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나다희는 영내문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는데 메시지 속에는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예전에 예선의 남자친구가 회사 로비로 온 적이 있어서 나다희는 예선의 남자친구 얼굴을 알고 있었다.영내문이 보내준 사진을 보니 바로 그때 예선의 그 남자친구였다.두 사람은 동일 인물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영내문이 보내준 소군연의 사진은 보아하니 영내문이 몰래 찍은 것 같았다.“세상에, 이런 우연의 일치라니.”나다희가 얼떨떨해하며 말했다.나익현은 가까이에서 나다희의 이런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했다.“소 씨 집안 도련님 노릇도 참 쉽지 않구만.”“오빠 지금 뭐라고 그랬어? 오빠 혹시 예선 언니 남자친구 알아?”“소군연이잖아. 경도 4대 귀족 중 하나인 소 씨 집안 도련님. 항상 겸손하고 점잖은 사람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지. 학교 다닐 때부터 그 사람에 대해 들어왔었어.”“그 남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나다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인성도 좋고 처신도 아주 잘해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지.”나익현이 소군연에 대해 꽤나 상세히 설명했다.그러나 나다희는 오히려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원래 그렇게 잘난 남자였구나. 그럼 오빠보다 잘났다는 거야?”나익현은 나다희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되물었다.“나보다 잘났냐고?”“그래, 내가 원래 오빠랑 예선 언니 엮어주려고 했거든. 그런데 알고 보니 예선 언니한테 남자친구가 있는 거야. 게다가 그 남자친구가 그렇게 완벽하고 대단한 사람이라니 예선 언니를 내 올케언니로 삼을 생각은 물거품이 되었지 뭐야.”나다희가 유감스럽다는 듯 탄식했다.나익현은 커피를 홀짝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퇴근 후 아파트로 돌아온 예선은 소군연이 집에 와 있는 것을 보았다.소군연은 그녀를 위해 일찌감치 그녀의 아파트로 와서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들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한 상 차려놓고 양초를 켜서 로맨틱하고 은은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있었
영내문을 따라 호텔 약혼식장으로 들어가는 이 사람의 그림자를 보며 예선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금요일 나다희에게 남자친구의 가짜 약혼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던 것을 떠올린 예선은 눈앞의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고 뭔가에 홀린 듯 그대로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그러나 예선이 약혼식장 입구에 도착했을 때 문을 지키던 경호원이 그녀를 가로막고 초청장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물론 예선은 초청장 같은 건 없었다.그녀는 한쪽 옆으로 가서 소만리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고 소만리는 상황을 대충 듣고는 예선에게 그 자리에서 딱 기다리라고 말했다.이윽고 호텔 로비 매니저가 급히 달려와 약혼식장 입구에 서 있던 예선을 보자마자 바로 인사를 하며 말했다.“예선 씨 되십니까?”예선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안녕하세요. 방금 사모님께서 전화로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얼른 이쪽으로 들어오세요.”예선은 자신이 약혼식장으로 들어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깨닫고 감사의 인사를 한 뒤 무사히 약혼식장 안으로 들어갔다.약혼식장은 굉장히 시끌벅적했다.소 씨 가문과 영 씨 가문은 모두 경도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이었다.약혼식은 비록 허울뿐인 가짜였지만 약혼식장은 어디에 내놔도 조금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최고의 인테리어로 장식되어 있었다.예선은 영내문이 소군연에게 진심으로 마음이 있음을 확인했다.영내문은 말로는 소군연을 도와주는 거라고 했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니 영내문의 속내가 시커멓다는 게 훤히 보였다.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심장을 사방에서 조여 들어와 그녀의 마음을 점점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소군연을 향한 영내문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가짜 약혼식을 이렇게 화려하게 한다고?말도 안 된다.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소군연이 원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의 마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예선은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다독여 보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이고, 우리 군연이가 내문이 같이 좋은 여자를 얻었으니, 정말 우리 집안의 경사예요.”소군연의 모친은 영내문을 높이 치켜세웠다.그러느라 마치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훌륭하고 빛나는 남자인지 잊은 것 같았다.영내문은 친지들이 한목소리로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며 수줍게 눈을 내리깔았다.“어머니, 과찬이세요. 그렇게 치켜세우지 마세요. 군연 오빠와 결혼하는 것이야말로 저한테는 크나큰 행운이에요.”“보세요, 이것 좀 보시라구요. 내문이가 이렇게 겸손하다니까.”소군연의 모친은 입이 닳도록 영내문을 칭찬했다.“너처럼 정숙하고 겸손한 며느리가 우리 집에 들어온 건 정말 우리 집안의 복이야.”영내문을 그 말을 듣고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영내문의 모친도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거들었다.“내문아, 앞으로 너 군연이랑 사이좋게 잘 지내야 해. 약혼하면 이제 부부나 다름없어. 나중에 그 예선이라는 여자가 와서 자기가 소 씨 집안 며느리라고 우겨도 똑 부러지게 행동해야 해.”“엄마, 그렇게 하면 안 좋지 않을까?”영내문이 생각에 잠기며 얼굴을 찡그렸다.“군연 오빠는 이 약혼식이 단지 형식적인 것인 줄로 알고 있어.”“왜 안 좋아? 넌 이제 소 씨 집안 며느리인데.”영내문의 모친은 정색을 하며 강조했다.“군연이만 가짜 약혼이라고 생각하지,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진짜 약혼식인 줄 알고 있어!”모친의 말에 영내문의 얼굴은 순식간에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가득 차 올랐고 눈에는 승리의 기쁨으로 넘쳐흘렀다.“참, 그러고 보니 왜 아직도 군연이는 안 보여요?”“내가 가서 찾아볼게요.”소군연의 모친이 나오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자 예선은 심장이 서늘해졌다.깜짝 놀란 예선이 그 자리를 피하려고 얼른 돌아섰을 때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예선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뒤에서는 그녀를 향해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그녀의 손을 잡은 사람은 얼른 그녀를 계단 입구로 끌어당겼다.계단참에
나다희가 이렇게 충동적으로 나올 줄 몰랐던 예선은 얼른 뒤돌아서서 그녀를 붙잡았다.“다희 씨, 가지 말아요.”예선이 자신을 막아서자 나다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 못 가게 해요? 저렇게 양가가 서로 결탁해서 언니 남자친구를 속이고 언니를 험담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요?”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예선은 멍하니 서서 과거에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를 떠올렸다.그녀 자신도 항상 이렇게 직설적이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 성격이었다.예전에 기모진이 소만리를 힘들게 했을 때도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고 소만리를 대신해 따지고 야단을 쳤다.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예선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피식 나왔다.소군연을 사랑한 후로 자신의 날카로운 발톱들은 다 온데간데없어진 것이다.소군연과의 사랑을 위해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걸음씩 양보하고 타협했던 것이었다.소 씨 집안사람들이 자신을 업신여긴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매번 웃는 낯으로 그들을 대했었다.왜냐하면 사랑하는 두 사람의 감정은 결국 두 사람만의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나아가 두 집안 사이의 일이기 때문이다.“예선 언니, 지금 무슨 생각해요?”예선이 멍한 얼굴을 하고 있자 나다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자신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예선을 난처하게 만든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고 결국 나다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미안해하며 사과했다.“예선 언니, 난 언니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언니가 너무 억울한 것 같다는 생각에 내가 너무 흥분했어요.”“나도 다희 씨가 날 위해 그런 거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 일은 우선 조금 생각해 봐요.”“생각해 보는 거 좋아요. 하지만 우선은 적어도 남자친구한테는 알려야 하잖아요. 이 약혼식은 절대 거행되어서는 안 돼요! 한번 코가 꿰어 버리면 뒷일이 너무 번거로워져요.”나다희가 심각한 얼굴로 예선을 타일렀다.예선은 나다희의 말도 어느 정도 일
”그들은 모두 약혼을 가짜가 아닌 정식 과정으로 진행하려고 하는데 언니 남자친구만 순진하게 속고 있는 거라구요.”예선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웃었다.“사람들 마음이 정말 간악해요. 난 내가 양보하는 것이 할아버지의 건강을 호전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날 속이기 위한 새빨간 거짓말이었어요.”“그러니 예선 언니, 더 이상 이런 속임수를 참고 넘어가면 안 돼요. 어서 남자친구한테 사실을 말하세요. 겁내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난 정의의 편, 언니 편이라구요!”나다희는 맹세하듯 결연한 얼굴로 약혼식장으로 예선을 끌고 갔다.약혼식장 안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아마도 이 약혼으로 철저히 쇄기를 박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그들은 또한 많은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어쨌든 소 씨 집안은 경도에서 명문이었기 때문에 뉴스에 나올 만한 기사 거리였다.이때 많은 사람들은 소군연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영내문도 어느새 소군연 옆에 다가왔다.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띠운 채 사리사욕이 가득한 눈으로 갖은 아양을 떨며 눈앞에 훤칠한 남자를 바라보았다.영내문의 모친은 영내문을 소군연의 곁으로 밀어붙이며 영내문과 소군연의 거리를 좁히려고 애썼지만 소군연은 좁히려고 하면 할수록 거리를 두는 모습이었다.그는 눈을 들어 약혼식장을 두리번거렸으나 예선의 모습을 찾지 못하자 얼굴을 찡그렸다.영내문은 소군연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했다.영내문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군연 오빠,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어요?”영내문이 물었다.“아니야. 없어.”소군연은 담담하게 부인했다.“다음에는 무슨 순서야? 나 일이 좀 있어서 그러는데 진행 좀 빨리 하면 안 될까?”“군연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오늘은 너와 내문이의 좋은 날인데. 아무리 큰일이라도 이보다 더 큰일이 어디 있다구! 게다가 내문이 아버지는 지금 호텔 위층에서 중요한 고객이랑 비즈니
소군연은 오늘 기분이 별로 좋지 못했다.왜냐하면 영내문과 가짜이긴 하지만 약혼식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지금 예선의 얼굴을 보고 나니 기분이 확 밝아졌다.“정말? 정말 나와 결혼하고 싶어?”소군연은 예선을 꼭 껴안고 기쁨과 기대를 맘껏 표현했다.예선은 미소 지으며 소군연의 품에서 나와 소군연의 다정한 눈빛을 마주 보았다.“물론이죠. 안 그러면 내가 오늘 여기 왜 왔겠어요? 설마 내가 질투 나서 온 줄 알았어요?”“하하. 맞아. 내 여자친구가 날 못 믿고 질투하는 줄 알았어.”소군연은 농담을 했다.“그럴 리가요? 난 당연히 내 남자친구를 믿죠. 하지만 질투가 전혀 나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예선도 같이 웃었다. 그러나 속고 있는 소군연을 생각하니 마음 한켠에 안쓰러운 심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지금 소군연 혼자 유일하게 속고 있는 것이었다.그는 이 약혼이 정말 형식적인 가짜라고 생각했고 영내문이 친절하게 도와주고 있는 거라고 믿고 있었다.할아버지 병세가 악화되지 않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속이고 있는 것이었다.예선은 소군연에게 진실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영내문과의 거짓 약혼식도 여기서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그런데 소군연은 예선의 대답을 듣고 있으니 마음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는 예선과 연애한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지만 평생 자신이 지키고 싶은 단 한 사람이 예선임을 확신했다.지금이 딱 그 타이밍일지도 모른다.소군연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고 대신 심장 박동은 요동치기 시작했다.그는 손을 뻗어 자신의 상의 주머니를 만졌다.소만리가 특별히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해 준 청혼 반지를 지금 예선에게 끼워주고 싶었다.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더 깊숙이 찔러 보았다.그럼에도 거기 있어야 할 벨벳 상자가 만져지지 않았다.소군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
”아니에요. 어머니, 얼른 가요!”영내문이 앞으로 나와 소군연의 모친의 손을 잡고 나가려는 시늉을 했다.소군연의 모친은 그런 영내문의 모습을 더욱 이상하게 여기며 무슨 상황인지 확실히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소군연의 모친은 영내문을 돌려세웠고 멀리서 서로 웃고 떠들고 있는 소군연과 예선의 모습을 보았다.소군연의 모친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소군연의 모친은 불같이 화를 냈다.“너와 소군연의 약혼식장에 버젓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내문아,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내가 바로 가서 내쫓아 버리고 말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소군연의 모친은 말을 마치자마자 화가 난 얼굴로 예선 쪽으로 얼른 걸어갔다.“어머니, 어머니, 가지 마세요.”영내문은 건성으로 소군연의 모친을 말리는 척했지만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숨길 수가 없었다.인기척을 들은 소군연과 예선은 동시에 눈을 들어 뒤를 보았고 예선은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소군연의 모친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타닥!”둔탁한 소리와 함께 소군연은 모친의 손목을 힘껏 잡았다.“엄마, 뭐하시는 거예요!”소군연이 당황해하며 냉랭한 얼굴로 물었다.소군연의 모친은 화가 나서 소군연의 손을 뿌리쳤다.“왜 그걸 나한테 물어보니? 군연아, 너 지금 뭐하는 짓이냐? 영내문은 네 약혼녀야. 앞으로 네 남은 인생을 함께할 사람이라구! 그런데 네가 지금 이 여자랑 여기서 서로 희희낙락하고 있는데 내문이가 어떻게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겠니? 넌 지켜야 할 도덕도 모르니! 저질스럽게! 너 이것밖에 안 돼?”소군연의 모친은 기세를 드높여 소군연을 꾸짖었고 이를 보고 있던 예선은 속으로 정말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저질스럽다고? 도덕이 어떻다고?소군연의 모친은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온 걸까?감히 소군연에게 도덕을 운운하며 비난을 퍼붓다니!저질스럽고 도덕을 모르는 사람들은 분명 그들이었다.
예선은 소만리를 제외하고 이렇게 성심성의껏 자신의 편에 서서 친구가 되어 줄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비록 지금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 것은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다희의 말이 예선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예선은 혼자가 아니었다. 곁에서 이렇게 힘을 주는 친구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했다.예선이 약혼식장에 들어왔을 때 사회자는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고 현장에 있던 내빈들과 친지들도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그들은 소군연과 영내문이 약혼반지를 주고받으며 서로 껴안고 사랑의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기대하는 눈치였다.하지만 소군연은 이런 순서까지 올 계획이 아니었다.게다가 영내문이 마음에 드는 반지가 없어서 끝내 고르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에 반지를 주고받는 절차는 생략할 수도 있었다.소군연이 의아한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 뜻밖에도 약혼녀 들러리가 영내문에게 다가와서 고혹스러운 벨벳 상자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이 상자는 왠지 소군연의 눈에 낯이 익은 것이었다.그가 더욱 의아해하고 있을 때 들러리는 벨벳 상자를 열었다.눈부신 불빛 아래 상자 안에 우뚝 솟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자태를 뽐내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소군연은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왜 이 반지가 여기 나타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어안이 벙벙한 와중에 그가 막 물어보려고 입을 떼려는 찰나 영내문이 영롱한 다이아반지를 보며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어머, 반지 너무 예뻐요. 군연 오빠, 언제 이런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어요? 너무 고마워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영내문의 얼굴에는 기쁨과 행복의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예선은 연단 아래에서 이 광경을 보고 심장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그 반지는 정말 아름다웠고 게다가 그녀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의 디자인이었다.그녀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심정을 아무리 해도 감당할 수 없었다.만약 소군연 집안의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소군연 앞에 서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