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요는 경계하며 뒤로 두어 발짝 물러섰다.전에 기묵비를 괴롭혔던 건달들이 아닐까 짐작했지만 보아하니 행세가 건달들같지는 않았다.“당신들 누구세요?”그녀는 다시 추궁하면서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내 긴급 전화를 걸려고 했다.“초요 아가씨, 겁내지 마. 악의는 없어. 다만 우리 선생님이 당신한테 차 한 잔 대접하고 싶을 뿐이야.”“당신이 말하는 선생님이 누구예요?”초요는 건달들에게 물어보며 한 손으로는 비상연락처를 눌렀다.“가보면 누군지 알 수 있을 테니 우리가 야만적으로 당신을 차에 끌어다 태우지 않도록 순순히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건달들 중 점잖게 보이는 남자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초요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그러나 그녀가 전화기에 대고 뭐라고 말할 겨를도 없이 경호원 몇 명이 그녀에게 달려왔다.“초요 아가씨, 순순히 따르시죠.”경호원들과 건달들의 행동을 보고 초요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당신들이 말하는 그 선생이 누구예요? 뭣 때문에 날 이렇게 끌고 가려는 거예요?”남자는 초요가 협조적이지 않자 마지못해 한숨을 내쉬었다.“초요 아가씨가 협조하지 않으니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우리 방식으로 당신을 차에 태울 수밖에 없어.”남자는 말하면서 주변에 있던 경호원에게 눈짓을 했다.두 경호원은 초요의 양쪽으로 가서 그녀의 팔을 꽉 잡아 제압했다.“뭐하는 거야! 이거 놔!”초요는 있는 힘껏 발버둥쳤지만 건장한 두 남자에게 제압당해 꼼짝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강제로 차에 태워졌다. 차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이런 상황에서 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치려는 것도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초요는 그들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남사택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다.끝나고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조금 전 초요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가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초요의 핸드폰은 이
고승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그 자리를 떠났다.초요도 따라 일어섰다.“고승겸.”그녀가 소리를 질렀지만 고승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초요도 쫓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눈앞에 남연풍과 고승겸이 스쳐 지나가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아름답고 우아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초요의 기억이 점점 떠올랐다.“당신 사택 선배 누나 아니에요?”남연풍은 붉은 입술을 구부리며 웃었고 담배 한 대를 꺼내 물고는 말했다.“사택 선배? 난 당신이 내 동생 아내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에요.”남연풍의 말뜻을 알아들은 초요는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당신과 고승겸 아는 사이예요? 당신들이 왜 날 여기로 데려왔죠?”남연풍은 초요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하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기묵비 맞죠?”갑자기 여기서 기묵비의 이름이 거론되자 초요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연풍을 바라보는 초요의 눈빛은 이미 넋을 잃은 듯했다.넋이 나간 듯한 초요의 모습을 보며 남연풍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싹 가셨다.“내 동생은 당신을 진심으로 대했고 당신을 위해 어린 두 아이를 키웠는데 당신은 마음속에 늘 기묵비라는 남자를 품고 있었죠. 이 세상에 인정과 사랑이라는 것은 정말 불공평해. 안 그래요?”“하지만 하늘은 늘 공평해요. 그 기묵비라는 남자는 이미 죽었죠. 이것이 당신이 내 동생을 저버린 업보 아니겠어요?”업보라는 말을 듣고 초요는 갑자기 정신이 번뜩했다.초요는 남연풍에게 경멸의 눈빛을 쏘아붙이며 말했다.“만약 이 세상에 정말 업보라는 게 있다면 가장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악행을 저지르고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사람들이죠. ““지금 그 말, 날 두고 하는 말이죠?”남연풍은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는 듯 초요를 노려보며 말했다.“여기 당분간 좀 있
매정하게 내뱉은 남연풍의 말이 차갑게 들려왔다.남사택은 남연풍을 흘끔 바라보고는 초요의 손을 잡고 계속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러나 두어 발짝도 못 가 남연풍의 목소리가 유유히 등 뒤에서 다시 울려 퍼졌다.“남사택, 그녀를 여기 데려온 것은 네가 편히 지내라고 그런 거니까 섣불리 이 문을 나서려고 하지 마.”이 말을 듣고 초요는 단번에 깨달았다.알고 보니 초요는 미끼였던 셈이다.남사택을 이곳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초요를 이용해 그를 유인한 것이었다.남사택은 주먹을 불끈 쥐며 돌아섰다.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배를 피워 대는 남연풍의 모습을 보고 그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남연풍, 아빠 수첩도 봤으면서 왜 그래? 왜 자꾸 이러는 거야?”남연풍은 남사택에게 다가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남사택, 나 이미 어른이야. 설마 네가 이렇게 하면 내 마음속 오랜 앙금이 다 풀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그건 절대 안 돼!”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 그녀는 악다구니를 쓰며 이를 갈았다.남사택도 몰인정한 남연풍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그는 지금 초요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만약 날 여기에 가둬두고 싶다면 날 남겨두고 초요는 보내줘.”남사택이 단호하게 요구했다.하지만 남연풍은 예상대로 남사택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고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한 명도 여기서 나갈 생각하지 마.”그녀는 냉혹하게 말하고는 주변에 있던 시중에게 몇 마디 이르고는 위층으로 훌쩍 올라갔다.단호하게 자리를 떠나는 남연풍의 뒷모습을 보며 남사택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초요는 괴로워하는 남사택의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그럼 여기 있어요. 휴가 받았다 생각하자구요. 당신은 남연풍의 친동생인데 설마 무슨 짓을 하려구요. 그러지는 못할 거예요.”남사택은 초요의 말을 듣고 말없이 한숨만 내쉬었다.그는 미안한 눈빛으
”그런 것 같아요.”초요가 고승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초요는 문득 남연풍에게서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예전에 자신도 기묵비를 위해 충실한 개처럼 일했었다.무슨 일이든 기묵비를 위한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했던 그녀였다.심지어 기묵비를 위해 기모진에게 최면까지 걸었었는데...그러나 그런 시절은 이미 멀리 기억의 저편으로 멀어졌다.그런 시절만 그녀의 기억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마저도 이미 그녀로부터 아주 먼 곳으로 가 버렸다.초요가 더 이상 아무 소용없는 생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던 그때 갑자기 남사택의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기모진이야.”남사택은 초요에게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초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남사택이 기모진의 전화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걱정 마세요. 가능한 한 빨리 해독제를 개발하려고 연구하고 있어요. 요즘 실험실에 쳐박혀 있는 시간이 많아요. 혹시 연락이 안 되더라도 조급해하지 마시구요. 무슨 소식이 있으면 바로 연락드릴게요.”초요는 두 사람의 통화를 듣고 남사택의 뜻을 이해했다.남사택은 기모진에게 그들이 지금 갇혀 있다는 상황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그녀는 갑자기 이 남자가 너무 안쓰러웠다.매사에 남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은 늘 뒷전인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남사택의 노력으로 다행히 기모진도 지금 남사택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하긴 요즘 기모진이 한창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바로 강자풍의 동향이다.기모진이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강자풍은 이틀 후에 경도에 도착한다는 것이다.이를 알게 된 소만리는 가장 먼저 자신의 소중한 딸 여온을 걱정했다.그녀는 여온이 마음속으로 강자풍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어린아이의 순수하고 여린 마음에 강자풍은 뭔가 특별한 존재로 자리 잡은 것 같았다.그러나 그녀는 기여온에게 강자풍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여느 때와 같이 소만리
기여온이 천천히 걸음을 멈추자 담임 선생님은 문밖에 서 있는 남자를 의아한 듯 쳐다보더니 몸을 구부리고 기여온에게 다정하게 물었다.“여온아, 저 오빠 알아? 아는 오빠라면 고개를 끄덕이고 모르는 오빠라면 고개를 가로저어서 선생님한테 알려줘.”담임 선생님의 말이 끝나고 십여 초가 지나도록 기여온은 고개를 가로젓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담임 선생님은 뭔가 좀 이상하다고 여겼다.기여온이 비록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이 기초적인 말은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걸 선생님은 분명 알고 있었다.담임 선생님은 문밖에서 기다리는 남자를 보고는 기여온의 손을 놓고 혼자 그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저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여온이 친척이라고 하셨는데 여온이는 모르는 것 같아요.”담임 선생님은 자신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을 말했다.“내 성은 강 씨예요.”남자는 입을 열었고 그 자리에서 멀리 서 있는 기여온을 바라보며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냈다.기여온은 사탕을 보자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는 듯 맑은 눈을 깜빡거리더니 작은 손을 주머니에 넣어 비슷하게 생긴 사탕 하나를 꺼냈다.문밖에 서 있던 남자는 여온이의 작은 손에 쥐여진 사탕을 보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여온아, 오랜만이야.”남자 강자풍은 인사를 건네며 기여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기여온은 강자풍의 다정한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담임 선생님은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는 듯 기여온에게 다시 물었다.“여온아, 너 정말 이 오빠 알아?”기여온이 이번에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기여온은 강자풍에게 다가가 작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강자풍은 미소를 지으며 기여온 앞에 몸을 구부렸다.기여온의 맑고 큰 눈동자에 한 줄기 찬란한 빛이 반짝거렸다.어린아이는 희고 부드러운 손을 뻗어 강자풍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소중하게 간직해 온 사탕을 강자풍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며 남자에게 꽉 쥐라고 손짓했다.강자풍의 눈빛이 반짝거렸고 기여온의
낯선 사람이 되었다 치더라도 그들의 어린 딸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기여온을 찾으러 갈 수 있을까?유치원 부근의 어린이 공원.겨울인데다 평일이어서 공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씨였지만 이 따스한 햇빛으로도 그의 온몸을 따뜻하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강자풍은 펜스 밖에 서서 회전목마를 신나게 타고 있는 기여온을 보았다.그의 얼굴에는 이전에 보였던 그 온화한 미소가 사라졌다.그는 눈을 내리깔고 손바닥 안에 있는 사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사탕의 겉포장은 이미 퇴색되었고 안에 싸여 있던 사탕도 지난 2년 동안 변질된 것처럼 기분 나쁘게 끈적거렸다.그러나 사탕은 퇴색되고 유통기한이 지났더라도 그들의 특별한 관계는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핸드폰은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분명 소만리와 기모진이 연락을 하려고 안달이 나 있을 거라는 걸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강자풍은 아랑곳하지 않고 회전목마가 곧 멈추려고 하는 것을 보고 다가가 기여온을 기다렸다.회전목마가 멈추자 그는 손을 뻗어 기여온을 살며시 품에 안았다.따뜻하고 보드라운 아이의 감촉이 닿자 강자풍은 마음이 꽉 찬 것처럼 든든했다.그는 기여온을 안고 이곳저곳 놀이 기구를 찾아다니며 그녀가 노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러는 동안 그는 기여온에게 풍선, 인형, 달콤한 솜사탕을 사주었다.분명 어린아이들은 사람을 귀찮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그에게 여온은 조금도 귀찮은 존재가 아니었다.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직도 기여온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그리고 기여온이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친누나 강연 때문이었다.허, 강연.그녀는 죽었다. 다 죽었다.이 세상에 있던 그의 가족은 모두 다 죽었다.“철퍼덕!”강자풍이 딴 데 정신이 팔린 사이 어디선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소만리는 끝내 강자풍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 소만리는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불안했지만 한편으로 강자풍은 절대 기여온을 해칠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다.“소만리, 강자풍이 여온이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 것 같아.”기모진은 기여온의 위치를 소만리의 핸드폰에 전송했다.소만리는 기여온의 위치를 보고 의아해했다.“여온이 몸에 위치 추적기를 달았어?”“우리 아들 걸작이야.”기모진은 자신의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며 으쓱해 보였다.“기란군은 겨우 여섯 살이지만 가끔 보면 우리보다 더 시야가 넓어.”이 점에 대해서는 소만리도 완전히 동의한다.그녀에게 여러 번 사고가 났는데 그때마다 모두 아들 덕분에 기모진은 그녀를 구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하지만 기여온의 위치를 보고 소만리의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여온이가 왜 병원에 있지? 강자풍이 왜 멀쩡한 여온이를 병원에 데리고 갔을까?”“소만리,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바로 가 보면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알 수 있어.”기모진은 다정한 목소리로 소만리의 불안한 감정을 다독거려 주었다.그러나 소만리의 마음은 여전히 조마조마했고 그녀의 불안은 병원에 도착해서도 가시지 않았다.병원에 도착한 후 소만리는 먼저 차에서 내려 병원으로 들어갔다.기모진의 핸드폰에서 지시하는 위치를 따라 빠르게 외래 진료소로 달려갔다.소만리는 급하게 모퉁이를 돌다가 그만 지나가는 남자와 부딪히고 말았다.“죄송합니다. 제가 급해서 그만...”소만리는 정중히 사과하면서 눈을 들어 보았다. 그녀의 눈앞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다만 예전에 그녀가 보았던 얼굴과는 달리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얼굴에는 전에 없던 성숙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강자풍, 안 그래도 널 찾으러 왔어.”소만리는 오만 가지 뜻이 담긴 첫 마디를 내뱉었다.“왜 우리랑 연락을 끊으려 한 거야? 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여온이를 데리러 간 거야? 여온이
뭐!강자풍의 대답은 청천벽력과도 같이 소만리와 기모진의 머릿속에 떨어졌다.한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폭우를 온몸으로 뒤집어쓰는 기분이었다.소만리는 마치 온몸의 산소가 다 빠져나간 듯 눈앞이 캄캄해져 왔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소만리!”기모진은 의식을 잃고 쓰러질 뻔한 소만리를 덥석 끌어안았다.소만리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듯 강자풍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홱 돌려 진료실로 달려갔다.기모진도 강자풍을 한번 힐끔 보고 난 후 소만리를 뒤따라 진료실로 들어갔다.“소만리, 천천히 가.”그는 그녀가 걱정이 되었고 동시에 그의 딸 기여온도 걱정이 되었다.아닐 거야. 뭔가 잘못되었을 거야.멀쩡한 여온이가 왜 백혈병에 걸려?기모진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부정했다. 소만리도 마찬가지였다.소만리는 진찰실 문을 밀고 들어갔고 진찰 중이던 의사는 소만리와 기모진을 보고 ‘엄마' 라고 부르는 기여온의 목소리를 들었다.소만리는 한달음에 기여온에게 달려가 자세를 낮추고 기여온을 안았다.“여온아, 여온아, 엄마한테 말해봐. 어디가 아픈 거야? 엄마한테 보여줘 봐.”소만리는 횡설수설하다가 끝내 눈물을 흘렸다.강자풍이 한 말이 마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단칼에 도륙 내었고 망신창이가 된 심장에서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피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소만리, 너무 흥분하지 마. 여온이가 놀래잖아. 우리 일단 의사 선생님한테 물어보자.”기모진은 소만리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달래주었고 손수건으로 소만리의 눈물을 닦았다.소만리는 얼른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의사 선생님, 우리...”“기여온의 부모님 되십니까?”의사가 되물었다. 소만리와 기모진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네, 우리가 여온이 부모예요.”“마침 잘 오셨어요.”의사는 안타까운 듯 눈을 내리깔고 기여온을 바라보았다.“방금 보호자분 친구가 이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아이를 상태를 보니 출혈이 멈추지 않길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