않아도 커뮤니티에서 학교 선생님을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글을 보고 오던 참이야. 학생으로서 공부와 탐구에 집중하지는 못할망정, 사적인 감정으로 복수하거나 질투로 남을 헐뜯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네. 잘못을 저지른 학생들은 학교 규정에 따라 처리할 테니, 모두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도록!” 진도윤 교수는 이 말을 마친 후, 채은에게 한 번 더 격려하는 눈빛을 보내고는 자리를 떠났다. 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윤아에게 쏠렸다.조금 전 식당에서 자신이 그 글을 썼다고 인정한 윤아는 진도윤 교수의 발언이 자신을 겨냥한 것임을 깨달았다. ‘나... 나한테 하신 말씀일 거야.’‘서채은이 정말 그 심리학과의 전설로 불리던 선배님이었다니!’학생들의 시선을 알아차린 윤아는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금세 새빨개졌고, 이내 황급히 자리를 떠나버렸다. 해프닝이 끝난 뒤, 학생들은 채은을
여학생의 눈에는 별빛이 가득했는데, 흥분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채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아요, 교수님들께서도 제가 졸업하기를 기다리실 줄은 몰랐네요.”채은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특히 심리학과 학생들은 더욱이 그랬다. 심리학과라면 누구나 알 법한 학생, 뛰어난 성적과 독보적인 업무 능력으로 심리학과의 천재라 불렸던 그녀가 바로 서채은이었다!졸업을 앞둔 채 뜻밖의 사고로 인해 자퇴를 결심하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한 채은을 위해, 지도 교수들과 학과장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학교 측에 특별 요청을 올려 전례 없는 ‘무기한 휴학 허가서’가 발급되었다!학과 전체가 채은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그 모든 기억이 떠오르자, 채은의 눈에 따뜻한 감정이 스쳐 갔다. 현장에 있던 학생들은 점점 더 흥분하며 채은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 선배님이라고? 세상에, 그 선배님의 논문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대박이었어!” “서채은 선생님이 정말 그 전설적인 선배님이라면, 단순히 대학 내 심리 상담사가 아니라, 전문 심리 상담사로도 충분한 자격이 있는 거잖아! 경찰과 협력해서 여러 사건을 해결했다는 소문도 있던데?” “와... 내 여신님이 우리 선생님이 되었다니. 교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시험지를 보면서 꼭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서채은 선생님이었어!” 점점 긍정적으로 변하는 분위기에 사람들은 채은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윤아가 이를 갈며 통통한 여학생을 향해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대체 뭘 보고 떠들어 대는 거야? 서채은이 그 전설 속의 선배님이라는 증거 있어? 그냥 거짓말로 넘어가려는 걸지도 모른다고!” 윤아는 절대 믿을 수 없었다.‘서채은이 무슨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거야? 지나가던 개가 웃겠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으면, 왜 우리 집안에서 몇 년 동안 참기만 했겠어?!’통통한 얼굴의 여학생이 억울한
하린이 고개를 돌리자, 놀란 척하며 자신을 쳐다보는 윤아의 모습이 보였다. “커뮤니티에 다 나왔잖아. 서채은은 고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이고, 부정한 수단으로 우리 학교 심리 상담 센터의 상담사가 된 거라고! 우리보다 학력도 낮은 사람과 어울리다니, 창피하지 않아?” 윤아는 채은을 향해 거만한 태도로 쏘아붙였다. 하린은 화가 치밀어 올라 바로 반박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채은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린을 뒤로하고 윤아의 앞으로 나섰다. 채은이 평온한 눈빛으로 윤아를 바라보며 담담히 물었다.“커뮤니티에 올라온 거, 네가 한 짓이지?” “내가 했으면 어쩔 건데?”윤아는 사실을 들킨 것에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당당한 태도로 비웃기 시작했다.“다 사실이잖아.” 윤아는 하린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채은이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다는 것도 맞는 말이니 자신은 떳떳하다는 태도였다. 바로 이때, 하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그 게시글이 뜨거운 화제가 된 건 알고 있지? 아, 허위 사실 유포나 명예훼손이 심각한 경우에는 범죄로 처벌될 수 있는 것도 알고 있으려나?” 하린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경고의 뜻이 서려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며 분위기가 점점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허, 명예훼손?”윤아가 냉소를 터뜨리며 비웃었다. “고졸이라는 게 명예훼손인 거야, 아니면 부정한 수단이 명예훼손인 거야?” “정말 본인 실력으로 우리 대학교의 심리 상담사가 된 거라면, 증명해서 보이면 되잖아!”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대학 심리 상담 센터의 상담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게다가 채은이 정식으로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채은이 어떤 증거로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지 의아해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채은의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나는 실력으로 채용된 게 맞아.”사람들이 깜짝 놀
‘커뮤니티?’채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하린은 곧장 핸드폰을 열어 화제의 중심인 게시글을 보여주었다.“이거예요. 누군가 언니의 학력이 고졸에 불과한 데다가, 부정한 수단을 이용해 대학 내 심리 상담사 자리를 얻은 거라고 의문을 제기했어요.”하린은 입술을 깨물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채은을 바라보았다.채은은 게시글을 흘깃 본 뒤, 오늘 사무실에서 느꼈던 이상한 시선들을 떠올렸다.‘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옆에 서 있던 하린은 채은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더 초조하고 불안한 듯 말했다.“언니, 이미 많은 사람이 이 게시글을 봤어요. 게다가... 심한 말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언니는 학교에서 버티기 힘들 거예요.” 하린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채은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그저 게시글일 뿐이잖아? 별거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점심부터 먹어야 한다는 거야.” 채은은 이 게시글이 분명 부윤아와 관련 있을 거라 짐작했지만,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여태 겪은 폭풍우에 비하면 이런 비방은 전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 듯했다.채은의 시선은 차분했고, 미소에는 여유로움이 배어 있었다. 게시글에 담긴 악의적인 말들은 채은에게 전혀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채은의 이런 태도에 마음이 놓인 하린도 미소를 지었다.두 사람은 식당으로 향해 줄을 서려 했다.하지만 두 사람이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하린은 본래부터 도씨 가문의 아가씨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고, 채은 역시 학교에 발을 들이자마자 뜨거운 화젯거리가 된 ‘미녀 심리 상담사’였다.여기에 커뮤니티 사건까지 더해지자,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저기 봐, 서채은이랑 도하린 아니야? 왜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거지?” “그러게, 두 사람이 왜 같이 식당에 와서 밥을 먹는 걸까?” “뭐야? 대체 무슨 사이지?”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게시물을
희주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윤아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어두워졌다. 이를 알아차린 희주가 급히 말을 바꾸며 아부하듯 말했다.“그래도 뭐 어쩌겠어? 딱 거기까지인걸. 코랑 쌍꺼풀을 보면 딱 성형한 것 같잖아! 윤아 너랑 비교하면 아직 한참 멀었지!”윤아는 채은이 성형했는지 안 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으나, 희주의 말은 그녀의 기분을 크게 풀어준 듯했다. 하지만 윤아는 표정이 한결 나아진 후에도 ‘심리 상담 센터의 예쁜 상담사 선생님’라는 말을 곱씹었다.‘심리 상담 센터? 예쁜 선생님? 서채은이?’ 윤아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희주에게 손짓했다.“희주야, 부탁이 하나 있는데, 잘만 해주면 지난달에 오빠가 선물해 준 샤넬 가방 너 줄게.”...다음 날.대학 커뮤니티 게시판에 굵고 빨간 글씨로 눈길을 끄는 게시물이 올라왔다.[고졸 출신 신입 미녀 심리 상담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떠나주세요.]신입, 미녀, 심리 상담 선생님.제목만으로도 쉽게 채은을 떠올릴 수 있는 문구였다. 게다가 채은은 이미 학교 안에서 화제의 인물이었기에, 자극적인 제목은 많은 학생들을 유도하기에 적합했다. 궁금증에 못 이긴 사람들은 잇달아 게시물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게시글 작성자는 새로 만든 계정을 이용했으나, 올린 내용은 모두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신입 미녀 심리 상담 선생님이 고졸인데도 대학교에 취업했습니다.][대체 어떻게 실습 자리를 얻은 걸까요?] 글과 함께 학교 공식 사이트에서 캡처한 졸업 명단과 채은의 입학 연도가 첨부되어 있었다. 명단을 보면 채은이 입학했으나, 졸업 또는 수료한 기록이 없었다. 즉, 대학교 학업을 마치지 못한 상태로 고졸 학력이라는 뜻이었다. [첨부된 자료를 보면 서채은 씨는 대학교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심리 상담 선생님이 되었지요. 우리 학교에는 특별 채용 사례가 없는 걸로 아는데, 이건 서채은 씨가 부정한 방법으로 우리 학교에 입사했다는 것을
“너 수작이 정말 대단하구나?”윤아는 하린이 이렇게까지 채은을 감싸는 모습에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분노를 터뜨렸다. 하지만 채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부윤아, 네 오빠를 좋아했던 건 내가 눈이 멀어서 그랬던 거야.”“하지만 그때의 네 오빠가 왜 날 선택했는지는 너희 부씨 가문 사람들이 더 잘 알지 않나? 사실을 왜곡하고 남을 모함하려고 해도,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 하지 않겠어?” 사실, 그 당시 진성이 채은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장진화과 부윤아는 적극적으로 지지했었다. 첫 번째 이유는 부경석이 진심으로 채은을 좋아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장진화과 부윤아가 채은과 진성의 결혼을 빌미로 고다희의 귀국을 당겨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채은의 말이 자신의 과거를 꼬집는 것임을 깨닫자, 윤아는 도리어 소리를 높이며 욕설을 퍼부었다.“내가 널 모함한다고? 서채은, 네가 그렇게 깨끗하다면, 우리 집에서 받아 간 집도 전부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니야?!” “가질 거 다 가져가 놓고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 있어? 너 같은 건 그 집들의 값만큼의 가치도 없을 거라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나는 네 오빠 때문에 3년 동안 내 청춘을 허비하면서 너희 모녀의 시중을 들었어. 그러고도 첫사랑이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이혼당했지.”“내가 사기 결혼으로 네 오빠를 고소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히 여겨야 할걸? 혹시라도 날 빈손으로 내보내려 했다면, 꿈 깨는 게 좋을 거야.” 채은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아는 채은의 단호한 태도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저 사람이 정말 내가 아는 서채은이 맞다고?’‘한때 오빠를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하던 서채은이 어떻게 저렇게 냉담해진 거지?’ ‘분명 서채은한테는 오빠가 약점이었는데?’손목시계를 확인한 채은은 더 이상 윤아를 신경 쓰지 않고, 하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이만 가요. 수업에 늦으면 안 되잖아요.” 하린은 얼굴에 밝은 미소를 띠며 채은의 팔을 붙잡았다.“네,
“이게 진짜!”윤아는 채은의 말에 분노가 폭발했다. ‘왜 예전에는 서채은의 말재주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을까?’‘흥, 이때까지 우리 부씨 가문에서 보여준 현모양처 같은 모습은 다 연기였구나?’ “두고 봐! 내가 우리 오빠한테 일러서 널 꼭 쫓아내고 말 테니까!”“나한테 대드는 게 어떤 결과를 낳는지 똑똑히 보여줄 거야!!” 어차피 청소부 따위라면 해고는 한 마디면 되는 일이었다. “채은 언니가 그쪽을 건드리면 어떤 결과가 난다는 거죠?” 두 사람이 대치하는 모습을 보던 학생들 사이에서 맑고 청아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린이 사람들 틈을 헤치고 걸어 나온 것이었는데, 채은과 대치하고 있는 사람이 윤아인 것을 확인한 순간, 하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부씨 가문은 비록 최상위 재벌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N시에서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가문이었다.윤아는 그런 부씨 가문의 이름을 등에 업고 학교에서도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전에 하린과 마주쳤을 때는 항상 온순한 태도를 보였기에, 하린은 윤아를 상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던 참이었다.‘부윤아가 우리 채은 언니를 건드린 거야?’비록 채은과 딱 한 번 만난 사이였지만, 하린은 첫 만남부터 마음속 깊이 ‘채은 언니’를 좋아하게 되었다.그래서 하린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나선 것이었다. 윤아는 하린이 나타난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채은 언니?’ 하린은 도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A대학교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윤아는 계속 하린과 친해지고 싶었지만, 하린은 항상 차갑게 굴며 곁을 내주지 않았다.‘도하린이 서채은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지?’ “너 정말 대단하다, 서채은! 권력에 빌붙는 네 능력에 감탄밖에 안 나온다니까?” 윤아는 하린을 건드릴 수 없어서 다시 채은에게 화살을 돌렸다. 하지만 하린이 윤아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부윤아, 다시 말해봐. 채은 언니가 왜 권력에 빌붙는다는 건데?” 하린이 채은을 노골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