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방을 옮기면 더 편히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밤새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렸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꿈, 정숙 아줌마의 죽음, 그리고 한수민의 죽음까지...꿈속의 모든 일들이 희미하고 불분명했지만 그 슬픔은 그녀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꿈에서 겪은 구체적인 상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박민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꿈을 되짚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는 게 없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했다.세수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박민정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누나.”동생 박민호였다.박민호는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박민정은 그를 보고도 별다른 반가움을 느끼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그녀는 박민호를 몇 번이나 마주쳤기 때문이었다.“응, 여긴 웬일이야?”박민정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유남우가 그녀를 속이고 있을 때, 박민호는 늘 유남우를 도와 거짓말을 꾸미는 데 일조했다.박민호도 그녀의 냉랭한 태도를 눈치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 앞으로 다가왔다.“누나, 설마 나한테 화난 거야? 나도 남우 형한테 속았던 거라고!”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속았다니, 무슨 말이야?”“남우 형이 그러더라고. 유 대표가 진심으로 누나를 대하지 않는다면서 오직 형만이 누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나도 예전에 유 대표가 누나에게 잘못했던 걸 생각하니 누나가 더 사랑받는 사람이랑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형 말을 믿었지.”박민호는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히 말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그래? 알겠어. 그럼 이제 무슨 일로 온 건데?”박민호는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누나, 기억은 얼마나 돌아왔어? 뭐라도 생각난 거는?”박민정은 솔직히 말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아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그래? 괜찮아, 천천히 떠올리게 될 거야.”박민호는 옆에 있는 과일 바
전날 밤 악몽 탓에 잠을 설친 박민정은 차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어느덧 차는 어느새 시골에 도착해 있었다.유남준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운전기사에게 차를 잠시 멈추게 했다.박민정은 깊이 잠들지 못했는지 몸을 비틀다가 그만 유남준의 품으로 넘어질 뻔했다.그는 재빨리 그녀를 받아 안았다.박민정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이 그의 몸에 기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당황스러워 얼굴이 붉어졌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유남준은 고개를 저었다.“사과할 일은 아니야. 가자, 다 왔어.”벌써 도착한 걸까?박민정은 창밖을 보았는데 새하얀 눈 아래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그곳은 어린 시절 그녀와 정숙 아줌마가 함께 살던 집, 그녀의 진짜 집이었다.어릴 적 기억의 단편들이 박민정의 머릿속에서 하나둘 떠올랐다.“맞아요, 여기가 바로 그 집이에요.”그녀는 유남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아줌마, 나 돌아왔어요.”박민정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이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차가운 바람이 귀를 스치고 박민정은 눈 덮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집으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고 그때 유남준이 다가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박민정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당신한테 여기 열쇠가 왜 있어요?”“예전에 네가 나한테 맡겼잖아. 우리 여기서 잠시 함께 살았었지.”“우리가 여기서 같이 살았다고요?”박민정은 이 말에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명품 정장에 품격이 넘치는 태도를 지닌 그가 이렇게 낡은 집에서 자신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유남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응. 예전에 네가 자꾸 삐져서 가출했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왔지.”그의 농담 섞인 말에 박민정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놀랐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테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오늘 하루 동안 많은 곳을 둘러보며 꽤 많은 기억을 떠올렸다.저녁이 되어서야 둘은 시골의 집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약간의 후회를 드러냈다.“벌써 열 시가 넘었네요. 지금 진주시로 돌아가면 새벽이 되어야 도착하겠어요.”유남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럼 오늘은 여기서 묵자. 밤늦게 운전하는 건 위험하니까. 게다가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을 깨울 수도 있잖아.”박민정은 타인의 사정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성격이었기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여기서 자는 걸로 할게요. 그런데 괜찮을까요?”“물론 괜찮지.”유남준은 내심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 몹시 반가웠다.박민정이 말한 건 두 개의 방이 있다는 뜻이었지만 유남준은 하나의 방을 생각했다. 그녀는 집 안을 둘러본 뒤 침실이 하나뿐임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그럼 저는 거실 소파에서 잘게요.”여기는 박씨 가문의 본가와는 달랐다. 박씨 가문의 저택은 침실 안에도 넉넉한 공간이 있어 소파를 두는 게 가능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유남준은 단 한 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그럼 나도 소파에서 같이 잘게.”그의 대답에 박민정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그러지 말고 각자 따로 자요.”박민정은 비록 기억의 조각들을 조금씩 되찾고 있었지만 유남준과의 관계가 너무 빨리 진전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유남준은 억지로 그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혼자 침실에서 자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여기는 외딴곳이라 네가 혼자 소파에서 자는 건 걱정돼. 침실 침대는 넓으니까 네가 불편하면 이불 하나로 우리 사이를 막아두면 되잖아. 어때?”그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박민정은 망설이면서도 밖에서 들려오는 거센 바람 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좋아요.”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남준은 곧바로 이불을 가져와 침대 가운데를 나누고 각각 이불을 하나씩 준비했다.유남준이 침대에 눕고 나서야 박민정도 몸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로
박민정의 시선이 우연히 유남준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유남준은 숨이 가빠지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직전 박민정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저기... 어젯밤 감사했어요.”박민정은 짧게 말한 뒤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유남준의 품이 순식간에 비어지며 허전함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그도 조용히 일어났다.창밖에는 두껍게 쌓인 눈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기억나? 재작년 이맘때도 우리 여기 머물렀었잖아.” 유남준이 말을 꺼냈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들었지만 머릿속엔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두 사람은 먼저 읍내로 나가 식사를 한 뒤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은정숙을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이후 차를 타고 진주시로 향했다.진주시는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길 위에는 삼삼오오 모여 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민정은 잠시 멍해졌다.‘만약 내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쯤 저렇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을까?’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몇 개의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뿐이었다.“잠시 후 우리 집, 본가로 갈 거야.” 유남준이 그녀를 바라보다 나지막이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본가요?”“응, 우리 집.”유남준의 대답에 박민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마침 그녀도 그곳에서 두 아이를 보고 싶었다.유씨 가문의 저택에서 고영란은 요즘 완벽한 가정의 화목을 누리고 있었다.자식과 손자들이 곁에 머물렀고 두 아이는 날마다 그녀를 웃게 했다.박민정이 온다는 소식에 그녀는 하인들에게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도록 했다.차가 저택 입구에 도착하자 고영란은 직접 마중을 나왔다.“민정아, 어서 와서 앉아.”박민정의 기억 속 고영란은 어린 시절에만 머물러 있었다.그때의 고영란은 차갑고 냉담한 분위기를 풍기며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박민정은 어릴 적 그녀를 조금 두려워
윤소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선두에 있던 여하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 한 하인을 거칠게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들어가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박민정과 유남준 가족이 함께 웃으며 화목하게 있는 모습이었다.그 광경에 윤소현의 눈빛이 질투로 뒤덮였다. 그녀는 곧바로 고영란을 향해 차갑게 비아냥댔다.“어머니, 저랑 남우 씨가 비록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건 아니지만 저도 유씨 가문에서 떳떳하게 맞아들인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모른 척하시겠다는 거예요?”고영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소현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유남우 역시 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큰 실수로 느껴졌다.“소현아,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어서 남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여긴... 당분간 환영받지 못할 것 같구나.”윤소현은 이 말을 듣고도 뻔뻔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왜요? 제가 여기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혹시 당신 아들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제가 다 까발릴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고영란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윤소현이 마지막 퇴로조차 거부하자 냉소를 띠며 대꾸했다.“우리 아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한번 말해 보렴.”윤소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뭘 말하냐고요? 당신 아들이 자기 형의 여자를 탐냈다는 거. 이게 바로 당신들이 자랑하는 유씨 집안의 가풍인가요?”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에 있던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은 옆에서 두 아이를 달래며 이 상황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유남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다들 뭘 보고 있어? 당장 저 여자를 끌어내!”윤소현은 유남준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자 더 큰 소리로 외쳤다.“유남준 씨, 이 말을 듣기 싫은 거죠? 뭐, 당연하죠. 형의 여자를 뺏어갔다니, 저라도 그런 꼴은 못 참겠어요!”만약 그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벌써 그녀에게 직접 손을 댔을 것이다.곧
박민정은 그 아기가 윤소현의 딸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죠?”보모는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경계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울기만 하고 어떻게 달래도 소용이 없네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따라온 보모에게 두 아들을 잘 돌보라고 지시한 뒤, 직접 아이를 안아 들어 달래기 시작했다.그러나 유다혜는 그녀의 품에서도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엄마가 된 경험 덕분인지 박민정은 아기를 돌보는 법을 잊었더라도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먼저 보모에게 아이가 충분히 먹었는지 물었고 이어 아이의 기저귀를 확인하며 배탈이 났는지 살펴보았다.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아기가 계속 울자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아기를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이렇게 계속 우는 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보모도 동의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보모가 아기를 다시 받으려던 찰나, 멀리서 윤소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내 딸을 저 여자한테 맡기라고 했어?”윤소현은 높은 굽의 힐을 신은 채 빠르게 걸어와 박민정의 품에서 아이를 거칠게 빼앗아 갔다.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보모를 질책했다.“내 딸을 당신한테 맡겼더니 이렇게밖에 돌보지 못해? 내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책임인 줄 알아!”그녀는 이어 박민정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너도 아이가 있잖아. 내 아이를 왜 안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은 그 아이가 윤소현의 딸임을 알았더라면 절대 안았을 리 없었다.보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작은 사모님, 다혜가 계속 울어서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잠깐 도와주셨던 것뿐이에요. 아무런 악의도 없었습니다.”“악의가 없었다고?”윤소현은 여전히 울고 있는 딸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 뿐이야.”그러다 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작은 사모님, 아이를 병
박민정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일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고영란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해 윤소현이 말한 병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윤소현이 병실에서 달려나오더니 곧장 박민정에게 달려들었다.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주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박민정 역시 피할 겨를이 없었고 결국 윤소현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세게 내려앉았다.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증이 얼굴을 타고 번졌다. 그러나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박민정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박민정도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고 그렇게 둘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고영란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도저히 가로막을 수 없었다.“박민정, 네가 어떻게 다혜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다혜는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안 됐는데!”‘뭐?’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전 당신 딸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우리 다혜 몸에 이렇게나 많은 상처가 났는데도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고? 너 정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윤소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분노를 퍼부었고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방어에만 집중했다.고영란이 아무리 소리쳐도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다.“소현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둬!”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윤소현은 그제야 멈췄다.박민정도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정수미가 황급히 달려와 박민정의 얼굴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을 보고 안타까워했다.“민정아, 괜찮아?”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불만을 터트렸다.“엄마, 똑같이 엄마 딸인데 우리가 싸웠으면 두 사람 다 챙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박민정만 신경 쓰는 거예요?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정수미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돌아보았다.“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봐. 왜 둘이
박민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좋아요, 신고해요. 경찰이 와서 모든 걸 조사하게 해요. 제가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겁니다!”그녀는 나쁜 짓을 하기 않았기에 당당했다.윤소현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려 했지만 고영란이 그녀를 막아섰다.“소현아, 분명 이건 오해가 있을 거야. 민정이가 그렇게 어린 아이를 해칠 리가 없잖니.”정수미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 모두 한 가족인데 경찰까지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니?”그러나 윤소현은 눈가가 붉어진 채 항의했다.“엄마, 지금 제 딸이 이런 상태인데도 엄마는 저를 외면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리 아이 편을 들어주실 생각은 없으세요?”박민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그만해요. 차라리 신고해요.”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경찰 조사를 통해서뿐이었다.윤소현은 사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 없었다. 아이의 일은 박민정과 무관했으며 그녀 스스로 꾸며낸 일이었기 때문이다.“민정아, 흥분하지 마. 우리 가족 일이니 우리끼리 해결해.”정수미가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윤소현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비꼬듯 말했다.“좋아요. 우리끼리 해결하죠.”“그럼 말해봐, 박민정. 내 딸이 이렇게 됐는데 넌 어떻게 책임질 거야?”“제가 한 일이 아닌데 왜 제가 책임져야 하죠?”박민정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되묻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지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야? 우리 다혜는 늘 멀쩡했어. 그런데 네가 안은 뒤로 이렇게 됐다고!”박민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적 없어요!”그녀는 어린 다혜가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걸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런데도 윤소현은 여전히 공격적이었다.“엄마, 보셨어요? 얘는 끝까지 오리발만 내밀잖아요!”정수미는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유다혜는 너무 어리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고영란이 오늘 아이를 돌본 보모를 불러왔고 보모는 떨
결국 진서연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들어줬다.그리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정민기에게 오늘은 안 될 것 같으니 내일 같이 밥 먹자고 문자를 보냈다.이 시각, 정민기는 문자를 보자마자 혹시나 진서연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원래 많이 물어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는 비록 궁금하긴 하지만 애써 참고 메시지에 답장했다.“네.”저녁때쯤, 에리는 진서연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정민기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따라오던 그의 부하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보스, 오늘 형수님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일 있대.”“헐, 저거 엄청 비싼 차인데!”그의 말에 정민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은 값비싼 슈퍼 카를 타고 자리를 떴다.부하들은 원래 정민기를 무서워했지만 같이 지낸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많이 편해진 것 같았다.“보스, 형수님은 왜 갑자기 저런 차를 타고 갈까요?”정민기는 원래 몇십억짜리 자동차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했지만 부하가 대놓고 물어보니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나도 몰라.”그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다시 자기 차에 올라탔다.지금 그가 타고 다는 차는 고작 몇천만짜리였고 길거리에 몰고 나가도 눈길 한 번을 안 줄 그런 차였다.그저 박민정의 보디가드로서 너무 좋은 차를 끌고 다녀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민기가 말없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본 부하들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설마 형수님이랑 다툰 건가?” “아까 그 차는 한눈에 봐도 엄청 비싼 차일 것 같은데 설마 형수님께서 마음을 바꾼 건 아니겠지? 우리 보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어떻게...”“대단하면 뭐 해? 지금 시대는 돈이 제일 쓸모가 있단 걸 몰라?”“하긴 요즘 사람들은 너무 현실적이야.”부하들의 말을 정민기는 차 안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그러나 지금은 퇴근한 박민정을 박씨
하정철의 황당한 물음에 에리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아빠,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제가 어떻게 연 사장님을 좋아해요?”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 얼굴인데 좋아한다고 하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만약 이런 사람이랑 매일 같이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에리의 말에 연지석은 그제야 마음 놓고 여유롭게 물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어르신, 들으셨죠? 정말 오해라니까요.”하정철은 그제야 묵은 체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직 궁금증이 해결이 안 된 게 있어 다시 에리에게 다가갔다.“그러면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구야? 애초에 없는 거 아냐? 만약 없으면 저번에 외삼촌이 소개한 그 여자를 한 번 만나보던지.”여기까지 와서 결혼을 재촉하는 아버지를 보고 에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마침 진서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 앞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에리가 대뜸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바로 저 사람이에요.”순간, 문 어구에 서 있던 진서연은 어안이벙벙해졌다.“네?”‘에리 씨가 날 좋아한다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자신은 정민기와 사귀는 사이인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에리도 외모가 아주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딴마음을 가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저기, 어르신...”진서연이 막 해명하려는데 에리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와 슬쩍 눈빛을 보냈다.이건 분명 도와달라는 구조신호였다.하여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예의상 하정철에게 말했다.“처음 뵙겠습니다.”하정철은 진서연을 다시 아래위로 훑어보니 얼굴도 귀엽고 예의 바른 것 같아 마음에 들었는데 무엇보다도 ‘여자’라는 면에서 크게 안심이 되었다.“아가씨, 이름이 뭐예요?”“진서연이라고 합니다.”하정철 세대의 어르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얼굴상이 바로 진서연처럼 귀엽고 순진한 여자일 것이다.“그래요. 오늘 퇴근하면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요. 제가 제 아내한테 말할 테니까 혹시 특
하정철은 최대한 그가 알아듣기 쉽게 말했으나 연지석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저기 어르신, 혹시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랑 에리가 왜 거짓말하겠어요?”에리랑은 친구 사이라고도 말 못 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과 함께 말을 맞춰 그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하정철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더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그러면 제가 더 알아듣게 말할까요?”순간 직원들의 시선이 전부 두 사람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그의 으름장에도 연지석은 덤덤하게 답했다.“네. 전 괜히 오해를 사기 싫습니다.”그러나 연지석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후회했다.“당신이랑 우리 에리가 지금 사귀는 중인가요?”하정철의 말에 주변은 삽시에 조용해졌고 연지석은 혹시나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그에게 되물었다.“뭐라고요?”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말아요. 저랑 에리 엄마도 이미 다 눈치챘으니까. 만약 두 사람이 진짜 사랑하는 거라면 일찍이 말해주지, 굳이 이렇게까지 늙은이들을 마음고생시킬 필요는 없잖아요!”하정철의 호소에도 연지석은 여전히 이게 무슨 말인지 상황판단이 안 섰다.유부녀를 좋아한다는 소문까지는 견딜 수 있어도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리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가 어떻게 게이란 말인가? 그것도 한때의 라이벌인 사람과?“오해입니다. 저랑 에리는 그저 동료일 뿐,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연지석은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이에 대해 해명하게 되었다.사람 중에서 구경하던 진서연은 갑작스러운 일의 전개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파일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대박, 설마 진짜야?’구경꾼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연지석은 어쩔 수 없이 하정철의 팔을 이끌며 말했다.“일단 제 사무실로 가시죠.”“인정하는 건가요? 그래서 창피해서 이러는 거죠?”하정철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계속 캐물었지만 연지석은 대답할 가치도
“내일 회사에 가서 그 여자가 누구인지 한번 봐야겠어.”에리의 아버지 하정철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하자 조미연도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우리 아들이 나쁜 길로 빠지게 할 수는 없잖아요.”사실 그녀도 에리가 진짜로 남자를 좋아할까 봐 걱정되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오히려 돌싱에 아이도 있는 여자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되었다.이튿날 아침.박민정이 회사로 와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고 설인하의 모습도 보였다.“인하 씨, 무슨 일이에요?”“에리 씨 아버님께서 오셨는데 에리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네?”박민정은 화들짝 놀라더니 어제 에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혹시 인하 씨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박민정의 물음에 설인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저야 당연히 모르죠. 회사에 이렇게 많은 인플루언서며 예쁜 여배우들이 있는데 에리는 다 싫대요. 눈이 아주 높은가 봐요.”“그럼 에리랑 아주 친한 사람이겠네요?”아마 그의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혼기가 찬 에리가 걱정되어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또한 신경외과 전문의의인데도 이렇게 회사까지 직접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거면 분명 에리의 아버지도 큰 용기를 냈을 것이다.설인하는 에리가 평소에도 자주 교류하는 사람이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 사람들을 다 제외한다면...그녀의 얼굴이 순간 돌변하더니 박민정에게 물었다.“에리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설마 연 사장님은 아니겠죠?”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말처럼 아마 에리는 연지석을 좋아해서 그와 자주 트러블이 생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네?”박민정은 순간 깜짝 놀랐다.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연지석과 두 사람이 티격태격 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보통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괜히 그 사람한테 장난치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어진다.“설마 진짜일까요?”박민정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뭐가?”이때 연지석이 언제 왔는지 문 앞에서 두 사람을 가만
유남우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윤소현을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위로해 줬는데 이런 모습을 일부러 박민정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아니면 홍주영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홍주영과 박민정 두 사람은 그저 한쪽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그들에게 말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거부 반응은 없는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박민정과 조하랑도 그곳에 한참 동안 머물다가 병원을 빠져나왔다.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은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했다.그녀는 원래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했지만 오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유다혜를 본 뒤로는 이상하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모든 아이한테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가 주어지는데 괜히 그 기회를 마음대로 저버리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김인우 씨가 혹시나 아이를 원치 않으면 어떡하지?’“민정아, 내가 임신한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해줘. 특히 인우 씨한테.”박민정은 왜 그래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갔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먼저 조하랑을 데려다준 뒤 박민정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에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정아, 아까 급하게 나가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야. 그저 하랑이 만나고 왔어.”“그럼 됐어.”그렇게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만 에리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민정아, 저번에 그 뉴스 기사 봤어?”‘기사?’순간 저번에 최현아가 에리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에리가 다급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민정아, 난 극히 정상적인 남자야. 절대 게이가 아니니까 믿어줘.”그의 말에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래. 믿을게.”박민정이 웃자 에리
“민정아, 하랑 씨.”다름 아닌 정수미와 윤소현이었는데 그중 정수미는 빠르게 두 사람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민정아, 병원에는 웬일이야? 어디 아픈 거야?”이때 조하랑이 갑자기 일부러 기침하더니 박민정 대신 답했다.“콜록! 콜록! 제가 감기 걸려서 민정이랑 같이 왔어요.”그러나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의사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보고서를 그녀에게 건네줬다.“조하랑 환자분, 임신 보고서를 두고 가셨어요.”순간 조하랑은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녀의 거짓말이 이렇게 빨리 탄로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민정은 재빨리 일어나 보고서를 건네받았고 조하랑도 멋쩍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왔던 김에 산부인과에도 와봤어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활짝 웃었다.“축하해요.”“감사합니다.”그러나 조하랑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옆에 서 있던 윤소현은 김씨 가문의 후계자를 임신했다는 소리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불타올랐다.이렇게 되면 김씨 가문에서 조하랑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진다고 볼 수 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신분이나 지위, 외모 면에서 조하랑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밀려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유남우와 홍주영 두 사람도 손에 한 무더기 결과서를 갖고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문득 박민정 손에 들린 검사 보고서를 본 순간 표정이 변했다.‘임신 보고서인가?’‘또 임신했다고?’유남우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윤소현이 빠르게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남우 씨, 우리 다혜는 어떻게 됐어요?”“방금 수술이 끝나서 이제 회복 결과를 지켜봐야지.”윤소현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유남우의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만약 우리 다혜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 그러면 저도 그냥 죽어버릴래요.”유남우는 그녀를 밀쳐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애써 참고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야.”“너무 무섭지만 남우 씨가 제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윤
박민정은 왠지 조급하게 들리는 조하랑의 목소리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하던 일을 멈추고 답했다.“그래.”한 시간 뒤, 어느 작은 내과 병원.박민정은 허름한 병원 외부와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조하랑에게 의아해서 물었다.“하랑아, 대체 이런 곳에는 왜 온 거야?”조하랑은 그녀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더니 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조용히 해.”그리고 주머니에서 마스크 두 장을 꺼내더니 하나는 박민정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었다.“민정아, 나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서 검사해 봐야겠어.”“뭐?”박민정은 진짜 큰 일인 줄 알고 가슴을 졸였는데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런 건 먼저 테스트기로 확인해 볼 수 있지 않나?’조하랑은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재빨리 해명했다.“임테기도 다 정확한 건 아니잖아. 무조건 병원에 와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게 제일 확실할 것 같아서.”“그렇지만 꼭 이런 곳에서 검사해야 해?”박민정은 이곳의 위생 상태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러나 진주시의 크고 작은 병원들은 거의 다 김씨 가문 산업이다 보니 조하랑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혹시나 김씨 가문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김인우랑 김훈한테 해명하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가자. 걱정하지 마.”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들어가서 더러운 의료 기기들을 보고는 기겁하더니 빠르게 뛰쳐나왔다.“그냥 다른 병원으로 가자.”두 사람은 다시 짐을 싸서 결국에는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소변 검사와 초음파 검사까지 마친 조하랑은 검사 보고서에 임신 4주 차라는 글씨를 본 순간 눈앞이 아찔해 났다.“어떻게 4주가 되는 거예요?”“마지막 생리 주기를 계산해 본 결과가 그렇게 나왔습니다.”조하랑은 지금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좋은 일인데 인우 씨한테 빨리 알려줘.”그러나 조하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아니, 절대 안 돼.”자신도 아직 받아 들을 준비가 안
정수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의사한테 자신이 사인하겠다고 말하려는데 멀리서부터 유남우가 다가와 그들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윤소현은 유남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굴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눈물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남우 씨, 우리 다혜가 혈액암이래요. 그래서 다른 피를 수혈받아야 한다는데 그래도 살 확률이 그리 높지 않대요. 저희 이제 어떡하죠?”유남우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럼 빨리 수혈부터 진행하자고 해.”윤소현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사인했다.그러나 정수미는 그녀의 빠른 태세 전환에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분명 이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유남우의 원인이 크다는 걸 윤소현도 알 텐데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렇게 그들은 밤새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새벽 때쯤, 홍주영도 전문의들을 데리고 달려왔다.그리고 어린아이가 고생하고 있는 게 너무 안쓰러웠다.“도련님, 다혜는 괜찮나요?”홍주영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유남우는 문득 어제 하민재와 그녀가 같이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나도 아직 몰라. 지금 수술 중이야.”홍주영은 수술실 쪽을 바라보면서 애써 조급한 마음을 달랬다.그러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소현은 그녀의 모습이 참 가증스럽다고 생각되었다.“홍 비서님, 다혜는 제 딸인데 왜 비서님이 난리예요?”그녀의 날카로운 말투에 홍주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이때 유남우가 고개를 돌리고 윤소현에게 물었다.“다혜가 자기 딸인 걸 아는 사람이 왜 지금 하나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그는 원래 이 계기로 윤소현에게도 만약 아이한테 사고가 일어나게 되면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그러나 이 여자는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윤소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이 일은 점점 크게 번져 어느새 김씨 가문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김인우는 유다혜가 병원에서 수술받는다는
“연애해 본 적 없다면서요?”하민재는 다소 의아했다.도대체 자신이 그 남자보다 부족한 게 뭐란 말인가?홍주영은 그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네, 연애는 해 본 적 없어요. 그냥... 짝사랑이었을 뿐이에요.” 하민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렇게 솔직한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럼 왜 고백하지 않았어요?” 그는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홍주영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그 사람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절 좋아하지 않거든요.”“그럼 둘이 이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거네요?”하민재가 다시 한번 확인하자 홍주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헤어질 필요도 없잖아요? 난 신경 안 써.”짝사랑이라면 아무 문제없었다.하민재는 자신만만했다. 연애 경험 없는 홍주영쯤이야 얼마든지 자신의 매력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홍주영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하민재가 가로막았다.“하지만은 무슨. 이제 이 얘긴 그만해요. 연애에 공평함 같은 게 어디 있어요? 난 주영 씨 마음속에 누군가 있는 걸 개의치 않으니까 주영 씨도 내 과거에 신경 쓰지 않으면 돼요.”하민재의 단호한 태도에 홍주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좋아요, 약속할게요.”“네.”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하민재의 할머니가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어떻게 됐어?”“뭐가요?”하민재가 되묻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랑 주영이 말이다. 주영이 같은 아이, 꼭 소중히 여겨야 한다. 부잣집 딸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할 것 없는 아이야.”하민재의 할머니는 함부로 연을 맺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홍주영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었다. 홍주영은 비록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할 만했다.그녀는 가문 사업에는 별 관심 없는 손자가 이런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하민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