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너무 많은 사고와 돌발 상황에 부딪혔었다.기모진은 매사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특히 소만리와 관련된 일에 절대 타협이란 있을 수 없었다. 한껏 경계하며 문을 열었더니 작업복을 입은 채 웃고 있는 종업원의 모습이 보였다.“안녕하세요. VIP 손님. 한 시간 후에 저희 호텔 테라스에서 가면무도회가 열리는데 두 분께서 관심이 있으시면 와주셔서 자리를 빛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알고 보니 종업원이 초대장을 주려고 온 것이었다. 소만리는 초대장을 받았다.“고맙습니다.”“아닙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종업원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돌아섰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원래 휴가를 즐기려고 놀러 온 터라 이런 파티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그런데 기모진은 이런 행사가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고 의상도 이미 준비해뒀다.소만리는 이 사실에 깜짝 놀랐다. 심지어 그는 그녀가 입을 검은색 롱 드레스도 다 준비해두고 있었다.기모진은 드레스를 직접 그녀에게 입혀주고는 전신거울 앞에 선 그녀를 보고 다정하게 뒤에서 끌어안았다.“여보, 당신 정말 너무 아름다워.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다른 남자들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소만리는 거울 속 남자와 마주 보고 웃으며 손을 들어 잘생긴 그의 얼굴을 살며시 감쌌다.“무슨 질투를 그렇게 해. 어차피 난 당신 건데.”“정말? 당신이 뽀뽀해 주지 않으면 못 믿을 것 같은데?”남자가 애교를 부리고 떼를 쓰는 모습을 소만리는 즐기는 듯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돌려 기모진의 입술에 세 번 연거푸 뽀뽀를 했다.“이제 믿을 수 있겠어?”남자의 얼굴에선 싱글벙글 미소가 떠나질 않았고 이렇게 환한 미소는 오직 소만리 앞에서만 보였다.한여름 밤 서늘한 바람이 그들의 마음을 간지럽혔다.소만리가 기모진의 손을 잡고 테라스로 나왔을 때 아직 무도회가 시작될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그 안의 분위기는 이미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각자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한 듯 독특한 복장을
그러나 바 근처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면을 쓴 한 남자가 다가와 소만리에게 춤을 권하였다.화려한 불빛 아래 기모진이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소만리는 지금 기모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당장이라도 한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그의 차가운 눈동자만 보아도 소만리는 지금 이 남자가 아무리 얼음이 가득 든 음료를 마셔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가슴속에 불쾌한 불꽃이 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기모진의 외모는 이미 출중하기로 적수가 없을 정도인데 지금은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그에게 춤을 청하는 여자가 없었다.소만리는 손에 찬 음료수 한 잔을 들고 화가 잔뜩 나 있는 남자를 놀려줄까 하던 참에 갑자기 마녀 복장을 한 젊은 여자가 기모진에게 다가왔다.무도회장의 음악 소리가 귀를 찔렀지만 소만리는 여자가 기모진에게 인사하는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모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참 신기한 일도 다 있지.”기모진은 처음에는 누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모르고 있다가 지금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여자는 아주 큰 호박 가면을 쓰고 있어서 기모진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여인은 기모진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단번에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환상적인 불빛이 여자의 얼굴을 비추었다.소만리의 눈에 매혹적인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웃음을 머금은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사람을 유혹하듯 빛나고 있었다.소만리의 가슴속에 질투의 화신이 불을 당기고 있었다.그녀는 방금 기모진이 자신 때문에 질투했던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그러나 이해는 이해고 질투는 질투였다. 소만리의 질투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그런데 가만 보니 이 여자는 가면을 쓴 기모진을 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기모진의 이름을 친숙하게 불렀다.소만리가 기모진에게 이 여자에 대해 물어보려 했을 때 기모진의 잘생긴 얼굴에 의아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았다.소만리는 저도
기모진은 바싹 소만리를 뒤쫓아 나갔다.이미 그녀의 심기가 불편한 것이 뒷모습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다만 지난 반년 동안의 시간을 생각해 보니 그는 정말이지 다시 되돌아보기 싫었다.호텔 근처 모래사장에 선 소만리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밤바람을 맞으며 거침없이 걸어갔다.“소만리.”기모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소만리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녀는 결코 이 남자에게 화낼 생각은 없었지만 확실히 마음이 편지는 않았다.기모진은 소만리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바닷바람을 맞아 부드럽게 나부끼는 그녀의 단발머리와 어둑어둑한 가로등 아래 수심에 가득 찬 소만리의 작은 얼굴을 보았다.그는 미안한 듯 검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팔을 들어 소만리를 힘껏 품에 안았다.“소만리, 쓸데없는 상상하지 마.”기모진은 소만리를 꽉 껴안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그 여자와 난 오로지 친구 사이일 뿐이야.”소만리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당신이 가면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도 당신을 알아보던 여자야. 당신을 모진이라고 친근하게 부를 정도였다고.”“소만리.”기모진은 품에서 그녀를 풀어내고는 소만리의 양쪽 뺨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미소 지었다.“소만리, 지금 질투하는 거야?”소만리는 딱히 부인하지 않고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기모진은 얇은 입술을 들썩이며 기분 좋은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소만리, 질투하는 모습 너무 귀여워. 너무 기분이 좋아.”“난 하나도 기분이 안 좋아.”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소만리는 아직도 웃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모진, 당신이 실종된 그 반년 동안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내가 물었지만 당신은 매번 입을 다물거나 어물쩍 넘어가려고 웃기만 했어. 그렇지만 난 정말 그 시간들이 너무나 궁금하고 신경이 쓰여.”소만리의 말을 듣자 기모진의 얼굴에도 웃음이 사라졌다.“모진, 우리 지금까지 온갖 풍파 다 겪었잖아. 서로 숨길 게 뭐가 있어? 난 당신을
소만리는 이미 그런 아픔 따위 초월한 사람처럼 태연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니 점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내 머리색이랑 눈동자 색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알아?”기모진은 웃으며 물었다.“강연이 나에게 준 만성 독소와도 일정 부분 관련이 있긴 하지만 완전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그는 아름다운 선을 자랑하는 고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더 큰 이유는 내가 좀 더 오래 살려고 수많은 약물들을 이것저것 시도했었기 때문이야. 아까 만났던 그 여자는 만성 독소가 퍼지는 것을 억제시키는 약물을 개발한 의사였는데 그 반년 동안 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절망 속에서 발악하고 있었어.”“그리고 그 여자가 말하기를 이 독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기껏해야 2년밖에 살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가족들 품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굉장히 모순된 삶에 처하게 될 거라고 했어.”기모진은 그때의 상황이 떠오른 듯 망연자실한 웃음을 지었다.“난 당신과 함께 있고 싶고 당신한테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지만 잠시 같이 살겠다고 당신한테 잊지 못할 더 큰 아픔을 주고, 게다가 여온이, 우리 여온이가 이제 아빠라고 알아보는데 갑자기 아빠를 잃어버리는 슬픔을 안겨주게 될까 봐 너무나 두려웠어. 그래서 여온을 아주 차갑게 대했어. 날 미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중에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이 말을 듣자 소만리는 명치끝이 저릿하게 아파왔다.“모진.”“소만리.”기모진은 소만리의 말을 끓으며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내가 잘못했어. 아이들한테 냉담하게 대하면 안 되는 거였어. 하루를 살더라도 그 하루를 위해 긍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살았어야 했어.”남자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소만리는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눈시울을 적셨다.“바보, 울지 마. 나 이제 회복되고 있잖아?”기모진은 소만리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애틋하게 닦아주며 말했다.“울지 마. 응?”기모
메시지의 내용을 보고 기모진은 뒤돌아보며 다시 소만리를 보았다.그녀의 잠을 방해할까 봐 그는 가볍게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런데 기모진이 슬리퍼를 신고 가려는 순간 갑자기 소만리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기모진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괜히 마음이 켕기는 듯 돌아섰고 소만리가 잠꼬대하는 것을 보고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죄의식은 지울 수 없었다.소만리.미안해.내가 일을 다 처리하면 돌아와서 당신과 계속 함께 있을게.기모진은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살금살금 스위트룸을 빠져나갔다.호텔 테라스.무도회가 끝난 이 시각, 텅 빈 고요함만이 공허함을 채웠다.기모진이 들어가자 바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오렌지빛 조명 아래 여인은 거나하게 취한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보랏빛 물결이 일렁이듯 긴 그녀의 머리는 매끄러운 어깨선을 타고 등 쪽으로 늘어져 있었고 볼륨감 있는 몸매는 불빛 아래에서 더욱 요염함을 뿜어내고 있었다.그러나 기모진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는 곧장 그녀 뒤로 가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셜리, 우리가 다시 만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셜리라는 이름의 여자는 술을 마시려고 잔을 들다가 기모진의 목소리를 듣고 술잔을 내려놓았다.풍성한 웨이브 머리를 살짝 쓸어 넘기며 그녀는 천천히 기모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불빛이 얼큰히 취한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그녀의 모습은 더욱 농염하고 여성스러워 보였다.그녀는 바닥에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한 걸음 한 걸음 기모진 앞으로 다가와 손을 들어 기모진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기모진은 얼른 그녀의 손을 피했다.“쓸데없는 짓 하지 마.”“이게 쓸데없는 짓이야?”여인은 붉은 입술을 들썩이며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모진, 당신 잊은 것 같은데. 그 반년 동안 당신과 나 사이에 이런 ‘쓸데없는'일이 있었지. 그것도 아주 많이.”
셜리라는 여인은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으며 냉소를 흘렸다.“남사택, 내가 절대 당신한테 질 리가 없는데. 당신이 정말 기모진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흥. 내 실험용 대상을, 네가 다시 끼어들 틈을 내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기모진은 테라스에서 호텔 입구까지 쫓아갔지만 그 어디에도 소만리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소만리가 방금 그 대화를 듣고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기모진은 너무나 걱정되었다.더구나 지금은 한밤중이었고 여기는 낯선 땅이었다.기모진은 소만리가 길이라도 잃을까 봐 두려웠다.그가 서둘러 스위트룸으로 돌아왔을 때 침대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기모진의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그가 핸드폰을 들어 소만리의 위치를 추적해 보려고 현관으로 발걸음을 향하던 중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기모진은 발걸음을 홱 멈추고 눈을 들어보니 소만리가 잠결에 실눈을 뜨고 화장실에서 나왔다.그녀는 헐렁한 잠옷 차림을 하고 있었다. 방금 외출하다 온 사람 같지 않았다.“모진, 일어나서 어디 갔었어? 화장실에 있는 줄 알았어.”소만리는 중얼거리며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기모진에게 다가와 작은 새처럼 기모진의 품에 안겨들었다.기모진은 얼른 손을 들어 소만리를 감싸 안았고 심장 박동이 어수선하게 뜀박질을 했다.“나 배가 좀 고파서 밑에 식당에 가서 뭐 좀 먹으려고 했지.”기모진은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소만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기모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술을 열었다.“배고픈 건 이제 좀 괜찮아? 괜찮아졌으면 이제 우리 같이 잘까? 나 졸려.”“그래, 우리 같이 자자.”기모진은 소만리를 덥석 안아 침대에 눕혔고 그도 외투를 벗고 침대에 올랐다.그가 눕자마자 소만리는 그의 품으로 달려들어 바싹 붙었다.“잘 자. 내 사랑.”기모진은 그녀의 달달함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론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녀의
기모진은 소만리가 현관 쪽으로 올지도 몰라서 얼른 아무렇지도 않게 문밖 상황을 흘끗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아니야. 이제 문을 열려고 하던 참이야.”그는 살짝 웃으며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소만리는 방문 앞에 젊은 여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그 여자였다. 어젯밤 불빛이 좀 어둡긴 했지만 소만리는 이 밝고 경쾌한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셜리는 소만리가 자신을 훑어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어젯밤 기모진과 이야기하다가 소만리에게 들킨 일을 떠올렸고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막 입을 열려고 했다.그때 소만리가 먼저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안녕하세요. 모진의 아내 소만리예요. 모진이 말해줬어요. 지난 반년 동안 우리 남편이 아팠을 때 곁에서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라고요. 남편을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해줘서 너무 고맙습니다.”“...”셜리는 소만리의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셜리는 소만리가 지금 은근히 비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소만리의 웃음은 나름 진지해 보였다.“저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셜리예요.”여인은 입을 열어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부인, 고맙다니 별말씀을요. 전 의사예요. 사람을 살리는 일은 제 의무에요. 제 환자가 호전되는 것을 보는 것이 저에게도 큰 기쁨인 걸요.”셜리는 잠자코 서 있는 기모진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모진, 여기서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가웠어. 별일 없이 잘 지낸다니 더 기뻐. 나 지금 떠나려던 참인데 가기 전에 잠깐 인사차 들른 거야.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 경도에서 또 봐.”그녀의 말을 듣은 기모진의 눈빛에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셜리도 경도 출신이에요?”소만리는 자못 놀란 듯 셜리에게 물었다.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경도 출신이에요.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지만 경도에 아직 가족들이 있어요.”셜리는 약간 안타까워하는 눈빛을 흘리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저한테요?”소만리가 의아하게 물었고 그 순간 상자 위에 놓여 있는 카드 한 장을 발견했다.[여행 일정이 촉박해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던 내 친구에게,이걸 보고 당신이 좋아했으면 좋겠어요.]카드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고 보낸 사람은 역시 셜리였다.셜리가 나한테 준 선물이라고?소만리는 깜짝 놀랐다.“모진, 당신 셜리 연락처 있어? 있으면 고맙다고 메시지라도 전하고 싶은데.”“아니야.”기모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소만리, 이거 프런트에 놓고 우리 출발해.”“일부러 챙겨 주신 건데 내가 너무 무례하게 보이지 않을까?”소만리도 어떻게 할까 고심하다가 우선 방에 갖다 놓고 나가기로 결정했다.기모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만리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소만리가 상자를 열어보니 상자 안에는 향수가 한 병 들어 있었다.향수병이 약간 뱀 모양 같기도 한 것이 특이했다.소만리는 향에 민감한 사람이었고 조향사이기도 해서 흥미롭게 향을 맡기 시작했다.몇 가지 일반적인 향신료 외에도 지금까지 맡아본 적 없는 성분의 향기가 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소만리, 이제 여기 놓고 가자. 우리 여행 계획을 망치지 말고.”기모진은 소만리에게 계획한 여행에 대해서 시간을 일깨워준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셜리가 준 선물을 회피하고 싶었다.어젯밤 셜리가 한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였지만 기모진은 소만리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소만리도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향수를 캐비닛에 넣어두고 기모진을 따라 방을 나섰다.오늘의 여정은 사실 간단했다.오후에 잠깐이면 여정이 다 끝나기 때문에 소만리는 선물을 좀 사서 돌아가려고 했다.그녀는 영상통화 버튼을 눌러 기란군과 대화를 나누며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고르도록 했다.옆에서 소만리를 따라다니던 기모진은 화면 속에서 웃기만 하고 말은 하지 않는 기여온을 보며 죄책감이 밀려왔다.여온아, 다 아빠 잘못이야.아빠가 그때 정말 어리석었어.기모진은 마음속으로 가슴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