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 모두 다 가는데 네가 왜 안 가?”남우영은 차량에 시동을 걸고 훌쩍 떠났다.남서연이 묵묵히 말이 없자 남우영이 나지막이 달랬다.“오빠가 우리 서연이 데리고 가서 예쁜 메이크업 받고 예쁜 드레스 사줄 테니까 오빠랑 파티에 가자. 응?”남서연의 성격은 늘 부드럽고 유순해서 몇몇 오빠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으리으리한 백가의 별장.화려한 크리스털 램프가 파티장을 환하게 비추며 화려하고 호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은은하고 듣기 좋은 음악이 흐르고 파티장은 사람들로 북적이며 서로 술잔이 오갔다.M국 갑부의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명문 귀족과 권세 있는 사람들이었다.남씨 가문 전체가 모두 참석했다.남서연의 몇몇 큰아버지들이 둘러앉아 백정우에게 불평했다.셋째 큰아버지: “대체 서연이에게 무슨 약을 먹였기에 애가 하필 이 집안 회사에서 일하겠다는 거예요?”백정우는 억울하다는 듯 웃었다.“난 서연이가 우리 회사에 와서 일하는 것도 몰랐어.”첫째 큰아버지: “내가 돈을 주면서 창업하라고 해도 거절하고 우리 회사에 와서 부대표를 맡으라고 해도 거절했어요.”그러자 둘째 큰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내가 대박 IP를 만들어 배우로 데뷔시키고 잘나가게 밀어주겠다는데도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굳이 ND에 들어가서 디자이너가 돼서 이 집안을 위해 일하겠다잖아요.”첫째 큰아버지: “내 생각에 우리 서연이는 출근하지 말아야 해요. 회사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들어요? 우리가 서연이를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백정우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연이 왔네.”모든 사람의 시선이 입구에 쏠렸다.남서연은 남우영의 손을 잡고 들어왔는데 베이지 컬러의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당당하고 귀여운 매력을 뽐냈다.첫째 큰아버지가 두 사람에게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서연아, 큰아버지가 우리보고 오라고 하셔.”남서연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몇몇 큰아버지들을 바라보았다.그때 유니
남자 종업원은 멍하니 있다가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서윤아와 백정우도 다가가 남서연을 관심했다.남서연은 어릴 적부터 남우영의 호칭을 따라 그들을 부르며 황급히 사과했다.“할아버지 할머니, 죄송해요. 제가 귀빈들께 폐를 끼쳤어요.”“괜찮다. 어서 가서 옷 갈아입어.”남서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떠나려다가 잊지 않고 종업원을 위해 한마디 했다.“방금 그 종업원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 탓하지 마세요.”어른들은 마지못해 입을 오므리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참 착하고 철이 든 여자라는 탄사가 절로 나왔지만 아쉽게도 너무 순진했다.남서연은 인심의 추악함을 볼 줄 몰랐다.다른 손님들도 잇달아 속삭였다.“저 여자애 누구죠? 저렇게 작은 일로 남씨 가문 남자들이 총출동하고 백씨 집안 어르신들도 세심하게 돌보잖아요?”“남창민의 손녀, 남씨 가문의 보배지.”“보통 배경이 아니야. 어머니는 유명한 로맨스 작가, 아버지는 일급 경찰 사단장, 첫째 큰아버지와 셋째 큰아버지는 상업계의 거물이고, 둘째 큰아버지는 엔터 쪽의 거물. 다섯째 큰아버지는 장군이고 다섯째 큰 엄마는 갑부 백씨 가문의 딸로 지금은 가장 유명한 화학자 정안이지.”“남씨 가문의 딸로 태어난 사람은 전생에 은하계를 구했나 보네요.”“하하!”남서연이 파티장을 나와 긴 복도를 지나자 한 쌍의 남녀가 정면으로 걸어왔다.그녀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단정하게 다듬어진 정장을 입은 잘생긴 남자는 우아한 기품이 흘러넘쳤다.차갑고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윽한 눈빛으로 남서연을 바라보더니 와인이 묻은 그녀의 드레스도 보았다.남서연은 심장이 쫄깃하고 너무 당황해 꼼짝도 못 하며 앞에 있는 남자, 백건을 바라보았다.백건의 옆에는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 유승아가 있었는데 아마 지금은 그의 약혼녀일 것이다.남서연은 숨쉬기가 좀 불편하고 심장이 쥐어짜는 것 같아 괴로웠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삼촌, 승아 언니, 안녕하세요.”유승아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새 드레스로 갈아입은 남서연은 화장을 고치고 파티장으로 돌아갔다.안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남서연은 조용히 옆에 있는 식탁으로 가서 작은 접시를 들고 좋아하는 음식을 골랐다.그때, 백정우 부부가 술잔을 들고 무대로 올라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오늘 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남서연이 무대의 두 사람을 흘끗 보니 그들은 환한 웃음과 함께 열정적이고 형식적인 멘트를 하고 있었다.이런 파티와 이런 멘트에 익숙한 남서연은 집중해서 듣지 않았다.모두가 축배를 들 때, 그녀는 여전히 오늘 디저트를 하나 먹을까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디저트는 살도 찌고 피부에도 좋지 않았다.외모와 몸매를 잘 관리하려면 음식이 중요했다.‘됐어, 디저트는 말고 호박 수프나 먹자.’백정우가 형식적인 멘트를 길게 늘어놓자 서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이 파티를 빌어 귀빈 여러분께 좋은 소식을 발표하려 합니다. 제 아들 백건과 유승아 양의 약혼식이 다음 달 진행될 예정이니 다들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남서연은 온몸이 굳어버리고 나른해지고 손에 힘이 풀렸다. 손에 든 접시가 음식물과 함께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접시가 떨어지는 소리는 컸지만 열정적인 박수 소리에 묻혀버렸다.남서연은 귀가 윙윙거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저 주위가 시끄럽고 어수선하게만 느껴졌다. 심장 깊숙이 칼에 베인 듯 통증이 몰려와 순식간에 선혈이 낭자했다.너무 아팠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테이블 위에 떨어진 물건들을 챙겼다. 목구멍이 시큰해지자 순식간에 눈시울이 젖었다.출국한 백건이 2년 만에 갑자기 돌아온 건 유승아와 약혼하기 위해서였다니.12년이면 이제 정신을 차릴 때도 되었다.남서연은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몰래 손을 들어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닦아냈다.10살 때 단순히 좋아한 마음으로 시작해 소년 시절의 사랑, 성인이 된 후 짝사랑까지 절대 쉽지 않은 길이었다.그녀는 감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이 비밀을 마음속 깊이 숨기고
파티장의 어느 구석.백건은 이상하리만치 굳은 얼굴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친한 친구들이 모두 와서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유승아가 참지 못하고 백건 곁으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우리 다음 달에 약혼하는데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어?”백건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그때 남우영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삼촌, 승아 누나, 축하해요. 앞으로 외숙모라고 불러야 하나?”유승아가 급히 제지했다.“아니. 절대 그러지 마. 네가 그렇게 부르면 내가 나이 많아 보이잖아.”“우리 삼촌이 워낙 촌수가 높아서 어쩔 수 없어요.”남우영이 웃으며 백건의 얼굴에 시선이 꽂히더니 의문스러워 물었다.“삼촌, 안색이 왜 그래요? 누가 화나게 했어요?”백건이 차가운 눈빛으로 남우영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네가.”“내가 언제 삼촌을 화나게 했어요?”남우영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남수혁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백건!”모두 목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보니 남수혁이 남서연을 끌고 오는 것이 보였다.백건은 조금 굳은 눈빛으로 잔뜩 움츠러든 남서연과 분노에 휩싸인 남수혁을 바라보았다.남수혁은 남서연을 백건의 앞으로 끌어당기며 버럭 화를 냈다.“왜 우리 서연이를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았어?”남서연은 긴장되고 찔려서 고개를 숙이고 감히 백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큰오빠가 자기 회사 대표 앞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내용을 들을 수가 없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남우영은 경악해서 물었다.“뭐요? 서연이가 해고당한다고요?”남수혁은 백건을 노려보며 말했다.“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똑바로 설명해봐!”남우영은 불쾌한 듯 백건을 보며 말했다.“삼촌, 우리 가문 회사도 나쁘지 않아요. 서연이가 무슨 일을 하고 싶든 우리 가족은 전폭적으로 지지하고요. 서연이가 하필이면 ND에 들어가고 싶어 해요. 공과 사를 막론하고 서연이를 해고하는 건 아니죠.”백건의 눈빛이 약간 어두워지며 입을 열었다
백건은 차가운 얼굴로 몸을 돌리며 툭 내뱉었다.“그럼 아무 호칭도 부르지 마.”몇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고 남서연 역시 멍한 얼굴이었다.백건의 성격은 언제나 종잡을 수 없었다.파티가 끝난 후.남서연은 사촌 오빠 몇 명들과 함께 별장을 나섰다.그녀는 문 앞에 서서 남우영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멀지 않은 모퉁이에서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남서연이 궁금한 마음에 가서 살펴보니 모퉁이 빈터에서 양복 차림의 남자가 한 종업원을 때리고 있었다.바로 와인을 한서연의 드레스에 쏟은 그 종업원이었따.“그만...”남서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종업원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제발 그만 때리세요. 제가 사실대로 말할게요... 사실은 유승아 씨의 고모님께서 그렇게 시키셨어요. 서연 아가씨가 파티에서 망신을 당하게 하려고요.”남서연은 화들짝 놀랐다.유승아의 고모라면 아마 유미를 말하는 것 같았다.“꺼져.”양복남이 명령하자 종업원은 허둥지둥 도망쳤다.남서연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양복 차림의 남자가 다가왔을 때도 그녀는 발견하지 못했다.남자는 남서연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황급히 공손히 인사했다.“서연 아가씨, 여기 계셨어요?”남서연은 남자의 낯선 얼굴을 보고 어느 사촌 오빠의 부하인지 알 수 없었다.“폭력은 불법이니 다음부터는 그렇게 모진 수법으로 묻지 마세요.”남자는 공손히 대답했다.“네. 아가씨.”남서연은 정문으로 돌아갔고 남우영을 따라 차에 올라 떠났다....다음 날 아침.남서연은 평소대로 출근했다.사무실 안의 분위기가 좀 가라앉고 엄숙했다.디렉터가 대표 사무실에 갔다가 돌아온 후 안색이 매우 안 좋았다.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 곧 상자를 들고 말없이 떠났다.온 사무실이 완전히 들끓었다.“대체 무슨 일이에요?”“몰라요. 디렉터 님이 왜 갑자기 물건을 챙겨 떠난 거예요?”“설마 해고당한 걸까요? 절차도 안 밟고 이렇게 매정하게 내쫓은 걸까요?”“신임 대표가 성격이 괴팍하고 종잡을 수 없
“그쪽은?”남서연이 물으려는데 남자가 공손히 말했다.“저는 대표님의 비서 하현우입니다.”남서연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안녕하세요.”“안으로 드시죠. 아가씨.”하현우가 문을 열고 그녀에게 들어가라고 했다.남서연은 몇 초 동안 망설였다. 어젯밤에 종업원이 그녀의 드레스를 더럽힌 것을 이 남자가 왜 조사했는지 알 수 없었다.그건 아주 작은 일이었고 종업원이 고의적이라고 해도 그녀의 품위를 손상시킨 건 없었다.남서연은 사무실로 들어갔다.커다란 사무실은 밝고 심플했으며 호화롭고 대범했는데 통유리창 앞에 깨끗한 사무용 책상이 있었다.블랙 수트를 입고 우아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하는 남자의 모습은 아주 매력적이었다.남서연은 그를 본 순간부터 괜히 마음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렸다.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고민했다.삼촌은 통하지 않았다.“대표님, 저 찾으셨어요?”남서연이 다가가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백건은 흠칫 놀라더니 고개도 들지 않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계속 수중의 서류를 보았다.남서연은 손가락을 꼬며 호흡이 더욱 어지러워졌고 남자의 잘생긴 옆모습을 바라보니 그녀의 몸은 떨릴 정도로 긴장되어 있었다.‘날 불러 놓고 왜 말도 안 하지?’남서연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바로 잡았다. 절대 사랑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고.“대표님?”남서연이 다시 한번 불렀지만 백건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백건 씨,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죠?”남서연은 이미 화가 나 있었다.그러나 백건은 다른 서류를 집어 들고 펼쳤다.남서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이런 천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는 열이 차서 말했다.“백건, 사람을 왜 불렀냐고?”백건은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손을 뻗어 서류 한 장을 뽑아 그녀를 올려다보며 건넸다.남서연은 멍해졌다.그의 반응을 보고 또 그가 건네준 서류를 보았다.이 남자는 깊고 어두운 눈으로, 차갑지만 아주 심오한 눈빛으로 태연
백건은 계약서를 가져가서 한번 보고는 덮고 서랍에 넣었다.“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남서연이 묻자 백건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남자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윽한 눈빛에 남서연은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너...”백건이 말을 하려는데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건아.”유승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노크 없이 바로 문을 열고 들어온 유승아는 남서연이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서연이도 있었네?”남서연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승아 언니 오셨어요?”유승아가 웃으며 말했다.“내가 두 사람 방해했나? 나 잠시 나갈까...”백건이 바로 그녀를 불러세웠다.“아니야.”이윽고 남서연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더 할 말 없으니 나가봐.”남서연은 가슴이 조금 답답하고 아팠다.그녀는 자신이 왜 슬퍼하는지 몰랐다. 유승아는 백건이 몇 년 동안 사귄 첫사랑 여자 친구이며 그들은 다음 달에 약혼할 것이다.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것은 백건이 허락한 것이 틀림없었다.유승아가 왔으니 나가야 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녀였다.남서연은 마음속으로 자신을 위로했지만 마음 끝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쓸쓸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떠났다.사무실을 나온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눈물은 멈출 수 없이 눈가에 넘쳐흘렀다.그녀는 마음이 쓰라리고 괴로웠다. 황급히 눈가의 눈물을 닦고 고개를 젖히고 심호흡을 하며 눈물이 나오지 않도록 했다.누군가를 짝사랑하는 기분은 정말 괴로웠다.12년의 감정이 잊어야 한다고 해서 바로 잊히는 게 아니었다.만약 그녀와 백건은 평생 불가능한 사이라면 그녀는 백건이 다른 사촌 오빠들처럼 그녀에게 잘해주길 바랐다.그녀에게 이렇게 소원하고 냉담하게 굴지 않기를 바랐다.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잔인했다....정규직이 된 지 일주일 후.남서연은 갑자기 신임 디렉터 육나리의 업무 요청을 받았다.“서연 씨, 모레 나랑 같이 출장 가
남서연은 더욱 불편했다.“그럼... 나도 이코노미석으로 갈게요. 일반 직원인 제게 비즈니스석은 적합하지 않죠.”남서연은 방금 백건의 목소리가 나른하다고 생각했지만 곧 약간의 명령조가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앉아. 네 티켓은 회사 돈이 아니라 내 사비야.”남서연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며 물었다.“그럼 제가... 갚을게요. 얼마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백건은 책을 덮은 뒤 안경을 벗어서 옆 탁자 위에 겹쳐 놓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남서연은 휴대전화를 들고 잠시 멍하니 있었지만 백건은 그녀를 무시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천천히 휴대전화를 넣어두었다.이 남자는 정말 종잡을 수 없었다.몇 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그는 가끔 책을 읽거나 잠을 청했고 남서연은 계속 디자인 초안을 그렸다.비행기에서 내리자 남서연은 육나리와 또 다른 ND의 거물 디자이너 준을 따라 5성급 호텔에 체크인하러 왔다.로비 소파에서 남서연은 참지 못하고 휴대전화를 꺼내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통하자 남서연은 기뻐하며 말했다.“우석 오빠. 나 지금 어디게?”진우석은 진연우의 아들이었다. 진연우와 그녀의 아버지는 절친이었으니 그들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다.마침 진우석이 이 나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진우석은 감격해서 말했다.“이 말투와 이상한 질문은 뭐지? 너 설마 내 숙소 앞에 온 거 아니야?”“비슷해요. 회사 출장 왔는데 마침 이 나라로 왔어요. 오빠와 가까운지 모르겠어요.”진우석은 더욱 흥분했다.“서연아 너 어디야? 위치 보내봐. 내가 당장 갈게.”“그러니까...”남서연은 사방을 둘러보았다.“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위치 보내줄 테니까 시간 나면 찾아와요. 오빠 공부에 방해되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공부가 어디 너만큼 중요하겠어?”남서연은 피식 웃으며 말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휴대폰을 앗아갔다.화들짝 놀란 그녀는 홱 몸을 돌렸다.소파 뒤에 있는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