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내문의 모친은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남편에게 되물었다.“당신 지금 한 말이 사실이에요? 정말이냐구요!”영내문의 모친은 결국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그녀는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오자 그녀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내문이를 지금 만나야겠어요. 지금 당장!”영내문의 모친이 강하게 고집을 부리자 영내문의 부친은 아는 사람을 통해 영내문과의 만남을 주선했다.영내문이 감옥에 수감된 지 20일쯤 되었다.영내문의 모친은 이런 상황에서 수감된 영내문을 만날 줄은 몰랐다.영내문은 지금 감옥 내에 있는 병실에 있었다.영내문을 보자마자 영내문의 모친이 달려갔지만 주위에 있던 교도관들이 주의를 주었다.“두 분 시간은 단 10분밖에 없어요. 큰소리로 떠들어서도 안 됩니다.”영내문의 모친은 교도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영내문한테만 시선을 꽂은 채 아무렇게나 고개를 끄덕였다.영내문의 부친은 교도관의 말에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교도관이 나가는 것을 돌아보았다.영내문의 모친은 교도관이 나가는 것을 보고 바로 영내문 곁으로 다가갔다.“내문아!”영내문의 모친의 얼굴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내문아, 너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한 거야? 잘못한 사람은 네가 아니야. 그런데 왜 스스로한테 이런 짓을 해? 왜 자해를 하냐구?”영내문의 부친은 영내문이 이번에도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알지만 결국 자신의 친딸이었다.딸의 초췌하고 핏기 없는 얼굴을 보니 아버지로서 그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내문아, 어찌 되었든 간에 스스로를 해치는 짓은 하면 안 돼.”“허허.”영내문은 냉소적인 미소를 보이며 자신의 손목을 힐끗 쳐다보았다.“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엄마 아빠 얼굴 볼 수 있겠어?”이 말에 영내문의 부모는 서로를 쳐다본 후 약속이나 한 듯이 영
영내문의 모친이 하는 말을 듣고 영내문의 부친은 골치가 아픈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찡그리고만 있었다.영내문은 자신의 아버지가 잠자코 있자 더욱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렇게 어렵게 기회를 만들었는데도 왜 아빠는 내 편을 안 들어주는 거야? 아빠가 반평생 이렇게 노력하고 힘들게 쌓아 올린 이유가 뭐야? 다른 사람이 아빠의 소중한 딸 괴롭히는 거 이렇게 가만히 지켜볼 거야?”“내문아, 진정해.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아빠한테 화풀이하지 마. 아빠가 얼마나 널 아끼는지 네가 더 잘 알잖아.”영내문의 모친은 손을 들어 영내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달래었고 영내문의 손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감정이 무너져 내리면서 동시에 증오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내문아, 말해 봐. 엄마 아빠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아빠가 안 들어준다고 해도 엄마가 어떻게든 널 도울 거야! 그 예선이라는 여자, 진작에 눈에 거슬렸어. 그런 여자가 널 이렇게 만들었으니 엄마도 절대 그 여자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혼자 편안하게 살게 놔두면 안 되지!”영내문의 모친이 하는 말에 영내문의 얼굴에는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자신의 모친이 자기 편을 드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손목에 부상을 입은 환자의 얼굴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음흉했다.“예선이가 죽길 바라.”영내문의 입에서 섬뜩한 말이 나왔다.영내문의 모친은 갑자기 정신이 멍해졌고 영내문의 부친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키운 딸이 맞는 것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이렇게 악랄한 사람을 자신이 키웠다니.그의 품에서 자란 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독했다.면회를 마치고 나온 영내문의 부친은 줄곧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돌렸고 아내가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타일렀다.“당신 내문이가 한 말 절대 들어줄 생각하지 마.”영내문의 모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소군연이 보이지 않자 예선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왠지 불길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소군연이 교통사고를 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예선은 즉시 핸드폰을 꺼내 소군연에게 전화를 걸었다.핸드폰을 쥔 그녀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제발,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해. 제발 제발.예선은 마음속으로 쉴 새 없이 되뇌었지만 소군연의 전화는 계속 연결되지 않았다.이 불길한 예감은 예선의 심장을 마음대로 휘저어 놓았다.그녀는 당장이라도 소군연을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녀가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군... 아, 사장님.”나익현을 보는 순간 예선의 기대도 산산이 부서졌다.나익현은 다정하게 예선에게 미소를 지었다.“혼자 서 있길래 무슨 일인가 해서 와 봤어요. 얼굴도 별로 좋지 않아 보여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예선은 초점 없는 눈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안 왔나 봐요. 전화를 했는데 계속 안 받네요.”대충의 상황을 파악했는지 나익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급하신 거 같은데 나랑 같이 예선 씨 친구 찾아봐요.”“아니에요.”그녀가 단칼에 거절하며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예선의 대답이 단호해서 나익현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돌아서려고 했을 때 아는 사람을 본 듯 갑자기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었다.“예 교수님, 아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예 교수님?예선은 누가 왔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아, 자넬 좀 만나려고 일부러 들렀어.”예기욱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예선은 예기욱을 등지고 서서 조심스럽게 몸을 피하려고 발걸음을 천천히 움직였다.그때 예기욱이 그녀를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예선, 예선이니?”예선의 발걸음이 순간 멈칫했다.그 자리에 가
예선은 나익현의 눈을 쳐다보았다.나익현이 자신을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것 같았다.그녀는 예기욱의 제안을 거절하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예기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요? 아, 친구와 약속이 잡혀 있었구나. 그것참 아쉽네. 오늘 네 엄마 생일이어서 우리 가족이 오랜만에 이렇게 다 모여서 단란하게 밥 한 끼 할 수 있을까 했거든.”이 말을 들은 예선은 거절하려던 말이 목구멍에서 딱 걸려 버렸다.“예선아, 괜찮다면...”예기욱은 그래도 예선을 잡고 싶은 모양이었다.그러나 그는 말을 꺼내다가 잠시 머뭇거린 뒤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아니야.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 어서 가 봐. 네 엄마랑 둘이 먹어도 되니까.”“괜찮으시다면 저도 낄 수 있을까요? 교수님?”나익현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웃으며 말했다.그러나 예기욱은 나익현의 농담을 덥석 물었다.“아, 자네만 괜찮다면 얼마든지 같이 해도 돼.”예기욱의 말을 듣고 나익현은 흔쾌히 손짓을 하며 그를 안내했다.“그럼 가시죠. 제 차가 이미 앞에 세워져 있어요.”“운전할 필요 없어. 여기 바로 뒤에 있는 아파트인걸 뭐. 걸어서 가면 몇 분밖에 안 걸려. 애 엄마가 직접 음식을 만들고 있어. 마침 자네와 얘기하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잘 됐군. 우리 천천히 먹으면서 얘기하자구.”예기욱은 말을 마치며 예선을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예선아, 친구 왔는지 전화해 봐. 아빠는 네가 친구 만나는 거 보고 갈 테니까.”예기욱은 못내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했다.예기욱의 다정한 미소를 바라보니 예선의 마음이 갑자기 좋지 않았다.비록 거절을 하긴 했지만 예기욱의 말을 듣고 있자니 왠지 그녀의 마음이 흔들렸다.예선의 마음이 갈팡질팡하던 그때 그녀의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소군연의 메시지였다.“예선, 지금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지금 바로 들어가 봐야 해. 정말 미안한데 오늘은 데리러 갈 수 없을 것 같아. 정말 미안해.”소군연의 메시지를 본 예선
사영인은 상기되어 있는 예기욱의 얼굴을 보고 잠시 의아해하다가 문 쪽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사영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예, 예선아?”사영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문 앞에 서 있는 예선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예선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생신 축하드려요.”그녀는 손에 든 카네이션 꽃다발을 사영인에게 건넸다.사영인은 또 한 번 얼어붙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그녀가 감히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순간이 온 것이다.예기욱은 눈시울이 붉어지는 사영인을 보며 어색한 침묵을 깨뜨려 보려고 입을 열었다.“이거, 무슨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뭘 만들고 있었던 거야? 밖에까지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하네.”예기욱의 말을 듣고 사영인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예선을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예선아, 어서 들어와. 여긴 원래 네 집이야. 언제든지 와도 돼. 이 집 문은 너한테 항상 열려 있어.”사영인은 꽃다발을 받아들고 함박웃음을 보였고 나익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나익현 씨도 어서 들어와요. 손님을 초대하는 게 서툴러요. 이해해 주세요.”“별말씀을요. 오늘은 여사님 생신이잖아요. 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이윽고 나익현은 축하의 말을 덧붙였다.“제가 케이크 말고 다른 선물은 준비를 못 했어요. 죄송해요. 그렇지만 오늘 생신을 맞이해 온 가족이 모이신 거 정말 진심으로 축하드려요.”“고마워요. 정말.”사영인의 얼굴에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그녀는 지금 이 순간 정말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예선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꽃다발을 들고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그녀였으니 하늘을 나는 기분일 것이다.집으로 돌아온 사영인은 얼른 꽃병을 가져와 꽃을 다듬은 다음 우아하게 꽃병에 꽂았다.예선은 사영인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았다.사영인이 지금 이 순간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그러면서 어쩌면 이것이 오랫동안 사영인이 꿈꿔 왔던 행복일지도 모
”무슨 소원 빌었어?”예기욱이 농담하듯 넌지시 물었다.사영인은 그저 포근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예선을 바라보았다.“말을 하면 이뤄지지 않을지도 몰라. 난 내 소원이 곧 이뤄질 거라 믿어.”예기욱은 사영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던 예선과 나익현도 대강은 눈치를 챘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자, 음식들 들어요. 맛이 어떤지 한번 드셔 보세요. 이 두 접시는 예선이 직접 만든 거라 나도 궁금하네.”사영인은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이 말에 동조하듯 예기욱과 나익현은 젓가락을 들어 예선이 만든 음식을 맛보았다.맛을 본 두 사람의 평가는 모두 똑같았다.“예선 씨 요리 솜씨가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는데요. 너무 맛있어요. 아주 훌륭해요. 정말.”나익현이 감탄하며 칭찬을 늘어놓았다.예기욱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동의했다.영민하게 생긴 그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물론이지. 내 딸은 뭘 해도 아주 특출나다니까.”별다른 생각 없이 말을 내뱉은 예기욱은 갑자기 자기가 말을 잘못한 것 같다고 느꼈고 긴장한 표정으로 예선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예선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조용히 콜라를 마시며 음식을 들었고 그제야 예기욱도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영인이 보기에는 딸을 향한 자신과 예기욱의 애정 표현에 예선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식사 후 사영인은 예선, 예기욱, 나익현에게 케이크를 가져왔다.네 사람은 거실에 앉아 케이크를 먹었다.그러나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아 조용한 정적만이 네 사람을 맴돌았다.그러다 결국 예기욱이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자네, 사진 좀 찍어주겠나?”예기욱이 나익현에게 부탁했고 나익현은 즉시 대답하며 일어나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사영인은 약간 조마조마해하며 예기욱을 힐끔 쳐다보았고 뒤이어 조심스레 예선에게 물었다.“예선아, 괜찮아?”예선은
예선은 현관 문 앞에 서 있는 영내문의 모친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영내문의 모친이 여기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그녀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영내문의 모친은 예선과 함께 서 있는 나익현을 보고 한껏 비꼬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예선. 내가 정말 널 얕잡아 봤었네. 아니 모두가 당신을 과소평가했어.”예선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그래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어서 얘기해요.”예선의 도도한 태도를 보고 영내문의 모친은 극도로 기분이 상했지만 일부러 침착한 척하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네가 내 딸을 모독하고 헐뜯는 바람에 사람들은 내 딸이 여우같이 악랄하고 사악한 여자라고 생각해. 모든 사람들이 우리 내문이가 신중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그런데 네가 뭔데 내 딸을 그렇게 모독할 수 있어? 무슨 자격으로? 넌 소군연을 꼬셔서 내 딸한테서 빼앗더니 지금은 또 나익현이랑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거야? 그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욕하냐구? 넌 얼마나 결백하길래?”“부인, 우리 두 집안이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란 걸 굳이 따지진 않겠어요.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나와 예선 씨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부인한테 그런 모욕을 받을 만한 사이가 아니라구요. 그냥 가는 길에 예선 씨를 데려다준 것뿐이에요.”나익현이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영내문의 모친은 당연히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사장님이 한밤중에 직원을 아파트 현관문 앞까지 바래다준다구요? 지나가던 강아지가 웃을 일이네요. 난 절대 안 믿어요!”“사장님 말이 맞아요. 사장님이 가는 길에 집에 바래다준 게 뭐가 어떻다는 거예요? 당신이 믿거나 말거나 나랑은 아무 상관없어요. 다시는 내 집까지 와서 날 귀찮게 하지 마세요. 다음에 또 이런 짓을 한다면 그땐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예선은 엄중하게 경고하며 고개를 돌려 나익현을 향해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사장님, 오늘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데려다주셔
예선은 집으로 들어간 후 얼른 샤워를 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습관적으로 소군연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나익현한테서 온 메시지를 보았다.나익현은 방금 영내문의 모친이 또 찾아와서 예선이 무서워할까 봐 염려되어서 일부러 안부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예선은 나익현의 다정함을 고맙게 여기며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그녀는 그와의 대화창을 보면서 문득 아까 그가 자신에게 보낸 사진에 눈길이 갔다. 가족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진이었다.사진 속 사영인과 예기욱의 눈에는 예선을 향한 감출 수 없는 기쁨이 가득 들어 있었다.그것은 지난 세월 그들의 가족이 잃어버린 기쁨이었고 어쩌면 그토록 바라왔던 세 사람의 모습이었다.하지만 그렇게 자식을 아끼는 사람들이 그땐 왜 그리도 매몰차게 자식을 버렸을까?예선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그녀는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그녀는 우울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사진을 바라보았다.그때 나익현이 사진을 두 장 더 보내왔다.이번에는 네 명이서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사장님이 여기 있으니 좀 이상해.”예선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나익현은 예기욱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고 친분이 있는 사람의 가족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일이 그리 이상할 것까진 없는 것 같았다.예선은 소리 없이 나직이 웃었다.그러다 갑자기 소군연에게서 아직 답장이 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왠지 걱정이 되었고 결국 소군연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생각했다.그때 마침 소군연에게서 소식이 왔다.“미안해, 예선. 내가 바빠서 이제야 여유가 생겼어. 오늘은 일단 쉬어. 나도 씻고 자야겠어.”소군연이 보내온 답장을 읽고 또 읽다 보니 예선의 마음속에선 예상치 못한 상실감이 밀려왔다.메시지에서 왠지 모를 서먹함도 느껴졌다.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억을 잃은 그가 아니던가.기억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