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겸이 경고하자 소만리도 이에 지지 않고 경고했다.말을 마친 소만리는 기여온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인사를 했다.“여온아, 안녕.”기여온은 희고 보드라운 손을 들어 소만리를 향해 흔들었다.“엄마.”기여온의 여리고 고운 목소리가 소만리의 귀에 아프게 미끄러졌다.소만리도 안타까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지만 이제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소만리가 떠나자 고승겸은 방문을 닫았고 고승겸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남연풍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고승겸을 보며 긴장하기 시작했다.소만리가 방금 건네준 핸드폰에서 무슨 소리라도 날까 봐 그녀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하지만 불안한 마음도 잠시 남연풍의 머릿속에는 고승겸이 자신을 데리고 F국에 온 진짜 목적이 떠올랐다.고승겸은 남연풍에게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소만리랑 무슨 얘기했어?”남연풍은 정신이 번쩍 든 듯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았다.“내가 소만리랑 할 얘기가 뭐가 있겠어. 여온이랑 잘 지내달란 얘기뿐이지 뭐.”“그래?”고승겸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당신들 사이 좋았잖아. 같이 연합해서 나한테 맞서려고도 했었고 말이야. 방금도 당신들은 날 어떻게 상대할지 상의하지 않았어?”고승겸은 농담을 하듯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남연풍은 그가 진지하게 말하고 있고 게다가 그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와 소만리는 방금 확실히 뭔가 상의하기는 했었다.다만 얼마 되지 않아 고승겸이 나타나는 바람에 많은 얘기를 하진 못했다.“당신과 소만리가 한통속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날 높은 자리에서 끌어내릴 줄은 정말 몰랐어.”고승겸은 한껏 비꼬며 말하다가 옆에 있는 기여온에게 시선을 돌렸다.“엄마 만나서 좋았지? 아빠도 보고 싶어?”기여온은 눈을 깜빡일 뿐 고승겸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왜? 너 아빠 보고 싶지 않아?”고승겸은 시큰둥하게 계속 말을 이었다.
조그마한 어린아이에게 이렇게 크고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을 줄은 몰랐다.남연풍은 눈가가 뜨거워지며 살며시 기여온의 손을 잡았다.“고마워, 여온아. 언니 꼭 행복할게. 여온이도 행복해야 해. 언니는 여온이가 곧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어.”그녀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남연풍이 핸드폰을 무음으로 조정하려고 보니 이미 소만리가 무음으로 조정해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소만리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조심하며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남연풍은 충전기가 따로 없었으므로 배터리 소모를 줄이기 위해 저전력 모드로 바꿨다.그때 핸드폰 화면이 환해지며 소만리의 가족사진이 보였다.무심코 바라본 가족사진에 남연풍의 눈에는 어쩔 수 없는 부러움이 솟아올랐다.다섯 식구가 얼마나 행복했을까.할 수만 있다면 그녀도 다음 생에는 이렇게 온전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고 싶다.소만리는 호텔을 나와 호텔 입구에 잠시 서 있는데 갑자기 강자풍이 나타났다.강자풍이 이곳에 올 줄은 몰랐다.“여온이가 이 호텔 안에 있는 게 맞아?”강자풍은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고승겸이 여온이를 데리고 몇 호실에 있는 거야? 어서 말해 줘.”“강자풍, 네가 여온이를 걱정하는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거망동할 수는 없어. 네가 섣불리 사람을 데리고 올라가서 여온이를 구하려고 한다면 더 큰 사고가 날지도 몰라.”소만리는 침착하게 강자풍에게 일렀다.강자풍은 언짢은 듯 호텔 입구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소만리의 말을 듣고 그곳을 떠났다.강자풍은 차 안에서 소만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방금 기모진이 전화를 했길래 핑계를 댔어.”그는 핸드폰을 건네주며 자신과 기모진이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기모진은 그녀와 아이들에 대한 걱정으로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하지만 소만리는 지금 남연풍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준 상황이었고 쓸 수 있는 전화라고는 강자풍의 핸드폰밖에
강자풍은 소만리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누나, 날 믿어줄 수 있겠어?”소만리는 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넌 내가 여온이를 데려가길 원하지 않는다는 거네. 그런 뜻이야?”“누나, 솔직히 말해서 난 여온이가 누나와 함께 돌아가는 게 너무 아쉽고 안타까워.”“...”이 말에 소만리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그녀는 강자풍의 말에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 그 아이는 보배로운 그녀의 딸이었다.“당신과 기모진, 그리고 당신 가족들이 모두 걱정하고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만약 여온이가 누나와 함께 돌아간다면 앞으로 다시는 여온이를 못 볼 것 같아서 그래.”“어째서 여온이를 다시 못 볼 것 같아? 네가 보고 싶다면 언제든지 와서 만나면 돼. 설마 나와 기모진이 널 말리겠어?”소만리는 의아하게 여기며 물었다.“아니, 나 스스로 다시 경도에 갈 일은 없을 거야.”강자풍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이 말을 듣고 있던 소만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강자풍의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그녀는 강자풍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어떤 것인지 그녀는 헤아릴 수 있었다.소만리는 지금의 강자풍에게는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자풍과 함께 돌아온 후 소만리는 이반의 회신을 기다리고 있었다.지금 상황으로 볼 때 고승겸은 이반의 아버지로부터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않으면 기여온을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이튿날 소만리는 일어나자마자 방 밖에서 누군가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그녀는 황급히 얼굴을 씻고 방을 나갔고 강자풍과 이반이 2층 거실에서 무슨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다.그녀가 다가가자 이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아버지는 고승겸의 친구를 치료할 시간을 도저히 낼
남연풍이 지금 전화를 받기 불편한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만리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점심 무렵 소만리는 마침내 남연풍에게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남연풍은 고승겸이 점심을 사러 나간 틈을 타서 겨우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또한 남연풍은 일부러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고승겸에게 약국에 가서 존재하지도 않는 약을 사 오라고 말했다.이 말을 전해 들은 소만리는 곧장 호텔로 달려갔다.소만리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호실로 가서 바로 벨을 눌렀고 남연풍은 소만리가 온 소리를 듣고 바로 문을 열려고 갔으나 역시나 문이 잠겨 아예 열리지 않았다.“고승겸이 밖에서 문을 잠갔나 봐요. 소만리, 문밖에 뭔가 걸려 있는 거 없는지 살펴보세요.”소만리는 즉시 방문 좌우를 둘러보았고 손잡이에 뭔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승겸은 남연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몰래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모로 공을 들인 것 같았다.소만리는 재빨리 문고리에 묶인 끈을 풀었고 남연풍은 이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소만리는 기여온의 귀엽고 작은 얼굴을 보았다.“엄마.”소만리를 본 기여온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여온아.”소만리는 손을 뻗어 작은 뺨을 어루만졌다.“소만리, 얼른 여온이를 데리고 가세요. 더 늦으면 고승겸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거예요. 아마 곧 돌아올 거예요.”소만리는 기여온의 손을 잡았다.“당신도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요?”남연풍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처음에는 나도 그를 떠나고 싶었어요. 떠나서 다시는 그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나를 데리고 F국에 온 이유가 날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생각을 단념하려고요.”소만리는 남연풍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승겸의 마음속에 그녀에 대한 사랑이 깊고 그녀 또한 그를 향한 마음이 그와 다르지 않음을 소만리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소만리, 내 걱정은 말고 어서 가세요. 고승겸이 날 잘
소만리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승겸에게 들키는 순간 그녀와 기여온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이 더 복잡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기여온의 작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여온아, 엄마한테 더 가까이 붙어. 고개 들지 말고 있어.”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당부했고 곧바로 기여온을 안고 돌아섰다.소만리는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열리는 소리를 들었고 동시에 고승겸의 발자국 소리가 멀지 않은 그녀의 뒤에서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고승겸이 자신의 뒷모습을 알아볼까 봐 너무 빨리도 걷지 못하고 고승겸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최대한 정상적인 걸음걸이로 걸었다.기여온은 고분고분하게 소만리의 말에 따르며 작은 머리를 소만리의 목에 푹 엎드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기여온은 아직 어렸지만 자신의 엄마가 뭔가 걱정하는 것 같아 더욱 힘차게 소만리를 끌어안았다.기여온의 움직임을 감지한 소만리는 고개를 숙이고 아이를 달랬다.“여온아, 겁내지 마. 엄마 여기 있어.”기여온은 작은 머리를 살짝 끄덕이기만 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고승겸은 점심을 사 들고 서늘한 표정을 한 채 방으로 향했다.그는 약국을 대여섯 군데나 돌아다녔지만 남연풍이 부탁한 약은 구할 수 없었다.결국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을 검색해 본 고승겸은 남연풍이 말한 그런 약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그를 속인 것이었다.그렇다면 그녀가 그를 속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를 속이고 무엇을 하려던 것이었을까?고승겸은 생각할수록 수상한 느낌이 들어 발걸음을 재촉했다.소만리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최대한 정상 속도처럼 걷다가 갑자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점점 다급해지는 것을 눈치채고는 고승겸이 자신을 발견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느꼈다.초조한 마음에 소만리가 뒤를 돌아보려던 순간 고승겸도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소만리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엘리베이터를 막 내렸을 대는 고승겸도 자세히
고승겸은 소만리같이 총명한 여자는 분명 모두가 예상하는 뻔한 방식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일부러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할 요량으로 아래쪽 계단을 선택하지 않고 위쪽 계단으로 올라갔을 것이라고 예상했다.그런데 소만리는 고승겸이 생각지도 못한 곳을 선택했다.그곳은 위쪽도 아래쪽도 아닌 바로 계단 통로의 철문 뒤였다.소만리는 심장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그녀는 고승겸이 위쪽으로 올라가는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서야 자신의 입을 막은 손바닥을 걷어내고 홱 돌아섰다.“쉿.”소만리가 막 입을 열려고 하자 남자는 자신의 입에 검지를 갖다 대며 소만리의 품에서 기여온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지체 없이 계단 통로에서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고승겸은 몇 층인가를 올라가다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기여온을 안은 소만리가 이렇게 멀리 달아날 수는 없었다.방금 그가 뒤쫓아온 뒤 복도 전체가 조용하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걸로 보아 소만리가 딸을 안고 계단을 오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고승겸은 잽싸게 몸을 돌려 아까 왔던 층으로 되돌아갔다.그가 철문 뒤를 살피자 그 좁은 공간에서 온기가 느껴졌다.고승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얼른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그가 뒤쫓아가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고 있었고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기여온을 안은 소만리의 모습이 보였다.그리고 소만리는 어떤 남자의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호텔 엘리베이터는 속도가 빨랐다.고승겸이 엘리베이터로 달려갔을 때 소만리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이미 1층에 도착해 버렸다.그는 다시 쫓아가도 늦을 것임을 직감했다.“소만리, 이번엔 당신이 똑똑했던 게 아니라 내가 너무 방심했기 때문이야.”고승겸은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이렇게 딸을 데려간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된다고 생각하지 마. 사흘도 안 돼서 날 다시 찾으러 올 테니까.”고
소만리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기모진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내 남편이 어떻게 그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날 수 있을까 감탄하고 있었지.”그녀는 감탄하듯 말하며 기모진의 손을 잡았다.“아까는 정말 긴박한 상황이었는데 당신이 나타나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고승겸이 나와 여온이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정말 상상하기도 싫어.”“그러니까 왜 또 그런 위험한 상황을 만든 거야, 응?”기모진은 나무라듯 말했지만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그녀를 아끼는 마음으로 가득했다.소만리는 옆에서 놀고 있는 기여온을 보고는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여온이를 위해서 엄마인 내가 못할 게 뭐가 있겠어?”“위험한 상황에 뛰어들기 전에 당신 남편도 한번 생각해 주면 안 돼?”기모진은 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소만리는 기모진이 진심으로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하며 말했다.“미안해, 모진.”“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걸 잊었어?”기모진은 손을 들어 소만리의 뺨을 어루만졌다.“내가 제때 나타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였어. 그리고 꼭 기억해. 다시는 이런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고 말이야.”“알겠어. 남편 말 꼭 들을게.”소만리는 눈웃음을 지으며 기모진의 말에 수긍했지만 마음속에는 약간의 억울함도 없지 않았다.언젠가 또 이런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녀는 오늘과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그녀에게는 기모진도 소중한 사람이지만 딸도 똑같이 소중하다.“참, 모진. 당신 어떻게 여기 나타난 거야?”소만리는 갑자기 궁금해져서 기모진에게 물었다.소만리가 궁금해하는 얼굴을 하고 기모진을 바라보자 그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소만리의 오똑한 코를 살짝 건드렸다.“당신 정말 너무한 거 아냐? 나랑 전화할 때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뚝 끊어 버리고 말이야.”이 말을 듣고 소만리는 어제 기모진과 통화하던 상황을 떠올렸다
소만리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기모진을 바라보았고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달래주었다.“어쨌든 내가 당신이랑 여온이 곁에 있으니 고승겸이 다시는 당신과 여온이한테 상처 주게 하지 않을 거야.”기모진이 든든하게 다짐을 하자 소만리의 마음이 한결 따뜻해졌지만 시름은 오히려 더 짙어졌다.“아니야, 모진. 내 생각에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당신이야. 고승겸이 가장 복수하고 싶은 대상은 바로 당신이야. 그와 남연풍의 아이를 당신이 죽였다고 끝까지 착각하고 있어.”기모진은 소만리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소만리, 그럼 우리 우선 경도로 돌아가자. 고승겸이 남연풍을 데리고 잠시 이곳에서 치료하는 동안은 날 상대할 여력이 없을 거야.”기모진은 눈을 들어 옆에 있는 기여온을 바라보았다.“우리 가족이 다시 모일 때도 됐어.”기모진은 최대한 빨리 기여온을 집으로 데려가고 싶었다.소만리도 이런 그의 마음을 읽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모진, 여온이가 F국에 남아 강자풍 곁에 머물면 더 나은 치료와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당신 혹시 여온이를 계속 여기에 머물게 할 의향 있어?”소만리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 말을 꺼냈다.그녀의 말을 들은 기모진의 얼굴에는 역시나 당혹감과 의아함이 가득 떠올랐다.“소만리, 그게 무슨 소리야?”기모진은 답답한 듯 소만리에게 물었다.“당신 혼자 위험을 무릅쓰고 F국에 와서 강자풍을 만난 이유가 뭐야? 우리 딸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한 거였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모진.”소만리는 기모진의 손을 잡고 그를 진정시켰다.“당신이 얼마나 기막혀 할지 나도 잘 알아. 그런데 있잖아. 여온이 몸이 이렇게 빨리 나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알아?”기모진은 눈썹을 찡그렸다.“무슨 이유인데?”“강자풍이 자신의 골수를 여온이한테 이식해 줬어. 강자풍의 친구인 이반이 직접 수술을 했고. 이반은 의사야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