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유난히 귀에 거슬렸지만, 그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소지아는 그를 막던 손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도윤은 이미 그녀의 패딩 안으로 손을 뻗었는데, 그 안에는 스웨터, 스웨터 안에는 패딩 조끼, 조끼 안에는 내복도 있었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너 할머니야? 왜 이렇게 많이 입었어?”소지아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춥단 말이야.곧 이도윤은 한 가지 일을 의식했다. 분명히 이렇게 많이 입었지만 소지아는 전혀 뚱뚱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도대체 얼마나 말랐으면?그의 손바닥은 그녀의 피부에 닿았고, 그녀의 등이 무척 배기는 것을 느꼈는데, 마치 위에는 얇은 살만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제 이렇게 말랐을까?이도윤의 방금 나타난 욕망은 깨끗이 사라졌고 심지어 보이지 않는 죄책감으로 가득 찼다.소지아도 일이 어떻게 이렇게 발전했는지 몰라 불쾌하게 그 칠흑 같은 동공을 쳐다보았다.“나한테 이러면 백채원에게 들키는 거 두렵지 않니? 잊지 마,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이도윤의 냉담하고 각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와 백채원의 일은 네가 이래라저래라 할 게 없어. 방금 전에 네가 제의한 거, 난 동의했어. 지금부터 네 아빠의 빚은 네가 갚아.”소지아는 급히 입을 열었다.“그럼 레오는...”“내가 찾을 거야.”그가 약속을 하자 소지아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남자의 눈빛은 갈고리처럼 그녀의 몸에 떨어졌다.“그리고 너, 내가 필요로 할 때 반드시 제때에 도착해야 해.”소지아는 그가 이 말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그녀의 번쩍이는 눈물을 보며 이도윤의 차가운 손끝은 그녀의 뺨을 스치며 목소리가 경박하고 경멸했다.“나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어. 난 아직 네 몸에 대해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내가 널 건드릴 때마다 넌 죽을 만큼 괴롭겠지.”이도윤의 차가운 눈빛은 줄곧 그녀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았다.“이 방식보다 더 너를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이 어딨지? 안 그래.”
이도윤은 그리 크지 않은 이 아파트를 살펴보았는데 곳곳에서 소지아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그는 방에 놓여진 아기의 작은 침대를 보았다. 이는 그녀가 유일하게 그 집에서 가져간 물건이었다. 이도윤은 마음이 복잡했다.소지아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따라갔을 때, 그는 한 가지 일을 깨달았다.그가 아무리 그녀를 미워해도, 그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이 두 가지 복잡한 감정은 서로 뒤엉켜 있었다.마치 가시덤불이 두 사람을 매섭게 감아놓은 것처럼 피투성이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달아날 수 없었다.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소지아를 심연으로 몰아넣었는데, 그 자신은 또 어찌 벼랑 끝에 서서 휘청거리지 않았겠는가.이도윤은 침대에 있는 인형을 들어 보았다. 이 2년간의 수백 일 동안, 소지아는 이 인형을 안고 잠을 청했던 것 같았다.만약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소지아, 매번 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의 입에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사랑이 넘쳐흐른다.그는 그녀를 떠날 방법이 없었다.욕실에서 오랫동안 쉬었더니 소지아는 마침내 좀 좋아졌다.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식은땀을 흘린 몸을 이끌고 한 걸음 한 걸음 거실로 향했다.그녀는 이도윤처럼 시간을 중시하는 사람은 벌써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들어 베란다 옆에 기대어 있는 사람을 보았다.두 손가락 사이에는 불빛이 반짝거렸는데, 그는 전보다 담배 피우는 횟수가 훨씬 많아진 것 같았다.하지만 소지아를 놀라게 한 것은 이도윤이 뜻밖에도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아니면 그가 자신을 짓밟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인가?여기까지 생각하자 소지아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녀는 따뜻한 물 한 잔을 받아 목을 축였다.그리고 천천히 이도윤을 향해 걸어갔다.“여기서, 아니면 침대에서 할 거야?” 그녀의 말투는 싸늘해서 마치 기계 같았다.이도윤은 눈을 들어 창백한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고 연기를 한 모금
이도윤은 진환이 그에게 옷을 보내온 줄 알고 직접 걸어 나왔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뜻밖에도 임건우였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지아를 향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손님이야?”소지아는 잠옷을 입고 있었고, 이도윤은 목욕 수건을 둘러싸고 있었으니 아무리 봐도 부부간에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행위를 마친 모습이었다.임건우는 바보도 아니고, 설맞이 용품을 내려놓고 넋을 잃은 채 떠났다.소지아는 설명하지 않았다. 임건우가 깊이 빠질수록 오히려 위험해졌으니 이러면 그에게나 본인 자신이게도 모두 좋았다.이도윤은 차갑게 그 설맞이 용품들을 바라보았다.“내가 쩨쩨한 거야?”2000억 원의 위자료, 그야말로 평생 다 쓰지 못할 돈이었다.“이따가 쓰레기 수거하는 아저씨한테 줄게.”이도윤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자주 오는 거야?”“내가 감기에 걸렸을 때 왔었어.”“다음은 없어.”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냉혹했다.소지아는 잠시 멈추었다가 순종하며 대답했다.“응.”이도윤이 정리를 마치고 떠날 때에야 그녀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레오에 대해서 말이야.”“찾으면 알려줄게.”그리고 문이 닫혔다.그가 한 사람을 찾는 것은 그래도 매우 쉬웠다.소계훈에게 이제 살 희망이 있었다.소지아는 소파에 주저앉아 고개를 들어 눈을 감고 한숨을 돌렸다.오후.임건우는 집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지금 출국 연수할 기회가 있는데 그가 몇 년간 나갔다가 다시 귀국하기만 하면 직접 원장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다고 표시했다.“죄송해요, 아버지, 저 당분간 출국하고 싶지 않아요.”“이거 엄청 좋은 기회야, 이 아빠가 얼마나 노력해서 널 위해 쟁취한 건데. 전국에 딱 세 명 밖에 갈 수 없는 거야.”임건우는 씁쓸하게 웃었다.“이도윤이 준 거겠죠.”“나는 너와 이 대표님 사이에 무슨 일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이 대표님이 나한테 직접 이 소식을 알려줬어. 너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 집안을 위해서, 그리고 네 동생들을 위해 잘 생각해봐.”말을 잘 듣
소지아는 동작을 멈추고 말투는 약간 엄숙해졌다.“아주머니, 선을 넘었네요. 난 우리 아빠와 이야기를 좀 할 테니 먼저 나가 있어요.”“네, 아가씨.” 간병인은 문을 살며시 닫았다.소지아는 평소와 같이 인내심을 가지고 소계훈을 위해 몸을 닦고 머리카락과 손톱을 다듬었다.한쪽의 심전도에서 그의 평온한 심박수를 나타내지 않았다면, 그녀는 거의 그가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할 것이다.오늘은 날씨가 좋았고 더는 폭설이 내리지 않았다. 그녀는 커튼을 걷어 따뜻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게 했다.“아빠, 나도 지금 점점 아빠와 함께 할 시간이 줄어들고 있어요. 빨리 깨어나지 않으면 아마 나를 볼 수 없을 거예요. 참, 나 이도윤과 이혼했어요.”소지아의 목소리는 매우 가벼웠다. 햇빛이 그녀의 입가의 미소에 떨어지자 그녀는 계속 말했다.“비록 이 2년 동안 이도윤이 날 괴롭혔지만, 이혼할 때는 오히려 매우 대범했어요. 집, 차, 주식, 줄 거 모두 다 줘서 나는 지금 부자예요.”“나는 엄마가 떠날 때, 아빠가 나에게 인생은 아쉬움을 남겨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요. 그래야 우리는 소중히 여길 줄 안다고. 그 후부터 나는 주변의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겼지만, 결국 나는 여전히 아무도 남길 수 없었어요.”“아빠, 또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요. 전에 우리 별장을 산 우씨 어르신이 소씨 별장을 경매에 내놓을 계획이래요. 난 그 집을 살 거예요. 그때 레오가 아빠를 치료하면, 남은 생을 거기서 한가롭게 보내요. 내가 불효녀라서 아빠보다 먼저 떠나네요. 아빠를 보살필 수 없을 같아요.”소지아는 오후 내내 소계훈과 말했고, 햇빛이 하늘에서 사라졌을 때, 그녀는 여전히 소계훈이 깨어난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웃었다.“역시 기적은 모두 소설에서만 일어나는군요.”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YH 그룹 대표, 거금을 들여 약혼녀를 위해 고급 예복을 주문함’ 이란 뉴스를 봤다. 아래에 예복의 사진을 보았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 저녁의 자선 만찬은 우씨 집안 사람이 전적으로 꾸렸다. 그들은 경매가격의 10%를 자선 기부한다는 말을 내걸었다. 사실 모두들 잘 알고 있었는데, 우씨 집안은 최근 자금에 문제가 생겨 물건을 좀 팔아 현금을 챙기려 했던 것이다.연회의 사람들은 모두들 정신이 딴 데에 있었다. 우씨 어르신은 정말 눈이 밝기로 유명했다. 어릴 때부터 골동품 수집하는 것을 좋아해서 우씨 집안에 적지 않은 보배를 숨겼다.모처럼 이번에 어르신이 경매를 열었으니, 명문 가문의 사람들도 모두 오게 되었고,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그 보물들을 보고 싶어했다. 소씨 집안 별장도 경매 행렬에 있다고 했다.소지아와 김민아는 시간을 맞춰서 왔는데, 김민아가 차창에서 머리를 내밀었다.“내가 차를 잘 세우고 올 테니 넌 먼저 올라가서 나 기다리고 있어. 앞자리 차지하고.”“좋아.”김민아는 이런 모임에 참가한 적이 없어 도서관처럼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줄 알았다. 사실 이런 자리는 모두 사전에 앉는 자리를 이미 배치했다.일반적으로 위치를 나누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첫 번째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배열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선 자금에 의존하는 것이었다.마침 그녀는 미리 김민아에게 기부금을 처리하게 했기 때문에 그녀도 어렵게 자리를 얻었으니 어디 앉고 싶은 곳이 있다면 앉을 수가 있었다.다만 소지아는 여전히 한 가지 일을 깜빡했는데, 문앞에 도착하자마자 가로막혔다.“아가씨, 초대장 있습니까?”경비원은 소지아를 난처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온 사람 중 예복을 입지 않고 패딩 입고 온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안의 털이 다 나온 패딩을.소지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내 친구한테 있어요.”“미안합니다만, 친구분이 오셔서 함께 들어가셔야 합니다.”이런 장소는 원래 사적인 자리라 소지아도 경비원의 직책을 이해할 수 있었다.들어가는 손님들도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소지아는 등을 곧게 펴고 태연하면서도 침착했다.바로 이때, 여금청이 백채원의 팔을 안고 나타났는데, 멀리서
“아가씨, 제가 바래다줄까요?”진환은 여전히 소지아에게 공손하게 말했다.“아니야, 난 내 친구를 기다리고 있어. 아, 저기 오네.”소지아는 멀리서 붉은색 담비 외투를 입은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마치 홍학 같았고, 살구색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소지아는 문득 그 여자를 알아보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김민아가 천천히 온 이유가 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김민아는 향기로운 바람을 안고 다가왔고, 과장된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소지아는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떠나려 했다.“아, 아니구나. 사람을 잘못 봤어. 먼저 들어가자.”“지아야, 같이 가. 좀 기다려!”김민아는 하이힐을 신고 진환 앞에 섰다. 그리고는 선글라스를 벗더니 진환을 노려보며 말했다.“진환 씨, 또 지아를 화나게 한 건가요?”진환은 여자들의 옷차림에 대해 평소에는 평가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참지 않고 말했다.“여기가 클럽인 줄 아세요? 이런 옷을 입고 디스코하러 온 건가요?”김민아는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다. 또한, 이도윤에게 항상 불만이 있었기에 진환을 보자마자 더욱 화를 내며 말했다.“진환 씨가 죽으면, 전 이 옷을 입고 당신 무덤에서 춤출 거예요.”그러나 진환은 더 이상 김민아와 다툴 생각이 없었다.“따라오세요.”그러자 김민아가 초대장을 꺼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필요 없어요. 저도 초대를 받고 왔거든요.”두 사람이 말하는 동안 소지아는 이미 2층에 올라가 있었다. 이전에 소계훈도 이곳에 오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왜냐하면 많지 않은 취미 중 하나가 바로 골동품 수집이었기 때문이다.고대의 대형 솥에서부터 100년 전의 옥기까지, 부유할 때 많은 유물을 구매했었다. 또한, 소계훈은 여가 시간에 도자기를 직접 만들어 찻잔이나 그릇을 구웠다. 소계훈은 문학적 감각이 넘치는 예술가였고, 증거가 없었다면 소지아는 소계훈이 그런 잔인한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소지아는 전통미가 넘치는 건물 안을 걸어 다
이때 연회는 아직 정식으로 시작되지 않아 모두들 흩어져서 전시품을 살펴보다가 여금청의 목소리에 하나하나 목을 들고 그들을 바라보았다.백채원은 이도윤이 눈살을 찌푸린 것을 보고 그의 팔을 끼며 말했다.“금청과 소지아 씨는 동창생인데 전에 무슨 일이 좀 있었 나봐요. 도윤 씨가 두 여자애의 사적인 일에 끼어드는 것은 적합하지 않겠죠?”이도윤은 팔을 그녀의 팔에서 꺼내며 내색하지 않고 넥타이를 정리했다.백채원은 눈치 있게 더는 그에게 접근하지 않고 말로 계속 일깨워주었다.“하물며 도윤 씨는 이미 이혼했으니 만약 나서서 소지아 씨를 돕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당신과 지아 씨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우리는 약혼을 앞두고 있는데다 병원도 준비 중인데, 이럴 때 만약 당신에 관한 안 좋은 소문이 난다면 YH 그룹의 주가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칠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든 도윤 씨는 소지아 씨와 선을 그어야 해요.”“내가 언제 소지아를 돕겠다고 했죠?” 이도윤은 머리도 돌리지 않고 떠났다.여금청은 더욱 날뛰며 소지아의 얼굴을 가리키며 도발했다.“여러분들 잘 보세요. 이 초대장도 없는 도둑이 들어왔으니 다들 자신의 귀중품이 도둑맞지 않도록 잘 조심하세요.”“책임자는 어딨는 거예요? 일을 어떻게 했길래 이런 도둑놈까지 들여놓은 거죠?”이때 우 사장의 아들 우설운이 급히 나타났다. 그는 소지아를 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옷차림만 살펴보더니 바로 결론을 내렸다.“이봐요 아가씨, 좋은 말 할 때 스스로 나가세요.”소지아는 그저 이 상황이 웃기게만 느껴져 화를 내지 않았다.“내가 왜 나가야 하죠?”우설운은 설명했다.“아가씨, 이곳의 모든 자리는 기부금액에 따라 정해지는데, 이곳은 당신의 자리가 없어요.”“맞아요, 저런 뻔뻔한 여자한테는 설명도 필요 없어요. 소독을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렇게 입고 나오다니, 함께 서 있어도 격이 떨어진다 진짜.”모든 사람의 말은 칼날처럼 사방팔방에서 소지아를 향해 날아왔다. 비록 다치게 하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곳
김민아가 자리에 앉자, 연회장의 불빛도 어두워졌다. 이때 백채원은 목소리를 낮추며 협박했다.“김민아, 당신 너무 날뛰지 않는 게 좋을 거야.”“네? 내가 뭘 했다고 날뛴다는 거죠? 난 당신이 상간녀란 것을 밝히는 거야말로 날뛰는 건 줄 알았단 말이에요.”어두컴컴한 불빛이 백채원의 얼굴을 비추자 그녀의 안색을 무척 창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민아는 오히려 즐겁게 웃었다.“난 당신이 화가 났는데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요. 백채원 씨, 당신이 한 그 일들, 난 이미 증거를 준비했어요. 만약 또 나를 건드리고 나와 지아를 도발한다면, 나는 그 증거들 공개할지도 몰라요. 내가 만약 당신이라면, 지금 이도윤 씨를 얻은 이상, 밖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하게 있을 거예요. 사람이라면, 사람 같은 짓을 해야죠.”백채원은 눈을 부릅뜨고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소지아는 이도윤과 헤어진 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남들 눈엔 그들이 서로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의 표정은 똑같이 차가웠고, 남들이 10억, 20억을 부르든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았다.아무튼 남이 떠들썩하든 말든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경매가 막바지에 이르자, 우 사장은 직접 무대에 올라 사회를 맡았다.“다음은 역사가 아주 유구한 경매품인데, 이미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죠.”대형 스크린에 고풍스러운 정원을 가진 고택이 나타났다.소씨 고택은 소씨 집안 조상님이 지은 것으로, 후에 다시 리모델링하여 역사를 보존한 동시에 또 새로운 스타일을 추가했다. 가장 관건적인 것은 이 고택의 지반이 매우 좋다는 것이다.이는 현재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에 있어, 스스로 안에서 살든 내놓아서 비즈니스를 하든 모두 괜찮았다.소지아는 그 익숙한 정원을 바라보았다. 매화는 이미 꽃망울이 맺혀 머지않아 필 것이다.그녀는 소계훈이 나무 밑에 약초를 많이 묻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시집가서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