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정에게는 지금 소만리를 구해야겠다는 신념만이 유일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사화정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갑자기 달려들 줄 몰랐다.그러다 소만리는 뒤로 두어 걸음 비틀거리며 넘어져 한쪽 책장에 부딪혔다.책장이 두 번 흔들리며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소만리는 부딪힌 머리가 아프긴 했지만 사화정이 이미 불 속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보니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엄마!”소만리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사화정을 껴안았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엄마, 나 좀 봐. 내가 진짜 소만리야!”소만리는 사화정을 끌어안고 연신 강조하며 말했다.“네가 소만리라고...”사화정이 잠시 멍하니 넋을 잃고 소만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눈에는 반신반의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 딸 소만리는 날 미워해. 나와 이렇게 말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넌 아니야. 콜록콜록. 넌 아니...”소만리는 사화정을 꼭 껴안고 말했다.“엄마, 소만리는 처음부터 엄마를 미워하지 않았어. 그때 엄마가 일부러 날 힘들게 한 게 아니란 걸 알아. 소만리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아.”“소만리가 날 원망하지 않는다고?”사화정은 소만리의 말이 조금 귀에 들어온 듯 천천히 손을 들어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소만리의 뺨을 어루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소만리, 정말 엄마 원망하지 않아?”소만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화정의 손을 꼭 잡았다.“그럼, 물론이지. 소만리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아. 소만리는 엄마를 사랑해. 콜록콜록.”소만리가 한 말을 알아들은 듯 사화정은 갑자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럼 소만리, 엄마랑 같이 집에 갈래?”“응. 엄마랑 집에 갈 거야! 우리 이제 헤어지지 말자!”“그래, 좋아!”사화정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소만리의 머리를 만지려 했는데 갑자기 놀란 눈빛을 했다.소만리가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의아해하던 순간 사화정이 그녀의
”소만리, 나 여기 있어.”기모진은 침대 옆에 앉아 소만리의 어깨를 감싸며 다독였다.“소만리, 괜찮아. 정신 차려. 괜찮아.”남자에게서 전해오는 익숙한 따스함을 느끼자 소만리의 긴장했던 심장박동이 점차 완화되었다.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니 아직도 그녀의 심장이 마구 벌렁거렸다.그녀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고 예쁜 눈동자에는 아직도 불안감이 엿보였다.“책장이 쓰러졌어. 엄마가 날 구하려다가 책장 밑에 깔렸어.”소만리는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오며 말했다.기모진은 얼른 다가가 소만리를 안았다.“소만리, 어디 가? 당신 지금 너무 기력이 떨어져 있어.”“엄마도 병원이 있는 거 알아! 모진, 날 엄마한테 데려다 줘. 우리 엄마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아야겠어.”소만리의 표정에는 조마조마한 불안감이 흐르고 있었고 시선은 온통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기모진은 검은 두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소만리, 장모님 괜찮으셔. 우선 내 말 듣고 푹 쉬어.”“푹 쉴게. 그런데 나 엄마 상황부터 알아야겠어.”소만리는 집요한 표정으로 기모진의 손을 잡아끌었다.“모진, 날 데려다줘.”그러나 기모진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떼기 힘들었다.소만리는 수상한 예감을 느끼며 안색이 변하더니 잡은 기모진의 두 손을 놓았다.“엄마 상태가 설마 심각한 건 아니지?”“소만리,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기모진은 무너지기 직전인 소만리의 마음을 달래어 주었다.소만리는 격해진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쓸데없는 생각하지 않을게. 지금 의사를 찾아가서 분명하게 물어볼 거야!”소만리는 한달음에 제일 먼저 간호사실로 달려가 사화정이라는 환자가 여기에 입원해 있는지 알아보았다.간호사는 이를 확인한 뒤 곧바로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네, 사화정이라는 환자분은 바로 앞 VIP 병동에 입원해 계세요.”이 말을 듣고 소만리는 갑자기 긴장하며 간호사에게 물었다.
소만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빙긋 웃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엄마를 납치한 그놈은?”“이미 경찰서에 잡혀갔어. 지금은 병실에 구금되어 있는데 이미 그가 모든 것을 다 자백했어.”“뭐라고 자백했어?”소만리가 물었다. 기모진은 소만리의 다소 지쳐 보이는 뺨을 어루만지며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놈은 폐허가 된 집 근처 길에서 장모님을 보았고 장모님의 옷차림새를 보고 욕심이 생겨서 장모님을 속여 자신의 집으로 유인해 우리를 협박한 거야.”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기모진은 조금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 생각했어. 당신을 혼자 들여보내서는 안 되는 거였어. 나 혼자서도 그런 놈을 제압할 수 있는데 괜히 당신을 또 위험에 빠뜨렸어.”기모진은 소만리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 가늘고 깊은 그의 눈동자엔 미안해하는 빛으로 물들었다.“소만리, 당신한테 무슨 일 있을까 봐 너무 걱정됐어.”소만리는 눈을 들어 매혹적인 기모진의 두 눈을 보았다.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사랑받는 행복으로 벅차올랐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의 품에 다가가 안겼다. 마음껏 그의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모진, 당신이 곁에 있어서 너무 행복해.”기모진은 웃으며 소만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바보.”소만리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 활짝 웃었다.다음날 아침 깨어난 사화정은 병세가 약간 좋지 않아 보였다.몸 상태가 좋지 않은지 그녀는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이 모습을 본 소만리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제정신이 아닌 사화정이었지만 딸에 대한 사랑이 여전했음을 그녀는 너무나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소만리가 사화정의 병실에 들어갈 때마다 사화정은 그녀를 계속 쳐다보았고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온화하고 자애로운 눈빛을 전해주고 있었다.위청재도 매일 병원에 와서 사화정을 돌보았다.위청재는 정성이 가득한 따뜻한 보약을 가지고 왔을 뿐만 아니라 직접 사화정에게 한 입 한 입 먹여주었고 위로의 말을 하는 것까
소만리는 핸들을 꽉 잡았다.저 멀리 천천히 멀어져 가는 얼굴을 바라보았다.“빵빵빵.”뒤에서 재촉하는 경적음 소리가 들려왔고 소만리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눈을 들어 보았을 때는 방금 본 그 얼굴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착각한 건가?소만리는 자신이 요즘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착각한 거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액셀을 밟았다.기모진이 있는 곳에 도착한 후에야 소만리는 이 남자가 내일 떠나는 비행기 표를 예매했고 기분전환을 위해 그녀와 함께 휴가를 떠날 계획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소만리도 기모진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 거절하지 않았다.사실 돌이켜보니 그녀와 기모진은 그 많은 세월 헤어졌다 만났다 여러 일을 겪느라 정작 신혼여행조차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일정이 정해진 후 소만리와 기모진은 병원에 와서 사화정을 방문했다.내일 여행을 앞두고 소만리에게 가장 마음이 쓰이는 일은 바로 자신의 엄마, 사화정이었다.“소만리, 모진이랑 같이 여행 가서 기분 좀 풀고 와. 네 엄마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아빠가 네 엄마 잘 돌볼 테니까 걱정 말고 안심하고 놀다 와.”모현은 소만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녀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소만리도 자신의 아버지가 당연히 엄마를 진심으로 보살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단지 마음에 약간의 걱정은 떨칠 수 없었다.어쨌든 사화정은 자신을 구하려고 하다 그렇게 심하게 다쳤으니 마음에 짐이 없을 수가 없었다.소만리는 침대 옆에 앉아 사화정의 손을 잡고 차분하고 온화한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엄마, 소만리 잠깐 다녀올게. 그동안 아빠 말 잘 듣고 몸조리 잘 하고 있어. 알았지?”소만리는 다정하게 당부하였다.사화정은 멍한 눈으로 소만리를 바라볼 뿐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소만리는 그 모습을 보고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조금 실망감이 들었다.기모진이 상심하는 듯한 소만리를 보며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고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해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교도관이 들어왔다.경연은 소리를 듣고 천천히 회색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경연은 자신에게 누가 면회를 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부모를 제외하고 그 누가 찾아온단 말인가.아무런 기대없이 시선을 들어 올린 경연 앞에 깜짝 놀랄 만한 얼굴이 와 있었다.경연은 그녀를 다시 만날 날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는 그날 그녀와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경연이 막 입을 열려고 하던 순간 눈앞의 여자가 비꼬는 듯한 냉소를 터뜨리는 소리를 들었다.그 웃음소리에 경연의 놀라움과 기대감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경연, 당신이 내 다음 여정을 계획해 주었는데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여인은 붉은 입술을 살며시 들썩였고 그린 것 같은 눈썹을 구부리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경연, 나 정말 괴롭고 힘들었어. 왜 이런 모습으로 변했어? 당신이 평생 이런 곳에 있어야 한다면 내가 이렇게 된 게 무슨 의미가 있어?”경연은 흠잡을 데 없는 빼어난 미모를 바라보다가 엷은 시선을 던졌다.“가. 이미 끝났어.”여자의 섬세한 눈매에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경연,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당신 지금 패배를 인정하는 거야? 어떻게 이렇게 패배를 인정할 수 있어? 당신이 이러면 난 어떻게 해?”경연은 분노에 찬 여자의 얼굴을 차갑게 흘겨보았다.이렇게 분노에 가득 찬 얼굴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경연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경연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여자는 이를 갈며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였다.“경연!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패배를 인정할 수 있어?”“잘 들어. 나 이렇게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넌 패배를 인정해도 난 절대 인정하지 않을 거야!”경연이 이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뭘 어쩌려는 거야?”여자는 냉담한 목소리로 가볍게 웃었고 손을 들어 자신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그 남자들 보면 안 돼.”남자의 낮고 그윽한 목소리가 청량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코끝에 상큼한 향기가 느껴졌다.소만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시선을 가린 기모진의 손바닥을 헤집고 웃으며 그의 가늘고 매혹적인 눈을 마주 보았다.“왜 보면 안 돼? 눈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감상하는데 써야 해.”소만리는 천연덕스럽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모래사장의 아름다운 풍경을 계속 바라보았다.그러나 기모진은 다시 소만리 앞으로 다가가 그의 잘생긴 얼굴로 아름다운 풍경에 쏠린 소만리의 시야를 막아섰다.“소만리, 나 질투하는 거 안 보여?”그는 짐짓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소만리의 예쁜 입술이 가늘게 아치를 그리며 말했다.“그거 참 잘 됐어. 내 남편이 질투하는 모습이 어떤지 한번 봐야겠어.”“안 보는 게 좋을 거야.”기모진은 심각한 얼굴로 범접할 수 없는 냉엄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윽고 그의 눈빛과 표정에 사랑스러운 사람을 향한 사랑이 넘쳐났다.“내 마누라가 보고 싶어한다면 나중에 호텔로 돌아가서 시원하게 보여줄게. 그렇지만 지금 당신의 눈 속엔 오직 나만 있어야 해.”소만리는 마음속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 설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놀리지 않았다.“그래, 좋아. 남편 말고는 아무도 안 봐.”그녀는 눈썹에 고운 아치를 그리며 웃었고 손을 들어 기모진의 팔을 잡고 다정하게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기모진은 옆에 기대어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내려다보았다.그의 잘생긴 얼굴에 세상을 비출 듯 환한 미소가 번졌다.할 수만 있다면 그는 정말 이런 순간에 매일 그녀와 함께 머물며 이렇게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을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그는 그때 소만리가 한 말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평온한 삶을 원했을 뿐이었다.그리고 그는 지금 그녀의 이런 소박한 희망을 실현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그는 가만히 생각에 잠기며 소만리의 이마에 머리를 숙이고 뽀뽀를 했다.소만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반짝이는 남자의 눈동자를 올려
”죄송합니다.”소만리는 미안한 듯 재빨리 몸을 구부려 모자를 집어 건넸다.소만리가 눈을 들어 보니 얼굴을 거의 반쯤 가릴 정도로 큰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보였다.선글라스에 가려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었지만 소만리는 이 여인의 이목구비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갸우뚱거렸다.“괜찮아요.”여자는 소만리가 건네준 모자를 받아들고 싱긋 웃으며 백사장으로 향했다.여인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소만리는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소만리, 뭘 보고 있어?”기모진이 소만리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우선 호텔로 돌아가자.”“모진, 방금 그 여자 생김새 봤어?”소만리는 기모진의 발걸음을 따라가다가 참지 못하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우연의 일치인지 그 여자도 마침 소만리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리고 있었다.“소만리 이외의 여자에겐 관심 없어.”기모진의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단호했다.소만리는 기모진의 말을 듣고 마음이 달콤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왠지 마음 한켠이 불안했다.그러나 불안해하던 마음도 이 남자의 달콤한 애정 공세에 바로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기모진이 예약한 호텔은 규모가 아주 큰 건물이었고 안에 내부 장식도 화려했다.게다가 안에는 큰 수영장도 있었다.소만리는 예전에 자신이 시약을 구하기 위해 강물에 몸을 던졌던 일을 떠올리며 수영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다음에 또 비슷한 위험에 처했을 때는 적어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어야 했다.오후 내내 기모진의 밀착 지도 아래 소만리는 거의 기본적인 영법을 배웠다.해 질 무렵 황혼이 해변을 황홀하게 물들이며 마지막 붉은 온기를 불태우고 있었다.종업원이 와인과 세심하게 세팅한 저녁을 보내왔다.소만리는 산뜻하고 섹시한 수영복을 입고 수영장에 반쯤 몸을 담근 채 노을빛을 눈에 담고 있었다.한여름의 저녁 바람이 더위를 쓸어내리는 듯 살랑살랑 불어오자 소만리는 행복감에 젖은 듯 기모진의 곁에 기대었다.“이렇게 당신이랑 아무 걱정없
기모진의 고백은 예상대로 그녀의 마음의 문을 열고 훅 들어왔고 그 달콤함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달콤했다.소만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살며시 웃으며 헤어날 수 없이 매력적인 그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나도 사랑해. 당신을 처음 만났던 날부터 당신이 어디에 가든 세상 끝까지 당신과 평생 함께 하길 바랐어.”이 말을 들은 기모진의 시선은 더욱 부드러워졌다.“소만리, 이제야 이런 날을 맞이하게 해서 미안해. 내가 너무 많이 기다리게 했어.”“모진, 당신을 기다리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소만리의 말이 떨어지자 기모진은 그녀의 입술에 주체할 수 없이 깊은 키스를 했다.가슴속에 쌓인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고 싶었다.“소만리, 우리 아기 한 명 더 낳을까?”“세 명이나 낳았는데 기 사장님 감당할 수 있겠어요?”“당신은?”남자는 나직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기모진은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소만리, 난 당신이 더 이상 고통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우리에게 기란군과 여온이와 막내까지 있어. 난 이미 충분히 축복받은 기분이야. 그리고 나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곁에 있다는 거야.”남자는 부드럽지만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소만리가 대답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저녁 바람이 진열대 위의 촛불을 간지럽히며 살랑살랑 흔들었고 벽에 따뜻한 두 줄기의 그림자를 만들었다.경도.위청재는 평소대로 보약을 챙겨 사화정을 돌보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모현이 피곤한 기색으로 버티고 앉아 있는 모습이 위청재의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침대 근처로 가서 모현에게 말했다.“사돈은 밤새 편히 쉬지도 못하셨으니 어서 들어가서 좀 주무세요. 여기 사돈은 내가 돌볼게요.”모현도 요즘 피곤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화정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사화정은 지금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서 아무도 못 알아보고 오직 모현만 알아보았다.모현은 자기가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