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이야말로 요즘 팔자가 폈지. 벌써 임신 5개월 차에다 이제 곧 엄마가 된다면서? 남편은 대기업 부장이라고 했나? 정말 인생 승자네!”동창들의 칭찬과 웃음소리에 이다은은 속이 점점 답답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술잔을 기울이며 홀로 식사를 이어갔다. 가끔씩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면 억지 미소로 대답할 뿐이었다.‘그래도 동창회 나와서 인맥 하나쯤 얻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내가 너무 큰 착각을 했구나.’이다은은 씁쓸하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이 자리에서 그저 우스갯거리일 뿐이었다. 오래된 동창들에게 심심풀이 웃음거리로 전락한 자신을 느끼며 그녀는 빨리 식사를 끝내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그러나 소이현이 다시 엉뚱한 소리를 했다.“다은아, 너 결혼했으면서도 우리 같은 동창들한테는 결혼식 초대도 안 했잖아? 차라리 오늘 이 자리를 네 결혼 피로연이라고 생각하고 우리한테 한턱내라!”주변 사람들도 맞장구쳤다.“그래! 나중에 우리가 축의금 보내줄게!”이다은은 젓가락질하던 손을 멈췄다. 입에 넣은 음식은 더 이상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눈앞의 화려한 음식과 고급 와인을 바라보며 얼어붙었다.‘이건 분명 5성급 호텔인데... 이 한 끼가 최소 몇백만 원은 나오겠지. 축의금? 안성시에서는 한 사람당 기껏해야 십만 원 정도로 알고 있는데... 열 명이면 백만 원?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바보는 아니잖아... 동창이라는 것들이 이렇게 괘씸할 수가!’그간 참아왔던 모욕과 조롱이 머릿속을 스쳤다. 가난 앞에서 자존심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녀의 돈까지 탐내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었다.이다은은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술잔을 들었다. 단숨에 술을 비워낸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소이현이
“십만 원? 나도 십만 원 낼게!”누군가의 말이 시작점이 되어 동창들은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이다은에게 송금하려는 제스처를 취했다.이다은은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냥 다들 송금하지 마. 여기 음식값은 너희들의 축의금으로 퉁 칠게. 부족한 건 이 모임 주최한 사람이 알아서 채우고... 난 너무 가난해서 단돈 천 원도 못 내겠어.”그 말을 남긴 이다은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모임장을 걸어 나갔다.남아 있던 동창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고, 그중 두 명의 여학생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이다은을 따라나섰다.그들은 긴 호텔 로비를 지나 끝까지 걸어가는 이다은을 붙잡으며 다급히 말했다.“다은아, 아직 모임 안 끝났는데 이렇게 나가는 건 좀 그렇잖아.”다른 한 명은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소이현이 일부러 그런 거잖아. 오늘 모임 처음부터 끝까지 널 곤란하게 만들고 말로 계속 찔렀잖아. 그냥 참지 말고 맞서야지. 이렇게 화내고 나가면 네가 지는 거 아니야?”“맞아. 걔네가 널 웃음거리로 만들게 두면 안 돼.”이다은은 그들을 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었다.“너희 걱정 고마워. 그런데 내가 이런 자리,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사실은 나...”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은 씨?”이다은과 두 여동창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이다은은 숨이 멎을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걸음을 멈췄다.그녀를 불러세운 사람은 바로 남우영이었다.그는 세련된 정장을 입고 우아하고 당당한 걸음으로 다른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같은 정장을 입은 남성들이 뒤따르고 있었고, 그중에는 TV에서 종종 보던 유명 재계 인사들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이다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접대 자리인가? 고객 접대 때문에 온 건가? 그런데 이런 5성급 호텔까지 오는 건 좀 과하지 않나?’남우영은 뒤를 돌아 동행한 사람들에게 말했다.“여러분은 먼저
남우영의 선천적인 우아함과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그를 평범한 영업사원으로 연상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방 안의 사람들은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았고 이다은은 남우영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그냥 가요.”그녀는 남우영이 이 무례한 동창들 앞에서 조롱당하고 웃음거리가 되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남우영은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듯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의자 하나를 당겼다.“앉아요.”이다은이 앉자 남우영도 자연스럽게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방 안의 모든 시선이 다시 남우영에게 고정되었다.이때, 한 여동창이 농담을 던졌다.“다은아, 네 남편 진짜 멋있다! 너 정말 복 받았네!”이다은은 어색하게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동창이 거들었다.“그러니까 네 남편이 정하늘보다 훨씬 잘생겼잖아.”소이현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얼굴이 잘생기면 뭐 해. 겨우 부동산에서 원룸이나 보여주는 영업사원이라는데. 우리 남편이랑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그 말을 듣고 남자 동창들이 한껏 들떠 맞장구쳤다.“맞아, 남자는 잘생긴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능력, 재력, 그리고... 전투력이 있어야지.”‘전투력’이라는 말에 남자 동창 몇몇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무아지경에 빠졌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그 유치한 농담의 속뜻을 이해하자 연이어 웃음소리가 퍼졌다.그러나 이다은과 남우영은 미동도 없이 웃지 않았다.분위기가 점점 과열되자, 이다은에게 호감을 보였던 한 남자 동창이 남우영을 향해 말을 건넸다.“남우 씨, 농담이에요.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우리가 당신 전투력이 없다는 소린 아니었으니까요. 뭐, 재력은 ‘충분히’ 보여주셨고... 전투력은... 그건 우리 다은이가 잘 알겠죠?”그의 말끝에 방 안의 웃음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그녀는 남우영의 손을 꽉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남우영은 그녀의 손을 반대
“전에 고객이랑 마시다 남은 건데 다 못 마셔서 호텔 셀러에 맡겼었어요.”남우영은 앞에 놓인 와인을 들어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이런 와인은 입에 댈 수조차 없어서요...”안진호가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400만 원짜리 와인이 입맛에 안 맞는다고? 막걸리만 마셔서 그런 거 아니야?”그의 비웃음에 몇몇 사람들이 몰래 웃었다. 모두가 남우영이 곧 창피를 당할 거라 기대하며 분위기를 지켜보았다.그때 호텔 매니저가 작은 카트를 끌고 들어왔고 모두의 시선이 매니저와 그가 들고 있는 와인으로 쏠렸다.매니저는 와인을 조심스럽게 꺼내 남우영 앞에 놓으며 공손히 물었다.“대표님, 지금 오픈할까요?”남우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매니저는 숙련된 손길로 와인 오프너를 집어 들었다. 코르크가 완전히 빠지는 순간, 특유의 깊은 소리가 방 안에 은은하게 울렸다.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와인이 완벽히 디캔팅 된 순간, 매니저는 잔에 한 모금 따라 살짝 스월링하며 와인의 향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았다.와인을 여는 매니저의 움직임이 마치 의식처럼 느껴졌고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인 채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이다은은 술을 마시지 않아 와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방 안 사람들의 과장된 표정을 보며 무언가 대단히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다.그녀는 남우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이 와인, 얼마짜린데요?”남우영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비싸진 않아요. 하지만 돈 있다고 아무나 살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사람들이 놀라는 거예요.”이다은은 그의 말을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매니저는 와인 잔에 소량의 와인을 따라 남우영에게 건넸다. 남우영은 잔을 받아 들고 이다은에게 건넸다.“마셔볼래요?”이다은은 급하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저는 술을 못 마셔서요.”남우영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방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마시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매니저님께 한 잔씩 부탁드리세요.”안진호
“남우 씨, 어느 부동산에서 일하세요?”한 동창이 궁금한 듯 묻자, 남우영은 미소를 지으며 단호히 대답했다.“퇴근 후엔 업무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중개사가 연락처를 안 준다고?’‘퇴근 후엔 공적인 얘기를 안 한다고?’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이다은조차 남우영의 태도가 평소와 달라 살짝 의아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남편 지금 자존심 세우는 건가? 이런 사람들한테 굳이 잘 보이려고 굽신댈 필요 없지... 역시 대단해!’남우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다은의 손을 잡고 말했다.“집이 좀 멀어서요. 다은 씨를 먼저 집에 데려다줘야 할 것 같네요.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그는 말을 마치고 이다은의 가방을 들어 어깨에 걸치고 그녀의 손을 이끌며 방을 나섰고, 나가면서 호텔 매니저가 준비한 와인도 잊지 않고 챙겼다.남우영과 이다은이 방을 나가자, 몇몇 동창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몰래 따라 나갔다.‘진짜 저 와인 가져가나 보자.’그들은 남우영이 1억 4천만 원짜리 와인을 들고 호텔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안진호는 남우영이 말한 반값 세일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 계산서를 받아서 들었다. 예상대로 호텔 측은 남우영의 말 한마디로 정확히 50% 할인된 금액을 청구했다.안진호는 충격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대체 저 사람 뭐 하는 사람이야? 이 호텔이 그 사람 말 한마디에 반값을 해주다니... 말도 안 돼!”다른 동창들도 궁금한 얼굴로 소이현에게 물었다.“이현아, 너랑 다은이는 제일 친했잖아? 남편이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소이현은 난감한 표정으로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뭘 알겠어... 그냥 시골 출신에 차도 없고 집도 없고... 아버지는 희귀 난치암 말기라고 들었어.”그 말을 들은 동창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했다.호텔을 나와 대로변으로 걸어가던 두 사람 앞에 검은색 고급 세단이 멈췄다. 운전기사가 내려 차 문을 열며 공손히 말했다.
M국, 변경.서다인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친오빠라는 자가 도박 빚을 갚기 위해 그녀를 2천만 원에 팔아버렸다!이 암담한 사기 센터에는 전화 사기, 인신매매, 장기매매, 구타와 학대가 매일 발생하고 있다. 이곳은 사람을 풀 베듯 함부로 죽이는 곳이다.서다인은 수려한 미모를 지녀 범죄자들에게 강제로 이끌려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있다.그녀는 죽을지언정 필사적으로 반항하여 혹독하게 두들겨 맞아 옷이 갈기갈기 찢어졌고 몸에 온통 상처투성이였다.서다인은 고통과 두려움에 휩싸여 절망의 끝자락에 놓였을 때 문득 남편 남하준이 떠올랐다.“제발 저 건드리지 마세요. 우리 남편더러 돈 보내오라고 할게요... 얼마든지 다 드릴 수 있어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그녀는 울먹이며 애원했다. 이건 최후의 몸부림이나 다름없다.금전 갈취는 그들의 업무 중 하나이다.앞장선 김호영이 화색을 띠며 서다인을 두들겨 패는 부하들을 멈춰 세우고 재빨리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넸다.“네 남편에게 40억 가져오라고 전해! 10원 한 장이라도 모자라기만 해봐. 그땐 여기 있는 우리 애들을 네가 전부 먹여 살려야 할 거야. 몸을 팔아서 손님들 돈을 벌어와야 한다고, 알아들었어?”서다인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고 겁에 질려 눈동자가 흔들렸다.짝사랑한 지 3년, 혼인 신고한 지 1개월이 지났지만 단 하루도 함께 지내지 않은 그녀의 남편이 진짜 40억을 내놓으며 그녀를 구할까?“알았어요.”서다인은 무기력하게 대답한 후 남하준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건 마지막 동아줄이다. 그녀의 생사가 걸린 마지막 전화 한 통이다.전화가 연결되자 수화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누구세요?”그 순간 서다인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처럼 눈앞이 캄캄하고 마음이 텅 비었다.그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나 초조하게 말했다.“저는 남하준 씨 아내 서다인이에요. 실례지만 남하준 씨 바꿔줄 수 있나요?”전화기 너머로 여자가 담담하게 말했다.“오빠 지금 낮잠 자고 있어요. 용건
국가의 안위를 위해 침략자를 몰아내며 피로 물든 전쟁을 이어가면서도 두려운 기색은 추호도 없었다.남하준은 중동 내부전쟁에 참가한 군사의 왕이고 위기에 처한 이 나라를 구한 영웅이며 가장 참혹한 전쟁에서 포위를 뚫은 신과 같은 존재인데 눈앞에 있는 연약한 여자가 그의 아내라니, 이건 당최 말이 안 되는 일이다.김호영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부하를 타일렀다.“걱정들 붙들어 매. 남하준이 어떤 사람이야? 권력이 하늘을 찌르고 단지 이름 석 자만으로도 사람을 간담이 서늘해지게 하는데 그런 사람의 아내를 누가 감히 팔겠어? 내가 알기로 남하준은 아직 미혼이야. 아마 동명이인일 거야. 이년 남편한테 계속 연락해서 40억 갖고 오라고 해!”남자들은 계속 남하준에게 연락했다.서다인은 마음이 재가 되어 구석에 털썩 주저앉아 절망감에 휩싸인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얼마나 지났을까.귀가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콰당!”대지가 흔들릴 정도의 폭격 소리였다.서다인은 화들짝 놀라며 두 눈을 떴다.방에서 한창 카드놀이를 하며 서다인의 몸값을 기다리던 남자들이 식겁하여 넋을 놓았다.밖에 있던 부하들도 공포에 휩싸여 큰소리로 외쳤다.“보스, 큰일 났어요. 우리 대문이 폭발해버렸어요.”“폭발?”김호영은 겁에 질렸다.“누구 짓이야?”“그게... 군전 그룹 사람들이에요. 어마어마한 군부대가 거침없이 쳐들어와 우리 센터를 포위해버렸어요.”부하는 상공을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전투기 헬리콥터도 두 대 더 있어요...”“필레 전쟁에 참여한 군전 그룹을 말하는 거야? 우린 이젠 뒈졌어!”이때 김호영이 가녀린 체구의 서다인을 잡아당기며 일그러진 표정으로 윽박질렀다.“네 남편이 정말 군전 그룹 수장 남하준이야?”서다인은 무기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김호영은 순간 미친 듯이 후회가 밀려왔다. 그는 서다인에게 총을 겨눈 채 밖으로 나갔다.사기 센터 밖에는 수십 대의 무장 차량이 이곳을 가지런히 에워쌌다.수백 명의 건장한 무장 병사가 강렬한
김호영은 겁에 질려 몸을 벌벌 떨며 끝까지 협박했다.“그럼 도련님 아내분과 함께 죽을 겁니다.”남하준은 살인에 늘 단호한 법이다. 그 누구에게도 협박당해보지 못한 그였기에 두 눈에 살기가 스쳤다!별안간 일곱 발의 탄알이 폭발하는 소리가 서다인의 고막을 울렸다.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온몸에 피가 굳은 듯 제자리에 경직되어서 두 눈만 질끈 감고 있었다.잔인한 참살이 이뤄지고 선홍빛 핏물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튀었다.이 순간 그녀가 남하준의 아내란 신분은 단지 우스갯소리에 불과했다. 이토록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니!남하준이 구한 건 그녀가 아니라 사기 센터에 갇힌 수천 명의 피해자였으니 실수로 그녀를 죽여도 전혀 괜찮겠지?!서다인은 한없이 연약한 몸으로 이런 충격을 견디지 못해 비통한 슬픔에 젖은 채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군전 그룹 본사.M국 최대 규모의 무기 생산 기지이자 삼엄한 경계를 이룬 국영 병기 공장.“안돼...”악몽에서 놀라 깬 서다인은 땀에 흠뻑 젖어서 두 눈을 부릅떴다.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의식이 흐트러진 채 사방을 둘러보다가 침대 맡에 서 있는 여자에게 시선이 멈췄다. 의학의 힘을 빌린 정교한 이목구비는 마치 인형 같았고 요염함 속에 은은한 청순함이 돋보였다.여자의 손에 쥔 쟁반에는 온수 한 잔과 전복죽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깼어? 오빠가 먹을 것 좀 가져다주라길래.”백하린이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고마워요.”서다인은 친절하게 고마움을 표하고는 나른한 몸을 이끌고 겨우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그녀는 종일 물 한 방울도 안 마셔서 지금 허기지고 온몸에 기운이 쫙 빠졌다.백하린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나더러 네게 음식을 갖다 주라고 하긴 했지. 근데 아쉽게도 네가 대접받을 급은 아니잖아.”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백하린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수중의 음식을 바닥에 내던지고 본인도 잇따라 주저앉았다.물건이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문밖까지 울려 퍼졌다. 백하린은 울먹이는 목
“남우 씨, 어느 부동산에서 일하세요?”한 동창이 궁금한 듯 묻자, 남우영은 미소를 지으며 단호히 대답했다.“퇴근 후엔 업무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중개사가 연락처를 안 준다고?’‘퇴근 후엔 공적인 얘기를 안 한다고?’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이다은조차 남우영의 태도가 평소와 달라 살짝 의아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남편 지금 자존심 세우는 건가? 이런 사람들한테 굳이 잘 보이려고 굽신댈 필요 없지... 역시 대단해!’남우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다은의 손을 잡고 말했다.“집이 좀 멀어서요. 다은 씨를 먼저 집에 데려다줘야 할 것 같네요.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그는 말을 마치고 이다은의 가방을 들어 어깨에 걸치고 그녀의 손을 이끌며 방을 나섰고, 나가면서 호텔 매니저가 준비한 와인도 잊지 않고 챙겼다.남우영과 이다은이 방을 나가자, 몇몇 동창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몰래 따라 나갔다.‘진짜 저 와인 가져가나 보자.’그들은 남우영이 1억 4천만 원짜리 와인을 들고 호텔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안진호는 남우영이 말한 반값 세일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 계산서를 받아서 들었다. 예상대로 호텔 측은 남우영의 말 한마디로 정확히 50% 할인된 금액을 청구했다.안진호는 충격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대체 저 사람 뭐 하는 사람이야? 이 호텔이 그 사람 말 한마디에 반값을 해주다니... 말도 안 돼!”다른 동창들도 궁금한 얼굴로 소이현에게 물었다.“이현아, 너랑 다은이는 제일 친했잖아? 남편이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소이현은 난감한 표정으로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뭘 알겠어... 그냥 시골 출신에 차도 없고 집도 없고... 아버지는 희귀 난치암 말기라고 들었어.”그 말을 들은 동창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했다.호텔을 나와 대로변으로 걸어가던 두 사람 앞에 검은색 고급 세단이 멈췄다. 운전기사가 내려 차 문을 열며 공손히 말했다.
“전에 고객이랑 마시다 남은 건데 다 못 마셔서 호텔 셀러에 맡겼었어요.”남우영은 앞에 놓인 와인을 들어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이런 와인은 입에 댈 수조차 없어서요...”안진호가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400만 원짜리 와인이 입맛에 안 맞는다고? 막걸리만 마셔서 그런 거 아니야?”그의 비웃음에 몇몇 사람들이 몰래 웃었다. 모두가 남우영이 곧 창피를 당할 거라 기대하며 분위기를 지켜보았다.그때 호텔 매니저가 작은 카트를 끌고 들어왔고 모두의 시선이 매니저와 그가 들고 있는 와인으로 쏠렸다.매니저는 와인을 조심스럽게 꺼내 남우영 앞에 놓으며 공손히 물었다.“대표님, 지금 오픈할까요?”남우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매니저는 숙련된 손길로 와인 오프너를 집어 들었다. 코르크가 완전히 빠지는 순간, 특유의 깊은 소리가 방 안에 은은하게 울렸다.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와인이 완벽히 디캔팅 된 순간, 매니저는 잔에 한 모금 따라 살짝 스월링하며 와인의 향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았다.와인을 여는 매니저의 움직임이 마치 의식처럼 느껴졌고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인 채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이다은은 술을 마시지 않아 와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방 안 사람들의 과장된 표정을 보며 무언가 대단히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다.그녀는 남우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이 와인, 얼마짜린데요?”남우영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비싸진 않아요. 하지만 돈 있다고 아무나 살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사람들이 놀라는 거예요.”이다은은 그의 말을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매니저는 와인 잔에 소량의 와인을 따라 남우영에게 건넸다. 남우영은 잔을 받아 들고 이다은에게 건넸다.“마셔볼래요?”이다은은 급하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저는 술을 못 마셔서요.”남우영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방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마시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매니저님께 한 잔씩 부탁드리세요.”안진호
남우영의 선천적인 우아함과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그를 평범한 영업사원으로 연상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방 안의 사람들은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았고 이다은은 남우영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그냥 가요.”그녀는 남우영이 이 무례한 동창들 앞에서 조롱당하고 웃음거리가 되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남우영은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듯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의자 하나를 당겼다.“앉아요.”이다은이 앉자 남우영도 자연스럽게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방 안의 모든 시선이 다시 남우영에게 고정되었다.이때, 한 여동창이 농담을 던졌다.“다은아, 네 남편 진짜 멋있다! 너 정말 복 받았네!”이다은은 어색하게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동창이 거들었다.“그러니까 네 남편이 정하늘보다 훨씬 잘생겼잖아.”소이현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얼굴이 잘생기면 뭐 해. 겨우 부동산에서 원룸이나 보여주는 영업사원이라는데. 우리 남편이랑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그 말을 듣고 남자 동창들이 한껏 들떠 맞장구쳤다.“맞아, 남자는 잘생긴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능력, 재력, 그리고... 전투력이 있어야지.”‘전투력’이라는 말에 남자 동창 몇몇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무아지경에 빠졌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그 유치한 농담의 속뜻을 이해하자 연이어 웃음소리가 퍼졌다.그러나 이다은과 남우영은 미동도 없이 웃지 않았다.분위기가 점점 과열되자, 이다은에게 호감을 보였던 한 남자 동창이 남우영을 향해 말을 건넸다.“남우 씨, 농담이에요.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우리가 당신 전투력이 없다는 소린 아니었으니까요. 뭐, 재력은 ‘충분히’ 보여주셨고... 전투력은... 그건 우리 다은이가 잘 알겠죠?”그의 말끝에 방 안의 웃음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그녀는 남우영의 손을 꽉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남우영은 그녀의 손을 반대
“십만 원? 나도 십만 원 낼게!”누군가의 말이 시작점이 되어 동창들은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이다은에게 송금하려는 제스처를 취했다.이다은은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냥 다들 송금하지 마. 여기 음식값은 너희들의 축의금으로 퉁 칠게. 부족한 건 이 모임 주최한 사람이 알아서 채우고... 난 너무 가난해서 단돈 천 원도 못 내겠어.”그 말을 남긴 이다은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모임장을 걸어 나갔다.남아 있던 동창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고, 그중 두 명의 여학생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이다은을 따라나섰다.그들은 긴 호텔 로비를 지나 끝까지 걸어가는 이다은을 붙잡으며 다급히 말했다.“다은아, 아직 모임 안 끝났는데 이렇게 나가는 건 좀 그렇잖아.”다른 한 명은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소이현이 일부러 그런 거잖아. 오늘 모임 처음부터 끝까지 널 곤란하게 만들고 말로 계속 찔렀잖아. 그냥 참지 말고 맞서야지. 이렇게 화내고 나가면 네가 지는 거 아니야?”“맞아. 걔네가 널 웃음거리로 만들게 두면 안 돼.”이다은은 그들을 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었다.“너희 걱정 고마워. 그런데 내가 이런 자리,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사실은 나...”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은 씨?”이다은과 두 여동창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이다은은 숨이 멎을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걸음을 멈췄다.그녀를 불러세운 사람은 바로 남우영이었다.그는 세련된 정장을 입고 우아하고 당당한 걸음으로 다른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같은 정장을 입은 남성들이 뒤따르고 있었고, 그중에는 TV에서 종종 보던 유명 재계 인사들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이다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접대 자리인가? 고객 접대 때문에 온 건가? 그런데 이런 5성급 호텔까지 오는 건 좀 과하지 않나?’남우영은 뒤를 돌아 동행한 사람들에게 말했다.“여러분은 먼저
“이현이야말로 요즘 팔자가 폈지. 벌써 임신 5개월 차에다 이제 곧 엄마가 된다면서? 남편은 대기업 부장이라고 했나? 정말 인생 승자네!”동창들의 칭찬과 웃음소리에 이다은은 속이 점점 답답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술잔을 기울이며 홀로 식사를 이어갔다. 가끔씩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면 억지 미소로 대답할 뿐이었다.‘그래도 동창회 나와서 인맥 하나쯤 얻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내가 너무 큰 착각을 했구나.’이다은은 씁쓸하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이 자리에서 그저 우스갯거리일 뿐이었다. 오래된 동창들에게 심심풀이 웃음거리로 전락한 자신을 느끼며 그녀는 빨리 식사를 끝내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그러나 소이현이 다시 엉뚱한 소리를 했다.“다은아, 너 결혼했으면서도 우리 같은 동창들한테는 결혼식 초대도 안 했잖아? 차라리 오늘 이 자리를 네 결혼 피로연이라고 생각하고 우리한테 한턱내라!”주변 사람들도 맞장구쳤다.“그래! 나중에 우리가 축의금 보내줄게!”이다은은 젓가락질하던 손을 멈췄다. 입에 넣은 음식은 더 이상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눈앞의 화려한 음식과 고급 와인을 바라보며 얼어붙었다.‘이건 분명 5성급 호텔인데... 이 한 끼가 최소 몇백만 원은 나오겠지. 축의금? 안성시에서는 한 사람당 기껏해야 십만 원 정도로 알고 있는데... 열 명이면 백만 원?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바보는 아니잖아... 동창이라는 것들이 이렇게 괘씸할 수가!’그간 참아왔던 모욕과 조롱이 머릿속을 스쳤다. 가난 앞에서 자존심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녀의 돈까지 탐내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었다.이다은은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술잔을 들었다. 단숨에 술을 비워낸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소이현이
이다은은 하루 종일 구직 활동을 하며 여러 곳에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그녀는 전문대 졸업생에, 전공도 항공우주 기계 설비 수리 및 공학이라는 비주류 분야였기에 기업 입장에서 매력적인 지원자는 아니었다.그녀의 꿈은 항공우주연구소에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학력으로는 꿈조차 꾸기 어려웠다. 높은 곳에 닿을 수는 없고 낮은 곳을 바라보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포기하고 다시 쇼핑몰을 운영할지 고민하던 찰나,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다은아, 오랜만이다! 우리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한 번 모이자. 요즘 너무 연락도 안 하고 지냈잖아.”처음엔 당연히 거절하려 했지만, 그 찰나에 상대방이 덧붙였다.“다들 성공했더라. 큰 회사 사장도 있고 출세한 사람도 많아.”이다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인맥이라는 게 가장 큰 구직 네트워크라는데... 동창들 덕에 일자리를 소개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안성 호텔.화려하게 꾸며진 호텔의 한 룸에서 고등학교 동창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이다은이 룸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 반장이었다.“다은아! 오랜만이다!”반장이 반갑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이다은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먼저 와있던 동창들도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약간의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소이현도 앉아 있었다.이다은이 자리에 앉자마자 한 동창이 물었다.“다은아, 이현이가 너 결혼했다고 하던데 진짜야?”이다은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응... 결혼했어.”“우리도 동창인데, 결혼식에 초대도 안 한 거야?”“결혼식 안 올렸어.”“남편은 누구야? 우리도 아는 사람이야?”“너희는 모르는 사람이야.”이다은의 단호한 대답에 동창들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그러다 한 동창이 농담조로 물었다.“남편 뭐 하는 사람인데? 얼굴 좀 보여줘!”이다은은 말없이 고개를
아침 식사를 마친 남우영은 출근 준비를 끝내고 문을 나섰다.이다은은 그를 아래까지 배웅하며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손을 흔들었다.“운전 조심하세요!”남우영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배웅했다.그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이다은은 천천히 돌아서서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록 집이 8층이었지만 그녀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는 것을 운동 삼아 여겼다.집에 돌아오자마자 이다은은 부지런히 집안일을 시작했다.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하고 빨래를 널고 다 마른 옷을 개며 하루의 일과를 착실히 이어갔다. 집안일을 마친 후, 거울 앞에서 간단히 화장을 고치고 이력서를 챙겨 구직 활동을 위해 집을 나섰다.에이스타 그룹.남우영이 1년 전 창립한 에이스타 그룹은 신흥 기업으로 단기간에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주요 사업 영역은 인터넷 기반 쇼핑 플랫폼, 온라인 방송, 항공우주 운송, 그리고 가장 수익성이 높은 게임 개발 및 e스포츠 팀 운영이었다.남우영은 젊은 나이에 천억 원대의 자산을 일구며 사업계의 거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성공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다양했다.“타고난 금수저잖아. 부모의 배경 덕이겠지.”“재벌가 외삼촌의 후광을 업은 거야.”“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하지만 그런 평가는 대부분 그를 직접 본 적 없는 이들의 추측에 불과했다.넓은 사무실에서.남우영은 전면 유리창 앞에 서서 도심의 화려한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억짜리 계약조차 그의 관심 밖이었고 지금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고작 몇백만 원짜리 일자리였다.‘괜찮은 일자리를 찾았으려나...’그는 아내 이다은의 구직 결과가 궁금할 뿐이었다.고요를 깨우는 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책상으로 걸어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대학 동창 진영수였다.“여보세요.”“우영아, 바쁘지 않지?”“그냥 평소랑 똑같아. 무슨 일이야?”“사실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 네가 도와주면 좋겠어.”“뭔데
이다은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방금 자신이 내뱉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얼굴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고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책망했다.‘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진짜 창피해서 어떻게 눈을 마주쳐.’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고 방 안은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남우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불을 껐고 방은 어둠 속에 잠겼다.고요한 공간에는 서로의 고른 숨소리만이 은은하게 울렸다.남우영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잘 이해했기에 더 이상 그 주제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침묵을 유지했지만, 그 밤은 그에게도 쉽지 않은 밤이었다.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 전, 이다은은 부지런히 일어나 하루를 준비했다. 남우영의 와이셔츠를 다림질하고 그의 구두를 반짝이게 닦아두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차린 뒤에는 정성스럽게 점심 도시락까지 준비했다.남우영이 일어났을 때, 이다은은 이미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림질을 마친 옷은 눈에 잘 띄는 곳에 걸려 있었고 그것을 보자 남우영은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꼈다.남우영이 부엌으로 들어가자, 이다은은 앞치마를 두른 채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아침 준비 다 했어요. 어서 드세요.”이다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남우영은 테이블 위에 정성껏 준비된 잡곡밥과 수제 만두, 그리고 도시락을 보고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고 눈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이렇게까지 준비하려면...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난 거예요?”“괜찮아요. 원래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서요.”이다은은 가볍게 대답하며 앞치마를 벗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어제 팔려고 갖고 나갔던 물건들을 전부 도시관리 공무원들한테 몰수당했어요. 벌금 내야 하는데 그냥 포기했어요. 쇼핑몰도 문 닫았고... 오늘부터 일자리 좀 알아보려고요.”남우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굳이 일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혼자 벌어도 우리 가족 생계는 책임질 수 있어요.”
“뭔가 떠오르면 그때 말할게요.”이다은은 바닥을 닦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녀는 남우영에게 감정적 유대감도, 특별한 기대도 없었다. 결혼은 정하늘을 마음에서 지웠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한 단순한 선택에 불과했다.늦은 밤, 샤워를 마치고 잠옷 차림으로 방으로 들어간 이다은은 문을 열자마자 뜻밖의 광경에 발이 멈췄다.눈앞에는 옷을 갈아입고 있는 남우영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탄탄한 근육, 완벽한 라인, 건강하게 빛나는 피부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순간 놀라 굳어버린 이다은은 이내 정신이 번쩍 들며 황급히 문을 닫았다.‘쾅!’남우영은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멈칫하던 그의 눈빛은 살짝 어두워졌다.문밖에 선 이다은은 얼굴이 달아오른 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방금 본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진짜 저 몸이 현실이야? 드라마도 아니고...’평소 조용하던 마음이 갑자기 요동치며 얼굴이 화끈거려 두 손으로 뺨을 감싸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던 순간 문이 열렸다.이다은은 놀라 고개를 들었고 옷을 다 입은 남우영이 불쾌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물었다.“왜 숨어요?”“저... 그게...”이다은은 당황한 나머지 변명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남편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까지 큰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미안해요. 아직 좀 익숙하지 않아서요.”남우영은 한 손으로 그녀를 방 안으로 이끌며 문을 닫았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다음부터 이런 상황엔 밖으로 도망치지 마요.”“그럴게요...”이다은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심장을 부여잡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은 갑자기 작아진 듯했고 공기가 더 뜨겁게 느껴졌다.그녀는 묘한 긴장감과 어색함에 몸을 움츠렸다.“얼른 쉬어요.”“다은 씨도요.”이다은은 서둘러 이불을 들어 올리고 침대에 누웠고 남우영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침대 가장자리에 섰다.이다은은 그가 자신을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