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사이에 비에 흠뻑 젖은 남자를 보며 소민아가 말했다. “이랑 씨 미쳤어요?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요?”신이랑은 시선을 내리깔고 힘없이 말했다. “난 괜찮아요. 이건 민아 씨 꽃이잖아요. 민아 씨가 비 맞는 거 싫어요.”풀이 죽은 그의 모습에 굳게 닫혔던 소민아의 마음이 순간 사르르 녹아내렸다.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제야 날 한 번이라도 봐주네요. 민아 씨...난 정말 민아 씨를 잃을까 봐 너무 무서워요. 온 힘을 다해서 겨우 내 아내로 만들었는데, 민아 씨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요.”소민아는 무거운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도 여우림 씨가 가르쳐준 거예요?” 손으로는 그의 머리카락에 맺힌 빗방울을 닦아주고 있었다.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우미가 담요와 우산을 들고 달려가려 했지만, 명세진이 그녀를 막아 세웠다.도우미는 무언가 알아차린 듯 다시 뒤로 물러섰다.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에 맺혔던 빗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여우림 씨한테 도움을 청한 건 세 번뿐이에요.”“첫 번째는 우리가 처음 만남을 가졌던 날이에요. 소개팅 상대가 민아 씨라는 걸 알고 엄청 긴장했거든요. 그때 우림 씨가 민아 씨가 좋아할 거라면서 입고 나갈 옷을 골라줬어요.”“두 번째는 민아 씨가 경찰서에 갇혀있을 때였어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우림 씨가 아버지에게 부탁하라고 말해줬어요. 내가 돌아가 그분의 자리를 물려받겠다고 약속만 하면 분명 민아 씨를 꺼내줄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민아 씨... 난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곳에는 내 가족이 없으니까, 그 사람들은 다 날 버렸으니까. 그날 민아 씨가 안에서 혼자 견디게 놔두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눈을 맞더라도 바깥에서 민아 씨를 기다리고 싶었어요. 그건 순전히 내 의지였어요.”“세 번째는 민아 씨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였어요. 난 정말 개의치 않았지만, 혹시라도 민아 씨가 아이 때문에
“기 비서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이 대신하고 있거든요.”송시아 옆에 서 있던 소피아는 기성은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기성은이 풍기는 분위기는 송시아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얼굴만 아니었다면, 전연우가 살아 돌아와 그녀 앞에 서 있다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기성은의 뒤에는 성세 그룹 법무팀 총책임자이자, 국제 법조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변호사, 엄기준이 서 있었다.엄기준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송시아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대표님께서 사고를 당하시기 전 저에게 남겨두었던 성세 그룹 대표 직무 대행 계약서입니다. 이제 이 서류의 효력이 발동되는 시간이 되었네요.”“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에 따라, 지금부터 기성은 씨는 성세 그룹의 임시 대표입니다. 또한 회사 경영에 관한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갖습니다.”“말도 안 돼요.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사람은 아직 혼수상태인데 어떻게 사인을 할 수가 있어요?”기성은이 말했다. “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처음부터 오늘을 예상하신 겁니다. 이 계약서는 이미 반년 전에 작성된 겁니다.”“이제 송시아 부대표님은 당신의 사무실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송시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황당한 상황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소피아는 서류를 살펴보다가 맨 마지막에 자리 잡고 있는 사인을 본 순간 경악했다.“이... 이건 대표님의 친필 사인이 확실합니다.”송시아는 냉소하며 엄기준을 바라보았다. “당신까지 전연우의 편에 선 거예요?”“아니, 애초부터 전연우의 사람이었죠?”“어쩐지 전연우가 거액을 들여 법무팀을 키우더라니... 그중에 당신까지 포함되어 있었을 줄은 몰랐네요!”송시아는 그 서류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이 진실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송시아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기성은의 옆으로 다가갔다. “무언가를 얻으면, 다른 무언가는 잃게 되는 법이에요. 당신은 기꺼이 전연우의 개가 되었지만, 소민
“네. 최대한 빨리 사모님의 행방을 찾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뒤.기성은은 휴대폰 속 두 번째 연락처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없는 번호라는 신호음이 들려왔다.지금 상황이야말로 그가 바라던 것이 아닌가?기성은은 바로 누군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소민아 연락처 보내줘.]상대방은 3분도 채 되지 않아 전화번호를 보내왔다.소민아는 짐을 챙기며 신이랑과 함께 신혼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공항으로 가는 길, 소민아는 모르는 번호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시죠?”“어디예요?”소민아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왜 끊었어요?”소민아는 대충 얼버무리며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스팸 전화였어요.”신이랑이 소민아의 손을 잡아 입을 맞추자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됐어요. 운전에나 집중해요.”이번엔 백혜진이 전화를 걸어왔지만, 소민아는 망설임 없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녀의 새 번호는 가족 외에 백혜진에게만 알려주었었다.성세 그룹.백혜진은 연결되기도 전에 끊겨버린 핸드폰을 보며 곤란한 표정으로 기성은에게 말했다.“기 비서님, 전화가 끊겼습니다.”“신혼여행 간다고 했으니까 지금쯤이면 아마 비행기를 탔을 거예요. 지금 가봤자 아무 소용없을 겁니다.”기성은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백혜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용기 내어 그를 불렀다. “기 비서님, 저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기 비서님 마음속에 아직 민아 씨가 남아 있다는 것도요. 하지만 민아 씨는 얼마 전 결혼했어요. 그리고 기 비서님도 곧 약혼하시잖아요. 이제 와 민아 씨의 삶에 끼어든다면...”“민아 씨는 분명 기 비서님을 원망할 거예요!”“겨우 기 비서님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민아 씨를 부디 흔들지 말아 주세요.”“기성은 씨, 지금 싸우는 거예요?” 복도 끝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한 여자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말했다.양옆에 보디가드 두 명을 데리고 나타난 주가은은
“...” 기성은은 들고 있던 도시락을 내려놓고는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아가씨, 그동안 도움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일이 끝나면, 약속대로 주씨 집안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아버지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기성은이 말했다.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더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여지가 전혀 없는 칼 같은 말이었다.주가은의 눈동자에 실망감이 어렸다.“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 밥 꼭 챙겨 먹어요.”기성은은 도시락에 손도 대지 않고 백혜진에게 가져다주었다. 그 순간 비서실 직원들 모두 일제히 똑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백혜진은 너무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인사부에선 이미 기성은이 성세 그룹의 대리 대표가 되었다는 공고를 발표했다.기성은은 사무실로 돌아와 휴대폰을 확인했다.[소민아 씨의 전부 일정입니다. 이건 두 사람이 묵을 호텔 이름과 주소입니다.]기성은은 메시지를 한 번 훑어보고는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백혜진은 자신에게 이런 엄청난 행운이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대리 대표님의 비서가 된 것이다.백혜진은 대표 사무실로 들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 비서님, 아니 대표님, 정말 저더러 대표님 비서로 일하라는 거예요? 하지만... 아시겠지만, 제 업무 능력은 소민아 씨랑 비슷해요. 분명 대표님에게 폐를 끼칠 텐데...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는 게....”기성은은 손에 든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머리 쓸 필요 없어요. 말만 할 줄 알면 돼요.”“최근 몇 개월 사이 모든 재무 보고서를 출력해 가져다줘요. 그리고 오후 2시 30분 임원진들 회의 소집하고요.”백혜진이 대답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반산 별장.송시아는 드레스를 움켜쥐고,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남자가 상반신을 벗고 탄탄한 몸과 매끄러운 근육 라인을 드러내며 두 손이 묶인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런 게 당신이 생각하는 부부야?” 전연우가 손을 들어 올리자 손목에 채워진 쇠사슬이 침대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여전히 거짓말만 늘어놓는다.송시아는 전연우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여보, 의사 선생님께서 기억을 되찾으려면 자극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풀어!” 전연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자, 송시아는 곧바로 침대 옆에서 열쇠를 가져와 쇠사슬을 풀었다.전연우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상반신을 모두 드러내고 하반신에는 얇은 회색 줄무늬 잠옷 바지만 걸치고 있는 그는 남성 호르몬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는 방을 나가 복도로 걸어갔다.1층 거실에 들어서니 도우미들이 모두 고개를 숙여 깍듯하게 인사했다. “대표님...”넓은 거실을 둘러보니 벽에 걸려 있는 고풍스러운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그의 눈은 마치 야생의 밤처럼 칠흑같이 어두웠다.20XX년, 그가... 돌아온 건가?꿈이 아니었다.이것이 하늘이 그에게 준 두 번째 기회인가?장소월...그의 아내!그리고 우리의 아이, 그 아이도 살아있다...그렇다. 전연우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자신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이것은 하늘이 그에게 준 두 번째 기회가 확실하다.등 뒤로 송시아가 다가와 남자의 단단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여보, 기억나요? 여긴 당신이 날 위해 지어준 별장이에요. 결혼하면 나랑 같이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자고 했었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결혼식 날 날 데리러 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동안 당신이 깨어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송시아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을 자신의 볼에 대고는 그의 온기를 느꼈다.“연우 씨, 우리 이제야 드디어 함께 살 수 있겠어요.”전연우는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송시아는 행복한 여자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보, 배고프지 않아요?”“내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요.”“당신 예전에 내가 끓여준 국수 제일 좋아했잖아요.”송시아가 까치발을 들고 그에게
전생에서 전연우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장소월이 끓여준 국수였다.하여 송시아는 장소월에게 국수 끓이는 법을 특별히 배웠었다. 전연우가 누구의 솜씨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히 익혔다.어쩌면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던 탓에 예전 맛을 잊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전연우는 손목을 주무르며 문밖으로 나갔다. “여보...”송시아의 손이 남자의 몸에 닿은 순간, 돌연 강한 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문에 짓눌렀다. “내가 기억을 되찾기 전까지는,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말했을 텐데?”“오늘 밤엔 옆방에서 잘게.”전연우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여보!”송시아가 아무리 불러도 전연우는 결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맞은편 방으로 들어가 매정히 문을 닫았다.송시아는 불안한 마음에 방으로 돌아가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 나한테 준 약, 정말 문제없는 거 맞죠?”“아가씨, 그 약은 복용자로 하여금 기억 상실에 빠지게 하거나, 기존 기억을 뒤죽박죽 섞어놓을 수 있습니다. 지금 그 사람에게 이상한 모습이 보인다면, 약효가 나타났다는 뜻입니다.”“그 환자가 아가씨를 받아들이게 될지는, 모두 아가씨 본인에게 달렸습니다.”송시아는 차가운 눈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정말 기억을 잃은 게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죠?”“직접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아니면 그분이 약을 드시는 장면을 직접 보셔도 됩니다. 그 약은 비타민C와 맛이 비슷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만약 약효가 없거나, 다른 사람과 짜고 나를 속이는 거라면,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당신 딸도 마찬가지예요.”“아니에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 약은 최고입니다. 불안하시면 부작용이 조금 더 크고 정신과 기억을 통제할 수 있는 약을 사용해도 됩니다. 하지만 생식기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사용이 금지되어 있어 있는 약이라 구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송시아가 말했다. “무슨 수를 쓰든 그 약 구해와요. 내가 원하는 건 그 사람의 몸뚱어리니
러시아의 국경과 맞닿아 있는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화국 사람들이었다. 오랜 시간 바다 위에 머물렀다 보니 남자의 얼굴에는 거뭇한 수염이 자라나 있었다. 손에선 낯선 까칠함이 느껴졌지만, 그 익숙한 얼굴은 틀림이 없었다. 그의 몸에 새겨진 문신 또한 그대로였다. 그는 살아 숨 쉬고 있는 강영수다. 그가... 정말 살아있었다.기억 속 강영수는 온화하고 부드럽고 헌앙하기까지 한 선비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 보였다.몸에선 바다에서 갓 나온 듯 비린내가 진동했고, 머리도 빗질하지 않아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손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가 다시 거두어들였다. “나... 나 네가 이렇게 망가진 거 처음 봐.”“뭐 하는 거예요! 우리 해이한테 수작 부리지 말아요!”검은 피부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스무 살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해이라고 불리는 남자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장소월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강영수는 이제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다.“당신 정말 수상해요. 여기 와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해서 내가 좋게 봐줄 것 같아요? 해이에게 수작 부리면 가만 안 둘 거예요.”그때 장소월 옆에 있던 유화가 입을 열었다. “언니, 송 선생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저 친구를 찾으려는 거예요.” 유화가 장소월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이 찾던 친구 맞아요?”송민영은 장소월이 이곳에서 사용하는 이름이었다.“해이야, 가자.”장소월은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답답함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유화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선생님, 어디 편찮으세요?”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그녀는 모두의 의심스러운 시선 속에서 뒤돌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예전 전연우는 강영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없앴었다. 심지어 강씨 집안의 저택도 지금은 빈껍데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그녀는 강씨 집안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김남주인가...장소월은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유화는 그림 왼쪽 아래에 있는 검은색 사인을 보고 의아한 듯 말했다. “장소월... 선생님 성함 송민영 아니었어요? 장소월은 누구예요? 신기하네요! 언니 이름에도 ‘월’ 자가 들어가요. 언니 이름은 유월이고, 저는 유화예요. 엄마가 지어주셨어요.”유월이 나뭇가지를 치켜들고 달려왔다. “그런 수업을 왜 해! 당장 돌아와, 유화!”멀리서부터 유월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유화는 겁에 질려 몸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송 선생님, 밥이 다 됐나 봐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장소월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며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너 먼저 가봐. 선생님은 조금만 더 있다 갈게.”장소월은 조금 전 그린 그림을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얼른 조심히 집에 돌아가.”“네, 선생님.”유화는 그림을 안고 조심스럽게 집으로 뛰어갔다.유월은 동생이 들고 있는 물건을 보고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무거나 집에 가져오지 마. 보기만 해도 짜증 나.”유화는 그녀를 향해 혀를 삐쭉 내밀었다. “무섭게 왜 그래요. 언니는 송 선생님보다 착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아요. 송 선생님이 내 언니였으면 좋겠어요.”“한 번만 더 말해봐.” 유월이 그녀를 때리려고 하자, 유화는 재빨리 엄마 뒤로 숨었다.“됐어, 그만 좀 싸워. 조용히 좀 살면 안 돼? 우리 이 작은 국경 마을에 선생님이 와서 가르쳐주시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 게다가 그분은 대도시에서 오신 분이야. 선생님한테 자꾸 시비 걸지 마. 너한테 빚진 것도 없잖아.”유화가 말했다. “맞아요. 송 선생님은 아는 것이 정말 많은 똑똑한 분이에요. 전 송 선생님이 제일 좋아요.”“송 선생님, 송 선생님, 말끝마다 송 선생님, 지겨워 죽겠어. 그렇게 좋으면 쫓아나가서 같이 살아. 여기서 나 귀찮게 하지 말고.”“어머
“아버지를 위해 죽은...” 강용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서... 네가 서울을 떠난 게 전연우 때문이었어?”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서철용으로부터 전연우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또다시 그 새장 안으로 돌아가게 될까 봐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전연우한테 원망이 남아있을까? 그를 향한 증오는 시간이라는 강물에 모두 휩쓸려 떠내려간 듯했다. 사랑? 그녀와 전연우 사이에 더는 존재하지 않을 감정이다. “내가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건, 단지 다시는 그 숨 막히는 새장 속으로 들어가는 게 싫을 뿐이야. 인생엔 원래 아쉬움이 남는 법이잖아. 그냥 알지 못한 채 살아가지 뭐. 그 사람 곁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나아.” 송시아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 또한 서울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지난 생에서 송시아는 모든 것을 차지했었다. 그녀의 손에서 전연우를 앗아갔었다. 이제 그녀가 떠났으니, 송시아는 더 이상 그를 빼앗으려 발버둥 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 물러선 것이다. 그렇게 원한다면 다 가져가라지. “지나간 일은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아. 강용, 이제 네 이야기를 해줘. 그동안 뭘 하며 지냈던 거야?” “네 화첩 속에 담긴 곳들을 전부 찾아다녔어. 황량한 사막에서 저무는 해도 보았고, 눈 덮인 산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해돋이를 보기도 했어. 또 망망대해에서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칠 때 폭우가 쏟아지던 그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어...” “첫해에는 발길 닿는 대로 걷고 또 걸었어. 두 번째 해에는 정체 모를 사람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한동안 숨어 지냈지...” “누가 널 쫓았던 거야? 혹시 누구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었어?” “전연우... 그 사람이야?” 강용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대체 그 사람 얼마나 싫어하는 거야? 네 오빠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이라고? 난 서울을 떠날 때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몰랐어! 전연우가 아니라 다른 패거리였어. 국내에서 전문적으로 훈
장소월은 그 작은 소동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녀는 별장으로 돌아가 편안한 청바지와 헐렁한 티셔츠로 갈아입고는 겉에 트렌치코트를 걸쳤다. 밤이 되면 러시아의 밤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두 사람은 한 레스토랑의 야외 테라스에 자리 잡고 앉았다. 장소월은 여전히 이곳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양식보다는 한식이 더 좋았다. 억지로 몇 입 먹은 뒤 장소월이 물었다. “영수 말이야, 비행기 사고 이후 심각하게 다쳤을 텐데 어떻게 살아남았던 거야?” 강용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누군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형의 위치를 알려줬어. 내가 데리고 나왔을 때, 형은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어. 낙일 마을에 있는 신의라고 불리는 분이 살려주셨어.”“혹시, 그 할아버지 말이야?” 강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사람. 그 노인은 과거에 궁궐에서 일했던 의원의 후손이라고 했어. 마을 사람들도 병이 생기면 다들 그 사람을 찾아간대. 그런데 그 노인 성격이 좀 괴팍해서 이장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대. 감기나 열 때문에 찾아온 환자들은 바로 맞은편 진료소로 쫓아내는 사람이야.” “그랬구나. 그럼 나 전에...” “그때 형이 도와줬어. 네 상태가 너무 심각했거든. 예전에 앓았던 병까지 겹쳐서... 살아난 게 기적이지. 네가 최근에 마셨던 한약들 모두 그 노인이 직접 처방한 거야.”장소월은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 생각하고는 말했다. “내일 다시 그곳에 가보고 싶어. 그분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강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같이 가줄게.” 강용은 집에 돌아간 뒤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은 장소월에게 만두를 만들어주었다. 장소월이 몇 입 먹은 뒤, 늘 그랬듯 강용이 설거지를 했다. 별장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장소월은 잠이 오지 않아 테라스에 앉아 창밖의 밤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가다가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본 강용이 안으로 들어왔다.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아직도 안 자?” 장소월은 뒤를 돌
장소월은 오전 내내 보디가드 노릇을 한 강용에게 고마운 마음에 완성된 그림 한 점을 건넸다. “선물이야. 보수라고 생각해.” 강용의 시선이 그림으로 옮겨졌다. 그림 속 인물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그림을 소중히 받으며 말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네. 오늘 저녁 나랑 같이 밥 먹을 기회를 줄 테니까, 눈치껏 승낙하는 게 좋을 거야. 거절하고 내 심기를 건드린다면, 앞으로 아예 기회조차 없을지도 몰라.” 장소월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저녁은 내가 살게.” “네가 그린 이 그림 말이야, 실물보단 많이 떨어지지만 뭐 봐줄 만은 해.” “오늘 더 이상은 못 그리겠네. 그만 돌아가자.” 눈 앞에 펼쳐진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도 그녀의 영감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무엇을 그릴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가슴 한쪽이 텅 빈 듯했지만, 무엇이 비어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그림이 안 그려져? 내일 다른 곳에 데려다줄게.”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생각해보자. 마침 저녁 먹을 시간이 됐네, 돌아가자.” 이곳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공원이자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비수기라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었다. 장소월에게 이곳은 처음이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 장소월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 “너 어딜 가든 항상 사진이나 영상 찍어서 나한테 보내줬었잖아. 그런데 왜 그 뒤엔 보내주지 않았던 거야?” “메일 계정이 해킹당했었어. 나중에 일이 터지고 나서 계정을 찾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더라고.”“누가 그랬는지 알아?” “안다고 한들 뭐 어쩌겠어. 메일 계정 해킹하는 것 정도는 너무 쉬운 일이잖아. 아가씨... 말 돌리지 말고 저녁밥 사는 거나 준비해.” 강용은 걸음이 빨랐기에 장소월은 혼자 뒤처졌다. 하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겨우 세 걸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던 중, 어리숙해 보이
“파가 없네.” 장소월이 입맛이 없는지 미동도 하지 않자, 강용은 그녀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말했다.“먹기 싫어도 조금은 먹어줘. 두 시간이나 들여서 만든 거야. 한 입만 먹어 봐, 응?”강용이 숟가락을 내밀자 장소월은 마지못해 만두를 살짝 맛보았다. “맛있네. 정말 그 골목길에서 먹었던 만두랑 똑같아. 언제부터 배우기 시작한 거야?” 강용은 의자를 끌어와 그녀 앞에 자리 잡고는 만두가 담긴 그릇을 들고 그녀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5년 전 내가 떠났을 때 말이야, 선물 받았었어?” 기억이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강용이 쫓겨나던 날, 장소월은 갑자기 그 가게 만두가 먹고 싶어져 걸음 했었다. 그날 사장님은 강용이 남겨둔 선물이라며 그녀에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빨간색 장갑 한 켤레였다. 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받았어. 내가 그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해?” 강용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기억하지. 네가 그랬잖아! 우린 어디에 있든, 때가 되면 분명 다시 만날 거라고.”장소월은 그가 그렇게까지 자세히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네가 했던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해. 장소월, 고등학교 때 일부러 시험을 망쳤던 건 그저 네 관심을 끌고 싶어서였어. 너한테 솔직하게 말하기도 전에 떠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 당시 강용이 떠난 것도 그녀 때문이었다. 막상 과거를 돌이켜보니, 희미하게만 기억하고 있을 줄 알았던 일들이 하나하나 생생히 머릿속에 펼쳐졌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5년이나 지나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몇 년만 지나면 30대에 접어드는 나이였다. 장소월은 그릇에 담긴 만두를 전부 비웠다. 하지만 그리고 싶은 그림에 대한 영감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한 해외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싶다며 장소월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이건 그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그녀의 스승님이 어렵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상대방이 언제까지 완성해야
강씨 집안이 없었더라도, 전연우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이들을 해치려 했을 것이다.한 프랑스풍 저택, 강용이 그녀의 여행 가방을 안방까지 옮겨다 주고 있었다. 장소월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네가 산 집이야?” “따지고 보면 강씨 집안 소유야. 예전 내가 서울에서 쫓겨날 때 그 사람이 나한테 준 집이거든. 지금은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 강용이 말하는 ‘그 사람’은 강영수의 아버지이자 강용의 아버지였다. 예전 인정아는 강용의 어머니를 끝까지 괴롭히며 쫓아내려 했다. 결국 어머니는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그녀를 따라갔다. 지금은 강용만이 홀로 이 세상에 남아있다. “이 방은 내가 도우미를 구해 청소해 놨어. 그 누구도 머무른 적 없는 방이야. 당분간 이 방 쓰면 돼. 근처에 꽤 괜찮은 꽃밭도 있으니까 나중에 한번 가 봐.” 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신세 좀 질게. 나 지금... 좀 특별한 상황이라서 신분증을 다시 만들어야 하거든. 그래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강용은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그녀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편하게 지내. 아무도 널 쫓아내지 않아. 하지만 밤에는 조심해야 할 거야...” “뭘 조심해야 하는데?” 강용은 돌연 가까이 다가갔다. 장소월은 빛나는 안광을 내뿜는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등이 벽에 닿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까지 말이다. 강용이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내가 몽유병이 좀 있거든. 혹시라도 밤에 실수로 네 방에 들어가면, 네가 나한테 반해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너 나 책임져야 할 거야.” 장소월은 피식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됐어, 그만해.” 그녀는 이내 미소를 거두고 말했다. “나와 전연우는 법적으로 아직 부부관계야. 이제 그 누구에게도 감정을 쏟는 일은 없을 거야.” 너무 지쳤다! 매번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때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도 다치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다 잊어버렸어. 너도 나 머리 나쁜 거 알잖아. 옛날에 나 과외해줄 때, 네가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잊었어?” “그건 그래! 내가 아는 모든 걸 다 가르쳐 줬는데도 넌 그저 놀기만 했어.” 다행히 강용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강용을 망가뜨리지 않았고, 강영수 또한 죽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떠나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후회하지 않겠어?” 강용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장소월은 걸음을 멈추고 멀리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뭘 후회한다는 거야?” 강용도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곁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떠나는 거 후회하지 않냐고. 강영수에게 모든 걸 이야기하면 두 사람 다시 함께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장소월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그럴 자격 없어. 그리고...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일 뿐이야. 영수가 행복하다면, 난 그걸로 충분해. 강용, 넌 어때? 아직도 강영수가 미워?” 강용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여전히 예전처럼 거칠고 반항적인 소년이었지만, 정말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딱히 미워할 것도 없어. 따지고 보면 강영수 잘못도 아니야. 내가 그 사람의 아버지를 오랫동안 빼앗아 간 건 사실이잖아. 내 어머니 때문에 형의 가족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로 인해 형은 가정의 화목함을 잃어버렸어.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내가 겪었던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가장 힘든 건 형이었을 거야. 네가 떠난 후 많이 힘들어했거든. 줄곧 너를 찾아 헤맸고...” “게다가... 예전의 강 씨 집안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잖아.” “그래! 강 씨 집안은 사라졌어.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영수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내가 떠나
저 여자가 여긴 왜 왔지?“이 선물 전해주려고 왔어.” 박원근은 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소월아... 좋은 날인데 같이 앉아서 축하주 좀 마시고 가지 그래? 오늘 특별한 날이잖아. 곧 공연도 시작될 거야.”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친구가 데리러 왔어요.” 그녀를 데리러 온 사람은 다름 아닌 강용이었다. 예전 그 오만하고 자유분방했던 소년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제법 성숙하고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건들거리는 태도와 모든 것에 무심한 듯한 그 모습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장소월이 이곳에 온 이유는 강용 때문이기도 했다. 강용의 도움으로 강영수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늘 종잡을 수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지만, 그녀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저 사람은...” 박원근은 강용을 알지 못했다. 장소월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사직서는 선생님께 따로 드릴게요.” 그녀는 혼례복을 입은 해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 있어.” 그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채, 장소월은 방으로 돌아가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챙겼다. 처음부터 그녀는 강영수의 무사함만 확인하면 곧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유화가 그녀를 붙잡았다. “송 선생님, 가지 마세요, 보고 싶을 거예요.” 장소월이 가르쳤던 아이들 모두 그녀에게 깊은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용은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모자를 쓴 채 기둥에 기대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축 늘어진 앞머리가 가늘고 긴 눈을 가리고 있었다. 강용이 장소월의 여행 가방을 받아들었다. 장소월이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유화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저 선생님이 송 선생님이 아니라는 거 알아요. 선생님 성함은 장소월 맞죠? 그림에 쓰여 있는 이름이 진짜 선생님의 이름이죠?” “장 선생님, 유화는 선생님이 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유화는 선생님이 계속 그림을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장소월은 유화 뒤에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천진한 눈망
낙일 마을에는 오래된 풍습이 있었다. 새롭게 부부의 연을 맺은 신랑 신부는 황혼 녘 태양을 향해 무릎 꿇고 백년가약을 맺으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백년해로한다고 한다. 결혼식이 치러질 때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여 일손을 도왔다. 유월은 오래전 이미 혼례복을 지어 놓았다. 낙일 마을에는 풍습이 또 하나 있었는데, 여자들은 혼기가 차면 결혼식에 입을 옷을 손수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많은 액세서리를 몸에 지니고 결혼식을 올려야만,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평안하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잔치는 3일 밤낮으로 이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술을 마시며 축복을 빈다. 신랑은 매일 손님들과 술잔을 기울인 뒤에야 신방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축복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낙일 마을 전체는 기쁨에 들썩이고 있었다. 유화 엄마는 유월의 머리를 빗겨주고, 산에서 꺾어온 꽃들을 꽂아 예쁘게 장식했다. 거울에 비친 유월의 모습을 보며 유화는 신이 나 팔짝팔짝 뛰었다. “언니, 드디어 시집가네요!” 엄마는 유화를 타박했다. “이 녀석이! 어서 가서 놀아. 언니 방해하지 말고.” “전 해이 오빠 보러 갈 거예요!” 오후 4시 30분 저녁노을이 하늘을 발갛게 물들이는 시간, 여자가 결혼식을 올리는 최고의 길시다. 문밖에서는 혼례를 축하하는 사람들의 흥겨운 북소리와 징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이가 입고 있는 파란색 한복은 유월이 직접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바느질한 것이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다. 그 옷은 유월이 앞으로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해이와 함께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만든 것이었다. 그가 신고 있는 신발도 마찬가지다. 바느질은 낙일 마을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 신부가 신방으로 들어가면, 신랑은 사흘 동안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신부 또한 방을 나올 수 없고, 먹고 자는 모든 것을 방에서 해결해야 했
“정말이야?” 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말했잖아, 너랑 결혼하겠다고. 울지 마, 나 마음 아파.” 해이가 유월을 품에 끌어안았다. 유월은 그때에야 비로소 흥분을 가라앉히고 평온해졌다. “네 과거를 알아보고 싶더라도, 앞으로는 혼자서 몰래 그 여자 찾아가지 마. 나 질투 나.” “알았어.” “됐어. 그만 징징거리고 빨리 안으로 들어가 봐. 그 아가씨 쓰러졌잖아.” “멀쩡하던 사람이, 무슨 일이야.” 장소월은 해열제를 먹고 진료소에서 반나절 동안 링거를 맞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옆에는 강영수, 유월 외에도 박원근이 더 있었다. “후배님, 좀 괜찮아졌어?” “후배?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유월은 깜짝 놀라 물었다. 박원근은 장소월보다 반년 정도 먼저 이곳에서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후배님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냥 미술 선생님 아니었어요?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장소월은 두통과 어지럼증 때문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귓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더더욱 아찔해졌다. “좀 나가줄래요. 쉬고 싶어요.” 박원근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는 문밖에 있을게. 푹 쉬어.” 세 사람이 문밖으로 나온 뒤, 유월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여자 대체 누구예요? 어떤 사람이에요? 교장 선생님?” 박원근은 옆에 있던 해이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난 민영이와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었어요.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어요. 민영이는 내 스승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신 제자예요.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죠. 기회가 되면 미술관에 가 봐요. 그곳에 전시된 작품 중 몇몇은 민영이의 손에서 탄생한 거니까.” “민영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요. 정말 뛰어난 사람이에요.” 유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가 물었다. “저 여자 결혼했다는 거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