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음식이 다 준비된 것을 보고 양정숙을 깨우려고 했다. 하지만 의자에 앉은 그녀는 깊이 잠들지 못한 듯 입으로 중얼거렸다.“근심 걱정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법...” 지아는 조심스럽게 양정숙을 깨웠다.“이모님, 식사하셔야죠.” 양정숙은 천천히 눈을 떴고, 눈앞에 있는 아리따운 얼굴을 보고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언니...” 지아는 놀라서 되물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양정숙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물었다.“내가 방금 뭐라고 했죠?” “이모님, 저를 ‘언니’라고 부르시던데, 뭔가 생각나신 거죠?” “나는...”양정숙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녀는 분명 꿈을 꿨고, 꿈속에서 어떤 여자를 본 것 같았다. 하지만 깨어나니 꿈의 내용이 모조리 사라져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아는 양정숙이 힘들어하는 표정을 보며, 거짓이 아님을 확신했다.‘무의식 속의 기억을 자극한 걸지도 몰라.’ “이모님, 일단 식사하세요.”지아는 더 이상 자극하지 않으려 조심스레 말을 돌렸다.‘나는 아무래도 신경과 쪽을 잘 모르잖아.’ 식사 자리에서 양정숙은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경아, 나는 네가 올해도 올 줄 알았어. 너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아이잖니. 다만, 올해 친구까지 데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배신혁은 모두에게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여사님, 보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사님을 잊지 않을 겁니다. 소 선생님, 저희와 함께 여사님과 보스의 생일을 축하하며 건배합시다.” 지아는 잠시 놀라며 되물었다.“오늘이 두 분의 생일이라고요?” 양정숙이 웃으며 대답했다.“나는 머리를 다쳐서 내가 누군지도 잊어버린 사람이지만, 경이는 더 안타까운 사람이에요. 몇 번이나 팔려 다니는 바람에 자기 가족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니까요. 그러니 자기 생일이 언제인지 알 리도 없죠. 그래서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생일로 정한 거예요. 매년 그날을 함께 축하하고 있고요.”양정숙의 담담한 말투에 지아는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한대경의 과거는
한대경은 술이 세기로 유명했지만, 오늘은 어쩐지 취한 듯 보였다. 지아는 그를 침대까지 부축했는데, 한대경은 그녀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거 놔, 경고하는데, 이런 얕은수는 쓰지 않는 게 좋을 거야!”지아가 단호히 경고했다. 한대경의 뺨은 술기운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입에서는 진심 어린 말이 흘러나왔다.“나는 진심으로 널 좋아해. 나한테도 기회를 주면 안 될까?” “미안하게 됐어.”지아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힘껏 떼어내며 냉정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한대경보다는 양정숙이 그녀에게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양정숙은 술을 몇 잔 마셨지만, 주량이 꽤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있는 만큼, 지아는 그녀가 걱정되었다.침대에 누운 양정숙은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언니, 나를 떠나지 마. 언니...” 지아가 방으로 들어서자, 양정숙은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언니, 환희 언니, 나야, 양정숙.” “정숙아, 내가 누구라고?” “언니잖아, 환희 언니.” “내 이름이 뭐라고?”지아는 계속 물었다. “언니 이름은...”양정숙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지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술이 사람을 망치기도 한다더니, 오늘이 딱 그러네.’두 사람이 모두 잠들어 있는 사이, 지아는 핸드폰을 찾아서 도윤과의 연락을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양정숙은 애초에 핸드폰이 없었고, 한대경의 핸드폰은 잠금을 해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밖에는 감시하는 사람들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지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소파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설날 아침, 지아는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낯선 곳에서 밤을 보냈다는 사실이 문득 씁쓸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한대경은 흐릿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소파에서 자고 있는 지아를 보자 하니, 그녀에 대한 감정이 더욱 깊어지는 듯했다.바로 그때, 배신혁이 들어와 그의 귀에 속삭이며 무언가를 보고했다. 지아도 낮게 들리는 대화 소리에 눈을
지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하용의 도움을 받아 환풍구로 올라갔다.환풍구 내부는 성인 남성이 기어갈 정도의 크기였지만, 오랜 시간 청소되지 않은 탓에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하지만 지아는 그런 것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단 하나의 생각만 있었다.‘탈출하자. 아이들이 날 기다리고 있어.’ 이 지역은 혼란스러운 구역이라 여러 세력과 파벌이 난립하고 있었다. 하용은 이전부터 이런 음지에서 활동해 온 사람이었기에, 지역을 유력한 우두머리와 손을 잡고 지아가 빠져나갈 길을 마련할 수 있었다.덕분에 극히 짧은 시간 안에 그녀는 해상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한대경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추격했지만, 지아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분노에 휩싸인 그가 격노하며 소리쳤다.“내 눈앞에서 소지아를 데려가다니!” 이 모든 것이 도윤의 짓임을 짐작한 한대경은 이를 악물었다.‘역시 만만치 않은 녀석이군.’‘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했는데, 어떻게 소지아를 찾아낸 거지?’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거나 다름없다고 비웃었는데, 역으로 날 완벽하게 속였잖아?!’ “쫓아! 소지아를 놓쳐서는 안 돼!” 한대경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지아를 붙잡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인력을 동원해 그녀의 흔적을 뒤쫓았다. 한편, 하용과 지아는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고, 공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들은 그녀는 안전하게 옮겼다. 하지만 한대경 역시 빠른 속도로 쾌속정을 몰고 추격해 왔다.지아는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그림자를 보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도윤 씨에게 붙잡혔던 그날의 악몽이 떠오르는 것 같아.’ 저 멀리, 도윤은 군함 위에 서서 지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 위로 갈매기들이 맴돌고, 쾌속정이 일으키는 물보라가 바다 위로 튀어 올랐다. 도윤은 배 위에서 밧줄 사다리를 내렸다.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던 그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지아야, 어서 나한테 와.” 보름 남짓
한대경은 쾌속정 위에 엎드린 채 얼굴 가득 상처를 드러내고 있었다. 지아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고, 그 안에는 어떠한 거짓된 감정도 없었다. 도윤이 차가운 눈빛으로 총을 들어, 한대경의 쾌속정 옆에 연이어 총을 난사했다.물보라가 일며 한대경의 얼굴을 적시는 순간이었다. “한대경, 오늘의 원수를 언젠가 두 배로 갚아주겠어!!” 도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 뒤, 배를 돌리라고 명령했다. 배이혁은 한대경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보스, 이미 떠난 사람이에요. 인제 그만 포기하시라고요. 저 여자는 보스를 사랑하지 않아요.” 마음이야말로 가장 멀리 있는 것. 나이와 지위와는 상관없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그리고 이 사실은 그 누구도 강제로 바꿀 수 없었다. “왜...”한대경은 중얼거렸다.그는 오랜 세월 동안 특별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 기다려왔다. 하지만 하늘은 끝내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지아는 도윤의 품에 기대어 나지막이 속삭였다.“평생 도윤 씨를 볼 수 없을 줄 알았어.” ‘한대경이 나를 평생 그 섬에 가둬 둘 줄 알았거든.’ “미안해, 지아야.”도윤은 비로소 자신이 늦었다는 걸 깨닫고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지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도윤의 공포와 초조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며칠 전까지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한 채, 매 순간 긴장과 불안 속에 살아야만 했다.‘이제 다 끝났어.’ 지아의 귀환은 마치 먹구름 속에서 비치는 햇살처럼 도윤의 마음속 어둠을 걷어냈고, A의 눈보라마저 멈추게 했다.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왔다.“엄마!” 지아는 아이들을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미안해, 많이 걱정했지?” 아이들은 볼품없이 야위어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어른보다 성숙한 걱정과 애정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지윤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엄마,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지아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다독이며 안심시켰다. 그러자 부장경과 그 일행이 다가왔다.“지
지아는 아이들과 함께 처음 머물렀던 섬으로 돌아왔다. 오랜 세월이 지나, 섬은 완전히 새롭게 변모해 있었다. 섬을 둘러싼 해안에는 다채로운 색의 바닷길이 생겼고, 할머니의 집 앞에 있던 벚나무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은 벚꽃이 만개한 때였다.지아는 거대한 벚나무 아래에 서 있었는데, 나무에 매달린 풍경들이 바닷바람에 흔들리며 ‘딸랑딸랑’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벚나무에 불이 켜지자, 떨어지는 벚꽃잎들 사이에 서 있는 그녀는 마치 아름다운 여신처럼 보였다.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이라 해도, 그만큼 고운 빛을 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무무는 벚나무 위에 앉아 발목의 방울을 흔들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고, 나무 아래에서는 쌍둥이 남매가 서로 장난을 치며 뛰어다녔다.도윤은 감회에 젖어 벚나무를 어루만질 뿐이었다. ‘어릴 적 기억은 대부분 희미해졌지만, 이 벚나무만은 잊히지 않는 것 같아.’ 그는 기저귀를 차고 지아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시절을 떠올렸다. ‘할머니는 재작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지아의 방은 여전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구나.’ 섬의 주민들도 대부분 그곳에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환하게 웃으며 지아를 반겼다. “다 네 덕분이야.” 이제 섬에는 전기와 수도가 통하고, 인터넷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섬 주민들은 더 이상 바깥세상과 단절되지 않았고, 큰 불편 없이 세상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지아와 도윤은 아이들과 함께 섬에서 일주일을 보냈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핸드폰이 깜빡이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지아는 아이들과의 장난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소 선생님.”수화기 너머로 소시후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지아는 그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물었다.“몸은 괜찮으세요?” [괜찮아. 설날에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한데... 지아야, 전에 말했던 다리가 불편한 내 동생, 기억하지?]“셋째 도련님이요?”[응, 그 아이는 다리 문제로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최근에 상태가 악화돼서 자살 시
지아는 고양이처럼 도윤의 셔츠 깃에 얼굴을 비비며 나지막이 말했다.“나랑 소씨 가문 사람들 간엔 아무런 원한도 없어. 오히려 소 선생님은 예전에 나를 도와줬던 분이셔. 소씨 가문은 가장 안전한 곳이야. 게다가 내가 본래의 신분으로 가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도 내가 Z국에 갔다는 걸 알지 못할 거야.” “넌 말이야, 매번 나름의 이유가 있구나?” 도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좋아, 하지만 이번에는 꼭 무무를 데려가야 해. 무무는 약초에 대해 잘 알고, 동물들을 조종해서 너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알겠어.”지아는 소씨 가문에서 위험이 생길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무무와 함께라면 오히려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여겼다. “무무는 아이 중에서 의학에 가장 관심이 많아. 나랑 함께 다니며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다면, 언젠가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을 거야.” 지아가 무무를 데리고 떠난다는 소식에 다른 아이들은 부러움과 서운함이 뒤섞인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특히 쌍둥이는 양쪽에서 손을 붙잡으며 애원했다.“엄마, 우리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절대 방해하지 않을게요.” 지아는 아이들의 작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했다.“엄마는 어떤 삼촌을 진료하러 가는 거야.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렴.” “하지만 곧 개학이잖아요... 우리는 엄마랑 만나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고요! 게다가 엄마가 나쁜 사람한테 붙잡혀갔던 일도 있었잖아요. 우린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 지아는 가슴이 아팠지만, 이 일이 목숨이 걸린 중대한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이어진 우울증은 환자를 언제든 자살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위험한 것이었다. 하루라도 늦어지면 환자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지아는 정말이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그녀는 아이들을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엄마는 괜찮을 거야. 착한 우리 아가들, 엄마가 삼촌의 병을 다 고치고 돌아오면, 그때는 온종일 너희와 함께 있을게.” 아이들은 여전히 아쉬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을 일찍 일어나 지아를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동생들을 잘 돌볼게요.” “역시 우리 아들은 착해.” 도윤은 지아의 앞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그 목걸이, 절대 잃어버리지 마. 그 목걸이만 있으면 네가 어디에 있든 찾을 수 있을 거야.” 지아는 그의 말에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목걸이 덕분에 자신이 쉽게 탈출할 수 있었다는 걸 알기에 고마운 마음이 들 뿐이었다. “응, 알겠어. 아이들을 잘 부탁할게. 금방 올 거야.” “Z국 쪽은 내가 이미 손을 써 뒀어. 혹시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면 바로 우리 사람들한테 연락해.” “알겠어.”지아는 살짝 발끝을 세우고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지윤이랑 약속했어. 재혼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도윤의 눈은 기쁨으로 반짝였다. 그는 무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꼬마 아가씨, 엄마를 잘 따라다녀야 해.” 무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엄마를 따라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듯했다. 간단히 변장을 마친 지아와 무무는 원래 모습과 완전히 달라 보였다. 외부 사람들이 보기에 두 사람은 평범한 외모의 모녀였지만, 무무의 초록빛 눈동자는 여전히 특별하게 빛났다. 하지만 세상에서 무무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도윤과 부씨 가문 사람들뿐이었기에, 아무도 지아에게 무무라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10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지아와 무무는 무사히 착륙했다.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시후가 보낸 전용 비행기와 픽업 차량이었다. 지아가 Z국의 수도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밤이었다. Z국은 위도가 낮아 온화한 기후가 뽐냈고, 사방이 봄기운으로 가득했다. Z국과 A국은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나라로, 여전히 설날을 기념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거리는 형형색색의 등이 빛을 내며 명절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무는 창밖의 화려한 불빛을 바라보며, 초록빛 눈동자에 별처럼 반짝이는 빛을 담았다. 지아는
아침이 밝아오자, 지아는 바람이 잔디를 스쳐 갈 때의 아름다움과 고요함 속의 씁쓸함을 떠올렸다. ‘셋째 도련님이 왜 우울증에 시달리는지 알 것도 같아.’‘이런 환경 속에서 오랜 시간 머무른다면, 누구라도 마음에 황량한 풀밭이 자라나지 않을까?’차가 멈춘 별장은 단순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듯했다. 벽면은 온통 회색과 흰색뿐이라 생기가 없었고, 죽음의 정적이 깔린 듯했다. 밤 열한 시가 되었지만, 별장 안에서는 도자기 같은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그 소리는 귀에 익은 ‘하늘의 성’의 곡조였다. 바깥에는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고독하게 울려 퍼졌다. 지아는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을 느꼈고, 이곳에 우울증 환자가 머문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고작 몇 분간 머물렀을 뿐인데도 바닷속에 홀로 남겨진 고래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온 세상에 자신만 남겨진 듯, 황폐하고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우울증 환자가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회복할 수 있겠어?’ “셋째 도련님께서 연주하시는 소리입니다. 불면증을 앓고 계시는 탓에 잠을 설치시거든요.” 지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이상해...’ ‘왜 우울증에 시달리는 본인을 이렇게까지 외로운 환경에 내버려두는 거지?’ ‘이런 환경에 있으면 호전은커녕 더 우울해질 거라고!’ “셋째 도련님을 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려울 겁니다. 셋째 도련님은 감정 기복이 심해서, 최근 몇 년간 가족도 만나지 않으려 하시거든요. 며칠 전, 선생님에 대해 언급했을 때도 강한 거부감을 보이셨고요.” 그런데도 운전기사는 문을 두드리며 새로 온 의사가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답변 대신 안에서 들려온 것은 도자기가 바닥에 부딪히며 깨지는 소리였다. 그는 단순히 만남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지아에게 강한 적대감을 품고 있는 듯했다. 운전기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합니다만, 오늘은 너무 늦었습니다. 장거리 이동으로 피곤하실 텐데, 우선 자녀분과 함께 쉬
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절대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그래.”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나는 아버지 일부터 정리할게. 월아, 집안을 부탁해.”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떠나기 전, 시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그리고 월아, 소 선생님도 우리 사람이야. 무슨 일이든 소 선생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 “네, 알겠어요.”사람들 앞에서의 시월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해졌다. “죽일 X! 그 X이 뭔데 나랑 같이 소씨 가문을 관리한다는 거야?” 심장후는 그런 시월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우리 계획은 이미 반이나 성공했잖아. 이제 소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발버둥칠 여력도 없을 거라고.” “그래도 분하단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소씨 가문을 접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인데...” “소시후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 거야. 네가 혼란에 휩싸일까 봐 두려운 거지. 여태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급해할 거 없어. 조금만 진정해 봐.” 시월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심장후는 서둘러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월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았다. “소씨 가문의 인간들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제 남은 건 그 노친네 하나뿐이야. 그 인간만 죽으면 소씨 가문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한 명은 팔 하나를 잃었고, 하나는 절름발이가 됐잖아? 이제 별거 아닌 잡것들만 남았어.”“하지만 그 노친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 “그래봤자 그 노친네의 시대는 가고, 우리의 시대가 왔어.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노친네가 무슨 힘을 쓰겠어? 내가 불쏘시개 하나만 더 던지면, 불길은
시후도 맞장구쳤다.“역시 우리 월이가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왜요, 오빠?”“상대의 목표는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연이어 위기에 처했고,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그 사람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월아, 앞으로는 외출할 때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 전에 차량도 철저히 점거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은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도록 해.” 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큰오빠, 저는 우리 소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왔고, 아빠도 많은 걸 바치셨잖아요. 아빠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싫어요. 지금은 저만이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복잡해질까 봐 걱정된다고요!”“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아. 월아, 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야. 오빠들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버지도 떠나시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준비를 해두셨을 테니까, 당분간은 집에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든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시후가 시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너 자신을 꼭 돌봐야 해. 오빠들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이를 꼭 지킬 겁니다.” “그래.”시후가 고개를 돌려 심장후를 바라보았다.“장후야, 우리가 이 사건과 연관 있는 심세호라는 사람을 찾아냈는데, 혹시 심씨 가문의 사람일까?” 심장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심세호가 저희 할아버지의 사생아인지는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에게 큰아버지 이전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할아버지를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요.”“하지만 그 술집 여자와 사생아 모두 우리 심씨 가문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죠. 제 아버지조차 그 사람과 왕래가 거의 없었으니, 우리 같은 후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아는 새로 등장한 인물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소시월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보였다. 지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후가 차분히 설명했다.“심씨 가문의 장남, 심장후예요. 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죠.” ‘심씨 가문?’지아는 순간 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윤의 어머니인 심예지 역시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과거의 그녀는 사랑을 택하며 심씨 가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소시월의 약혼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심장후가 자연스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분은...?”시월이 눈물을 훔치며 소개했다.“내가 얘기했던 뛰어난 의술을 갖춘 소 선생님이셔. 우리 시하 오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기도 하지.” 지아가 심장후의 손을 잡아끌며 지아 쪽으로 향했다.“소 선생님, 제 약혼자예요.” “안녕하세요.”지아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인사했다. “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후 역시 지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후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소 대표님께서는...” 지아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지자, 시월이 급히 설명했다.“미안해, 오빠, 내가 이야기했어. 장후 오빠랑 전화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시후는 이런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시월과 장후의 사이를 알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원래 올해 두 가문이 결혼 문제를 상의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것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장후도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인 셈이니까.”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시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은 마음속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폭발했어. 아
시하는 시언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했다.“나도 잘못이 있어. 그동안 책임은커녕 모두에게 짐이 되었으니까.” “그만 좀 하세요!”지아가 탁자를 치며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지금은 서로에게 사과할 때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이럴수록 심세호를 기쁘게 할 뿐이라고요. 아직 비행기 사고로 대표님의 사망을 확정할 수는 없어요.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요.” 지아는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내가 소씨 가문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여러분은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야 해요. 만약 대표님께서 정말 돌아가셨다면, 여러분이 아들로서 소씨 가문을 지켜내야 한다고요. 가족을 슬프게 하고, 원수를 기쁘게 만드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사모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찾아내는 일이에요. 사모님은 최대한 빨리 눈을 치료해야 한다고요. 그렇지 않으면 회복이 불가능해질 거예요!” “게다가 소 대표님은 해외 사업을 접고 귀국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일을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해요. 나라에는 왕이 하루도 없어선 안 되는 법이잖아요. 이런 상태라면, 소씨 가문은 곧 무너지고 말 거라고요!” 이어서 지아는 시언에게 조언했다.“건강을 반드시 회복하셔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나아지셔야 가족 모두가 안정을 찾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지아는 몇 마디로 어지러운 상황을 안정시켰다.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았고, 나이도 그들보다 어렸지만, 그녀의 말에는 이상할 정도의 신뢰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맞습니다. 우리는 절대 무너지면 안 돼요. 소 선생님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지아가 시후를 부축해 앉혔는데, 사실 지아가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바로 소시후였다. 시후는 지아 다음으로 성공한 실험체였지만, 신장병은 여전히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고, 예전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 더 높아졌을 뿐이었다. 시후의 몸과 마음은 이미 지쳐 있었기에, 지아는 그가 버티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지아는 이런 걱정을 안고 시후를 부드럽게
지금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은 소식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그 말이 전해지자 모두의 눈가가 떨리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장 집사님, 장 집사님은 집안의 어른이시잖아요. 어쩜 그렇게 경솔할 수 있으세요?” 지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아는 처음 소씨 가문에 왔을 때 자신을 맞이하던 장덕수의 침착함과 신중함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당황하며 문턱에서 넘어질 정도로 급하게 들어왔다는 갓은, 사건이 간단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장 집사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시월이 다급히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장덕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께서 탑승하신 개인 비행기가... 비행 중에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비행기가... 폭발했다고요!” “뭐, 뭐라고요?!”시월은 그 자리에서 바로 기절하고 말았다. “월아!”시후는 곧장 시월을 안아 들었는데, 이는 혼란스러운 소씨 가문이 더욱 큰 혼란에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지아는 빠르게 다가가 시월의 상태를 살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는 단지 충격으로 실시하신 것뿐이에요. 잠시 쉬면 곧 깨어나실 거예요.” “누가 월이 좀 방으로 옮겨주세요! 휴식이 필요합니다!” “예, 도련님!”고용인이 시월을 방으로 데려가자, 거실에 남은 사람들의 표정은 말 그대로 참혹해졌다. 시후는 아직 치료받지 않아 병약한 얼굴로 서 있었고, 시언은 수술을 막 끝낸 상태에서 시하와 마찬가지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시월은 너무 놀라 혼절하기까지.“형, 아버지는...”가장 강인하던 시언의 눈시울조차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은 장남인 시후였다. 그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누구보다 힘들었지만 지금은 더욱 강한 척해야만 했다. “괜찮을 거야. 단지 비행기 사고일 뿐이야. 기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시하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휠체어를 세게 내리쳤는데, 그의 눈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분명 심세호가 한 짓이야! 사랑이 증오로 변한
다행히 지금은 60년 전처럼 정보가 부족한 시대가 아니어서, 원하기만 하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조경숙은 조씨 가문 출신으로, 이름 높은 명문가 자제였다.집안에는 여섯 명의 오빠가 있었고, 조경숙은 유일한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즉, 집안의 보석 같은 존재로, 아름다운 외모와 온화한 성품을 겸비한 인물이 된 것이었다.조경숙은 성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여러 집안에서 혼인을 청했고, 심지어 해외의 명문가들도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조경숙의 수많은 구혼자 중에서도 한 사람만이 유독 특별했다.그 시절 조경숙을 쫓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호들이었기에, 단순히 재산만으로는 그들의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하지만 그중 한 명은 천재 발명가로 불리며, 동시에 뛰어난 의술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그의 사랑은 그야말로 뜨겁고 격렬했으며, 조경숙을 얻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조경숙이 소임호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음에도, 그는 결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소임호가 무슨 방법을 썼는지, 그 천재 발명가는 갑작스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의학 미치광이의 소개서를 읽은 지아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역시 지아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 천하의 악당 같은 의학 천재는 루이스가 길러낸 첫 번째 제자였는데, 이미 사제 관계가 파탄 나긴 했으나, 지아는 그를 ‘선배’라고 불러야 했다. ‘이미 파문되었다던 그 사람이 사모님과 그렇게 깊은 연관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래서 그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피부에서 별다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던 거구나.’그의 나이를 추정하면 이미 50세가 되었을 것이었다.얼굴은 가면으로 감출 수 있겠지만, 몸은 속일 수 없지 않겠는가?그 사람의 피부는 마치 20대나 30대처럼 매끄럽고 탱탱해, 지아는 그가 소명담이 아닐 거라고 의심하지 못했다. 루이스 역시 젊음을
조경숙이 갑자기 납치되면서 소씨 가문의 안팎은 큰 혼란에 빠졌다. 심지어 병상에 누워 있던 시언조차 몸을 일으키려 애썼으니 말이다. 시후는 곧장 소명담의 본가로 향했다.‘사람은 도망칠 수 있어도 근거지는 숨길 수 없는 법이지.’ 하지만 소명담을 잡기도 전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한편, 지아는 무무의 머리를 땋고 있었는데, 아이의 머릿결은 매끄럽고 윤기가 흘러, 까만 머리카락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도윤은 모녀의 곁에서 작은 수납 상자를 들고 서 있었고, 상자 안에는 아이들의 머리끈과 머리핀들이 가득했다. 도윤이 초록색 리본 모양의 머리핀을 건넸다.“이걸로 하자. 초록색이 예쁘잖아.” 지아는 그것을 받아 무무의 머리를 묶어주었고,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우리 딸, 정말 예쁘다.”무무의 초록색 눈동자에 웃음기가 만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한 손으로 지아를, 다른 손으로 도윤을 잡고 아주 행복해했다. 바로 이때, 진봉이 급히 들어왔다.“사모님, 나쁜 소식입니다!” 지아는 대충 짐작이 갔다.“소명담이 도망친 거야?” 이는 지아도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소명담이 그렇게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온 일을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요, 죽었습니다.”지아가 빗을 들고 있던 손을 멈추며 물었다.“뭐라고? 죽었다고?” 이것은 지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말도 안 돼!’“그게 말이 돼? 설마... 그 사람 뒤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걸까?” 지아는 과거 자신과 대면했던 소명담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어.’‘그런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고?’ 그때 진환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제가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진봉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 같네요.”“소명담은 죽은 게 맞습니다만, 죽은 지는 이미 수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까지 우리가 본 소명담은 누군가가 변장했던 거야?” 지
아무도 소시월의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옆에서 조용히 관찰하던 지아는 시월의 표정을 정확히 포착했다. 시월은 마치 자기 행동을 들킨 것처럼 고개를 돌려 지아와 눈을 마주쳤다. 곧이어 시월은 다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소 선생님, 왜 그러세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지아가 침착하게 대답했다.“아니요, 아가씨께서 너무 아름다워서 그냥 한 번 더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시월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지아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소 선생님, 오랫동안 고생하셨으니 잠시 옆 방에서 쉬는 게 어떠세요? 여긴 우리가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지아는 은근히 자기 손목을 향하는 시월의 시선을 감지했다.그 손목은 몇 년 전 도윤의 총에 맞았던 곳이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피부가 정말 하얗고 매끄러우시네요. 정말 부러워요. 평소엔 어떻게 관리하세요?” 지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씨, 사모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는데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으시네요? 평소에 가족에게 효심이 지극하신 분이, 왜 이런 일엔 관심이 적으신 거죠?” 지아의 말은 정확히 급소를 찔렀고, 시월은 당황한 듯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소씨 가문에 이렇게 많은 일이 연달아 터지는데, 제가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저 지금은 제가 조급해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오빠들을 도와 손님들을 챙기려 했던 거라고요.”“그런데 소 선생님께서 갑자기 저를 의심하는 듯한 질문을 하시니까 조금 속상하네요.” 두 사람은 몇 번의 수를 주고받았지만, 어느 쪽도 명확한 단서를 잡지 못했다.시월은 지아의 정체를 의심했다. 그녀는 지아의 손목에 총상 흉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지아는 매끈한 손목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혀 총알 자국이 없었다. 지아 역시 시월에게서 의심스러운 점을 느꼈다.하지만 모든 증거가 소명담을 가리키고 있었고, 시월과는 아무런 관련이
“세라야,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해줘.”시하가 부드럽게 설득했다. 시하와 강세라의 대화는 다른 방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시하 오빠의 미남계가 통한 모양이네요.” 시후는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분노했다.“역시 그 자식일 줄 알았어! 망할 자식 같으니라고!” 지아는 마음 한편이 실망스러웠다. 지아는 모든 일이 시월과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그렇지 않았다. 그 순간, 양지운이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 “소 선생님, 사모님께서 사용하시는 화장품과 약물을 검사했는데, 매일 사용하시는 안약에서 추가적인 약물이 발견됐습니다. 그 약물은 정기적으로 사용할 경우 시력을 저하시켜 실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나쁜 새X!” 시후가 분노하며 벌떡 일어섰다.“드디어 증거를 잡았어! 양 비서, 당장 그 자식을 붙잡아! 우리 소씨 가문을 이렇게 망쳐놓다니, 여태까지의 모든 대가를 치르게 해주자고!”“예!”시하가 시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형, 너무 화내지 마. 화내다 몸 상하면 안 되잖아. 이제 그 능구렁이를 잡았으니, 나도 안심이야.”지아는 옆에서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았다.“지아야, 왜 아직도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모든 게 네 계획대로 되고 있잖아. 혹시 뭔가 잘못된 거라도 있어?” 지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모든 게 계획대로라는 게 오히려 마음에 걸려요. 너무 순조롭잖아요.” “순조로운 게 어때서?” “그냥 좀 불안해요. 물론 제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요.”“이제 원인을 찾았으니, 사모님께선 약물을 끊은 후에 제대로 진찰받고 휴식까지 취하시면 시력을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좋아, 나는 이 좋은 소식을 시언이한테 알려야겠어. 마음 놓고 푹 쉴 수 있도록 말이야.”“저도 같이 갈게요.” 지아는 곧 동이 트려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모든 일이 해결되었으니, 남은 일은 소 선생님께 맡기면 될 거야.’ 하지만 그때 불길한 소식이 전해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양지운이 급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