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미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어. 당신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야.”고승겸이 약속하듯 말했다.남연풍은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휠체어를 돌려 침대 쪽으로 갔다.“그래, 고 선생. 잘 들었어. 그러니 이제 돌아가도 돼. 나도 잘 준비해야 해.”남연풍의 시큰둥한 말에 고승겸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내가 한 말을 믿기 힘들고 남사택과 초요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도 알아. 그렇지만 당신과 나의 관계는 그 누구도 바꿀 수 없어.”고승겸의 한마디 한마디가 유난히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그러나 남연풍은 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고 더더욱 무관심했다.고승겸은 더 이상 스스로 거북함을 자초하고 싶지 않아서 곧바로 남연풍의 방을 나갔다.그는 방을 나서자마자 시중을 불러 남연풍의 잠자리를 봐 주라고 일렀다.사실 그는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눕혀 주고 싶었지만 남연풍이 지금 자신에게 강하게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그녀에게 위화감과 거부만만 더 안겨줄 뿐이라고 생각했다.고승겸은 돌아서서 다시 기모진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시중은 방금 끓인 죽을 가지고 와서 기모진에게 가져가려고 하다가 마침 고승겸이 오는 것을 보았다.고승겸을 향한 그녀의 태도는 소만리를 대할 때와는 달리 거만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사자 앞에 전전긍긍하는 사슴처럼 조심스러웠다.그녀는 천천히 죽 그릇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방 문 앞으로 물러나 있었다.기모진은 침대에 기대어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그는 고승겸의 얼굴을 보기 싫었고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고승겸은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기모진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내일 소만리와 함게 산비아 왕궁에서 결혼식을 올릴 거야.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당신을 결혼식장에 앉혀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와 부부가 되는 모습을 똑똑히 보게 할 거니까.”“거 참 기대되는군.”
고승겸의 물음에 시중은 삽시간에 온몸이 굳어지며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였다.“아, 아니에요. 전 엿듣지 않았어요. 감히 어떻게 엿듣겠어요...”시중은 전전긍긍하며 말했고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원래 기분이 좋지 않았던 고승겸은 제대로 바른 말을 하지 않는 시중의 모습에 불쾌함이 더했다.“정말 엿듣지 않은 게 확실해? 그렇다면 넌 내 눈과 지능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아니면 네 말이 너무 허술하다고 생각하지 않아?”그 말을 들은 시중은 놀라서 손에 땀이 났다.“겸, 겸 도련님...”“고 씨 가문은 너같이 분별없는 시중은 필요 없어. 당장 여기 고 씨 가문에서 나가. 이번 달 월급은 한 푼도 받을 수 없을 거야.”고승겸은 매정하게 말을 마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시중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다급하게 쫓아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겸 도련님, 저, 저는 정말 기 선생님과의 대화를 엿들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기 선생님을 좀 더 신경 쓰고 싶은 마음에 그랬던 거예요. 정말 다른 뜻은 없어요. 겸 도련님,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 제발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시중이 애걸복걸했다.고승겸은 시중의 얘기를 듣고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애가 타는 듯 조마조마해하는 시중의 얼굴을 곁눈질했고 검은 눈썹을 번쩍 치켜세우며 찡그렸다.“기모진을 신경 쓰고 싶었다고?”“...”시중이 고승겸의 말을 듣자마자 어리둥절해하면서 창백했던 두 뺨에 붉은 홍조가 서서히 일어났다.시중의 얼굴빛이 변하는 것을 본 고승겸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알고 보니 시중은 기모진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기모진처럼 외모도 좋고 기품도 있는 남자가 여자한테 호감을 사는 건 당연한 일이다.하물며 이런 얄팍한 시중의 처지에서는 더더욱 그럴 일이었다.고승겸은 시큰둥하게 미소를 지었다.시중은 다시 목을 움츠리고 두 손을 휘저으며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갑자기 고승겸이 묻는
”겸 도련님, 고맙습니다. 겸 도련님 정말 고맙습니다!’시중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으나 이내 근심이 되살아났다.“그런데 겸 도련님, 얼마 전에 아가씨가 말씀하시길 기모진이 이미 결혼한 몸이라던데 그게 사실인가요?”고승겸은 이 말을 듣고 눈빛이 묘하게 달라졌다.“소만리가 언제 너한테 그런 말을 했어?”“얼마 안 되었어요.”시중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아가씨도 제가 기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에게 기 선생님이 아내가 있다고 말해 주었고요.”그 말을 들은 고승겸의 얼굴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맞아. 기모진은 결혼했어. 그렇지만 그와 그의 부인은 이미 헤어졌으니 너한테도 기회가 있는 셈이지.”“정말요!”시중은 이 말을 듣고 몹시 흥분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추태를 부린 것 같은 느낌에 이내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승겸은 시큰둥한 얼굴로 시중을 힐끔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이 일은 내가 널 대신해 주도적으로 추진해 볼 테니 넌 내 말만 잘 믿고 따라와, 알겠어?”시중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고승겸의 제안을 마다하겠는가.“겸 도련님, 걱정 마세요. 꼭 잘 따를게요! 기 선생님과 제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허.고승겸은 속으로 차갑게 비웃었다.이 시중은 기모진에게 굉장히 빠져들어 있었다.하긴, 기모진이 누구였던가.경도 제일의 태자 나리에 얼굴은 조각처럼 빚어진 데다 여자를 미치게 하는 매력까지 지니고 있으니 어찌 이런 여자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이제 이 시중은 기모진에게 복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고승겸의 도구가 될 것이다.침실.소만리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달빛에 은은히 빛나는 수정등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왼손을 들어 텅 빈 손가락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다가 눈을 감고 이내 잠이 들었다.다음날 아침 일찍 시중
고승겸은 소만리에게 직진했다.그의 짙은 남색 연미복이 완벽한 바디라인을 뽐내며 시선을 압도했다.그는 담담하게 남연풍의 옆을 스쳐 지나 소만리의 곁으로 다가갔다.그는 소만리를 바라보며 양미간에 옅은 웃음기가 맴돌았지만 그의 웃음은 눈앞에 있는 소만리에게는 와닿지 않았다.“소만리, 당신 오늘 너무 눈부셔.”그는 곁눈으로 옆에 있는 남연풍을 힐끔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준비되었으면 이제 우리 산비아 왕궁으로 가자.”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녀는 매우 협조적이었고 먼저 발걸음을 내디뎌 문 쪽으로 걸어갔다.문밖에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부랴부랴 달려와 소만리에게 부케를 쥐여 주었다.사람들이 하나 둘 흩어지자 남연풍도 뒤따라 돌아섰다.고승겸은 남연풍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당신이 저 웨딩드레스를 입었다면 더 아름다웠을 거야.”“허, 허허.”남연풍은 비꼬며 말했다.“얼굴이 망가진 절름발이는 뭘 입어도 추해. 고승겸 설마 날 열일곱, 열여덟 살쯤으로 착각하는 거 아니야?”“...”고승겸은 할 말이 없어 멍하니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남연풍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하게 떠났다.말과 행동에 고승겸에 대한 미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그는 남연풍이 저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승겸은 헛헛한 마음을 감추며 발걸음을 옮겼다.산비아의 왕궁.으리으리한 궁전은 지금 이 순간 이미 하객들로 가득 들어찼다.모두들 목이 빠져라 오늘의 주인공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지금은 아직 시간이 조금 일러 모두들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작은 다과를 곁들이고 있을 뿐이었다.기모진은 다리를 다쳐서 당분간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고승겸은 사람을 시켜 특별히 기모진을 궁전 로비로 데리고 왔고 그 시중에게 한시도 기모진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지시했다.기모진은 시중이 자신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지만 이 여자는 찰거머리처럼
역시 그건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어. 소만리가 나한테 마음이 쓰이는 것 같았어.비록 그녀의 생각은 고승겸에 의해 통제된 상태였지만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남아 있는 거야.소만리는 궁전의 복도를 지나 2층 테라스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많은 하객들 속에서도 그녀는 한눈에 기모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그는 비교적 구석진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다.아니, 혼자가 아니라 그 시중이 기모진 옆에 딱 붙어 서 있었다.소만리는 조용히 기모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온화한 웃음이 감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마치 시중과 즐거운 대화라도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소만리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뒤돌아가려고 했는데 뒤에서 갑자기 희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안녕하세요, 예쁜 사촌 형수님.”소만리는 발걸음을 가볍게 내디뎠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고승근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세상이 발아래에 있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지난번 캐주얼한 차림이었던 그에 비해 오늘 고승근은 아주 제대로 격식을 차린 복장을 하고 있었다.빳빳하게 다림질한 블랙 셔츠에 블랙 슈트를 매치해 세련되고 당당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안녕하세요, 고승근 씨.”소만리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리며 인사했다.“사촌 형수님, 서먹서먹하게 대하지 마시고 이제 우리도 곧 가족이 되는데 승근이라고 불러주세요.”고승근은 경망스러운 말투로 지금 눈앞에 있는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잠시 소만리를 빤히 바라보던 고승근은 입에 발린 찬사를 늘어놓았다.“여자들이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많이 봤지만 사촌 형수님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어요.”소만리는 이런 칭찬은 많이 들어서 아무런 감흥도 없이 대꾸했다.“고마워요.”소만리는 고승근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몸을 돌렸는데 고승근이 그녀를 불렀다.“미래의 사촌 형수님, 잠시 얘기 좀
소만리는 남자가 하는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그녀를 불쌍하게 생각하다니!그가 소만리를 가엾게 생각하고 동정할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고승근은 소만리의 맑고 예쁜 눈동자에 당혹감이 가득 피어오르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당신은 고승겸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일 뿐이에요. 그는 당신에게 진실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당신은 이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니까 그게 불쌍한 게 아니고 뭐겠어요?”고승근의 말에 소만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 생각엔 당신이 걱정이 좀 많으신 것 같아요. 나를 불쌍히 여기다니,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같은데요. 마지막 순간까지 가 보지 않으면 불쌍한 사람이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죠.”이 말을 듣고 고승근은 약간 어리둥절했다.그는 그림같이 정교한 그녀의 얼굴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미소를 보았는데 그 미소는 꽤나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그는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소만리의 말에 도대체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소만리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고승근은 다가가 더 물어보려고 했으나 그때 마침 고승겸이 나타났다.“어떻게 승근이 네가 여기서 신부랑 얘기하고 있는 거야?”고승겸의 말투는 담담하게 들렸지만 고승근은 이미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다.고승겸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어깨를 으쓱하며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아, 이렇게 예쁜 신부는 처음 보거든. 나 같은 보통 사람이 언제 이렇게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겠어. 그래서 못 참고 보러 올라왔지.”고승근의 화법은 경망스러웠고 왠지 아리송한 여운을 남겼다.이 말을 듣고 고승겸의 우아하고 온화한 얼굴에 갑자기 노한 빛이 드리워졌다.“소만리가 곧 네 사촌 형수가 되는데 승근아, 너 상대를 좀 존중하며 말을 하는 게 좋겠어.”“존중?”고승근은 되물으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고승겸도 존중이라는 걸 아는 거야?”고승겸의 눈빛
시중은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려는 듯 눈을 깜빡였고 그 모습은 사뭇 진지해 보였다.그녀의 말이 끝나자 기모진은 시중을 슬쩍 쳐다보았다.요 며칠 동안 그녀는 정말 열정적이고 친절하게 그를 돌보았다.기모진도 자신에 대한 그녀의 호감을 이용해서 약간의 단서를 얻긴 했다.기모진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아까처럼 그렇게 차가운 말투가 아닌 조금 부드러운 톤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당신의 보살핌이 필요 없어요. 그러니 당신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게 낫겠어. 나한테 아무리 신경 써 봐도 소용없어요. 난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말투는 많이 누그러졌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는 말이었다.시중의 얼굴에 슬픔과 허탈한 빛이 역력했고 이어 깊은 한숨이 뒤따라왔다.“기 선생님이 몇 번이나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더 이상 혼자만 좋아서 기 선생님을 부담스럽게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선생님을 돌보는 것은 지금 내 업무이기도 해요. 더 이상 날 거절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내가 일을 잘 못한다면 겸이 도련님이 날 벌하실 거예요.”시중이 기모진을 잘 돌보지 못할 경우 고승겸이 시중을 벌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기모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기 선생님, 샴페인이 싫으시다면 과자 좀 드세요. 아침부터 지금까지 별로 안 드셨잖아요.”시중은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를 띤 채 케이크를 건네주었다.그러나 기모진이 이를 받지 않자 시중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케이크가 싫으시다면 내가 다른 간식을 가져올게요.”시중은 이 말을 하고 돌아서서 기모진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려고 했다.“그럴 필요 없어요.”기모진은 그녀를 불러 세우고는 손을 뻗어 시중이 들고 있는 케이크를 받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기모진이 더 이상 자신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자 시중의 얼굴에 환한 꽃이 피어올랐다.고승겸은 대기실에서 소만리와 함께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는 것을 느끼며 대기하고 있었다.고승겸은 무의식적으로 손
문이 닫히자 고승겸의 입가에 일렁이던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기모진, 네가 내 인생을 방해하고 내 아이를 죽였으니 난 결코 널 편안하게 살게 놔두지 않을 거야.소만리는 대기실에서 앉아 있었고 스타일리스트가 들어와 헤어스타일과 웨딩드레스를 세심하게 살펴주었다.소만리는 벽에 걸린 시계에 눈길을 돌렸다.거의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고승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딸깍.”대기실 문이 열렸고 고승겸이 백옥처럼 매끈한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섰다.스타일리스트는 공손하게 고승겸에게 미소로 인사했고 자연스럽게 대기실을 나갔다.“승겸, 이제 왔구나.”소만리는 미소를 머금고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고승겸은 환한 표정으로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시간이 거의 다 됐어. 소만리, 이제 우리 내려가자.”“방금 내가 보니까 아래층에 손님들이 많던데 다 당신 집안사람들이야?”소만리는 궁금해서 물었다. 고승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모두 왕실과 관련된 친족이니 너무 긴장하지 마. 내가 항상 옆에 있어 줄게.”고승겸은 다정한 말투로 소만리의 불안한 감정을 잠재워 주었고 소만리가 너무 긴장할까 봐 차분하게 이런저런 당부를 했다.“결혼식이 시작되기 전에 한 사람을 먼저 만나게 될 거야. 그는 우리 루이스 가문에서 가장 지위와 항렬이 높은 분이셔. 가장 권위 있는 어른이지. 잠시 후 그분이 당신한테 몇 가지 질문을 할 거야. 소만리, 신중하게 대답해야 해.”소만리는 맑고 예쁜 눈매를 들어 보이며 되물었다.“승겸, 무슨 질문인데? 만약 그때 내가 대답을 잘못하면 당신한테 뭔가 피해가 가는 거 아니야?”고승겸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말했다.“아니야. 당신은 대답 잘 할 거야.”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물론 당연히 자신 있었다.그가 소만리에게 이미 완벽하게 최면을 걸었기 때문이다.당부해야 할 말들은 이미 소만리의 머릿속에 완전히 각인되어 있었다.이따가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그녀는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그대로 대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