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풍과 이반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동시에 눈을 들어 보았다.문이 열리는 찰나 바깥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가 조용하던 공기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고 문이 닫히는 순간 순식간에 다시 적막감에 휩싸였다.강자풍은 문을 열고 들어온 소만리를 보며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번에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사람을 미행하는 능력이 대단하시군.”강자풍은 비웃으며 말했다. 이반에게도 소만리는 낯선 인물이 아니었다.“소만리? 설마 기여온의 일로 온 거예요?”소만리는 술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두 젊은 남자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내 딸의 행방을 알아보려고 왔죠.”소만리는 강자풍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여기 술 마시러 온 거야?”“왜? 난 술 마시면 안 돼?”강자풍은 냉소적으로 되물으며 다시 술병을 들고 자신의 잔을 채웠고 소만리가 보는 앞에서 호탕하게 술잔을 비웠다.소만리는 눈살을 찌푸렸다.“나랑 강 선생은 가족도 뭣도 아닌 사이니 네가 뭘 하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 난 단지 내 딸의 상황을 알기 위해 왔을 뿐이야.”“방금 자풍이 나한테 말했어요. 당신 딸은 그 고승겸이라는 남자가 납치해 갔고 내가 마침 오늘 그 고승겸이라는 작자를 만났어요. 그는...”“이반!”강자풍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이반의 말을 끊었다.이반은 별뜻 없이 소만리에게 말을 한 건데 강자풍이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강자풍이 소만리에 대해 여전히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이반의 말에 소만리는 놀란 얼굴을 하며 이반에게 물었다.“오늘 고승겸이라는 사람을 만났다고요? 어떻게 그 사람을 만났어요?”“그게...”이반은 손을 들어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머뭇거리다가 말했다.“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통해 나한테 연락했어요.”“이반!”강자풍은 다시 소리를 지르며 이반의 말을 잘랐다.소만리는 눈살을 찌푸리고 강자풍을 쳐다본 뒤 이반에게 물었다.“고승겸이
”그래, 맞아. 부탁하는 거야.”소만리는 당당하게 인정했다. 그러자 강자풍은 정신이 멍해졌다.왜 그런지 그도 알 수 없었다.룸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는 다른 세상 소리처럼 희미하게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강자풍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만리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고 술잔을 들어 와인을 따랐다.강자풍은 더욱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만리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소만리, 뭘 하려는 거야?”“너, 강자풍 도련님. 술 마시고 싶어 한 거 아니었어? 내가 같이 마셔 줄게.”“...”“언제든지 나랑 말하고 싶을 때 말해도 돼. 늦지 않아.”소만리는 시원스럽게 술잔을 비웠다.강자풍과 이반은 소만리의 이런 행동에 적잖이 놀라는 듯했다.소만리가 갑자기 이런 태세로 나올 줄 몰랐고 술잔을 단숨에 비워 버릴 줄은 더더욱 몰랐다.강자풍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소만리가 네 번째 잔을 마시려 하자 손을 내밀어 그녀의 잔을 눌렀다.“그만해.”강자풍이 말렸다. 소만리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강자풍 도련님이 이제 나와 말할 의향이 있는 거야?”강자풍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소만리, 왜 이렇게 날 귀찮게 구는 거야? 난 다시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고 더 이상 당신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왜 자꾸 날 따라오는 거야?”“왜 그러냐고 묻는 거야? 그렇다면 나도 물어볼게. 왜 내 딸은 엄마인 나와 함께 집에 갈 수 없는 거야? 왜? 나도 좀 알고 싶어.”소만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담담한 어조로 되물었다.강자풍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갑자기 그녀를 따라 웃었다.그는 소만리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얼굴을 돌렸고 내키는 대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자풍이는 여온이의 몸 상태를 걱정해서 집에 못 보내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여온이가 F국에 남아 요양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이에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구요.”소만리는 이반의 말을 듣고 의아해했다.“
이반의 말을 듣고 소만리의 마음은 밀려오는 감동으로 벅차올랐다.소만리는 술기운에 취해 곯아떨어진 강자풍을 바라보며 그동안 자신과 기모진을 향한 강자풍의 차가운 언행을 되짚어 보았다.어쩌면 강자풍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갈등이 수없이 많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자풍은 어려서부터 그의 형인 강어의 그늘 아래서 자랐고 강어는 비록 독하고 악랄한 짓을 많이 했지만 동생에게만은 모든 사랑을 다 쏟아부었죠.”이반은 계속 말을 이었다.소만리가 강자풍이라는 사람에 대해 깊이 헤아려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강어는 자신이 취급하는 사업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끝까지 자풍을 끌어들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자풍은 자신의 형과 누나가 하던 사업이 떳떳하지 못한 것임을 전혀 알지 못했던 거예요.”“비록 강어와 강연이 법을 어기고 인간성을 상실한 일을 벌였지만 자풍에게는 좋은 형, 좋은 누나였어요. 자풍의 친구로서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당신이 자풍의 이런 점을 잘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는 정말로 당신 딸을 많이 걱정하고 있고 진심으로 아끼고 있어요.”이반의 말에 소만리는 강자풍을 말없이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자풍은 지금 많이 취한 것 같아요. 혹시 물어볼 게 있으면 지금 나한테 물어보세요. 혹시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을 내가 해결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이반은 소만리를 향해 다정하게 웃으며 앉으라고 손짓했다.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자풍 옆자리에 앉았다.“정말 궁금한 게 많지만 강자풍만이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꼭 그렇지만은 않아요.”이반은 소만리의 말을 조심스럽게 부정했다. 소만리는 의아한 눈으로 이반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이반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당신이 지금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바로 기여온의 행방이라는 걸 알아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지금 당신에게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이반의 말에 소만리는 깜짝 놀랐다.“
”고마워요.”소만리는 서둘러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시간을 체크해 보았다.내일 아침이 적당할 것 같았다.이반은 알았다고 말하며 명함 지갑에서 고승겸이 준 명함을 꺼냈다.이제나저제나 이반의 답을 기다리고 있던 고승겸은 갑자기 이번에게서 전화가 오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내일 아침에 만나자는 이반의 제안에 그는 흔쾌히 응했다.소만리는 이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이반과 함께 술에 취한 강자풍을 차에 태웠다.이반과 강자풍을 태운 차가 멀리 떠나는 것을 지켜본 소만리는 차들이 오가는 길가에 잠시 서 있다가 호텔로 돌아왔다.다음날 소만리는 일찍 일어났다.기여온에 대한 걱정에 그녀는 밤새 거의 한숨도 잠을 잘 수 없었다.남연풍이 기여온을 잘 돌봐줄 거라는 걸 알지만 여전히 그들 부부를 증오하고 있는 고승겸이 갑자기 마음이 변해 기여온에게 손을 대는 건 아닌지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한편 강자풍은 숙취에서 깨어났다.느긋한 자세로 소파에 기댄 채 한가롭게 아이패드를 보고 있는 이반을 보며 강자풍은 지끈지끈한 머리를 흔들며 소파에 앉았다.“이제 일어났어요, 자풍 도련님.”이반은 농담 섞인 목소리로 강자풍을 놀렸다. 강자풍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비비며 말했다.“내가 왜 그렇게 뻗어 버렸지? 당신이 날 데리고 왔어요?”“내가 데려온 게 아니면 그럼 소만리가 데려다줬겠어요?”“소만리?”농담으로 한 이반의 말에 강자풍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그러다가 서서히 그의 머릿속에서 어젯밤 술집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어젯밤 소만리가 술집까지 날 미행해 따라와서 여온이에 대한 단서를 알고 싶어 했는데 내가...”“당신이 술에 취해 뻗어 버렸죠.”“...”강자풍은 어리둥절했다.“그럼 소만리는? 소만리는 혼자 갔어요?”“소만리는 당신보다 주량이 훨씬 세던데요. 그녀는 취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혼자 갔죠.”이반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말투로 강자풍을 놀렸다.그러나 강자풍은 갑자기 안색이
”사장님?”고승겸은 종업원이 부르는 호칭을 들으며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종업원은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분은 저희 카페 사장님이세요.”종업원이 이렇게 말하자 고승겸은 드디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그는 이반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좀 알아보았다.F국에서 명망 있는 부잣집 도련님인 이반은 놀기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꽤 전문적이고 뛰어난 소아과 의사였다.가족들 중에는 엘리트가 많았고 거의 대부분이 의사였다.이런 부잣집 도련님이 카페에 투자해서 사장님으로 불리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고승겸은 마음속에 의심을 품고 위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종업원은 고승겸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카페 입구 문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잠갔다.고승겸은 이반에게 정확한 답변을 들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가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그의 눈동자에는 소만리의 냉엄한 얼굴이 비쳤다.고승겸의 발걸음이 멈칫했고 그의 눈빛은 매섭게 주위를 훑어보고 있었다.아무도 없는 홀을 바라보며 그는 차츰 뭔가를 깨달았다.이반은 아예 여기에 없었고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다는 것이 벌써 수상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소만리가 F국에 왔다니 고승겸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우연은 아니겠지?그는 냉엄하고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소만리를 바라보았다.“당신의 인간관계는 정말 남다르군. 내가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 당신과도 아는 사이였다니, 좀 놀라운데.”고승겸은 비아냥거렸다.“이반이 당신을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걸 보니 당신들은 보통 사이가 아닌 모양이야.”“이반과 난 몇 번 만났을 뿐 잘 알지는 못해. 날 위해 이렇게 당신을 만나게 해 준 건 단순한 호의일 뿐이야.”“호의?”고승겸의 얼굴에 웃음이 짙어졌다.“그렇지만 난 당신이랑 할 말이 아무것도 없어.”고승겸은 이 말을 던지고는 발길을 돌렸다.“고승겸, 당신이 내 딸 숨겼지?”소만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고승겸
”고승겸, 다 큰 어른이잖아. 그런 식으로 빙빙 돌려 빠져나가려고 하지 마.”“그래, 빙빙 돌리지 않을게.”고승겸이 드디어 인정했고 돌아서면서 날카롭고 깊은 눈동자를 소만리에게 단단히 고정시켰다.“소만리, 딸 보고 싶지? 당신과 교환하면 돼.”소만리는 눈썹을 찡그렸다.“나랑 뭘 바꾼다는 거야?”“당신과 강자풍, 이반이 모두 아는 사이니까 당신이 이반에게 부탁해서 그의 아버지가 남연풍을 치료하도록 허락을 받아오면 당신 딸을 돌려주지.”고승겸이 이렇게 제안하자 소만리는 가벼운 웃음을 날리며 말했다.“이반과 난 그저 우연히 만난 사이일 뿐이야. 난 그를 설득할 능력이 없어. 그의 아버지를 설득할 능력은 더더욱 없고.”“당신은 할 수 없지. 그렇지만 강자풍은 할 수 있어.”그는 자신이 말하는 것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진 듯했다. 소만리도 고승겸의 눈에서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었다.그가 기여온을 조건의 대상으로 내세운 것은 인간말종다운 처사였지만 남연풍을 향한 마음만큼은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어때 소만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나?”고승겸은 건들거리며 말했고 아까 자리를 피하려던 마음은 사라졌는지 이제는 한가롭게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난 시간이 많지만 당신 딸이 당신을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겠군.”고승겸은 분명히 소만리를 위협하고 있었다.소만리는 그의 말을 듣고 주먹을 불끈 쥐였다가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주먹을 풀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창가에 앉아 있는 고승겸을 바라보았다.그녀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그의 얼굴은 표정 하나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흐르던 신사의 품격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승겸은 지금 편집증적 성격으로 치달았고 인간성을 상실한 악마의 모습이 되어 가고 있었다.“이반이 남연풍을 구하는 일에 응하든 응하지 않든 그건 당신이 내 딸을 납치해 간 것과 상관없는 일이야. 별개라고. 고승겸, 이 두 가지 일을 엮으려 하지 마.”“당신의 그 말은 그럼, 우리의 거래가 성사될 수 없다
이반이 제안에 응하자 고승겸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의외의 수확인 셈이었다.원래 고승겸은 기여온으로 기모진에게 복수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더 큰 것을 얻은 느낌이 들었다.기여온이 그에게 뜻밖에도 가장 효과적인 바둑알이 된 형국이었다.“당신 아버지가 날 만나겠다고 동의하기 전에는 아무도 기여온을 만날 생각하지 마세요.”“고승겸!”강자풍은 약간 짜증이 났다. 화가 난 강자풍의 모습에 고승겸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왜? 화가 나? 당신이 화를 내 봐야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어.”고승겸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다.막 두어 걸음 가다가 그는 다시 이반을 돌아보았다.“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빠른 시일 내에 연락주세요.”이반은 이렇게 미치광이처럼 자기 마음대로 날뛰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그러나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고승겸의 광기를 잠재울 만한 방법이 없었다.고승겸이 흡족한 얼굴을 하고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강자풍은 화가 난 듯 손을 들어 벽을 내리쳤다.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소만리는 강자풍의 얼굴에 근심과 번뇌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이반은 강자풍이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자풍, 그럼 난 집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 이 일을 의논해 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강자풍은 끓어오르는 짜증과 불안함을 가라앉히며 얼굴을 가다듬고 이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다.“이반, 고마워요. 이제 여온이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친한 친구 사이에 고맙다는 말 하는 거 아니에요. 남도 아니고. 그럼 나 먼저 갈게요.”이반은 소만리를 항해 고마운 마음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소만리가 이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할 겨를도 없이 이반은 황급히 돌아섰다.이반의 지시로 커피숍 직원이 소만리와 강자풍에게 커피를 두 잔 가져다주었다.이렇게 큰 커피숍에 소만리와 강자풍 두 사람만이 남았다.주위는 고요하게 내려앉았다.어색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강자풍은
그러나 강자풍을 바라보는 소만리의 눈빛은 점점 더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맞아. 강어와 강연은 인간성을 거스르고 도덕에 위배되는 일을 많이 저질렀어. 난 강연을 싫어했어. 아니 심지어 죽도록 원망했어. 그녀가 경연의 총에 죽임을 당하자 난 자업자득이라 생각했어. 강어가 냉엄한 법의 집행을 받았을 때도 난 마땅히 그가 받아야 할 죄를 받은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그들이 모두 너의 혈육이라는 사실은 간과했어.”소만리가 여기까지 말하자 강자풍은 소만리가 무슨 의미에서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그동안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고 널 조금도 배려하지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해.”이 말에 강자풍의 미간이 일그러졌고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말로만 항상 네 친구라고 했지 정작 그럴 만한 자격은 없었던 거야. 친구라면 이반처럼 너의 감정을 배려하고 위로해 주었어야 했어.”“네가 왜 나와 기모진에게 원한을 품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소만리는 자책하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강연이 경연의 총에 맞아 죽고 모진이 모함을 당했을 때 넌 모진을 무조건적으로 믿으며 진짜 범인을 찾기 위해 함께 백방으로 뛰어 주었는데 난 너한테 위로의 말도 한마디 하지 않았어. 결국 넌 친누나를 잃은 건데 난 그 생각을 못 했어.”얘기를 하다 보니 더욱더 소만리의 마음이 무거워졌다.“강자풍, 정말 미안해. 난...”“그만해.”강자풍이 소만리의 말을 끊었고 이미 두 눈을 붉어져 있었다.“더 이상 말하지 마.”그는 소만리가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그렁그렁해진 눈물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뚝뚝 떨어졌다.소만리는 일어나 티슈를 건넸다.“날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뿐이야. 고마워. 여기서 마음 좀 가라앉히고 가. 나 먼저 갈게.”소만리는 강자풍의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 티슈를 올려놓고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누나.”강자풍에게서 오랜만에 들어보는 정감 어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