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선의 얼굴빛이 많이 어두워 보여서 소만리는 처음으로 예선의 얼굴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꼬는 듯한 쓸쓸한 표정을 보았다.소만리도 부모님을 생각했다. 처음에 그녀 역시도 부모님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었다.그러나 결국 피는 물보다 진했다. 사화정과 모현은 정말 마음 아파했고 후회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이미 그녀를 떠나버렸다.엄마 아빠.소만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며 돌아가신 두 분을 떠올렸다.눈을 들어 소만리의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을 본 예선은 이내 사화정과 모현을 떠올렸고 그녀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소만리, 우리 그런 슬픈 생각하지 말자. 너 경연이 생일선물 사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 명품숍에 가서 골라 봐. 나도 소군연 선배한테 선물 하나 사 주려던 참이야.”소만리는 정신을 차리고 예선에게 진지하게 말했다.“예선아, 사실 모든 엄마들은 자기 아이를 많이 사랑해.”“소만리,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아. 내 부모가 날 사랑했으면 좋겠지만 그들은 그때 그럴 수가 없었던 거야. 지금 나한테 이렇게 뭘 사주려고 하는 건 단지 그들 마음 편하려고 그러는 거야. 난 이런 거 원하지 않아.”예선의 태도는 매우 강경했다. 아마도 그때 당시 부모님한테 받은 상처가 너무 깊었던 탓일 것이다.소만리도 지금은 그녀에게 충고하기 쉽지 않다는 걸 알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예선의 부모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그녀가 이렇게 툭 털어놓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예선은 소만리의 손을 잡고 명품 코너로 들어갔다.“그런데 소만리, 경연한테 선물하면 기모진이 질투하지 않아?”소만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질투하지 않을 거야. 나 이미 기모진한테 얘기했어.”“모진, 모진. 아주 다정하게 입에 짝짝 붙는구나. 소만리 드디어 너한테도 이런 달달한 시간이 왔어.”예선이 놀리며 웃었다.고진감래.소만리도 정말 고생 끝에 낙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는 기모진이 휴지 뭉치를 숨기던 행동을
영내문은 한가롭게 앉아 직원에게 신발을 신겨달라고 했다.예선은 결코 영내문과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아 돌아서려 했지만 영내문이 시비를 걸어왔다.“예선, 가는 거예요? 여기 물건이 너무 비싸서 못 사는 거예요? 괜찮아요. 난 소군연 오빠랑 어릴 적부터 친구니까 혹시 돈이 부족해 못 사는 거면 내가 빌려줄 수 있어요. 자꾸 짝퉁이나 사고 그러지 말아요. 들통나면 창피하잖아요.”영내문의 얼굴에 도도한 우월감이 넘실대고 있었고 일부러 손목의 주얼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잠자코 자신을 보고 있는 예선을 보고는 영내문은 더 도도한 태도로 말했다.“이 팔찌 예쁘지 않아요? 당연히 예쁘겠죠. 몇천만 원짜린데. MissLady에서 나온 2년 전에 절판된 디자인이에요. 이젠 돈이 있어도 못 사죠.”영내문이 자랑스러운 듯 말하는 표정을 보고 예선은 미소 지으며 주얼리를 칭찬했다.“ML 한정판이구나, 어쩐지 예쁘더라고요.”영내문은 더욱 거드름을 피우며 신발을 신고 일어선 뒤 일부러 예선에게 다가갔다. 예선이 물었다.“영내문,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영내문은 매장 안의 다른 고객과 점원을 한 번 쓱 보고 일부러 목소리를 약간 높여 말했다.“예선, 군연 오빠 집안 재력에 눈독 들이고 있다는 걸 알아. 당신처럼 허영심 많은 여자는 너무 많아.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지.”그녀는 안하무인으로 두 눈을 들어 예선을 한 번 훑어보았다.“당신 좀 봐. 몸에 명품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군연 오빠랑 어울릴 수 있겠어? 예전에 군연 오빠 집에선 내가 다 까발리기가 미안했지만 정말 당신한테 일깨워주고 싶었어. 돈이 없으면 굳이 있는 척 포장하지 마. 명품을 살 수 없으면 굳이 짝퉁을 사서 본인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짓도 하지 마. 예선, 짝퉁 걸치고 다니다 들통나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당신 몰라?”영내문은 말을 마치고 거만하게 눈을 번뜩거렸다.소만리는 여기까지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영내문을 향해 걸어갔다.“영내문 씨.
영내문의 얼굴빛이 순간 홀로그램처럼 붉고 푸른빛이 뒤섞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영내문은 소만리를 보고도 믿을 수 없었고 왜 그녀가 그렇게 단호하게 분명히 말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며 경의로운 시선이 소만리에게 쏟아졌다.“알고 보니 그녀가 ML 수석 디자이너였구나. 그런데 이렇게 예쁘기까지 하니 디자인한 주얼리가 안 예쁠 수가 없지.”“그동안 이 브랜드의 주얼리 많이 샀는데 디자인이 정말 특이하고 예뻐.”“그때 자주 샀었는데 디자이너가 바뀌면서 잘 안 샀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소만리를 매우 자랑스러워했다.소만리는 좀 쑥스러웠다.“예선아, 목소리 좀 낮춰.”예선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영내문을 바라보았다.“...”영내문은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체면이 서지 않는 듯 얼른 입을 열었다.“당신이 ML 수석 디자이너면 어쩌라고? 그러면 내 명예를 비방해도 되는 거야? 우리 아빠는 경도에서 유명한 사업가이고 집에 돈이 넘쳐나는데 내가 가짜를 쓴다고? 당신이 예선을 도와주려고 일부러 날 모함하는 거잖아!”그녀는 애처로운 척하며 보는 사람들을 자극했다.“소만리, 그래요. 좋아. 디자이너니까 이거 잘 봐. 내 팔찌에는 번호가 정해져 있어! 나 유명한 사업가 집안 외동딸이야! 내가 가짜를 왜 해!”소만리는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당신이 가짜를 하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한 가지 당신한테 말하고 싶은 건 바로 번호가 있기 때문에 이 팔찌가 가짜라는 거야. 소위 번호라는 것은 모두 위조품을 파는 사람이 만든 거야. 정품 팔찌는 번호가 있는 게 하나도 없어. 만약 당신이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당신한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도 있어.”“뭐...”소만리의 말을 듣자 영내문의 얼굴은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그녀는 이를 악물었지만 대답할 말이 없었다.예선도 아무 말없이 영내문을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웃기만 했다.영내문은 답답
그녀는 모조품을 착용한 것이 들통난 상황에서 지금 수표를 끊지 못하면 체면이 더 말이 아니게 된다.하지만 요즘 지출이 너무 많아서 수표가 이미 한도액 초과라 이 주얼리를 살 여력이 없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 부잣집 외동딸의 수표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영내문의 얼굴은 점점 난처해졌고 그녀는 가방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었다.“내일 여기로 날 찾으러 와. 오늘은 수표를 가지고 오지 않았어!”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가방을 들고나가다가 예선과 소만리 앞을 지날 때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두고 봐!”영내문이 떠나자 소만리와 예선은 속이 다 후련했다.지금 영내문의 모습은 소군연 선배 집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예선아, 너 소군연 선배 꽉 잡아. 저 영내문이란 여자 보통이 아냐.”소만리는 걱정이 되어서 예선에게 귀띔을 했고 방금 영내문이 한 행동을 보고 완전히 간파할 수 있었다.“보니까 영내문은 팔찌가 가짜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어.”“나도 봤어. 영내문의 그 표정.”예선은 회상하며 말했다.“처음 영내문을 만났을 때 그 여자가 입었던 원피스와 소군연 선배 엄마에게 선물한 브로치는 모두 가짜였는데 소군연의 엄마는 영내문이 배려심이 많다며 자랑했었어.”예선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자기가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사람을 헐뜯는 저런 사람을 정말 난 이해할 수가 없어. 그것도 유명한 사업가 외동딸이라면서.”소만리도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 세상에는 온갖 이상 해괴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소만영, 강연 모두 보기 드문 이상 해괴한 인물들이었다.그들의 공통점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었다.소만리는 결국 경연에게 줄 선물을 고르지 못했고 예선은 소군연과 함께 입으려고 커플 캐주얼 평상복 두 벌을 샀다.로맨스의 달콤한 미소가 맴도는 예선의 얼굴을 보며 소만리도 커플룩을 사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달콤한 로맨스 가
소만리는 멍하니 휴지에 묻은 검붉은 핏자국을 보고 있었다.머릿속은 순간적으로 산소가 부족한 듯 어지러웠고 눈앞은 검은 안개로 뒤덮이는 듯 캄캄해졌다.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다만 끝없는 어둠만이 그녀의 호흡과 지각을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그의 병은 낫지 않았고 몸속의 독소도 아직 깨끗이 제거되지 않았던 것이다.그는 그녀를 속였다.“소만리.”멀리서 기모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만리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차가워진 손발을 가다듬고 휴지를 주머니에 숨긴 채 눈가의 눈물을 빠르게 훔쳐내며 애써 웃음 짓도록 스스로를 다그친 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녀는 자신이 고른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기모진을 보았다. 맞춘 것처럼 꼭 맞았다.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에 아치를 그렸다.“어때? 괜찮아?”소만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그의 옅은 미소는 마치 오래전 그를 처음 만났던 때로 그녀를 돌려놓는 것 같았다.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의 얼굴에는 풋풋한 소년미가 남아 있다.소만리는 눈가가 떨려오는 걸 참지 못하고 기모진의 품에 안겨 그의 허리를 덥석 껴안았다.기모진은 소만리가 왜 갑자기 자신을 안았는지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를 꼭 껴안았다.“왜 그래, 응?”“날 떠나지 마.”소만리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속삭였다.기모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을 향한 소만리의 사랑과 애틋함을 느끼며 다정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다시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야.”그는 약속했지만 눈빛은 점점 쓸쓸해졌다.“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 함께할 거야.”내 목숨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해도 다시는 당신을 놓지 않을 거야.기모진은 마지막 이 말을 소리 없이 마음속에 간직했다....소만리는 조심스럽게 화학 실험실로 가서 그 휴지 뭉치를 실험사에게 건네주었다.반년 전에도 소만리에게 피 묻은 휴지를 의뢰받은 적이 있었던 고
넓은 강가에 검은 양복을 입은 경연이 강물을 향해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은 여전히 깊은 정취가 묻어나고 우아했다.소만리는 기모진을 차에서 기다리게 하고 케이크를 들고 혼자 경연의 뒤로 걸어갔다.“경연, 나 왔어요. 다리 다 나았어요?”경연은 소만리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석양빛이 비말처럼 경연의 등 뒤로 부서졌고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소만리가 전에 볼 수 없었던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지만 그는 소만리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생일 축하해요.”소만리가 케이크를 건넸다.“내가 어떤 값비싼 선물을 준비하더라도 당신한테는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케이크를 만들었어요.”“고마워요. 잘 먹을게요.”경연은 케이크를 받아들고 고마운 마음으로 케이크를 보았다.“내가 촛불을 붙여 소원을 빌 수 있게 좀 열어 줄 수 있어요?”“그럼요.”소만리는 케이크 상자를 열고 가늘고 긴 초를 꺼내 케이크에 꽂았다.그러나 불을 붙일 만한 것이 없어서 경연의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촛불을 켰다.석양이 물러간 해 질 무렵 촛불이 옅은 강바람에 흔들렸다.기모진은 멀지 않은 곳에서 차에 앉아 강변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고 그윽한 눈동자는 날카롭게 경연을 노려보았다.점점 더 서늘한 기운이 그의 두 눈을 가득 채웠다.소만리는 기모진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신경 쓰였고 이 남자를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경연이 소원을 빌고 촛불을 끈 후 서명한 이혼 합의서를 그녀에게 주면 그녀는 곧장 돌아가려고 했다.그녀와 경연의 관계는 이것으로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경연은 생각에 잠긴 듯한 소만리를 바라보며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소만리, 내가 무슨 소원 빌었는지 알아요?”경연이 물었다. 소만리는 당연히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당신이 무슨 소원을 빌었든 꼭 이루어지길 바래요.”경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층 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
소만리는 경연에게 강제로 안기는 순간 몸부림을 치다가 경연이 자신에게 키스하려 하자 황급히 고개를 숙여 피했다.“경연, 당신 왜 그래요! 놔줘요!”소만리가 있는 힘껏 빠져나갔지만 경연은 갑자기 소만리의 뒷머리를 잡아당겨 그녀를 다시 그와 마주 보게 했다.지금 그의 싸늘한 눈빛은 분명 이전의 온화함과는 정반대였다.“경연?”소만리는 갑자기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낯설다고 느꼈다.경연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소만리, 그거 알아? 당신이 내 최고의 생일선물이라는 거.”“...”소만리는 경연의 말뜻을 듣고 갑자기 눈빛에 날카로운 날을 세웠다.그녀도 더 이상 이런 그와 타협을 할 수가 없었다.힘을 다해 저항하려는데 뒤에서 갑자기 돌풍이 불어오는 듯 낯익은 손바닥이 그녀의 어깨를 꼭 끌어안고 경연의 품에서 끌어냈다.소만리는 기모진의 품에 안기는 동시에 차가운 기운을 가득 담은 남자의 얼굴이 자신의 역린을 건드린 사탄을 만난 듯 경연의 멱살을 움켜쥐고 조금도 망설임 없이 경연의 얼굴을 향해 한 방 세게 날리는 것을 보았다.“경연! 소만리 건드리지 마!”기모진의 말투는 추운 겨울바람처럼 매서웠고 눈빛은 매의 그것보다 더 날카로웠다.지금까지 본 적 없는 독하고 살벌한 것이었다.한 대 제대로 얻어맞은 경연은 얼굴을 찌푸리고 손을 들어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가볍게 털어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전히 웃으며 얼굴을 들어 올렸다.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폭발하려는 기모진을 바라보았다.“기모진, 소만리는 내 아내야.”경연이 가볍게 이 말을 내뱉었다.경연의 말은 마치 기모진의 마음을 폭발시키는 탄약과도 같았고 기모진은 다시 경연의 멱살을 잡았다.피에 굶주린 듯 눈동자는 더욱 살벌한 빛을 깊게 뿜어냈다.“소만리는 내 아내야!”기모진은 입술 사이로 지독하게 한 글자 한 글자 깨물듯 말했고 미간에는 서슬 퍼런 한기가 솟아올랐다.소만리가 경 부인이라는 칭호를 달고 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만스러운지
”소만리, 경연이 이혼 번복했지?”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경연이 기모진 앞에서 한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게다가 나와 소만리는 이미 부부관계도 했었어.”그녀는 머리가 몹시 지끈거려서 갑자기 차 문을 열고 쓰레기통 옆으로 가서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를 집어던졌다.돌아서려는 순간 기모진이 이미 그녀에게 다가왔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팔 벌려 소만리를 끌어안았다.“경연이 무슨 말을 해도 당신에 대한 내 감정엔 아무 변함이 없어.”그는 소만리가 지금 무엇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것인지 다 알고 있었다.“나한테 맡겨. 내가 경연한테 가서 서명 받아 올게.”소만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고 갈색 눈동자는 더욱 근심으로 가득 찼다.“모진, 절대 과격한 행동은 하면 안 돼. 당신한테 무슨 일 생기는 거 절대 보고 싶지 않아.”기모진은 소만리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이해했다.“바보, 당신과 더 오래 더 멀리 가기 위해서 난 절대 허튼짓 안 해.”“그런데 방금 당신 모습 너무 살벌했다는 거 알아?”“나한테 놀랐어?”기모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웃으며 물었다.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가을빛 눈동자는 진지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당신이 나를 그렇게 미워할 때도 이렇게 사나운 눈빛을 한 적은 없었어.”기모진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지만 다시 한번 웃으며 말했다.“내가 당신을 놀라게 했구나. 미안해. 내가 지금 잘 위로해 줄게.”그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살며시 가까이 다가갔고 애틋하게 키스했다.“소만리, 우리 이제 집에 가자.”“응, 집에 가자. 우리 집에 가자.”소만리는 기모진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기분이 한결 좋아졌고 바로 차에 올랐다.시간이 아직 조금 일러서 소만리는 기모진에게 기 씨 집으로 먼저 가보자고 했다.어제부터 오늘까지 꼬박 하루 동안 아이들을 보지 못해서 소만리는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만리는 기여온과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