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는 문득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시골 옆집에서 종돈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매번 거래가 있을 때면 이웃 할아버지는 종돈에게 독한 약을 먹였고 약을 먹은 종돈은 열 몇 마리의 암퇘지와 교배를 했다.그녀는 그 장면을 본 적은 없지만 처절하고 끔찍한 돼지 울음소리는 그녀 어린 시절의 악몽이었다.정신이 번쩍 든 지우는 두말없이 펑 하고 문을 닫았다.갑작스레 문을 닫는 모습과 지우의 창백한 얼굴, 당황하는 모습에 남태준은 피식 웃었다.지우는 부랴부랴 택시를 잡았고 15분 후, 남태준은 지우와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응급실에 가서 의사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의사가 남태준 옆에 있는 지우를 가리키며 물었다.“환자분 여자친구예요?”남태준이 다급하게 말했다.“여동생이에요.”지우는 마음이 뭉클했다. 남태준은 스스로 고통을 참을지언정 그녀가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여자친구 있어요?”“없어요.”“내가 주소를 줄 테니 가서...”의사가 간단한 방법을 추천하려 하자 남태준이 엄숙하게 말했다.“나 경찰입니다.”의사는 말을 뚝 그치고 긴장된 듯 침을 삼키더니 웃어 보이며 애써 둘러댔다.“그러니까 제 말은 이런 경우 의사를 찾아오는 경우가 드물다는 거예요. 게다가 우리도 해독제가 없어요.”“진정제 놔주세요. 진정제가 안 되면 마취제라도...”“그런 약은 함부로 처방할 수 없고 일정한 수치에 도달해야 처방할 수 있어요. 환자분 같은 경우는...”의사는 난처해하더니 남태준의 차가운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강한 카리스마에 겁을 먹고 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진정제 놓아드리겠지만 효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거예요. 그저 괴로움을 조금 억제하는 정도예요.”“감사합니다.”남태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괴롭게 참아내느라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다른 약도 같이 처방해 드릴게요.”의사가 약을 처방하며 말했다.“여자친구도 없고 그런 서비스도 받기 싫다면 여동생분께 성인 가게에 가서 사달라고 하세요.”지우는 이렇게 난처한 적이 없었다.
잠시 후 한 남자 의사가 들어와 남태준이 평온하게 쉬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효과가 조금은 있네요.”말을 마친 그는 남태준의 아랫도리를 보더니 한마디 보탰다.“하지만 효과가 만족스럽지는 않네요. 휴. 환자분 물 많이 주시고 약효가 천천히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의사는 자리를 떠났고 지우는 급히 미지근한 물을 붓고 남태준의 아랫배를 슬쩍 쳐다봤다.병원의 이불이 너무 얇은 편도 아니었는데 남태준의 아랫배가 여전히 부풀어 올랐다.지우는 속으로 욕했다.‘늑대 같은 임다희! 빌어먹을!’“태준 씨. 물 좀 마셔요.”지우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남태준이 흐릿한 검은 눈동자를 뜨고 몸을 지탱하며 일어나자 지우가 서둘러 그의 등을 부축해 주었다.“아직도 힘들어요?”지우가 관심하며 묻자 남태준은 대답하지 않고 물을 마시고 다시 누워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나 이제 괜찮으니까 너 집에 가서 쉬어.”“싫어요. 여기 있을래요.”남태준은 눈을 감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돌아가라고.”“혹시 무슨 일 생겼는데 옆에 돌봐줄 사람 없으면 어떡해요?”“여기 의사도 있고 간호사도 있으니까 나 괜찮아.”“그래도 난 여기 있고 싶다고요.”남태준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흐릿한 검은 눈동자를 천천히 뜨고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몸 안의 불은 꺼졌지만 탄소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어. 넌 탄소 더미 옆의 디젤과 같아서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고.”“비유를 어떻게 그렇게 잘해요?”남태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지우는 그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여기 머무르는 게 어쩌면 그의 안정과 회복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좋아요. 나 먼저 갈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 줘요.”“그래.”지우는 병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1층 로비에서 매니저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약을 받는 임다희를 만났다.지우는 재빨리 기둥 뒤에 숨었다. 보아하니 그녀는 허리와 다리를 다친
지우는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병원에 병 보러 오지 왜 왔겠어? 갑자기 왜 태준 씨를 물어?”임다희는 지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재차 확인했다.“태준이가 당신 안 찾았어?”“아니.”지우가 고개를 젓자 임다희는 가볍게 웃었다.“그쪽이 아니라면 대체 누굴 찾아갔을까?”“그게 무슨 말이야?”지우가 일부러 이해가 안 가는 척 묻자 임다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두 사람 재결합한 거 맞지?”지우는 침묵했다.임다희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조롱했다.“거짓말할 필요 없어. 두 사람 다시 만나는 거 아니까. 태준이가 당신을 찾지 않은 건 아마 약효가 너무 강해 당신 같은 여린 몸을 망쳐도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으니 다른 여자를 찾아 해결했나 보네.”“약효가 너무 세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지우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며 그녀를 만족시켜줬다.임다희는 속이 편안해지며 여유롭게 말했다.“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고. 이 시간에 당신 남자친구는 다른 여자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지우의 안색이 확 가라앉았다.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눈앞의 이 악랄한 여자를 갈기갈기 찢고 싶었다.남태준을 그렇게 괴롭게 만들고 무슨 염치로 지금 까불고 있을까?만약 남태준이 그녀가 임다희와 정면충돌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면 지우는 절대 임다희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남태준의 뜻에 따라 얌전하고 철든 여자친구가 되어야 했다.지우는 괴로운 척 연기하며 겨우 눈물 한 방울을 짜냈다.임다희는 그녀의 괴로운 모습을 보고 마음속의 분한 감정을 잠재우고는 실소를 터뜨렸다.“이게 당신들 사랑이야? 하하. 우습네!”그녀의 비아냥거림과 함께 차 문이 닫히고 차량이 서서히 빠져나갔다.지우는 마음을 가다듬은 뒤 택시를 잡아타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남태준을 걱정했다. 그의 옷이 흠뻑 젖어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지우는 기사에게 주소를 말하고는 남태준의 집에 가서 깨끗한 옷 몇 벌을 챙기려 했다.
지우는 마음이 뒤숭숭해져서 다른 서랍을 잽싸게 뒤지고 양말과 팬티를 챙긴 다음 옷장 문을 닫고 황급히 남태준의 집을 떠났다.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그녀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신경 쓰지 않으려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위로했지만 그럴수록 바늘에 가슴이 찔리는 듯 아파졌다.지우가 다시 병원에 돌아왔을 때 남태준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그녀는 짐가방을 가볍게 내려놓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의 옆을 지켰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수액을 보고 또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 서글퍼졌다.‘임다희는 몇 번이나 당신을 해쳤는데 왜 그 여자가 준 반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요? 전에는 당신을 죽일 뻔했고 지금은 당신을 이렇게 괴롭게 만들었는데 왜 계속 마음속에 그 여자 자리가 있냐고요.’지우는 생각할수록 슬퍼져서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려 그의 큰 손 옆에 기대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녀의 손은 저도 모르게 천천히 남태준의 따뜻한 큰 손을 만졌고 천천히 그와 손깍지를 꼈다.지금의 지우는 너무 불안하고 조금의 안정감도 느끼지 못했다.남태준이 아직도 임다희를 사랑할까 봐 두려웠다.남태준은 은은히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에 천천히 눈을 떴다.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하자 지우의 거뭇거뭇한 머리가 그의 곁에 엎드려 자는 것이 보였다.여자의 손이 그와 맞닿았다.남태준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그녀가 금방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다.남태준은 달콤한 행복에 마음이 꽉 채워진 것 같았고 손바닥을 천천히 조여 여자의 부드럽고 작은 손과 더 단단하게 밀착시킨 후 다시 눈을 감았다.조용한 병실에서 지우의 존재가 가져다준 따뜻한 행복에 남태준은 그 어떤 고난이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그날 밤, 남태준은 몸 안의 약효가 빠지자 서둘러 퇴원절차를 마쳤다.지우는 그에게 하루 더 병원에 머물며 지켜보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새벽 네 시에 중요한 임무가 있어서 지금 서둘러 경찰서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남태준은 지우가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고 그녀의
남태준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물었다.“임다희가 내게 선물한 반지 같아서 질투하고 기분 나빴던 거야?”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이 가라앉았다.남태준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고 흥분하며 지우의 몸을 덥석 껴안고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너도 나 좋아하지? 그래서 신경 쓰고 있는 거지?”“맞아요. 나 당신 좋아해요. 그 반지 돌려주면 안 돼요? 더 이상 갖고 있지 말아요. 네?”“지우야.”남태준은 흥분하는 말투로 달랬다.“다시 한번 말해주면 안 될까?”지우는 순순히 중복했다.“그 반지 돌려주라고요.”남태준의 호흡이 거칠어지며 긴장해서 말했다.“그거 말고 첫 마디.”지우는 얼굴이 화끈거려 그의 가슴팍에 묻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수줍게 말했다.“좋아해요. 태준 씨.”“나도 너 좋아해.”남태준은 크게 흥분하여 매력적인 목소리로 지우의 귓가에 속삭였다.“사랑해. 지우야.”“그럼 그 반지는...”남태준이 바로 말을 끊었다.“그거 임다희가 준 반지 아니야.”지우가 호기심에 고개를 들고 물었다.“그럼 누구 거예요?”“그때 큰 마약 조직을 잡으면서 많은 사람을 체포하고 물건도 압수했지만 배후의 보스만 잡지 못했어. 그 신비로운 배후의 보스는 다들 준영이 형이라고 부르는데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어.”“그 반지는 그 사람이 잠자리에 들 왕비로 선택받은 중요한 증거야. 그것만 있으면 그 사람 배에 탈 수 있거든.”지우는 충격적인 표정으로 남태준을 밀어내고 눈을 부릅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남색을 팔아 접근했던 거예요?”남태준이 피식 웃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난 선택받았지만 그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신분이 폭로됐어.”“만약 폭로되지 않았다면...”지우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용기가 없었고 남태준은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그 사람을 만났다면 지금쯤 아마 감옥에 갇혔겠지.”지우가 호기심에 물었다.“그 사람은 잠자리에서 어떤 역할인데요?”남태준은 미간을 잔
남태준은 경찰서로 돌아와 밤새 배치하고 새벽 4시에 많은 경찰 병력을 이끌고 이웃 마을 산꼭대기의 영화기지를 공격했다.산꼭대기에 가까운 사람들은 늦은 밤 총소리에 잠이 깼다.날이 밝자 많은 경찰차가 정적을 울렸고 인터넷에서는 난리가 났다.지우가 한창 단잠에 빠져있는데 송수빈의 전화에 잠이 깼다.지우가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송수빈의 전화를 받자 송수빈은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지우야. 지우야. 얼른 인터넷 확인해봐. 세상에. 우리 마을에서 큰 뉴스가 났어. 어젯밤 얼마나 짜릿했는 줄 알아?”“우리 마을에서?”지우는 일어나 게슴츠레한 눈을 비볐고 송수빈이 황급히 수정했다.“아니. 우리 마을 아니고 옆 마을. 산에 있는 촬영기지 있잖아. 새벽 4~5시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경찰차가 잔뜩 오가고 난리가 났대.”새벽 4~5시? 지우는 남태준 생각이 나서 군말 없이 송수빈의 전화를 끊고 남태준의 휴대전화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전원이 꺼진 상태였다.지우는 그가 임무를 나갈 때 전원을 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마음이 조마조마해진 그녀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곧바로 인터넷에 접속해 인근의 기사를 검색했다.지우는 아침 내내 걱정하며 전화도 여러 번 했다.정오가 되자 지성이 밖에서 돌아와 득의만면한 얼굴로 물을 따라 마시더니 흥분해서 말했다.“누나! 육건우가 잡혔대. 하늘도 양심이 있지.”“육건우가 잡혔다고?”지우가 긴장하며 물었다.“마약 형사한테 잡혔대? 태준 씨는 괜찮아?”“누나 남자친구 괜찮던데? 내가 방금 육건우가 묵고 있는 호텔 입구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태준이 형이 경찰 몇 명과 함께 육건우를 경찰차에 태우는 걸 봤어.”아침 내내 근심하던 지우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육건우는 잡히면 사형 아니면 종신형이야. 네가 진 빚도 갚지 않아도 돼.”지성이 흥분해서 말했다.“그러니까 말이야. 죽어도 싸지 뭐.”“이번 사건으로 교훈을 얻어서 다시는 도박 하지 말고 착실하게 살아.”지성은 테이블에 있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소
경찰이 한 달간 배치한 작전이 오늘로 끝이 났다.산에서 거대한 독극물 재배 기지와 원자재가 발견되었고 2t의 현물도 압수되었다.남태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촬영기지의 투자자 육건우는 체포되어 입건되었다.다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그의 변호사가 와도 보석으로 풀려날 수 없었다.취조실.남태준은 쇠 옥에 갇힌 육건우를 향해 말했다.“침묵은 최선의 선택이 아니에요. 당신이 말을 하든 안 하든 증거가 확실하다면 마찬가지로 형을 선고할 수 있어요.”육건우는 피식 웃더니 조금의 당황함도 없이 여유작작한 모습이었다.경찰이 아무리 검문해도 침묵으로 일관했다.“대장님, 잠깐 나와보셔야겠어요.”취조실 문이 열리면서 오신우가 그를 불렀다.남태준이 일어나서 떠나려고 할 때, 육건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남태준, 난 그저 평범한 영화 투자자일 뿐이야. 마약 같은 거에 손댄 적 없으니까 나 풀어줘.”남태준은 얼굴이 어두워져서 육건우를 돌아보니 그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눈가에 냉기가 돌았다.남태준이 나가 문을 닫는 순간 오신우가 긴장해서 말했다.“대장님. 지성이가 신고하러 왔어요.”“지성이가?”남태준이 긴장하며 얼굴을 찡그리자 오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남태준은 밖으로 나가면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무슨 일이야?”“누나가 실종됐대요.”오신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태준은 황급히 달려나갔다.그는 달려가면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종일 꺼둔 전원을 켰다.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계속 들어왔고 그중에 지성도 있었다.남태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경찰 프런트 데스크에서 뛰쳐나왔고 표정은 엄숙하고 무거웠다.지성은 남태준을 보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더욱 초조해서 말했다.“형...”남태준이 다급히 물었다.“지우가 왜?”지성은 눈시울이 흠뻑 젖은 채 그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누나가 아침에 장 보러 간다고 나갔다가 계속 집에 안 돌아왔어요. 누나 스쿠터는 길바닥에 쓰러져있는데 사람은 안 보여요.”그때 옆에
종일 걱정 안 하다가 이웃이 알려줘서야 경찰에 신고하다니.남태준은 깊은숨을 내쉬고는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오늘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역시 낯선 번호의 부재중 전화가 걸려왔었다.그는 휴대전화를 동료에게 건네며 말했다.“이 번호 감청해줘.”동료가 의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납치범이 확실해요?”“몰라. 일단 시도해봐.”지우가 실종된 지 하루가 지나도록 납치범은 지성과 진효연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남태준을 노린 납치일 것이다.경찰은 곧바로 휴대전화를 들고 감청실 안으로 들어갔고 남태준은 지성을 데리고 함께 갔다.경찰이 휴대폰을 장치에 연결했다. 지성은 앞에 놓인 크고 복잡한 기기들을 보며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몰라 긴장하며 기다렸다.경찰은 숨을 죽이고 남태준의 다이얼을 관찰했지만 벨이 십여 차례 울리고 자동으로 꺼질 때까지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모두가 상심하고 있을 때 그 번호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남태준은 움찔 놀라더니 긴장된 눈으로 몇 명의 동료를 보았다.그들은 감청 장비의 데이터가 달리고 있으니 남태준에게 연결하라고 눈짓했다.남태준은 핸즈프리를 켜고 연결한 뒤 여유롭게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시죠?”휴대전화를 연결한 순간부터 컴퓨터 화면에 위치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상대방 쪽에서 음성 변조한 소리가 들렸다.“남태준, 여자친구 살리고 싶으면 지금 당장 육건우 풀어줘.”지성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긴장하여 입을 틀어막았다.위치를 파악한 경찰은 곧바로 몸을 돌려 감청실을 빠져나와 분초를 다퉈 구조하러 나갔다.남태준은 담담하게 웃으며 여유롭게 말했다.“지금 장난해? 내 여자친구는 지금 집에 있어.”그러자 휴대전화 너머로 침묵이 흐르더니 지우의 고통스러운 고함이 들려왔다.“악!”지우의 소리를 듣는 순간 남태준은 만 개의 화살이 가슴을 뚫은 듯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팠고 얼굴빛은 잿빛이 되었다. 휴대전화를 꽉 쥔 큰 손에도 핏줄이 솟아올랐다.그는 이미 호흡이 흐트러졌지만 말투는 이상하리만큼 차
유승아는 조금 경악했다.“서연이도 있었네?”그러자 백건이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다음 달 결혼에 대해 아주머니가 너무 재촉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너와 의논하려고 왔어.”남서연은 괜히 애태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유승아는 남서연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서연아, 나 건이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너...”남서연은 급히 말했다.“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전 먼저 가볼게요.”그녀가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백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너 갈 필요 없어. 여기서 들어.”남서연은 경악했고 유승아는 얼굴이 굳어지며 난처한 태도로 말했다. “건아, 그건 좀 아니지. 우리 두 사람 얘기야. 서연이는 외부인이고.”백건은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외부인이 아니라 내 아내야.”남서연은 깜짝 놀랐고 유승아는 더욱 경악했다.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백건을 바라보았다.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말에 남서연은 어리둥절했다.벌써 그의 아내가 되는 건가?유승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두 사람... 만나기로 한 거야?”남서연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자 백건이 또박또박 대답했다.“응. 몇 분 전에 결혼까지 약속했어.”유승아는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짐짓 대범한 척 말했다.“축하해.”“소파에 가서 앉아서 말해.”백건은 남서연의 손을 잡고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유승아도 따라가 앉더니 침울하게 숨을 푹 내쉬었다.“우리 집 쪽 친척들은 이미 청첩장을 받았어. 다들 축하 전화를 걸어오고 있어. 오늘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나를 찾아오셔서 결혼식은 반드시 거행될 거라고 하셨어. 어떻게든 너를 잡아서 교회에 묶어둘 테니까 안심하고 너의 신부가 되라고 하셨어.”백건이 되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유승아는 남서연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내가 뭘 어떻게 생각해? 오랫동안 네 여자친구였으니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잖아.”백건은 서둘러 남서연을 바라보며 나지
그녀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사진은 무엇일까?여자 사진?남서연은 기분이 가라앉아 말했다.“나 먼저 돌아갈게요.”그러자 백건이 그녀에게 다가갔다.“나랑 같이 집에 가서 어른들께 상황을 설명해 드리자.”“안돼요.”남서연은 긴장감에 못 이겨 안절부절했다.“일단 아직은 안돼요. 내가 먼저 가서 가족들 생각을 알아보고 다시 결정해요.”“어떤 상황이든, 어떤 결과든, 나 혼자 감당할 거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서두르지 말고 우리 천천히 얘기해요. 내가 우리 가족들 설득하고 오빠는 오빠 가족들 설득해요. 네?”백건은 여전히 변수가 있을까 봐 걱정했다.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행동해 남서연을 놀라게 해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그래. 네 말대로 해.”남서연은 그가 덮은 앨범을 가리키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덤덤하게 물었다.“누구 사진이에요?”백건은 고개를 돌려 협탁을 보더니 마음이 찔려 말했다.“내 사진이야.”그건 백건이 전에 몰래 찍었던 남서연의 사진이었다.결혼 후에만 그녀에게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가 한 모든 것들이 오랫동안 계획한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어머니의 강력한 방해를 무릅쓰고 그는 강력한 권한을 동원하여 인사팀을 통해 남서연의 면접을 합격시키고 그녀를 ND에 무사히 입사하게 했다.또 직권을 이용하여 남서연을 데리고 해외 출장을 갔다. 그 목적은 바로 남서연을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만든 다음 그 기회를 빌려 잠자리를 갖고 그녀를 임신시키는 것이었다.두 차례의 성관계에도 보호조치를 하지 않은 것도 그녀를 임신시키기 위함이었다.그는 감히 남서연에게 말할 수 없었다. 남서연이 그를 비열하다고, 수단이 더럽다고, 파렴치하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결혼하고 나서 다시 그녀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천천히 용서를 빌어야 했다.남서연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백건은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발이 미끄러질까 봐 보호했다. 남서연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보호하
심장이 두근두근 떨려서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녀는 초롱초롱한 큰 눈으로 물끄러미 백건을 바라보며 머리가 하얘졌다.결혼이라는 두 글자가 백건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 큰 유혹이었다.그녀가 당황하고 있을 때, 백건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왼쪽 무릎을 그녀 앞에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놀란 그녀는 소파에 붙으며 경악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뜨거운 눈빛으로 부드럽게 말했는데 매우 절실해 보였다.“서연아, 나와 결혼해줘. 응?”‘지금 아이를 위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한 거야?’남서연은 아주 기뻤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괴롭고 불안했다.“두 집안 어른들 모두 찬성하지 않을 거예요.”“너만 원한다면 그런 것들은 전부 내가 알아서 해.”남서연은 차마 배 속의 아이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가족 모두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현실 생활에서 많은 부부가 선을 보고 결혼하니 먼저 결혼하고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결혼 후에 그녀가 잘 보인다면 백건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남서연은 멋진 미래를 상상하며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은 감격에 겨워 붉어진 눈시울이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어지러운 숨결로 소파에 앉더니 남서연을 덥석 품에 끌어안았다.남자의 동작은 절박했고 강렬한 포옹에 그녀는 몸이 아팠다.남서연은 그의 등 뒤에 두 손을 널어놓고 턱을 그의 어깨에 괴고는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았다.귓가에 남자의 무거운 호흡과 함께 약간 울먹이는 쉰 목소리가 들렸다.“고마워. 서연아. 정말 고마워. 반드시 좋은 남편과 좋은 아빠가 될게.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최선을 다해서 네게 가장 행복한 미래를 줄게.”남서연은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 몽환적이고 아름다웠다.다만, 앞으로 어떻게 가족을 대해야 할까?아이 때문에 결혼하게 되면 백건은 앞으로 후회하지 않을까?
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슬픈 듯 중얼거렸다.“나 임신했어요.”백건은 심장이 움찔했고 온몸은 걷잡을 수 없이 흥분했다. 그는 제자리에서 거의 뛰기라도 하듯 벌떡 일어났다. 가슴의 흥분을 터뜨리기 위해 미친 듯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서연이가 내 아이를 임신했다고? 나 아빠가 되는 거야? 서연이 아이의 아빠? 이거 지금 꿈 아니지?’그는 갑작스러운 행복을 애써 눌렀다.남서연은 그의 반응에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니 남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를 등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이 남자가 대체 어떤 마음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그녀와 마찬가지로,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까?그녀처럼 망연자실할까?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남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책임지라고 찾아온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다만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에 오빠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서요. 만약 수술하게 되면 나와 함께 가줘요.”백건은 무거운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순식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그는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얼굴빛은 굳어졌고 말투는 엄숙했다.“뭐? 수술한다고?”남서연은 주눅이 들어 쳐다보며 말했다.“네. 혼전 임신은 안 돼요.”가족들이 만약 그녀가 혼전임신이라는 것을 안다면 반드시 백건을 때려죽일 것이다.숨이 가빠진 백건은 두 손을 꼭 잡았고 엄숙한 말투에 약간의 온기를 더해 부드럽게 달랬다.“서연아, 아이는 포기할 수 없어. 내게 책임질 기회를 줄 수 없어? 나 좋은 아빠가 될게.”남서연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백건을 바라보며 멍해졌다.그녀의 생각과 달랐다.그녀는 백건이 그녀보다 더 이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아이의 존재가 그를 위험하게 만들 테니까.백건은 긴장된 듯 입술을 오므리고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그리고 너만 괜찮다면 나... 좋은 남편이 될 수도 있어.”남자는 주먹을 문지르며 가늘게 떨릴 정도로 긴장했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남서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의 시주를 기
남서연은 복잡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저예요.”백건은 숨이 거칠고 오랫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말이 막힐 정도로 긴장했다.그는 남서연이 무슨 일로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 몰라 계속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다.“지금... 시간 있어요?”남서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쭈뼛쭈뼛 물었다.백건이 다급하게 대답했다.“있어.”“잠깐 만나서 얘기할래요?”“좋아.”백건이 곧바로 대답하더니 또 물었다.“어디서 볼래? 데리러 갈게.”남서연이 생각해보니 밖에는 보는 눈이 많아 안전할 것 같지 않았다.“데리러 올 필요 없어요. 내가 오빠 집으로 갈게요. 반 시간이면 도착해요.”“좋아.”남서연은 전화를 끊고 일어서서 마스크를 쓰고 공중화장실을 나섰다.한편, 공항 가는 차에 타고 있던 백건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명령했다.“차 돌려서 집으로 가.”“대표님, 비행기 시간 이미 다 됐어요.”백건은 정색해서 말했다.“이번 행사 취소하고 바로 집으로 가.”하현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그 전화를 들으니 아마 남서연일 것이다.백건에게 새 시즌 발표회는 취소할 수도 있고 연기할 수도 있고 없어도 되는 일이다.그러나 남서연을 만날 어떤 기회도 그는 놓칠 수 없었다.하현우는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30분 후.남서연은 산 중턱 별장에 와서 막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하현우가 이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고 공손히 인사했다.“서연 아가씨,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남서연은 살짝 놀랐다가 하현우인 걸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녀는 경치가 아름다운 화원의 앞마당을 지나 웅장한 큰 집으로 들어갔다.문은 열려 있고 백건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흰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어 우아하고 멋스러우며 준수한 매력을 자랑했다.남자는 그윽한 눈동자로 남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를 다시 만난 남서연은 마음이 혼란스럽고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마음속에 토끼 한 마리가 숨
백건은 당황해서 화를 내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하현우는 침을 삼키고 목숨을 걸고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 여자가 대표님과 관계를 맺은 후 연락을 끊었다면 아마도 대표님의 돈과 권력 때문에 감히 저항하지 못했을 거예요. 진짜 대표님께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백건은 화를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아니, 돈과 권력이 부족한 여자가 아니야.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아.”하현우는 경악하더니 속으로 크게 흥분했다.‘뭐야? 대표님 설마 서연 아가씨와 잔 거야? 대단하네!’‘목숨을 걸고 남씨 가문의 권위에 도전하다니. 목숨을 바칠 정도로 위대한 사랑이라니.’하현우는 은근히 충고했다.“대표님, 어떤 여자들은 성격이 순하고 마음씨가 착해서 아무리 권위 있는 집에서 자라도 담은 작아요. 어려서부터 너무 잘 보호 받으며 자라서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해도 거절할 줄도, 반항할 줄도 모르죠. 그래서 도망을 치죠.”백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심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거절하지 않으면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가 일방적으로 남서연에게 상처를 준 걸까?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위해 일방적인 행위를 가한 그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아닌가?백건은 눈을 감았고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남서연은 늘 낙천적인 성격이었다.그녀는 두 번의 잠자리로 인해 계속 괴로워하지 않았다.백건은 어쨌든 그녀가 짝사랑하는 남자였으니 아무리 쓰레기일지라도, 이미 일어난 이상 좋은 추억으로 여기기로 했다.그녀의 짝사랑도 욕망을 만족시킨 셈이었다.만약 백건이 그녀와 사귀고 싶지 않으면서 계속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여다혜가 말한 대로 그녀는 더 이상 타락해서는 안 되었다.남자는 여자와 달리 사랑이 없어도 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그녀는 백건의 전화를 받지 않고 그의 메시지에도 답장하지 않기 시작했다.그 후 백건은 포기하고 그녀를 찾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도 접촉이 많지 않았으니 남서연은 일
“남서연 씨는요?”직원이 공손하게 대답했다.“대표님, 서연 씨는 방금 가방을 챙겨 나갔습니다.”백건은 군말 없이 급히 몸을 돌려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남서연의 번호를 눌렀다.벨이 몇 번 울리더니 끊겼다.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남서연이 다시 끊었다.세 번 연속 시도한 후 결국 포기했다.백건이 1층 로비까지 쫓아갔지만 이미 남서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풀이 죽어 위층으로 몸을 돌렸다.종일 그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날이 저물자 창밖의 네온사인이 유리창에 비쳐 창 앞의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그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창문을 마주하고 하늘가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눈 밑은 번화한 경치였지만 그의 마음속은 황폐했다.그는 남서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노크소리가 들렸고 하현우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미 10시예요. 퇴근 안 하세요?”백건은 침묵했다.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고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뒤덮어 섬뜩하여 그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하현우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이미 몰래 저녁을 먹었지만 집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아무리 야근 수당이 있어도 또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그는 내키지 않았다.하현우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대표님,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제가 도와드려요?”백건은 말없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떠나갔다.하현우는 급히 옆으로 피했고 등이 뻣뻣해져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백건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는 쪼뼛쭈뼛 따라갔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백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고 깊고 어두운 눈으로 창밖 거리의 야경을 바라보았다.차를 몰던 하현우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추측했다.“대표님, 혹시 서연 아가씨와 연락이 안 되세요?”고개를 돌려 하현우를 보는 백건의 눈빛은 차갑고 굳어 있었다.하현우는 놀라서 침을 꿀꺽 삼키더니 등
[좀 바빠요.][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응?][서연아, 처음에 너도 거절하지 않았잖아? 왜 이제와서 이래? 이거 무슨 뜻이야?][기다릴 테니 내려와. 아니면 내가 올라간다?]남서연은 백건이 보낸 몇 개의 메시지를 보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마음이 더욱 불안해져 여다혜를 돌아보았다.여다혜는 연애경험이 비교적 풍부해서 거의 감정 전문가인 셈이었다.남서연은 의자를 옮겨 여다혜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다혜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여다혜는 책상 위에 엎드려 졸면서 중얼거렸다.“말해.”“내 친구가 있는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를 계속 짝사랑했어. 근데 그 남자는 계속 그 친구에게 차가웠고 만날 때마다 일부러 숨었어. 마치 싫어하는 것처럼.”“나중에 내 친구가 커서 그 남자가 먼저 접근했고 아무 이유 없이 두 번이나 잤어. 그 남자는 대체 무슨 뜻일까?”여다혜는 번쩍 튕겨 일어나 앉더니 깜짝 놀라며 입을 가리고 남서연을 끔벅끔벅 바라보았다.“왜 그래?”남서연이 묻자 여다혜는 비통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서연아, 너 나쁜 남자 만났구나.”“내가 아니라 내 친구라고.”“그래그래. 네 친구.”여다혜는 서둘러 말을 바꾸고 슬픈 듯 입을 납작하게 하고는 눈에는 동정이 가득했다.“네 친구 나쁜 남자 만난 거야. 정말 너무해. 대체 어느 개자식이야?”남서연은 긴장감에 침을 삼키고 숨을 몰아쉬었다.“무슨 말이야?”여다혜는 그녀의 말을 바탕으로 분석했다.“네 친구는 커서 예쁜 여자가 된 게 틀림없어. 그래서 그 남자가 혹한 거지. 어렸을 때부터 네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어도 자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 남자는 하반신으로 고민하는 수컷이니까.”남서연은 얼굴이 희끗희끗해지며 축 처져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여다혜는 남서연의 차디찬 손을 맞잡고 위로했다.“서연아, 네 친구는 감정에 무지하고 세상 물정에 어둡고 순진해서 남자한테 속았을 거야.”“그런... 사람 아니야.”남서연은 무기력하게 해명했다.“그
끝난 후, 너무 수줍은 남서연은 백건이 어찌할 수 없는 틈을 타 재빨리 자신의 옷을 챙겨 입고 거의 도망가듯 뛰쳐나갔다.“서연아...”백건은 옷을 챙겨 입지 못해 따라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사무실을 뛰쳐나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숨을 헐떡였다.그녀가 디자인 부서로 돌아왔을 때 여다혜는 급히 걸어가서 책상을 두 손으로 받치고 그녀의 붉어진 얼굴과 약간 불그스름한 입술을 보았다.“서연아,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너 점심 먹었어?”남서연은 마음이 켕겨 감히 여다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먹었어. 혼자 먹었어.”“식당에서 너 못 봤는데? 그리고 평소에는 30분이면 다 먹더니 오늘은 왜 한 시간이나 걸렸어?”“나... 구내식당이 아니라 밖에서... 멀리 가서 먹었어.”여다혜는 불쾌해하며 그녀의 손을 두드렸다.“왜 좋은 곳에 나는 안 데리고 갔어?”남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귓가에 있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다음에. 다음에 꼭 데리고 갈게.”여다혜가 깜짝 놀라 외쳤다.“너 움직이지 마.”남서연은 경악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여다혜는 그녀의 긴 머리를 쓸어올리고 귓불 뒤 목덜미에 닿는 위치를 보며 의아해하며 물었다.“너 목에 왜 빨간 자국이 있어? 마크 같아.”“무슨 마크?”“키스 마크!”크게 당황한 남서연은 황급히 긴 머리를 풀어 목을 가리고는 화난 척 말했다.“함부로 말하지 마. 그냥... 긁은 거야. 모기한테 물려서 난 자국이야.”모기에 물린 것인지, 키스 마크인지 여다혜는 경험자로서 한눈에 알 수 있었다.더군다나 남서연은 지금 볼이 붉어지고 눈 밑에는 수줍음이 가득했다.여다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서연아, 너 정말 우리 오빠 안 좋아해?”“안 좋아해. 자꾸 엮지 마.”남서연이 나지막이 말하자 여다혜는 어깨를 으쓱하고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돌아가서 희망이 없다고 오빠에게 말할게. 네 생각하지 말고 빨리 다른 여자 만나라고.”남서연은 담담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