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1분 1초 흘러갔고 윤소현은 점점 버티기 힘들었다.그러나 누구한테도 연락할 사람이 없어 막막했는데 이튿날 어렵게 유남우와 연락이 닿았고 또 직접 면회 오겠다고 했다.윤소현은 자신의 추해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서둘러 엉망진창인 머리를 정리했다.그리고 그의 앞에 마주 앉아 애틋한 얼굴로 말했다.“남우 씨,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요.”그러나 유남우는 한껏 쌀쌀맞은 얼굴로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 오늘 여기에 온 목적은 너한테 꼭 할 말이 있어서니까.”“뭘요?”“예전에 네가 당했던 그 불미스러운 일 말이야.”유남우의 말에 윤소현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지더니 머릿속에 그때의 그 끔찍했던 장면이 또다시 떠올랐다.“남우 씨,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유남우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사실 그 일을 내가 시켰어.”순간 윤소현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여태껏 범인을 찾아내지 못해 계속 애를 먹고 있었는데 그 주범이 유남우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그러다가 애써 정신을 차린 뒤 책상을 세차게 두드리며 그에게 따져 물었다.“대체 왜요? 제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요? 왜요!”윤소현은 여태껏 친엄마인 한수민, 자신을 키워줬던 정수미한테도 마음을 열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유남우한테만은 진심이었다.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 칠 줄은 정말 몰랐다.유남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윤소현의 모습을 보고도 차분하게 답했다.“네가 먼저 나를 건드렸잖아.”“뭐라고요?”윤소현이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제가 뭘 했는데요?”“나한테 약을 타서 먹이려 했단 사실을 내가 모를 것 같아? 그리고 그때 민정이랑 민정이 아들을 해치려 했던 사람이 너란 것도 이미 알게 돼버렸네?”그의 대답에 윤소현은 순간 멍해졌다.“그래서 이 모든 게 다 박민정 때문이었다는 건가요?”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두 주먹을 꼭 쥐고 또다시 테이블을 쾅쾅 두드렸다.“왜! 대
윤소현은 자기 딸을 보러 가겠다고 병문안을 신청했다.그리고 수중에 남아있던 돈으로 변호사도 불렀다.교도소에서는 그녀의 딸이 지금 중병에 걸린 점을 고려하여 하루만 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줬다.병원 안.윤소현은 병실 침대에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누워있는 아이를 보고 나서도 일말의 애틋함이 아닌 오직 분노만 가득 차올랐다.“다 너 때문이야!”그러다가 갑자기 아이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아이는 아직 너무 어리기도 하고 몸도 허약해 울거나 발버둥조차 치지 않았다.다혜가 그저 유남우의 복수 도구였다는 사실에 윤소현은 이 아이를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윤소현 씨.”이때 변호사가 들어오는 모습에 윤소현은 재빨리 손을 거두고 한껏 불쌍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주 변호사님, 어린아이가 지금 옆에서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꼭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더 이상 감옥에 있을 수 없어요.”주영훈은 아직 윤소현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병든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쓰이긴 했다.“소현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잘 조율해 보겠습니다.”이 뜻은 감형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예상 밖으로 오늘날 이 아이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윤소현은 속으로 너무 기뻤다.하여 윤소현은 딸을 엄청 아끼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둔갑해 변호사더러 영상 하나를 찍게 하여 모든 사람이 보고 도와주길 바랐다....이 시각, 정수미도 마침 영상을 보고는 한껏 불쾌한 얼굴로 되물었다.“윤소현은 애초에 아이를 싫어하는 인간인데 이게 진심일 리가 없잖아?”길서연도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당연하죠. 이 기회에 동정표나 받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아이만 너무 불쌍해.”정수미는 안타까운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이 문득 호기심에 물었다.“다혜는 윤소현 씨랑 유남우 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닌가요? 왜 두 사람이 모두 아이를 돌봐주지 않나요?”“민정아, 너 몰랐어? 다혜는 유남우 씨 친딸이 아니라 소현이가
박민정은 순간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갑자기 그만두시는 거예요?”“사실 민정 씨가 기억도 잃고 정 대표님을 원망하고 계셨을 때, 저는 그저 두 분을 돕고 싶어서 지금까지 옆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억도 돌아왔고 또 두 분이 화목하게 지내시는 걸 보니 저도 제가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고 싶어서요.”저 말은 분명 자수하러 가겠다는 뜻이었다.예전에 정호철은 박예찬을 납치하면서 하마터면 박민정과 아이를 죽일 뻔했다.박민정은 모든 기억이 돌아오면서 그때의 일도 생각났다.솔직히 그를 용서한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그리고 지금까지 오른쪽 얼굴에 그날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어 볼 때마다 그 일이 떠오르곤 했다.그러나 이 일이 전부 정호철 잘못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었다.“그러면 우리 엄마도 같이 감옥에 가야 할까요?”박민정이 담담하게 되묻자 정호철은 깜짝 놀라 빠르게 답했다.“이 일은 저 혼자만의 잘못이지 정 대표님과는 무관합니다. 그저 속았을 뿐이라고요. 민정 씨, 그분은 만약 자기 목숨과 민정 씨를 바꾼다고 하면 기꺼이 받아들일 겁니다.”“게다가 지금의 몸 상태로는 감옥에서 버티기도 힘들 거예요. 요 몇 년간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겪었거든요...”정호철은 정수미 편을 드느라 박민정의 진짜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하여 박민정이 그의 말을 자르고 다시 말해줬다.“정 부장님, 그냥 지금처럼 계속 저희 엄마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순간 정호철은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박민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이 일은 그냥 이렇게 넘어갑시다.”“민정 씨...”정호철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까지 더듬었다.“그런데 얼굴에 난 상처랑... 예찬이는...”“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라잖아요. 그때 정 부장님은 윤소현 씨를 돕기 위해 제 얼굴에 상처를 냈고, 지금은 제가 정수미 씨의 딸이란걸 아니까 저한테 사과하는 거겠죠?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제가 정수미 씨의 친딸로서 정 부장님을 감옥에 보내지 않을 겁니다.”이 세
그러나 정호철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단번에 거절했다.“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이제 쉰 살이나 넘는데 어떤 여자가 저한테 시집오고 싶겠어요. 게다가 전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자기만의 가정을 꾸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그러는 정수미는 거의 인생의 대부분을 자기 딸을 찾는 데에 썼다.고민 끝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솔직하게 고백했다.“호철아, 나 사실 얼마 못 살아.”갑작스러운 말에 정호철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게 무슨 말이에요? 왜 얼마 못 살아요?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정수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이상한 생각한 적 없어. 그리고 이건 의사가 해준 말인데 지금 내 몸 상태로는 길어서 2년이래.”정호철은 자기도 모르게 휠체어의 손잡이를 꼭 잡고 분노에 차서 말했다.“분명 돌팔이 의사가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 이따 제가 다시 가서 물어볼게요. 정 안되면 다른 전문의로 바꾸던지 해요.”그러자 정수미가 그에게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의사한테 폐 끼치지 말라던 민정이 말을 벌써 잊었어?”순간 정호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저는...”“됐어. 사람은 결국에는 다 죽을 텐데 뭐가 무서워? 지금 이렇게 죽는 것도 다 하느님 덕분이야. 결국에는 딸을 찾게 도와주고 날 용서해 줬잖아. 난 이제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어.”정수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지만 정호철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따사로운 햇볕이 두 사람에 비쳤는데 정호철은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그러다가 정수미는 다시 정호철에게 말했다.“아까운 시간을 나같이 곧 죽을 사람에게 낭비하지 말고 너도 이제 너만의 행복을 찾아가.”정호철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정 대표님, 지금도 그분을 못 잊은 거 맞으시죠?”그분이라...순간 정호철의 입에서 나온 그 사람이 머릿속에 떠오른 정수미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부터 떨렸다.“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평생 용서하지 못할 거야.”정호철은 여전히 자신과 그 사람은 전혀 비교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차 한 대가 그들 앞에 세워지더니 고영란이 두 동생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어머님.”고영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민정아.”이때, 정수미가 말소리를 듣고 눈을 뜨자 고영란은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사돈.”마침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고 같은 또래다 보니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박민정도 옆에서 네 명의 아이와 놀아줬다.“어, 어마마...”두 동생은 아직 말이 서툴렀지만 박민정은 오히려 그게 듣기 좋았다.이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려 확인해 보니 조하랑이었다.“민정아.”“무슨 일이야?”“혹시 지금 우리 집으로 좀 와 줄 수 있어?”떨리는 소리로 묻는 조하랑의 모습에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 박민정은 빠르게 답했다.“응. 바로 갈게.”그리고 고영란과 정수미에게도 김씨 가문으로 간다고 말하자 박예찬이 냉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엄마,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그래.”그렇게 박민정은 박예찬을 데리고 김씨 가문으로 가는 차에 올라탔다.도착해보니 조하랑은 진작에 대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슨 일인지 인우 씨가 하루 종일 혼자 방안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어. 불러도 대답 없고.”“할아버지는?”“오늘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셨는데 괜히 할아버지까지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박민정은 일단 조하랑과 같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김인우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조하랑은 다시 조심스레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인우 씨, 문 좀 열어봐요. 민정이랑 예찬이가 놀러 왔어요.”박민정이 왔다는 말에 방안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방안의 인기척을 느낀 조하랑은 다시 그에게 물었다.“혹시 무슨 일 있어요?”“한번 나와봐요.”지금까지 김인우와 같이 살면서도 이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오래 기다린 끝에 마침내 방문이 열리면서 김인우의 모습이 보였는데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온 얼굴에 수염까지 덥수룩
그리고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어차피 조하랑과 엄마의 비밀은 어느 정도 다 알고 있었다.겨우 거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조하랑은 더는 못 참고 입을 열었다.“민정아, 나 인우 씨랑 할아버지한테 아직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왜?”박민정은 조하랑의 몸을 보더니 이제 어느 정도 임산부인 티가 난다고 생각했다.그러자 조하랑이 머뭇거리며 답했다.“인우 씨 태도가 계속 애매하더라고. 그리고 이런 부잣집 도련님에 대해 솔직히 믿음이 안가.”지금까지 딱 한번 연애를 해봤는데 그때 호되게 당한 뒤로는 아무리 결혼했다고 해도 여전히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다.“그런데 이런 일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잖아.”“그러니까.”조하랑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박민정을 보며 물었다.“민정아, 예찬이가 그러던데 너희 가족 모두 서주에 간다면서? 나도 따라가면 안 될까?”“뭐?”박민정이 깜짝 놀라 그녀에게 되물었다.“서주에 가서 뭐 하려고?”“일단 서주로 일하러 간다고 하고 1년 반 정도 있다가 다시 돌아오려고.”조하랑은 여전히 김인우가 아이를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했다.그녀의 말에 박민정은 그제야 조하랑이 홀로 아이를 낳은 뒤 다시 돌아올 계획이란 걸 알아챘다.“과연 할아버지께서 널 보내줄까?”“걱정하지 마. 할아버지쯤이야 가볍게 구슬릴 수 있어. 나를 제일 아끼는 분이라 반드시 허락할 거야.”“그래. 결정되면 알려줘.”조하랑은 둘도 없는 친구이기에 박민정도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돕고 싶었다.“민정아, 고마워.”말을 마치자마자 조하랑은 박민정을 꼭 안아줬는데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박민정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아무리 그래도 태어날 아이의 미래도 잘 생각해 봐야 해. 혹시나 아빠가 필요할 수도 있잖아...”박민정은 여태껏 겪었던 자기 경험담을 모두 말해줬다.그러자 그녀는 박민정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답했다.“응, 그럴게.”두 사람은 얼마간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박민정이 그만 집에 가려는데 마침 김훈이 돌아왔다.그리고 박민
“하랑아, 할아버지가 잊어버리고 너한테 말해주지 않았는데 오늘이 인우 부모님 기일이야.”김훈의 말에 조하랑은 그제야 김인우가 오늘 왜 저리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는지 이해가 갔다.“지금 생각해 보니 작년 이맘때쯤에도 그랬던 것 같네요.”작년에는 김인우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을 때라 물어보지도 않았다.김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때 인우가 어리기도 했고 또 부모님의 죽음이 커서도 큰 트라우마로 남았나 봐.”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하랑아, 혹시 우리 인우 좀 도와줄 수 있을까?”“나는 인우가 그래도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거든. 가서 그냥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돼. 저렇게 방안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래. 아무리 평소에는 까불거리고 말하기 좋아한다고 해도 마음이 아주 여린 아이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거야.”조하랑은 점점 김인우가 안쓰럽게 느껴졌다.사실 그의 어머니는 어릴 적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그러나 아버지는 항상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그에게 최선을 다해 아낌없는 사랑을 줬다.“네, 제가 노력해 볼게요.”조하랑의 대답에 김훈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리고 박예찬의 방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예찬아.”“증조할아버지, 들어오세요.”김훈은 박예찬의 말에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예찬아, 할아버지가 오늘 무슨 선물을 가져왔게?”김훈은 손을 뒤로 감췄으나 박예찬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답했다.“또 어디서 간식 사 왔어요?”“아이고, 먹는 게 아닌데?”김훈이 장난스레 답했다.“그럼 바둑인가요?”김훈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 네 연령대에 어울리는 물건이라고 생각해 줄래?”그러나 박예찬은 끝까지 알아맞히지 못했다.김훈은 그제야 싱글벙글해서 손에 감췄던 물건을 내놓았는데 그건 바로 다이아몬드 게임이었다.“우리 보드게임 한판 하자.”박예찬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너처럼 매일 컴퓨터만 보고 있으면 시력 건강에 아주 안 좋아.
김훈은 박예찬이 일찍 철이 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생각이 깊은 아이일 줄은 몰랐다.“할아버지가 사실대로 말해주면 절대로 하랑 이모랑 우리 인우한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알겠지?”박예찬은 머뭇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네.”김훈은 그제야 오늘 병원에서 들은 결과를 말해줬는데 지금 상황이 매우 안 좋다고 했다. 계속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려서 검사해 보니 심장병이 맞았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고 했다.그러나 김훈은 여태껏 사람들 앞에서 줄곧 꾀병을 부리는 듯한 행동을 보여줬다.“증조할아버지, 그런데 왜 하랑 이모랑 은우 삼촌한테 비밀로 하나요?”박예찬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김인우가 자기 앞에서 김훈이 얼마나 고집불통인지 불만을 토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만약 자기 할아버지가 진짜로 병에 걸렸다는 걸 알면 그런 소리도 못 할 텐데 말이다.그리고 조하랑도 마찬가지다.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김훈에게 알려주면 엄청 기뻐할 텐데 애석하게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바보야, 사람이 늙으면 죽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그걸 뭣 하러 말해? 말해봤자 괜히 걱정만 시키겠지. 남은 사람이라도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박예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그러자 김훈이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예찬아, 방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해. 절대로 두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 아니면 이 할아버지가 진짜로 화낼 거야.”“네.”박예찬은 자꾸만 목이 메어와 겨우 답했다....다른 한편.조하랑은 김훈의 부탁대로 김인우의 방문 앞까지는 왔지만 뭐라고 문을 두드려야 할지 막막했다.바로 이때, 방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김인우는 또다시 자기 눈앞에 서 있는 조하랑과 마주하게 되었다.“왜요? 또 무슨 일 있어요?”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네, 아, 아니요.”혼란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김인우가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맞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그, 그게 혹시 지금 어디로 가요?
이 시각, 조하랑은 무작정 핸들은 잡았는데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몰랐다.김인우도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는 것 같아 그저 도로를 따라 앞으로 계속 직진했다.평소 재잘거리기 좋아하던 김인우는 오늘 유난히 조용했고 그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조하랑은 가는 도중에도 사실 몇 번이고 그를 위로해 보고 싶었지만 끝내 내뱉지 못하고 말을 다시 삼켰다.딱히 위로할 줄 아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김인우가 스스로 이 우울함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앞으로 조금만 가다가 오른쪽으로 가요.”이때, 김인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네.”그리고 그의 말대로 옆 골목으로 빠지니 어느새 인적이 없는 작은 길이 나왔다.얼마쯤 더 가보니 조하랑은 산 중턱에 있는 묘원을 발견했다.“여기서 세워줘요.”“네.”차가 멈추자마자 김인우가 먼저 내렸고 조하랑은 빠르게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여긴 어디예요?”“김씨 가문의 묘지에요.”조하랑은 말없이 그를 따라갔다.그렇게 수많은 묘비를 지나 김인우는 어느 부부의 합장 묘비 앞에 멈춰 섰다.조하랑은 묘비에 걸려있는 왼쪽과 오른쪽 두 장의 흑백 영정사진을 번갈아 보다가 그제야 두 부부의 모습이 김인우와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외모상으로 봤을 때는 겨우 20~30대밖에 안 돼보이는데 생각해 보면 너무 일찍 고인이 된 것 같았다.김인우는 묘비 위의 부모님 사진을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그들을 불렀다.“아빠, 엄마.”조하랑은 가만히 서 있다가 앞으로 한 발짝 내딛으며 인사를 건넸다.“아버님, 어머님, 제 이름은 조하랑이고 인우 씨 아내입니다.”두 사람은 결혼한 후에도 김씨 가문의 묘원에는 와본 적이 없었다.김훈은 그녀가 사람이 많은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추석이나 설 때에도 될수록 친정집에서 가족들과 명절을 쇨 수 있게 배려해 줬다.김인우는 뜬금없는 조하랑의 행동에 어리둥절해서 그녀에게 되물었다.“왜 갑자기...”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하랑이 먼저 말했다.“뭐가
김훈은 박예찬이 일찍 철이 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생각이 깊은 아이일 줄은 몰랐다.“할아버지가 사실대로 말해주면 절대로 하랑 이모랑 우리 인우한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알겠지?”박예찬은 머뭇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네.”김훈은 그제야 오늘 병원에서 들은 결과를 말해줬는데 지금 상황이 매우 안 좋다고 했다. 계속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려서 검사해 보니 심장병이 맞았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고 했다.그러나 김훈은 여태껏 사람들 앞에서 줄곧 꾀병을 부리는 듯한 행동을 보여줬다.“증조할아버지, 그런데 왜 하랑 이모랑 은우 삼촌한테 비밀로 하나요?”박예찬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김인우가 자기 앞에서 김훈이 얼마나 고집불통인지 불만을 토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만약 자기 할아버지가 진짜로 병에 걸렸다는 걸 알면 그런 소리도 못 할 텐데 말이다.그리고 조하랑도 마찬가지다.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김훈에게 알려주면 엄청 기뻐할 텐데 애석하게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바보야, 사람이 늙으면 죽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그걸 뭣 하러 말해? 말해봤자 괜히 걱정만 시키겠지. 남은 사람이라도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박예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그러자 김훈이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예찬아, 방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해. 절대로 두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 아니면 이 할아버지가 진짜로 화낼 거야.”“네.”박예찬은 자꾸만 목이 메어와 겨우 답했다....다른 한편.조하랑은 김훈의 부탁대로 김인우의 방문 앞까지는 왔지만 뭐라고 문을 두드려야 할지 막막했다.바로 이때, 방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김인우는 또다시 자기 눈앞에 서 있는 조하랑과 마주하게 되었다.“왜요? 또 무슨 일 있어요?”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네, 아, 아니요.”혼란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김인우가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맞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그, 그게 혹시 지금 어디로 가요?
“하랑아, 할아버지가 잊어버리고 너한테 말해주지 않았는데 오늘이 인우 부모님 기일이야.”김훈의 말에 조하랑은 그제야 김인우가 오늘 왜 저리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는지 이해가 갔다.“지금 생각해 보니 작년 이맘때쯤에도 그랬던 것 같네요.”작년에는 김인우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을 때라 물어보지도 않았다.김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때 인우가 어리기도 했고 또 부모님의 죽음이 커서도 큰 트라우마로 남았나 봐.”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하랑아, 혹시 우리 인우 좀 도와줄 수 있을까?”“나는 인우가 그래도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거든. 가서 그냥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돼. 저렇게 방안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래. 아무리 평소에는 까불거리고 말하기 좋아한다고 해도 마음이 아주 여린 아이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거야.”조하랑은 점점 김인우가 안쓰럽게 느껴졌다.사실 그의 어머니는 어릴 적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그러나 아버지는 항상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그에게 최선을 다해 아낌없는 사랑을 줬다.“네, 제가 노력해 볼게요.”조하랑의 대답에 김훈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리고 박예찬의 방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예찬아.”“증조할아버지, 들어오세요.”김훈은 박예찬의 말에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예찬아, 할아버지가 오늘 무슨 선물을 가져왔게?”김훈은 손을 뒤로 감췄으나 박예찬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답했다.“또 어디서 간식 사 왔어요?”“아이고, 먹는 게 아닌데?”김훈이 장난스레 답했다.“그럼 바둑인가요?”김훈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 네 연령대에 어울리는 물건이라고 생각해 줄래?”그러나 박예찬은 끝까지 알아맞히지 못했다.김훈은 그제야 싱글벙글해서 손에 감췄던 물건을 내놓았는데 그건 바로 다이아몬드 게임이었다.“우리 보드게임 한판 하자.”박예찬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너처럼 매일 컴퓨터만 보고 있으면 시력 건강에 아주 안 좋아.
그리고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어차피 조하랑과 엄마의 비밀은 어느 정도 다 알고 있었다.겨우 거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조하랑은 더는 못 참고 입을 열었다.“민정아, 나 인우 씨랑 할아버지한테 아직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왜?”박민정은 조하랑의 몸을 보더니 이제 어느 정도 임산부인 티가 난다고 생각했다.그러자 조하랑이 머뭇거리며 답했다.“인우 씨 태도가 계속 애매하더라고. 그리고 이런 부잣집 도련님에 대해 솔직히 믿음이 안가.”지금까지 딱 한번 연애를 해봤는데 그때 호되게 당한 뒤로는 아무리 결혼했다고 해도 여전히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다.“그런데 이런 일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잖아.”“그러니까.”조하랑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박민정을 보며 물었다.“민정아, 예찬이가 그러던데 너희 가족 모두 서주에 간다면서? 나도 따라가면 안 될까?”“뭐?”박민정이 깜짝 놀라 그녀에게 되물었다.“서주에 가서 뭐 하려고?”“일단 서주로 일하러 간다고 하고 1년 반 정도 있다가 다시 돌아오려고.”조하랑은 여전히 김인우가 아이를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했다.그녀의 말에 박민정은 그제야 조하랑이 홀로 아이를 낳은 뒤 다시 돌아올 계획이란 걸 알아챘다.“과연 할아버지께서 널 보내줄까?”“걱정하지 마. 할아버지쯤이야 가볍게 구슬릴 수 있어. 나를 제일 아끼는 분이라 반드시 허락할 거야.”“그래. 결정되면 알려줘.”조하랑은 둘도 없는 친구이기에 박민정도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돕고 싶었다.“민정아, 고마워.”말을 마치자마자 조하랑은 박민정을 꼭 안아줬는데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박민정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아무리 그래도 태어날 아이의 미래도 잘 생각해 봐야 해. 혹시나 아빠가 필요할 수도 있잖아...”박민정은 여태껏 겪었던 자기 경험담을 모두 말해줬다.그러자 그녀는 박민정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답했다.“응, 그럴게.”두 사람은 얼마간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박민정이 그만 집에 가려는데 마침 김훈이 돌아왔다.그리고 박민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차 한 대가 그들 앞에 세워지더니 고영란이 두 동생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어머님.”고영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민정아.”이때, 정수미가 말소리를 듣고 눈을 뜨자 고영란은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사돈.”마침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고 같은 또래다 보니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박민정도 옆에서 네 명의 아이와 놀아줬다.“어, 어마마...”두 동생은 아직 말이 서툴렀지만 박민정은 오히려 그게 듣기 좋았다.이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려 확인해 보니 조하랑이었다.“민정아.”“무슨 일이야?”“혹시 지금 우리 집으로 좀 와 줄 수 있어?”떨리는 소리로 묻는 조하랑의 모습에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 박민정은 빠르게 답했다.“응. 바로 갈게.”그리고 고영란과 정수미에게도 김씨 가문으로 간다고 말하자 박예찬이 냉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엄마,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그래.”그렇게 박민정은 박예찬을 데리고 김씨 가문으로 가는 차에 올라탔다.도착해보니 조하랑은 진작에 대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슨 일인지 인우 씨가 하루 종일 혼자 방안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어. 불러도 대답 없고.”“할아버지는?”“오늘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셨는데 괜히 할아버지까지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박민정은 일단 조하랑과 같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김인우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조하랑은 다시 조심스레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인우 씨, 문 좀 열어봐요. 민정이랑 예찬이가 놀러 왔어요.”박민정이 왔다는 말에 방안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방안의 인기척을 느낀 조하랑은 다시 그에게 물었다.“혹시 무슨 일 있어요?”“한번 나와봐요.”지금까지 김인우와 같이 살면서도 이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오래 기다린 끝에 마침내 방문이 열리면서 김인우의 모습이 보였는데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온 얼굴에 수염까지 덥수룩
그러나 정호철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단번에 거절했다.“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이제 쉰 살이나 넘는데 어떤 여자가 저한테 시집오고 싶겠어요. 게다가 전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자기만의 가정을 꾸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그러는 정수미는 거의 인생의 대부분을 자기 딸을 찾는 데에 썼다.고민 끝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솔직하게 고백했다.“호철아, 나 사실 얼마 못 살아.”갑작스러운 말에 정호철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게 무슨 말이에요? 왜 얼마 못 살아요?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정수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이상한 생각한 적 없어. 그리고 이건 의사가 해준 말인데 지금 내 몸 상태로는 길어서 2년이래.”정호철은 자기도 모르게 휠체어의 손잡이를 꼭 잡고 분노에 차서 말했다.“분명 돌팔이 의사가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 이따 제가 다시 가서 물어볼게요. 정 안되면 다른 전문의로 바꾸던지 해요.”그러자 정수미가 그에게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의사한테 폐 끼치지 말라던 민정이 말을 벌써 잊었어?”순간 정호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저는...”“됐어. 사람은 결국에는 다 죽을 텐데 뭐가 무서워? 지금 이렇게 죽는 것도 다 하느님 덕분이야. 결국에는 딸을 찾게 도와주고 날 용서해 줬잖아. 난 이제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어.”정수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지만 정호철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따사로운 햇볕이 두 사람에 비쳤는데 정호철은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그러다가 정수미는 다시 정호철에게 말했다.“아까운 시간을 나같이 곧 죽을 사람에게 낭비하지 말고 너도 이제 너만의 행복을 찾아가.”정호철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정 대표님, 지금도 그분을 못 잊은 거 맞으시죠?”그분이라...순간 정호철의 입에서 나온 그 사람이 머릿속에 떠오른 정수미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부터 떨렸다.“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평생 용서하지 못할 거야.”정호철은 여전히 자신과 그 사람은 전혀 비교
박민정은 순간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갑자기 그만두시는 거예요?”“사실 민정 씨가 기억도 잃고 정 대표님을 원망하고 계셨을 때, 저는 그저 두 분을 돕고 싶어서 지금까지 옆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억도 돌아왔고 또 두 분이 화목하게 지내시는 걸 보니 저도 제가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고 싶어서요.”저 말은 분명 자수하러 가겠다는 뜻이었다.예전에 정호철은 박예찬을 납치하면서 하마터면 박민정과 아이를 죽일 뻔했다.박민정은 모든 기억이 돌아오면서 그때의 일도 생각났다.솔직히 그를 용서한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그리고 지금까지 오른쪽 얼굴에 그날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어 볼 때마다 그 일이 떠오르곤 했다.그러나 이 일이 전부 정호철 잘못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었다.“그러면 우리 엄마도 같이 감옥에 가야 할까요?”박민정이 담담하게 되묻자 정호철은 깜짝 놀라 빠르게 답했다.“이 일은 저 혼자만의 잘못이지 정 대표님과는 무관합니다. 그저 속았을 뿐이라고요. 민정 씨, 그분은 만약 자기 목숨과 민정 씨를 바꾼다고 하면 기꺼이 받아들일 겁니다.”“게다가 지금의 몸 상태로는 감옥에서 버티기도 힘들 거예요. 요 몇 년간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겪었거든요...”정호철은 정수미 편을 드느라 박민정의 진짜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하여 박민정이 그의 말을 자르고 다시 말해줬다.“정 부장님, 그냥 지금처럼 계속 저희 엄마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순간 정호철은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박민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이 일은 그냥 이렇게 넘어갑시다.”“민정 씨...”정호철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까지 더듬었다.“그런데 얼굴에 난 상처랑... 예찬이는...”“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라잖아요. 그때 정 부장님은 윤소현 씨를 돕기 위해 제 얼굴에 상처를 냈고, 지금은 제가 정수미 씨의 딸이란걸 아니까 저한테 사과하는 거겠죠?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제가 정수미 씨의 친딸로서 정 부장님을 감옥에 보내지 않을 겁니다.”이 세
윤소현은 자기 딸을 보러 가겠다고 병문안을 신청했다.그리고 수중에 남아있던 돈으로 변호사도 불렀다.교도소에서는 그녀의 딸이 지금 중병에 걸린 점을 고려하여 하루만 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줬다.병원 안.윤소현은 병실 침대에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누워있는 아이를 보고 나서도 일말의 애틋함이 아닌 오직 분노만 가득 차올랐다.“다 너 때문이야!”그러다가 갑자기 아이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아이는 아직 너무 어리기도 하고 몸도 허약해 울거나 발버둥조차 치지 않았다.다혜가 그저 유남우의 복수 도구였다는 사실에 윤소현은 이 아이를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윤소현 씨.”이때 변호사가 들어오는 모습에 윤소현은 재빨리 손을 거두고 한껏 불쌍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주 변호사님, 어린아이가 지금 옆에서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꼭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더 이상 감옥에 있을 수 없어요.”주영훈은 아직 윤소현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병든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쓰이긴 했다.“소현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잘 조율해 보겠습니다.”이 뜻은 감형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예상 밖으로 오늘날 이 아이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윤소현은 속으로 너무 기뻤다.하여 윤소현은 딸을 엄청 아끼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둔갑해 변호사더러 영상 하나를 찍게 하여 모든 사람이 보고 도와주길 바랐다....이 시각, 정수미도 마침 영상을 보고는 한껏 불쾌한 얼굴로 되물었다.“윤소현은 애초에 아이를 싫어하는 인간인데 이게 진심일 리가 없잖아?”길서연도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당연하죠. 이 기회에 동정표나 받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아이만 너무 불쌍해.”정수미는 안타까운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이 문득 호기심에 물었다.“다혜는 윤소현 씨랑 유남우 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닌가요? 왜 두 사람이 모두 아이를 돌봐주지 않나요?”“민정아, 너 몰랐어? 다혜는 유남우 씨 친딸이 아니라 소현이가
시간이 1분 1초 흘러갔고 윤소현은 점점 버티기 힘들었다.그러나 누구한테도 연락할 사람이 없어 막막했는데 이튿날 어렵게 유남우와 연락이 닿았고 또 직접 면회 오겠다고 했다.윤소현은 자신의 추해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서둘러 엉망진창인 머리를 정리했다.그리고 그의 앞에 마주 앉아 애틋한 얼굴로 말했다.“남우 씨,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요.”그러나 유남우는 한껏 쌀쌀맞은 얼굴로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 오늘 여기에 온 목적은 너한테 꼭 할 말이 있어서니까.”“뭘요?”“예전에 네가 당했던 그 불미스러운 일 말이야.”유남우의 말에 윤소현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지더니 머릿속에 그때의 그 끔찍했던 장면이 또다시 떠올랐다.“남우 씨,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유남우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사실 그 일을 내가 시켰어.”순간 윤소현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여태껏 범인을 찾아내지 못해 계속 애를 먹고 있었는데 그 주범이 유남우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그러다가 애써 정신을 차린 뒤 책상을 세차게 두드리며 그에게 따져 물었다.“대체 왜요? 제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요? 왜요!”윤소현은 여태껏 친엄마인 한수민, 자신을 키워줬던 정수미한테도 마음을 열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유남우한테만은 진심이었다.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 칠 줄은 정말 몰랐다.유남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윤소현의 모습을 보고도 차분하게 답했다.“네가 먼저 나를 건드렸잖아.”“뭐라고요?”윤소현이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제가 뭘 했는데요?”“나한테 약을 타서 먹이려 했단 사실을 내가 모를 것 같아? 그리고 그때 민정이랑 민정이 아들을 해치려 했던 사람이 너란 것도 이미 알게 돼버렸네?”그의 대답에 윤소현은 순간 멍해졌다.“그래서 이 모든 게 다 박민정 때문이었다는 건가요?”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두 주먹을 꼭 쥐고 또다시 테이블을 쾅쾅 두드렸다.“왜!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