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는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자신이 이곳에 다시 올 줄은 몰랐다.불쾌한 기억이 가득한 이곳.기모진은 소만리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이곳이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는지 그도 잘 알고 있었기에 정말로 다시는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지하실에 있어.”기모진이 침묵을 깨고 앞으로 나와 철문을 열었다.소만리가 그를 뒤따라 들어갔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 불쾌했던 기억이 밀려왔다.오늘 부쩍 기온이 낮아서인지 지하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유독 그녀의 가슴에 차가운 가시를 돋우고 파고드는 것 같았다.이런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을 뒤로하고 소만리는 잠자코 기모진의 뒤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왔다.지하실 문이 열리고 문을 통해 한 줄기 빛이 지하실 내부를 비추었다.소만리는 축축이 젖은 바닥에 엎드려 있는 사람 그림자를 보았고 빠른 걸음으로 남연풍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남연풍의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그녀의 입에서 약하게 새어 나오는 숨결조차 뜨거운 기운이 가득했다.지금 이 순간 남 앞에서 도도하고 화려하던 남연풍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남연풍.”소만리가 그녀를 불렀다. 기모진은 소만리의 곁에서 차갑게 남연풍을 쳐다보았다.“소만리, 안 죽어. 이런 악랄한 사람을 걱정할 필요 없어.”소만리는 기모진이 얼마나 남연풍을 증오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만약 남연풍이 이곳에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기모진에게 닥칠 미래가 너무 무서웠다.“모진, 남연풍을 풀어줘. 고승겸한테 데리러 오라고 해.”“말도 안 돼.”기모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런 여자는 죽어도 싸. 마땅히 받아야 할 죄야. 소만리, 당신 왜 이런 사람을 걱정하고 그래?”“내가 걱정하는 건 당신이야, 기모진.”소만리의 말투가 무겁게 지하실을 울렸다. 기모진은 갑자기 너무나 혼란스러웠다.그는 자신이 분노에 사로잡혀 정신이 혼미해졌다는 걸 알았다.소만리의 말을 듣고서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아마 남연풍도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그런 남연풍을 보며 소만리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모진, 정말 남연풍 놓아주지 않을 거야?”“그녀를 여기에 있게 하는 것이 그녀를 위한 나의 마지막 예우야.”기모진은 소만리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고 밖에서 방문을 잠갔다.그는 돌아서서 소만리의 어깨를 잡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소만리, 내 걱정은 하지 마. 이 여자한테 어떤 동정심도 갖지 마. 이 여자는 당신한테 독소를 먹였어. 이 여자 때문에 우리 부부가 몹쓸 독소에 시달리게 된 거라고. 완치되지도 않아. 이 여자는 여기서 좀 쉬면 괜찮을 거야.”기모진의 말을 듣고 소만리는 갑자기 마음이 풀렸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따뜻한 손바닥을 기모진의 얼굴에 살짝 갖다 대었다.“모진, 당신 말 무슨 뜻인지 잘 알았어. 당신 뜻대로 남연풍을 잠시 여기에 두기로 해. 만약 그녀가 깨닫고 해독제를 우리에게 준다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난 당신이 최대한 이성적으로 대하길 바래.”자신의 말에 기모진이 침묵하자 소만리는 그의 뺨을 살짝 들어 올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로 그의 시선을 단단히 감쌌다.“모진, 날 봐. 약속해.”기모진은 소만리의 눈동자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진심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소만리. 절대 이성을 잃지 않을게.”“그래.”소만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 열쇠 이리 줘.”기모진은 망설이지 않고 소만리에게 열쇠를 건네주었다.소만리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연풍이 침대에서 일어나 있었다.남연풍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걸 느끼고 있었는데 방으로 들어오는 소만리를 보자 더욱 깊은 낭패감이 밀려왔다.남연풍이 발걸음을 떼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뒤따라오는 기모진의 모습을 보고 발걸음이 저절로 뒤로 물러났다.“기모진, 소만리. 이렇게 날 가둬놓으면 해독제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란 생각하지
남연풍의 말에 소만리는 대답은 하지 않고 옷장 쪽으로 다가가 깨끗한 옷 한 벌을 꺼냈다.“지금 이런 초췌한 모습 당신 분명히 받아들이기 힘들 텐데, 우선 먼저 샤워부터 해요.”소만리는 옷가지를 침대 끝에 살짝 놓았다.“지금 열이 좀 나던데, 여기 약상자 있어요. 뭘 먹어야 할지는 누구보다 잘 아실 테고.”남연풍은 소만리가 하는 말이 왠지 의심스러워 경계하는 눈빛으로 잠시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소만리, 그게 무슨 뜻이죠? 원수에게 은덕이라도 베풀려는 거예요?”소만리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난 그렇게 위대하지도 자비롭지도 않아요. 다만 우리는 결국 같은 배를 탄 사람이라는 거죠. 결국 내가 완전히 나으려면 당신한테 의지해야 하지 않겠어요?”남연풍은 소만리의 말을 듣고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소만리를 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비록 소만리가 지금 하는 말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남연풍은 뭔가 께름직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그녀는 지금 여기에 갇혀 있어서 해독제를 개발할 방법도 없었다.따라서 소만리를 치료해 줄 수 있는 방법도 없거니와 회복과 완쾌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남연풍,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안심해도 돼요. 내 남편 말이 맞아요. 난 당신이랑 달라요. 당신은 다른 사람을 해칠 생각을 하고 있지만 난 그럴 수 없어요. 그러니 당신은 지금 샤워를 하고 편하게 자도 돼요.”남연풍은 이 말을 들으며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자신의 몸을 한번 쓱 훑어보고는 얼굴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소만리의 말대로 샤워를 하기로 했다.“그래, 당신 말대로 지금은 샤워부터 하고 좀 쉬어야겠어요.”남연풍은 몸을 일으켜 침대 끝에 놓인 옷가지를 챙겨 들고 돌아서서 방 안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소만리는 몇 초 동안 욕실 쪽을 바라보다가 방문을 열었다.기모진은 소만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남연풍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순간 긴장한 빛이 기모진의 얼굴이 스쳤지만 이내
남연풍은 소만리의 행동이 더욱 의아했지만 지금은 배가 너무 고팠다.그녀는 소만리가 음식에 이상한 짓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먹기 시작했다.그녀가 다 먹을 즈음 소만리도 마침 침대 시트와 이불 시트를 다 갈았다.“당분간 여기서 지내요.”소만리는 남연풍에게 다가가 말했다.“당신이 고승겸을 좋아하는 마음은 잘 알지만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들어주어선 안 돼요.”“허, 소만리. 당신 지금 나 가르치려는 거예요?”남연풍은 어이없어하며 되물었다.“당신이 기모진을 위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많이 했는지 생각해 봐요.”소만리는 이 말을 듣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나도 그 당시에는 나 자신이 없어질 정도로 그에게 맞춰 사랑했지만 그를 위해 양심을 속이고 남을 해치는 일을 한 적은 없어요.”“...”남연풍은 할 말을 잃었다. 소만리의 말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그러나 잠시 후 남연풍은 입술을 깨물어 소만리의 말에 발끈하며 공격했다.“소만리, 당신 남편이랑 당신 도대체 나한테서 뭘 원하는 거예요?”소만리는 담담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말했다.“당신한테 동생이 있다는 거 다행인 줄 아세요.”“...”“무슨 말인지 잘 생각해 봐요.”소만리는 짧게 말하고 돌아서서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남연풍은 소만리가 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그녀는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나니 아까보다는 훨씬 기력도 올라왔고 정신도 맑아졌다.얼마나 더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할까 하는 생각에 남연풍은 갑자기 일어나 방을 나가려는 소만리를 향해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소만리, 당신 호의는 고맙지만 난 애초부터 좋은 사람이 못 돼요. 당신 수작 따위 나한테 먹히지 않는다구요!”남연풍은 두 손을 뻗어 소만리를 잡으려고 다가갔다.순간 소만리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남연풍은 어리둥절했고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소만리에게 손목을 잡히고
”소만리, 한마디만 물어볼게요. 살면서 가장 두렵고 무섭고 돌이켜보기도 싫은 일이 뭐예요?”소만리는 자신이 가장 돌이켜보기 싫은 과거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죽지 못해 살았던 암울한 세월이었다.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문득 소만리는 독소의 마지막 단계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지 깨달았다.아니다.쓸데없는 생각하면 안 된다.소만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멀어져 가는 마음을 다잡았다.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쁘다는 느낌이 들자 그녀는 도로변에서 차를 불러 병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다.하지만 차를 탄 후 소만리는 더 많은 생각에 사로잡혔다.소만리가 독소의 마지막 단계에 벌어질 상황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는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신체적인 고통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자신했다.일찍이 그런 고통은 너무나 많이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은 훨씬 더 견디기 어렵다.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였다. 지금 그녀가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남연풍이 말한 마지막 단계는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이었다.“키익!”마지막 단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던 소만리는 갑자기 차가 멈춰 서자 몸이 반사적으로 앞으로 기울어서 급히 손잡이를 잡았다.“왜 그러세요? 기사님.”소만리는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운전기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소만리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고개를 들어보니 고승겸이 차를 막아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고승겸은 소만리가 탄 차를 자신의 몸을 날려 강제로 세웠던 것이다.“죄송해요, 기사님. 저 사람은 내 친구예요. 여기서 내릴게요.”소만리는 즉시 차비를 기사에게 건네고는 얼른 차에서 내렸다.운전기사는 이 상황을 보고 이상하다고 여기며 바로 차를 후진해 갔다.매서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겨울날, 어느새 내린 하얀 눈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소만리는 침착한 눈빛으로 고승겸을 바라보았다.그는 검은 코
고승겸의 말을 들은 소만리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날 좋게 봐준 건 고맙지만 난 당신 호감 따위 필요 없어. 날 특별하게 생각해 줄 필요도 없고 나에 대한 호감을 가질 필요도 없어. 오히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당신을 배척하게 만들어.”고승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올렸다.“그래? 그럼 남연풍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줄 수 없는 건가?”“맞아, 말해줄 수 없어.”소만리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고승겸의 어두운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만약 이런 상황에서 나를 잡아가 남연풍과 교환할 생각을 했다면 그렇게 해. 어차피 나도 남자의 힘에 필적할 수는 없으니까.”그랬다. 고승겸은 방금 소만리가 말한 대로 그렇게 하려고 생각했었다.만약 소만리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바로 그런 방식으로 소만리를 잡아가 기모진에게 남연풍과 교환하자고 제안했을 것이다.그러나 고승겸은 소만리가 그의 생각과 마음을 한눈에 꿰뚫어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승겸의 눈에는 감탄하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소만리, 당신은 역시 특별해. 하지만 난 당신을 잡아가지 않을 거야.”그는 조수석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우리 집에 가서 차나 한잔 해.”소만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그러나 그녀는 차에 오르는 과정에서 고승겸이 눈치채지 못하게 얼른 기모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러나 고승겸은 소만리가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동작을 눈치챘고 그 누군가가 기모진일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른 척했다.고승겸이 소만리를 데리고 가려던 원래 목적이 기모진에게 알리는 것이었는데 지금 소만리가 자진해서 기모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에 시간도 절약된 셈이었다.30분 뒤 소만리는 고승겸의 집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 비로소 소만리는 눈이 많이 내려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소만리는 외투를 꽁꽁 싸매고 쌓인 눈을 밟으며 현관을 향해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겼다.집에 들어오니 따뜻한 훈풍이 그들
소만리의 여유로운 태도에 고승겸은 새삼 감탄했다.처음에도 고승겸은 그녀의 이런 여유롭고 담담한 모습에서 특별함을 느꼈다.그는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사실 난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없어.”그는 시계를 쳐다보며 말했다.“당신 남편 올 때 다 됐겠지.”고승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만리는 대문 밖에서 귀에 익은 엔진 소리를 들었다.영락없는 기모진의 차였다. 고승겸은 창가로 가서 슬쩍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정말 빠르군. 기모진은 정말 당신을 많이 아끼고 사랑하나 봐.”“고승겸, 정말 농담도 참. 내가 기모진의 아내인데 날 아끼지 않으면 누굴 아끼겠어?”소만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어떤 사람은 참 불쌍해. 한 사람을 아끼면서도 어떤 명목으로 다가서야 할지 모르고 말이야. 내 말이 맞지?”“...”고승겸은 소만리의 말을 듣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그는 그녀가 뭔가를 비아냥거린다는 건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지 못했다.“뚜벅뚜벅.”익숙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자 소만리는 얼른 소파에서 일어났다.“소만리!”“모진, 나 여기 있어.”소만리는 다급하게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초조함에 타들어가는 듯한 기모진의 얼굴을 보니 진심으로 미안함이 느껴졌다.그녀가 기모진을 먼저 내보내고 남연풍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지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어쨌거나 이제 기모진과 함께 있으니 고승겸 앞이라도 소만리는 마음이 놓였다.“기모진, 정말 빨리 왔군.”고승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모진의 차가운 시선이 고승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기모진은 소만리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가자.”“잠깐 얘기 좀 하고 가지 않겠어?”고승겸은 기모진에게 물으며 새 찻잔을 집어 들고 홍차를 한 잔 더 따랐다.“밖에 눈이 많이 오는데 앉아서 홍차나 한잔하면서 얘기 좀 해.”기모진은 유유자적한 고승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당신 몸속에 있는 독소도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아서.”고승겸의 경고에는 충분한 확신이 묻어났다.이 말을 들은 기모진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그래서? 그렇게 말하면 당신한테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그럼, 백 프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고승겸의 얼굴에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엿보였다.“기모진, 이왕 당신들이 여기 왔고 우리 얘기도 다 했으니 내가 지금 당신들을 데리고 어딜 좀 가야겠어.”소만리와 기모진은 서로 말없이 쳐다보았다.“왜? 감히 같이 갈 용기가 없어?”고승겸이 도발적인 어조로 말했다.“같이 갈 용기가 없으면 안 따라와도 돼.”고승겸은 이 말을 내던지고 돌아서서 지하실 쪽으로 곧장 걸어갔다.소만리는 이곳을 기억한다. 예전에 고승겸이 여기에서 그녀에게 최면을 걸었었다.그런데 그곳이 고승겸의 지하실 안에 있는 동굴이었다는 걸 소만리는 몰랐다.지하실 안에 동굴이 따로 있었다니.들어가서 옆문을 열어보니 제법 큰 규모의 실험실이 있었다.실험실에 비치된 기구들은 모두 최신식이었다.소만리는 각기 다른 색의 시약이 선반 위에 가지런하게 배열되어 있는 것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수많은 시약들은 아마 남연풍이 개발해 낸 것이고 각기 다른 효과를 지닌 시약일 것이다.“여기에 당신들이 원하는 시약이 있을지 알아맞혀 봐.”고승겸은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마 그는 자신이 이런 다양한 시약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뿌듯한 것 같았다.“소만리, 다음에 독소가 발작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고승겸이 뜸을 들이며 물었다. 그는 기모진의 반응을 한번 살피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떠올리게 될 거야.”고승겸의 도발적인 말에도 소만리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예상하고 있던 터였다.그러나 고승겸의 말은 기모진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고승겸은 기모진의 반응을 살피더니 상당히 만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