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박원근이 장소월을 찾아 나섰을 때, 그녀는 집에 없었다. 장소월이 깨어난 곳은 어느 읍내의 작은 의원이었다. 낡은 나무 침대에 몸을 누인 채 눈을 떴을 때,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너무 허약해. 좋은 걸 좀 먹여서 몸보신해줘야 해. 다행히 일찍 데려왔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정신을 놓았을 거야.” “이 아가씨는 누구야? 해이야, 너 유월이랑 헤어진 거야?” 해이가 말을 더듬었다. “전...” “콜록콜록...” 침대에 누워있던 여자가 갑자기 기침을 토해냈다. 해이는 저도 모르게 일어나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따라주었다. 그녀의 곁에 다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장소월은 몽롱한 정신으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별아...” 해이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별이? 그녀의 아이다. 팔순의 노인은 따스한 햇살 아래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마주 앉은 이 하나 없는 텅 빈 공간에서 홀로 장기를 두고 있었다. “약이 다 끓었다. 따라내서 환자한테 먹여.” 해이는 손에 들었던 물컵을 침대 옆 탁자 위에 내려놓고 싸늘한 눈빛으로 문을 나섰다.노인이 그런 그를 보며 물었다. “어딜 가려는 거야?” “저 아가씨 그냥 저렇게 내버려 두려고?” “저랑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유월이가 싫어할 거예요.” “어휴, 쯧쯧, 쯧쯧... 그렇게 마누라 치마폭에만 싸여 있어서야. 그래, 그래, 그럼 가 봐. 어차피 이 늙은이도 바쁘니까, 그냥 내버려 두지 뭐.” 집을 나서 몇 걸음 걸었던 해이는 결국 다시 돌아와 정성껏 약을 따라냈다. 그러고는 약이 미지근하게 식기를 기다려 그녀의 입가에 조심스레 가져갔다. 약이 쓴 탓인지 그녀는 대부분의 약을 입술 밖으로 토해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해이의 눈빛에 처음이 아닌 듯한 묘한 익숙함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사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강력한 끌
“영수? 너 왜 여기 있는 거야? 참, 너 이제 강영수 아니지.” 장소월의 입안에 한약의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앉았다. “여긴 어디야?” “읍내 의원이에요. 선생님 만나러 집에 갔었는데 쓰러져 계셔서 이곳에 모셔 왔어요.” “이제 괜찮으면 알아서 약 드세요. 난 이만 갈게요.” 필사적으로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하는 그의 마음을 읽은 장소월은 떠나려는 그를 막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약그릇을 집어 들다가 힘이 풀려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문밖에서 그 소리를 들은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노인은 장기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 “호의를 베풀 거면 끝까지 베풀어야지. 난 더이상 도와줄 수 없어. 이 콧구멍만 한 낡은 의원에서 그 아가씨까지 돌보기에는 역부족이야.” 장소월은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약국에 가서 해열제 몇 알을 사 먹을 생각이었다. 이 약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써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그녀는 깨진 숟가락 조각을 주우려다 실수로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일찌감치 자리를 떴는 줄 알았던 남자는 다시 돌아와 쪼그려 앉아 있는 여자를 안아 일으켜 세웠다. “몸이 성치도 않으면서, 왜 일어나려고 하는 거예요?” 장소월은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해이가 그녀를 재빨리 부축했다. 문밖에서 유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감님, 우리 해이 못 봤어요?” 유월은 고개를 돌린 순간 안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당... 당신들!” “이 뻔뻔스러운 년, 너 이럴 줄 알고 있었어! 우리 해이 꼬드기려는 거지!” 그는 유월이 갑자기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유월은 단번에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장소월은 아픈 가슴을 움켜쥔 채 힘없이 침대에 주저앉았다. “오... 오해예요.” “오해라고?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너 쫓아낼 거야.
“정말이야?” 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말했잖아, 너랑 결혼하겠다고. 울지 마, 나 마음 아파.” 해이가 유월을 품에 끌어안았다. 유월은 그때에야 비로소 흥분을 가라앉히고 평온해졌다. “네 과거를 알아보고 싶더라도, 앞으로는 혼자서 몰래 그 여자 찾아가지 마. 나 질투 나.” “알았어.” “됐어. 그만 징징거리고 빨리 안으로 들어가 봐. 그 아가씨 쓰러졌잖아.” “멀쩡하던 사람이, 무슨 일이야.” 장소월은 해열제를 먹고 진료소에서 반나절 동안 링거를 맞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옆에는 강영수, 유월 외에도 박원근이 더 있었다. “후배님, 좀 괜찮아졌어?” “후배?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유월은 깜짝 놀라 물었다. 박원근은 장소월보다 반년 정도 먼저 이곳에서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후배님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냥 미술 선생님 아니었어요?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장소월은 두통과 어지럼증 때문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귓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더더욱 아찔해졌다. “좀 나가줄래요. 쉬고 싶어요.” 박원근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는 문밖에 있을게. 푹 쉬어.” 세 사람이 문밖으로 나온 뒤, 유월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여자 대체 누구예요? 어떤 사람이에요? 교장 선생님?” 박원근은 옆에 있던 해이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난 민영이와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었어요.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어요. 민영이는 내 스승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신 제자예요.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죠. 기회가 되면 미술관에 가 봐요. 그곳에 전시된 작품 중 몇몇은 민영이의 손에서 탄생한 거니까.” “민영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요. 정말 뛰어난 사람이에요.” 유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가 물었다. “저 여자 결혼했다는 거 사실
낙일 마을에는 오래된 풍습이 있었다. 새롭게 부부의 연을 맺은 신랑 신부는 황혼 녘 태양을 향해 무릎 꿇고 백년가약을 맺으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백년해로한다고 한다. 결혼식이 치러질 때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여 일손을 도왔다. 유월은 오래전 이미 혼례복을 지어 놓았다. 낙일 마을에는 풍습이 또 하나 있었는데, 여자들은 혼기가 차면 결혼식에 입을 옷을 손수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많은 액세서리를 몸에 지니고 결혼식을 올려야만,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평안하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잔치는 3일 밤낮으로 이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술을 마시며 축복을 빈다. 신랑은 매일 손님들과 술잔을 기울인 뒤에야 신방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축복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낙일 마을 전체는 기쁨에 들썩이고 있었다. 유화 엄마는 유월의 머리를 빗겨주고, 산에서 꺾어온 꽃들을 꽂아 예쁘게 장식했다. 거울에 비친 유월의 모습을 보며 유화는 신이 나 팔짝팔짝 뛰었다. “언니, 드디어 시집가네요!” 엄마는 유화를 타박했다. “이 녀석이! 어서 가서 놀아. 언니 방해하지 말고.” “전 해이 오빠 보러 갈 거예요!” 오후 4시 30분 저녁노을이 하늘을 발갛게 물들이는 시간, 여자가 결혼식을 올리는 최고의 길시다. 문밖에서는 혼례를 축하하는 사람들의 흥겨운 북소리와 징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이가 입고 있는 파란색 한복은 유월이 직접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바느질한 것이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다. 그 옷은 유월이 앞으로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해이와 함께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만든 것이었다. 그가 신고 있는 신발도 마찬가지다. 바느질은 낙일 마을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 신부가 신방으로 들어가면, 신랑은 사흘 동안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신부 또한 방을 나올 수 없고, 먹고 자는 모든 것을 방에서 해결해야 했
저 여자가 여긴 왜 왔지?“이 선물 전해주려고 왔어.” 박원근은 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소월아... 좋은 날인데 같이 앉아서 축하주 좀 마시고 가지 그래? 오늘 특별한 날이잖아. 곧 공연도 시작될 거야.”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친구가 데리러 왔어요.” 그녀를 데리러 온 사람은 다름 아닌 강용이었다. 예전 그 오만하고 자유분방했던 소년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제법 성숙하고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건들거리는 태도와 모든 것에 무심한 듯한 그 모습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장소월이 이곳에 온 이유는 강용 때문이기도 했다. 강용의 도움으로 강영수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늘 종잡을 수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지만, 그녀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저 사람은...” 박원근은 강용을 알지 못했다. 장소월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사직서는 선생님께 따로 드릴게요.” 그녀는 혼례복을 입은 해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 있어.” 그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채, 장소월은 방으로 돌아가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챙겼다. 처음부터 그녀는 강영수의 무사함만 확인하면 곧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유화가 그녀를 붙잡았다. “송 선생님, 가지 마세요, 보고 싶을 거예요.” 장소월이 가르쳤던 아이들 모두 그녀에게 깊은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용은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모자를 쓴 채 기둥에 기대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축 늘어진 앞머리가 가늘고 긴 눈을 가리고 있었다. 강용이 장소월의 여행 가방을 받아들었다. 장소월이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유화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저 선생님이 송 선생님이 아니라는 거 알아요. 선생님 성함은 장소월 맞죠? 그림에 쓰여 있는 이름이 진짜 선생님의 이름이죠?” “장 선생님, 유화는 선생님이 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유화는 선생님이 계속 그림을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장소월은 유화 뒤에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천진한 눈망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다 잊어버렸어. 너도 나 머리 나쁜 거 알잖아. 옛날에 나 과외해줄 때, 네가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잊었어?” “그건 그래! 내가 아는 모든 걸 다 가르쳐 줬는데도 넌 그저 놀기만 했어.” 다행히 강용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강용을 망가뜨리지 않았고, 강영수 또한 죽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떠나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후회하지 않겠어?” 강용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장소월은 걸음을 멈추고 멀리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뭘 후회한다는 거야?” 강용도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곁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떠나는 거 후회하지 않냐고. 강영수에게 모든 걸 이야기하면 두 사람 다시 함께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장소월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그럴 자격 없어. 그리고...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일 뿐이야. 영수가 행복하다면, 난 그걸로 충분해. 강용, 넌 어때? 아직도 강영수가 미워?” 강용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여전히 예전처럼 거칠고 반항적인 소년이었지만, 정말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딱히 미워할 것도 없어. 따지고 보면 강영수 잘못도 아니야. 내가 그 사람의 아버지를 오랫동안 빼앗아 간 건 사실이잖아. 내 어머니 때문에 형의 가족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로 인해 형은 가정의 화목함을 잃어버렸어.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내가 겪었던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가장 힘든 건 형이었을 거야. 네가 떠난 후 많이 힘들어했거든. 줄곧 너를 찾아 헤맸고...” “게다가... 예전의 강 씨 집안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잖아.” “그래! 강 씨 집안은 사라졌어.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영수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내가 떠나
강씨 집안이 없었더라도, 전연우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이들을 해치려 했을 것이다.한 프랑스풍 저택, 강용이 그녀의 여행 가방을 안방까지 옮겨다 주고 있었다. 장소월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네가 산 집이야?” “따지고 보면 강씨 집안 소유야. 예전 내가 서울에서 쫓겨날 때 그 사람이 나한테 준 집이거든. 지금은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 강용이 말하는 ‘그 사람’은 강영수의 아버지이자 강용의 아버지였다. 예전 인정아는 강용의 어머니를 끝까지 괴롭히며 쫓아내려 했다. 결국 어머니는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그녀를 따라갔다. 지금은 강용만이 홀로 이 세상에 남아있다. “이 방은 내가 도우미를 구해 청소해 놨어. 그 누구도 머무른 적 없는 방이야. 당분간 이 방 쓰면 돼. 근처에 꽤 괜찮은 꽃밭도 있으니까 나중에 한번 가 봐.” 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신세 좀 질게. 나 지금... 좀 특별한 상황이라서 신분증을 다시 만들어야 하거든. 그래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강용은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그녀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편하게 지내. 아무도 널 쫓아내지 않아. 하지만 밤에는 조심해야 할 거야...” “뭘 조심해야 하는데?” 강용은 돌연 가까이 다가갔다. 장소월은 빛나는 안광을 내뿜는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등이 벽에 닿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까지 말이다. 강용이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내가 몽유병이 좀 있거든. 혹시라도 밤에 실수로 네 방에 들어가면, 네가 나한테 반해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너 나 책임져야 할 거야.” 장소월은 피식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됐어, 그만해.” 그녀는 이내 미소를 거두고 말했다. “나와 전연우는 법적으로 아직 부부관계야. 이제 그 누구에게도 감정을 쏟는 일은 없을 거야.” 너무 지쳤다! 매번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때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도 다치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장소월, 31세, 암으로 사망.서울 강남병원, 소독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연우야, 오늘 의사선생님이 투석한다고 주사를 놓아주셨는데 너무 아팠어.」「나 곧 죽어. 보러 와 줄 거지?」「제발, 연우야...」장소월이 힘겹게 머리를 돌려 전화기의 메시지 창을 보고 있다. 메시지를 몇 개나 보냈건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전연우는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그녀의 손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뼈만 남아 앙상했고 두 눈은 안쪽으로 푹 꺼져 있었다.사지는 이미 암 후유증으로 인해 썩어가고 있었다.몸을 까딱할 수 없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책임 간호사도 거의 보름 너머 와보지 않았다.원인: 더 이상 치료해도 의미 없음.그녀는 사실 엄살이 많았고 아픈 걸 끔찍이 무서워했다. 암 말기라 그녀는 매일 고통에 시달렸고 전연우에 대한 사랑만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하지만 이 넘쳐나던 사랑이 메말라가자 그녀에게 남은 건 뼈만 남은 몸뚱이였다.장소월은 전화기를 꺼버리고 조용히 죽기를 기다렸다.고통으로 그녀는 의식이 흐릿해졌다. 씁쓸하게 느껴졌다. 안 깐 힘을 다해 전연우와 결혼했고 8년간 그녀는 최선을 다해 좋은 아내가 되려 했다. 모든 걸 다 바쳐 그 사람 곁을 지켰는데 그녀가 얻은 건 무엇인가?사람들은 하나 둘 그녀의 곁을 떠났고 가난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그녀가 죽으면 제일 기뻐할 사람이 전연우다. 이제 그는 자유의 몸이다. 더 이상 징그러운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전연우, 드디어 소원대로 송시아와 결혼할 수 있다.8개월 전.전연우의 생일날,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장소월은 소파에 앉아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테이블 위 그녀가 정성껏 차린 음식들도 이미 차갑게 식어갔다.기다리던 전연우는 오지 않고 비서가 이혼서류를 가져왔다. 비서가 싱겁게 입을 열었다.“사모님, 사장님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요. 이렇게 큰 전 씨 집안 산업을 누군가는 물려받아야 되잖아요.”장
강씨 집안이 없었더라도, 전연우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이들을 해치려 했을 것이다.한 프랑스풍 저택, 강용이 그녀의 여행 가방을 안방까지 옮겨다 주고 있었다. 장소월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네가 산 집이야?” “따지고 보면 강씨 집안 소유야. 예전 내가 서울에서 쫓겨날 때 그 사람이 나한테 준 집이거든. 지금은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 강용이 말하는 ‘그 사람’은 강영수의 아버지이자 강용의 아버지였다. 예전 인정아는 강용의 어머니를 끝까지 괴롭히며 쫓아내려 했다. 결국 어머니는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그녀를 따라갔다. 지금은 강용만이 홀로 이 세상에 남아있다. “이 방은 내가 도우미를 구해 청소해 놨어. 그 누구도 머무른 적 없는 방이야. 당분간 이 방 쓰면 돼. 근처에 꽤 괜찮은 꽃밭도 있으니까 나중에 한번 가 봐.” 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신세 좀 질게. 나 지금... 좀 특별한 상황이라서 신분증을 다시 만들어야 하거든. 그래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강용은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그녀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편하게 지내. 아무도 널 쫓아내지 않아. 하지만 밤에는 조심해야 할 거야...” “뭘 조심해야 하는데?” 강용은 돌연 가까이 다가갔다. 장소월은 빛나는 안광을 내뿜는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등이 벽에 닿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까지 말이다. 강용이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내가 몽유병이 좀 있거든. 혹시라도 밤에 실수로 네 방에 들어가면, 네가 나한테 반해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너 나 책임져야 할 거야.” 장소월은 피식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됐어, 그만해.” 그녀는 이내 미소를 거두고 말했다. “나와 전연우는 법적으로 아직 부부관계야. 이제 그 누구에게도 감정을 쏟는 일은 없을 거야.” 너무 지쳤다! 매번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때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도 다치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다 잊어버렸어. 너도 나 머리 나쁜 거 알잖아. 옛날에 나 과외해줄 때, 네가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잊었어?” “그건 그래! 내가 아는 모든 걸 다 가르쳐 줬는데도 넌 그저 놀기만 했어.” 다행히 강용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강용을 망가뜨리지 않았고, 강영수 또한 죽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떠나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후회하지 않겠어?” 강용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장소월은 걸음을 멈추고 멀리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뭘 후회한다는 거야?” 강용도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곁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떠나는 거 후회하지 않냐고. 강영수에게 모든 걸 이야기하면 두 사람 다시 함께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장소월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그럴 자격 없어. 그리고...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일 뿐이야. 영수가 행복하다면, 난 그걸로 충분해. 강용, 넌 어때? 아직도 강영수가 미워?” 강용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여전히 예전처럼 거칠고 반항적인 소년이었지만, 정말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딱히 미워할 것도 없어. 따지고 보면 강영수 잘못도 아니야. 내가 그 사람의 아버지를 오랫동안 빼앗아 간 건 사실이잖아. 내 어머니 때문에 형의 가족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로 인해 형은 가정의 화목함을 잃어버렸어.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내가 겪었던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가장 힘든 건 형이었을 거야. 네가 떠난 후 많이 힘들어했거든. 줄곧 너를 찾아 헤맸고...” “게다가... 예전의 강 씨 집안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잖아.” “그래! 강 씨 집안은 사라졌어.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영수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내가 떠나
저 여자가 여긴 왜 왔지?“이 선물 전해주려고 왔어.” 박원근은 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소월아... 좋은 날인데 같이 앉아서 축하주 좀 마시고 가지 그래? 오늘 특별한 날이잖아. 곧 공연도 시작될 거야.”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친구가 데리러 왔어요.” 그녀를 데리러 온 사람은 다름 아닌 강용이었다. 예전 그 오만하고 자유분방했던 소년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제법 성숙하고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건들거리는 태도와 모든 것에 무심한 듯한 그 모습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장소월이 이곳에 온 이유는 강용 때문이기도 했다. 강용의 도움으로 강영수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늘 종잡을 수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지만, 그녀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저 사람은...” 박원근은 강용을 알지 못했다. 장소월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사직서는 선생님께 따로 드릴게요.” 그녀는 혼례복을 입은 해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 있어.” 그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채, 장소월은 방으로 돌아가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챙겼다. 처음부터 그녀는 강영수의 무사함만 확인하면 곧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유화가 그녀를 붙잡았다. “송 선생님, 가지 마세요, 보고 싶을 거예요.” 장소월이 가르쳤던 아이들 모두 그녀에게 깊은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용은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모자를 쓴 채 기둥에 기대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축 늘어진 앞머리가 가늘고 긴 눈을 가리고 있었다. 강용이 장소월의 여행 가방을 받아들었다. 장소월이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유화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저 선생님이 송 선생님이 아니라는 거 알아요. 선생님 성함은 장소월 맞죠? 그림에 쓰여 있는 이름이 진짜 선생님의 이름이죠?” “장 선생님, 유화는 선생님이 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유화는 선생님이 계속 그림을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장소월은 유화 뒤에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천진한 눈망
낙일 마을에는 오래된 풍습이 있었다. 새롭게 부부의 연을 맺은 신랑 신부는 황혼 녘 태양을 향해 무릎 꿇고 백년가약을 맺으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백년해로한다고 한다. 결혼식이 치러질 때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여 일손을 도왔다. 유월은 오래전 이미 혼례복을 지어 놓았다. 낙일 마을에는 풍습이 또 하나 있었는데, 여자들은 혼기가 차면 결혼식에 입을 옷을 손수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많은 액세서리를 몸에 지니고 결혼식을 올려야만,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평안하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잔치는 3일 밤낮으로 이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술을 마시며 축복을 빈다. 신랑은 매일 손님들과 술잔을 기울인 뒤에야 신방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축복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낙일 마을 전체는 기쁨에 들썩이고 있었다. 유화 엄마는 유월의 머리를 빗겨주고, 산에서 꺾어온 꽃들을 꽂아 예쁘게 장식했다. 거울에 비친 유월의 모습을 보며 유화는 신이 나 팔짝팔짝 뛰었다. “언니, 드디어 시집가네요!” 엄마는 유화를 타박했다. “이 녀석이! 어서 가서 놀아. 언니 방해하지 말고.” “전 해이 오빠 보러 갈 거예요!” 오후 4시 30분 저녁노을이 하늘을 발갛게 물들이는 시간, 여자가 결혼식을 올리는 최고의 길시다. 문밖에서는 혼례를 축하하는 사람들의 흥겨운 북소리와 징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이가 입고 있는 파란색 한복은 유월이 직접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바느질한 것이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다. 그 옷은 유월이 앞으로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해이와 함께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만든 것이었다. 그가 신고 있는 신발도 마찬가지다. 바느질은 낙일 마을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 신부가 신방으로 들어가면, 신랑은 사흘 동안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신부 또한 방을 나올 수 없고, 먹고 자는 모든 것을 방에서 해결해야 했
“정말이야?” 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말했잖아, 너랑 결혼하겠다고. 울지 마, 나 마음 아파.” 해이가 유월을 품에 끌어안았다. 유월은 그때에야 비로소 흥분을 가라앉히고 평온해졌다. “네 과거를 알아보고 싶더라도, 앞으로는 혼자서 몰래 그 여자 찾아가지 마. 나 질투 나.” “알았어.” “됐어. 그만 징징거리고 빨리 안으로 들어가 봐. 그 아가씨 쓰러졌잖아.” “멀쩡하던 사람이, 무슨 일이야.” 장소월은 해열제를 먹고 진료소에서 반나절 동안 링거를 맞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옆에는 강영수, 유월 외에도 박원근이 더 있었다. “후배님, 좀 괜찮아졌어?” “후배?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유월은 깜짝 놀라 물었다. 박원근은 장소월보다 반년 정도 먼저 이곳에서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후배님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냥 미술 선생님 아니었어요?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장소월은 두통과 어지럼증 때문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귓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더더욱 아찔해졌다. “좀 나가줄래요. 쉬고 싶어요.” 박원근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는 문밖에 있을게. 푹 쉬어.” 세 사람이 문밖으로 나온 뒤, 유월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여자 대체 누구예요? 어떤 사람이에요? 교장 선생님?” 박원근은 옆에 있던 해이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난 민영이와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었어요.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어요. 민영이는 내 스승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신 제자예요.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죠. 기회가 되면 미술관에 가 봐요. 그곳에 전시된 작품 중 몇몇은 민영이의 손에서 탄생한 거니까.” “민영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요. 정말 뛰어난 사람이에요.” 유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가 물었다. “저 여자 결혼했다는 거 사실
“영수? 너 왜 여기 있는 거야? 참, 너 이제 강영수 아니지.” 장소월의 입안에 한약의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앉았다. “여긴 어디야?” “읍내 의원이에요. 선생님 만나러 집에 갔었는데 쓰러져 계셔서 이곳에 모셔 왔어요.” “이제 괜찮으면 알아서 약 드세요. 난 이만 갈게요.” 필사적으로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하는 그의 마음을 읽은 장소월은 떠나려는 그를 막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약그릇을 집어 들다가 힘이 풀려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문밖에서 그 소리를 들은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노인은 장기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 “호의를 베풀 거면 끝까지 베풀어야지. 난 더이상 도와줄 수 없어. 이 콧구멍만 한 낡은 의원에서 그 아가씨까지 돌보기에는 역부족이야.” 장소월은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약국에 가서 해열제 몇 알을 사 먹을 생각이었다. 이 약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써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그녀는 깨진 숟가락 조각을 주우려다 실수로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일찌감치 자리를 떴는 줄 알았던 남자는 다시 돌아와 쪼그려 앉아 있는 여자를 안아 일으켜 세웠다. “몸이 성치도 않으면서, 왜 일어나려고 하는 거예요?” 장소월은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해이가 그녀를 재빨리 부축했다. 문밖에서 유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감님, 우리 해이 못 봤어요?” 유월은 고개를 돌린 순간 안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당... 당신들!” “이 뻔뻔스러운 년, 너 이럴 줄 알고 있었어! 우리 해이 꼬드기려는 거지!” 그는 유월이 갑자기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유월은 단번에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장소월은 아픈 가슴을 움켜쥔 채 힘없이 침대에 주저앉았다. “오... 오해예요.” “오해라고?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너 쫓아낼 거야.
그러나 박원근이 장소월을 찾아 나섰을 때, 그녀는 집에 없었다. 장소월이 깨어난 곳은 어느 읍내의 작은 의원이었다. 낡은 나무 침대에 몸을 누인 채 눈을 떴을 때,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너무 허약해. 좋은 걸 좀 먹여서 몸보신해줘야 해. 다행히 일찍 데려왔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정신을 놓았을 거야.” “이 아가씨는 누구야? 해이야, 너 유월이랑 헤어진 거야?” 해이가 말을 더듬었다. “전...” “콜록콜록...” 침대에 누워있던 여자가 갑자기 기침을 토해냈다. 해이는 저도 모르게 일어나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따라주었다. 그녀의 곁에 다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장소월은 몽롱한 정신으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별아...” 해이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별이? 그녀의 아이다. 팔순의 노인은 따스한 햇살 아래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마주 앉은 이 하나 없는 텅 빈 공간에서 홀로 장기를 두고 있었다. “약이 다 끓었다. 따라내서 환자한테 먹여.” 해이는 손에 들었던 물컵을 침대 옆 탁자 위에 내려놓고 싸늘한 눈빛으로 문을 나섰다.노인이 그런 그를 보며 물었다. “어딜 가려는 거야?” “저 아가씨 그냥 저렇게 내버려 두려고?” “저랑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유월이가 싫어할 거예요.” “어휴, 쯧쯧, 쯧쯧... 그렇게 마누라 치마폭에만 싸여 있어서야. 그래, 그래, 그럼 가 봐. 어차피 이 늙은이도 바쁘니까, 그냥 내버려 두지 뭐.” 집을 나서 몇 걸음 걸었던 해이는 결국 다시 돌아와 정성껏 약을 따라냈다. 그러고는 약이 미지근하게 식기를 기다려 그녀의 입가에 조심스레 가져갔다. 약이 쓴 탓인지 그녀는 대부분의 약을 입술 밖으로 토해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해이의 눈빛에 처음이 아닌 듯한 묘한 익숙함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사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강력한 끌
이곳에서 장소월은 매일 바쁘게 돌아치며 자신에게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결혼식이 끝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지 못했다.또한 건강이 점점 악화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생명이 천천히 소실되는 공허한 기분이었고, 뭘 하든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장소월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 사람은 저와 아무 상관없어요.”“별이는? 별이도 버릴 거예요?”별이 이야기를 꺼내자 장소월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그 아이, 혹시 시간 여유가 되면 친부모 찾아줘요. 전연우가 절 묶어두려고 데려온 아이예요. 이제 제가 없으니 그 아이를 버릴지도 몰라요.”“별이가 엄마로 생각하는 사람은 소월 씨뿐이에요.”장소월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이내 마음을 독하게 먹고 말했다.“하지만 전 그 아이 엄마가 아니에요. 선생님도 알잖아요... 전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거.”“저 여기 떠날 거예요. 전연우가 괴롭히더라도 비밀 지켜주길 바라요.”서철용은 발코니에 서서 희미한 빛을 내뿜으며 밤하늘에 걸려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소월 씨... 난 언제나 소월 씨 편이에요.”“지금 한 말 꼭 기억해요. 이건 당신이 나한테 진 빚이니까.” 장소월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서철용을 믿고 있었다. 돌고 돌아 다시 전연우에게 돌아가는 건 두렵지 않았다. 더욱 무서운 건 전연우가 강영수를 해치는 것이다.지금의 강영수는 다행히 기억을 잃어버렸다. 모든 것을 잊은 채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있다.차가운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장소월은 문을 닫다가 구석에 서 있는 그림자를 발견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차디찬 냉기 속에서 장소월의 가냘픈 몸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버렸다.장소월의 말을 엿들었던 세 사람이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유화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엄마한테 이를 거예요. 언니가 송 선생님 통화 엿들었다고요.”유월은 문
장소월은 손목에 찬 옥팔찌를 풀어 유월의 손목에 걸어주었다. “잘 어울리네요.”“이게 뭐예요! 이런 거 준다고 해서 내가 해이를 당신에게 넘겨줄 것 같아요?”장소월은 팔찌를 벗으려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하고 있어요. 이건 원래 그 사람의 것이었어요.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지금 유월 씨에게 이걸 주는 건, 유월 씨를 인정한다는 뜻이에요. 그 사람의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을게요.”“다만 단 하나 확실히 알려주고 싶은 건, 그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거예요.”“진심으로 두 사람이 행복하게 백년해로하길 바라요.”유월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에요? 정말로 해이를 뺏어가려고 온 거 아니에요?”“설령 이 여자가 날 데려가려 한다고 해도, 내가 따라가지 않아.” 해이가 된 남자가 유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일주일 뒤 우리 결혼할 거예요. 송 선생님 바쁘실 텐데 청첩장은 안 보낼게요.”“팔찌 돌려줘. 과거의 물건은 지금 가져와 봐야 아무 의미 없어.”유월은 그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이 말이 맞아요. 진심으로 우리를 축복하든 아니든, 이 팔찌는 받지 않겠어요. 과거의 일은 이제 해이와 아무 상관없어요.”장소월은 받지 않았다. “이건 애초에 네 것이었어. 난 그저 원래 주인에게 돌려줬을 뿐이야.”강영수는 유월의 손에서 팔찌를 가져와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럼 버려야겠네요.”장소월이 말했다, “마음대로 해. 네 물건이니까.”‘강영수, 네가 잘 지내는 모습 봤으니까 난 이제 충분히 만족해. 우리 이제 여기서 작별하자.’장소월은 여전히 바닷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 견디질 못할 습기와 한기에 온몸이 아파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그녀는 또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밤 8시, 침대 옆에 놓아둔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서철용이 전화기 너머 그녀의 기침 소리를 듣고 물었다. “감기 걸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