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국에는 사형제도가 있었고 그가 원하는 것도 사형이었다.“뚜두!”앞쪽에서 갑자기 귀에 거슬리는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큰 길가에 서 있던 기묵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점점 차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다.그때 갑자기 따뜻하고 작은 손 하나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기묵비는 그제야 무언가를 느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가 눈을 내리깔자 맑고 동그란 눈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그러나 기묵비가 아이의 모습을 자세히 볼 겨를도 없이 차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는 얼른 아이를 번쩍 안아 안전하게 인도로 물러났다.기묵비는 아이를 내려놓고서야 비로소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두어 살쯤 된 사내아이였다.어린 녀석은 큰 눈을 말갛게 깜빡거리며 그를 쳐다보더니 조그만 입을 열어 말했다.“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차는 위험하대요.”이 아이는 차가 위험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했다는 걸 기묵비는 뒤늦게 알아차렸다.희고 귀엽게 생긴 작은 얼굴을 보면서 기묵비는 약간 정신이 들었다.“고마워, 꼬마야.”기묵비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아이에게 뭔가 더 말하려고 했을 때 앞쪽 멀지 않은 곳에서 여자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기묵비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들어 보니 노란 장미를 손에 든 젊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여자는 몸을 웅크린 채 그에게 등을 돌리고 두어 살짜리 소녀의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엄마가 나 불러요. 나 가야 돼요.”어린 꼬마 아이는 앳된 목소리로 말하고는 짧은 다리를 힘차게 딛고 돌아서서 노란 장미를 들고 한 손에는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젊은 여인을 향해 걸어갔다.기묵비는 이 모습을 자신도 모르게 한참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문득 점점 이 뒷모습이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초요?”그는 자신의 추측을 확신할 수 없어서 가서 자세히 보려고 했는데 기모진이 그에게 다가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숙부가 저지른 죄로 인해 적지 않은 대가를 치르게 될 수도 있지만 오늘 제공한 단서에
기묵비는 잠시 말을 멈췄고 그의 심장 박동이 소리 없이 빨라지기 시작했다.“그런데 뭐예요?”기모진도 궁금해하며 물었다.기묵비는 빙빙 돌리지 않고 말했다.“이 의사는 여러 해 동안 나와 함께 했기 때문에 초요와도 잘 알고 있었어. 그는 항상 초요를 자신의 딸로 대하고 초요도 그를 매우 존경하며 따랐어.”여기까지 듣고 기모진도 뭔가가 생각났다.“당신이 말한 그 의사가 예전에 나를 치료했던 그 의사 아닌가요?”기묵비는 고개를 끄덕였다.“초요는 그 의사와의 친분을 이용한 거야. 그렇지 않았으면 그 의사도 초요의 부탁에 응하지 않았을 거야.”“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장 그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죠.”기모진이 기묵비에게 상기시켜주었다.기묵비의 심장 박동은 더욱 거칠게 속도를 높여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기묵비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냈지만 순간적으로 양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그가 정말 전화를 걸어도 될까?만약 부정적인 답이 돌아온다면 그의 마음은 또 한 번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얻게 될 것이다.하지만 묻지 않으면 그의 마지막 희망조차 없어지는 것이다.기모진은 기묵비가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 눈치챘다.“내가 대신 물어봐 드릴까요?”“아니, 그럴 필요 없어.”기묵비는 기모진의 도움을 거절하였다.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핸드폰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전화가 연결되었다.기묵비는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의문을 던졌다.“초요, 아직 살아 있어요?”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심란하게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전화기 너머에서는 놀랐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기묵비? 당신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죠?”의사의 말투는 확실히 뭔가 혼란스러워 보였다.“초요 양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는데 잊었어요? 초요 양은 참 안타까웠어. 심장에 총을 맞아서 손을 써 볼
소만리가 이런 의문을 내놓자 기묵비의 가슴속에 희망이 되살아났다.저녁 식사를 마친 후 기묵비는 기모진을 따라 기씨 본가 대문을 나서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이 일을 확실히 하고 싶어.”기묵비가 눈을 들자 가로등 불빛이 어지러이 흩어지다 그의 눈 속에 흐르는 빛을 선명하게 비추었다.기모진은 돌아섰다. 사실 마음속으로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숙부님은 이미 나한테 자수했다고 생각해요. 내가 지금 숙부님을 위해 시간을 좀 더 벌어볼게요. 초요와 닮은 여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어떻게 된 일인지 숙부님에게 알아낼 기회를 드릴게요.”“고마워.”기묵비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오늘 그 여자를 본 곳을 좀 더 둘러보고 싶어. 나중에 돌아올게.”그는 말을 마치고 홀연히 떠났고 기모진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왔다.소만리는 거실 소파 옆에 앉아 사화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기모진은 소만리의 기분과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날 경연이 총에 맞고 쓰러진 모습을 그녀의 눈앞에서 목격한 것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기모진이 들어오자 소만리의 시선이 단번에 이 남자에게로 향했다.사화정은 당연히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고 그녀는 아쉬워하며 소만리의 손을 잡아당겼다.“소만리, 우리 다시...”“여보, 늦었어. 우리도 방으로 들어가 쉽시다.”모현은 소만리의 눈에 비친 기모진에 대한 사랑을 알아차리고 사화정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소만리도 사화정과 함께 하고 싶고 싶지만 지금은 이 남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사방이 두 사람에게 이 공간을 허락하는 듯 고요했다.소만리는 기모진의 품에 기대어 전에 없던 마음속의 편안함을 한껏 누리고 있었다.기모진의 갸름한 손가락이 소만리의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가 짧은 머리를 어루만졌다.그의 마음이 여전히 시리고 아팠다.그 잘린 머리카락은 마치 그의 몸에서 떨어진 살점 같았다.경연의 수단은
”여보세요. 누구시죠?”깨끗하고 감미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소만리의 귓가로 미끄러져 들어왔다.소만리는 자신이 방금 들은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전화기를 든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이 목소리는 그녀의 기억 속에 깊이 박혀 있어서 너무나 익숙했다.“초요?”소만리가 탐색하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뭐라구요?”전화기 너머의 여인은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초요'라는 글자가 낯설기 짝이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소만리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려 다시 물어보려고 했을 때 저쪽에서 전화기를 누군가에게 바꿔주는 것 같았다.곧이어 소만리는 남사택의 목소리를 들었다.“기모진? 무슨 일로 날 찾았어요?”이 소리를 듣고 소만리는 재빨리 기모진의 상황을 설명했다.“남사택, 내 남편 몸속 만성 독소가 또 발작을 일으켰어. 당신은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주소 보낼 테니 바로 와 줘.”“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남사택은 흔쾌히 대답했다.소만리는 자신의 말투가 너무 공손했다고 느꼈다.남사택과 경연이가 예전에 자신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속에 분노가 들끓었다.전화를 끊은 뒤 소만리는 괴로워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남자를 끌어안으며 가슴 아파했다.마치 지금 기모진이 겪고 있는 고통이 그녀의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모진, 남사택이 곧 올 거야. 조금만 참아.”그녀는 그를 꼭 껴안고 달래었지만 흐르는 눈물은 주체할 수 없었다.“도대체 언제쯤 다 나을 수 있을까? 당신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기모진은 자신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소만리가 슬퍼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미 그에게는 이런 고통이 익숙했다.게다가 남사택이 있는 한 완치될 확률이 높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소만리, 걱정 마.”기모진은 숨을 헐떡이며 밀려오는 고통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나 당신과 아이들이랑 더 많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함께 보낸다고 약속했잖아. 이번에는 꼭 지킬
소만리는 방금 남사택 대신 전화를 받은 여인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남사택, 여자친구 생겼어?”소만리가 슬쩍 떠보았다.이 말이 떨어지자 소만리는 남사택이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을 분명히 포착할 수 있었고 기모진도 의아해하며 남사택을 쳐다보았다.“소만리, 왜 그렇게 물어?”“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남사택한테 전화를 걸었을 때 여자가 전화를 받길래. 그런데 그 여자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본 것처럼 너무 낯익은 거야.”소만리는 미소를 지으며 태연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남사택, 그 여자 혹시 우리가 아는 사람 아니야?”“당신들이 아는 사람 아니에요.”남사택이 재빨리 부정하면서 한편으론 인정했다.“그렇지만 내 여자친구인 건 맞아요.”그는 말을 마치며 시계를 슬쩍 보았다.“이제 돌아가야겠어요. 여자친구가 겁이 많아서 어두워지면 집에 혼자 있는 걸 불안해하거든요.”이렇게 말하고 남사택은 얼른 몸을 돌렸다.소만리는 그를 문까지 데려다준 후 곧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그녀는 수건을 가져와서 기모진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갈색 눈동자에는 아직도 공포가 가시질 않고 남아 있었다.“모진, 남사택이랑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당신 어떻게 그렇게 남사택을 신뢰하게 되었어?”“그가 경연의 곁에 있었던 데에는 뭔가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기모진은 소만리의 손을 잡고 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사실 남사택은 우릴 괴롭힌 적은 없어. 그때 당신이 기란군을 임신한 몸으로 중병에 걸려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가 소군연을 통해 당신한테 보낸 그 약은 사실 실험용 약이 아니었어.”소만리는 눈을 크게 뜨고 더욱 당혹스러워하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야?”“그는 사실 줄곧 진심으로 우리를 구하고 있었어. 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만.”기모진은 소만리에게 설명했다.소만리는 생각에 잠긴 듯 잠자코 있었다.돌이켜 생각해 보니 경연에게 가택
”그때?”소만리가 기모진에게 바짝 다가와 앉았다.“모진, 남사택과 초요가 무슨 사이인지 알고 있어?”“단언할 수는 없어.”기모진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지만 길고 가는 두 눈에 희색이 번지며 말했다.“소만리, 이제야 여러 정황을 비춰보니 정말로 초요가 살아 있는 것 같아. 남사택은 그냥 평범한 의사가 아니야. 그는 충분히 초요를 살려낼 능력이 있어.”소만리의 심장 박동이 빠르게 속도를 높이며 뛰기 시작했다.“만약 초요가 살아있다면 정말 너무 좋을 것 같아.”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지며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모진,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는 정말 쉽게 오지 않았어. 초요와 기묵비에게도 이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어.”“초요만 살아있다면 다시 시작하는 그날이 오지 않더라도 숙부는 초요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하실 거야.”“맞아.”소만리가 기모진의 말에 호응하며 그의 품에 안겼다.남자의 품에 안겨 따뜻함과 기댈 수 있는 든든함을 느끼자 소만리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다음날 소만리는 깨어나 초요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기묵비에게 알리려고 했으나 기모진이 이를 말렸다.“소만리, 혹시나 희망을 줬다가 나중에 더할 수 없는 실망을 안겨 드리면 안 돼. 아직 확신이 없는 상태니까 섣불리 알려선 안 된다고 생각해.”소만리는 기모진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잠시 입을 다물고 알리지 않기로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소만리는 핑계를 대고 남사택이 사는 곳에 가서 상황을 알아보고 싶었지만 사화정이 어린아이처럼 그녀에게 달라붙었다.“소만리, 너 이따가 시간 있어? 나랑 같이 쇼핑하러 안 갈래?”기대에 가득 찬 사화정의 얼굴에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가 넘쳤다.소만리는 이제 거의 정상으로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정신을 회복하지 못한 엄마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그래, 나랑 같이 가.”소만리는 시원하게 대답했다.요즘 모현은 모 씨 그룹을 관리하
경연의 엄마는 더욱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저 사람은 저렇게 들어갈 수 있는데 무슨 근거로 나는 내 아들 얼굴도 못 본단 말이야!”“저분은 우리 IBCI 내부 조사과에서 당신 아들의 조사를 전담하는 선임 요원입니다. 저분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겁니까?”“...”경연의 엄마는 잠시 할 말을 잃었고 한쪽으로 물러나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다 기다리고 있기 짜증이 난 경연의 엄마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으며 나갔다.병실 안.경연은 생기 없는 조각품처럼 무표정하게 눈을 뜨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소만리지 당신이 아니야.”경연은 힘겹게 입을 열어 이 말을 꺼냈다.경연의 얼굴 위로 기모진의 차가운 시선이 스쳐 지나갔다.“아직도 내 아내를 볼 낯이 있다고 생각해?”경연은 느릿느릿 천천히 눈초리를 치켜들며 여전히 기모진에 대한 적개심을 뿜어내었다.“그녀가 날 깨웠으니 못다 한 말을 해야 할 책임이 그녀에게 있는 거지.”“경연, 정말 내 아내가 당신한테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기모진은 냉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소만리가 너한테 삶의 의지를 불러 일으키는 것, 내가 당신에게 내 아내를 허락하는 건 딱 그것까지야. 더 이상은 없어. 넌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 거야. 단념해.”경연의 얼굴에는 놀라고 당황하는 빛이 번쩍였고 눈에는 더욱 강렬하게 불만스러운 기운이 솟아올랐다.“기모진, 나 당신한테 지지 않았어. 난 그저 무고한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기모진이 이 말을 듣자 잘생긴 그의 얼굴에 먹구름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내 아내를 상처투성이로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그녀가 아무 잘못도 없는 무고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그의 눈동자에는 분노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경연, 넌 네 할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고 했지만 도대체 네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알아보기나 한 거야?”이 말을 듣고 경연은 갑자기 얼음장 같은
편지를 손에 든 경연의 눈에는 익숙한 필체가 스쳐 지나갔고 한 글자 한 글자 똑똑히 그의 눈에 비쳤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경연의 호흡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그는 세월의 때가 묻은 낡은 편지를 손에 쥐고 다시 한 글자 한 글자 살펴보았다.아무리 보아도 그 글자들의 내용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아니야. 할아버지는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경연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듯 창백하고 메마른 입술로 끊임없이 중얼거렸고 잿빛 눈동자에는 초점을 잃은 빛들이 갈 곳을 모르고 있었다.“경연,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게 사실이야.”기모진은 담담하게 사실을 강조했다.“말도 안 돼!”경연은 혼신의 힘을 다해 울부짖었고 순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심장을 쥐어뜯었다.기모진은 경연의 몸에 달려 있는 기기들의 데이터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경연이 충격을 받았음을 알았지만 그는 결코 동정의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기모진은 결국 이 모든 것은 경연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가 지금 깨어난 것만으로도 엄청난 은혜를 입은 것이다.다만 인간적인 도리로 기모진은 경연의 상태를 살필 수 있게 의사를 불러 주었다.병실 문이 열리자 밖에서는 어느새 몰려든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뤘고 앞다퉈 병실에 들어가 취재하려고 했다.의사가 황급히 달려오는 것을 본 경연의 부모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우리 경연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경연의 엄마는 당황한 표정으로 상황을 추측하다가 병실에서 나오는 기모진을 보고 사납게 달려들었다.“기모진, 너지! 네가 일부러 우리 경연이 괴롭힌 거지, 그렇지? 넌 우리 경연일 죽이고 싶은 거야, 우리 경연일 살리고 싶지 않은 거라구! 어떻게 이렇게 악랄할 수가 있어!”“15년 전, 너의 집 영감이 기 씨 그룹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비열한 수단을 동원해 우리 경 씨 그룹의 ZF 프로젝트를 가로채서 내 아버님을 우울하게 만들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