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진.”소만리는 화난 척하며 기모진의 말을 끊었고 서운한 눈빛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평생 당신은 오직 나에게서만 사랑을 느꼈고 나 또한 마찬가지야.”기모진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던 근심이 순식간에 흩어졌다.“당신의 그 말이 듣고 싶어서 일부러 질투하는 척해 봤어.”“뭐? 척하는 거였어?”소만리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그럼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한 가지 더 알려줄게.”“무슨 일?”“나 그 사람이랑 약혼했어.”“뭐?”기모진이 깜짝 놀라며 표정이 돌변했다.“당신이랑 그 사람이 약혼을 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당신 지금 또 질투하는 거지? 그지?”소만리의 얼굴에 모처럼 장난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그러나 기모진은 다급한 듯 따졌다.“소만리, 얼른 제대로 말해봐.”남자의 애타는 모습을 지켜보던 소만리는 그제야 차근차근 해명했다.“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기 위해 그냥 가짜 커플 행세 좀 했어.”기모진은 소만리의 설명을 듣고 잘생긴 얼굴에 여전히 근심을 가득 드리운 채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소만리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이번엔 정말 질투하는 거지?”기모진의 그윽한 눈빛이 번쩍였다. 역시나 이번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소만리도 고승겸과 약혼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더욱 중요한 일은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고승겸의 신뢰를 얻어 그가 왜 기모진을 조사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었다.기모진의 기분이 여전히 언짢은 것을 보고 소만리는 먼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모진, 걱정하지 마. 난 내 자신을 잘 보호할 거야. 게다가 그 사람 성격이 좀 이상해. 괴팍하다고 할까? 암튼 가끔은 나한테도 엄청 냉담하게 굴거든. 다른 사람이 당신 아내를 좋아할 것 같아? 그런 건 걱정 마. 알았지?”소만리는 남자의 팔을 흔들었다.“알았어. 알았어. 화내지 마. 내가 한 가지 더 말해줄게.”“무슨 일인데?”“그 고승겸
기모진이 이렇게 이해해 주니 소만리는 너무 기쁘고 위안이 되었다.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모진,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알았어.”기모진이 화답했다.막내아들을 도우미에게 맡긴 후 기모진은 소만리를 고승겸이 있는 집 근처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이미 빗줄기는 잦아들어서 소만리는 혼자 우산을 쓰고 고승겸의 집으로 들어갔다.고승겸은 거실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책을 뒤적이다가 마스크를 쓰지 않고 돌아온 소만리를 보고 몇 초간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시킨 뒤에야 입을 열었다.“어젯밤에는 내 곁에 남아 있고 싶다고 더 이상 기 씨 집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오늘 아침부터 거길 간 거야?”“몇몇 소지품이 아직 거기에 남아 있어서 가지러 갔었어요.”고승겸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물건은 가져왔어?”“그럼 이제는 다시 그쪽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소만리는 자신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승겸에게 대답했다.“그래요. 다시는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소만리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승겸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나 소만리에게 다가갔다.“당신 밥 할 줄 알아?”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할 줄 알아요.”“할 줄 몰라도 상관없어. 가르쳐 줄 사람이 있어.”“겸 도련님 말 뜻은 그러니까...”“오늘 저녁 부모님과 친척 몇 명이 와서 저녁 먹을 거야. 당신이 준비 좀 해.”그녀에게 오늘 저녁상을 차리라고 하다니 소만리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다른 선택권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고승겸이 그녀를 부엌으로 데려갔다. 벌써부터 요리사와 파티시에가 소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사실 소만리의 음식 솜씨는 훌륭했기 때문에 따로 가르쳐 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그러나 고승겸은 그녀를 위해 요리사를 섭외하였고 덕분에 그녀도 자연스럽게 묻어갈 수 있었다.
”아우! 깜짝이야! 언제 왔어?”안나는 자신의 엄마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원망하듯 말했다.안나의 엄마는 눈앞의 손질된 닭을 보고 말했다.“너도 참 조심성 없지! 이런 일을 하려거든 문을 잠그고 해야지. 내가 들어왔으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들어와 보기라도 했으면 넌 이미 끝장이야!”안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누군가 들어오더라도 나름대로 핑계를 다 생각해 놓았지.”그녀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흥, 오늘 밤 그 성형괴물이 얼마나 예쁜지 보자구! 나중에 어머니가 구기자가 들어간 삼계탕을 한 숟갈 입에 대면 그 자리에서 바로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것이고 그때 그 성형괴물이 어떻게 당하는지 똑똑히 볼 거야!”“정말 이렇게 하면 될까?”안나의 엄마는 조금 걱정이 되는 듯 말했다.“승겸이가 그 여자를 감싸고돌지 않을까?”“겸이 오빠가 그 여자를 감싸 줘서 일이 뜻대로 안 되면 또 다른 방법을 준비하면 되지.”안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자작부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 성형괴물도 될 수 없어. 절대 그 여자가 내 위에 올라서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안나는 이를 악물었고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부엌을 떠났다. 안나의 엄마도 재빨리 부엌을 빠져나왔다.그녀는 여지경에게 일이 벌어졌을 때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걱정되었다.소만리는 방으로 돌아가 30분 동안 휴식을 취했고 쉬는 동안 은밀히 기모진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했다.그 후 그녀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요리를 시작했다.도우미가 도와주었기 때문에 소만리는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다.요리하는 동안에 고승겸이 한 번 부엌으로 들렀다.그는 소만리가 어떻게 요리를 하는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조금 더 빨리 움직이도록 채근하기 위해서 들렀고 어떤 요리에도 구기자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그는 여지경이 구기자 알레르기가 있음을 재차 상기시켜주었다.소만리도 이미 여지경이 구
고승겸은 다정하게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소만리, 이리 와 봐.”고승겸의 말에 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고 고승겸이 지정한 자리에 앉았다.고승겸도 그녀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았다.이를 지켜보던 안나는 눈에서 피가 날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안나의 엄마는 조용히 안나의 손을 툭툭 건드리며 안나에게 눈짓을 보냈다.두 모녀는 재빨리 눈빛을 교환하고는 몇 마디 주고받았다.“조금 있으면 이 성형괴물의 좋은 구경을 볼 텐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지 않게 조심해.”“알았어. 조금 있으면 절대 저렇게 웃지 못할 테니까!”안나는 미소를 보이고 있는 소만리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심호흡을 했다.안나는 최대한 기품 있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겸이 오빠와 저는 아주 오래된 사이죠. 겸이 오빠가 이렇게 마음에 드는 약혼녀를 만나게 되다니 저도 너무 기뻐요.”“겸이 오빠, 소만리. 약혼 진심으로 축하해.”그녀는 고승겸과 소만리를 향해 와인잔을 치켜세우고는 자신의 와인잔을 단숨에 들이켰다.소만리와 고승겸은 바보가 아니다.안나가 이렇게 말하는 게 진심이 아니란 걸 당연히 잘 안다.그러나 소만리는 웃음을 잃지 않고 안나를 바라보며 와인잔을 들고 와인을 마셨다.안나의 행동도 진심이 아니고 소만리의 행동도 진심이 아니다.어쨌든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두 사람 모두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올케언니, 며느리 주량이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하지만 여자가 술을 잘 마시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야. 시어머니가 좀 가르쳐 줘야겠어. 만약 매일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라도 된다면 그 얼마나 집안 망신이야.”방금 그 셋째 고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녀의 말투는 아무리 들어도 빈정거리는 것 같았다.소만리는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셋째 고모님께서 말씀하신 집안 망신시키는 일이란 것이 꼭 술을 마실 수 있느냐 없느냐와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오히려 그 장소에 맞지
여지경은 구기자에 알레르기가 있어서 먹기는커녕 만지기만 해도 온몸이 가렵고 잠시 후 붉게 발진이 일어나는 등 증상이 아주 심하다.많은 의사들을 만나봤지만 방법이 없었다.의사들은 그저 여지경이 특수한 체질이라고만 할 뿐이었다.그런데 지금 여지경이 구기자가 들어간 삼계탕을 먹으려는 것이었다.소만리는 이제 끝장이 날 것이다.오늘 저녁 음식에 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소만리에게 있다는 것을 안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여지경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소만리는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안나는 생각하면 할수록 즐거워졌고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여지경이 드디어 삼계탕 국물을 떠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녀가 숟가락을 놓았다.“이 삼계탕도 네가 끓인 거야?”여지경이 갑자기 소만리를 향해 말했다. 여지경의 표정이 뭔가 미심쩍어 보였다.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제가 끓였는데, 뭐 이상한 거라도 있으세요?”여지경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겼다.“이상한 거 없어. 삼계탕 냄새가 너무 구수해서 물어봤어. 요리 솜씨가 쓸 만한 모양이구나. 이제 국물을 떠먹어 보고 맛까지 좋다면 두 번째 관문을 넘은 셈이 되는 거야.”“...”소만리는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오늘 밤 이렇게 저녁 상을 마련하라고 한 것도 다 그녀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소만리는 다시 한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도대체 어떤 가문이길래 이렇게 옛날 궁궐에서 왕비를 뽑듯이 이런 시험을 거쳐야 한단 말인가.첫 번째 관문은 용모.두 번째 관문은 요리 솜씨.그럼 그 다음에는 또 뭐가 있을지 소만리는 정말 감도 오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드리우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흥, 두 번째 관문을 넘었다고? 이 국물을 먹고 나서나 그렇게 말씀하시지!이 국물을 먹고 나면 아마도 소만리를 죽이고 싶어질 거야!“아 삼계탕, 정말 맛있어. 어떤 재료를 넣은 거야?”고승겸도 한 마디
이들의 대화를 듣고 소만리는 이 삼계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여지경은 안나와 안나 엄마의 말에 속아 넘어가 소만리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다시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뜨려고 했다.안나와 안나의 엄마는 약속이나 한 듯 음흉한 미소를 주고받으며 눈을 크게 뜨고 여지경이 숟가락을 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여지경이 국물을 한 숟갈 뜨려는 순간 소만리는 벌떡 일어나 팔을 뻗어 여지경이 들고 있던 국그릇을 툭툭 쳤다.여지경의 손이 기울어지더니 손에 들고 있던 국그릇이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아!”여지경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릇 파편과 국물이 얼굴에 튀는 걸 피했다.여지경은 고개를 들어 사나운 눈빛으로 소만리를 노려보았다.“소만리, 너 무슨 짓이야 이게! 나한테 저녁을 대접하려는 게 아니라 날 괴롭히고 싶었던 거야?”갑작스러운 소만리의 행동은 여지경뿐만 아니라 식탁에 모인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했다.고승겸의 얼굴빛도 확 가라앉았고 불쾌한 표정으로 차갑게 입을 열었다.“당신 왜 그래?”안나와 안나의 엄마도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척했지만 한 마디 거드는 데는 역시 빠질 수 없었다.“소만리, 이게 무슨 짓이야? 어떻게 어머니한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소만리, 너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이런 짓을 해! 승겸이 너를 감싸고돈다고 하니까 아주 제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너 지금 예비 시어머니한테 대드는 거야? 지금도 이렇게 대하는데 나중에 이 집 안주인이라도 되면 더 한 일도 하겠어!”안나의 엄마는 옆에서 불난 집에 기름을 드럼통으로 들이붓고 있었고 여지경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방향을 바꿔 고승겸에게 화살을 돌렸다.“승겸아, 너 이러면 안 돼. 이런 여자를 집안에 들이면 나중에 네 엄마가 더 많은 모욕을 당할 거야.”고승겸은 눈살을 찌푸리며 언짢은 눈빛으로 안나의 엄마
소만리의 따끔한 시선이 느껴지자 안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즉시 허둥지둥 시선을 피하더니 옆에 있던 자신의 엄마를 보았다.안나의 엄마는 정신을 차리고 바로 소만리에게 화살을 돌렸다.“소만리, 오늘 밤 저녁은 모두 네가 준비한 거잖아. 그런데 지금 책임을 회피하려는 거야? 승겸이 엄마가 이 국물을 먹었더라면 어쩔 뻔했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너 알아?”소만리는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겨냥하는 안나의 엄마를 당당히 쳐다보며 말했다.“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저는 모르지만 당신들 모녀는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안나의 엄마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소만리, 그게 무슨 뜻이야?”안나가 일부러 억울하고 당황스러운 척하며 물었다.소만리는 빙긋이 웃었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신들 모녀가 잘 알 텐데.”“너, 소만리! 말 똑바로 해!”안나의 엄마는 화를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승겸 엄마, 이 여자 좀 보세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고 있어. 자기가 잘못을 저지르고 인정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나와 안나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잖아요. 무슨 이런 여자가 다 있어!”“맞아, 언니. 이런 여자를 어떻게 루이스 가문에 들이겠어.”“맞아, 절대 들여보내선 안 돼.”“승겸아, 너도 봤지. 이 여자는 정말 안하무인이구나.”고모와 이모들이 싸잡아 소만리를 비난했다.안나와 안나의 엄마는 이 광경을 보고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그러나 여지경은 점점 더 안색이 나빠졌다.“승겸아, 잘 생각해 봐. 이런 여자라면 난 절대 우리 가문에 들이지 않을 거야. 이렇게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고도 회피할 생각만 하다니. 그런 인품을 가진 여자는 네 짝이 될 자격이 없어!”여지경의 비난과 책망을 들으면서도 사실 소만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예전에 벙어리 냉가슴 앓던 그 소만리가 아니었다.오직 그녀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이 두 모녀의 본색을 드러내게 할 수 있을까 방법을 구상하고 있었다.
안나의 엄마는 급히 국자를 가지고 다가와 냄비에 넣고 계속 휘휘 젓다가 젓가락으로 닭의 배를 확 갈랐다.강한 구기자 냄새가 물씬 퍼지고 주먹만 한 구기자 뭉치가 토종닭의 뱃속에 들어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여지경은 구기자를 보고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려 버렸다.그녀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정말 구기자를 극도로 혐오스러워하는 것 같았다.“소만리, 너 이 악독한 것! 승겸이 분명히 구기자 넣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이렇게 버젓이 구기자를 숨겨 넣어! 너 분명히 날 죽이려고 작정한 거지? 어!”이를 지켜보던 고승겸의 표정도 싸늘해졌다.“당신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그의 말투는 비난과 불만과 실망이 담겨 있었다.“무슨 조심? 조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딱 봐도 아예 작정하고 고의적으로 넣은 게 틀림없어! 일전에 승겸이 엄마가 한 말 때문에 앙심을 품고 이런 짓을 꾸민 거라고! 정말 악랄해!”안나의 엄마는 절호의 찬스라고 여겼는지 맹공격을 퍼부었다.안나는 이 모습이 매우 만족스러웠다.비록 여지경이 국물을 먹지는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아니 훨씬 더 잘 된 것 같다.이 모든 사람들의 의심과 질타, 분노에도 불구하고 소만리는 여전히 침착한 모습을 보였고 말없이 식탁으로 다가가 숟가락을 들어 냄비를 두어 번 휘저었다.“그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 구기자가 들어 있지?”소만리는 계속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정말 구기자 안 넣었어요.”소만리의 억울하고 곤혹스러운 모습을 보며 안나는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네가 안 넣었으면 누가 넣었겠어? 이 삼계탕은 네가 끓인 거잖아!”안나의 엄마는 이 일에 쐐기를 박듯이 확실하게 말했다.여지경은 극도로 화가 나서 소만리를 노려보았다.“이 냄비 내 눈앞에서 당장 치워! 그리고 너도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다시는 너 같은 여자 꼴도 보기 싫어.”여지경은 소만리에게 말한 후 고승겸에게 시선을 돌렸다.“승겸아, 이 여자가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