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때요? 아무거나 해내면 돼요.” 무용 선생님이 박민정에게 말하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그리고 넓은 공간으로 걸어갔다.무용을 하고 있는 직원들은 모두 박민정을 주목하며 그녀가 실수하는 모습을 기다렸다.아까 선생님이 보여준 동작은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고 그들은 박민정이 그걸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지 의심했다.박민정이 그 동작을 따라 하긴커녕, 아마 우스꽝스럽게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박민정은 선생님이 보여준 동작을 완벽하게 해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동작을 더 깔끔하고 정확하게 소화했다.“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한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리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반 달 동안 연습해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동작을 박민정이 그렇게 쉽게 해냈다는 사실에 놀랐다.“언제 우리 회사에 이런 춤 잘 추는 사람이 있었던 거야?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또 다른 사람이 투덜거렸다.무용 선생님은 박민정을 보며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저기, 어느 부서 사람이에요? 제가 매니저님께 얘기해서 앞으로 이 기간 동안 우리랑 같이 춤 연습을 해요. 공연 끝난 후에는 보너스도 줄게요.”박민정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저는 이 회사 직원이 아니에요. 오늘 면접 보러 온 사람이에요.”무용 선생님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아, 그럼 면접은 합격했나요?”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무용 선생님은 그 말을 듣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합격 못했지? 이렇게 춤도 잘 추고 예쁘기까지 한데, 정말 판매직에 딱 맞을 사람인데.”박민정은 자신의 장점은 알지만‘경력'란을 채우는 일이 정말 어려웠다.“잠깐만 기다려 줘요.”무용 선생님은 박민정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잠시만요, 금방 돌아올게요.”박민정은 의아했지만 결국 선생님의 말을 따랐다.“네.”무용 선생님이 자리를 떠나자 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우리 회사
“방금 그 여자요? 이제 막 온 사람이잖아요. 그 춤을 완전히 익히지도 않았는데요.” 리더는 여전히 억울해했다.그녀는 겨우 얻은 리더 자리를 놓칠 수 없다. 이번 공연만 잘 끝내면 성과가 두 배로 오를 텐데 이제 와서 신입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될 줄은 몰랐다.“주 비서가 방금 못 했던 동작, 그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해냈잖아.”무용 선생님의 눈엔 명백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주 비서, 전에 나한테 사람을 바꾸라고 했잖아? 그럼 이제 내가 바꿨는데 왜 불만이야?”주영리라는 이름의 리더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이제 와서 후회할 수도 없었다. 후회하면 그야말로 자존심이 말도 못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럼 안 하면 되죠. 제가 이걸 좋아하는 줄 아세요? 하지만 오늘 선생님이 매니저님에게 뒷문으로 부탁한 일, 전 꼭 대표님에게 보고할 거예요.”무용 선생님은 주영리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럼 가서 고자질해 봐.”주영리는 무용 선생님의 태도에 화가 나면서도 이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손에 힘을 주며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무용 선생님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잠깐만, 그 무용 복장은 두고 가.”주영리는 결국 무용 복장을 남기고 떠났지만 마음속으로는 박민정을 수십 번 욕하며 씩씩대었다.박민정은 집에서 메시지를 확인하며 재채기를 했다.그녀는 유남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국내에 도착했어요? 오늘 면접은 성공했는데, 인턴이에요.”그때 해외에서 돌아온 유남우는 윤소현에게 아이를 잠시 돌봐달라고 요구받아 할 수 없이 아이를 안고 한쪽으로 갔다.윤소현은 그를 지켜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유남우의 휴대전화 화면이 켜지는 것을 봤다.궁금한 마음에 다가가 봤지만 그녀는 박민정의 메시지를 발견했다.유남우는 박민정의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여자의 직감으로 그녀는 이 메시지가 박민정에서 온 것임을 알았다.그녀는 재빨리 유남우의 휴대전화를 확인하려 했지만 비밀번호를 알 수 없어서 열지 못했다.그
윤소현은 유남우가 단호하게 등을 돌리고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따라 나섰고 마침 비서 홍주영이 유남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여자의 직감으로 홍주영이 자신의 남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었다. 질투심이 활활 타오르던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유남우 앞에서 홍주영의 뺨을 후려쳤다.“아직 설 연휴인데 홍 비서는 왜 남우 씨를 직접 나서게 해요? 일을 그 정도로 못 하나?”홍주영의 뺨은 화끈거렸고 그녀는 한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해 있었다.그제야 유남우가 사태를 파악하고 급히 다가와 윤소현의 팔을 붙잡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그의 날 선 질문에 윤소현은 한순간 당황했지만 곧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남우 씨, 그냥 너무 속상해서 그랬어요. 명절에 당신이 나랑 다혜를 두고 가버리다니...”그러나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며 차갑게 말했다.“그게 네가 무고한 사람을 때린 이유야?”그의 싸늘한 눈빛은 평소의 온화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그 눈빛에 겁먹은 윤소현은 몸을 떨었고 손목이 점점 아파왔다.“남우 씨, 아파요...”하지만 유남우는 전혀 풀어줄 기색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홍 비서에게 사과해.”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나더러 부하 직원한테 사과를 하라고요?”“홍 비서는 단순한 부하 직원이 아니야. 내 친구이기도 해. 그러니까 얼른 사과해.” 유남우는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했다.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윤소현은 마지못해 홍주영을 향해 말했다.“미안해요, 홍 비서.”홍주영은 얼얼한 뺨의 통증을 참으며 유남우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됐죠?” 윤소현은 다시 유남우를 바라봤다.그제야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손목이 풀리자마자 윤소현은 아픈 손목을 문지르며 속으로 화를 삼켰다.손목이 빨갛게 부어오를 정도로 세게 잡
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민정 씨 문자야?”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박민정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약을 한 움큼씩 퍼먹었다.귓등을 만져보니 손끝에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순간 의사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박민정 씨, 사실 많은 질병의 악화는 환자의 기분과 관련이 있어요. 반드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낙관적이라, 말이 쉽지.박민정은 최대한 유남준의 말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날이 어렴풋이 밝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약이 작용했는지 청력도 조금은 회복됐다.그녀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빛을 넋 놓고 한참 바라봤다.“비 그쳤네.”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은 단 한 가지만이 아니다.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이다가 결국 사소한 일로 폭발하게 된다. 그건 차가운 말 한마디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다.오늘 유남준은 외출하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박민정이 사과하고 후회하길 기다렸다.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도 종종 화낼 때가 있었다.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과했다.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는 유남준이다.박민정은 세안을 마치고 평소처럼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캐리어와 서류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가 서류를 건넨 순간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라는 몇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남준 씨 시간 될 때 연락해요.”그녀는 담담하게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박민정은 그 순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쥐고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그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박민정의 뒷모습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아챘다.다만 그 답답함도 한순간일 뿐, 그는 곧장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 나간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다.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이면 박민정은 얌전히 옆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살갑게 대할
윤소현은 유남우가 단호하게 등을 돌리고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따라 나섰고 마침 비서 홍주영이 유남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여자의 직감으로 홍주영이 자신의 남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었다. 질투심이 활활 타오르던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유남우 앞에서 홍주영의 뺨을 후려쳤다.“아직 설 연휴인데 홍 비서는 왜 남우 씨를 직접 나서게 해요? 일을 그 정도로 못 하나?”홍주영의 뺨은 화끈거렸고 그녀는 한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해 있었다.그제야 유남우가 사태를 파악하고 급히 다가와 윤소현의 팔을 붙잡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그의 날 선 질문에 윤소현은 한순간 당황했지만 곧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남우 씨, 그냥 너무 속상해서 그랬어요. 명절에 당신이 나랑 다혜를 두고 가버리다니...”그러나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며 차갑게 말했다.“그게 네가 무고한 사람을 때린 이유야?”그의 싸늘한 눈빛은 평소의 온화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그 눈빛에 겁먹은 윤소현은 몸을 떨었고 손목이 점점 아파왔다.“남우 씨, 아파요...”하지만 유남우는 전혀 풀어줄 기색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홍 비서에게 사과해.”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나더러 부하 직원한테 사과를 하라고요?”“홍 비서는 단순한 부하 직원이 아니야. 내 친구이기도 해. 그러니까 얼른 사과해.” 유남우는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했다.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윤소현은 마지못해 홍주영을 향해 말했다.“미안해요, 홍 비서.”홍주영은 얼얼한 뺨의 통증을 참으며 유남우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됐죠?” 윤소현은 다시 유남우를 바라봤다.그제야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손목이 풀리자마자 윤소현은 아픈 손목을 문지르며 속으로 화를 삼켰다.손목이 빨갛게 부어오를 정도로 세게 잡
“방금 그 여자요? 이제 막 온 사람이잖아요. 그 춤을 완전히 익히지도 않았는데요.” 리더는 여전히 억울해했다.그녀는 겨우 얻은 리더 자리를 놓칠 수 없다. 이번 공연만 잘 끝내면 성과가 두 배로 오를 텐데 이제 와서 신입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될 줄은 몰랐다.“주 비서가 방금 못 했던 동작, 그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해냈잖아.”무용 선생님의 눈엔 명백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주 비서, 전에 나한테 사람을 바꾸라고 했잖아? 그럼 이제 내가 바꿨는데 왜 불만이야?”주영리라는 이름의 리더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이제 와서 후회할 수도 없었다. 후회하면 그야말로 자존심이 말도 못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럼 안 하면 되죠. 제가 이걸 좋아하는 줄 아세요? 하지만 오늘 선생님이 매니저님에게 뒷문으로 부탁한 일, 전 꼭 대표님에게 보고할 거예요.”무용 선생님은 주영리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럼 가서 고자질해 봐.”주영리는 무용 선생님의 태도에 화가 나면서도 이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손에 힘을 주며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무용 선생님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잠깐만, 그 무용 복장은 두고 가.”주영리는 결국 무용 복장을 남기고 떠났지만 마음속으로는 박민정을 수십 번 욕하며 씩씩대었다.박민정은 집에서 메시지를 확인하며 재채기를 했다.그녀는 유남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국내에 도착했어요? 오늘 면접은 성공했는데, 인턴이에요.”그때 해외에서 돌아온 유남우는 윤소현에게 아이를 잠시 돌봐달라고 요구받아 할 수 없이 아이를 안고 한쪽으로 갔다.윤소현은 그를 지켜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유남우의 휴대전화 화면이 켜지는 것을 봤다.궁금한 마음에 다가가 봤지만 그녀는 박민정의 메시지를 발견했다.유남우는 박민정의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여자의 직감으로 그녀는 이 메시지가 박민정에서 온 것임을 알았다.그녀는 재빨리 유남우의 휴대전화를 확인하려 했지만 비밀번호를 알 수 없어서 열지 못했다.그
“어때요? 아무거나 해내면 돼요.” 무용 선생님이 박민정에게 말하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그리고 넓은 공간으로 걸어갔다.무용을 하고 있는 직원들은 모두 박민정을 주목하며 그녀가 실수하는 모습을 기다렸다.아까 선생님이 보여준 동작은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고 그들은 박민정이 그걸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지 의심했다.박민정이 그 동작을 따라 하긴커녕, 아마 우스꽝스럽게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박민정은 선생님이 보여준 동작을 완벽하게 해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동작을 더 깔끔하고 정확하게 소화했다.“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한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리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반 달 동안 연습해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동작을 박민정이 그렇게 쉽게 해냈다는 사실에 놀랐다.“언제 우리 회사에 이런 춤 잘 추는 사람이 있었던 거야?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또 다른 사람이 투덜거렸다.무용 선생님은 박민정을 보며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저기, 어느 부서 사람이에요? 제가 매니저님께 얘기해서 앞으로 이 기간 동안 우리랑 같이 춤 연습을 해요. 공연 끝난 후에는 보너스도 줄게요.”박민정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저는 이 회사 직원이 아니에요. 오늘 면접 보러 온 사람이에요.”무용 선생님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아, 그럼 면접은 합격했나요?”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무용 선생님은 그 말을 듣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합격 못했지? 이렇게 춤도 잘 추고 예쁘기까지 한데, 정말 판매직에 딱 맞을 사람인데.”박민정은 자신의 장점은 알지만‘경력'란을 채우는 일이 정말 어려웠다.“잠깐만 기다려 줘요.”무용 선생님은 박민정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잠시만요, 금방 돌아올게요.”박민정은 의아했지만 결국 선생님의 말을 따랐다.“네.”무용 선생님이 자리를 떠나자 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우리 회사
실내는 죽은 듯한 침묵에 휩싸였고 박민정은 머리가 갑자기 지끈거리며 아팠다.그녀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며 어색하게 말했다.“저는 예전에 어떤 일도 해본 적이 없어요.”매니저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럼 전업주부로 계셨던 건가요?”이곳에서는 전업주부도 일종의 직업으로 여겨졌다.하지만 박민정은 자신이 결혼조차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매니저는 더욱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결혼 후 육아 때문에 일을 안 했다는 거라면 몰라도 졸업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일한 적이 없다니.‘이건 게으르거나, 아니면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매니저는 곤란한 듯 말했다.“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희는 경력이 필요한 자리라서요. 정말 죄송합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녀는 표정을 잃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그녀는 자신의 이력서를 꽉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사실,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왜 졸업 이후로 단 한번도 일을 하지 않았던 걸까?’유남우는 그녀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일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이 전혀 이상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건물 밖으로 나온 박민정은 각양각색의 면접자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들은 학력도 뛰어나고 경력도 풍부해 보였으며 어떤 이는 그녀보다 더 어려 보였다.하지만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다른 일자리를 다시 찾아보자.’그녀는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가 더 많은 공고를 살펴보기로 했다.그렇게 돌아가는 길에서 그녀는 우연히 한 댄스 스튜디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안에는 대부분이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한 댄스 강사가 리더 자리에 서 있는 한 여성을 향해 소리쳤다.“너 대체 뭐 하는 거야? 2주나 배웠는데 아직도 실수야? 2주 후면 해외 VIP들 앞에서 공연해야 하는데, 이 상태로 괜찮겠어?”리더로 보
아침이 밝자 의사가 집에 방문해 박민정에게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한 뒤 약을 처방했다.의사는 약을 꼭 정해진 시간에 맞춰 복용하라고 당부했고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난 뒤 유남우는 그를 배웅하며 차 안에서 물었다.“1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예전 일을 꿈에 꾸는 거죠?”의사는 차분히 대답했다.“그건 정상입니다. 어떤 최면이라도 환자가 과거를 완전히 잊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그리고 덧붙였다.“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그녀의 상태는 안정될 겁니다. 그때부터는 매달 치료를 받을 필요도 없어질 겁니다.”유남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네요.”그러나 의사는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하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환자분이 예전에 알던 사람이나 익숙한 물건을 접하면 기억이 자극받아 최면이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알겠습니다.” 유남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의사를 배웅한 후 그는 방으로 돌아와 박민정이 약을 다 복용하는 것을 확인했다.약을 먹은 박민정은 졸음을 느꼈지만 일자리 지원을 잊지 않았다.그녀가 고른 회사는 현지에 위치한 곳으로, 출장도 필요하지 않아 유남우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그는 박민정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수화기 너머로 윤소현의 다소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남우 씨, 오늘 새해잖아요. 왜 아직도 안 와요? 집에는 나랑 다혜밖에 없는데, 우리랑 시간을 안 보내줄 거예요?”그녀의 말에도 유남우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소현아, 너도 알잖아. 나 지금 호산 그룹에서의 기반이 불안정해. 나도 다혜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하지만 윤소현은 물러서지 않았다.“대체 어떤 일이기에 꼭 외국에 있어야 하는 건데요? 그리고 언제쯤 돌아올 건데요?”그는 잠들어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며칠 후에.”“안 돼요! 늦어도 내일
박민정은 유남우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그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저, 이제 자러 갈게요.”“그래.”유남우는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은 박민정은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다시 누웠다.그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박민정은 누워 있어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옆방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대체 왜 이러지?”박민정은 스스로에게 질문했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최근 들어 유남우와의 관계에서 이유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1년 전 깨어난 뒤로 박민정은 자신이 많은 기억을 잃었다고 느꼈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유남우와 관련된 몇 가지 일들뿐이었다.그는 그녀에게 과거에 큰 교통사고를 당해 일부 기억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외에서 치료를 받으며 회복 중이라고 했다.새벽이 되어서야 박민정은 겨우 잠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악몽에 시달렸다.꿈속에는 유남우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나타났는데 그 남자는 성격이 매우 거칠었다.박민정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당신 누구예요?”남자는 눈가가 붉어진 채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날 잊은 거야?”그의 말에 박민정은 혼란스러웠다.갑자기 남자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너를 찾느라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알아?”그러더니 강제로 무언가를 하려 했다.박민정은 몸부림치며 외쳤다.“놔요! 제발 놔요!”그 순간, 그녀는 깨어났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여전히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박민정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다시 잠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방의 등을 켜고 핸드폰을 들어 인터넷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스크롤을 내리던 중 여러 구인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박민정은 자신이 예전에 외국어에 능숙했던 기억은 있지만 무슨 일을 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비서직이나 번역 관련 공고를 보며 흥미를 느꼈다.그때 문
“무슨 일이야?”유남우가 묻자 박민정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저, 밖에 나가서 일하고 싶어요.”지난 1년 동안 그녀는 유남우의 돈으로 생활하며 치료를 받아왔다.하지만 이제 몸이 많이 회복된 만큼 스스로 자립하고 싶었다.모든 걸 그에게만 의지하며 그의 어깨에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박민정은 그가 기꺼이 허락할 거라 생각했지만 잠시 침묵을 지킨 유남우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혹시 사고 싶은 게 있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내가 다 해결할게.”“아니에요.”박민정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오빠가 준 돈도 다 쓰지도 못해요. 그냥 내 힘으로 해보고 싶어서 그래요. 오빠한테 계속 의지하는 것도 싫고요.”“그게 왜 의지야? 난 너를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적 없어.”그는 말을 마치며 대화를 끝내려는 듯 덧붙였다.“알겠지? 자, 이제 밥 먹자. 일 얘기는 나중에 하고.”그의 단호한 태도에 박민정은 더 이상 강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저녁을 먹은 뒤 박민정은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요즘 그녀는 집안일을 하고 나면 독서나 TV 시청으로 하루를 때웠는데 그런 단조로운 일상이 너무 지루하다고 느껴졌다.어느새 유남우가 그녀의 등 뒤에 다가왔다.“민정아.”“응?”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맑은 그녀의 눈을 마주한 유남우는 순간 목울대가 꿈틀거렸다.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박민정의 옆얼굴에 닿았다.“왜 그래요?”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박민정은 얼어붙은 듯 물었다.하지만 유남우는 아무런 대답 없이 손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곧이어 몸을 기울이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박민정은 긴장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당황한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그를 보지 못했다.그리고 그의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결과 그의 입맞춤은 그녀의 옆얼
여느 때처럼 박예찬은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화면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었다.옆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박윤우가 한마디를 던졌다.“두 녀석이 이제 겨우 한 살 좀 넘었잖아. 뭘 안다고 그래?”박윤우는 한숨을 쉬며 다시 문을 닫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아휴, 저 애들 꼴값 떠는 거 정말 못 봐주겠어.”그는 투덜거리면서 박예찬 옆으로 다가가 함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화면에는 어딘가의 거리 CCTV 영상이 떠 있었다.1년 전부터 여전히 엄마의 흔적을 찾지 못한 박예찬은 세계 곳곳의 CCTV 영상을 끌어모으며 단서를 찾고 있었다.시간이 날 때마다 두 아이는 거리 CCTV를 뒤져 엄마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다.“뭔가 찾았어?”“아니... 아직 없어.”박예찬의 목소리엔 실망감이 묻어났다.그는 다른 지역의 영상을 다시 띄우며 끈질기게 화면을 지켜보았다.그렇게 두 아이는 꼼짝하지 않고 화면 앞에서 모든 영상을 체크하고 있었다.한편, 집 안은 시끌벅적했다.정수미는 두 외손자들과 놀며 한껏 즐거워하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윤소현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는 자기 딸이 소외되는 것이 못마땅해 아이를 안고 내려왔다.“엄마, 요즘 다혜를 너무 안 챙기시는 것 같아요.”박민정 사건 이후로 정수미는 윤소현에게 좋은 감정이 없었다.그래도 겉으로는 치우치지 않으려 유다혜를 받아 안으며 말했다.“다혜야, 외할머니가 너한테도 선물 사왔단다.”하지만 아직 몇 개월밖에 안 된 유다혜에게 줄 만한 건 옷 몇 벌뿐이었다.윤소현은 자기 딸에게 주어진 옷 몇 벌과 박민정의 네 아이에게 보내진 고가의 선물들을 비교하며 질투심이 치밀었다.“엄마, 어릴 때부터 늘 딸이 최고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편애하시면 안 되죠. 예찬이랑 윤우에겐 개인 비행기를 사주시면서 우리 다혜는 옷 몇 벌이 다예요?”정수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다혜는 아직 어려서 그래. 나중에 크면 당연히 비행기도 사줄 거야.”정수미는 윤소현의 이런 불만이
고영란은 투박하기 그지없는 윤소현의 말투를 들으며 왜 이런 여자가 유씨 가문에 시집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혀 상류층의 여인 다운 기품이 없었다.“그럼 남준이는? 아직도 안 왔어요?”잠시 망설이던 집사가 대답했다.“큰 도련님은 지금 두원 별장에 계십니다. 설날엔 안 오실 거라고 하셨어요.“박민정을 찾지 못한 유남준이 아직도 우울에 빠져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고영란은 더 묻지 않았다.“알겠어요. 이제 음식 준비 부탁해요.”“네.”집사는 곧바로 사람들에게 음식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영란은 두 아이를 베이비 시터에게 맡기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식탁에는 윤소현, 박윤우, 박예찬 그리고 고영란 이렇게 네 명뿐이었다. 오늘따라 식탁이 아주 썰렁하게만 느껴졌다.“고기 많이 먹어.”고영란은 두 아이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윤소현은 두 아이에게 지나친 애정을 쏟는 고영란을 바라보며 질투심으로 불편한 마음을 안고 음식을 먹었다.그때, 식탁으로 다가온 집사가 말했다.“사모님, 정 대표님이 오셨는데요.”정수미는 박민정이 자신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박민정의 행방을 찾는 동시에 네 명의 외손자들을 자주 찾아왔다.그녀는 이제라도 박민정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상하기 위해 외손자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쏟아붓고 있었다.“고마워요.”고영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미를 맞이하러 갔다. 그리고 윤소현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고영란의 뒤를 따라나섰다.하지만 박윤우와 박예찬은 식사에만 집중하며 정수미의 등장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아이들 역시 이제는 정수미가 엄마의 친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복잡했다.“엄마, 저녁 식사 중이었는데, 같이 드실래요?”윤소현은 웃는 얼굴로 정수미에게 말했다.하지만 정수미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이미 먹고 왔어. 이번에는 그냥 아이들 보러 온 거야.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네.”윤소현은 정수미의 냉한 태도를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