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익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엄마 밑에 그런 딸이 나온 거죠. 그런 엄마가 딸을 제대로 교육시켰을 거라고 생각해요?”“아니요.”예선은 입술을 오므리고 헛헛한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죄송합니다, 사장님. 영내문의 엄마가 겨냥한 사람은 저인데 뜻밖에 사장님까지 끌어들여서 피해를 끼치게 되었어요. 죄송해요.”“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우리가 마음에 한 점 부끄럼이 없으면 됐죠. 원래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예측이 잘 안 되는 법이에요. 스스로 잘 하고 잘 보호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걸로 충분해요.”나익현의 대답을 듣고 나니 예선의 마음이 왠지 든든했다.예선이야 원래 잘 흔들리지 않는 성격이라 그렇다 쳐도 나익현이 이렇게 담담하고 털털할 줄은 몰랐다.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도 그럴 것이 사업을 하면서 온갖 경험을 겪었을 테니 이런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은 애초에 고민거리도 되지 않을 만했다.“사장님, 사무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던데요.”예선이 궁금해하며 물었다.나익현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예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마도 그 여자가 또 찾아온 모양이에요. 예선 씨를 찾아 또 행패를 부리려 했던 것 같아요. 내가 이미 사람을 시켜서 다 처리했어요.”나익현은 점점 표정이 굳어지며 말을 이었다.“예선 씨,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며칠 전에 영내문의 엄마가 예선 씨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는 걸 보고 뭔가 또 행패를 부리겠구나 싶었어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진 않아요.”나익현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예선에게 조언했다.예선도 나익현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안 그래도 당분간 친구 집에 가서 지낼 생각이에요. 그러면 좀 안심이 될 것 같아요.”나익현이 머뭇거리며 물었다.“그 친구 집이라는 게 소군연의 집을 말하는 거예요?”“아니요.”예선이 바로 부정했다.“내 친구 소만리요. 사장님도 아시잖아요.
소만리가 이렇게 묻자 예선의 마음속에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소만리, 왜 그래? 왜 그렇게 물어?”예선은 밀려오는 불안감에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나 어젯밤에 군연이랑 연락했어. 이거 봐.”예선은 긴장된 표정으로 소만리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분명히 어젯밤까지만 해도 나랑 연락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소만리는 급히 예선의 마음을 달래며 말했다.“예선아, 긴장하지 말고 그거 나 좀 보여줘.”소만리는 예선의 핸드폰을 받아들고 소군연이 어젯밤에 예선에게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예선아, 최근에 소군연 선배랑 통화한 적 있어?”“없어.”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녀의 얼굴에는 점점 더 불안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소만리,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군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소만리는 타들어가는 듯한 예선의 눈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예선아,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소군연 선배가... 실종됐어. 그렇지만 아무 일 없을 거야.”예선은 소만리에게서 핸드폰을 받아들고 바로 소군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여전히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예선은 두 번 더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소군연과는 연결되지 않았다.그러나 잠시 후 소군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예선, 내가 지금 일이 좀 있어서 나중에 연락할게.”말투로 보아 이것은 진짜 소군연이 보낸 답장 같았다.“예선아, 알았다고 얼른 답장해 줘.”소만리가 옆에서 예선을 재촉했다.예선은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소만리의 말에 얼른 답장을 보냈다.그러나 그 후 그쪽에서는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오지 않았다.예선은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정신없이 소만리를 따라 그녀의 사무실로 들어온 예선은 기모진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을 보았다.기모진의 표정이 매우 냉랭하게 가라앉아 있었다.기모진은 소만리와 눈을 마주친 후 전화를 마무리하고 끊었다.“모진, 어
”이게 사실이야?”예선은 눈앞의 메시지를 보고도 믿을 수 없었고 납치범이 왜 소만리에게 몸값을 요구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 모진한테 이 번호를 추적해 보라고 했는데 확실히 뭔가 문제가 생기긴 한 것 같아.”소만리의 말을 들은 예선은 더욱더 불안해졌다.“안 돼. 지금 바로 군연의 집에 가 봐야겠어. 군연이 정말 납치당했는지 직접 확인해야겠어!”예선은 말을 마치자마자 급히 돌아섰다.“예선아, 나랑 같이 가.”소만리가 예선을 뒤따랐다.기모진도 말 없이 그들을 따라갔다.지금 이 상황에서 소만리가 눈앞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그였다.이 납치범은 소만리에게 돈을 요구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소군연의 집 앞에 도착했다.예선은 얼른 차에서 내려 대문 쪽으로 달려갔다.마침 소군연의 모친이 안에서 급하게 뛰쳐나오고 있었다.그녀는 예선을 보자마자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예선, 군연이 널 만나러 간 거 아니었어? 어제 오후에 분명히 널 만나러 나갔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안 돌아왔어.”소군연의 모친은 예선을 보자마자 험악한 표정으로 다짜고짜 물었다.“도대체 군연이가 왜 너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소군연의 모친은 예선에게 모진 말을 내뱉고서야 소만리와 기모진도 함께 왔다는 것을 깨달았고 갑자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오늘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두 분이 이렇게 오셨어요?”“부인, 우린 당신과 말싸움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우리도 소군연 선배를 만나러 온 거예요.”소만리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소군연의 모친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어젯밤 군연이 이 여자를 데리러 나가서 밤새 돌아오지 않았어요. 전화도 안 받고 아무 소식도 없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다짜고짜 내 아들을 만나겠다고 찾아왔으니, 이거 원 영문을 모르겠네요. 지금 농담하는 거예요?”다소 흥분한 소군연의 모친
기모진의 제안을 듣고도 예선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 지금 영내문의 집으로 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바로 가서 그 미치광이를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군연에겐 더 많은 위험이 따를 수 있어요.”“하지만 만약 정말로 영내문의 엄마가 소군연을 납치했다면 네가 영내문의 엄마를 만나는 게 소군연을 더 위험에 빠뜨릴 수 있어.”기모진은 자신이 만류한 이유를 설명했다.“그런데 정말 영내문의 엄마가 사람을 시켜 소군연을 납치한 걸까?”소만리가 마음속에 품었던 의혹을 털어놓았다.“영내문이 소군연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어떻게 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해칠 수가 있어?”“내 것이 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도 갖지 못하게 망쳐버리는 거지. 영내문 같은 이기적인 사람은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예선은 조용히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군연, 제발 무사해야 해.예선은 마음속으로 묵묵히 기도했다.기모진의 말이 일리가 있긴 했지만 소군연이 지금 직면한 위험을 생각하니 예선은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소만리와 기모진을 따라 일단 기 씨 그룹으로 돌아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이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예선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결국 그 길로 바로 영내문의 엄마를 만나러 갔다.그러나 예선은 기모진의 말을 떠올리며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다.그녀는 영내문의 집으로 바로 쳐들어가지 않고 그 근처에서 내린 후 줄곧 은밀히 영내문의 집 앞에서 동정을 살폈다.그 시각 소만리는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예선이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자 예선에게 전화를 걸었다.예선은 지금 기분이 매우 혼란스러워 혼자 밖에 나와 바람을 쐬고 있다고 했다.소만리가 당장 예선이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하자 예선은 급히 만류하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바로 그때 예선은 영내문의 모친이 대문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부잣집 부인들은 으레 운전기사가 목적지로 태워다 주는 것이 보통인데 영내문의
예선의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영내문의 모친이 방금 여기에 내린 게 맞는 것인지 또 누가 그 소리를 듣고 나와 주변을 살필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웅크리고 있던 예선의 귀에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거친 발걸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기 시작했다.잠시 후 예선은 키가 큰 남자가 벽 너머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에이, 벽이 다 허물어졌잖아.”남자는 퉁명스럽게 말했다.“사람을 이런 낡은 곳에 가두다니. 아직 돈도 손에 넣지 못했는데 그 전에 건물이 무너져서 압사할 판이군. 쳇!”남자는 껄렁껄렁한 말투로 불평을 내뱉고는 돌아갔다.예선은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어 남자가 걸어가는 방향을 살폈다.남자의 말로 보아 예선은 정말로 여기에 소군연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역시나 영내문의 모친은 자신의 딸 못지않은 악랄함을 가진 사람이었다.예선은 주위를 한 번 휙 둘러보고 나서야 살금살금 그를 뒤따라갔다.그러나 그녀가 계단을 오른 지 몇 걸음 되지 않아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뒤를 돌아보려고 했을 때 갑자기 눈앞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등 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예선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들어보는 순간 목덜미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한편 예선과 통화를 마친 소만리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예선이 쇼핑을 하러 가진 않았을 텐데 자꾸 시간이 지체되자 소만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결국 소만리는 예선이 영내문의 엄마를 찾으러 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했다.예선의 안전이 걱정된 소만리는 영내문의 집으로 가서 상황을 살펴보기로 결심하고 일어서는데 육경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육경은 기모진에게 보고하기 위해 사무실에 온 것이었다.“사장님, 소군연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육경의 말에 소만리와 기모진은 동시에 의아한 눈빛을 하며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집으로 돌아왔다고
기모진과 소만리가 의혹을 쏟아내자 소군연은 얼굴을 찡그리며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어제 저녁에 예선을 데리러 나갔는데 길에서 다리가 불편하고 게다가 가족과 헤어진 노인을 만났어요. 도저히 안 되어서 그 노인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는데 글쎄 집이 그렇게 멀리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예선에게 말하려고 핸드폰을 찾았을 때 알았어요. 핸드폰을 잃어버렸다는 걸. 그 노인을 데려다주고 나서 보니 너무 외져서 택시가 잡히지 않았어요. 나오는 차가 없어서 오늘 아침까지 기다렸던 거예요.”소군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나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어요.”소군연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군연아, 그럼 어젯밤 너 예선이랑 같이 있었던 게 아니야?”“아니에요.”“...”소군연의 모친은 얼굴이 붉어졌다.얼마 전 자신이 예선에게 퍼부었던 말이 떠올라 당황스러웠던 것이다.그녀는 예선이 일부러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예선은 정말로 소군연이 어디로 갔는지 몰랐던 것이었다.“큰일 났어.”소만리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표정이 굳어졌다.그녀는 예선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았다.소군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그래? 뭐가 큰일 났다는 거야?”“누군가 당신 이름으로 예선에게 메시지를 보냈어요. 또 다른 사람은 내 아내에게 협박 메시지를 보냈구요. 두 사람 모두 당신이 납치되었다고 말했어요. 예선은 당신을 납치한 배후가 영내문의 엄마라고 의심했죠. 당신의 안전이 걱정된 예선이 영내문의 엄마를 찾아간 것 같은데 지금 연락이 안 되네요.”기모진이 자초지종을 소군연에게 알렸다.이 말을 듣고 소군연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고 예선에게 전화를 걸려고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찾았지만 텅 빈 주머니를 만지고서야 자신이 핸드폰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핸드폰은 실수로 잃어버린 것 같지 않았다.누군가 의
의식이 흐릿하던 예선은 살을 에는 듯한 서늘함을 느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추위에 깨어났다.어렴풋이 보이는 그녀의 눈앞에 사람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힘겹게 머리를 들어보았다.음흉한 미소를 띤 채 도도하게 걸어오는 얼굴이 보였다.영내문의 모친이었다.예선은 눈을 감고 자신이 쓰러지기 직전의 일을 떠올렸고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역시 당신이었군요.”예선은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그녀가 애써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등 뒤에서 맹렬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다.“아.”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한껏 움츠린 예선은 온몸을 뒤덮은 한기에 벌벌 떨면서도 굴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그녀가 겨우 몸을 일으키자 영내문의 모친은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다가와 세차게 뺨을 때렸다.“천한 년! 이제야 아픈 걸 알겠어? 감옥에 있는 내 딸은 지금 너보다 백 배 천 배는 더한 고통 속에 있다구! 알기나 해?”영내문의 모친은 발을 들어 쓰러진 예선을 향해 다시 한번 발길질을 하며 험악한 미소를 지었다.“예선, 너랑 소만리는 스스로가 아주 총명하다고 생각했겠지. 우리 내문이를 함정에 빠뜨려 자백하게 만들고 결국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감옥으로 보냈지!”영내문의 모친은 예선의 멱살을 잡았고 부들부들 치를 떨며 말했다.“25년이야. 25년. 한 사람의 일생에서 25년이란 세월이 얼마나 긴지 알아? 우리 내문이가 25년 후 감옥에서 나왔을 때 내가 살아있을지 어떨지도 모른다구. 그렇지만 자신을 모함한 사람과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결혼해서 알콩달콩 사는 꼴을 보면 우리 내문이가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영내문의 모친은 포효하며 예선의 멱살을 움켜쥐었다.“이 천한 년! 내 딸을 그렇게 괴롭혀 놓고 네가 편하게 살 줄 알았어? 절대 그렇게 둘 수 없지!”영내문의 모친은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저주를 퍼부었고 옆에 서 있던 건장한 남자 두 명에게 명령을 내렸다.
영내문의 모친은 흉악한 얼굴로 예선에게 말했다.지금 영내문의 모친에게는 온화하고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그녀는 마치 이성을 잃은 악마처럼 미쳐 날뛰고 있었다.예선은 차디찬 바닥에 널브러진 채 영내문의 모친이 퍼붓는 저주의 말을 들으며 힘없이 눈을 감았다.일이 잘못되었다.너무 성급하게 발을 내밀었던 것이다.예선은 소만리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영내문의 모친을 서둘러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다.그녀는 기 씨 그룹에서 기모진이 단서를 찾을 때까지 가만히 때를 기다렸어야 했다.함부로 움직인 것이 패착이 되었다.이젠 다 끝났다.여기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예선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행동을 되돌려보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그러나 이때도 그녀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소군연의 안위였다.“군연...”당신 도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이 근처 어딘가에 있긴 한 거예요?돌아서려던 영내문의 모친은 예선이 소군연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다시 발걸음을 돌려 그녀에게 향했다.“다 죽어가는 이때에 남자 생각을 해?”영내문의 모친은 경멸하듯 냉소를 날렸다.눈에는 영내문과 매우 흡사한 음흉한 미소가 가득 흐르고 있었다.“네가 귀머거리가 되기 전에 내가 한 가지 진실을 알려줄게. 소군연은 무사해. 아무 일 없다고. 아무도 그를 납치하지 않았거든. 아마 지금쯤 편안하게 집으로 돌아갔을 거야.”영내문의 모친은 더없이 의기양양하게 말했고 그 말에 예선은 힘겹게 눈을 떴다.“뭐? 군연이 벌써 집에 갔다구요?”“그래, 아마 무사히 집에 도착했을 거야.”“...”예선은 놀란 눈으로 영내문의 모친을 바라보았다.“그럼 일부러 날 이곳으로 끌어들인 거예요?”“너와 소만리가 내 소중한 딸을 모함하기 위해 한 것처럼 나도 그래 봤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소만리도 함께 오길 바랐는데 운 좋게 쏙 빠졌지 뭐야.”영내문의 모친은 언짢은 듯 눈을 흘기며 마음속에 쌓여 왔던 원한을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