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은의 얼굴에 물을 끼얹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큰어머니였다. 큰어머니는 눈에 살기를 띤 채 목소리를 높였다.“이다은, 가서 네 엄마한테 전해! 한 번만 더 우리 아들한테 귀찮게 굴면 가만 안 둔다고! 누가 더 독한지 한번 보자고!”이다은은 화를 삼키며 얼굴에 범벅진 더러운 물을 손으로 닦아냈다.큰아버지 가족이 집안 조상 대대로 물려준 집을 강제로 빼앗았을 때도, 부모님이 큰아버지 부부와 법정까지 가며 싸웠을 때도 그녀는 입을 닫고 참았다. 하지만 이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장애를 가졌고 어머니도 능력 없으며 그녀 또한 힘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끝없이 괴롭혀 왔다.지금까지의 다툼은 묵묵히 견뎠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에게 직접 더러운 물을 끼얹는 모욕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조상 대대로 내려온 집도, 내 자존심도 모자라 이제는 좋아했던 남자까지 뺏겼고... 내 인생이 이렇게 실패로 끝날 운명인 거야?’이다은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큰어머니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그리고 그녀를 곧장 더러운 물이 고인 도랑 쪽으로 끌고 갔다.“아야! 아야야야! 이 계집애가! 어디 어른한테! 이거 좀 놔! 아프다니까!”큰어머니는 이다은이 여느 때처럼 참기만 할 줄 알고 있었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끌려갔다.이다은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악취가 나고 온갖 오물이 떠다니는 얕은 도랑 속으로 밀어 넣었다.큰어머니는 도랑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고 이내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도랑에 빠진 큰어머니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울부짖었고 이를 본 이웃들은 이다은을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이다은은 주변의 시선을 견디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집! 조상 대대로 내려온 집을 강제로 빼앗은 건 사실이잖아요. 이미 빼앗겼으니 되찾을 방법은 없겠죠. 하지만 적어도 조용히 살았어야 하지 않나요? 제가 착하다고 만만하게 보지 마세요. 계속해서 우리 가족들을 괴롭히면 저도 어찌 될지 몰라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경고할게요. 우리 가족 괴롭히지 마세요.
이다은이 뒤돌아보자, 정하늘이 손수건을 꺼내 들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 얼굴의 물기를 닦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우리 여전히 가장 좋은 친구잖아...”이다은은 급히 손수건을 받아 들며 불편한 표정으로 답했다.“임신한 아내 두고 이렇게 쫓아오면 어쩌라는 거야? 하늘아,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정하늘은 당황한 듯 말했다.“그냥 네가 걱정돼서 온 거야.”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긴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누가 또 괴롭히면 바로 나한테 말해. 내가 항상 널 지켜줄게. 난 여전히...”“필요 없습니다!”이다은 대신, 누군가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낯선 발걸음 소리가 계단 아래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다은과 정하늘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검은색 수트를 입은 남우영이 계단을 내려오며 우아하고 품격 있는 분위기를 풍기며 등장했다. 몇 번 본 적 있는 모습이었지만, 이다은은 다시 한번 그의 멋진 모습에 숨이 멎는 듯했다.남우영은 그녀에게로 다가와 젖은 어깨를 한 팔로 가볍게 감싸며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고 곧은 자세에서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느껴졌다.“내 아내는 내가 지킬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이다은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심장이 요동치고 몸이 굳어졌다. 그의 품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정하늘은 충격을 받은 듯 남우영을 바라보다 이다은에게 시선을 돌렸다.“너 결혼했어?”이다은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황당해하고 있자, 남우영이 대신 담담히 대답했다.“네. 저희는 이미 결혼했습니다.”남우영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이다은은 정신을 차리며 그의 품에서 황급히 벗어났다.“괜찮아요. 남우 씨는 출근 준비 중 아니었어요?”정하늘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고 이를 악물며 분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다은아, 나한테 네 남편 소개 정
“나 정말 바빠. 너희 부부 문제에 신경 쓸 시간도 없으니까 제발 나를 끌어들이지 말아줘.”이다은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마치고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갔다.소이현은 울먹이며 등 돌려 돌아가며 중얼거렸다.“이혼하고 싶은 거면 얘기해. 애도 필요 없어.”정하늘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남우영을 향해 쏘아붙였다.“다은이는 아무 남자나 만나서 결혼할 사람이 아니에요. 이건 분명 나한테 복수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그는 말을 끝내고 소이현을 쫓아갔다.남우영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이다은은 집에 돌아와 더럽게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살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불공평해도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고 울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낙타도 마지막 한 줌의 짚에 짓눌려 무너진다더니... 나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 건가 봐.’정하늘과 소이현을 만날 때마다 이다은의 마음은 찢어질 듯한 고통으로 무너졌다. 무엇보다, 그녀는 여전히 정하늘을 완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고, 그 사실이 더욱 그녀를 아프게 했다.눈물을 훔친 뒤, 이다은은 큰 짐을 챙겨 거리로 나섰다. 생계를 위해 길거리 장사를 시작해야 했지만 이번에도 불운은 그녀를 비껴가지 않았다.물건을 진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단속반이 들이닥쳐 그녀의 모든 물건을 몰수해 버렸다. 남은 것은 텅 빈 손과 벌금 고지서 한 장뿐이었다.“물건을 되찾고 싶으면 사무소로 와서 각서를 쓰고 벌금을 내세요.”단속 공무원은 형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몰수된 물건의 가치는 200만 원 이상이었고, 이를 되찾으려면 100만 원의 벌금을 내야 했다.이다은은 벌금 고지서를 손에 쥔 채 도로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속에서 마음은 텅 비었고,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어지러웠다.바람이 살짝 불어오며 그녀의 머리칼을 흩날리자, 마음 한쪽에는 싸늘한 허탈감이 스며들었다.‘사는 게 왜 이렇
이다은은 부엌으로 들어가 채소를 다듬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아빠, 여기 제가 할게요. 아빠는 나가서 좀 쉬세요.”이적은 손을 멈추고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하루 종일 일하고 왔잖아. 피곤할 텐데 내가 할 테니 너라도 좀 쉬어.”“저 안 피곤해요.”이다은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이적을 부축해 부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오늘 저녁은 제가 할게요.”이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부탁할게.”이적은 다리가 없어 과거에는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이동했지만, 몇 년 전 몇백만 원을 들여 의족을 맞췄다. 그러나 품질이 나빠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고 지금도 오래 서 있으면 다리가 아프고 걸을 때마다 절뚝거렸다.그는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쉬었고 이다은은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했다.30분 뒤, 간단한 두 가지 반찬과 밥 두 그릇이 식탁 위에 놓였다.“아빠, 밥 먹어요.”이다은이 부르자 이적은 식탁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아 식탁 위 음식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이다은은 자리에 앉아 젓가락으로 삼겹살 한 조각을 집어 아버지의 밥그릇에 넣으며 말했다.“아빠, 드세요.”그러나 이적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를 본 이다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요? 어디 안 좋으세요?”이적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다은아, 너 혹시 뭐 잊은 거 없니?”“제가요? 뭘요?”이다은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이적은 웃으며 말했다.“혹시 네가 결혼한 거 깜빡한 거 아니야?”이다은은 순간 멍해졌다.‘아차! 깜빡했네!’결혼했다는 사실이 아직 마음에 와닿지 않은 그녀는 늘 하던 대로 두 사람 분량의 반찬만 준비한 것이었다.그녀는 당황하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서둘러 말했다.“제가 얼른 계란이라도 더 부칠게요. 계란후라이 괜찮으시죠?”“좋지. 몇 개 더 부쳐. 남우는 체격도 크고 잘 먹게 생겼더라.”이적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이다은은 부엌으로 들어가 계란 여섯 개를 부쳤다. 계란 후라이를 들
이다은은 바닥을 닦으며 미소를 띤 채 말했다.“괜찮아요. 남우 씨는 회사에서 고생하는데 퇴근하면 편히 쉬어야죠. 이런 건 제가 하면 돼요.”남우영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다은 씨,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요?”이다은은 바닥을 닦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무슨 얘긴데요?”남우영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서로 조금 더 알아가고 익숙해졌으면 좋겠어요. 결혼하고 나서 적응 기간을 줄이는 게 낫지 않을까요?”이다은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자, 남우영은 따뜻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우리가 각자 바쁘다 보니,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은 것 같아요.”이다은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평생이 함께할 건데, 남우 씨는 그렇게 빨리 알아가야만 안심이 돼요?”남우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직설적으로 물었다.“다은 씨, 정하늘 씨랑 어떤 사이였어요? 전 남자 친구였어요?”이다은은 손을 멈추고 책상에 기대며 차분히 대답했다.“아니요. 그냥 평범한 친구였을 뿐이에요.”남우영은 다시 물었다.“그럼 그 사람 부인은요? 소이현 씨랑은 무슨 관계였죠?”“예전에 친했었어요. 지금은 그냥 얼굴 아는 이웃이나 다름없어요.”“그 사람들 아직 근처에 살아요?”“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동네 친구들이니까요.”남우영은 잠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아직도 그 사람 좋아해요?”이다은은 차갑게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저는 이미 남우 씨랑 결혼했잖아요. 왜 그런 질문을 하죠?”남우영은 표정을 굳히며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아직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예요?”이다은은 고개를 숙이며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단호히 말했다.“아니에요.”남우영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그렇다면 앞으로 그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세요.”이다은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요?”남우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속이 시커먼 여자에 멍청한척하는 능청스러운 남자더라고요. 다은 씨가 두 사람을 감당하기
“뭔가 떠오르면 그때 말할게요.”이다은은 바닥을 닦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녀는 남우영에게 감정적 유대감도, 특별한 기대도 없었다. 결혼은 정하늘을 마음에서 지웠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한 단순한 선택에 불과했다.늦은 밤, 샤워를 마치고 잠옷 차림으로 방으로 들어간 이다은은 문을 열자마자 뜻밖의 광경에 발이 멈췄다.눈앞에는 옷을 갈아입고 있는 남우영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탄탄한 근육, 완벽한 라인, 건강하게 빛나는 피부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순간 놀라 굳어버린 이다은은 이내 정신이 번쩍 들며 황급히 문을 닫았다.‘쾅!’남우영은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멈칫하던 그의 눈빛은 살짝 어두워졌다.문밖에 선 이다은은 얼굴이 달아오른 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방금 본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진짜 저 몸이 현실이야? 드라마도 아니고...’평소 조용하던 마음이 갑자기 요동치며 얼굴이 화끈거려 두 손으로 뺨을 감싸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던 순간 문이 열렸다.이다은은 놀라 고개를 들었고 옷을 다 입은 남우영이 불쾌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물었다.“왜 숨어요?”“저... 그게...”이다은은 당황한 나머지 변명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남편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까지 큰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미안해요. 아직 좀 익숙하지 않아서요.”남우영은 한 손으로 그녀를 방 안으로 이끌며 문을 닫았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다음부터 이런 상황엔 밖으로 도망치지 마요.”“그럴게요...”이다은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심장을 부여잡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은 갑자기 작아진 듯했고 공기가 더 뜨겁게 느껴졌다.그녀는 묘한 긴장감과 어색함에 몸을 움츠렸다.“얼른 쉬어요.”“다은 씨도요.”이다은은 서둘러 이불을 들어 올리고 침대에 누웠고 남우영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침대 가장자리에 섰다.이다은은 그가 자신을 보고
이다은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방금 자신이 내뱉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얼굴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고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책망했다.‘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진짜 창피해서 어떻게 눈을 마주쳐.’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고 방 안은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남우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불을 껐고 방은 어둠 속에 잠겼다.고요한 공간에는 서로의 고른 숨소리만이 은은하게 울렸다.남우영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잘 이해했기에 더 이상 그 주제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침묵을 유지했지만, 그 밤은 그에게도 쉽지 않은 밤이었다.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 전, 이다은은 부지런히 일어나 하루를 준비했다. 남우영의 와이셔츠를 다림질하고 그의 구두를 반짝이게 닦아두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차린 뒤에는 정성스럽게 점심 도시락까지 준비했다.남우영이 일어났을 때, 이다은은 이미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림질을 마친 옷은 눈에 잘 띄는 곳에 걸려 있었고 그것을 보자 남우영은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꼈다.남우영이 부엌으로 들어가자, 이다은은 앞치마를 두른 채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아침 준비 다 했어요. 어서 드세요.”이다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남우영은 테이블 위에 정성껏 준비된 잡곡밥과 수제 만두, 그리고 도시락을 보고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고 눈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이렇게까지 준비하려면...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난 거예요?”“괜찮아요. 원래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서요.”이다은은 가볍게 대답하며 앞치마를 벗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어제 팔려고 갖고 나갔던 물건들을 전부 도시관리 공무원들한테 몰수당했어요. 벌금 내야 하는데 그냥 포기했어요. 쇼핑몰도 문 닫았고... 오늘부터 일자리 좀 알아보려고요.”남우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굳이 일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혼자 벌어도 우리 가족 생계는 책임질 수 있어요.”
아침 식사를 마친 남우영은 출근 준비를 끝내고 문을 나섰다.이다은은 그를 아래까지 배웅하며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손을 흔들었다.“운전 조심하세요!”남우영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배웅했다.그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이다은은 천천히 돌아서서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록 집이 8층이었지만 그녀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는 것을 운동 삼아 여겼다.집에 돌아오자마자 이다은은 부지런히 집안일을 시작했다.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하고 빨래를 널고 다 마른 옷을 개며 하루의 일과를 착실히 이어갔다. 집안일을 마친 후, 거울 앞에서 간단히 화장을 고치고 이력서를 챙겨 구직 활동을 위해 집을 나섰다.에이스타 그룹.남우영이 1년 전 창립한 에이스타 그룹은 신흥 기업으로 단기간에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주요 사업 영역은 인터넷 기반 쇼핑 플랫폼, 온라인 방송, 항공우주 운송, 그리고 가장 수익성이 높은 게임 개발 및 e스포츠 팀 운영이었다.남우영은 젊은 나이에 천억 원대의 자산을 일구며 사업계의 거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성공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다양했다.“타고난 금수저잖아. 부모의 배경 덕이겠지.”“재벌가 외삼촌의 후광을 업은 거야.”“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하지만 그런 평가는 대부분 그를 직접 본 적 없는 이들의 추측에 불과했다.넓은 사무실에서.남우영은 전면 유리창 앞에 서서 도심의 화려한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억짜리 계약조차 그의 관심 밖이었고 지금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고작 몇백만 원짜리 일자리였다.‘괜찮은 일자리를 찾았으려나...’그는 아내 이다은의 구직 결과가 궁금할 뿐이었다.고요를 깨우는 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책상으로 걸어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대학 동창 진영수였다.“여보세요.”“우영아, 바쁘지 않지?”“그냥 평소랑 똑같아. 무슨 일이야?”“사실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 네가 도와주면 좋겠어.”“뭔데
이다은은 하루 종일 구직 활동을 하며 여러 곳에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그녀는 전문대 졸업생에, 전공도 항공우주 기계 설비 수리 및 공학이라는 비주류 분야였기에 기업 입장에서 매력적인 지원자는 아니었다.그녀의 꿈은 항공우주연구소에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학력으로는 꿈조차 꾸기 어려웠다. 높은 곳에 닿을 수는 없고 낮은 곳을 바라보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포기하고 다시 쇼핑몰을 운영할지 고민하던 찰나,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다은아, 오랜만이다! 우리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한 번 모이자. 요즘 너무 연락도 안 하고 지냈잖아.”처음엔 당연히 거절하려 했지만, 그 찰나에 상대방이 덧붙였다.“다들 성공했더라. 큰 회사 사장도 있고 출세한 사람도 많아.”이다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인맥이라는 게 가장 큰 구직 네트워크라는데... 동창들 덕에 일자리를 소개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안성 호텔.화려하게 꾸며진 호텔의 한 룸에서 고등학교 동창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이다은이 룸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 반장이었다.“다은아! 오랜만이다!”반장이 반갑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이다은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먼저 와있던 동창들도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약간의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소이현도 앉아 있었다.이다은이 자리에 앉자마자 한 동창이 물었다.“다은아, 이현이가 너 결혼했다고 하던데 진짜야?”이다은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응... 결혼했어.”“우리도 동창인데, 결혼식에 초대도 안 한 거야?”“결혼식 안 올렸어.”“남편은 누구야? 우리도 아는 사람이야?”“너희는 모르는 사람이야.”이다은의 단호한 대답에 동창들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그러다 한 동창이 농담조로 물었다.“남편 뭐 하는 사람인데? 얼굴 좀 보여줘!”이다은은 말없이 고개를
아침 식사를 마친 남우영은 출근 준비를 끝내고 문을 나섰다.이다은은 그를 아래까지 배웅하며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손을 흔들었다.“운전 조심하세요!”남우영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배웅했다.그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이다은은 천천히 돌아서서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록 집이 8층이었지만 그녀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는 것을 운동 삼아 여겼다.집에 돌아오자마자 이다은은 부지런히 집안일을 시작했다.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하고 빨래를 널고 다 마른 옷을 개며 하루의 일과를 착실히 이어갔다. 집안일을 마친 후, 거울 앞에서 간단히 화장을 고치고 이력서를 챙겨 구직 활동을 위해 집을 나섰다.에이스타 그룹.남우영이 1년 전 창립한 에이스타 그룹은 신흥 기업으로 단기간에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주요 사업 영역은 인터넷 기반 쇼핑 플랫폼, 온라인 방송, 항공우주 운송, 그리고 가장 수익성이 높은 게임 개발 및 e스포츠 팀 운영이었다.남우영은 젊은 나이에 천억 원대의 자산을 일구며 사업계의 거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성공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다양했다.“타고난 금수저잖아. 부모의 배경 덕이겠지.”“재벌가 외삼촌의 후광을 업은 거야.”“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하지만 그런 평가는 대부분 그를 직접 본 적 없는 이들의 추측에 불과했다.넓은 사무실에서.남우영은 전면 유리창 앞에 서서 도심의 화려한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억짜리 계약조차 그의 관심 밖이었고 지금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고작 몇백만 원짜리 일자리였다.‘괜찮은 일자리를 찾았으려나...’그는 아내 이다은의 구직 결과가 궁금할 뿐이었다.고요를 깨우는 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책상으로 걸어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대학 동창 진영수였다.“여보세요.”“우영아, 바쁘지 않지?”“그냥 평소랑 똑같아. 무슨 일이야?”“사실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 네가 도와주면 좋겠어.”“뭔데
이다은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방금 자신이 내뱉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얼굴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고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책망했다.‘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진짜 창피해서 어떻게 눈을 마주쳐.’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고 방 안은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남우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불을 껐고 방은 어둠 속에 잠겼다.고요한 공간에는 서로의 고른 숨소리만이 은은하게 울렸다.남우영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잘 이해했기에 더 이상 그 주제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침묵을 유지했지만, 그 밤은 그에게도 쉽지 않은 밤이었다.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 전, 이다은은 부지런히 일어나 하루를 준비했다. 남우영의 와이셔츠를 다림질하고 그의 구두를 반짝이게 닦아두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차린 뒤에는 정성스럽게 점심 도시락까지 준비했다.남우영이 일어났을 때, 이다은은 이미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림질을 마친 옷은 눈에 잘 띄는 곳에 걸려 있었고 그것을 보자 남우영은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꼈다.남우영이 부엌으로 들어가자, 이다은은 앞치마를 두른 채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아침 준비 다 했어요. 어서 드세요.”이다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남우영은 테이블 위에 정성껏 준비된 잡곡밥과 수제 만두, 그리고 도시락을 보고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고 눈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이렇게까지 준비하려면...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난 거예요?”“괜찮아요. 원래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서요.”이다은은 가볍게 대답하며 앞치마를 벗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어제 팔려고 갖고 나갔던 물건들을 전부 도시관리 공무원들한테 몰수당했어요. 벌금 내야 하는데 그냥 포기했어요. 쇼핑몰도 문 닫았고... 오늘부터 일자리 좀 알아보려고요.”남우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굳이 일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혼자 벌어도 우리 가족 생계는 책임질 수 있어요.”
“뭔가 떠오르면 그때 말할게요.”이다은은 바닥을 닦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녀는 남우영에게 감정적 유대감도, 특별한 기대도 없었다. 결혼은 정하늘을 마음에서 지웠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한 단순한 선택에 불과했다.늦은 밤, 샤워를 마치고 잠옷 차림으로 방으로 들어간 이다은은 문을 열자마자 뜻밖의 광경에 발이 멈췄다.눈앞에는 옷을 갈아입고 있는 남우영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탄탄한 근육, 완벽한 라인, 건강하게 빛나는 피부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순간 놀라 굳어버린 이다은은 이내 정신이 번쩍 들며 황급히 문을 닫았다.‘쾅!’남우영은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멈칫하던 그의 눈빛은 살짝 어두워졌다.문밖에 선 이다은은 얼굴이 달아오른 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방금 본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진짜 저 몸이 현실이야? 드라마도 아니고...’평소 조용하던 마음이 갑자기 요동치며 얼굴이 화끈거려 두 손으로 뺨을 감싸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던 순간 문이 열렸다.이다은은 놀라 고개를 들었고 옷을 다 입은 남우영이 불쾌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물었다.“왜 숨어요?”“저... 그게...”이다은은 당황한 나머지 변명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남편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까지 큰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미안해요. 아직 좀 익숙하지 않아서요.”남우영은 한 손으로 그녀를 방 안으로 이끌며 문을 닫았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다음부터 이런 상황엔 밖으로 도망치지 마요.”“그럴게요...”이다은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심장을 부여잡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은 갑자기 작아진 듯했고 공기가 더 뜨겁게 느껴졌다.그녀는 묘한 긴장감과 어색함에 몸을 움츠렸다.“얼른 쉬어요.”“다은 씨도요.”이다은은 서둘러 이불을 들어 올리고 침대에 누웠고 남우영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침대 가장자리에 섰다.이다은은 그가 자신을 보고
이다은은 바닥을 닦으며 미소를 띤 채 말했다.“괜찮아요. 남우 씨는 회사에서 고생하는데 퇴근하면 편히 쉬어야죠. 이런 건 제가 하면 돼요.”남우영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다은 씨,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요?”이다은은 바닥을 닦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무슨 얘긴데요?”남우영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서로 조금 더 알아가고 익숙해졌으면 좋겠어요. 결혼하고 나서 적응 기간을 줄이는 게 낫지 않을까요?”이다은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자, 남우영은 따뜻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우리가 각자 바쁘다 보니,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은 것 같아요.”이다은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평생이 함께할 건데, 남우 씨는 그렇게 빨리 알아가야만 안심이 돼요?”남우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직설적으로 물었다.“다은 씨, 정하늘 씨랑 어떤 사이였어요? 전 남자 친구였어요?”이다은은 손을 멈추고 책상에 기대며 차분히 대답했다.“아니요. 그냥 평범한 친구였을 뿐이에요.”남우영은 다시 물었다.“그럼 그 사람 부인은요? 소이현 씨랑은 무슨 관계였죠?”“예전에 친했었어요. 지금은 그냥 얼굴 아는 이웃이나 다름없어요.”“그 사람들 아직 근처에 살아요?”“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동네 친구들이니까요.”남우영은 잠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아직도 그 사람 좋아해요?”이다은은 차갑게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저는 이미 남우 씨랑 결혼했잖아요. 왜 그런 질문을 하죠?”남우영은 표정을 굳히며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아직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예요?”이다은은 고개를 숙이며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단호히 말했다.“아니에요.”남우영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그렇다면 앞으로 그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세요.”이다은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요?”남우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속이 시커먼 여자에 멍청한척하는 능청스러운 남자더라고요. 다은 씨가 두 사람을 감당하기
이다은은 부엌으로 들어가 채소를 다듬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아빠, 여기 제가 할게요. 아빠는 나가서 좀 쉬세요.”이적은 손을 멈추고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하루 종일 일하고 왔잖아. 피곤할 텐데 내가 할 테니 너라도 좀 쉬어.”“저 안 피곤해요.”이다은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이적을 부축해 부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오늘 저녁은 제가 할게요.”이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부탁할게.”이적은 다리가 없어 과거에는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이동했지만, 몇 년 전 몇백만 원을 들여 의족을 맞췄다. 그러나 품질이 나빠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고 지금도 오래 서 있으면 다리가 아프고 걸을 때마다 절뚝거렸다.그는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쉬었고 이다은은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했다.30분 뒤, 간단한 두 가지 반찬과 밥 두 그릇이 식탁 위에 놓였다.“아빠, 밥 먹어요.”이다은이 부르자 이적은 식탁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아 식탁 위 음식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이다은은 자리에 앉아 젓가락으로 삼겹살 한 조각을 집어 아버지의 밥그릇에 넣으며 말했다.“아빠, 드세요.”그러나 이적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를 본 이다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요? 어디 안 좋으세요?”이적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다은아, 너 혹시 뭐 잊은 거 없니?”“제가요? 뭘요?”이다은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이적은 웃으며 말했다.“혹시 네가 결혼한 거 깜빡한 거 아니야?”이다은은 순간 멍해졌다.‘아차! 깜빡했네!’결혼했다는 사실이 아직 마음에 와닿지 않은 그녀는 늘 하던 대로 두 사람 분량의 반찬만 준비한 것이었다.그녀는 당황하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서둘러 말했다.“제가 얼른 계란이라도 더 부칠게요. 계란후라이 괜찮으시죠?”“좋지. 몇 개 더 부쳐. 남우는 체격도 크고 잘 먹게 생겼더라.”이적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이다은은 부엌으로 들어가 계란 여섯 개를 부쳤다. 계란 후라이를 들
“나 정말 바빠. 너희 부부 문제에 신경 쓸 시간도 없으니까 제발 나를 끌어들이지 말아줘.”이다은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마치고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갔다.소이현은 울먹이며 등 돌려 돌아가며 중얼거렸다.“이혼하고 싶은 거면 얘기해. 애도 필요 없어.”정하늘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남우영을 향해 쏘아붙였다.“다은이는 아무 남자나 만나서 결혼할 사람이 아니에요. 이건 분명 나한테 복수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그는 말을 끝내고 소이현을 쫓아갔다.남우영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이다은은 집에 돌아와 더럽게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살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불공평해도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고 울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낙타도 마지막 한 줌의 짚에 짓눌려 무너진다더니... 나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 건가 봐.’정하늘과 소이현을 만날 때마다 이다은의 마음은 찢어질 듯한 고통으로 무너졌다. 무엇보다, 그녀는 여전히 정하늘을 완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고, 그 사실이 더욱 그녀를 아프게 했다.눈물을 훔친 뒤, 이다은은 큰 짐을 챙겨 거리로 나섰다. 생계를 위해 길거리 장사를 시작해야 했지만 이번에도 불운은 그녀를 비껴가지 않았다.물건을 진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단속반이 들이닥쳐 그녀의 모든 물건을 몰수해 버렸다. 남은 것은 텅 빈 손과 벌금 고지서 한 장뿐이었다.“물건을 되찾고 싶으면 사무소로 와서 각서를 쓰고 벌금을 내세요.”단속 공무원은 형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몰수된 물건의 가치는 200만 원 이상이었고, 이를 되찾으려면 100만 원의 벌금을 내야 했다.이다은은 벌금 고지서를 손에 쥔 채 도로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속에서 마음은 텅 비었고,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어지러웠다.바람이 살짝 불어오며 그녀의 머리칼을 흩날리자, 마음 한쪽에는 싸늘한 허탈감이 스며들었다.‘사는 게 왜 이렇
이다은이 뒤돌아보자, 정하늘이 손수건을 꺼내 들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 얼굴의 물기를 닦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우리 여전히 가장 좋은 친구잖아...”이다은은 급히 손수건을 받아 들며 불편한 표정으로 답했다.“임신한 아내 두고 이렇게 쫓아오면 어쩌라는 거야? 하늘아,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정하늘은 당황한 듯 말했다.“그냥 네가 걱정돼서 온 거야.”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긴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누가 또 괴롭히면 바로 나한테 말해. 내가 항상 널 지켜줄게. 난 여전히...”“필요 없습니다!”이다은 대신, 누군가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낯선 발걸음 소리가 계단 아래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다은과 정하늘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검은색 수트를 입은 남우영이 계단을 내려오며 우아하고 품격 있는 분위기를 풍기며 등장했다. 몇 번 본 적 있는 모습이었지만, 이다은은 다시 한번 그의 멋진 모습에 숨이 멎는 듯했다.남우영은 그녀에게로 다가와 젖은 어깨를 한 팔로 가볍게 감싸며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고 곧은 자세에서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느껴졌다.“내 아내는 내가 지킬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이다은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심장이 요동치고 몸이 굳어졌다. 그의 품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정하늘은 충격을 받은 듯 남우영을 바라보다 이다은에게 시선을 돌렸다.“너 결혼했어?”이다은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황당해하고 있자, 남우영이 대신 담담히 대답했다.“네. 저희는 이미 결혼했습니다.”남우영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이다은은 정신을 차리며 그의 품에서 황급히 벗어났다.“괜찮아요. 남우 씨는 출근 준비 중 아니었어요?”정하늘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고 이를 악물며 분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다은아, 나한테 네 남편 소개 정
이다은의 얼굴에 물을 끼얹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큰어머니였다. 큰어머니는 눈에 살기를 띤 채 목소리를 높였다.“이다은, 가서 네 엄마한테 전해! 한 번만 더 우리 아들한테 귀찮게 굴면 가만 안 둔다고! 누가 더 독한지 한번 보자고!”이다은은 화를 삼키며 얼굴에 범벅진 더러운 물을 손으로 닦아냈다.큰아버지 가족이 집안 조상 대대로 물려준 집을 강제로 빼앗았을 때도, 부모님이 큰아버지 부부와 법정까지 가며 싸웠을 때도 그녀는 입을 닫고 참았다. 하지만 이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장애를 가졌고 어머니도 능력 없으며 그녀 또한 힘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끝없이 괴롭혀 왔다.지금까지의 다툼은 묵묵히 견뎠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에게 직접 더러운 물을 끼얹는 모욕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조상 대대로 내려온 집도, 내 자존심도 모자라 이제는 좋아했던 남자까지 뺏겼고... 내 인생이 이렇게 실패로 끝날 운명인 거야?’이다은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큰어머니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그리고 그녀를 곧장 더러운 물이 고인 도랑 쪽으로 끌고 갔다.“아야! 아야야야! 이 계집애가! 어디 어른한테! 이거 좀 놔! 아프다니까!”큰어머니는 이다은이 여느 때처럼 참기만 할 줄 알고 있었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끌려갔다.이다은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악취가 나고 온갖 오물이 떠다니는 얕은 도랑 속으로 밀어 넣었다.큰어머니는 도랑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고 이내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도랑에 빠진 큰어머니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울부짖었고 이를 본 이웃들은 이다은을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이다은은 주변의 시선을 견디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집! 조상 대대로 내려온 집을 강제로 빼앗은 건 사실이잖아요. 이미 빼앗겼으니 되찾을 방법은 없겠죠. 하지만 적어도 조용히 살았어야 하지 않나요? 제가 착하다고 만만하게 보지 마세요. 계속해서 우리 가족들을 괴롭히면 저도 어찌 될지 몰라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경고할게요. 우리 가족 괴롭히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