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휴식 시간 동안, 도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진환과 진봉이 없었기에 그는 많은 일들을 직접 처리해야 했다.염경훈도 임시로 그의 곁으로 전근되었는데, 30분 후 거행될 주주 투표를 생각하면서, 그는 오히려 두렵지 않았고, 그저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었다.“대표님께서 요 몇 년간 전심전력으로 회사에 몰두했기에 YH 그룹이 이런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건데, 이 사람들은 뜻밖에도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도윤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이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야. 난 그 사람이 몰래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진작에 알아차렸거든. 마침 이번 기회를 틈타 내부의 배신자를 잡을 수 있고.”“대표님, 지금 가문을 청산하시려는 겁니까?”“나와 그 사람은 언젠간 이 일로 싸우게 될 거야.”도윤은 연기를 내뿜었다.“하지만 난 그에게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노리는 것이 어떤 결말인지를 똑똑히 알려줄 거야.”염경훈은 휴대전화를 꺼내 보았다.“대표님의 예상대로, 방금 떠난 후, 연지은은 한 남자를 만나러 갔습니다.”“누구지?”염경훈은 휴대전화 속의 사진을 확대했다. 사진 속 남자는 우아한 하얀 양복을 입은 채, 얇은 입술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그 실루엣만 봐도 남자의 부드러운 기질을 느낄 수 있었다.도윤은 싸늘하게 웃었다.“역시 그였군. 최근 몇 년간 회사의 고위층을 빈번히 접촉했던데.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오늘 일어선 사람이 반수에 달한 것도 다 그 남자가 최근 몇 년간 적지 않은 신경을 썼단 것을 말해주지.”“마침 대표님도 이 기회를 빌어 일망타진할 수 있겠어요. 참, 대표님, 황산을 뿌린 그 사람은 오늘 저녁에 바로 석방될 수 있습니다.”“일단 가둬. 그리고 그 사람 건드리지 마, 아직 큰 쓸모가 있으니까. 참, 문창걸은 지금 어디에 있지?”“방금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내렸으니 틀림없이 이 일을 알았을 것입니다.”“해외에서 여론을 조종하는 그 사람은? 아직 찾지 못했어?”염경훈은 고개를 저었다.“상대방의 IP
두 사람은 이복형제로, 한 사람은 친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부모님과 함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이씨 가문 재산의 80%를 가지고 있었다.두 사람은 같은 날에 태어났고 모두 미숙아였다. 도윤은 그보다 5분 일찍 태어났지만, 두 사람의 지위는 천양지차였다.이남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술실 앞을 지키며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렸다.그러나 도윤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심지어 그의 이름마저 할아버지가 지어준 것이었다. 명의상의 아버지는 그를 보러 한 번도 오지 않았다.이유민의 이름은 이남수가 지어준 것으로, 각각 이유민의 아빠와 엄마의 성을 딴 것이었다.세 살 되던 해, 도윤도 자신의 생일을 기대했었다.아버지가 돌아와서 생일을 챙겨준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도윤은 두 주일 전부터 손꼽아 기다렸고, 심지어 생일 전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날이 밝기도 전에 도윤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를 기다렸다.그러나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지만, 그의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도윤은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여태껏 돌아온 적이 없어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도윤은 기사 아저씨에게 아버지를 데리러 가자고 애원했다.그들이 이남수의 집에 도착하자, 도윤은 마침내 평소에 영상과 사진에서만 보던 그 사람을 보았다. 이남수는 키가 클 뿐만 아니라 매우 잘생겼다.‘이게 아버지인가?’그러나 이남수는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다른 한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그는 그 아이가 넘어지려고 할 때 안아주었고, 또 떼를 쓸 때 달래주었으며 심지어 어깨에 올려 ‘말 타자’라고 말하기도 했다.그들의 옆에는 아주 친절한 아주머니가 서 있었는데, 그들이 떠들썩하게 놀고 있을 때, 그녀는 줄곧 웃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어린이들이 왔고, 그들은 손에 예쁜 선물을 안고 남자아이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말했다.어느새 도윤도 그들을 따라
도윤의 할아버지는 도윤을 엄격하게 대해왔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아주 잘 보호했다. 할아버지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고, 그저 도윤에게 아버지가 일 때문에 바빠서 집에 오지 목한다고만 했다.그때의 도윤은 정말 단순하게 아버지가 돈을 벌러 나갔다고 생각했고, 아버지가 다른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자신이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 이 남자아이는 오히려 도윤에 대해 손금 보듯 잘 알고 있었다.이유민은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도윤의 몸에 케이크를 발랐고, 그의 얼굴, 팔, 목, 몸을 모조리 더려혔다.그들은 도윤을 비웃었고,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도윤의 귀를 찔렀다.도윤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하면서 멍하니 이남수를 바라보았다.그는 이남수가 자신을 안아주거나 다른 아이들을 막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이남수는 차가운 표정으로 옆에 서 있을 뿐이었다.이유민은 천사처럼 부드럽게 생긴 얼굴로 가장 잔인한 말을 했다.“형은 형의 엄마와 마찬가지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어. 언젠가는 난 형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올 거야. 그것도 원래 다 내 것이었으니까.”이때 기사는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멀리서 달려와 도윤을 안았는데, 도윤은 이미 크림으로 뒤덮였고, 차는 점차 그들과 멀어졌다.그는 자신의 아버지란 사람이 수건으로 이유민의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아끼는 보물처럼 아주 꼼꼼하게 닦고 있었다.도윤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다.‘무엇 때문에 아버지는 날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심지어 날 그렇게 싫어하다니.’그날 밤, 이남수는 돌아와서 도윤과 함께 생일을 보내지 않았다.그는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도 자신에겐 엄마가 있었으니 도윤은 여전히 무척 기뻤다. 도윤은 정신을 차리고 촛불을 불었지만, 소원을 다 빌기도 전에 정서가 불안정한 어머니는 갑자기 그를 안고 베란다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테라스에서 뛰어내릴 때, 도윤은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 이남수의 어깨를 타고 있던 이유민의 얼굴을 떠올렸다.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두 사람은 팽팽하게 맞섰고, 주위의 고위층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두 팀으로 나뉘며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이유민은 비록 사생아이지만 이남수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했고, 이남수가 이혼한 후에도 그는 이씨 집안의 둘째 도련님으로 인정받을 만큼 특별했다.그러나 불행히도 어르신은 이 손자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들마저 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마음을 모질게 먹고 이남수의 이름을 족보에서 지워버렸다.이런 집안일로 모두들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회사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었기에, 이 서자와 적자 사이의 왕위 다툼에 모두들 멀찌감치 숨었고, 행여나 자신이 연루될까 봐 두려웠다.도윤이 애정을 과시하다 이런 일을 일으킬 줄은 아무도 몰랐다.그들은 이씨 집안이 다른 사람들의 침입을 받는다는 역사적인 순간의 증인이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태자와 서자의 싸움이었기에, 모두들 눈치 있게 입을 다물었고, 심지어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고래 싸움에 배 터질지도 모르니까.도윤이 말을 꺼내자, 이유민은 부드러워 보였지만 카리스마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여긴 곧 내 자리가 될 테니, 미리 느껴보는 것도 괜찮겠지, 형?”“스스로 꺼지든지 아니면 나한테 얻어맞던지. 둘 중 하나 선택해.” 도윤은 염경훈에게 눈짓을 했다.염경훈은 손가락 관절에 소리를 내며 보기만 해도 만만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이유민은 즉시 일어섰다.“알았어, 어차피 서두를 필요도 없으니까.”그는 도윤의 오른쪽에 앉았고, 도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그와 이렇게 가까이 앉아있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다른 사람들도 잇달아 자리에 앉았고, 이유민은 앞의 생수병을 가지고 놀면서 경박한 기색을 보였다.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형, 내가 오늘 여기에 앉은 것도 다 형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서 그런 건데. 하지만 형은 내 비장의 카드가 무엇인지 잘 모르잖아.”이 말이 나오자, 도윤은 불안함을 느꼈다.‘설마 변고가 생겼나?’이유민은 계속
평소와 달리, 오늘의 지아는 가볍게 화장을 했고 또 머리를 감아 올렸다. 그녀는 오늘 청색의 양모 코트를 입었고 또 같은 색깔의 사파이어 귀걸이까지 맞춰 착용했다. 하얀 목은 우아하면서도 존귀해 보였다.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걸어왔는데, 비록 시상식 때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청아하고 부드러워보였다. 얼굴로 따지면 스타들도 그녀의 미모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며, 기질로 따지면 그녀는 독특한 매력을 가졌다.심지어 지아의 실물을 처음 본 이유민조차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의 카리스마는 신성한 존재처럼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또 다가가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여자가 신성하다고 느꼈다.도윤은 일어나서 그녀를 맞으며 지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왜 연락도 하지 않고 왔어?”지아도 자연스럽게 손을 그의 손에 올려놓았고,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을 함께 했다.방금 깨어났을 때의 불안함에 비해, 지아는 지금 도윤을 배척하지 않았다.두 사람의 상태는 마치 일주일 정도 사귄 커플 같았다. 아직 알콩달콩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감정은 좋은 편이었다.지아는 부드럽게 웃었다.“회사에 문제 생겼다고 들어서 한 번 와봤어.”“괜찮아, 내가 다 처리할 수 있어.” 도윤은 그녀를 자신의 자리로 데려간 다음, 앉으라고 표시했다.지아는 말을 하지 않았고, 놀라움에서 정신을 차린 이유민이 오히려 먼저 입을 열었다.“형은 정말 대단하다니깐. 이 시점에서 아직도 사랑을 과시할 힘이 있다니.”지아는 앉고서야 눈을 들어 이유민을 바라보았다. 올 때, 기사는 그녀에게 현재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고, 앞서 아주머니도 지아에게 이유민이 한 짓들을 알려주었다.갓 세 살 된 아이가 다른 사람과 손을 잡고 도윤을 괴롭히다니. 그 말이 정말 맞았다. 나이와 무관하고,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마였다. 이유민이 아무리 화려하게 자신을 꾸민다 하더라도, 그의 영혼이 더럽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개변시킬 수 없었다.“요즘은 개도 투표할 수 있으니, 애정을 과시하는 건 또 무슨 문제
“펑!!”회의실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도윤은 이유민의 의자를 걷어찼고, 그의 힘은 아주 컸는데, 아래의 활차를 빌어 그 속도는 너무나도 빨랐다.모두가 반응할 때, 이유민은 이미 날아갔고, 뒤로 발라당 자빠져 낭패를 보였다.구경꾼들은 얼른 그를 부축했다.“괜찮으십니까?”도윤은 단단히 화가 난 게 분명했는데, 의자까지 모두 부서졌다.의자가 없었더라면, 지금 산산조각이 난 사람은 아마 이유민이었을 것이다.“난 괜찮아.”그는 억지로 웃었고, 입가의 미소는 방금처럼 선명하지 않았다.도윤의 둘째 작은아버지는 화가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이 부부가 이렇게 악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그는 도윤에게 화를 낼 엄두가 없어 고개를 돌려 지아를 겨냥했다.“소지아, 오늘은 주주 총회이니,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만약 이 대표를 기다리고 싶다면 귀빈실에 가서 기다렸으면 하는데.”요 몇 년 동안 도윤은 지아를 아주 잘 숨겼기에, 그도 도윤이 지아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녀를 이씨 집안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았다.도윤이 또 화를 내려는 것을 보고 지아는 급히 그의 손을 잡으며 그를 달랬다.“주주 총회인 이상, 난 떠날 이유가 더욱 없겠네요. 둘째 작은아버님 아직 모르시구나. 며칠 전에 지분 변경이 생겨서 나도 지금 주식을 보유한 주주거든요.”둘째 작은아버지는 멈칫했다.“뭐라고? 너한테 주식이 있다고?”“전에는 양도 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마침 오늘 절차가 끝났어요. 나도 이제 정식 주주예요.”지아가 깨어난 다음 날, 도윤은 이유 없이 그녀에게 몇 장의 서류를 건네주며 사인해달라고 했다. 지아는 서류가 너무 많아 자세히 보지 않았다.오늘에야 그녀는 자신이 서명한 그 서류들이 주식 양도뿐만 아니라 부동산 소유권 이전, 차량 소유권 변경 등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숫자였다. 만약 기사가 그녀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더라면 지아는 아직도 속고 있을지도 모른
이유민은 모든 수단을 다 써서 대부분의 고위층의 지지를 얻었다.그래서 오늘의 도윤은 해임될 수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상황이 나타날 수 있을까?그는 모든 사람의 투표 결과를 살펴볼 것을 요구했고, 그제야 자신이 매수한 사람들, 특히 손에 많은 주식을 들고 있던 고위층들이 여전히 도윤의 편에 서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심지어 자신을 지지하겠다고 맹세한 사람들까지 모두 그를 배신했다.일부 사람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주식을 지아에게 넘기기도 했다.그래서 지아가 지금 가지고 있는 그룹 주식은 뜻밖에도 10% 에 달했다!요 몇 년 동안 이유민의 노력은 결국 물거품이 되었고, 이 때문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이럴 리가 없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그는 이 사람들을 접촉한 지 꽤 되었다. 상대방이 도윤에게 충성하는 부하인 것을 알고 이유민은 최대한 자신의 성의를 보였다.그리고 상대방도 그의 편을 설 수 있다고 분명히 밝혔지만, 모두 감히 도윤의 미움을 사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도윤에게 그들이 배신했단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들은 그저 말로만 합의했을 뿐 마땅히 진행해야 할 절차를 밟지 않았다.그들은 도윤을 해임하고 이유민이 대표님의 자리에 앉은 후, 다시 그들의 주식을 양도하기로 했는데, 심지어 가격까지 협상을 끝냈다.지금 이 순간에야 이유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람들이 도윤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단지 그의 앞에서 연기를 했을 뿐이었다.그는 두 눈이 빨개지더니 그 몇 사람들을 노려보았다.“감히 날 속여!”방금 전에 무척 날뛰던 이유민은 지금 엄청난 창피함을 느꼈다. 요 몇 년 동안 쏟은 돈과 정력이 적지 않았지만, 결국 이유민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아마 그 누구도 이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돈은 그렇다 쳐도, 지금 이유민은 철두철미한 멍청이로 전락됐다.공증인은 최종 결과를 발표했다.“득표수가 부족하므로 해임 제안을 기각합니다. 이도윤 대표님은 여전히 YH 그룹의 대표님으로 되겠습니
사무실에서, 도윤은 지아에게 이번 일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사실 도윤은 이유민이 이미 주주들과 몰래 접촉한 사람이라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예 이유민의 계획에 따라 부하들에게 이유민의 믿음을 얻는 시점을 찾으라고 요청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유민은 바로 속아넘어왔고, 또 도윤을 위해 회사 내부의 진정한 배신자를 찾아주었다.지아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입을 벌렸다. 그녀는 며칠 전 직장인들의 기싸움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그러나 그 기사에는 주로 남의 회사에 가서 몰래 와이파이 케이블을 끊거나 전원을 차단하는 유치한 수단이었다.도윤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코를 만졌다.“그러다 침 흘리겠어.”“그 뭐지, 사실 나에게 이런 일 좀 더 말해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나 정말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거든.”그녀의 이런 귀여운 모습을 보고 도윤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나는 네가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아.”“회사 문제는 해결됐지만, 주아담 사건은 어떡하지? 진 비서 그들은 아직 경찰서에 있잖아. 이번에 재무부 부장까지 잡혀갔다며? 지금 사람들 마음이 뒤숭숭할걸.”“걱정 마. 난 줄곧 세금에서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으니까. 누군가 신고한 것도 다 소란을 피우려는 것에 불과해. 그냥 놔둬, 나한테 다 방법이 있어.”도윤은 종래로 이유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필경 그가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점도 단지 부모님의 사랑을 받은 것밖에 없었다.도윤이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은 지아에게 불리한 그 주모자였다.그 사람은 너무 신중해서 매수한 킬러는 잡힌 후에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심지어 단서를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왜 그래? 이번에 이렇게 멋지게 이겼는데.”“지아야, 이유민은 별거 아니지만, 진정으로 무서운 사람들은 이번에 슬쩍 널 죽이려는 사람이야.”도윤은 그동안 지아의 상태가 안정된 것을 보고, 그녀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이 일을 일깨워주었다.“그 황산과 칼을 든 사람? 그들은 주아담의 광팬 아니었어?”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