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진은 해독제를 버리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해변으로 걸어갔다.소만리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끌어당기며 그에게 달려갔다.“기모진, 난 당신 여자일 뿐만 아니라 당신 아내야! 내가 당신 아내라구! 알겠어?! 남편을 위해서 아내가 희생하는 게 어때서! 하나도 억울하지 않아!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그녀는 목이 쉬도록 있는 힘을 다해 그를 향해 소리쳤고 결국 힘이 빠져 호흡이 심하게 떨려서 낮은 목소리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기모진은 붉게 물든 소만리의 눈을 바라보며 손가락 마디마디 힘을 주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기모진, 당신이 기어이 해독제를 바다에 던져버리겠다면 내가 바다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게 될 거야!”“소만리!”“당신이 해독제를 던지면 나도 바다에 뛰어들 거야!”소만리의 눈빛이 강하게 기모진을 쏘아보았다.기모진은 소만리의 눈에서 강인한 결심을 보았다.소만리는 기모진이 이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에게 말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더 이상 숨길 방법이 없었다.소만리는 자신의 감정이 너무 복받친 탓에 주변에 놀고 있던 관광객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모진의 얼굴이 너무 눈에 띄어서 소만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알아볼까 봐 걱정되었다.“모진,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 어디 다른 데 가서 얘기해.”소만리는 기모진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하지만 남자는 고집 센 아이처럼 소만리의 손을 놓고 혼자 걸어갔다.고집스러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만리의 마음이 쓰라려왔다.그때 강자풍이 소만리에게 전화를 걸어와 무슨 일이 생겼냐고 물었다.소만리는 강자풍에게 호텔에 가지 말라고 했고 호텔에서 있었던 사실을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기모진을 뒤쫓았다.“모진, 내가 당신을 속이고 경연을 만난 것 때문에 화난 거야?”기모진은 눈앞에 눈시울이 붉어진 아름다운 눈을 바라보며 힘없이 눈을 내리깔았다.“내가 당신의 지고지순한 희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을까?”
기모진의 말은 맞지만 소만리는 요즘 경연에게 너무 오랫동안 끌려다녀서 어떻게 자신이 주도권을 가져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소만리, 날 꽉 안아. 꼭 잡아.”기모진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만리는 그를 꼭 껴안았다.“모진, 당신 아까 그렇게 괴로워했는데 오토바이 탈 수 있겠어?”“아까 그렇게 힘들었던 건 오토바이를 탔기 때문이 아니야.”기모진은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그럼 왜 그런 거야? 모진, 지난 반년 동안 도대체 당신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한테 말해줄 수 있어?”소만리의 물음에 기모진은 잠시 멈칫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는 소만리에게 대답은 하지 않고 손잡이를 돌려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경연은 IBCI 본부로 돌아왔다.그는 상급 부서의 간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한 수사국 간부에게 기모진이 경도에서 사람을 죽인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다.게다가 상급자에게 기모진을 해임하도록 하고 경도의 경찰이 기모진을 잡는 것에 IBCI가 협조하도록 요청했다.상급자들은 이 일을 주의 깊게 신경 쓰겠다며 경연에게 직접 기모진을 잡는 임무를 부여했다.그야말로 경연이 매우 원하던 임무였다.이렇게 하면 기회를 봐서 기모진을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기모진만 제거한다면 그는 더 이상 뒷걱정 없이 안심하고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IBCI 본부를 빠져나온 경연은 F 국 안에서 흑강당의 가장 은밀한 지하창고로 슬그머니 찾아갔다.창고 문을 열려면 비밀번호가 필요했는데 이것은 그와 강어 두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강어는 이미 죽었고 이제 이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경연이 유일했다.경연이 창고에 들어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물건들을 바라보았다.그의 눈 속에 엄청난 야망과 거만함이 자신감을 앞세운 채 이글거리고 있었다.“기모진, 당신이 IBCI에 가입해서 흑강당에 성공적으로 잠입해 강어와 강연 두 남매에 대한 범죄 증거를 확보하면 흑강당을 완전
강연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 호텔방 주변에는 이미 경찰들이 철수한 상태였다.기모진은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소만리의 손을 잡고 방문 앞으로 왔다.“모진, 방문이 잠겼는데 어떻게 들어가지?”소만리가 걱정하며 묻자 기모진은 미리 준비한 만능 마스터키를 꺼내 쉽게 문을 열었다.강연이 피를 많이 흘렸는지 사건이 발생한지 며칠이 지났지만 진동하는 피비린내가 소만리의 코끝을 자극했다.그날의 상황을 말해주듯 구불구불 사방으로 튀어 있는 핏자국을 따라 소만리는 강연이 쓰러진 자리를 확인했다.기모진은 커튼을 친 다음 불을 켜고 소만리와 함께 현장에 남아 있는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소만리도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애초에 경연이 소만리를 카페로 불러내 해독제를 가져가게 하였고 다시 전화해서 기모진에게는 이 호텔 방으로 불러들인 건 분명 누명을 씌우기 위한 경연의 계략이었다.그때 갑자기 호텔방에 음식을 들고 나타난 여종업원조차 경연이 주선했을 것이다.경연은 미리 이 방 앞으로 코스요리를 불렀고 기모진이 이 방에 들어간 후 때마침 여종업원이 현장을 목격하게끔 만든 것이다.공교롭게도 복도 CCTV도 고장이 나 있었다.이 남자의 계략은 매우 치밀했고 하나하나 모든 동선과 알리바이를 철저하게 계산한 것이었다.소만리는 경연이 정말 이렇게 빈틈없이 계획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그녀는 가방에 휴대하고 있던 조그마한 손전등을 꺼내 강연이 쓰러진 부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경연이 왔었고 강연과 접촉한 적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무언가를 남겼거나 가져갔거나 했을 것이다.하지만 소만리는 뭔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모진, 그 총 말이야. 왜 거기서 당신 지문이 나왔지?”“그건 간단해. 경연이 내가 접촉한 물건들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 물건에 있던 내 지문을 탁본하면 되는 일이야. 경연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야.”기모진은 이미 꿰뚫고 있었다.소만리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경연이
기모진은 걸음을 멈추고 빙그레 웃고 있는 소만리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그가 서서히 뭔가 짐작을 하기 시작했고 그려놓은 듯 짙고 올곧은 두 눈썹을 점점 찡그렸다.순간 표정도 무거워졌다.“난 동의 못 해.”그가 아예 거절했다.소만리는 갑자기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아직 말도 안 했어.”“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난 알아.”기모진의 눈에 똑똑하고 지혜로운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소만리, 난 동의 못 해.”그의 표정이 더욱 굳어지며 재차 강조했다.소만리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모진, 난 당신 아내잖아. 내가 당신을 위해 뭔가 할 수 있게 해 줘. 두 눈 버젓이 뜨고 내 남편이 누명 쓰는 꼴을 볼 수 없어.”기모진은 소만리에게 다가갔다.“당신이 내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인 나는 당신이 나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게 할 수 없어.”“내가 하고 싶어.”“난 싫어.”“...”소만리는 말문이 막혔고 이 세상에서 그녀보다 더 고집이 센 사람이 기모진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어쩔 수 없이 그녀는 그를 따라 호텔을 나섰고 그들은 아이들을 보러 기 씨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기 씨 본가든 새집이든 이미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을 거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신분증 등록이 필요 없는 허름한 여인숙에 방을 하나 잡았다.지금 그들에겐 여기가 딱이었다.두 사람은 좁은 욕실에서 각각 샤워를 한 뒤 테라스에 나란히 서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고요한 밤빛 아래 별빛이 속삭이며 그들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이 밤, 모든 것이 평온했다.소만리는 기모진의 어깨에 기대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그의 품이 그리웠다.“모진, 당신 그거 알아? 처음에 당신과 결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내가 얼마나 미친 듯이 기뻐했는지. 평생 당신과 부부가 된다는 건 내 평생 가장 큰 행운이었어.”그녀는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가슴 시린 여정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오히려 풋풋함과 달콤함만 남아 그녀의
경연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선을 휙 그어 전화를 받자마자 저 너머에서 저돌적인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경연, 나 좀 만나.”“지금?”경연이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그래. 지금. 좀 만나야겠어.”소만리의 말투는 매우 침착했다. 경연은 궁금해졌다.“당신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아니야. 내가 그쪽으로 갈게.”경연은 이 상황을 즐기는 듯 재미있어하며 다른 뜻을 품고 말했다.“그럼 우리 신혼집으로 와. 기다릴게.”그들의 신혼집?소만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마음속에 그를 향한 혐오감과 거북스러움이 끓어올랐지만 오늘 밤 그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전화를 끊은 경연은 통화기록 속 소만리의 이름을 바라보며 그녀가 지금 보자고 하는 의미가 뭘까 추측했다.소만리가 기모진 때문에 살인범을 도운 혐의를 받고 경찰의 추적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경연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소만리가 그를 만나자고 하는 것이다.십여 분 후 경연은 공항에서 자신의 신혼집으로 도착했다.거실에는 그와 소만리의 웨딩 사진이 걸려 있었다.그가 웨딩 사진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경연이 뒤를 돌아보고 소만리를 본 순간 그의 갈색 눈동자에 놀라움이 가득 들어찼다.소만리는 갈아입을 옷도 없었고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었는지 낮에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였다.“당신 이런 섹시한 옷차림 정말 매력적인데.”경연의 칭찬은 나름 진심이었다. 확실히 경연은 소만리에 대해 호감이 가득했다.하지만 소만리는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경연, 난 내 남편을 구하러 왔을 뿐이야.”“응?”경연은 웃으며 눈썹을 가다듬었다.“그래서 이런 한밤중에 날 찾아온 거야?”“그래.”소만리는 돌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남사택은 기모진의 몸속 독소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해독제를 반드시 가지고 있을 거야. 그걸 갖고 싶어.”경연이 소만리에게 다가가자 훤칠한 몸집이 거대
소만리의 대답과 그녀의 눈에 서린 자신감은 경연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순간 강렬한 좌절감이 그를 덮쳤다.그는 검은 눈썹을 추스르며 침착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 소만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그는 확실히 어떤 여자에게도 이런 패기를 본 적이 없었다.소만리가 이미 결혼한 적이 있었고 아이까지 있는 여자였지만 경연은 그녀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는 매력을 느꼈다.지금도 뭔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종잡을 수 없는 마력 같은 것이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와 그를 사정없이 이끌어버렸다.하지만 경연에게는 기모진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설마 그가 정말 한 여자 때문에 이런 절호의 기회를 헛되이 놓치겠는가?아니다.경연은 마음속으로 웃었다. 그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기모진도 반드시 죽이고 소만리도 차지할 것이다.“경연, 어떻게 생각해? 내 남편 구해줄 거야, 말 거야?”소만리가 침묵을 깨고 따져 물었다.경연이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즐거운 듯한 눈빛을 반짝였다.“소만리, 기모진을 위해서라면 당신 뭐든 할 수 있잖아?”“그럼, 기모진이 무사하기만 하다면.”소만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경연은 겁 없이 덤비는 소만리를 짐짓 놀라며 바라보았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당신의 결심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어?”소만리는 경연이 말하는 뜻을 알아듣고 그를 마주 보며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움츠리지 않고 꼿꼿이 섰다.그녀는 손을 뻗어 크로스백을 잡아 바닥에 내던지고 상의의 어깨 끈을 미끄러뜨렸다.옷을 벗으려고 하자 경연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소만리, 언젠가 당신 스스로 기꺼이 내 여자가 되어줄 날이 올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그는 자신감이 가득 찬 눈으로 말했다.“남사택이 기모진의 몸속 독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해독제를 연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성분들이 너무 귀해서 줄지 말지는 당신 하기에 달렸어.”소만리의 눈동
기모진은 단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그런데 텅 빈 옆자리를 만져보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소만리?”그는 좁은 방 안에서 소만리를 찾아보려 했지만 방안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그가 대충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내려와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물어보려고 하자 사장님이 기모진에게 메모지 한 장을 건넸다.“멋쟁이 아저씨. 이제 일어나셨구나. 한밤중에 여자친구는 먼저 갔어요. 이 쪽지를 주라고 하면서.”한밤중에 갔다고?기모진은 이미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고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서늘해져 왔다.메모지를 열어보았더니 단 여섯 글자만이 눈에 들어왔다.“기모진, 사랑해.”기모진은 소만리의 아름다운 필체를 보았고 여섯 글자가 그의 동공에 깊이 파고들어 가슴에 새겨졌다.그 순간 그는 어젯밤 소만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모진, 나 경연이 자기 입으로 순순히 자백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어.”그래서, 이 바보야. 당신은 나의 결백과 위태로운 나의 목숨을 위해 경연을 찾아간 거야?이런 짐작이 들자 기모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소만리, 왜 이렇게 아직 바보 같아?난 당신이 이렇게 희생할 만큼 가치가 있는 사람이 못 돼.기모진은 즉시 소만리에게 전화를 걸면서 길에 오가는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했다.그러나 전화는 통화 중이었다.기모진은 소만리가 자신의 번호를 해킹했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그래서 더욱 걱정이 되었다.그는 소만리가 반드시 계획적으로 경연에게 접근해 아주 지혜롭게 스스로를 보호할 것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녀가 상대하는 사람은 경연이었다.경연은 피도 눈물도 없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냥이 같은 사람이었다!기모진은 경연을 찾아가기로 결심했고 한 상가 현관문 앞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소만리를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소만리 아냐? 왜 경연이랑 같이 있어?”기모진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엘리베이터 구석에 몰린 소만리는 저항하지도 몸부림치지도 못했다.눈앞에 있는 사람의 생김새는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이 바닐라 향기는 이미 그녀의 숨결을 압도하고 있었다.몇 초 동안 혼이 쏙 빠진 소만리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있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속에서 불이 나듯 초조한 마음에 그를 몰아세우며 말했다.“여기 왜 왔어? 얼른 가! 경찰이 아직도 날 감시하고 있을 텐데 이렇게 날 찾아오면 어떻게 해!”소만리는 급히 문 열림 버튼을 누르며 기모진을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기모진의 품으로 끌려가 엘리베이터 구석에 틀어박혔다.“날 따라와.”기모진의 말투는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며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탓하지 않았고 더욱이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자신의 자존심 따위 다 내팽개치고 오로지 기모진을 구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소만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난 안 가. 이미 시작한 일이야.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기모진은 심호흡을 하며 검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무슨 일이야?”그의 안색이 어둡다는 것을 알아챈 소만리는 걱정스러운 듯 기모진의 팔을 잡았다.“모진, 어디 아파? 당신 또 힘들어? 그 만성 독소가 당신을 또 힘들게 하는 거야?”기모진은 소만리의 걱정 가득한 모습을 보며 손을 뻗어 꼭대기 층의 버튼을 누르고 소만리를 돌아보며 끌어안았다.“소만리, 내 옆에 있어. 돌아와. 제발.”애원하는 그의 목소리가 마치 날카로운 칼처럼 그녀의 귓가를 찌르며 그대로 심장을 통과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울먹이며 눈물을 흘렸지만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모진, 난 당신한테 돌아갈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 말 한 번만 들어줘, 응?”“안 돼.”기모진은 고집 센 아이처럼 단호하게 거절했고 그의 깊은 눈도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소만리는 기모진의 몸 상태에 뭔가 이상이 있음을 느꼈다.그의 피부색은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