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나는 구원 소설 속으로 들어가 여자주인공 임시연이 되었다. 나의 미션은 구원 소설 속 빌런인 남자 주인공 고재원을 공략하여 음험하고 속이 사악한 빌런을 밝고 명랑한 소년으로 바꾸는 것이었다.나에 대한 호감도가 100%에 도달하면 나는 상금 200억을 받을 수 있다.하지만 공략이 7년이나 이어졌지만 되돌아오는 건 집착과 병적인 괴롭힘이었다.머릿속에 고재원이 했던 마지막 한마디가 또 떠올랐다.“강효진, 죽어도 날 떼어낼 생각 하지 마.”내가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소년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다시 한번 물었다.“묻잖아요. 누구냐고.”나는 그제야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놀란 두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난...”무의식적으로 도망가려고 뒷걸음질 친 그때 누군가 갑자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보니 보육원 원장이었다.“임준서, 버릇없게 굴면 안 돼. 이분은 강 대표님이셔.”“임준서?”“네. 이 아이도 우리 보육원에서 자랐는데 올해 18살이에요. 아쉽게도 입양 기회를 놓쳤죠. 지금 여기서 대학교에 다니는데 여름 방학이라 일손을 도와주러 왔어요.”원장의 소개를 듣고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재원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임준서. 이름 예쁘네.”나는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거두고 임준서를 다시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꽤 잘생긴 얼굴이었는데 고재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임준서의 눈빛이 어둡긴 해도 깨끗하고 맑았다. 하지만 매번 나를 볼 때마다 고재원의 두 눈에는 욕망만 가득했다. 두 사람은 완전히 달랐다.그리고 고재원은 절대 나와 저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지금처럼 날 경계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항상 나의 손목을 잡고 영원히 그의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강요했다.내가 임준서에게 관심을 보이자 원장은 임준서를 내 앞으로 잡아당겼다.“강 대표님이라고 불러. 아니, 아니. 누나라고 불러.”소년의 키가 커서 나를 내려다보았고 두 눈에 궁금함이 가득했다.“누나. 왜 자꾸 그렇게 이
잘생긴 남자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설령 그가 올해 갓 성인이 된 남자라도 말이다.‘행동거지와 학업이 뛰어난 고아를 후원하는 일은 나 같은 돈 많은 여자들이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편히 살게 집 하나 마련해주는 것도 일도 아니지. 난 절대 얘가 반반하게 생겨서 데려온 게 아니야.’한창 나에게 자기 최면을 걸던 그때 함께 집으로 온 임준서가 갑자기 말했다.“누나 집이 엄청 큰데요?”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자꾸만 저도 모르게 쳐다보았다.임준서는 집안을 둘러보다가 불쑥 말했다.“누나, 배고파요? 국수 한 그릇 말아줄까요?”“아니, 괜찮아. 와서 밥해달라고 후원한 게 아니야.”임준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서서 국수를 한 움큼 집어 환하게 웃었다.“누나 국수 안 좋아해요? 아까 냉장고에 있던데.”나는 그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임준서는 주방으로 가서 가스 불을 켰다.“누나, 배고파요?”배고프지 않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임준서가 피식 웃었는데 웃는 것조차 아주 매력적이었다.“금방 돼요.”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가 절대 고재원이 아니라고 다시 한번 되뇌었다. 고재원은 이렇게 다정할 리가 없으니까.그런데 임준서는 국수를 만든 게 아니라 반찬을 뚝딱 만들었다.오늘 온 하루 제대로 된 식사조차 하지 못했다. 요리 솜씨가 어찌나 뛰어난지 나는 허겁지겁 먹었다.임준서는 맞은 편에 앉아서 한 손으로 턱을 받쳐 들고 나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천천히 먹어요.”그러고는 다른 한 손으로 내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주었다.나는 순간 마음이 설렜다. 데려온 연하남이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해준 음식이 너무도 맛있었다.어느덧 잠잘 시간이 되었다.임준서가 이젠 성인이 되었기에 새 거처로 옮겨도 무서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여 마음 놓고 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한밤중에 임준서가 내 방문을 슬쩍 열고 들어왔다.“누나, 나 무서워요.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중저음은 마치 마력이
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놀라서 깨어난 바람에 온몸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하지만 침대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악몽 꿨나...”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악몽 꿨어요?”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임준서가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아... 아니야.”그러고는 임준서의 사냥감을 보는 듯한 시선을 피하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임준서가 내 손목을 잡았다.“임준서, 뭐 하는 거야?”내가 발버둥 치자 임준서가 천천히 말했다.“어젯밤에 했던 질문 아직 대답해주지 않았어요. 누나...”그 소리에 나는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임준서를 쳐다보았다.임준서는 천천히 다가와 나를 짓눌렀다. 뜨겁고 익숙한 느낌이 다시 나를 덮쳤다.“고... 재원?”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너 죽은 거 아니었어?”나는 뒷걸음질 쳤지만 그의 품 안에 갇힌 바람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강효진, 내가 너에 대한 호감도를 조절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나보다 더 독하더라? 투신자살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나는 놀란 두 눈으로 고재원을 쳐다보았다.“내 미션을 어떻게 알았어?”그는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왜냐하면 너무 긴장해서 미친 듯이 뛰고 있었으니까.“널 만난 첫날부터 네 마음의 소리를 들었어.”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속으로 시스템에 수도 없이 질문을 했는데 이 버그를 7년이나 내버려 둔 것이었다.지금 이 순간 나는 고재원 앞에 알몸으로 발가벗겨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임준서는 내 마음을 진작 꿰뚫어 본 듯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어루만지면서 차갑게 웃었다.“죽은 다음에 집에 갈 생각이었지? 근데 난 널 놓아줄 수 없어... 너랑 같이 투신하고 눈을 떠보니까 보육원이더라고. 그러다가 나중에 테이프 커팅식에서 널 봤고 이름을 알게 되었어.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도 붙였고. 내 운이 이렇게 좋을 줄은 정말 몰랐어. 진짜로 널 찾다니...
나는 아무 목적이 없이 달리다가 저도 모르게 한 정신과 병원 앞으로 왔다. 안에 있던 의사는 나를 보자마자 재빨리 달려 나오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나는 옷차림이 단정한 남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머릿속에 과거 7년 동안의 기억이 나타났다.이 사람이 바로 육한결이었는데 나의 정신과 개인 주치의이자 약혼자였다.내가 떠난 7년 동안 이 몸은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고 자살하려는 생각도 여러 번이나 했다. 그럴 때마다 육한결이 나를 구해주었다. 세심하고 자상한 데다가 키도 크고 잘생긴 그는 나의 일상생활을 아주 꼼꼼하게 챙겨주었다.아직 평범한 정신과 의사고 수입도 나의 천분의 일도 안되지만 나는 여전히 그와 약혼했다.육한결은 맨발로 달려온 나를 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옷을 걸쳐준 다음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효진아, 잠깐 기다리고 있어. 내가 따뜻한 물 한잔 떠다 줄게.”육한결이 자리를 비운 틈에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뻥 뚫린 통유리여서 햇볕이 잘 들어왔고 향긋한 캔들 향이 코끝을 스쳤다. 내 머릿속에 있긴 했지만 나의 것이 아닌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예전의 진료기록을 훑었다.아니나 다를까 내가 육한결에게서 정신과 진료를 7년이나 받았다는 기록이 그대로 남아있었다.7년 전, 그에게 환자라곤 나 하나였고 이 병원마저도 내가 차려준 병원이었다. 그러나 육한결은 지금 나에게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이라서 약혼자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그런데 ‘나를’ 7년이나 돌봐준 것도 사실이었다...‘됐어.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 나중에 기회 되면 얘기해야겠어.’한창 그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육한결이 따뜻한 물 한잔을 들고 들어왔다.“효진아.”육한결은 나의 어리둥절한 눈빛을 보면서 뭔가 아는 듯했다.“효진아, 또 내가 누군지 기억 안 나?”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어떻게 알았어?”육한결은 가볍게 웃었지만 그 웃음에 약간의 한숨이 담겨있었다.“지난 7년 동안 넌 가끔 기억을 잃었어. 날 잊는 것도 거의 일상이거든
약혼자라는 세 글자에 고재원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고재원의 적대심이 수직상승하는 걸 본 순간 나는 고재원이 육한결에게 주먹이라도 날릴까 봐 걱정되어 그만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곧 이어진 육한결의 말에 나마저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아 참, 효진아, 다음 달이 우리 결혼식인데 드레스 맞추러 언제 갈래?”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다... 다음 달? 이렇게나 빨리?”육한결은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나의 볼을 꼬집었다.“응. 좋은 날짜라면서 네가 직접 골랐잖아. 그것도 잊었어?”고재원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일단 육한결부터 보내야 했기에 웃으면서 수습했다.“아니. 안 잊었어...”육한결은 기쁨에 겨워하며 나의 이마에 입맞춤하고는 계속하여 말했다.“그때 가서 이 학생더러 내 들러리를 서라고 하면 되겠어.”그 소리에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고재원의 표정을 차마 돌아볼 수 없었지만 지금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른 가. 졸려서 이만 자야겠어.”나는 대충 핑계를 대고 육한결을 보냈다. 그런데 숨을 고르기도 전에 고재원에게 잡혀 방으로 들어갔다.그는 나를 침대에 눕힌 채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이마의 핏줄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들러리? 약혼자? 다음 달에 결혼? 강효진, 엄청 급했구나, 너.”순간 머리가 하얘진 나는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이나 했다.“사실... 네가 양복 입으면 꽤 멋있을 것 같은데.”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재원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강효진, 대체 날 뭐라 생각하는 거야?”고재원의 목소리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 질문에 나는 한참 동안 고민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고재원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고재원.”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돌아보지 않은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무슨 이유인지 고재원의 뒷모습만 보면 마음이 저렸다.‘난 대체
그날 나는 육한결의 병원으로 와서 한 달에 한 번 받는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파혼하고 싶다는 얘기도 할 생각이었다.육한결은 금색 안경을 낀 채 내 앞에 앉아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고 귀티도 흘러넘쳤다.그의 질문에 나는 일일이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런데 매번 육한결의 병원에 올 때마다 향긋한 캔들 냄새를 맡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었고 육한결의 말도 고분고분 따르게 되는 것 같았다.치료를 마친 후 육한결은 이번 달에 먹을 약을 준비하러 갔다. 그때 소파 위에 놓인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아무 생각 없이 힐끗거렸는데 서은정이라는 여자가 보낸 카톡 문자였다.[오빠, 바빠?]수년간의 공략 경험에 따른다면 이건 누가 봐도 여우 짓 하는 여자의 문자였다.나는 의심 가득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런데 화면을 켜기도 전에 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오빠, 내일이 바로 오빠랑 그년 결혼식인데 계획은...]문자 내용이 다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여자가 말한 그년이 누가 봐도 나였다. 그리고 계획이라는 건 또 뭘까?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휴대전화 잠금을 해제하려 했다. 기억 속에 육한결이 나를 안심하게 하려고 휴대전화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라는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놀랍게도 잠금이 해제되었다.‘솔직한 사람인 건가? 아니면 내가 휴대전화를 절대 뒤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나는 후자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원래의 내가 아니었다.잠금을 해제한 후 서은정이 보낸 또 다른 문자도 확인했다.[오빠가 옆에 없으니까 자꾸 악몽을 꿔. 얼른 그 바보 같은 여자한테서 벗어나고 나랑 결혼해.]그리고 아까 내가 채 보지 못했던 문자 내용은 이러했다.[오빠, 내일이 바로 오빠랑 그년 결혼식인데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지?]나는 부들부들 떨며 두 사람이 전에 나눴던 대화 기록을 뒤졌다. 하지만 육한결이 이미 다 지워서 확인할 수 없었다. 하여 나는 육한결의 말투로 서은정에게 문자를 보냈다.육한결:[
육한결이 다시 들어왔다. 내가 그의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걸 보았고 서은정과의 대화창에 머물러 있는 것도 보았다.잠금을 해제한 걸 발견한 순간 다정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다가와 휴대전화를 빼앗아버렸다. 다시 나를 쳐다봤을 때 흉악한 본색을 드러냈다.“다 봤어?”나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말했다.“그래.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다 봤어.”육한결의 마음을 쿡쿡 찌르듯 일어서서 또박또박 말했다.“기생오라비 주제에 내 돈을 쓰고 내 집에서 살면서 내 돈으로 바람까지 피우려고?”육한결은 갑자기 막무가내로 변했고 나를 확 밀어버렸다.중심을 잃은 나는 테이블에 이마를 부딪치면서 뜨거운 피가 눈앞을 가렸다. 그는 더는 예전처럼 다급하게 나를 부축하지 않고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대놓고 비웃었다.“강효진, 네까짓 게 뭔데? 내가 기생오라비라고? 넌 뭐 달라? 너랑 네가 후원하는 그 남학생 무슨 사이인지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래. 돈이 하도 많아서 쓸 데가 없으니까 어린 남자를 옆에 끼고 살겠지. 말은 또 어찌나 번지르르하게 하는지, 참.”나는 테이블을 잡고 일어났다. 이마를 부딪쳐 고통이 밀려왔다.남녀의 힘 차이를 느낀 순간 겁이 덜컥 났다. 하여 나도 여지를 남겨두었다. 휴대전화 녹음 기능을 켜고 뒤에 숨긴 다음 육한결이 모든 진실을 얘기하길 유도했다.“육한결, 너랑 파혼할 거야. 서은정이라는 여자와 짠 계획이 나랑 이혼한 후 내 자산을 빼돌리는 거 아니었어? 이젠 그 계획이 다 들통났으니까 그만 꿈 깨.”육한결이 차갑게 웃더니 천천히 말했다.“알면 뭐?”뜻밖에도 육한결은 고민도 하지 않고 인정했다. 내가 원하는 말을 녹음했으니 더는 인간쓰레기만도 못한 육한결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나는 문 쪽으로 뒷걸음질 치면서 고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울리자마자 고재원이 전화를 받았다.고재원의 노곤하면서도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나는 기쁨에 겨워하며 휴대전화를 꽉 잡았다.“재원아, 나 좀 살려줘. 지금...”
흐리멍덩하게 깨어났을 때 나는 낯선 방 안에 갇혀있었는데 민가 같았다.그때 금색 안경을 낀 남자가 계약서 하나를 들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당신 누구야?”남자가 피식 웃었는데 참으로 간사한 웃음이었다.“너의 약혼자 육한결이잖아, 효진아. 우리 곧 결혼해.”나는 몇 초 동안 생각하다가 그제야 떠올렸다.‘맞다. 내 약혼자 육한결이지. 내가 평생 가장 사랑했던 사람.’나는 육한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가장 사랑했던... 사람?’그런데 나의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모습이 스쳤다. 그 사람의 눈빛은 어둡기 그지없었고 나의 손목을 꽉 잡고 죽어도 떼어낼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었다.그 사람과 육한결은 완전히 달랐다. 육한결보다 훨씬 더 잘생겼다.나는 머리를 힘껏 두드렸다.‘대체 누굴 잊은 거야? 누굴 잊은 거냐고.’육한결은 나의 손을 잡고 펜과 계약서를 건넸다.“효진아, 여기에 사인해. 오늘은 우리 결혼식 날이야. 오늘이 지나면 합법적인 부부가 돼. 그럼 이 계약도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어. 하하하.”육한결이 미친 듯이 웃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서류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재산 양도 계약서? 이건... 뭐지? 뭔가 익숙한데?’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육한결이 회중시계를 꺼냈다.“얼른 사인하지 않고 뭐 해.”회중시계를 들고 내 앞에서 흔드니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육한결은 옆에서 계속 사인하라고 다그쳤다.“강효진, 여기에 사인해. 얼른.”나의 몸이 육한결의 명령에 따라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쾅.내가 사인하려던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나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의식 속 흐릿했던 그 모습이 갑자기 또렷해졌다.‘그 사람이야.’“육한결, 이 X 같은 놈아. 죽고 싶어?”그는 내 옆에 있는 육한결을 가차 없이 발로 걷어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육한결은 얼굴이 퉁퉁 부었고 멍이 들었으며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그때 질서정연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또 한 무리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병실에 가득 퍼진 소독수 냄새에 코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눈을 떠보니 그 남자가 침대 옆에 엎드리고 있었다.“당신 누구야?”남자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강효진, 깼어?”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당신 누구냐고.”그제야 당황하기 시작한 남자는 비틀거리면서 간호사를 찾으러 가려 했다. 나는 뛰쳐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하하하...”나의 웃음소리에 고재원은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강효진, 또 날 속였어?”나는 우쭐거리며 아래턱을 들었고 겁먹은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어야지. 전에 너도 임준서인 척하며 날 속였잖아.”말문이 막혀버린 고재원은 손을 들어 나의 볼을 어루만지려 하다가 창백한 입술을 보고는 다시 손을 내렸다. 그런데 이내 생각을 바꾸고 허리를 숙여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했다.그러더니 뜻밖에도 옆에 있는 칼 한 자루를 들었다. 나는 순간 소름이 쫙 돋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고재원, 날 죽이려고?”한참이 지났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손가락 사이로 힐끔 쳐다보았다.고재원이 사과를 깎고 있는 것이었다.‘고재원이 사과를 깎는다고?’나는 너무도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경악하는 나의 모습에 고재원은 실소를 터트렸다.“왜.”“고재원, 지금 사과를 깎고 있는 거야?”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병원 맞는데? 설마 내가 죽어서 천국에 왔나?’“먹기나 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고재원은 사과 하나를 나의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그 사과를 받았다.‘역시 속이 사악한 사람이야.’나는 사과를 다 먹은 후 고재원에게 다가가 얘기를 나누었다.“나중에 날 어떻게 찾았어?”고재원의 얼굴과 목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알려줄 생각이 없었지만 나의 궁금증 가득한 눈빛에 그냥 알려주기로 했다.그는 미간을 어루만지면서 건들거리며 말했다.“그날 육한결의 사무실에서 청첩장이랑 네가
흐리멍덩하게 깨어났을 때 나는 낯선 방 안에 갇혀있었는데 민가 같았다.그때 금색 안경을 낀 남자가 계약서 하나를 들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당신 누구야?”남자가 피식 웃었는데 참으로 간사한 웃음이었다.“너의 약혼자 육한결이잖아, 효진아. 우리 곧 결혼해.”나는 몇 초 동안 생각하다가 그제야 떠올렸다.‘맞다. 내 약혼자 육한결이지. 내가 평생 가장 사랑했던 사람.’나는 육한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가장 사랑했던... 사람?’그런데 나의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모습이 스쳤다. 그 사람의 눈빛은 어둡기 그지없었고 나의 손목을 꽉 잡고 죽어도 떼어낼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었다.그 사람과 육한결은 완전히 달랐다. 육한결보다 훨씬 더 잘생겼다.나는 머리를 힘껏 두드렸다.‘대체 누굴 잊은 거야? 누굴 잊은 거냐고.’육한결은 나의 손을 잡고 펜과 계약서를 건넸다.“효진아, 여기에 사인해. 오늘은 우리 결혼식 날이야. 오늘이 지나면 합법적인 부부가 돼. 그럼 이 계약도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어. 하하하.”육한결이 미친 듯이 웃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서류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재산 양도 계약서? 이건... 뭐지? 뭔가 익숙한데?’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육한결이 회중시계를 꺼냈다.“얼른 사인하지 않고 뭐 해.”회중시계를 들고 내 앞에서 흔드니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육한결은 옆에서 계속 사인하라고 다그쳤다.“강효진, 여기에 사인해. 얼른.”나의 몸이 육한결의 명령에 따라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쾅.내가 사인하려던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나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의식 속 흐릿했던 그 모습이 갑자기 또렷해졌다.‘그 사람이야.’“육한결, 이 X 같은 놈아. 죽고 싶어?”그는 내 옆에 있는 육한결을 가차 없이 발로 걷어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육한결은 얼굴이 퉁퉁 부었고 멍이 들었으며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그때 질서정연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또 한 무리
육한결이 다시 들어왔다. 내가 그의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걸 보았고 서은정과의 대화창에 머물러 있는 것도 보았다.잠금을 해제한 걸 발견한 순간 다정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다가와 휴대전화를 빼앗아버렸다. 다시 나를 쳐다봤을 때 흉악한 본색을 드러냈다.“다 봤어?”나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말했다.“그래.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다 봤어.”육한결의 마음을 쿡쿡 찌르듯 일어서서 또박또박 말했다.“기생오라비 주제에 내 돈을 쓰고 내 집에서 살면서 내 돈으로 바람까지 피우려고?”육한결은 갑자기 막무가내로 변했고 나를 확 밀어버렸다.중심을 잃은 나는 테이블에 이마를 부딪치면서 뜨거운 피가 눈앞을 가렸다. 그는 더는 예전처럼 다급하게 나를 부축하지 않고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대놓고 비웃었다.“강효진, 네까짓 게 뭔데? 내가 기생오라비라고? 넌 뭐 달라? 너랑 네가 후원하는 그 남학생 무슨 사이인지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래. 돈이 하도 많아서 쓸 데가 없으니까 어린 남자를 옆에 끼고 살겠지. 말은 또 어찌나 번지르르하게 하는지, 참.”나는 테이블을 잡고 일어났다. 이마를 부딪쳐 고통이 밀려왔다.남녀의 힘 차이를 느낀 순간 겁이 덜컥 났다. 하여 나도 여지를 남겨두었다. 휴대전화 녹음 기능을 켜고 뒤에 숨긴 다음 육한결이 모든 진실을 얘기하길 유도했다.“육한결, 너랑 파혼할 거야. 서은정이라는 여자와 짠 계획이 나랑 이혼한 후 내 자산을 빼돌리는 거 아니었어? 이젠 그 계획이 다 들통났으니까 그만 꿈 깨.”육한결이 차갑게 웃더니 천천히 말했다.“알면 뭐?”뜻밖에도 육한결은 고민도 하지 않고 인정했다. 내가 원하는 말을 녹음했으니 더는 인간쓰레기만도 못한 육한결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나는 문 쪽으로 뒷걸음질 치면서 고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울리자마자 고재원이 전화를 받았다.고재원의 노곤하면서도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나는 기쁨에 겨워하며 휴대전화를 꽉 잡았다.“재원아, 나 좀 살려줘. 지금...”
그날 나는 육한결의 병원으로 와서 한 달에 한 번 받는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파혼하고 싶다는 얘기도 할 생각이었다.육한결은 금색 안경을 낀 채 내 앞에 앉아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고 귀티도 흘러넘쳤다.그의 질문에 나는 일일이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런데 매번 육한결의 병원에 올 때마다 향긋한 캔들 냄새를 맡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었고 육한결의 말도 고분고분 따르게 되는 것 같았다.치료를 마친 후 육한결은 이번 달에 먹을 약을 준비하러 갔다. 그때 소파 위에 놓인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아무 생각 없이 힐끗거렸는데 서은정이라는 여자가 보낸 카톡 문자였다.[오빠, 바빠?]수년간의 공략 경험에 따른다면 이건 누가 봐도 여우 짓 하는 여자의 문자였다.나는 의심 가득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런데 화면을 켜기도 전에 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오빠, 내일이 바로 오빠랑 그년 결혼식인데 계획은...]문자 내용이 다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여자가 말한 그년이 누가 봐도 나였다. 그리고 계획이라는 건 또 뭘까?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휴대전화 잠금을 해제하려 했다. 기억 속에 육한결이 나를 안심하게 하려고 휴대전화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라는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놀랍게도 잠금이 해제되었다.‘솔직한 사람인 건가? 아니면 내가 휴대전화를 절대 뒤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나는 후자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원래의 내가 아니었다.잠금을 해제한 후 서은정이 보낸 또 다른 문자도 확인했다.[오빠가 옆에 없으니까 자꾸 악몽을 꿔. 얼른 그 바보 같은 여자한테서 벗어나고 나랑 결혼해.]그리고 아까 내가 채 보지 못했던 문자 내용은 이러했다.[오빠, 내일이 바로 오빠랑 그년 결혼식인데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지?]나는 부들부들 떨며 두 사람이 전에 나눴던 대화 기록을 뒤졌다. 하지만 육한결이 이미 다 지워서 확인할 수 없었다. 하여 나는 육한결의 말투로 서은정에게 문자를 보냈다.육한결:[
약혼자라는 세 글자에 고재원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고재원의 적대심이 수직상승하는 걸 본 순간 나는 고재원이 육한결에게 주먹이라도 날릴까 봐 걱정되어 그만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곧 이어진 육한결의 말에 나마저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아 참, 효진아, 다음 달이 우리 결혼식인데 드레스 맞추러 언제 갈래?”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다... 다음 달? 이렇게나 빨리?”육한결은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나의 볼을 꼬집었다.“응. 좋은 날짜라면서 네가 직접 골랐잖아. 그것도 잊었어?”고재원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일단 육한결부터 보내야 했기에 웃으면서 수습했다.“아니. 안 잊었어...”육한결은 기쁨에 겨워하며 나의 이마에 입맞춤하고는 계속하여 말했다.“그때 가서 이 학생더러 내 들러리를 서라고 하면 되겠어.”그 소리에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고재원의 표정을 차마 돌아볼 수 없었지만 지금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른 가. 졸려서 이만 자야겠어.”나는 대충 핑계를 대고 육한결을 보냈다. 그런데 숨을 고르기도 전에 고재원에게 잡혀 방으로 들어갔다.그는 나를 침대에 눕힌 채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이마의 핏줄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들러리? 약혼자? 다음 달에 결혼? 강효진, 엄청 급했구나, 너.”순간 머리가 하얘진 나는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이나 했다.“사실... 네가 양복 입으면 꽤 멋있을 것 같은데.”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재원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강효진, 대체 날 뭐라 생각하는 거야?”고재원의 목소리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 질문에 나는 한참 동안 고민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고재원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고재원.”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돌아보지 않은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무슨 이유인지 고재원의 뒷모습만 보면 마음이 저렸다.‘난 대체
나는 아무 목적이 없이 달리다가 저도 모르게 한 정신과 병원 앞으로 왔다. 안에 있던 의사는 나를 보자마자 재빨리 달려 나오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나는 옷차림이 단정한 남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머릿속에 과거 7년 동안의 기억이 나타났다.이 사람이 바로 육한결이었는데 나의 정신과 개인 주치의이자 약혼자였다.내가 떠난 7년 동안 이 몸은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고 자살하려는 생각도 여러 번이나 했다. 그럴 때마다 육한결이 나를 구해주었다. 세심하고 자상한 데다가 키도 크고 잘생긴 그는 나의 일상생활을 아주 꼼꼼하게 챙겨주었다.아직 평범한 정신과 의사고 수입도 나의 천분의 일도 안되지만 나는 여전히 그와 약혼했다.육한결은 맨발로 달려온 나를 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옷을 걸쳐준 다음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효진아, 잠깐 기다리고 있어. 내가 따뜻한 물 한잔 떠다 줄게.”육한결이 자리를 비운 틈에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뻥 뚫린 통유리여서 햇볕이 잘 들어왔고 향긋한 캔들 향이 코끝을 스쳤다. 내 머릿속에 있긴 했지만 나의 것이 아닌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예전의 진료기록을 훑었다.아니나 다를까 내가 육한결에게서 정신과 진료를 7년이나 받았다는 기록이 그대로 남아있었다.7년 전, 그에게 환자라곤 나 하나였고 이 병원마저도 내가 차려준 병원이었다. 그러나 육한결은 지금 나에게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이라서 약혼자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그런데 ‘나를’ 7년이나 돌봐준 것도 사실이었다...‘됐어.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 나중에 기회 되면 얘기해야겠어.’한창 그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육한결이 따뜻한 물 한잔을 들고 들어왔다.“효진아.”육한결은 나의 어리둥절한 눈빛을 보면서 뭔가 아는 듯했다.“효진아, 또 내가 누군지 기억 안 나?”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어떻게 알았어?”육한결은 가볍게 웃었지만 그 웃음에 약간의 한숨이 담겨있었다.“지난 7년 동안 넌 가끔 기억을 잃었어. 날 잊는 것도 거의 일상이거든
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놀라서 깨어난 바람에 온몸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하지만 침대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악몽 꿨나...”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악몽 꿨어요?”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임준서가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아... 아니야.”그러고는 임준서의 사냥감을 보는 듯한 시선을 피하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임준서가 내 손목을 잡았다.“임준서, 뭐 하는 거야?”내가 발버둥 치자 임준서가 천천히 말했다.“어젯밤에 했던 질문 아직 대답해주지 않았어요. 누나...”그 소리에 나는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임준서를 쳐다보았다.임준서는 천천히 다가와 나를 짓눌렀다. 뜨겁고 익숙한 느낌이 다시 나를 덮쳤다.“고... 재원?”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너 죽은 거 아니었어?”나는 뒷걸음질 쳤지만 그의 품 안에 갇힌 바람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강효진, 내가 너에 대한 호감도를 조절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나보다 더 독하더라? 투신자살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나는 놀란 두 눈으로 고재원을 쳐다보았다.“내 미션을 어떻게 알았어?”그는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왜냐하면 너무 긴장해서 미친 듯이 뛰고 있었으니까.“널 만난 첫날부터 네 마음의 소리를 들었어.”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속으로 시스템에 수도 없이 질문을 했는데 이 버그를 7년이나 내버려 둔 것이었다.지금 이 순간 나는 고재원 앞에 알몸으로 발가벗겨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임준서는 내 마음을 진작 꿰뚫어 본 듯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어루만지면서 차갑게 웃었다.“죽은 다음에 집에 갈 생각이었지? 근데 난 널 놓아줄 수 없어... 너랑 같이 투신하고 눈을 떠보니까 보육원이더라고. 그러다가 나중에 테이프 커팅식에서 널 봤고 이름을 알게 되었어.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도 붙였고. 내 운이 이렇게 좋을 줄은 정말 몰랐어. 진짜로 널 찾다니...
잘생긴 남자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설령 그가 올해 갓 성인이 된 남자라도 말이다.‘행동거지와 학업이 뛰어난 고아를 후원하는 일은 나 같은 돈 많은 여자들이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편히 살게 집 하나 마련해주는 것도 일도 아니지. 난 절대 얘가 반반하게 생겨서 데려온 게 아니야.’한창 나에게 자기 최면을 걸던 그때 함께 집으로 온 임준서가 갑자기 말했다.“누나 집이 엄청 큰데요?”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자꾸만 저도 모르게 쳐다보았다.임준서는 집안을 둘러보다가 불쑥 말했다.“누나, 배고파요? 국수 한 그릇 말아줄까요?”“아니, 괜찮아. 와서 밥해달라고 후원한 게 아니야.”임준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서서 국수를 한 움큼 집어 환하게 웃었다.“누나 국수 안 좋아해요? 아까 냉장고에 있던데.”나는 그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임준서는 주방으로 가서 가스 불을 켰다.“누나, 배고파요?”배고프지 않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임준서가 피식 웃었는데 웃는 것조차 아주 매력적이었다.“금방 돼요.”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가 절대 고재원이 아니라고 다시 한번 되뇌었다. 고재원은 이렇게 다정할 리가 없으니까.그런데 임준서는 국수를 만든 게 아니라 반찬을 뚝딱 만들었다.오늘 온 하루 제대로 된 식사조차 하지 못했다. 요리 솜씨가 어찌나 뛰어난지 나는 허겁지겁 먹었다.임준서는 맞은 편에 앉아서 한 손으로 턱을 받쳐 들고 나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천천히 먹어요.”그러고는 다른 한 손으로 내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주었다.나는 순간 마음이 설렜다. 데려온 연하남이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해준 음식이 너무도 맛있었다.어느덧 잠잘 시간이 되었다.임준서가 이젠 성인이 되었기에 새 거처로 옮겨도 무서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여 마음 놓고 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한밤중에 임준서가 내 방문을 슬쩍 열고 들어왔다.“누나, 나 무서워요.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중저음은 마치 마력이
7년 전, 나는 구원 소설 속으로 들어가 여자주인공 임시연이 되었다. 나의 미션은 구원 소설 속 빌런인 남자 주인공 고재원을 공략하여 음험하고 속이 사악한 빌런을 밝고 명랑한 소년으로 바꾸는 것이었다.나에 대한 호감도가 100%에 도달하면 나는 상금 200억을 받을 수 있다.하지만 공략이 7년이나 이어졌지만 되돌아오는 건 집착과 병적인 괴롭힘이었다.머릿속에 고재원이 했던 마지막 한마디가 또 떠올랐다.“강효진, 죽어도 날 떼어낼 생각 하지 마.”내가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소년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다시 한번 물었다.“묻잖아요. 누구냐고.”나는 그제야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놀란 두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난...”무의식적으로 도망가려고 뒷걸음질 친 그때 누군가 갑자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보니 보육원 원장이었다.“임준서, 버릇없게 굴면 안 돼. 이분은 강 대표님이셔.”“임준서?”“네. 이 아이도 우리 보육원에서 자랐는데 올해 18살이에요. 아쉽게도 입양 기회를 놓쳤죠. 지금 여기서 대학교에 다니는데 여름 방학이라 일손을 도와주러 왔어요.”원장의 소개를 듣고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재원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임준서. 이름 예쁘네.”나는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거두고 임준서를 다시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꽤 잘생긴 얼굴이었는데 고재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임준서의 눈빛이 어둡긴 해도 깨끗하고 맑았다. 하지만 매번 나를 볼 때마다 고재원의 두 눈에는 욕망만 가득했다. 두 사람은 완전히 달랐다.그리고 고재원은 절대 나와 저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지금처럼 날 경계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항상 나의 손목을 잡고 영원히 그의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강요했다.내가 임준서에게 관심을 보이자 원장은 임준서를 내 앞으로 잡아당겼다.“강 대표님이라고 불러. 아니, 아니. 누나라고 불러.”소년의 키가 커서 나를 내려다보았고 두 눈에 궁금함이 가득했다.“누나. 왜 자꾸 그렇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