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후 나는 재벌이 되었다: Chapter 251 - Chapter 260

2631 Chapters

제251화 발표해야 할까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기자가 전보다 많이 수그러진 말투로 물었다.“그럼 문강훈 교수가 발표한 영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소은정이 지사의 표절을 인정한다는 건 문강훈 교수가 허위 발표를 했다는 걸 의미한다. 뭐 어느 업계에서나 거짓말은 질타를 받을만한 일이지만 특히 학계에서 연구 성과 표절 및 허위 발표는 말 그대로 금기였다.소은정은 자신만만한 미소로 대답했다.“거성 프로젝트의 핵심 기술은 문강훈 교수가 개발한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해당 기술의 핵심 개발자, 천재 물리학자 소은찬 씨를 소개합니다.”소은찬? 생각지 못한 이름에 기자들은 리액션조차 할 수 없었다.이때 기자 회견장의 문이 열리고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천천히 들어왔다. TV나 잡지에서나 보던 소은찬이 지금 바로 눈앞에 있다. 사람들은 보통 과학자라면 두꺼운 안경, 벗겨진 머리, 피곤한 얼굴 등을 연상하게 되지만 소은찬은 지금 당장 화장품 CF를 찍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깔끔한 이미지였다. 매체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소은찬이 이런 일로 직접 기자 회견장에 나타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소은찬의 등장과 함께 문강훈 교수의 영상이 조작이라는 사실 또한 자연스럽게 밝혀졌다.유명한 학자, 존경받는 교수... 이 모든 타이틀은 천재 소은찬 앞에서 모두 무력하게 느껴질 뿐이었다.소은찬을 건드린 이상, 아마 문강훈 교수는 학계에서 영원히 퇴출될 테지.소은찬은 기자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잠깐 멈춰 선 뒤 단상 위로 올라갔다.“앉아...”서로 시선을 마주친 두 남매가 싱긋 웃었다. 물론 기자들이 이 순간을 놓칠 리가 없었다.“뭐야, 이 달달한 분위기...”“설마 은찬님과도...?”“저도 은찬님 만나고 싶어요!”“은찬님 사랑해요!” 자리에 착석한 소은찬은 싱긋 웃으며 이번 사태를 해명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임춘식과 박수혁은 표정이 복잡미묘했다.임춘식이 박수혁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진짜 소은찬 씨를
Read more

제252화 하얀 토끼

소은정의 말에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기자들은 몇 초 뒤에야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기 시작했다.“헐! 대박 반전이잖아!”“뭐야, 남매였어? 그럼 은찬님, 저랑 결혼해 주세요.”“은정 언니는 전생에 무슨 나라를 구했길래 오빠 세 명이 다 저렇게 잘생긴 걸까? 우리 엄마 아들이랑 너무 비교된다...”“은찬님이 재벌 2세였다니! 몰랐어!”“평생 놀고먹을 수도 있을 텐데 과학기술 발전에 이바지하시는 은찬님, 존경합니다!”“언니, 저희 준열 오빠 아직 기억하고 계시죠?”......소은정의 발언에 댓글장도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자회견은 뜻하지 않게 30분 더 연장되었다.임춘식이 박수혁의 소매를 잡아당겼다.“들었어요?”박수혁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두 눈을 번쩍 떴다. 머릿속에는 방금 전 소은정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되어 울려 퍼졌다.소은정, 소은찬... 같은 성, 같은 돌림자... 딱 봐도 남매인데... 평소의 그였다면 진작 의심하고 눈치챘겠지만 질투에 눈이 멀어 방금 전에야 알게 되다니...공식적인 자리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눈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는 숨길 수 없었다. 방금 전, 소은정이 소은찬의 손을 잡는 순간, 기자 회견장에서 박차고 나갈 뻔했다.“남매사이일 줄은 몰랐네요. 전 또 소은정 씨가 저런 스타일 좋아하는 줄 알았죠...”임춘식의 깐죽거리는 목소리도 더 이상 짜증스럽게 들리지 않았다.“은정이는 워낙 눈이 높으니까요...”눈이 높으니까 날 좋아했지.박수혁의 말에 임춘식은 고개를 저었다. 이 무슨 왕자병 말기 환자 같은 발언이란 말인가?오늘의 기자회견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박수혁 대표의 보기 드문 미소와 소은찬의 등장, 그리고 드디어 밝혀진 소은정, 소은찬 두 사람의 사이까지. 예상치 못한 수확에 기자들도 싱글벙글이었다.기자회견을 한 이상,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회사로 돌아가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거늘, 속이 타들어가는 임춘식의 비서와 달리 박수혁, 임춘식은 너무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현장
Read more

제253화 불운

뭐?당황한 소은정이 고개를 들었다.아니야, 별말씀을... 당연히 이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미친 자식의 행보는 예측하는 게 아닌가 보다.소은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응, 말로만.”말을 마친 소은정이 돌아서자 박수혁이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네가 믿든 안 믿든 그날 밤 송지현이 꾸민 일... 정말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박수혁은 이런 일을 일일이 마음에 담아둘 만큼 소심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그럴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소은정과 관련된 일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잊혀지지 않았다.그를 향한 불신의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신뢰가 얼마나 절망적인 것임을 느낀 박수혁은 이렇게라도 변명을 하고 싶었다.박수혁의 말에 소은정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표절 사건이 터져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날 밤 일이 다시 떠올랐다.박수혁이 왜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해명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박수혁과 연관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고 소은정은 생각했다.“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다 지난 일이잖아?”기자회견이 끝나고 문강훈은 학계에서 완전히 퇴출되었다. 칩 관련 기술 파일을 빼돌린 범인은 바로 문강훈 교수의 상간녀, 거성그룹의 인턴 직원이자 심채린과는 먼 친척 사이였다.범인은 경찰에 연행되었고 진한 지사는 파산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이에 소찬학은 몇 번이나 회사 앞으로 찾아와 소찬식을 만나겠다며 난리를 피웠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나도 소씨 집안 사람이라고!”그 소란에 사무실에서 디저트를 먹고 있던 소은정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경비라도 불러서 내보낼까요?”우연준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회장님의 동생이라 대놓고 말은 못 하지만 다른 직원들의 불만도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소은정은 진한 지사에서 보낸 사진을 바라보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삼촌더러 들어오시라고 하세요.”우연준은 살짝 의아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하, 이제야 날 만나주는 거냐? 넌 피도 눈물도 없어
Read more

제254화 당연히 가야지

소은정의 말에 소찬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 그걸 알고 있었어?”지분이 얼마 없는 주주들과 접촉하며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들키다니.“삼촌, SC그룹은 저희 가문의 가업이 아니에요. 온전히 아빠 스스로 자수성가로 이루신 거죠. 솔직히 삼촌에게 돈 한 푼 주지 않아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어요. 삼촌이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아빠는 전부 알고 계세요. 그럼에도 가만히 계셨던 건, 삼촌과의 우애 때문이었죠.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하세요. 남아있는 일말의 가족의 정마저 사라지기 전에.”소찬학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평소 당당하던 모습과 달리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눈동자는 후회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삼촌도 저희 집안이 돈이 그 두 여자 손에 들어가는 건 싫으시죠?”소은정의 질문에 소찬학은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떴다. 그제야 소은정은 소찬식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제 집에 돌아오셔도 돼요!”사무실로 들어온 우연준이 물었다.“심청하 모녀를 당장 수배할까요?”진한 지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산을 들고 튄 사람들이다. 이대로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아니요. 삼촌이 하게 내버려 둬요. 자기 손으로 직접 해야 더 뼈저리게 느끼실 테니까.”지금까지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통해 그룹의 직원, 이사들은 더 이상 소은정을 낙하산, 곱게 자란 아가씨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룹의 명예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모습도 꽤나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소은호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소은정의 칭찬을 늘어놓을 정도였다.태한그룹, 박수혁이 회의실에서 나오자 이한석이 바로 그 뒤를 따랐다.“대표님, 글로벌 비즈니스 회의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미리 스케줄 조정할까요?”글로벌 비즈니스 회의란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가들이 모이는 프라이빗 파티로 극소수의 회원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고급스러운 블랙톤의 초대장을 힐끗 바라보던 박수혁이 물었다.“다른 회원과 함께 참석할 수도 있다고 했었지?”이에 이한석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그
Read more

제255화 아직 50초 남았어

소은정의 대답에 우연준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박수혁 대표가 있는 곳이라면 천국이라도 마다하실 것 같던 분이 이런 결정을 내리시다니.소은정은 초대장을 꽉 쥔 채 생각에 잠겼다.박수혁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렇게 잘해주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 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네 영혼까지 쪽쪽 빨아먹고 버려주겠어.“비행기 티켓 예매해 줘요...”“아, 그게... 이 비서 말로는 박수혁 대표가 대표님 티켓까지 전부 예매하셨답니다. 바로 공항으로 가시면 된다고...”우연준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내가 무조건 갈 줄 알고 있었단 말이지? 여우 같은 자식...소은정은 초대장을 들고 소은호의 사무실로 향했다.“오빠, 박수혁 그 자식이 나한테 이런 걸 보냈는데 나도 가보고 싶어.”초대장에 적힌 글귀를 확인한 소은호가 피식 웃었다.“좀 더 경력을 쌓으면 오빠가 직접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뭐 네가 정 원한다면야 얼마든지.”“그럼 오빠도 이번에 같이 가는 거야?”소은정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소은호는 서랍을 열더니 지금까지 받은 초대장들을 펼쳐놓으며 말했다.“해마다 이렇게 초대장을 보내긴 하는데. 한 번도 안 갔어. 난 그런 데 가면 그렇게 기가 빨리더라.”그녀가 욕심내는 기회가 소은호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파티에 불과하구나라는 생각에 소은정은 짐짓 입을 삐죽거렸다.이틀 후, 소은정은 Malo 숄을 걸친 소호랑과 함께 공항에 나타났다. 괜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까 싶어 꽁꽁 감싸두었지만 처음 와보는 공항이 신기한지 몰래 고개를 쏙 내밀곤 했다.“착하지. 도착하면 마음껏 놀게 해줄 테니까 조금만 참자?”하지만 아무리 숨겨도 소호랑의 존재는 역시나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소은정은 그저 호랑이 모양의 스마트 스피커일 뿐이라고 해명했고 소호랑도 이에 장단을 맞추며 소은정의 손바닥 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소란 끝에 체크인에 성공한 소은정이 속삭였다.“잘했어.”비행기에 오른 소은정이 텅 빈 비즈니스석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문자 알람이
Read more

제256화 사망자 명단의 그 이름

태한 그룹.박수혁이 사무실을 나왔을 땐 이미 해가 질 무렵이었다. 창밖 나뭇가지에는 붉은 석양이 비스듬히 걸려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퇴근길이었으나 그는 40분 후 프랑스 행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소은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친 그가 이한석에게 서명할 서류를 가져오라 요청하였고, 노크를 하고 들어올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그는 허둥지둥 사무실에 뛰어 들어왔다. 오랫동안 그를 보좌하며 단 한 번도 이런 추태를 보인 적 없던 그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박수혁을 바라보았다.“대, 대표님…….”그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무덤덤한 얼굴을 띄고는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한 시간 전에 연락을 받았는데… 소은정 아가씨께서 타신 비행기에 사고가 났다고…. 알아본 결과 생존자는 없다고… 합니다.”이한석의 목소리는 점점 먹어 들어가 끝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박수혁의 뒤로 크게 뚫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석양 빛에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붉은 태양빛과 정반대로 사무실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어두웠다.그의 안색은 점차 어두워졌고, 그윽하던 눈동자는 폭풍을 맞닥뜨린 듯 흔들려왔다.“지금 뭐라고 했지?”그의 목소리는 곧장 가라앉았고, 눈에는 핏발이 섰다.분명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믿고 싶었다.이한석은 자신이 했던 그 말을 다시 내뱉을 기운조차 없었다. 이내 곧 눈시울이 붉어졌다.“사망자 명단에서 소은정 아가씨의 이름을 찾았습니다……. SC그룹 쪽에도 소식이 닿았고, 곧바로 입국하신 소찬식 회장도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가셨다고…….”그의 말이 끝났고, 사무실의 분위기는 더욱더 어두워졌다. 차가운 공기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박수혁은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한석이 서있는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심장이 마치 둔기에 찔린 듯 아파왔다. 피가 끝없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알 수 없는 저림과 떨림만이 느껴졌다.온몸
Read more

제257화 이 세상을 떠난 사람

SC그룹에서는 사고가 난 해역 수색을 위해 10여 대의 자가용 비행기와 수십 명의 용병들을 고용하여 인양 작업을 실시하는 등 희망을 놓지 않았다.그럼에도 모자랐는지 누군가가 손을 써 해역의 수색 범위를 더욱 넓혔고, 상공의 비행기는 곧 백 대가 넘어갈 듯 보였다. 어마어마한 규모는 다국적 기업의 영향력을 확실히 보여주었다.수색에 협력한 이는 박수혁이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소은정은 이 일을 겪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 자책했다. 두려움에 떨지도, 사고를 겪지도, 실종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비행기가 추락하는 순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 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어쩌면, 박수혁을 더욱 원망했을지도 모른다.세상 천지 두려울 것 없던 그 당찬 소은정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차라리 자신이 비행기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바램과 달리 수색대는 며칠째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깊은 해저에서 인양된 비행기의 잔해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부서지고 그을린 잔해물의 형태는 그 순간의 참혹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잔해를 마주한 박수혁은 그나마 남아있던 힘이 전부 풀려버린 듯 휘청거렸다.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끝없이 넓었고, 검푸르고 깊었다. 이따금씩 파도가 휘몰아치며 비릿하고 짠 공기가 훅 끼쳐왔다. 이 순간, 그는 생명이 이렇게나 보잘것없었나, 회의감이 들었다.헬기의 문고리를 잡은 채 잘게 떠는 박수혁의 모습에 이한석이 성큼 나서 그를 붙잡았다.소은정과 지냈던 3년 동안냉담했던 박수혁과 달리 이한석은 소은정과의 접촉이 잦았다. 그는 그녀의 절망과 성장을 곧이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경험을 응원했고, 강인하게 탈바꿈 한 그녀의 모습에 기뻐했다.그런 그녀의 비보에 누구보다 숨이 막혔던 이한석이다. 며칠 동안 쉬지 않고 구조대를 따라 수색에 참여했다. 죄책감과 자책을 느끼면서도 그녀를 찾는 것이 자신이 살아있는 명분임을 알았다.“대표님, 회사에 처리하실 일이 많습니다. 먼저 돌아가시고, 소식이 있다면 제가 즉시 알려드리도
Read more

제258화 넌 호랑이잖아?

수색 구역에서 몇 천리쯤 떨어졌을까. 망망대해 가운데, 인적이 완전히 끊긴 섬이 자리잡고 있었다. 빽빽한 나무들은 푸른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했으며, 숲의 바깥은 파도와 바람만이 존재했다.소은정은 살아있었다. 이 숨겨진 섬을 3일 째 맴돌고 있었다. 목을 제대로 축일 수도 없었고, 당연히 음식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입술이 바싹 말라왔다.소호랑의 애착 스카프는 소은정의 어깨 숄이 되었다. 소호랑은 그녀의 널찍한 코트 주머니 안에 웅크려 있었다.다행히도 그녀는 남들보다 대처가 빨랐다. 비행기가 폭발할 것이라 감지한 그녀는 지체없이 낙하산을 메고는 탈출구의 문을 열었다.처음에는 참사에 휘말린 이들을 불쌍해했으나, 지금은 자신마저 죽을 위기였다. 핸드폰은 진작 바다에 빠져 통신구라고는 없었다.소호랑은 떨어지며 충격이 컸던 것인지 내부의 지능 시스템에 장애가 생긴 듯 보였다. 애초에 신호라 할 것도 없었기에 외부와의 연결은 어려워 보였다.그저 구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이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사람은 일주일은 살 수 있다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녀에겐 곧 한계였다.암초에 털썩 걸터앉은 소은정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란 절망감에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왜 아무도 날 구하러 오지 않는 거야?며칠이나 지났는데, 이렇게나 아무 소식이 없다니. 정말 자신이 죽은 줄 아는 걸까?망할 박수혁은 정말 자신에게 황천길을 맛 보여주고 싶던 걸까? 정말이지 이런 악연이 따로 없었다. 그를 저주하라면 만 번이라도 할 수 있었다.저주도 우선은 살아야만 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자신을 구하러 와준다면 과거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그 때, 소호랑이 코트 주머니에서 머리를 쏙 내밀었다. 작은 발톱이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아왔다. 그 장난기 많던 아기 호랑이가 풀이 다 죽어 있었다. 머리 위 하얗던 털이 잿빛으로 얼룩져 마치 어딘가 버려진 아이 같았다.“기분 안 좋아 보여
Read more

제259화 끊이지 않는 절망

소은정은 절망감 속에서 마지막 희망을 걸고 다시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편한 플랫 슈즈로 갈아 신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숲 속의 나무들은 높이는 물론 높았으며 사람 몇 명이 둘러쌀 정도로 굵직하고 우람했다. 난생 처음 보는 품종이었다.터벅터벅 걷는 와중 나뭇가지에 쓸려 피가 맺혔으나 지금은 작은 상처 따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목숨을 잃을 위기였으니, 당연했다.“소호랑, 근처에 과일이라도 못 찾겠어?”소은정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갈라져 있었다. 이에 소호랑이 실망 가득한 눈빛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무거운 발걸음으로 계속해서 걷자니 온몸이 피곤했다. 빙빙 도는 머리에 그만 발을 헛디뎌 진흙탕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어지러운 머리에 심한 충격이 더해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그런 소은정에 소호랑은 코트 주머니에서 나와 그녀의 주변을 빙빙 돌며 에워쌌다. 그 때, 인기척을 감지한 소호랑이 재빨리 다시 코트 주머니로 몸을 숨겼다.“사람이 있어요…….”소호랑의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려 했으나 제 몸은 이미 통제불능이었다. 재잘거리는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17개 국의 언어를 익힌 그녀였으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 인거지?그러나 상상 속의 구출과는 많이 달랐다.왜 이들은 자신의 사지를 시체 마냥 잡아 끌고 가는 거지?소은정은 예전에 봤던 사진을 떠올렸다. 뚱뚱한 돼지 한 마리가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붙잡혀 그대로 식당에 끌려갔다는….만약 박수혁이 보낸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그에게 감사를 전해야 하겠지만, 제 형제가 보낸 사람이라면 바로 컴플레인 넣어야겠다, 고 생각했다. 프로답지 않은 투박한 동작들은 정말 최악이었다….이 굴욕적인 시간이 꽤 오래 흘렀음에도 이들의 걸음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정신없이 온 몸이 흔들려 안 그래도 고단하던 소은정은 점차 의식을 잃어갔다.……그리고 다시 몇 천리 밖의 해역.박수혁이 불러들인 헬리콥터와 SC그룹에서 불러들인
Read more

제260화 넌 이해하지 못해

박수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은해는 아랑곳 않고 보드카를 두어 모금 더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은정이가 유럽으로 유학 갔을 때, 큰 형은 한 달에 서른 번을 찾아가고 싶어 했어. 둘째 형은 연구 장려금을 전부 줬었지. 나도 그 시간 동안은 유럽 촬영만 하겠다고 억지 부려가며 일 했었어…. 그게 우리랑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랑 결혼하고서 3년을 우리랑 연락을 단절했어. 우리보다도 널 중요하게 여긴 거라고. 근데 이런 결과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소은해는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남은 술을 모조리 들이켜는 그였다. 고요한 공기는 오히려 이들의 숨을 옥죄여왔다.박수혁은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이미 찢겨 나가 떨어진 것처럼, 텅 빈 공허감이 느껴졌다.그 독한 술을 전부 들이켜고서야 소은해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도 이 일이 전부 박수혁의 탓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 비행기를 박수혁이 사주했다는 것이 아님은 여실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소은정이 그 비행기를 타지 않았을 것은 명확했다.비행기를 타지 않았더라면, 제 여동생은 마음껏 돈을 쓰고, 여행을 다니며, 저택도 사고, 섬도 사고…. 살아있을 수 있었을 텐데.벌떡 몸을 일으킨 소은해의 옷자락이 찬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그의 손에서 던져진 빈 보드카 병이 바다로 빠져 저 깊이 사라졌다.“박수혁, 그만 가. 용서고 뭐고 다 늦었어. 네 일상으로 돌아가.”“못 가. 만약이라도 살아있으면…….”처참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박수혁에 소은해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박수혁 넌, 은정이를 전혀 몰라…. 은정이는 수영할 줄 모른다고…….” 만약이란 건, 기대할 수도 없었다. 끝없이 깊은 바다는 진작 그녀를 집어 삼켰을 것이다. 소은해의 말에 박수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왔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바다에 빠졌다. 끝이 어떨지는 모두의 예상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그는
Read more
PREV
1
...
2425262728
...
264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