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향해 조금씩 다가오는 기여온의 작은 몸짓을 보며 강자풍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기여온이 그에게 가까이 달려오자 강자풍은 쭈그리고 앉아 기여온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여온아, 네가 무사하면 그걸로 됐어.”그는 말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기여온이 무사한 것을 보자 그제야 요 며칠 동안 그를 괴롭혔던 근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다만 소만리와 기모진이 기여온을 집으로 데려간다는 생각에 그의 마음이 다시 한없이 가라앉았다.기여온은 강자풍이 며칠 동안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그에게 다가가 두 손을 들어 가볍게 안겼다.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그의 눈에는 기여온에 대한 걱정과 애정으로 가득 찼다.기모진은 두 사람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심란해졌다.질투심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한 마음이었다.물론 아빠로서 언젠가 자신의 딸이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떠날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자신의 귀염둥이 딸도 크면 누군가를 만나서 언젠가 가정을 꾸리게 되겠지만 그 누군가가 강자풍은 설마 아니겠지?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기모진은 문득 정신을 차렸고 기여온을 바라보는 강자풍의 눈빛을 유심히 살펴보았다.그러나 실상은 그리 복잡할 것도 없는 순수한 모습이었다.마치 큰 오빠가 여동생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처럼 평범하게 보였다.강자풍은 기여온을 잠시 안은 후 아쉬운 듯 손을 풀었다.“여온아, 엄마 아빠한테 가자.”강자풍은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며 기여온의 손을 잡고 기모진과 소만리가 앉아 있는 곳으로 갔다.그는 자연스럽게 기여온을 안고 자신의 옆에 앉혔고 기여온 역시 강자풍 옆에 편안하게 앉아 이따금 고개를 들어 강자풍을 바라보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이 모습은 소만리와 기모진의 눈에 너무나 또렷이 각인되었다.“어떻게 고승겸한테서 여온이를 데려오게 됐어?”강자풍은 호기심
기모진의 물음에 강자풍은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이게 진짜 이유일까?아니다.아마도 아닐 것이다.그에게 사심이 없지 않았다.이 이기심은 정확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여온을 곁에서 멀어지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그런데 그가 무슨 자격으로 고집을 부릴 수 있겠는가?이 아이는 기모진과 소만리의 보배로운 딸이다.당연히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가족이니까.소만리는 넋이 나간 듯한 강자풍을 보며 입을 열어 어색한 침묵을 깼다.“강자풍, 나와 모진은 네가 여온이를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여온이가 가족들이랑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서 우리 가족 모두 너무 걱정하고 있어. 네 심정을 너무 잘 알지만 부모로서의 우리 마음도 좀 이해해 주면 좋겠어.”소만리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기모진의 입장에 서서 강자풍에게 말했다.기모진이 딸을 집에 데려가고 싶어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마음이다.비록 그녀는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 기여온을 세심하게 돌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은 했지만 생각해 보니 엄마로서 딸을 정성껏 돌보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 같았다.강자풍은 소만리의 말을 듣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지금 당장 돌아가서 여온이 물건 다 정리해서 가져올게. 그리고 이반하고 약속을 잡아둘 테니까 여온이의 몸 상태에 대해서 궁금한 것 있으면 자세히 물어봐. 여온이의 몸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이반이니까.”강자풍은 순진무구하게 미소 짓고 있는 기여온을 보았다. 심장이 도려져 나가는 것 같았다.“여온아, 엄마 아빠랑 얌전하게 여기 있어. 오빠가 나중에 다시 여온이한테 놀러 올게.”강자풍은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가려고 했다.그는 소만리에게 기여온을 두고 가라고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았다.오히려 그의 표정은 의외로 평온했고 언행도 고분고분했다.소만리와 기모진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돌아서는 강자풍을 동시에 바라보았다.그러나 강자풍이 몸을 돌
기여온의 눈에 비친 상실감에 소만리의 마음도 덩달아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여온아, 우리 여온이 착하지. 강자풍 오빠 곧 돌아올 거야.”기여온은 눈을 들어 소만리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마치 정말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소만리는 기여온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강조하듯 힘주어 말했다.“엄마가 약속할게. 자풍이 오빠는 꼭 돌아올 거야.”이 말을 듣고 기여온은 그제야 자신의 눈에 가득 찬 상실감을 거두어 내었다.자리에 돌아온 기여온은 줄곧 얌전히 앉아 있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그 모습을 보고 기여온이 강자풍을 기다리고 있는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소만리는 강자풍과 기여온의 첫 만남을 돌이켜보았다.그가 순진무구한 기여온을 기묵비로부터 구해낸 후 두 사람 사이에는 끈끈한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강자풍은 항상 냉소적인 이미지였지만 기여온을 만난 후로 왠지 모르게 점잖게 변하기 시작했다.그는 유독 기여온에게 살뜰히 대했다. 평소 그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심지어 기여온 때문에 강연과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물론 이것은 강자풍이 실제로는 정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강연이 인간성에 어긋나는 일을 할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말리고 비난한 탓에 일어난 일이었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소만리는 또 마음이 약해졌다.“모진, 당신 봤어?”소만리는 옆에 앉은 기모진에게 물었다.“여온이도 많이 아쉬워하는 것 같아.”“응.”기모진도 자신의 딸이 강자풍을 믿고 의지하는 모습을 보았다.“여온아.”기모진은 다정한 눈빛으로 기여온을 바라보았다.“여온이는 기란군 오빠나 동생 보고 싶어 안 보고 싶어?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기모진의 물음에 기여온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기모진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그럼 여온이는 엄마 아빠랑 같이 집에 가서 오빠랑 식구들 다 만나고 싶어? 아니면 계속 자풍 오빠 옆에서 지내고 싶어?”기모진의 질문이 기여온을 난
그 사람은 소만리 일행을 아는 듯 곧장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이윽고 소만리는 이 남자가 이반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는 이반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소만리와 기모진에게 다가왔다.“두 분이 기 선생님과 부인이시죠?”남자가 이반에게 했던 것처럼 공손한 태도로 기모진과 소만리에게 말을 걸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소만리가 물었다.“당신은?”“이 사람은 강자풍의 조수예요.”이반이 남자를 대신해 대답했다.“강자풍의 조수라고요?”소만리는 의아해하며 물었고 점차 뭔가를 알 것 같았다.“강자풍은 안 오는 거예요?”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강 선생님은 갑자기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울 수 없게 됐어요. 강 선생님이 저한테 기여온의 물건을 가져다주라고 했어요. 물건은 차에 있어요. 수고스럽겠지만 기 선생님과 부인께서 저랑 함께 차로 가서 가져가셔야 할 것 같아요.”남자의 설명을 듣고 소만리와 기모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여온을 데리고 커피숍을 나왔다.물건을 주고받는 동안 이반은 슬쩍 강자풍의 조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자풍이 정말 중요한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오고 싶어 하지 않은 거지?”이반은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물었다.강자풍과 이반이 아주 친한 사이임을 알고 있는 조수는 숨김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고 ‘강 선생’이라는 다소 서먹한 호칭으로 바꿔 말했다.“강 선생님은 여온이를 많이 아끼셨어요. 차마 작별 인사를 할 용기가 없으셔서 절 보낸 거예요.”“강자풍이 어린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길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어.”이반은 강자풍의 이런 면이 새삼 놀라운 듯했다.조수는 이 말을 듣고 급히 해명했다.“이반 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강 선생님은 여온이에게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예요. 여온이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저도 여온이가 너무 좋아요. 이렇게 떠나는 것도 너무 아쉽구요.”조수가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하자 이반은 웃기
”당신 혼자 짐 세 개나 들 수 있어? 나 하나 줘.”소만리는 별다른 생각 없이 한 손에는 검은색 상자를 다른 한 손에는 캐리어를 들었다.“여온아, 엄마한테 와. 엄마 아빠랑 같이 방으로 올라가자.”기여온은 소만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이반이 떠난 쪽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소만리의 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만리와 기모진은 기여온이 지금 어떤 심정인지 알 수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곁을 지킬 뿐이었다.호텔로 돌아온 소만리는 검은색 상자를 침대 위에 놓고 기여온을 불렀다.“여온아, 이건 강자풍 오빠가 준 선물이야. 안에 뭐가 들었는지 좀 봐.”기여온은 크고 예쁜 눈을 반짝이며 작은 손을 뻗어 리본을 풀었고 소만리도 옆에서 기여온을 도와주었다.상자가 열리자 소만리는 자신의 눈에 반짝이는 빛이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자세히 보니 그 안에는 큐빅이 가득 박힌 눈부시게 빛나는 왕관이 있었다.기여온은 말을 할 줄 몰랐지만 소만리는 아이의 맑은 눈동자에서 놀라움과 호기심을 보았다.어린 기여온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나 어린아이의 눈에도 이런 예쁜 장식이 달린 왕관은 달라 보였다.이렇게 투명하게 빛나는 크리스탈 왕관은 맞춤 제작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강자풍이 왜 이런 귀한 물건을 여온이한테 보낸 거지?”기모진이 다가오며 말했다. 영롱한 빛을 내는 크리스탈은 한눈에 봐도 진품임을 알 수 있었다.소만리는 보석 디자이너로서 이 크리스탈 왕관의 가치를 더 잘 알아볼 수 있었다.소만리는 기모진의 의혹에는 달리 대답하지 않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기여온에게 다가갔다.“여온아, 마음에 들어?”기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귀여운 볼살 속에 움푹 패인 보조개를 띄웠다.“어린아이에게 이런 선물은 너무 과분해. 가서 강자풍에게 돌려주자.”기모진이 말했고 소만리도 같은 생각이었다.“아마도 강자풍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온이가 건강하고 걱정 없는 공주로 자랐으면 하고
되돌아온 상자를 본 강자풍의 눈에는 실망과 불만의 빛이 뒤엉켰다.기모진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강자풍, 여온이한테 선물을 준 당신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 선물은 너무 과분해.”“과분하다고요?”강자풍은 이 말에 유독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경도 제일가는 갑부가 나한테 이 선물이 너무 과분하다고 말씀하시는군요.”기모진은 강자풍의 말뜻을 알아들었지만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선물의 경중은 내 가문의 배경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강자풍, 네가 얼마나 여온이를 아끼는지 알아. 소만리도 알고 있어. 하지만 이건 여온이한테 어울리지 않아.”기모진은 여전히 완곡하게 거절했다.강자풍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으니 이제 가 보세요.”“그냥 선물만 두고 갈까도 생각했어. 그렇지만 정중하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강자풍은 이 말을 듣고 바로 대답했다.“당신의 감사 인사는 이미 받았으니 이제 가도 돼요.”“그래. 알았어.”기모진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고 그대로 가려다가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너한테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었어. 난 흑강당에 대한 일을 너한테 말하지 못했어. 결과적으로는 나에 대한 너의 믿음을 이용한 셈이 되어서 미안하게 생각해. 네가 나와 소만리를 원망했던 거 다 이해해.”기모진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는 고요히 가라앉았다.잠시 후 강자풍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이미 다 지나간 일이에요.”강자풍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과거의 일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오히려 내가 당신과 소만리에게 감사해야 하는 걸요.”“나와 소만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이번에는 기모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여온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마워요. 여온이는 내가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해 주었고 나에게 살아갈 동력을 주었어요.”이 말을 들으니 기모진은 갑자
하지만 소만리는 기여온의 작은 손에 아까보다 더 많은 반점들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그냥 보통의 피부병이 아닌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기모진도 병원에 도착했다.기여온의 작은 손과 팔에 난 붉은 반점을 보고 기모진의 미간이 깊게 잠겼다.“설마 백혈병과 연관이 있는 걸까?”기모진은 추측을 해 보았지만 어느 것도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소만리의 눈썹도 찡그려졌다.“밤이 늦어서 피부과 진료를 하는 병원이 드물대. 모진, 이제 어떻게 해?”“여온의 주치의한테 가 보자.”“이반 말이야?”소만리도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이반뿐이라고 생각했다.“우리 우선 호텔로 가자. 나 이반의 명함을 호텔에 두고 왔어. 우선 호텔로 가자.”“그럴 필요 없어요.”갑자기 뒤에서 강자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고 강자풍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빠르게 그들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기여온은 강자풍을 보자마자 몸을 움직였다. 소만리에게 자신을 내려달라고 하는 게 분명했다.소만리는 기여온의 의사를 알아듣고 얼른 기여온을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았다.기여온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아이는 주저 없이 강자풍에게 달려갔다.강자풍은 몸을 숙여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여온을 따뜻한 미소로 맞이했다.“여온아.”강자풍의 눈에는 애틋함과 안타까움이 가득 서려 있었다.기여온의 피부에 있는 붉은 반점을 보고 강자풍은 걱정스러운 듯 기여온을 안아올렸다.“이반한테 가 봐요. 만약 붉은 반점이 백혈병과 아무 관계가 없으면 이반이 피부과 의사에게 연락해서 상태를 봐 줄 거예요.”강자풍은 말을 마치고 나서 바로 길을 안내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강자풍의 안내에 따라 그의 차에 올라탄 후 이반이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이반은 술집에 가서 친구들을 좀 만나 볼까 하던 찰나에 마침 기여온의 상황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집으로 온 기여온의 몸 상태를 꼼꼼히 체크했다.“지금까지 많은 아
고승겸의 말에 기모진의 검은 눈썹이 번쩍 치켜올려졌다.기모진은 강자풍의 품에 안겨 있는 딸을 바라보았다.기모진의 눈빛을 보고 소만리와 강자풍은 동시에 뭔가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그들이 의아해하고 있는 사이 전화기 너머 고승겸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소만리는 기모진의 곁으로 다가갔다.“모진, 무슨 일이야?”기모진은 눈을 낮게 내리깔고 근심이 가득한 소만리를 쳐다보았다.그는 소만리에게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소만리는 기모진의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모진, 왜 그래?”기모진은 소만리가 너무 걱정할까 봐 염려되어서 말하기가 꺼려졌다.그러나 그는 과거에 그들 사이에 생긴 많은 오해들이 이렇게 해서 생긴 것임을 돌이켜 보고는 숨기지 않고 소만리에게 말했다.“여온이 몸에 난 반점은 단순 피부병이 아니라 누군가가 손을 썼기 때문이야.”기모진은 차분하게 소만리에게 설명했지만 그의 눈썹에는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뭐라고?”“누가 그런 거야?”소만리와 강자풍은 동시에 충격을 받았고 옆에 있던 이반은 영문을 몰라 그들에게 바짝 다가왔다.“붉은 반점이 누군가 일부러 손을 썼기 때문이라고요? 누가 그런 악랄한 짓을 해요? 어린아이한테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이에요!”이 말을 듣고 소만리의 머릿속이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고승겸이에요? 정말 그런 거예요?”소만리는 기모진을 쳐다보며 물었다.기모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소만리를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속일 수는 없었다.“이 나쁜 놈!”강자풍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고 얼굴빛이 무섭게 어두워졌다.하지만 강자풍은 지금 기여온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킬 수가 없었다.소만리는 불안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고승겸이 방금 전화로 뭐라고 했어?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기모진을 바라보며 소만리가 물었다.“내일 여온이를 데리고 옛 흑강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