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는 첫사랑과 두 번의 이별을 겪었다.이별의 아픔이 이 정도로 치명적일 줄은 몰랐다.밤이 깊어 인기척이 없을 때, 그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며칠 후 지우는 남태준이 그녀에게 주었던 선물을 포장해서 택배로 보냈지만 물건은 결국 되돌아왔다.받는 주소의 집에 이미 사람이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그 순간, 지우는 자신과 남태준이 이제는 인연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남태준이 준 선물을 봉인하면서 그를 향한 감정을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묻어 두었다.그녀 자신만이 그녀가 남태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그녀는 남태준을 원망하지 않았고 그저 속으로 그의 행복과 평안을 바랄 뿐이었다.“누나, 태준 형과 무슨 일 있어? 형 전근된 거 알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지성이 묻자 지우는 영혼을 잃은 듯 맥없이 덤덤하게 대답했다.“헤어졌어.”“또? 이번엔 왜 또 헤어졌는데?”지우가 대답하지 않자 지성이 나무라기 시작했다.“태준이 형 같은 좋은 남자가 돈까지 많기가 어디 쉬워? 왜 남자 마음 하나 못 잡아? 참 못났어.”지우는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며 지성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지성이 계속 잔소리했다.“이제 재벌가에 시집가는 꿈은 산산이 부서졌네. 꼴 좋다.”지우는 가슴이 욱신욱신 아팠다. 그녀는 계속 바삐 돌아치며 자신의 감각신경을 마취하려 했다. 남태준을 그리워하지 않고 눈물은 더욱 흘리지 않으려고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그때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누나 지금 우는 거야?”지성이 경악하며 묻자 지우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가 지금 우는 것 같니?”지성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긴장한 채 경청하며 소리의 방향을 잡은 뒤 진효연의 방을 가리켰다.“엄마가 울고 있는 것 같아.”지우는 부랴부랴 손에 쥔 옷을 내려놓고 방으로 향했다.두 사람이 진효연의 방문 앞에 와서 귀를 기울이자 역시나 그녀의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지성은 노크도 없이 문을 홱 열어 젖혔다.
“나 정말 괜찮아.”진효연은 그렇게 많은 돈을 쓸 것을 생각하니 아까워 둘러댔다.“나 진짜 괜찮다니까. 기분이 차츰 좋아지면 앞으로 울지도 않을 거야. 의사에게 수면제나 처방해달라고 해.”지우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이미 중증 우울증이에요. 왜 그동안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았어요?”진효연은 고개를 떨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줄곧 우울하고 불면에 시달리고 꿈을 많을 꿨다. 자식을 잃을까 봐 두려웠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희망도 전혀 없었다.“선생님, 입원해야 하나요?”지우가 묻자 진효연은 바짝 긴장하며 돈 아까워했다.“나 입원 안 한다. 약은 먹을 테니까 그냥 약만 처방해 달라고 해. 입원은 절대 싫다.”의사는 어쩔 수 없이 진효연에게 중증 우울증 치료제를 처방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성이 전화를 받더니 싱글벙글해서 말했다.“엄마, 누나, 어떤 여자가 나한테 영화 데이트를 신청했어. 두 사람 먼저 가. 내 밥 준비할 필요 없어.”진효연은 흥분해서 말했다.“그래. 어서 가.”그러자 지성은 손을 흔들며 떠났다.엄마가 이 지경인데 지성은 데이트할 기분이 날까? 지우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쳤다.“지성! 너 거기 서!”진효연이 다급히 지우의 손을 잡고 말렸다.“그만해. 데이트라도 안 가면 애가 어떻게 결혼하겠어?”“엄마!”지우는 화가 나서 온몸이 괴로웠고 주먹을 불끈 쥐고는 책임감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지성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바라봤다.“엄마 아들 계속 이렇게 오냐오냐 키우다가 애 큰 사고 쳐!”“괜찮아.”“엄마가 아픈데 집에 있지 않고 여자친구와 영화 보러 가? 이게 말이나 돼?”“나 정말 괜찮다니까?”진효연이 짜증스럽게 말하자 지우는 할 말이 없었다.그녀는 진효연을 모시고 병원을 떠났다.헤어진 지 두 달이 지났고, 지우는 어느새 남태준이 없는 나날들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매일 밤 울다가 지금은 조금씩 잊히고 있었다.다만 가끔 남태준이 생각날 때면 여전히
지우는 자신의 모든 저축을 털었고, 진효연도 저축한 돈을 모두 내놓았고 매점을 양도하고 친척에게 조금 더 빌리기까지 했다.이렇게 해서 5천만 원을 모아 피해자에게 배상했다.그 후 집안은 더욱 쓸쓸하고 처참하게 변했다.진효연의 병세는 갈수록 심해졌고 어떤 일에도 흥미를 끌지 못했다.지우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계속 돈을 벌어야 했기에 늘 지치고 힘들었다.나중에는 남태준을 떠올릴 시간과 정력도 없었다.진효연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하고 매일 울었으며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하루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밖에 나가지도,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다.자주 남편과 아들의 사진을 들고 구석에 숨어서 종일 울곤 했다.지우는 감옥에 있는 지성이 안에서 잘 먹도록 매달 몇만 원의 소비 돈을 보냈고 진효연을 데리고 면회를 가기도 했다.지성은 살도 빠지고 많이 퇴폐해졌다.그런 지성을 볼 때마다 진효연은 눈물범벅이 되었다.어머니의 병 때문에 지우는 병원을 찾는 빈도가 잦아졌다.이런 생활은 결국 어느 깊은 밤 완전히 끝이 났다.새벽 5시 반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 진효연은 옥상으로 올라가 7층에서 뛰어내렸다. 그날 밤, 그녀는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 남편을 보러 갔다.경찰차의 경적, 구급차의 경적, 수군거리는 인파의 소리가 모두 귀에 거슬렸다.지우는 바로 옆에 서서 하얀 천으로 뒤덮인 진효연을 영혼이 가출한 듯 바라보았고 피로 가득한 땅바닥을 보며 등골이 오싹했다.그녀는 눈물범벅이 되었고 두 다리에 힘이 빠지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제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그러나 무너지지 않고 씩씩하게 버텼다. 어머니의 뒷일을 차분히 처리했고 고향 풍습에 따라 모든 친척과 친구들을 맞아 장례를 치렀다.이번이 그녀 인생의 두 번째 장례식이었다.지난번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불과 3년 만에 또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있었다.지성도 하루 풀려나 어머니께 상복을 입혔다.그는 어머니 묘비 앞에서 숨이 끊어질 듯 통곡하며
지우는 가난한 여행길에 올랐다.그녀는 기차가 어디에 도착하면 어디에 정착했고 여행하면서 글을 썼다.여름 바다, 가을 초원 그리고 겨울의 설산도 보았다.길가에 텐트를 치고 소와 양과 함께 산책했다.시고 떫은 산과일을 먹었고 시냇물의 단맛도 보았다.십여 개의 도시를 다니며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그들은 서로 다른 인생과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유일한 공통점은 모두 삶을 사랑하고 자신이 지향하는 미래가 있다는 것이었다.지우는 그렇게 천천히 삶의 막막함에서 벗어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슬픔을 떨쳐내고 현재를 즐기게 되었다....세월은 덧없이 흘러갔고 어느새 1년 후, 봄이 다가왔다.안성.지우의 이번 역은 안성이었다.이유는 두 가지였다.첫 번째는 그녀가 다음 달에 독자 미팅이 있는데 현장에서 독자들에게 사인을 해 줘야 했다.그리고 두 번째는 정안과 남하준이 안성에서 결혼식을 올리는데 초대를 받은 것이다.그녀가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정안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지우야, 신부 들러리가 되어 줄래?]지우는 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답했다.[완자야, 난 복도 없고 운명도 불길하고 신분도 어울리지 않아. 네 들러리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 다른 사람 찾아봐.][너 언제부터 이렇게 비굴하고 미신을 믿었어?][난 정말 적합하지 않아.][너 안성에 도착했어? 언제 시간 돼? 우리 만나서 얘기해.][내일 아침에 보자. 어디서 볼까?][남씨 가문 본가. 네가 와서 나 결혼식 당일 입을 웨딩드레스랑 한복 좀 봐줘]지우는 휴대전화를 들고 다시 한번 남태준이 떠올라 오랫동안 그녀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정안이 다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내일 아침에 기사 보낼게. 호텔 위치 보내줘.]지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위치를 보냈다.그녀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베란다 밖으로 나가자 햇빛이 그녀에게 쏟아졌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손을 들어 눈부신 햇살을 막았다. 편안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푸른 하늘을 감상했다. 안성의 하늘은 사
지우는 여기서 남태준을 만날 줄은 몰랐다.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긴장해서 어쩔 줄 몰라 했고 남자의 뜨거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남태준은 혈 자리에 찍힌 듯 꼼짝 못 하고 서서히 주먹을 쥐었다.1년 만에 지우를 만나니 그의 마음은 소용돌이치는 물결처럼 도저히 진정할 수 없었다.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성숙한 음울함이 배어 있었다.안 변한 것 같기도 하고 많이 변한 것 같기도 했다.그녀의 웃음은 부드럽고 온순하며 약간 덤덤한 느낌이 있었다.“지우야!”정안은 놀라고 기뻐하며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지우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완자야, 오랜만이야.”“정말 오랜만이야.”정안은 그녀를 밀어내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더 예뻐졌네.”지우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오므리며 엷은 미소를 지었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남태준은 서서히 앞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지우야. 오랜만이야.”지우는 눈도 들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거리감 느껴지는 인사는 살짝 어색했다.남태준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주춤주춤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이 순간, 그는 정안이 왜 그에게 출근하지 말라고, 굳이 오늘 휴가를 내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정안은 힐끔힐끔 남태준의 기색을 살피더니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지우의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갔다.“지우야, 어서 들어가자. 거의 2년 동안 못 만나서 할 얘기가 너무 많아.”지우는 정안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남태준은 두 손을 허리에 짚고 문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발걸음이 뿌리내린 듯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다.그는 뒤를 돌아보며 집으로 들어갈까 고민했다.그가 막 돌아서서 두 발짝 걸었을 때, 지우의 어머니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빌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심장이 욱신욱신 쑤시고 주먹이 쥐어지더니 다시 돌아섰다.1년 동안 참아왔는데 이번만큼도 참으면 그만이었다.그녀는
지우가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난...”그녀가 미처 거절하기도 전에 허윤미가 말을 끊었다.“그래. 우리 집에 묵어. 여기 있으면 편하고 돈도 절약하고 안전하잖아. 여자 혼자 호텔에 묵으면 얼마나 위험하니?”“저 괜찮아요. 아주머니. 호텔에 묵으면 돼요.”지우는 크게 당황했다.벌써 1년이 지났는데 남태준은 이미 결혼했는지 알 수 없었다.어쩌면 다들 그녀가 남태준과 한때 만났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었다.그녀가 여기에 사는 것은 너무 불편했다.“지우야. 그냥 여기서 지내.”정안이 지우의 팔을 껴안고 애교스럽게 말했다.“요 며칠 나 결혼식 준비로 엄청 바쁘단 말이야. 네가 있으면 내게 조언도 해주고 얼마나 좋아. 그럼 나한테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야.”“나도 결혼한 적 없는데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지우는 얼떨떨해서 황급히 그들의 호의를 거절했지만 그 열정을 지우가 당해낼 수 없었다.허윤미는 일어나서 뒤에 있던 도우미를 향해 말했다.“아줌마, 가서 지우 방 하나 정리해줘요”“네. 사모님.”도우미가 대답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지우는 완전히 얼이 빠져 벌떡 일어났다.“정말 괜찮아요. 호텔에...”“호텔은 무슨 호텔이야. 그냥 우리 집에 있어.”정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가자. 내가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 보여줄게.”지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허윤미와 남창민에게 인사했다.“저 완자랑 올라가 볼게요.”“그래. 어서 가봐.”허윤미는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지우는 정안의 손에 이끌려 방에 도착했다.정안은 드레스룸에서 웨딩드레스 한 벌과 전통 한복 한 벌을 꺼냈다.아름다운 웨딩드레스에 지우는 눈이 번쩍 뜨이며 감탄했다.“너무 예뻐!”너무 아름답고 눈부셔서 지우는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정안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미간에는 환희가 가득했다.“오빠가 특별 제작해준 거야.”“도련님 너한테 참 잘해준다니까.”지우가 감탄하자 정안은 드레스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지우 곁으로 가서 그녀의 손을
지우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저녁 무렵.남씨네 가족들은 모두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데 유독 남태준만 없었다.공사다망한 남하준도 제시간에 집에 돌아와 아내와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있었으니 지우는 남태준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어쨌든 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어색했으니 말이다.남씨 가문은 형제가 많은 대가족이었다. 남태준을 제외하고 거의 다 결혼했고 심지어 아이도 한두 명씩 있었다.셋째 형은 이혼한 지 1년 만에 또 재혼했고 재혼한 아내도 임신 중이었다.이런 대가족은 정말 시끌벅적했다.지우는 가족의 온정을 느낀 지 오래고 집밥도 먹어본 지 오래였다.모든 사람이 지우에게 예의를 갖추어 친절하게 대접했다.몇몇 아이들도 지우를 특히 좋아했는데 그녀를 지우 언니라고 부르며 그녀와 함께 놀려고 했다.저녁 식사 후, 남씨네 가족들은 거실에 앉아서 과일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정안은 남하준의 품에 등을 기댔고 남하준은 그녀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고 핸드폰을 들고 서류를 내려다보며 두 사람만이 아는 전문용어를 말하며 일에 대해 속삭였다.큰 형과 둘째 형은 최근 사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큰 형수와 둘째 형수는 셋째 형수의 임신과 출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남영준은 옆에서 열심히 듣고 있었고 허윤미와 남창민은 손자와 놀고 있었다.이런 화기애애한 가족 분위기가 지우는 너무 부러웠다.그에 반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라렸다.오랫동안 지성을 보러 가지 않았는데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지우는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심장이 약간 무겁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태준이는 왜 아직도 안 돌아와?”허윤미는 걱정스러운 듯 문 쪽을 바라보았고 지우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허윤미를 보았다.‘남태준이 여기 산다고?’지우는 긴장해서 물었다.“태준 도련님은 단풍나무 숲 집에 사는 거 아니었어요?”그러자 허윤미가 엷게 웃으며 말했다.“눈 회복하고 나서는 쭉 여기 들어와 살
“태준이 왔어?”“태준아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아주 바빠?”“형, 지우 우리 집에 묵는 데 괜찮지?”“왜 그래 형?”남태준은 가족들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지만 한 글자도 들리지 않았다.그는 뜨거운 눈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호흡 조절도 잊은 채 심장이 마구 뛰었다.정안은 남하준의 귀에 기대어 입을 가리고 몰래 웃으며 속삭였다.“태준 오빠 저 눈빛 누가 봐도 지우 좋아하는 거잖아요?”남하준은 사랑스럽게 웃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다른 남자 보지 말고 내 눈빛이나 연구하지 그래?”“우리 어떻게든 두 사람 엮어봐요.”“그럴 필요 없어. 그냥 내버려 두면 돼.”“하지만...”남하준은 정안의 뒤통수를 낚아채고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겨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억지로 얻은 물건은 오래 못 가. 지우는 형한테 아무 느낌 없어 보이잖아?”정안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씁쓸하게 말했다.“그건 오빠가 눈치 없어서 그래요.”남하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남태준은 거실 소파로 가서 사람이 많이 없는 빈자리에 앉았는데 마침 지우의 맞은편이었다.그는 소파에 앉은 후 조용히 지우를 바라보았다.지우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 온몸이 불편하고 괴로웠다.“지우야.”남태준이 차분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갑자기 이름이 호명되자 지우는 심장이 움찔했고 긴장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애써 냉정하고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네?”“아줌마와 지성은 잘 지내?”남태준이 예의 바르게 안부를 묻자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남태준을 쳐다보았다.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지우는 그의 이 가시 돋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지우는 마음이 아팠지만 침착한 척하며 자신의 불운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모두의 기분이 상하는 것을 원치 않아 무심코 대답했다.“잘 지내요.”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었다.“너...”남태준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유승아는 조금 경악했다.“서연이도 있었네?”그러자 백건이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다음 달 결혼에 대해 아주머니가 너무 재촉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너와 의논하려고 왔어.”남서연은 괜히 애태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유승아는 남서연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서연아, 나 건이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너...”남서연은 급히 말했다.“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전 먼저 가볼게요.”그녀가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백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너 갈 필요 없어. 여기서 들어.”남서연은 경악했고 유승아는 얼굴이 굳어지며 난처한 태도로 말했다. “건아, 그건 좀 아니지. 우리 두 사람 얘기야. 서연이는 외부인이고.”백건은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외부인이 아니라 내 아내야.”남서연은 깜짝 놀랐고 유승아는 더욱 경악했다.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백건을 바라보았다.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말에 남서연은 어리둥절했다.벌써 그의 아내가 되는 건가?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두 사람... 만나기로 한 거야?”남서연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자 백건이 또박또박 대답했다.“응. 몇 분 전에 결혼까지 약속했어.”유승아는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짐짓 대범한 척 말했다.“축하해.”“소파에 가서 앉아서 말해.”백건은 남서연의 손을 잡고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유승아도 따라가 앉더니 침울하게 숨을 푹 내쉬었다.“우리 집 쪽 친척들은 이미 청첩장을 받았어. 다들 축하 전화를 걸어오고 있어. 오늘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나를 찾아오셔서 결혼식은 반드시 거행될 거라고 하셨어. 어떻게든 너를 잡아서 교회에 묶어둘 테니까 안심하고 너의 신부가 되라고 하셨어.”백건이 되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유승아는 남서연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내가 뭘 어떻게 생각해? 오랫동안 네 여자친구였으니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잖아.”백건은 서둘러 남서연을 바라보며 나지
그녀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사진은 무엇일까?여자 사진?남서연은 기분이 가라앉아 말했다.“나 먼저 돌아갈게요.”그러자 백건이 그녀에게 다가갔다.“나랑 같이 집에 가서 어른들께 상황을 설명해 드리자.”“안돼요.”남서연은 긴장감에 못 이겨 안절부절했다.“일단 아직은 안돼요. 내가 먼저 가서 가족들 생각을 알아보고 다시 결정해요.”“어떤 상황이든, 어떤 결과든, 나 혼자 감당할 거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서두르지 말고 우리 천천히 얘기해요. 내가 우리 가족들 설득하고 오빠는 오빠 가족들 설득해요. 네?”백건은 여전히 변수가 있을까 봐 걱정했다.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행동해 남서연을 놀라게 해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그래. 네 말대로 해.”남서연은 그가 덮은 앨범을 가리키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덤덤하게 물었다.“누구 사진이에요?”백건은 고개를 돌려 협탁을 보더니 마음이 찔려 말했다.“내 사진이야.”그건 백건이 전에 몰래 찍었던 남서연의 사진이었다.결혼 후에만 그녀에게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가 한 모든 것들이 오랫동안 계획한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어머니의 강력한 방해를 무릅쓰고 그는 강력한 권한을 동원하여 인사팀을 통해 남서연의 면접을 합격시키고 그녀를 ND에 무사히 입사하게 했다.또 직권을 이용하여 남서연을 데리고 해외 출장을 갔다. 그 목적은 바로 남서연을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만든 다음 그 기회를 빌려 잠자리를 갖고 그녀를 임신시키는 것이었다.두 차례의 성관계에도 보호조치를 하지 않은 것도 그녀를 임신시키기 위함이었다.그는 감히 남서연에게 말할 수 없었다. 남서연이 그를 비열하다고, 수단이 더럽다고, 파렴치하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결혼하고 나서 다시 그녀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천천히 용서를 빌어야 했다.남서연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백건은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발이 미끄러질까 봐 보호했다. 남서연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보호하
심장이 두근두근 떨려서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녀는 초롱초롱한 큰 눈으로 물끄러미 백건을 바라보며 머리가 하얘졌다.결혼이라는 두 글자가 백건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 큰 유혹이었다.그녀가 당황하고 있을 때, 백건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왼쪽 무릎을 그녀 앞에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놀란 그녀는 소파에 붙으며 경악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뜨거운 눈빛으로 부드럽게 말했는데 매우 절실해 보였다.“서연아, 나와 결혼해줘. 응?”‘지금 아이를 위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한 거야?’남서연은 아주 기뻤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괴롭고 불안했다.“두 집안 어른들 모두 찬성하지 않을 거예요.”“너만 원한다면 그런 것들은 전부 내가 알아서 해.”남서연은 차마 배 속의 아이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가족 모두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현실 생활에서 많은 부부가 선을 보고 결혼하니 먼저 결혼하고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결혼 후에 그녀가 잘 보인다면 백건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남서연은 멋진 미래를 상상하며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은 감격에 겨워 붉어진 눈시울이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어지러운 숨결로 소파에 앉더니 남서연을 덥석 품에 끌어안았다.남자의 동작은 절박했고 강렬한 포옹에 그녀는 몸이 아팠다.남서연은 그의 등 뒤에 두 손을 널어놓고 턱을 그의 어깨에 괴고는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았다.귓가에 남자의 무거운 호흡과 함께 약간 울먹이는 쉰 목소리가 들렸다.“고마워. 서연아. 정말 고마워. 반드시 좋은 남편과 좋은 아빠가 될게.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최선을 다해서 네게 가장 행복한 미래를 줄게.”남서연은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 몽환적이고 아름다웠다.다만, 앞으로 어떻게 가족을 대해야 할까?아이 때문에 결혼하게 되면 백건은 앞으로 후회하지 않을까?
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슬픈 듯 중얼거렸다.“나 임신했어요.”백건은 심장이 움찔했고 온몸은 걷잡을 수 없이 흥분했다. 그는 제자리에서 거의 뛰기라도 하듯 벌떡 일어났다. 가슴의 흥분을 터뜨리기 위해 미친 듯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서연이가 내 아이를 임신했다고? 나 아빠가 되는 거야? 서연이 아이의 아빠? 이거 지금 꿈 아니지?’그는 갑작스러운 행복을 애써 눌렀다.남서연은 그의 반응에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니 남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를 등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이 남자가 대체 어떤 마음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그녀와 마찬가지로,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까?그녀처럼 망연자실할까?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남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책임지라고 찾아온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다만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에 오빠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서요. 만약 수술하게 되면 나와 함께 가줘요.”백건은 무거운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순식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그는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얼굴빛은 굳어졌고 말투는 엄숙했다.“뭐? 수술한다고?”남서연은 주눅이 들어 쳐다보며 말했다.“네. 혼전 임신은 안 돼요.”가족들이 만약 그녀가 혼전임신이라는 것을 안다면 반드시 백건을 때려죽일 것이다.숨이 가빠진 백건은 두 손을 꼭 잡았고 엄숙한 말투에 약간의 온기를 더해 부드럽게 달랬다.“서연아, 아이는 포기할 수 없어. 내게 책임질 기회를 줄 수 없어? 나 좋은 아빠가 될게.”남서연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백건을 바라보며 멍해졌다.그녀의 생각과 달랐다.그녀는 백건이 그녀보다 더 이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아이의 존재가 그를 위험하게 만들 테니까.백건은 긴장된 듯 입술을 오므리고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그리고 너만 괜찮다면 나... 좋은 남편이 될 수도 있어.”남자는 주먹을 문지르며 가늘게 떨릴 정도로 긴장했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남서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의 시주를 기
남서연은 복잡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저예요.”백건은 숨이 거칠고 오랫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말이 막힐 정도로 긴장했다.그는 남서연이 무슨 일로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 몰라 계속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다.“지금... 시간 있어요?”남서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쭈뼛쭈뼛 물었다.백건이 다급하게 대답했다.“있어.”“잠깐 만나서 얘기할래요?”“좋아.”백건이 곧바로 대답하더니 또 물었다.“어디서 볼래? 데리러 갈게.”남서연이 생각해보니 밖에는 보는 눈이 많아 안전할 것 같지 않았다.“데리러 올 필요 없어요. 내가 오빠 집으로 갈게요. 반 시간이면 도착해요.”“좋아.”남서연은 전화를 끊고 일어서서 마스크를 쓰고 공중화장실을 나섰다.한편, 공항 가는 차에 타고 있던 백건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명령했다.“차 돌려서 집으로 가.”“대표님, 비행기 시간 이미 다 됐어요.”백건은 정색해서 말했다.“이번 행사 취소하고 바로 집으로 가.”하현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그 전화를 들으니 아마 남서연일 것이다.백건에게 새 시즌 발표회는 취소할 수도 있고 연기할 수도 있고 없어도 되는 일이다.그러나 남서연을 만날 어떤 기회도 그는 놓칠 수 없었다.하현우는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30분 후.남서연은 산 중턱 별장에 와서 막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하현우가 이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고 공손히 인사했다.“서연 아가씨,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남서연은 살짝 놀랐다가 하현우인 걸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녀는 경치가 아름다운 화원의 앞마당을 지나 웅장한 큰 집으로 들어갔다.문은 열려 있고 백건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흰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어 우아하고 멋스러우며 준수한 매력을 자랑했다.남자는 그윽한 눈동자로 남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를 다시 만난 남서연은 마음이 혼란스럽고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마음속에 토끼 한 마리가 숨
백건은 당황해서 화를 내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하현우는 침을 삼키고 목숨을 걸고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 여자가 대표님과 관계를 맺은 후 연락을 끊었다면 아마도 대표님의 돈과 권력 때문에 감히 저항하지 못했을 거예요. 진짜 대표님께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백건은 화를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아니, 돈과 권력이 부족한 여자가 아니야.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아.”하현우는 경악하더니 속으로 크게 흥분했다.‘뭐야? 대표님 설마 서연 아가씨와 잔 거야? 대단하네!’‘목숨을 걸고 남씨 가문의 권위에 도전하다니. 목숨을 바칠 정도로 위대한 사랑이라니.’하현우는 은근히 충고했다.“대표님, 어떤 여자들은 성격이 순하고 마음씨가 착해서 아무리 권위 있는 집에서 자라도 담은 작아요. 어려서부터 너무 잘 보호 받으며 자라서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해도 거절할 줄도, 반항할 줄도 모르죠. 그래서 도망을 치죠.”백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심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거절하지 않으면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가 일방적으로 남서연에게 상처를 준 걸까?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위해 일방적인 행위를 가한 그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아닌가?백건은 눈을 감았고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남서연은 늘 낙천적인 성격이었다.그녀는 두 번의 잠자리로 인해 계속 괴로워하지 않았다.백건은 어쨌든 그녀가 짝사랑하는 남자였으니 아무리 쓰레기일지라도, 이미 일어난 이상 좋은 추억으로 여기기로 했다.그녀의 짝사랑도 욕망을 만족시킨 셈이었다.만약 백건이 그녀와 사귀고 싶지 않으면서 계속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여다혜가 말한 대로 그녀는 더 이상 타락해서는 안 되었다.남자는 여자와 달리 사랑이 없어도 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그녀는 백건의 전화를 받지 않고 그의 메시지에도 답장하지 않기 시작했다.그 후 백건은 포기하고 그녀를 찾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도 접촉이 많지 않았으니 남서연은 일
“남서연 씨는요?”직원이 공손하게 대답했다.“대표님, 서연 씨는 방금 가방을 챙겨 나갔습니다.”백건은 군말 없이 급히 몸을 돌려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남서연의 번호를 눌렀다.벨이 몇 번 울리더니 끊겼다.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남서연이 다시 끊었다.세 번 연속 시도한 후 결국 포기했다.백건이 1층 로비까지 쫓아갔지만 이미 남서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풀이 죽어 위층으로 몸을 돌렸다.종일 그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날이 저물자 창밖의 네온사인이 유리창에 비쳐 창 앞의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그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창문을 마주하고 하늘가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눈 밑은 번화한 경치였지만 그의 마음속은 황폐했다.그는 남서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노크소리가 들렸고 하현우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미 10시예요. 퇴근 안 하세요?”백건은 침묵했다.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고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뒤덮어 섬뜩하여 그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하현우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이미 몰래 저녁을 먹었지만 집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아무리 야근 수당이 있어도 또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그는 내키지 않았다.하현우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대표님,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제가 도와드려요?”백건은 말없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떠나갔다.하현우는 급히 옆으로 피했고 등이 뻣뻣해져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백건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는 쪼뼛쭈뼛 따라갔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백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고 깊고 어두운 눈으로 창밖 거리의 야경을 바라보았다.차를 몰던 하현우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추측했다.“대표님, 혹시 서연 아가씨와 연락이 안 되세요?”고개를 돌려 하현우를 보는 백건의 눈빛은 차갑고 굳어 있었다.하현우는 놀라서 침을 꿀꺽 삼키더니 등
[좀 바빠요.][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응?][서연아, 처음에 너도 거절하지 않았잖아? 왜 이제와서 이래? 이거 무슨 뜻이야?][기다릴 테니 내려와. 아니면 내가 올라간다?]남서연은 백건이 보낸 몇 개의 메시지를 보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마음이 더욱 불안해져 여다혜를 돌아보았다.여다혜는 연애경험이 비교적 풍부해서 거의 감정 전문가인 셈이었다.남서연은 의자를 옮겨 여다혜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다혜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여다혜는 책상 위에 엎드려 졸면서 중얼거렸다.“말해.”“내 친구가 있는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를 계속 짝사랑했어. 근데 그 남자는 계속 그 친구에게 차가웠고 만날 때마다 일부러 숨었어. 마치 싫어하는 것처럼.”“나중에 내 친구가 커서 그 남자가 먼저 접근했고 아무 이유 없이 두 번이나 잤어. 그 남자는 대체 무슨 뜻일까?”여다혜는 번쩍 튕겨 일어나 앉더니 깜짝 놀라며 입을 가리고 남서연을 끔벅끔벅 바라보았다.“왜 그래?”남서연이 묻자 여다혜는 비통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서연아, 너 나쁜 남자 만났구나.”“내가 아니라 내 친구라고.”“그래그래. 네 친구.”여다혜는 서둘러 말을 바꾸고 슬픈 듯 입을 납작하게 하고는 눈에는 동정이 가득했다.“네 친구 나쁜 남자 만난 거야. 정말 너무해. 대체 어느 개자식이야?”남서연은 긴장감에 침을 삼키고 숨을 몰아쉬었다.“무슨 말이야?”여다혜는 그녀의 말을 바탕으로 분석했다.“네 친구는 커서 예쁜 여자가 된 게 틀림없어. 그래서 그 남자가 혹한 거지. 어렸을 때부터 네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어도 자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 남자는 하반신으로 고민하는 수컷이니까.”남서연은 얼굴이 희끗희끗해지며 축 처져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여다혜는 남서연의 차디찬 손을 맞잡고 위로했다.“서연아, 네 친구는 감정에 무지하고 세상 물정에 어둡고 순진해서 남자한테 속았을 거야.”“그런... 사람 아니야.”남서연은 무기력하게 해명했다.“그
끝난 후, 너무 수줍은 남서연은 백건이 어찌할 수 없는 틈을 타 재빨리 자신의 옷을 챙겨 입고 거의 도망가듯 뛰쳐나갔다.“서연아...”백건은 옷을 챙겨 입지 못해 따라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사무실을 뛰쳐나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숨을 헐떡였다.그녀가 디자인 부서로 돌아왔을 때 여다혜는 급히 걸어가서 책상을 두 손으로 받치고 그녀의 붉어진 얼굴과 약간 불그스름한 입술을 보았다.“서연아,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너 점심 먹었어?”남서연은 마음이 켕겨 감히 여다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먹었어. 혼자 먹었어.”“식당에서 너 못 봤는데? 그리고 평소에는 30분이면 다 먹더니 오늘은 왜 한 시간이나 걸렸어?”“나... 구내식당이 아니라 밖에서... 멀리 가서 먹었어.”여다혜는 불쾌해하며 그녀의 손을 두드렸다.“왜 좋은 곳에 나는 안 데리고 갔어?”남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귓가에 있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다음에. 다음에 꼭 데리고 갈게.”여다혜가 깜짝 놀라 외쳤다.“너 움직이지 마.”남서연은 경악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여다혜는 그녀의 긴 머리를 쓸어올리고 귓불 뒤 목덜미에 닿는 위치를 보며 의아해하며 물었다.“너 목에 왜 빨간 자국이 있어? 마크 같아.”“무슨 마크?”“키스 마크!”크게 당황한 남서연은 황급히 긴 머리를 풀어 목을 가리고는 화난 척 말했다.“함부로 말하지 마. 그냥... 긁은 거야. 모기한테 물려서 난 자국이야.”모기에 물린 것인지, 키스 마크인지 여다혜는 경험자로서 한눈에 알 수 있었다.더군다나 남서연은 지금 볼이 붉어지고 눈 밑에는 수줍음이 가득했다.여다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서연아, 너 정말 우리 오빠 안 좋아해?”“안 좋아해. 자꾸 엮지 마.”남서연이 나지막이 말하자 여다혜는 어깨를 으쓱하고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돌아가서 희망이 없다고 오빠에게 말할게. 네 생각하지 말고 빨리 다른 여자 만나라고.”남서연은 담담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