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 있어?”기모진이 바로 물었다. 육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가리켰다.“그 고승겸이라는 분이 오셨습니다.”기모진은 살짝 눈을 치켜들며 물었다.“그가 바로 사무실로 들어갔어요.”“프런트 데스크에 있다가 잠시 화장실에 가느라 그가 들어오는 걸 알아채지 못했더니 혼자 들어가 버렸습니다.”육경이 해명했다.기모진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큼성큼 고승겸이 들어간 사무실로 향했다.기모진을 만날 목적으로 회사를 찾아온 고승겸은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의자를 돌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고승겸은 기모진을 보자마자 비꼬며 말했다.“오, 기 사장님 왔어? 오래 기다렸잖아.”기모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고승겸을 곁눈질하며 담담하게 테이블로 걸어갔다.“빙빙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나 어서 해.”기모진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고승겸은 그런 기모진의 태도가 나쁘지 않은 듯 입술을 살짝 오므리다가 입을 열었다.“기 씨 그룹이 최근 ZF와 합작한 프로젝트를 따냈다는 걸 알고 있어. 성공하면 엄청난 이익이 있겠지. 당신도 알다시피 난 절대 당신이 성공하는 꼴을 볼 수 없어.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야.”고승겸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드리우며 말을 이었다.“기모진, 이제부터 당신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을 거야. 내 아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당신을 망가뜨려 놓을 테니까.”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아주 당당하게 걸어나갔다.육경이 옆에 서 있다가 고승겸의 당당한 뒷모습에 경멸하는 눈빛을 쏘아붙였다.“사장님, 도대체 저 사람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그의 목표는 ZF 프로젝트가 아니야.”기모진은 이미 고승겸의 의도를 간파했다.고승겸은 지금 유산한 아이를 트집 잡아서 기모진 부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고승겸이 원하는 복수는 사업과 관련이 없고 그의 목표는 오로지 기모진 부부와 심지어 그들의 아이들을 겨냥하고 있었다.기모진이 묵묵히 고승겸
”참, 내가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데 고승겸을 본 것 같아. 고승겸이 정말 당신을 보러 온 거야? 아니면 내가 잘못 본 거야?”소만리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잘못 보지 않았어. 날 찾아왔었어.”기모진이 솔직하게 대답했다.“도대체 왜? 뭐 때문에?”소만리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분명히 모든 일이 그 사람 때문에 일어났고 사실 남사택과 초요의 죽음도 그 사람 때문인데 왜 고승겸은 항상 자기는 조금도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그건 인격의 문제야.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거야. 고승겸은 자신감이 상당히 강한 사람이지. 정확히 말하면 자기 자신에게 자부심이 대단하다고나 할까.”기모진은 일찍이 고승겸이라는 사람을 꿰뚫어보았다.“고승겸은 학식이 풍부한데다 심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게다가 최면술에도 대단한 능력이 있고 귀족이라는 명예까지 거닐고 있으니 사람이 도도할 수밖에.”소만리는 기모진의 말을 듣고 경외로운 눈빛으로 우러러보듯 기모진을 바라보았다.기모진은 소만리의 그런 눈빛을 의아해하며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소만리, 뭘 그렇게 보는 거야?”“내 남편을 보고 있어. 귀족 신분이라는 것만 다르지 내 남편도 모든 면에서 훌륭하고 출중한데 당신은 결코 자만하거나 하지 않잖아.”기모진은 소만리의 말을 듣고 활짝 웃었다가 이내 미안함이 가득 서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야, 소만리. 나도 자만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때 당신을 저버렸겠어?”이 말을 하는 기모진의 눈에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소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손을 내밀어 기모진을 안았다.기모진은 소만리가 자신을 위로하려는 것을 알고 마음이 금세 따뜻해지고 뿌듯해졌다.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소만리에게 끼친 상처는 그녀가 그를 용서할지라도 그 자신은 결코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았다.소만리는 기모진과 상의한 끝에 고승겸의 집으로 가서 남연풍을 데리고
남연풍은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멈칫했다.소만리는 뒤에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들었고 잡고 있던 남연풍의 손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며 긴장하는 모습을 보았다.소만리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뒤를 돌아보았다.남연풍은 소만리를 잡은 손을 천천히 떼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당신...”소만리는 남연풍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는 어렴풋이 들었지만 자세히 듣지는 못했다.갑자기 나타난 고승겸을 보자 소만리는 관자놀이가 쭈뼛 서는 것 같았다.고승겸은 소만리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소만리를 향해 걸어갔다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남연풍의 눈빛을 보며 입을 열었다.“당신과 당신 남편을 독소에 시달리게 한 장본인을 이렇게 찾아올 만큼 한가해, 소만리?”고승겸은 비아냥거리며 말했고 그의 말투는 다분히 도발적이었다.소만리는 시큰둥한 표정을 한 고승겸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고승겸, 나와 내 남편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아?”“그게 무슨 말이야?”고승겸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소만리는 당당하게 고승겸의 시선을 마주 보며 말했다.“남연풍이 한 일은 모두 당신이 시킨 일이었어. 그녀는 항상 당신의 말에 따라서 일을 했다구.”소만리는 뒤에 있는 남연풍을 바라보며 말했다.“남연풍은 그저 사랑에 눈이 먼 바보 같은 여자였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한 죄밖에 없어. 당신의 감언이설에 순수한 그녀의 마음이 기만당한 거야.”소만리의 말에 고승겸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그는 소만리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리는 웃음이 가득한 채 말했다.“소만리, 남연풍의 모습에서 한때의 자신을 본 거야?”“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돌리지 말고 말해.”소만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고승겸은 소만리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예전에 당신도 사랑에 눈이 멀어 기모진을 사랑하다가 만신창이가 되었고 이후 미련한 여인처럼 결국 그를 용서했지.”고승겸은 돌이킬 수 없는 그녀의 과거를 언급했
소만리는 그제야 왜 방금 자신의 감정이 복받쳤는지 알게 되었다.알고 보니 고승겸이 또 최면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고승겸, 당신은 산비아의 귀족으로서 학식도 높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할 수가 있어?”소만리가 경멸하듯 퍼부었다.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최면을 걸던 작업이 끊겨 버린 고승겸은 아무런 감정 없는 눈빛으로 남연풍을 바라보았다.그러나 남연풍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이제 모든 것을 깨닫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가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어떤 행동이 떳떳한 건데?”고승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소만리에게 되물었다.“그때 기모진이 당신한테 한 짓이 떳떳하다고 할 수 있어?”“고승겸, 더 이상 나와 내 남편의 과거 일을 꺼내서 내 마음을 어지럽히려고 하지 마. 우리 부부의 일은 당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야. 당신 일이나 신경 써.”“내 일? 그럼 당신에게 물어볼게. 내가 무슨 일을 하건 내 일에 왜 당신들이 신경 쓰는 거야?”고승겸의 잘생긴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 웃음은 전혀 곱지 않았다.“고승겸, 무슨 일? 그럼 당신은 뭐하러 내 남편을 찾아간 거야? 괜히 생트집 잡으려는 거잖아?”“그 얘기를 하고 있었구나.”고승겸은 갑자기 뭔가를 알아차린 듯한 표정으로 하며 말을 이었다.“내가 진작에 경고하며 말했었는데 나한테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또 묻는 거야?”고승겸은 천천히 침대 곁으로 걸어가 남연풍의 얼굴에 시선을 바짝 붙이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난 무고하게 희생된 내 아이를 위해 복수할 거야. 내 아이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않을 거라구.”이 말을 할 때 고승겸의 눈에서 깊은 원한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남연풍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고승겸, 아이는 내가 포기한 거야. 누구와도 상관없는 일이야.”“상관없다고? 나하고도 상관없는 일이야?”고승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기모진이 당신의 몸에 AXT69
소만리는 어서 가라는 남연풍의 말에서 남연풍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남연풍은 고승겸이 소만리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웠던 것이다.하지만 소만리가 혼자 이곳으로 올 때 아무런 방비 없이 온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손을 뻗어 남연풍의 손을 잡고 차분하고 침착하게 미소를 지었다.“알았어요. 갈게요. 그러니 당신도 몸조심해요. 아무쪼록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지 말아요. 남사택과 초요도 같은 생각일 거예요.”소만리는 남연풍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눈을 들어 차가운 눈빛으로 고승겸에게 시선을 잠시 떨구었다가 이내 돌아섰다.소만리가 방을 나가자 고승겸은 남연풍을 잠시 바라보다가 뒤따라 방을 나갔다.“고승겸, 소만리를 보내 줘.”남연풍은 고승겸을 향해 황급히 소리쳤다.“후회할 짓 그만해.”고승겸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내가 가장 후회하는 게 뭔 줄 알아? 당신에게 이런 식으로 나와 맞설 기회를 준 거야.”“...”남연풍은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는 방을 나간 후였다.“고승겸, 고승겸! 그만 좀 해!”남연풍이 목청을 돋우면서 문을 향해 소리쳤다.고승겸은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소만리는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끼며 그것이 고승겸임을 짐작했지만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소만리.”소만리가 계단을 내려오는데 고승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당신 정말 용기가 대단해. 다시 여기로 올 생각을 하고 말이야.”소만리는 담담하게 돌아보며 말했다.“지옥에도 가 본 내가 지옥보다 여기가 더 무서운들 못 올 것 같아?”고승겸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정신이 멍했다.그의 기억 속에서 떠올려지는 그녀의 이미지는 항상 이렇게 박력 있고 뚝심이 두둑했었다.고승겸이 어찌 소만리의 이런 심성을 잊을 수 있겠는가?요트가 폭발해 얼굴이 망가졌을 때도 절대 고개를
”경도가 계승권을 얻는 유일한 지름길은 아니잖니. 너한테는 또 다른 지름길이 있어.”여지경은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그녀의 계획은 주도면밀했고 생각은 원대했다.고승겸은 당황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여지경을 바라보았다.“또 다른 지름길이라고요?”“그래.”여지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승겸의 곁으로 바싹 다가가 몇 마디 속삭였다.여지경의 말을 들은 고승겸의 미간이 더욱 굳어졌다.“승겸아, 네가 달갑지도 않고 내려놓기도 힘든 거 알아. 하지만 그 애는 우리 집과는 인연이 없는 건지도 몰라. 너도 더 이상 집착하지 마.”여지경은 마지막으로 설득하며 손을 들어 고승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준비해. 연풍이를 데리고 이틀 뒤면 돌아갈 텐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그래요. 어쩌면 지금이 돌아가야 할 때일지도 몰라요.”고승겸이 갑자기 입을 열었고 그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그는 소만리가 떠나가는 방향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소만리는 남연풍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고승겸이 그렇게 빨리 나타나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소만리는 아까 남연풍의 반응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남연풍은 여전히 고승겸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그렇지 않았다면 고승겸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남연풍의 손이 순식간에 그렇게 차갑게 식지는 않았을 것이다.소만리는 남연풍이 고승겸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남연풍을 데려올 수 없었다.그런데...소만리는 아까 남연풍이 끝내지 못한 말을 떠올렸다.“소만리, 잘 들어요. 당신과 당신 가족이 위험해질 거예요. 특히...”“특히 뭐?”소만리는 자문해 보았지만 답을 찾지는 못했다.그녀는 기 씨 본가로 돌아왔고 자신의 막내아들과 초요의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보기만 해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 같았다.다만 떠나버린 초요를 생각하니 소만리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마음이 먹먹해졌다.“엄마.”어린 아들이 소만리를 보고 기뻐하며 작은
소만리가 들어서자 기란군의 담임선생님이 보였다.소만리가 기란군을 보지 못했다는 말에 담임선생님은 의아해하며 말했다.“화장실 갔나? 기란군은 매우 총명한 아이니까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소만리도 아들이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화장실로 가서 아들을 찾아보았다.화장실 문 앞에 서서 소만리는 몇 번이고 기란군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기란군, 안에 있어?”“기란군, 안에 있으면 엄마한테 대답해.”“기란군...”소만리가 기란군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화장실에서 젊은 남자 선생님이 나왔다.소만리가 아들을 찾으러 온 것을 알고 그는 예의 바르게 말했다.“어머니, 화장실에 다른 사람은 없었어요. 아이를 못 찾고 계세요?”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왠지 모르게 심장박동이 불안해져 왔다.설마 고승겸이 벌써 누군가를 시켜 아이를 데려갔단 말인가?소만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나 여기 있어.”소만리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휙 돌렸다.기란군이 교복을 입고 노란 모자를 쓴 채 깜찍한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소만리는 마침내 마음을 쓸어내렸다.“기란군!”소만리는 기란군 앞으로 달려가 쪼그리고 앉아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기란군, 어디 있었어? 왜 교문에서 엄마를 기다리지 않고 여기에 있어?”기란군은 작은 손을 들어 색종이로 만든 카네이션을 들어 보였다.“오늘 만들기 시간에 카네이션 만들었는데 깜빡하고 안 가져와서 다시 들어왔어. 이제 엄마한테 줄게.”기란군은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소만리를 향해 밝게 웃었다.아들이 건넨 종이 카네이션은 비록 정교하지 못했지만 소만리는 보물을 받들 듯 손으로 받았다.“엄마랑 집에 가자.”“응.”기란군은 귀엽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만리와 함께 교문을 나섰다.차에 오르자 소만리는 카네이션을 살짝 내려놓고 안전벨트를
소만리는 웃으며 운전을 계속했고 앞에 있는 사거리까지 왔을 때 교통사고가 난 것을 발견했다.사고 때문에 앞 구간의 길이 꽉 막혀 있었다.원래 이 길이 집으로 가는 길인데 지금은 갈 수 없게 되었다.소만리는 차분하게 상황이 처리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차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결국 교통경찰의 지휘에 따라 핸들을 돌려 다른 길로 운전할 수밖에 없었다.그 길도 집으로 가는 길이지만 조금 돌아가야 했다.그런데 소만리가 다음 길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앞에서 하이빔을 켠 차가 튀어나왔다.소만리는 얼른 핸들을 꺾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그녀는 급히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려 뒤 칸의 문을 열었다.“기란군, 괜찮아? 어디 부딪힌 데는 없어?”소만리는 방금 급정거로 인해 혹시 아이가 다쳤을까 봐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이를 안고 물었다.기란군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엄마, 나 괜찮아. 걱정하지 마.”“그럼 다행이야.”소만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들을 내려놓았다.그녀는 돌아서서 방금 갑자기 튀어나온 차의 주인에게 다가갔다.차에서 내린 두 남자가 매우 공격적인 태도로 소만리에게 다가왔다.“부인, 놀라게 해서 정말 죄송해요. 번거롭겠지만 우리와 함께 좀 가 주셔야겠어요.”남자 중 한 명이 거짓 웃음을 지으며 소만리에게 다가왔다.말은 정중한 듯 보였지만 그 남자의 태도는 거들먹거리는 것이 분명했고 소만리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도 왠지 강제로 그녀를 끌고 가려는 태세였다.소만리는 침착하게 눈앞의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고승겸이 시킨 짓이에요?”남자는 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당신이 말하는 사람, 우리는 몰라요.”“그럼 당신들은 누구예요? 내가 왜 당신들과 함께 가야 하죠?”“부인, 아직도 모르겠어요?”“내가 뭘 알아야 하죠?”“우리는 상업범죄수사팀 직원이에요.”남자는 미리 준비해 둔 증명서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였다.“기 씨 그룹의 기존 유동자금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