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생각한 거예요? 일단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 없어요. 위험이 닥쳐도 내가 민아 씨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줄 수는 없고요.”소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알아요. 저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저 운도 항상 좋았어요. 아무도 저 다치게 못 해요.”기성은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민아 역시 단호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성은이 입을 열었다.“그럼 나 대신 그 자리를 지켜줘요. 송시아의 손이 너무 높게 뻗지 못하도록.”“그게.. . 무슨 뜻이에요? 기성은 씨 대신 총괄 비서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요? 하지만 전 지금 회사 본사에서도 나왔어요. 안 된다고요!”“어떤 일은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민아 씨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예요.”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나 걱정하고 있다는 거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기성은 씨처럼 입이 지독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아니면...”기성은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기성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어떻게 그런 황당한 말을. 소민아 씨,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라는 거 잊었어요?”소민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기성은 씨가 있으니까 곧 결혼하겠죠.”소민아는 굶주린 늑대처럼 기성은이 입고 있는 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기성은 씨, 저 남자를 한번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한테 듣기론 남자랑 자면 너무 짜릿하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요?”“솔직히 저번 기성은 씨 집에서 밤을 보낼 때부터 잠자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어요. 이번엔 꼭 할 거예요.”소민아는 허기진 암컷 호랑이처럼 차갑고 꼿꼿한 나무막대기 같은 기성은을 향해 군침을
그중 살집이 두둑한 털보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누님, 이런 사소한 일에 친히 걸음하시게 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저희가 이놈 껍질을 벗겨 누님의 분노를 달래드릴게요.”“전연우가 없으니까 엄청 막 나가네?”“누님,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은 지금 손을 씻은 상태라 푼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겨우겨우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요. 이놈이 겁도 없이 그 물건을 건드려서 저희까지 돈줄이 끊겨버렸어요. 누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솔직히 형님이 저희한테 추천한 일 꽤 괜찮아요. 시간도 힘도 별로 안 들어요. 하지만 벌이가 너무 적어서... 누님, 다른 방법 없을까요?”송시아가 손을 흔들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병인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병실 문이 굳게 닫혔다...소민아는 신이랑의 병실로 들어오던 중 환청인지는 모르나 송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송시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머릿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죽을 먹여주고 약을 가져다준 뒤 링거를 다 맞히고는 그의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신이랑이 물었다.“민아 씨, 돌아온 뒤로 계속 걱정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그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지금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인 소설을 마음껏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채 못한 일이 있나 고민하느라 그랬어요. 오늘 이랑 씨는 회사에 못 나간다고 말해뒀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이랑 씨가 저작권료 상의 때문에 출판사와 잡은 약속은 잠시 뒤로 미뤘어요.”소민아는 그를 부축해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신이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했다간 거부감만 더 살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천 리 밖으로 자신을 밀어낼 거라는
집에 돌아가는 길, 신이랑이 돌연 기성은을 언급했다.“그 사람이랑은 잘 사귀고 있어요?”핸들을 잡고 있던 소민아의 손이 순간 경직되었다.“네. 어젯밤 병원에서 성은 씨와 우연히 만났어요. 송시아가 총괄 비서 자리에 앉을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소민아는 그 뒤의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아직 대표님의 생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병원에 있을 때 간호사들이 대표님의 상태에 대해 수군대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이 일은 외부엔 비밀로 부쳤지만, 신이랑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신이랑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돌아가 그 자리에 앉고 싶은 거예요?”소민아는 그와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필경 그녀는 본사에서 나와 구르미 시리즈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구르미 시리즈는 예전 대표님이 소월 언니를 위해 설립한 회사였다. 현재 드라마화가 진행되고 있는 소설 모두 소월 언니가 직접 선택한 것이었다.지금은 비록 변고가 생기긴 했지만, 그들 손에 맡겨진 일이니 멈출 수는 없다.소민아가 말했다.“아니요. 지금 맡은 일 너무 좋아요.”“월급 때문이라면 상의 가능해요.”그녀를 잡을 수만 있다면 신이랑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어줄 수도 있었다.소민아는 신이랑을 집에 데려다준 뒤 일을 처리하러 회사로 돌아갔다.설영우는 이미 사무실에 와 있었다.퇴근 시간이 거의 다가오고 있을 때, 소민아는 신이랑의 문자를 받았다.가족 모임이 이번 주말로 결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4, 5일 정도 남아있었다.긴장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소민아가 그의 문자에 답장했다.[알겠어요.]퇴근길, 소민아는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고모부가 의식을 찾았고, 고모는 그의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다고 한다.명세진이 소민아의 손목을 잡고 병실 밖으로 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민아야, 우리 현아 어떻게 됐는지 알아? 강지훈은 대체 왜 그 아이를 다시 보내주
소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요즘 출근하느라 바빴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꼭 시간 맞춰 들어와 같이 밥 먹을게요.”명세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놓아주었다.“그래. 일이 아무리 바빠도 몸을 꼭 잘 챙겨야 해. 이젠 집에 들어와서 살아. 너랑 현아 방은 오랫동안 비어있긴 했어도 내가 아주머니한테 매일 청소하라고 했어..”“고마워요, 고모. 역시 고모가 제일 좋아요.”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소민아는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욕실에서 샤워를 마쳤다. 그 후 그녀는 기성은에게 오늘 일과가 모두 담긴 문자를 보냈다. 회사일 뿐만 아니라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오후엔 어떤 간식을 먹었는지까지 세세하게 담겨 있었다.역시 그 문자는 망망대해에 던져지기라도 한 듯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예전 기성은과 이런 문제로 심술을 부렸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너무나도 꿈 같은 시간이었다.소민아는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두 팔로 다리를 감싸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언제쯤이면 우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기성은 씨, 너무 보고 싶어요.”며칠 전에 보낸 문자에도 지금까지 답장이 없다.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정말 기성은과 사귀고 있는 건 맞는지 의심까지 들었다.“띠링.”기성은에게서 온 문자일 거라 생각한 소민아는 빠르게 핸드폰을 살펴보았다.신이랑의 문자였다.[언제 돌아와요? 민아 씨 주려고 삼계탕 끓여놨어요.]소민아는 문자를 쓰고 지우고 반복하다가 결국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답장했다.[오늘은 안 돌아갈 거예요. 이랑 씨, 저 앞으로 이곳에서 쭉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요.]신이랑에게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민아 씨 귀찮게 해서 그래요? 미안해요.”“이랑 씨 때문이 아니에요. 집에 돌아와 고모와 고모부를 뵌 지 너무 오래돼서 그래요. 정말 이랑 씨 때문은 아니에요. 삼계탕은 내일 가서 먹을
소민아는 명세진에게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했다.“아니에요. 방금 통화한 사람은 제 회사 상사예요. 저 지금 구르미 시리즈라는 회사로 옮겨서 총편집장 비서로 일하고 있어요. 월급은 예전과 같고요. 제 남자친구는 성세 그룹 총괄 비서예요. 다만 요즘은 다른 일이 있어 회사를 그만뒀어요.”“총괄 비서라고? 그럼 연봉도 엄청 높겠네?”“그건 물어본 적 없어요. 하지만 고아라 옆에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냥 제가 가끔씩 가서 함께 있어 주곤 해요. 최근엔 너무 바빠서 자주 못 만났어요.”명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민아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시간 있으면 집에 데리고 와. 이 고모가 널 평생 맡길 수 있는 사람인지 봐야지.”명세진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참, 저번에 너희 엄마가 소개해준 남자는 어땠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그 질문에 소민아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최근 있었던 일을 대체적으로 나열해줄 뿐이었다.“일이 좀 복잡하게 되긴 했구나.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내 마음이 좋다는 걸 어떻게 해. 들어보니 너 그 기성은이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구나.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네 속을 이렇게 태우는지 궁금하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접촉해본 명문가 도련님들도 적지 않았잖아. 성세 그룹 대표와 비교할 수는 없어도 다들 꽤 잘나가는 집안 자제들이었어.” 명세진이 말을 이어갔다.“그 강씨 집안은 어떻게 됐어? 예전 우리 소씨 집안은 강씨 집안 도움을 적잖게 받았었어. 요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분들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구나. 저번... 설 인사를 하러 네 고모부와 함께 강씨 저택에 갔는데 이사를 갔는지 집은 텅 비어있었어. 그 장씨 아가씨한테 묻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줄곧 만날 기회가 없었어.”소민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고모, 안 돼요. 지금은 심각한 상황이라 절대 강씨 집안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입에 올리면 안 돼요. 특히 대표님,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소민아는 날이 완전히 밝아와서야 깨어났다. 그 순간 알람이 한 번 울리더니 배터리가 없어 핸드폰이 꺼져버렸다.회사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소민아는 다급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침대 옆에 올려놓고 충전 선을 꼽고는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핸드폰 전원이 자동으로 켜졌을 때, 소민아도 세수를 마쳤다.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아침밥을 먹으러 아래로 내려갔다.그러던 중 약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도우미와 마주쳤다.“이건 뭐예요?”“민아 아가씨, 이건 어르신에게 드릴 한약입니다. 어르신께선 아직 쉬어야 하시기 때문에 아가씨와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하십니다.”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고모부 지금 많이 나아지셨어요?”“네. 이젠 밥도 드실 수 있습니다.”“다행이네요.”명세진은 완성된 만두를 들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민아야, 깼구나. 어서 와서 아침 먹어.”소민아는 아침 상이 이렇게나 풍성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모, 너무 많아요. 저 다 못 먹어요.”“많이 먹으렴.”“네.”소민아가 반쯤 먹었을 때, 명세진의 눈에 마당에 들어오고 있는 회색 승용차가 보였다.“저거 누구 차지?”소민아도 호기심에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차 번호를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신이랑 씨?”도우미가 문을 열려 나갔고, 소민아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이랑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 어서 들어와요.”“민아 씨한테 문자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요.”소민아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요! 배터리가 없어서 지금 충전 중이에요.”명세진이 미소를 머금고 걸어왔다.“이분이 바로 네가 어젯밤 말했던 신 총편집장님이시구나. 정말 유능하고 건실한 분이시네.”신이랑은 오늘 입술에 빨간빛이 감도는 것이 얼굴색이 꽤 괜찮았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 오늘은 민아 씨를 데리러 온 거예요. 아침밥은 이미 먹었습니다.”소민아는 그를 가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머리를 쥐
“앞당겨졌다고요? 주말로 결정되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저 준비 아무것도 못 했어요. 이런 옷차림으로 가면 실례 아닐까요?”신이랑이 점차 속도를 줄여 신호등 앞에 멈추었다. 그는 긴장감에 경직되어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내가 있잖아요. 뭘 입든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민아 씨 자체니까요. 그냥 편하게 밥 한 끼 먹는다고 생각하고 부담 갖지 말아요.”“네.”회사에 도착한 뒤, 신이랑과 소민아는 연이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회사 직원들은 이제 그다지 의아해하지 않았다.하지만 소민아에 관한 루머들은 여전히 가실 줄을 몰랐다.필경 그녀는 얼마 전 제 입으로 기성은과 사귄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비서팀을 떠난 뒤로는 구르미 시리즈에 들어와 신이랑 편집장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소민아는 회사 뒷담화 방에서 꽃뱀 딱지가 단단히 붙어 있었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몰래 소민아가 결국 두 사람 중 누구에게 갈지에 대해 내기까지 하고 있었다.지금은 신이랑에게 건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이번 내기를 위해 꽤 많은 돈을 쓴 사람도 적지 않았다.소민아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신이랑의 비서로서 오늘의 일정을 보고하고 일련의 계약서들을 처리했다.소민아가 서류 몇 장을 신이랑에게 내밀었다.“몽크 만화 스튜디오에서 보내온 계약서예요. 이랑 씨 사인이 필요해요.”신이랑은 서류를 받은 뒤 자애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오늘 민아 씨가 할 일은 날 도와 원고를 봐주는 것과 고전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대본을 보고 수정 의견을 내주는 거예요.”신이랑이 옆에 있던 태블릿을 가져와 내부 자료를 열어주었다. 안엔 아직 방영되지 않은 드라마 대본들이 가득했다. 이는 모두 구르미 시리즈에서 수정과 편집을 거듭한 것들이었다.소민아는 순간 수치심이 들었다. 부서를 옮긴 이후로 그녀는 줄곧 신이랑의 사무실에서 드라마를 보며 간식을 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심지어 물까지도 신이랑
소민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총괄 비서? 그녀와 소피아가?그녀는 성세 그룹에 입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그녀더러 소피아와 총괄 비서 자리를 두고 다투라니.비서팀엔 능력 있는 비서들이 수두룩한데 왜 하필 그녀를 불러들인단 말인가.소피아도... 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직원이라고 할 수 있다. 수 년간 회사에 다니며 꽤 많은 인맥을 쌓았을 것이다.이 일은 분명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경 송시아의 머릿속엔 갖은 교활한 생각이 가득 담겨 있으니 말이다. 소피아는... 어쩌면 처음부터 송시아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예전 회사에서의 음침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틀림없이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닐 것이다.소민아가 송시아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소피아는 이미 안에 앉아있었다. 다들 소민아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소민아가 말했다.“송 부대표님, 찾으셨어요?”소파에 앉아있던 송시아는 손을 휘저어 옆에 있던 간병인을 내보냈다.“사소한 일일 뿐이니 긴장하지 말아요. 일단 앉아요.”소민아의 맞은 편 자리에 앉은 소피아는 깍듯하게 송시아에게 물을 한 잔 따라주었다.“부대표님, 목마르시죠? 물 마시세요.”송시아는 옅은 웃음만 지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목까지 오는 길이의 짧은 단발머리로 헤어스타일을 바꾸었다. 깔끔하고 정교했지만, 몸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 바른 파운데이션이 잔뜩 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내가 두 사람을 부른 이유 짐작하고 있을 거예요. 기 비서가 돌연 사직하는 바람에 그 자리가 공석이 되어버렸어요. 누군가는 반드시 그 자리에 앉아 맡은 일을 처리해야 해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내 예전 비서였고, 다른 한 사람은 현재 비서직을 맡고 있어요. 나에게 있어 두 사람 모두 회사 내 가장 뛰어난 직원이죠. 혹시 추천할만한 사람 있어요? 아니면 대담하게 스스로 이 자리에 앉고 싶다고 나서지 않을래요?”소민아는 소피아의 반응을 살피고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자신을 향한 송시아의 눈빛
소민아는 남자의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싫어요. 당신한테서 그 사람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기성은 씨, 난 다시는 당신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 손 놓으면 또 사라져 버릴 거잖아요.”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기성은은 손을 들어 올렸다가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민아 씨, 이러면 안 돼요. 곧 결혼하잖아요.”소민아는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나는 신이랑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사람과는 그냥 좋은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언니가 계속 날 괴롭혀요. 처음에는 소월 언니 안전을 빌미로 협박했어요. 소월 언니를 찾았으니까 만약 신이랑과 결혼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두 번째는 별이 그 아이를 노리려 했어요. 그리고 대표님의 회사도 팔아넘기려고 했고요. 내가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그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요.”“세 번째는 기성은 씨의 안전이에요. 다들 당신이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아요. 기성은 같이 대단한 사람이 죽을 리가 없죠.”“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플까요. 왜 좋아하는 사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걸까요.”“사람이 살아봤자 얼마나 산다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민아 씨, 미안해요!”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그였다.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기성은은 손을 들어 소민아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소민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신이랑은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며 폐기물 더미가 쌓인 복도에서 위로 올라왔다. “민아 씨?”발코니 밖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신이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소파에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급히 다가갔다.백혜진도 마침 이곳을 찾아왔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본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민아 씨 괜찮은 거죠.”“네, 그냥 잠들었을 뿐이에요. 오늘 밤 민아 씨랑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런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헤비메탈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던 소민아는 마지막 잔을 마신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조명은 그녀에게 몽롱한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백혜진은 급히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만 마셔요, 민아 씨. 벌써 얼마나 마신 거예요. 계속 마시면 몸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백혜진의 손을 뿌리치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다. “나... 나는 집에 안 갈 거예요. 집에 가면, 신이랑이랑 결혼해야 한다고요. 난 결혼 안 할 거예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잠자리까지 했으니까 날 책임져야 한다고요!”엄청난 비밀을 들은 듯 백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아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기 비서님랑 잤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두 사람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고 일찌감치 느꼈었거든요. 기 비서님이 왜 자꾸 우리 쪽을 쳐다보나 했더니 역시 그런 일이 있었네요.”백혜진은 또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기 비서님을 좋아하면서 왜 신 편집장님이랑 결혼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소민아는 술에 취해 정신없이 비틀거리며 술잔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려 했다. “왜 이랑 씨랑 결혼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그건 내 언니가 강요한 거니까.”백혜진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언니요? 언니가 누군데요?”“누구겠어요, 송시아지.”“뭐라고요?” 백혜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가 누군가와 부딪히자, 백혜진은 급히 소민아를 부축했다. “민아 씨... 천천히 가요.”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들어간 뒤, 소민아는 중심을 잡지 못해 벽에 기대섰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잡고 불빛이 없는 컴컴한 복도로 끌고 갔다.“민아 씨, 어디 있어요?”“나...”백혜진이 다급하게 소민아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민아는 계속해서 기성은의 목숨을 빌미로 자신에게 신이랑과의 결혼을 강요하는 송시아에게 치를 떨었다. 지난번 면북에 갔을 때, 소민아는 송시아가 그곳에서 누리는 권세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곳 사람들은 그녀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고, 심지어 존경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무서운 상상이지만, 어쩌면 그 폭발 사고가 그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소민아는 답답함에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음속 울렁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집에 도착한 뒤, 소민아는 차에서 내렸고 송시아도 뒤따라 함께 거실로 들어왔다.명세진이 소민아를 맞이했다.“민아야, 이 녀석아, 어디 갔었어? 이랑이는...”소정국은 심장을 움켜쥐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문밖에 나타난 송시아를 보자 모든 사람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소정국이 소민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민아야, 이리 와.”소민아가 그의 말에 따라 걸어가자 명세진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당신이 여긴 왜 온 거예요. 여기엔 당신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당장 나가요.”송시아는 선글라스를 벗고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민아는 제 여동생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언니로서, 여동생 결혼 준비는 당연히 함께해야죠. 물론, 그동안 여동생을 키워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결혼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결혼 이후 비용까지 모두 책임질게요.”명세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소정국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단란한 한 가족이었다. 송시아는 누가 봐도 낯설기 짝이 없는 외부인이었다.모두가 침묵하며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소민아가 돌연 입을 열었다. 소민아를 꽉 잡고 있던 명세진의 손은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예전엔 당신 협박에 못 이겨서 억지로 신이랑과 결혼하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마음을 굳혔어요. 신이랑과 이혼할 거예요. 더 이상 당신 뜻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소민아와 신이랑이 사
눈물이 예고도 없이 뚝뚝 흘러내렸다. 소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거 믿지 않아요. 3년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기성은 씨 찾으러 갈 거예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요!”“기성은 씨, 당신이 죽었다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어요.”은밀하게 감춰진 공간에서 두 남자가 감시 카메라에 잡힌 화면을 보고 있었다.한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진짜 이 여자, 기성은 형 너무 좋아하나 봐. 한 달 동안 열 번 넘게 찾아왔어. 곧 결혼식까지 한다는데,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하나?”다른 남자가 컵라면을 들고 다가와 말했다. “그러게. 성은이 형도 참, 여자를 너무 몰라...”소민아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휴대폰에 도착해 있는 수많은 문자 메시지와 전화를 확인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빠 엄마가 왔어. 어디 있어? 민아야, 전화해. 너무 걱정돼.]아빠 엄마가 돌아오셨다고?소민아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아파트를 나섰다.그녀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빨간색 람보르기니 한 대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고, 송시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타, 동생.”소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당신 동생이 아니에요.”송시아가 말했다. “이미 소씨 집안에 이야기해 뒀으니까 그쪽 사람들도 내가 간다는 거 알고 있어. 지금 나 말고는 아무도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라. 지금 차에 타면 시간 낭비 없이 일찍 도착할 거야.”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나 감시하는 거예요?”송시아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일부러 소민아를 유혹하듯 말했다. “차에 타면 기성은에 대해 알려줄게.”그 단 한마디에 소민아는 바로 조수석에 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시선을 떨어뜨리니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