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사실 이건 간단하게 알 수 있어요. 주방으로 가는 복도에 CCTV가 있거든요. CCTV만 보면 안나가 주방에 들어갔는지 아닌지 알 수 있어요.”“...”이 말이 떨어지자 안나 모녀의 표정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굳어졌고 두 얼굴 모두 하얗게 질렸다.두 사람의 얼굴색이 변하는 것을 본 여지경의 눈에는 순간 실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안나, 네가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은 정말 몰랐어.”“...”안나는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방 밖에 CCTV가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게다가 그녀는 왜 자신의 귀걸이가 냄비 속에 있는지 제대로 변명할 수조차 없었다.오로지 그녀가 지금 인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어머니, 제가, 제가 잘못한 거 알아요!”그러자 안나의 엄마는 갑자기 안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안나, 너 미쳤어? 여기서 네가 인정해 버리면 어떡해? 너 정말...”“...”자신의 말이 떨어지자 그제야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린 안나 엄마는 자신의 말이 안나의 죄를 더욱 확실시하는 증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여지경은 비아냥거리며 가볍게 웃었다.“당신 수준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아니, 승겸 엄마, 내 말 좀 들어봐요...”“무슨 말을 더 들어요!”여지경이 화를 버럭 내며 말을 이었다.“소만리를 쫓아내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쓰다니! 내가 구기자에 얼마나 알레르기가 심한지 몰랐어요?”“승겸 엄마, 나, 난 정말 승겸 엄마한테 해를 끼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진작에 생각했다니까요. 만약에 승겸 엄마가 국물을 한 숟갈이라도 입에 대려고 한다면 바로 막으려고 했었어요!”안나의 엄마는 아직도 변명을 하려고 궁리하고 있었다.“막는다고?”여지경은 헛웃음을 지으며 소만리를 가리켰다.“만약 이 아이가 달려들어 내 국그릇을 엎지르지 않았다면 아마 난 국물을 먹었을 거예요. 그때 당신
소만리는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여지경이 무슨 일로 자신을 찾는 것인지 궁금해했다.“똑똑.”여지경은 다시 노크를 하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소만리, 안에 있는 거 알아. 문 열어.”소만리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다가가 방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여지경은 앞에 서 있는 소만리를 올려다보았다.잠시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던 여지경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아까 일은 정말 미안하구나. 그리고 내가 국물을 못 마시게 막아줘서 고마웠어.”여지경의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에도 소만리는 특별히 놀라지 않았다.방금 안나 모녀의 잘못을 똑똑히 꿰뚫어보고 맹렬히 비난하던 여지경의 모습을 보고 소만리는 여지경이 분명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역시나 짐작한 대로였다.그녀가 이렇게 사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인품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소만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여사님이 괜찮으시면 됐어요.”여지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아름다운 눈이 소만리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넌 잔꾀가 있는 아이로구나. 나도 바보는 아니거든.”이 말을 듣고 소만리는 의아해하며 여지경을 바라보았다.“그 냄비 안에는 처음부터 그 귀걸이가 없었어. 네가 넣은 거야.”여지경의 말에 소만리는 문득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여지경은 그때 소만리의 행동을 다 보고도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복도에는 CCTV 같은 거 없어. 도둑이 제 발 저려 스스로 잘못을 시인한 것뿐이야.”여지경도 보통 잔꾀가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소만리는 여지경의 본모습을 본 것 같아 깜짝 놀랐다.“난 네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적어도 나쁜 마음은 없었어.”여지경의 이 말은 마치 소만리를 칭찬하는 말처럼 들렸다.“승겸이에 대한 네 마음만 진심이라면 앞으로 시어머니로서 널 푸대접하진 않을 거야.”“...”소만리는 여지경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인정해 줄지 몰랐다.
초요가 깜짝 놀라자 기묵비는 얼른 손을 들어 가볍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그러나 갑자기 팔을 움직여 그의 상처에 무리가 간 것이 틀림없었다.기묵비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지만 입꼬리는 한껏 올라간 채 초요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겁내지 마. 나야.”그가 입을 열었다. 말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초요는 기묵비의 손을 확 밀치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그녀의 놀란 모습을 보니 기묵비의 가슴이 아려왔다.그때 자신의 품에 쓰러져 하염없이 피를 쏟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니 그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초요는 기묵비의 얼굴에서 슬픔과 애틋함을 보았다.그녀는 왠지 호기심이 느껴졌고 자신의 마음속에 무언가 뭉클한 기운이 명치끝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왜 울어요?”초요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기묵비는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약간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기뻐서 그래.”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만은 눈앞에 있는 사람을 깊이 바라보았다.그녀를 다시 볼 수 있어서 기뻤고 그녀가 무사해서 여한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기묵비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도와줘서 고마워. 날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죽었을 거야.”기묵비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난 이제 괜찮으니 더 이상 폐를 끼치지 않을게.”기묵비가 아직 성하지 않은 몸으로 돌아서자 초요는 망설임 없이 쫓아갔다.“이 시간에 어딜 간단 말이에요? 당신을 해친 사람들이 아직 주변에 있을 수도 있잖아요. 지금 나가면 또 다칠 수 있어요.”기묵비는 걸음을 멈추었고 암담했던 그의 눈빛에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자신에 대한 그녀의 과분한 관심에 그는 정말 더는 여한이 없었다.“가더라도 날이 밝을 때 가세요.”초요는 기묵비에게 다가갔다.“날이 밝으면 우선 남편에게 한 번 더 부상에 대해 체크를 받은 다음에 그때 가셔도 늦지 않아요.”기묵비도 마음속으로는 초요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지금
뭔가 무거운 것이 심장을 세게 강타하듯 남사택의 말이 초요의 심장에 떨어졌다.초요는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리는 것 같았다.초요.남사택이 말하길 다시는 초요를 이 남자 곁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말했다.남사택이 말한 초요가 나를 말하는 것일까?역시나 내가 초요였던 거야?초요는 놀라서 그 자리에 멍하니 얼어붙고 말았고 모든 신경이 저절로 기묵비에게 향했다.그녀는 기묵비가 옥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고 청아한 얼굴에 더없이 아쉬워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걱정 마, 난 더 이상 초요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을 거야. 나도 봤어. 그녀가 지금 네 곁에 있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려.”기묵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난 그녀에게 행복을 줄 방법이 없어. 그게 안타까울 뿐이야.”“안타까워요?”남사택이 비웃으며 말을 했다.“정말 그게 안타까웠다면 그때 어떻게 당신 자신을 위해서 사람을 시켜 초요에게 총을 쏘라고 할 수 있었겠어요!”헉.그날의 일을 언급하자 기묵비의 안색이 갑자기 냉랭해졌고 고통의 빛이 그의 미간을 맴돌았다.“초요가 운이 나빴더라면 당신이 지금 초요를 볼 수나 있었을까요? 그녀는 이미 예전의 그 불미스러운 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당신이란 사람을 깨끗이 잊었어요. 이제 겨우 그녀가 잘 살기 시작했는데 왜 나타나서 그녀의 평온한 삶을 방해하시는 거예요?”남사택의 구구절절한 말에 기묵비에 대한 원망이 가득 서려 있었다.남사택은 잠시 한숨을 쉬더니 기묵비를 향해 물었다.“기묵비, 정말 사랑이 뭔지 알아요? 당신이 정말 초요를 사랑한 적이 있기나 했어요? 당신이 지금 생각하는 사랑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일 뿐이고 스스로에게 속죄하려는 마음일 뿐이에요.”기묵비는 남사택의 말을 듣고 문득 정신이 멍해졌다.사랑이 무엇인가?도대체 사랑이란 게 무엇이란 말인가?그는 온 신경을 모아 머릿속을 뒤져보았지만 그가 초요를 사랑했던 흔적
정처도 없이 한참을 걷던 기묵비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눈앞의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보였다.그는 정말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일단 일어난 일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그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끝없는 회한이 그의 가슴을 적시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기묵비!”갑자기 험악한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기묵비가 눈을 뜨자 희뿌연 시야에 또 그 건달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그때 초요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초요를 위해 올바른 길을 가기로 결심한 그는 이전에 하던 사업을 모두 포기했었다.하지만 그를 따르던 부하들은 반란을 일으켰다.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들은 그를 끝까지 쫓아다녔다.그도 그들의 습성을 알고 있었다.한때는 호형호제하던 사람들이었지만 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었다.이 세상에서 그를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사랑한 초요, 단 한 사람이었다.“기묵비, 또 어디로 숨으려고?”선두에 선 남자는 칼을 들고 기묵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어차피 이제 이런 장사하고 싶지 않다면서 왜 형제들한테 좋은 길을 열어주지 않는 거야?”“그 물건들, 지금 창고에서 썩고 있잖아. 그게 다 돈인데! 당신은 원하지 않는다지만 우리는 원한다고, 그 돈!”“기묵비, 회사를 우리에게 넘길 마지막 기회를 줄게. 당신이 죽은 사람이나 계속 지키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렇지만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을 방해하지는 마. 안 그러면 우리가 당신도 그 죽은 초요 옆에 같이 묻어줄 테니까!”기묵비는 원래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이 아니었고 무감각한 사람에 가까웠지만 이 사람들이 죽은 초요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을 하자 갑자기 기묵비의 분노가 마음속에서 솟구쳐올랐다.기묵비가 회사를 전혀 양도할 의사가 없자 칼을 쥔 그 세 명의 건달들은 일제히 기묵비를 향해 손을 쓰려고 달려들었다.기묵비는 이미 온몸에 상처투성이
비가 내리던 밤이었다.지금처럼 이렇게 건달들에게 둘러싸인 기묵비는 심한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초요는 우산을 쓰고 가서 그를 구했다.초요는 기묵비를 안고 빗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방금 눈앞을 스쳐 지나간 장면은 그녀에게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잠시 헷갈렸다.인기척을 듣고 뛰쳐나온 남사택은 먼 곳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두 실루엣을 보고 황급히 달려왔다.“초요!”초요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온몸이 피로 물든 기묵비를 보고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뜬 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기묵비! 죽지 마!”울부짖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남사택은 초요가 울부짖는 소리에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그는 초요의 곁으로 얼른 달려가 의식을 잃은 기묵비를 보고 즉시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불렀다.구급차가 도착하기 전 남사택은 기묵비에게 응급처치를 했다.남사택이 응급조치를 하는 과정에서도 초요는 계속 넋이 나간 사람처럼 옆에 서 있었고 두 어린아이가 초요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녀는 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진 기묵비를 지켜보는데 여념이 없었다.기묵비는 결국 병원으로 보내졌다. 흉기가 그의 가슴을 찔렸고 다행히 급소를 다치지는 않았지만 출혈이 너무 심했다.기묵비에게 급히 수혈이 필요하다는 말에 초요가 먼저 나섰다.“의사 선생님, 저와 그 사람은 혈액형이 같으니 저 수혈할 수 있어요.”“혈액형이 같다고 바로 수혈할 수 있는 게 아니라...”“저 알아요. 내 피를 그 사람에게 줘도 된다는 사실을 전 잘 알고 있어요.”초요의 의지는 매우 확고했고 눈빛도 결연했다.남사택은 초요의 뒤에 서서 이런 초요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점점 더 가슴이 조여왔다.그는 초요가 무사히 수혈을 할 수 있게끔 채혈실로 데리고 가서 채혈을 마치고 난 후 복도 의자에 앉아 기묵비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남사택은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
그녀는 원래 핑계를 대고 외출을 하려고 했다.아래층으로 내려오자마자 마침 고승겸과 그의 어머니 여지경이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소만리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여지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리 와서 같이 아침 먹자.”고승겸도 따라 입을 열었다.“이리 와, 마침 물어볼 게 있어.”소만리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식탁으로 가서 그들 곁에 앉았다.소만리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여지경의 눈빛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생각에 빠져 있던 소만리는 문득 여지경이 입을 여는 소리를 들고 정신을 가다듬었다.“네가 직접 만든 어제 저녁은 정말 만족스러웠어. 그래서 오늘 아침은 내가 직접 만들었단다. 너도 먹어봐.”“...”아침을 만들어 주다니?소만리는 정말 뜻밖이었다.그리고 구기자가 여지경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도 다시 한번 확실히 느끼게 되었다.“그럼 아침부터 먹자. 먹고 나서 얘기할게.”고승겸은 아침 햇살 같은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여지경이 만든 아침을 맛보았는데 정말 맛있었다.역시 루이스 집안의 여인들은 얼굴도 예쁘고 요리 솜씨도 일류였다.하지만 소만리는 자신이 이 집안에 들어가야 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승겸이 왜 기모진을 조사하는지 이유만 알아낸다면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내가 경도에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듣자 하니 경도 출신이라던데, 그럼 나한테 길 안내 좀 해 줄 수 있을까?”여지경이 소만리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소만리는 오늘 마음속으로 기모진을 보러 갔다 오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지경의 부탁을 완곡하게 거절하려고 했다.그러나 고승겸이 그녀의 말에 앞서 바로 승낙해 버렸다.“소만리도 어차피 오늘은 별로 할 일이 없으니 같이 나갔다 오면 되겠네.”“...”소만리는 할 말이 없었다.고승겸의 말을 들은 여지
소만리는 여지경에게 대답할 겨를도 없이 여지경의 손을 힘껏 잡고 사람이 많은 곳으로 달려갔다.“빨리 뛰세요!”“뭘 뛰어!”여지경은 줄곧 고귀하고 우아한 귀부인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행동만 했을 뿐 여태껏 그런 행동의 폭이 큰 동작을 해 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소만리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니 당연히 여지경의 기분이 언짢았다.“소만리, 도대체 왜 날 끌고 도망치는 거야?”여지경은 소만리의 손에서 벗어나려다가 검은 옷과 마스크를 한 두 남자가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말을 삼켰다.두 남자는 매우 험상궂어 보였다.그제야 여지경은 소만리가 왜 자신을 끌고 도망가려는지 알게 되었다.“너희들은 누구야? 왜 우리 길을 막고 있어?”여지경은 심각한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두 남자에게 물었다.그러나 두 남자는 여지경의 묻는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았고 그중 한 명은 여지경을 가리키며 경고했다.“당신과는 상관없어. 당신은 그냥 잠자코 있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당신까지 잡아갈 수 있어!”이 말을 듣고 소만리는 두 남자가 자신을 잡으러 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여지경도 두 남자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들었지만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백주대낮에 감히 사람을 납치할 생각이야?”“그래. 납치하러 왔어.”남자는 음침한 대답을 내뱉으며 시선을 소만리에게 고정시켰다.여지경은 핸드폰을 꺼내 고승겸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남자가 핸드폰을 사정없이 바닥에 떨어뜨렸다.여지경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도대체 당신들 누구야? 왜 우리 며느리를 잡아가려는 거야? 원하는 게 돈이야?”“돈이라면 오히려 쉬웠지. 이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남자는 뚫어져라 소만리를 쳐다보았다.“순순히 우리랑 함께 가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너희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거야.”소만리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지금은 도망치고 싶어도 퇴로가 없었다.“그래, 내가 순순히 너희를 따라갈 테니 이 분은 난처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