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앳된 경찰이 갑자기 소리를 냈다.그는 떨리는 두 손을 들어 경연을 가리키며 기세등등하게 말했다.“역시나 당신이 강연을 죽인 진범이었어. 기, 기모진은 당신한테 모함을 당한 거였어...”경연은 이 젊은 경관이 아직 숨을 거두지 않은 줄은 몰랐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경연은 오히려 더 광기 어린 웃음을 띠며 말했다.“그래, 나야. 강연을 죽이고 기모진에게 누명을 씌운 건 나야. 그런데 뭐, 그게 어때서? 진실을 알아낸 사람 여기 있어?”“당신...”분노에 찬 앳된 경찰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의기양양해하는 경연을 가리키며 동료에게 알리려는 듯 핸드폰을 꺼내려고 했다.이를 본 경연이 아무런 표정 없이 앳된 경찰의 심장에 총을 겨누었고 방아쇠를 당겼다.경연의 위치를 찾던 소만리가 갑자기 ‘펑'하는 이 소리를 듣고 발걸음이 멈칫하며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모진, 모진...”소만리는 자신도 모르게 기모진의 이름을 읊조렸다.그녀는 총소리를 난 곳을 찾아서 쏜살같이 달려갔다.겹겹이 쌓인 빗발 사이로 풀밭에 누워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한눈에 소만리의 눈 속에 들어왔다.그녀의 머릿속은 순간 까마득해지며 정신을 잃을 뻔했다.“모진!”소만리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지만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는 기모진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그녀는 어리둥절했다.그날 옥상에서 기모진이 강연의 살인범이라고 분석한 그 경찰인가?그가 여기서 왜 죽은 거지?이때 소만리는 경연의 음산한 목소리가 다른 쪽에서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기모진, 당신은 이미 물러설 곳이 없어. 경도 제일이라는 기 씨 집안 명성도 이제 당신으로 인해 끝이 날 거야. 경도 제일 황태자 자리는 이제 바뀌게 될 거라고!”“펑!”경연의 말소리와 함께 소만리는 또 한 번 총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일어서서 소리가 나는 자리로 달려갔다.그녀는 경연이 전방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전방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기모진이 한 말을 듣고 소만리는 말문이 막혔다.밤바다처럼 깊고 차가운 그의 눈빛을 보면서 그가 한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녀를 화나게 만들어 떠나게 할 심산이었는지 그녀는 분간할 수 없었다.“어서 가. 당장!”기모진은 멍하니 서 있는 소만리를 보며 재차 강조했다.“모진?”“경연이 온갖 나쁜 짓을 하긴 했지만 단 한 가지 옳은 말을 한 게 있어.”기모진은 심호흡을 하고 팔을 에워싸는 욱신한 통증을 참으며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내가 잘못한 건 당신을 너무 아낀다는 거야.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당신을 사랑한 대가가 기 씨 가문을 모두 몰락시키는 거라면 그건 너무 참혹해.”소만리는 지금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소만리, 나도 좀 지쳤어.”그는 갑자기 매우 피곤해하며 이렇게 말했다.“난 더 이상 당신 때문에 나 자신과 기 씨 집안 전체를 희생할 수 없어.”그는 말을 마쳤고 소만리의 시선은 빗물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흐릿해져 그의 윤곽이 부서지기 시작했다.그녀는 눈앞의 초췌한 얼굴을 헝클어진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당신도 가. 더 이상 날 위해 목숨 걸 필요 없어.”기모진은 얼굴을 돌리고 소만리를 보지 않았다.소만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고 가슴은 치명적인 아픔으로 굳어져갔다.그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그에게 내몰리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돌아섰다.그의 무심한 태도를 지켜보다가 소만리는 차를 타고 떠났고 그녀가 떠나자마자 경찰차와 구급차가 동시에 도착했다.부상당한 앳된 경찰관은 즉시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다.경찰들이 황급히 도착해 보니 경연이 손에 피투성이가 된 기모진을 겨누고 있었다.“경연, 이게 무슨 일이에요?”선두에 오던 경찰이 물었다.경연은 독소에 시달려 안색이 말도 못 하게 나빠진 기모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경찰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기모진이 탈옥하는 과정에서 내 총을 빼앗아 그를 쫓던 사복 경
경연이 거실에 들어서자 뭔가 날카로운 것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그는 곤혹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며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고 눈앞의 광경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소만리!”그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곤드레만드레 취한 소만리에게 달려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소만리는 그를 힘껏 밀쳐냈다.“상관하지 마!”그녀는 와인병을 들고 바로 고개를 젖히고 꿀꺽꿀꺽 병나발을 불었다.그녀는 아까 입은 옷차림 그대로였고 온몸이 축축하고 머리카락도 젖은 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기모진은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왜?”소만리는 울면서 서운함을 터트렸다.“그 사람만 좋다면 그 사람을 위해 뭐든지 해줄 수 있는데. 한다는 말이 뭐, 피곤하다고?”소만리는 자조인 듯 경멸인 듯 넋두리를 늘어놓았다.“몇 년째야?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한 게 몇 년이냐고?”그녀는 스스로 물으며 눈물과 빗물에 얼룩진 젖은 눈을 들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고 있는 경연을 올려다보았다.“처음 봤을 때부터 그 사람을 좋아했고 몇 년 동안 만신창이가 되어 피를 흘리며 그 사람을 용서했는데. 결과는? 이게 뭐야. 허...”소만리는 씁쓸하게 자신을 비꼬며 쓴웃음을 지었다.“결국 당신들 남자의 마음속에는 가정보다 사회적 지위가 중요한 거지. 여자는 당신들 삶의 부속품일 뿐이고 명예, 권력, 지위야말로 당신들이 가장 원하는 거야. 그렇지?”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허탈하게 웃으며 경연을 바라보다가 다시 와인을 들이키려고 했다.경연은 소만리의 손에 든 와인병을 한쪽으로 집어 던졌고 흐느끼며 부서진 소만리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그의 두 눈썹은 깊게 잠겨 있었고 얼굴빛은 엄숙했다.“기모진이 당신을 그렇게 힘들고 아프게 했으니 당신은 결코 그 사람을 용서하지 말았어야 했어.”“소만리, 이제 그 사람 생각은 그만하고 날 당신 마음속에 들어오게 해 봐.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줄게.”“허, 허허허...”소만
소만리의 이런 진지한 모습을 보고 경연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깊은 눈으로 소만리를 탐색하듯 훑어보았다.“상의하고 싶은 게 뭐야?”소만리는 살짝 눈을 내리깔고 뒤돌아 창가로 다가갔다.“어젯밤, 난 기모진의 매정한 모습을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어. 아마 당신이 말한 게 맞을지도 몰라. 난 내려놓아야 해. 기모진과의 결혼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만의 애틋한 감정이었던 거 같아.”경연은 소만리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그래서 당신이 나와 상의하고 싶은 게...”“앞으로 그 사람에게 어떤 형벌이 내려질지 알 수도 없고, 만약 그가 정말 죽는다면 형 집행 전날만큼은 그가 고통스럽지 않길 바랄 뿐이야.”경연은 이제야 소만리의 뜻을 알아들었다.“기모진에게 해독제를 주라는 말이야?”“그래. 판결이 어떻게 되든 해독제를 줬으면 좋겠어.”소만리는 몸을 돌렸고 촉촉이 젖은 그녀의 가을빛 눈동자는 마치 엄청난 마력을 가진 듯 경연을 멍하게 만들었다.“내가 해독제를 얻으려고 당신에게 애걸복걸하며 만났다는 것을 알고는 그 사람은 고마운 줄도 모르고 차라리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죽을지언정 해독제 맞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 심지어 남은 해독제 세 개도 모두 버렸지.”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남자로서 강한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받아들이든 말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독제를 주고 싶어.”소만리의 말을 들은 경연은 침묵에 빠졌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가 금고로 가서 소만리 앞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해독제를 꺼내 소만리에게 건넸다.“가져가.”소만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경연을 바라보았다.“정말 나한테 주는 거야?”“당신이 그를 위해 마지막으로 해주는 일이니 나도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경연은 다정하게 소만리를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소만리는 천천히 손을 들어 해독제를 받았다.“고마워.”소만리는 눈시울을 붉히며 솔직하게 말했다.
”소만리, 당신 뭐 하는 거야?”기모진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부부는 일심동체야. 당신이 죽을 때까지 이 지긋지긋한 독소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소만리는 이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주저하지 않고 기모진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그녀는 몸부림도 치지 못하는 남자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내일 재판이 열리는데 그게 우리들의 마지막이 아니길 바랄 뿐이야.”소만리의 말을 듣고 기모진은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 소만리의 슬픈 얼굴이 비쳤고 무슨 말을 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떠났다.소만리는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경연을 보았다.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차에 올랐다.경연은 소만리가 지금 우울한 기분이라는 것을 알고 소만리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그는 그녀와 집에 도착한 뒤 다정하게 그녀에게 커피 한 잔을 끓여주며 말했다.“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내일 나랑 같이 재판장에 가.”소만리는 커피를 받아들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서재에서 뭐 좀 챙겨서 나 좀 나갔다 올게.”경연이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그가 방금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소만리가 핸드폰을 보니 아무런 발신자 정보도 뜨지 않았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저쪽에서 외국 억양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내일 오후 2시 경도 폐선착장에서 내 사람들이 물건을 받으러 갈 거예요.”소만리가 이 말을 듣고 담담하게 대답했다.“네,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갑자기 저쪽에서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당신 누구야?”“현재 그의 결혼 증명서에 있는 아내입니다만.”소만리의 대답에 상대방은 안심한 듯 말했다.“아, 그럼 잘못 기억하지 말라고 좀 전해주세요.”“네, 그럴게요.”소만리는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연이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그는 테이블 위의 핸드폰을
소만리의 핑크빛 입술이 살짝 올라갔고 맑고 예쁜 눈동자에 훤칠하고 잘생긴 그의 모습이 비쳤다.기모진은 한정수량 맞춤양복을 입고 검은색 셔츠에 와인색 넥타이를 매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이틀 전의 피폐하고 초췌한 모습에 비해 오늘 그의 컨디션은 매우 좋아 보였다.어떠한 모욕적인 눈길에도 의연한 그의 단아한 자태는 온몸에 잠재되어 있던 매력을 아낌없이 자유자재로 발산하고 있었다.그는 형 집행을 위한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범죄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심판하려는 패기 있는 재판장 같았다.경연은 이런 기모진의 모습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기모진의 현재 이미지가 아무리 좋아도 카리스마가 아무리 강렬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증거가 확실한 살인 사건에 대해 그가 죄책을 면할 수는 없다.경연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무 표정 없는 기모진을 향해 비열하게 웃었다.그는 마치 이미 승리를 거머쥔 것 같았다.이 판결이 내려지면 기모진이라는 인물은 경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경도에서의 기 씨 집안 지위는 몰락하게 될 것이다.이렇게 되면 경 씨 집안이 명실상부 경도 제일 명문가가 되는 것이다.그의 이름이 드높이 알려지며 모두들 우러러볼 것이다.다가올 눈부신 순간들을 생각하니 경연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점점 퍼졌다.소만리는 경연의 얼굴에서 환하게 퍼지는 미소를 바라보며 조용히 시선을 거두고 정면을 주시했다.방청석도 이제 거의 꽉 찼을 즈음 판사가 입장하였고 정식 개정이 선언되었다.기모진이 강연을 살해하고 탈옥한 두 가지 사건에 대해 심문이 시작되었다.그 호텔 여종업원과 당시 복도를 지나던 젊은 커플이 모두 법정에 나와 증언했다.피고인석에 있던 기모진을 보며 여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발언을 했다.“맞아요. 기모진이에요. 당시 제시간에 객실에 가서 손님들에게 음식을 배달했는데 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피투성이가 된 여자가 누워 있었고 기모진 혼자 있었어요.”젊은 커플도
그는 그윽한 눈으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하고 싶은 말 없습니다.”기모진의 반응이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기모진, 하고 싶은 말이 없다면 그럼 죄를 인정하는 겁니까?”“증언과 물증이 다 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사람을 죽인 거로군.”“예전에 저 사람을 존경하고 우러러봤었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기모진의 범행을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인터넷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소만리는 주변에 있던 위청재와 기종영을 바라보았다.두 부부는 모두 눈썹을 찡그렸고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모진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우리 모진이가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가 있어!”위청재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흥분하고 있었다.기종영도 눈썹을 찡그렸다.“일단 흥분하지 마. 모진이 하지 않았다면 가만히 앉아서 죄를 뒤집어쓰고만 있지 않을 거야.”“정숙하세요.”판사는 망치를 두드리더니 뒤이어 어젯밤 경찰관이 살해된 사건을 언급하며 증인을 불렀다.그런데 증인은 바로 경연이었다.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경연,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말해 보세요.”검찰 측이 안내했다.증인석에 앉아 있는 경연은 늠름하고 정의로운 모습이었다.네티즌들은 잘생기고 기품 있는 데다가 IBCI의 최고 행정 지휘관으로 정의와 진실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나같이 경연을 칭찬하기 바빴다.어떤 사람들은 기모진이 경연과 비교도 안 된다고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고 경연이야말로 경도 최고 명문 귀공자라며 추켜 세웠다.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경연이 어떻게 소만리처럼 이익만 보고 의리를 망각한 이혼한 여자를 아내로 삼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경연은 인터넷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기모진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갑자기 IBCI 내부로부터 기모진의 탈
소만리가 갑자기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하자 경연의 얼굴에 웃음기가 옅어졌다.미소를 머금은 채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만리를 향해 경연은 고개를 돌렸다.그의 마음속에 일순간 의혹이 일었다.새로운 증거?그녀가 무슨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려는 거지?판사는 소만리를 찬찬히 훑어보았다.“누구십니까?”소만리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약간 숙였다.“기모진의 아내, 소만리라고 합니다.”소만리의 자기소개에 심기가 불편한 듯 경연은 눈살을 찌푸렸고 방청객들과 네티즌들은 다시 한번 소만리를 향해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내었다.이 여자가 제정신이야?한때는 기모진이 남편이라고 했다가 법정에 경연과 함께 짝지어 들어와서는 또 기모진의 아내라고?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검찰 측 변호인은 즉각 의혹을 제기했다.“판사님, 검증되지 않은 증거물을 법정에서 제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규정은 생명이 없지만 사람은 생명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결정적인 증거가 채택되지 못해서 진상이 밝혀지는 것이 지체되고 무고한 사람이 누명을 쓰게 된다면 그 결과는 당신이 책임지는 겁니까?”소만리는 침착하게 검찰 측 변호인을 보며 말했다.경연은 누구보다 더 침착하고 조리 있게 변론하는 소만리를 보고 있는 것이 언짢았다.그녀는 마치 준비가 되어 온 것 같았다.그는 마음속에 의심이 들었지만 조금도 짚이는 것이 없었다.그는 소만리를 보며 그녀가 시선을 맞추어 주길 바랐지만 그녀의 당당하고 침착한 눈빛은 더없이 담담하게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오히려 기모진과 눈을 마주 보았다.소만리는 옆으로 돌아앉은 남자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옆에 있던 남자는 그녀에게 서류 한 부를 건네주었다.경연은 그제야 소만리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뜻밖에도 기모진의 조수 육경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소만리는 서류를 받아들고 법원 직원에게 건넸다.“강연이 살해된 그 방에서 우연히 발견된 단서입니다.”소만리는 그제야 당혹감으로 가득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