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진은 이미 누군가가 흑강당에 잠입해 들어가 있고 심지어 그 사람의 명령을 강어가 따른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흑강당을 뿌리째 뽑을 수 없는 걸 보면 흑강당의 저력이 얼마나 탄탄한지 알 수 있었다.기모진은 카페를 떠나 차를 몰고 기란군과 기여온이 다니는 유치원 앞에 왔다.그는 유치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지만 두 남매가 나오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그는 의아하게 생각되어 차에서 내려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물었다.담임 선생님은 기모진의 얼굴을 알아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기 사모님이 여온이는 요 며칠 유치원에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기란군도 같이 오지 않고 있어요.”대답을 듣고 나니 기모진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그는 차를 몰고 기 씨 집으로 가서 차를 멀리 떨어진 곳에 세운 후 걸어서 집 입구에 이르렀다.공교롭게도 그가 막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기란군과 기여온 두 남매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기여온의 조각같이 곱고 예쁜 얼굴에는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웃음이 넘쳐나고 있었지만 그저 웃고 있을 뿐 기란군과 기본적인 언어 소통조차 하지 않았다.그녀는 기란군의 손을 두드리거나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기란군과 소통할 뿐이었다.그 오밀조밀 작은 입은 아무리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기모진은 얇은 입술을 오므리며 일그러뜨렸고 눈시울은 이미 뜨거워졌다.이내 그의 목젖이 들썩거리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여온이 정말 말을 할 줄 모르다니.기모진은 주먹을 불끈 쥐고 괴로워하며 자책했다.그는 자신이 이미 이 아이를 대면할 자격을 잃었다고 생각했다.이 아이에게 무엇을 해 주었냐고 자신에게 자문해 보았다.아무것도 없었다.부성애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그는 여태껏 자격 없는 아빠 그 자체였다.기모진이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작은 고무공이 그의 발에 굴러들어 왔다.그가 시선을 내려 보니 기여온이 작은 다리를 팔랑거리며 신나게 뛰어오는
사실 이 익숙한 발걸음 소리를 듣고 기모진은 이미 누가 오는지를 알고 있었다.뒤돌아보는 순간 그는 역시 소만리가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자신의 혈육과 이 생명과도 같은 여자와 함께 살아가길 정말 간절히 원했다.그러나 소만리는 기모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두 아이 앞에 가서 온화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귀엽고 하얀 두 아이를 어루만졌다.“기란군, 동생 데리고 먼저 들어가 있어. 엄마가 조금 있다가 케이크 만들어 줄게.”기란군은 소만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손을 들어 기여온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을 잡았다.돌아서기 전에 기모진을 흘깃 다시 보았다.두 아이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소만리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당신 어쩌자고 여온이 보러 왔어?”소만리는 냉정하고 차가운 기운을 풍기며 비꼬았다.“당신 봤지? 여온이 말 못 하는 거. 당신 여자친구가 한 짓 마음에 들어?”기모진은 소만리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의 옆을 스쳐가더니 손에 든 작은 공을 문간 계단에 살짝 내려놓았다.내려놓고 그는 냉담하게 돌아서서 걸어갔다.소만리는 계단 쪽으로 다가가 공을 집어 기모진의 등 뒤로 내리쳤다.작은 고무공의 무게는 매우 가벼웠지만 기모진의 등에 천근만근 납덩이처럼 무겁게 부딪히는 것만 같았다.그는 걸음을 멈추고 소만리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지금 여기 다른 사람은 없어. 기모진 당신 말할 수 있지? 도대체 왜 강연이 곁에 있는 거야?”소만리의 말투는 공격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부드러웠다.“난 당신이 이렇게 잔인하다고 믿지 않아. 당신이 정말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아이들에게 이렇게 냉혈하게 대할 순 없어. 당신이 이렇게 무정하게 굴수록 문제는 더 커진다구.”소만리는 그의 앞으로 다가와 남자의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기모진, 대답해. 혹시 말 못 할 고충이 있다면 눈을 깜빡여 봐. 그럼 내가 알아들을 수 있어.”이 말이 떨어진 후 한
기모진은 피곤해서 의자에 기대었다. 눈물이 그의 눈가를 적시고 흘러내렸다.여온, 아빠가 미안해.아빠가 떠나기 전에 너의 달콤한 웃음소리와 즐겁게 엄마라고 부르는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길 바래.그는 몰래 숨겨놓았던 가족사진을 어루만졌다.슬픔이 온몸을 관통해 스쳐가고 그 아픔이 선명해질수록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누구인지 더 깊이 기억에 새겨지고 있었다.소만리는 오랫동안 기모진이 떠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도저히 기모진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소만리는 여전히 그에게 말 못 할 고충이 있기를 바랬지만 그의 행동이 너무 무자비해 보여서 이제는 그를 위해 어떤 변명을 찾아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앞으로 사흘 후면 그녀는 경연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위청재도 날짜를 보고 결혼식 이틀 전에 아기를 안고 소만리를 찾아왔다.“소만리, 너 정말 경연이랑 결혼할 거야? 모진이한테는 정녕 기회가 없는 거냐?”소만리는 정리된 옷을 캐리어에 넣고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었다.“나랑 그 사람은 헤어졌다 만났다 그 많은 세월을 보냈어요.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되었죠. 아마도 이건 서로 인연이 아니란 걸 말하는 것 같아요.”“어떻게 인연이 아니냐? 만약 인연이 아니었다면 너희들한테 어떻게 요 꼬물이가 생겼겠니?”위청재는 여전히 만류하고 있었다.소만리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지금 마음속으로 완전히 그를 내려놓았다고 할 순 없지만 나와 그 사람이 다시 만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소만리가 자신의 옷을 챙기고 상자를 들어 올렸다.그리고 일어나 위청재의 품에서 아기를 건네받고 안았다.아기는 벌써 태어난 지 석 달이나 되었다. 천사 같은 아기가 그녀를 향해 웃는다.“꼬물아, 엄마가 뭐라고 네 이름을 지어주면 좋을까? 형은 기란군인데 넌 어떤 이름이 좋아?”그녀는 아기에게 물었지만 사실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어차피 말할 줄 모르는 아기가 대답해 줄 리 만무했다.예전에 이 아
비록 날은 어두웠고 안에 불도 켜지지 않았지만 소만리는 똑똑히 보았다.단발머리에 섹시한 옷차림을 한 여자가 반듯한 체구의 남자에게 안겨 껴안고 키스를 하고 있었다.이 단발머리 여자는 분명히 강연이었고 그럼 이 남자는 기모진 말고 또 누가 있을까.기모진이 강연과 잤다고 예전에 말한 적은 있지만 소만리는 반신반의했었다.그러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말았다. 소만리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믿지 않을 수 없었다.냉정하게 이런 사실과 맞닥뜨릴 수 있을 줄 알았던 그녀는 순간 가슴이 아파서 심장이 마음대로 요동치고 흐트러져서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였다.소만리는 점점 더 보기 흉해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여자의 요염한 웃음소리가 들리자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손가락으로 엘리베이터를 닥치는 대로 눌렀다. 위가 경련을 일으키며 구역질이 났다.기모진은 사무실 안에서 소만리가 떠나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그제야 사무실 불을 켰다.방금 연기하고 있던 두 사람의 배우가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너네들은 이제 가도 돼.”그는 입을 열어 두 사람을 보내면서 당부를 했다.“일단 스타일링부터 바꾸고 뒷문으로 나가.”두 배우는 기모진이 건넨 수표를 받고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고맙습니다. 사장님. 다음에도 연기가 필요하시면 또 불러주세요.”“더는 필요 없어.”기모진이 냉랭하게 거절했다.“명심해. 이 일은 우리 셋만 알고 있어야 해. 꼭 기억해.”두 사람은 기모진의 신분과 지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서야 그 자리를 떠났다.기모진은 책상에 앉아 피곤해서 눈을 감았다.그는 자신의 몸 상태가 갈수록 나빠지는 것을 느꼈고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이 밀려왔다.모레 경연과 소만리가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의 통증이 한층 더해졌다.경연은 평생 의지할 만한 믿음직한 좋은 남자다. 기모진은 소만리가 그런 기회를 놓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그가 줄 수 없는 것을 다른
”기모진, 도대체 무슨 생각 하는 거야?”남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만리,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다시는 널 생각하지 않을 거야.”그는 차갑게 입을 열었고 신분증을 다시 꺼내며 말했다.“가져가. 더러워서 안 가져가면 영원히 당신 아들은 호적에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얘긴가?”“내 아들? 나 혼자만의 아들이야?”소만리는 비꼬듯 웃었다. 더욱 촘촘히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그녀의 시선을 흐렸다.“예전에 당신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무슨 말 했는지 기억나? 남은 인생은 꼭 함께 행복하게 해준다고 했었지. 하지만 당신이 내게 준 행복은 너무나 짧았어.”그녀는 비에 젖은 신분증을 보았다. 무너진 마음 한 끝자락을 다시 부여잡아 감정을 억누르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말했다.“모레 경연이랑 결혼하는 날, 그때 결혼식 참석하면 신분증 돌려줄게.”소만리는 신분증을 한 손에 들고 결연히 떠났다.기모진은 빗속에 서 있다가 갑자기 힘없이 차 옆에 기대어 그녀가 비 오는 밤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그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다음 날, 소만리는 아기의 호적 등록 수속을 밟으러 갔다.호적등본에 적힌 아기의 이름을 보며 소만리는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기를 안고 기모진의 신분증 사진을 보았다.남자의 검은 눈썹 별처럼 반짝이는 눈, 잘생긴 이목구비.그 해, 그녀를 업고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며 평생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겠노라 진지하게 약속했지만 결국 모든 맹세는 모래사장 위 파도와 함께 사라졌다.경연과의 결혼식 날,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다.소만리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부케를 든 채 양복을 입은 경연과 신부님 앞에 서서 결혼식을 올렸다.결혼식에 온 하객은 많이 없었다. 경연의 부모님과 몇몇 친구를 제외하면 예선과 소군연 두 명의 신부 들러리만 남았다.기모진은 사실 아침 일찍 도착했지만 줄곧 성당 밖에 서 있
기모진은 소만리가 언제 뒤에 와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해서 깜짝 놀랐다.소만리도 깜짝 놀랐다. 눈앞에 기모진의 얼굴이 도화지처럼 창백했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춘 듯했다.기모진은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기침과 짙은 피비린내를 간신히 억누르고 얼굴을 옆으로 돌려 소만리의 시선을 피하며 가볍게 기침을 했다.지금 기모진의 마음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소만리가 자신에게 뭔가 이상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볼까 봐 두려웠다.“소만리, 왜 거기 서 있어? 사진 찍으러 와.”예선이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소만리는 자신을 향해 돌아서는 남자를 보며 신분증을 건넸다.“돌려주려고.”그녀는 냉담한 말투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기모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만리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 수 없음을 알았다.그의 두 손바닥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기모진이 무관심한 것을 보고 소만리는 눈썹을 가볍게 찡그리며 말했다.“나를 보는 것도 이미 싫증이 난 것 같은데 왜 여기에 와서 당신 눈을 거슬리게 해?”“소만리.”예선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소만리는 기모진이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고 심지어 눈초리와 눈썹까지 매섭게 하고 그녀를 보자 갑자기 손을 들어 신분증을 그의 몸에 던졌다.“그렇게 싫으면 당신이 직접 주워.”이 말이 떨어지자 소만리는 치맛자락을 들며 미련 없이 멀어져 갔다.기모진은 입술 언저리를 가린 손가락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그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피로 물든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가볍게 떨며 소만리가 던진 신분증을 집어 들었다.그는 어두워진 눈을 들어 눈동자 속에 비친 아리따운 모습을 바라보며 끝내 입술 사이로 터져 내오는 핏덩어리를 토해 내고 말았다.소만리, 행복해야 해. 영원히.소만리가 떠날 때 기모진의 차가 성당 건너편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았는데 방금 기모진과 헤어진 곳에서 아직까지도
소만리는 경연과 함께 경 씨 집안 손님들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와 보니 예선은 이미 얼굴이 발그레 져서 얼떨떨하게 취해 있었다. 입은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소만리, 너 이번엔 꼭 행복해야 해. 꼭...”소만리는 감동이 밀려왔다. 예선은 이 세상에서 그녀를 진정으로 아끼고 신경 써 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상황이 이렇게 되어 소만리는 소군연에게 예선을 집으로 바래다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술에 취한 채 예선을 부축해 택시에 오른 소군연도 정신이 혼미해져 예선에게 기대었다.그는 원래 예선을 집에 데려다주려고 했지만 기사님이 호텔 앞에 차를 세우고 ‘나 다 알고 있어' 하는 표정으로 소군연을 대신해 차 문을 열어 주었다.소군연은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예선을 부축하고 차에서 내렸다.예선은 술이 너무 취해서 거의 서 있을 수가 없었고 온몸이 미역처럼 축 늘어져 힘없이 소군연 옆에 붙어 있었다.“예선, 괜찮아?”소군연은 매우 걱정스러웠다.“좋아?”예선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말했다.“좋아. 소만리는 잘 지낼 거야.”그녀는 앞뒤가 맞지 않는 대꾸를 했고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그의 품에 쓰러졌다.소군연은 예선을 덥석 껴안고 도로 위를 오가는 차들을 바라보다 예선을 안고 앞에 있는 호텔로 들어갔다.그는 방을 하나 잡고 예선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예선은 얼굴을 붉히며 다시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소군연 선배...”“나 여기 있어.”소군연은 더욱 정신이 또렷해져서 예선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듣고 대답했다.그러자 예선은 갑자기 취한 눈을 들어 무던하게 웃으며 그의 얼굴을 만졌다.자신이 지금 뭘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어? 진짜 소군연 선배야? 나 선배 꿈꿨는데.”“...”“꿈속의 선배도 이렇게 잘생겼었어.”“...”소군연은 알코올의 영향 때문인지 예선의 이 한마디 칭찬 때문인지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고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
기모진은 자신이 여기에 오면 괴로울 거라는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내려놓지 못했다. 뼈에 사무친 이 여인을 놓지 못하고 온 것이었다.가늘고 촘촘한 빗발 사이로 기모진은 커튼이 소만리 가까이 비치는 모습을 보았다.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경연이 고개를 숙이는 동작은 분명 그녀에게 키스하는 것이리라.핸들을 잡은 기모진은 차창 밖의 빗방울이 모두 그의 심장을 촉촉히 적시는 눈물같이 느껴졌다.심장이 추워서 얼어붙는 것 같았다.그는 계속 이렇게 지켜보고 있기도 괴로워서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기모진은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기 씨 집으로 가서 잠든 두 아이를 살그머니 살펴보는 일밖에 없었다.침실 안.경연은 소만리를 살며시 안은 후 품에서 그녀를 떼었다.“당신이 아직 기모진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다는 걸 알아요. 괜찮아요. 전 기다릴 수 있어요.”경연의 말에 소만리는 더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그녀는 이미 그의 합법적인 아내이지만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경연은 이해심이 깊은 남자였다.“우리 결혼이 좀 급작스러웠잖아요. 기모진을 놓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죠.”“경연, 고마워요.”“부부지간에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요.”경연은 소만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아이들이랑 일찍 주무세요.”그는 이 말을 하며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당신 거실에서 잘 거예요?”소만리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경연은 고개를 저었다.“바쁜 일이 좀 있어서 서재로 가요.”“그럼 일 끝나고 일찍 쉬세요.”“그래요.”경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소만리에게 방문을 닫아 주었다.그는 서재로 와서 검은 뿔테안경을 쓰고 책상 앞에 앉았다.원래 온화하고 우아한 얼굴에 순식간에 카리스마가 넘쳤다.그가 컴퓨터 카메라를 켜고 동영상을 연결하자 건너편에서 보고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기모진 몸속의 독소가 3기에 접어들었어요.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