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저리 쳐지도록 미워.경연은 이것이 지금 소만리 마음속에 있는 그의 이미지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밖에서 보는 그의 이미지는 항상 우아하고 점잖고 신사다운 귀공자였는데 진저리 처지도록 밉다는 말이 어떻게 그와 어울릴 수 있을까.훌쩍 돌아서는 소만리를 보고 경연은 갑자기 앞으로 나가 다시 소만리를 막아서서 그녀의 머리를 힘껏 누르며 키스를 하려고 했다.“경연, 내가 당신을 경멸하게 만들지 마.”소만리는 이번에는 피하지도 저항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소만리의 말을 듣고 경연의 동작이 멈추었다.“경연, 당신이 지금 날 협박할 꼬투리를 잡았다고 해도 그게 뭐? 당신이 기모진을 이긴다고 해도 그게 뭐? 사람들이 납득할 수 없는 수단을 가지고 협박하고 이긴들 그게 대단해 보이지 않아.”소만리의 말을 들은 경연의 깊은 눈에 강한 불쾌함과 불만이 솟아올랐다.꼼짝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경연을 밀어내고 소만리는 성큼성큼 그 자리를 떠났다.그녀는 지금 경연이라는 남자가 과도하게 자신만만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리고 이 남자에게 가장 좋은 타격은 그의 비열한 수단을 비웃는 것이다.“와, 이 여자 몸매 정말 좋은데!”“쯧쯧, 내가 아까 내려가서 구해 줄 걸!”한편에서 들려오는 시시 껄껄한 음담패설을 듣고 나서야 소만리는 주위에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어떤 사람은 핸드폰으로 쉴 새 없이 그녀를 찍고 있었다.여름 날씨라 그녀는 옷을 두껍게 입지 않았고 방금 물에 들어가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소만리는 서둘러 가방으로 가슴을 가린 채 기세등등하게 핸드폰을 들고 그녀를 찍고 있는 남자들에게 다가왔다.“방금 찍은 거 다 지워!”그녀는 이 사람들이 무엇을 찍었는지 모르지만 방금 들은 음담패설 속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건방져 보이는 남자들 몇 명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소만리를 보다가 오히려 신이 나서 말했다.“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뻐. 아까 안 뛰어
소만리도 몸이 어딘가 불편함을 느꼈고 어디가 아픈지 털어놓았다.“모진, 나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소만리는 기모진의 손을 힘없이 잡으며 말했다.“나 방에 들어가서 쉬게 부축 좀 해 줘.”그녀가 말하는 순간 바로 기절했다.“소만리! 소만리!”기모진의 눈이 찢어질 듯 놀라며 의식을 잃은 소만리를 덥석 껴안았다.“소만리!”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황급히 차 옆으로 돌진했다.기란군과 기여온은 소리를 듣고 일제히 돌아보았다.위청재도 방에서 나오다가 기모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기절한 소만리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소만리! 소만리 왜 그래!”“나도 잘 모르겠어요. 바로 병원으로 가 봐야겠어요.”기모진은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어머니, 기란군이랑 여온이 좀 부탁해요. 특히 여온이 좀 잘 돌봐주세요.”그는 위청재에게 상기시키며 핸들을 잡으려고 했을 때 소만리의 다리를 안은 자신의 팔에 뜻밖에도 커다란 핏자국이 있음을 발견했다.그는 뒷좌석을 한 번 살펴보았다. 소만리는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바지가 온통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볼 수 없었다!그녀의 바지가 왜 이렇게 피투성이가 되었지?기모진은 뼈가 으스러지는 아픔이 심장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서둘러 액셀을 밟고 병원으로 향했다.소만리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기모진은 소만리가 들고 있는 가방을 대신 들려고 했지만 그녀는 꽉 쥐고 놔주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억지로 벌려서 겨우 그녀의 손에서 가방을 빼냈다.하얀 백지장처럼 식어버린 그녀의 얼굴을 보니 다시 기모진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소만리, 당신 어떻게 된 거야?어디서 어떻게 다친 거야?기모진은 소만리가 응급실에서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1분 1초 흐르는 시간이 기모진의 불안하고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속절없이 지나갔다.그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보려고 핸드폰을 꺼내
기모진은 손에 든 소만리의 가방을 보면서 마음속에 맴도는 추측을 외면할 수 없었다.이 가방 안에는 분명 아주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는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강물에 뛰어드는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기모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가방을 열었다.그는 소만리가 몸을 사리지 않고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그런데 그때 간호사가 급히 응급실에서 뛰어나왔다.기모진은 가방 속 물건을 들여다볼 겨를도 없이 급히 간호사를 가로막았다.“제 아내는 어떻습니까? 왜 그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간호사는 급해서 속이 타들어갔지만 걱정하는 기모진을 보자 멈춰 서서 말했다.“왼쪽 다리 허벅지 바깥쪽에 날카로운 도구에 베인 듯 피가 많이 나고 있어요. 하지만 환자분 혈액형이 RH 마이너스에요. 우리 병원에는 지금 없어서 다른 병원에 물어본 뒤 조치를 취해야 해요! 다른 병원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어요.”간호사는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말하고는 급히 달려갔다.기모진의 심장이 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그의 소만리는 피를 많이 흘렸는데 병원에 보유한 혈액이 없고 다른 병원에도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소만리는 희귀한 혈액형을 가지고 있다. 그도 아는 사실이었다.그는 자신의 피를 소만리에게 줄 수 없음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그들의 혈액형은 서로 주고받을 수 없다.기란군의 혈액형은 소만리와 같지만 아직 여섯 살인 아이의 피를 그녀에게 줄 수는 없다.하지만 사화정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그녀는 소만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자신의 피를 내어놓았을 것이었다. 하지만...기모진은 초조하게 벽에 기대어 불에 타버린 모 씨 집안, 처참하게 돌아가신 사화정과 모현을 떠올렸다.비록 기모진이 불을 지른 게 아니라고 양이응이 진술하기는 했지만 그는 결국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그날 모 씨 집으로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도
기모진은 발치에 떨어진 작은 시약병을 내려다보며 몸을 구부려 주웠다.그의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투명한 병에는 무색무취의 액체가 들어 있었고 아무런 라벨도 붙어 있지 않았다.그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문득 새벽에 자신이 잠든 틈을 타 소만리가 자신에게 주사를 놓던 모습이 떠올랐다.기모진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소만리를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소만리, 당신이 나한테 놓은 주사가 이거 맞지?이게 도대체 뭐야?이걸 지키겠다고 목숨을 걸고 강물에 뛰어든 거야?기모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답도 찾아내지 못했고 그렇다고 소만리에게 물어볼 생각도 없었다.그가 가방에서 꺼낸 물건들을 다시 집어넣으려고 하는데 바로 그때 곁눈으로 누군가가 병실 문의 작은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언뜻 보았다.그가 눈을 번쩍 들어 올리자 그 사람은 재빨리 얼굴을 돌려 가버렸다.황급히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기모진은 수상하게 여겼다.그는 바로 일어나 병실 문밖으로 나가 그 사람이 떠난 방향을 따라 잠시 걸어가 보았지만 수상한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소만리가 걱정이 되어 기모진은 더 이상 뒤쫓지 않았다.병실에 들어서자 소만리가 눈을 살며시 감았다 떴다 하는 것이 보였다.“소만리.”기모진은 빠른 걸음으로 병상으로 돌아와 소만리의 손을 잡았다.소만리는 힘없이 피곤한 눈을 떴고 흐릿한 시선에 남자의 근심 가득한 얼굴이 보였다.“모진...”그녀는 힘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머리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기모진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며 말했다.“소만리, 천천히.”소만리는 온몸에 힘이 빠져 기모진의 품에 기대어 앉았다.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하고 힘없이 무기력함을 느끼던 그녀는 눈을 들어 마음 아파하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모진, 나 어떻게 된 거야? 왜 그렇게 어지럽다가 쓰러진
소만리는 지금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화제를 돌렸다.“모진, 나 배가 좀 고픈데 먹을 것 좀 사다 줄 수 있어?”“뭐 먹고 싶어?”“당신이 사다 주는 건 다 좋아.”소만리는 눈썹에 아치를 그리며 미소 지었다.기모진은 소만리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몸을 돌려 소만리의 앉은 자세를 편안하게 고쳐주고 나서야 떠났다.기모진이 떠나자마자 소만리는 지치고 힘없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옆에 놓인 가방을 집어 들었다.지금 생각해 보니 강물에 뛰어들었을 때 확실히 왼쪽 다리에 무언가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마 그때 상처를 입은 것 같다.소만리는 속으로 회상하며 가방을 열었다. 그런데 열쇠도 지갑도 립스틱도 다 있는데 제일 중요한 해독제가 없어졌다!소만리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시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어떻게 없을 수가 있지?”소만리는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강에 뛰어들었다가 뭍으로 나온 후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던 때를 회상했다.분명히 해독제는 가방에 무사히 있어야 했는데 지금 보이지 않았다.오늘이 기모진에게 주사를 놓을 마지막 기한인데 이 해독제가 없으면 안 된다!소만리는 이불을 들추었고 다리의 심한 통증을 참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초조하게 병실을 한 바퀴 돌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모진이 가져갔나?”소만리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허둥지둥 머리맡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고 기모진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소만리, 이걸 찾고 있는 거야?”한 여자의 목소리가 유유히 들려왔다.소만리는 몸을 홱 돌려 그날 병원 지하에서 마주친 뒤 계속 자신에게 협박전화를 걸었던 여자를 보았다.날씬한 몸매의 여자는 그날 본 모습과 똑같이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그러나 소만리는 지금 이 여자가 누구인지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 여자가 손에 들고 있는 해독제만 보였다.“왜 내 물건이 당신 손에
소만리가 소리치며 막아보았지만 이미 늦었다.그 여자는 시약을 버리려고 단단히 결심한 것이었다!소만리는 시약을 잡으려고 달려갔지만 시약은 이미 베란다 밖으로 날아가 아래로 떨어졌다.그녀는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다.“안 돼!”기모진은 작은 창문을 통해 이 광경을 보고 문을 박차고 들어가 소만리에게 달려갔다.선글라스를 낀 여자는 곧장 들이닥친 기모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기모진이 자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불쾌하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했다.기모진은 바람처럼 소만리 곁으로 달려와 시약을 잡기 위해 몸을 던졌으나 잡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소만리를 품에 안았다.기모진에게 이 모습은 너무나 충격이었다.“소만리!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기모진은 애처롭게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고 그녀의 두 눈에서 초조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았다.“그게 대체 뭐야? 뭐길래 이렇게 불안해하는 거야?”소만리는 기모진의 물음에 답을 할 수 없었고 힘껏 그를 밀어내고 다리 부상 따윈 완전히 잊고 성큼성큼 뛰어나갔다.기모진도 곧바로 뒤따라 돌아섰다. 지금 이 순간 선글라스 여자는 보이지도 않았다.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소만리를 쫓아갔다.지금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가로등을 켜지 않으면 주위의 상황을 전혀 볼 수 없다.소만리는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병실 아래층 화단으로 달려가 다리의 상처도 더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리저리 뒤졌다.지금은 바람이 없고 시약이 일정량 담겨 있어서 바람에 날릴 가능성도 없다.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떨어졌을 것이다.소만리는 눈을 들어 높은 곳을 한 번 둘러보았지만 자신의 병실이 몇 층인지 알지 못했다.그녀도 그저 이렇게 찾을 수밖에 없었고 달리 판단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시약이 화단에 떨어졌기를 기도할 뿐이었다.시약이 바닥에 떨어졌다면 유리병이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다.안 돼!깨지면 안 돼!소만리는 손등이 꽃잎에 베어 피를 흘리는 것
그 해독제는 바로 기모진의 목숨이다!“왜 안 보이지? 분명히 위에서 던졌는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어...”소만리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초조하게 중얼거렸다.핸드폰 조명을 켜고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거대한 검은 천이 순식간에 그녀를 짓누르는 듯 소만리는 숨이 막히고 눈앞이 캄캄했다.만약 이 해독제를 찾지 못한다면 기모진의 몸은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그럴 수는 없다. 그녀는 반드시 찾아야 했다!소만리는 이를 악물고 방향을 바꿔 다시 찾으려 했지만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아 현기증이 나서 눈앞이 까마득해졌다.“소만리.”기모진은 더 이상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지 않고 급히 다가가 쓰러질 뻔한 소만리를 부축했다.그의 마음이 너무 아파서 온몸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소만리, 도대체 뭘 찾고 있는 거야? 그게 당신한테 그렇게 중요한 거야?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물에 뛰어들 만큼? 이렇게 몸을 돌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풀밭을 뒤질 만큼?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소만리는 머리가 너무나 어지러웠지만 그녀가 강물에 뛰어든 일을 기모진이 말하는 것을 얼핏 들었다.알고 보니 이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누군가가 촬영한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본 것임에 틀림없다.소만리는 잠자코 생각하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 심호흡을 했다.그제야 조금 눈앞이 맑아지기 시작했다.그녀는 주먹을 쥐고 기모진의 품에서 일어서며 말했다.“날 내버려 둬.”기모진은 그녀를 끌어당기며 말했다.“내가 어떻게 당신을 내버려 둘 수 있겠어. 당신은 내 아내야. 내가 평생 가장 아끼고 가장 신경 쓰는 사람!”소만리는 붉게 물들어오는 눈을 들어 기모진에게 강렬하고 사나운 눈빛을 보였고 입술을 오므리고 눈물을 삼키며 고집스럽게 말했다.“당신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남자야. 그러니까 난 꼭 찾아야 해!”그녀는 고집을 부리며 돌아서서 계속 찾으려고 했다.그녀가 얼굴을 돌리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흩날렸다.
소만리가 뒤에서 껴안자 기모진은 황급히 몸을 돌려 고개를 그녀에게 향했다.소만리가 맨발로 온몸에 힘이라곤 하나 없이 자신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옆으로 끌어안았다.소만리는 가슴이 시려왔다. 있는 힘을 다해 두 손을 들어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그녀의 초췌한 얼굴을 그의 품에 묻었다.“모진, 날 내버려 두지 마.”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심지어 비굴하게 매달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기모진의 마음이 몹시 아팠다.그가 어떻게 그녀를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인가?그가 그녀를 위로하려는데 소만리가 미안해하며 말을 했다.“아까 내가 당신한테 심하게 굴었던 거 잘 알아. 그렇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냐.”기모진은 걸음을 옮기며 그녀의 볼에 머리를 숙여 키스하고 얇은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대었다.“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내가 어떻게 당신한테 화를 낼 수가 있겠어. 미안해하지 마. 당신은 나한테 미안한 짓 한 적 없어.”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오히려 소만리의 마음에 난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그의 품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그럼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줘.”“그래, 안 갈게.”기모진은 소만리를 안고 가만히 침대에 앉아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날 더 꽉 안아줘.”그녀는 예전에 없던 애교스러운 말투로 기모진에게 말했다.기모진도 그녀를 놓기가 아쉬웠고 그대로 소만리를 안고 침대 옆에 앉았다.따뜻한 손길로 그녀의 긴 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모진, 당신이 지금 뭘 궁금해하는지 알아. 그렇지만 내가 뭘 하든 당신을 더 이상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그래, 알아.”기모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그냥 내 곁에 있어 줄래?”아직 눈물방울이 맺혀 있는 소만리의 설레이는 눈빛이 기모진의 눈 속에 더욱 선명하게 비쳤다.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숙인 채 살며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대답을 대신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