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미에게 붙여둔 미행인이 박민정과 유남준에게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모든 것을 전해 들은 박민정이 혀를 찼다.“정말 한 편의 드라마가 따로 없네. 그래도 이제 함미현이 걱정하고 있는 게 뭔지는 잘 알겠네요.”유남준 역시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한 듯했다.“윤소현이 이미 함미현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정수미 친딸이라는 함미현 씨가 윤소현 말에 너무 고분고분 따르더라고요. 이제 모든 게 다 이해가 되네요.”박민정인 이제 정수미가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곁에 딸이라고 남아 있는 사람 중에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그렇게 힘들게 찾아낸 친딸도 가짜였다니.이제는 염혜란까지 사라졌다. 박민정은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해 추모를 마치고 유남준과 함께 돌아갔다.운전기사는 박민정을 회사 정문에 내려주었다.박민정이 차에서 내리려 하던 그때, 유남준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잠시만.”“왜요?”박민정이 고개를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던 유남준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니야. 저녁에 데리러 올게.”“알겠어요.”박민정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최근 들어 회사에서는 꽤 많은 신입 직원들을 채용했고, 그중에는 호산 그룹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꽤 많았다.회사로 들어선 박민정은 오늘따라 유난히 떠들썩한 회사 분위기를 눈치챘다. 자세히 보니 여직원들 여럿이 스튜디오와 고층을 오가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서연아, 무슨 일이야?”진서연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이게 다 우리 회사 요물들 때문이잖아요.”“요물들이라니?”서류 뭉치를 들고 지나가던 설인하가 말했다.“연지석이랑 에리잖아요.”설인하의 말을 들은 박민정도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그럴 만도 한 것이 그 두 명은 정말 요물이 다름없었다. 생김새부터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탓에 회사 여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보스, 요즘에 그 능력 있는 홍
듣고 있던 매니저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에리는 아마 본인도 그렇게 정직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됐어, 화 그만 내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하지만 에리는 지금 밥이 넘어갈 기분이 아니었다.“넌 유남준이 연지석의 존재를 알 거라고 생각해?”그 질문에 미간을 찌푸린 매니저가 대답했다.“너 이건 좀 아니지 않아?”“뭐가 아닌데.”휴대폰을 집어 든 에리는 연지석이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는 사실을 유남준에게 알려주었다.유남준의 표정이 보기 좋게 험악해졌다.“연지석이 왜 또 거기 있는 겁니까?”그런 유남준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서다희는 어이가 없었다.‘언제는 자기한테 이런 일 하나하나 알려주지 말라더니?’“게다가 부사장이라고요?”유남준의 기분이 점점 심연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침에 박민정을 회사까지 데려다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에리에 대해서만 몇 가지 물어보려 했다.하지만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옆에는 연지석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있었다.유남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대표님, 왜 그러십니까?”서다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오늘 휴가 내고 XS 본사 한 번 가봐야겠어.”그쪽 회사로 가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지 않으면 아내가 정말 다른 사람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서다희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자신의 대표를 따라나섰다.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불안해할 때도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XS 그룹.1층 로비의 안내데스크 직원은 유남준과 서다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선생님, 죄송하지만 저희 대표님과 미리 약속이 안 되어 있으셔서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정중하게 말을 마친 안내 직원은 유남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눈앞의 남자가 너무 잘생긴 탓이었다.연지석 부대표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얼굴이었다.그 말에 윤남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이 회사 박 대표의 남편인데, 따로 예약까지 해야 하나?”
안내데스크 직원은 순간적으로 공포가 엄습해왔다. 저 사람이 정말 박 대표의 남편이라면 자신은 끝장인 게 뻔했으니 말이다.하지만 회사 직원들에게 기재된 박 대표의 소개 글에는 분명 남편과 이혼한 상태라고 되어 있었다.“그냥 우리 와이프랑 밥이나 한 끼 먹으려고 왔지.”말을 마친 유남준은 안내데스크로 고개를 돌리더니 처음으로 그 여직원을 협박하기 시작했다.“잘리고 싶지 않으면 그 남자들 정보는 순순히 부는 게 좋을 거야!”상황 파악을 마친 서다희가 곧장 데스크 직원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다.그리고 안내데스크 직원은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아들었다.“네, 네...”이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몰랐던 박민정이 다가와 물었다.“오늘은 출근 안 해요?”“오는 쉬는 날이야.”유남준은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목요일인데 쉬는 날이라고요? 당신 회사 직원들은 참 좋겠다.”박민정이 대답했다.곁에서 유남준과 박민정의 사이에 끼어 애매한 포지션이 되긴 싫었던 진서연이 말했다.“보스, 저는 수아 씨랑 이 근처 좀 돌기로 약속해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래.”박민정은 흔쾌히 그 말에 대답했다.유남준도 고개를 돌려 서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우리 따라오지 말고 수아 씨 찾으러 가. 회사 직원들 간식거리도 좀 챙겨가고.”그의 의도는 아주 명백했다. 그저 XS 그룹의 직원들에게 박민정의 남편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었다.박민정은 그런 유남준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요. 뭐 먹고 싶은데요?”“나는 다 괜찮아. 네가 먹고 싶은 거로 먹자.”유남준은 정말 식사를 위해 찾아온 게 아니라 박민정의 회사 사람들에게 그녀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온 것이었다.“그래요.”박민정도 예의상 해봤던 말을 더 꺼내지 않았다.그녀는 곧장 유남준을 데리고 자신이 자주 가는 회사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배불리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소화도 시킬 겸 함께 산책했다. 그러던 중 궁금
유남준의 대답에 박민정은 기가 막혔다.“내가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뭐, 연지석이랑 계약 취소하고 에리도 해고할까요?”유남준은 깊은 눈동자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할 수만 있다면...”“절대 안 돼요!”박민정이 그의 말을 끊었다.“제 친구인 것도 있긴 하지만, 능력을 봐서라도 절대 남준 씨 말대로 해줄 수는 없어요.”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예전이었으면 무슨 일이 있든 박민정은 항상 유남준의 말대로 했을 텐데,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변해버렸다.유남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그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내가 하려던 말은, 가능하다면 그 두 사람이랑 조금 거리를 뒀으면 좋겠다는 거야. 내가 질투 나니까.”유남준은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마음을 담아 해명했다.그 말은 들은 후에야 박민정은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미안해요. 아까는 내가 너무 성급했네요. 말도 끝까지 못 듣고.”잠시 망설이던 박민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걱정 마요. 난 그 두 사람을 단순한 친구로만 생각할 뿐, 다른 감정은 전혀 없으니까요.”비로소 안심한 유남준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박민정은 그대로 유남준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물었다.“오늘 이렇게 온 거, 쉬는 날이어서 온 게 아니죠?”“내 회사야. 내가 쉬는 날이라고 하면 쉬는 날이지.”박민정은 아직도 유남준의 회사가 IM 그룹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일반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우린 사업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돼요. 얼른 회사로 돌아가서 다시 일 봐요.”그녀 역시 회사 운영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리더인 회사 대표부터 게으른 태도로 일한다면 밑에 있는 직원들도 열심히 일할 리 없었다.“알겠어.”유남준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의 기분은 조금 전보다 한결 나아졌다.오늘에서야 힘들게 민수아와의 데이트를
사무실 밖으로 나서는 에리의 모습을 보던 연지석의 눈빛이 차가웠다.이때, 하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형, 박민정은 또 왜 건드린 거야? 피도 안 섞인 애들 아빠 되는 걸로도 모자라서 이젠 배 속에 있는 쌍둥이 애들까지 형이 다 떠안으려고?”하민재가 답답한 듯 쏘아붙였다.연지석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헛소리하지 마. 이번에 돌아온 건 정말 일하러 온 거야. 그러면서 민정이도 한 번 보살펴주고.”“정말이야?”하민재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당연히 정말이지.”연지석은 일부러 태연하게 말했다.“민정이는 이미 유남준이랑 새 출발 하기로 한 것 같아. 나도 그거 다 알면서 민정이한테 매달릴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야.”하민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형, 세상에 여자는 많아. 제발 천천히 좀 찾아.”“응, 알겠어.”그때, 누군가가 연지석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연지석이 고개를 들어 문 쪽을 확인해보니 설인하가 커피를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설인하가 뭐든 빨리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는 박민정이 그녀를 연지석의 비서로 배치해준 것이다.연지석은 설인하를 발견하자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설인하는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얘기하고 끊어.”연지석이 수화기 너머로 말했다.설인하는 커피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부사장님, 여기 커피 가져왔습니다.”“네.”연지석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설인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어색하게 서 있던 설인하가 입을 열었다.“그, 연 대표님. 저한테 아무 일이라도 맡겨주실 수 있을까요?”설인하는 연지석을 따라다니며 중요한 일을 맡고 해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정작 이렇게 잡일만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연지석은 설인하의 말에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한 그는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연지석은 단순히 그녀의 얼굴만 감상하다가 입을 열었다.“어떤 일을 하고
함미현은 앞으로 정씨 가문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고 윤소현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그리고 윤소현은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함미현이 이런 속셈을 품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최근 들어 정수미에게 대놓고 미움받고 있던 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유씨 가문으로 돌아가야 했다.유남준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회사에서 지내다시피 했던 탓에 집에는 항상 그녀와 고영란만 있었다.고영란은 별다른 일만 없으면 두 손자들을 데리러 유치원으로 향하거나 다른 부잣집 사모님들과 함께 미용실로 가 관리를 받으며 윤소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그렇게 윤소현은 집에 혼자 남아 속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불만을 삭여야 했다.집으로 돌아온 최현아가 말을 걸어왔다.“동서, 이제 배도 많이 나왔네. 도련님이 집에서 안 챙겨줘?”그 말을 듣는 윤소현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없어요. 매번 들어오라고만 하면 항상 야근 핑계를 대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최현아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말을 이었다.“최근에 민정이가 회사 차렸다는 건 알고 있지?”“모를 리가 있겠어요? 언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윤씨 가문 사업을 인수했더라고요.”윤소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어디서 그렇게 큰돈이 났을까?”최현아는 일부러 윤소현을 자극하기라도 하듯 의문을 제기했다.사실 그녀 역시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어디서 났겠어요? 아주버님이랑 어머님께서 주신 거겠죠.”윤소현은 죽었다 깨어나도 박민정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예전에는 항상 박민정과 윤소현의 사이에 불화가 이는 것을 두려워했던 최현아였지만 계속해서 패배의 쓴맛만 보는 윤소현의 모습이 점점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신의 두 올케가 서로 영원히 지치지 않고 싸우는 것을 구경만 하면 됐으니 말이다.“동서도 엄연한 유씨 가문의 며느리이자 어머님의 며느리잖아. 게다가 뱃속에는 유씨 가문의 아이까지 품고 있고. 그런데 어머님께선 왜 아직도 그
박민정은 퇴근 후, 유치원으로 향했다.김인우와 조하랑 역시 박예찬의 가족을 대표해 참여하기로 했다.두 사람을 발견한 박예찬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두 사람, 방해만 안 되면 다행이네요.”그 말에 김인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야, 이 녀석아. 내가 널 방해할 사람처럼 보이냐?”마음의 상처를 입은 조하랑 역시 입을 열었다.“예찬아, 아줌마 상처받았어.”참다못한 박민정이 박예찬을 보며 말했다.“예찬아, 예의를 갖춰야지. 아저씨랑 아줌마는 널 위해서 쉬는 시간까지 포기해가며 여기까지 와 주신 거야.”박민정의 말에 박예찬은 금세 불만 섞여 있던 표정을 감추었다.“그럼 부탁드릴게요.”“그래야지.”김인우가 대답했다.할아버지가 육아에 미리 적응하라는 명목으로 그와 조하랑을 유치원으로 보내지만 않았어도 김인우는 이런 따분하고 지루한 활동에 참여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가장 성가신 점은 지금 날씨가 너무 더웠다는 것이다.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기 전, 박예찬은 박민정에게 다가와 물었다.“엄마, 그 사람은 안 왔어요?”유남준에게 가까스로 호감을 갖게 된 아이였지만 자신의 유치원 활동에 와 주지 않았다는 조금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민정이 말했다.“아저씨랑 아줌마가 와 준다고 해서, 굳이 아빠한테까지 얘기하진 않았어.”아빠?박예찬은 그 호칭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엄마, 예전에 했던 말 벌써 까먹은 거예요?”어딘가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인 박민정이 물었다.“무슨 말?”“아무것도 아니에요.”박예찬은 어딘가 화가 난 듯했다.그는 비록 김씨 가문의 집에서 잘 지내고 있었지만 여전히 박민정과 유남준의 관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이는 지금 두 사람의 관계가 예전보다 어느 정도 나아졌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박예찬은 조하랑과 김인우에게 다가갔다.박민정은 화난 모습으로 떠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단순히 유남준이 와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그녀는 뒤늦
박민정은 미소를 띤 채 유남우에게 걸어갔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별과 바다를 품고 있는 듯했다.유남우는 넋을 잃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눈 부신 햇살에 유남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모습은 유남준과 똑같았다.하지만 박민정은 끝까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유남우를 보며 말했다.“가요.”유남우는 박민정이 자신을 유남준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아무 해명도 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앞쪽으로 걸어갔다.임신 중인 박민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아무 말 없는 유남우에 혼잣말을 시작했다.“이따가 예찬이한테 말 좀 잘 해줘요. 화가 좀 난 것 같은데, 남준 씨를 안 부른 제 탓이에요.”유남우는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실수로 이 평온한 순간을 깨뜨릴까 봐 말을 최대한 아꼈다.그들 뒤에서는 전화 통화를 마친 윤소현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눈에 멀리서 걸어가고 있는 유남우와 박민정의 뒷모습이 들어왔다.윤소현의 동공이 순식간에 좁아지며 두 눈빛에 분노가 가득 찼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그때, 타이밍 좋게 유남준의 차도 도착했다.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걸어간 윤소현은 이내 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박민정을 향해 소리쳤다.“박민정, 염치도 없어?”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박민정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윤소현을 발견했다.그리고 유남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그만해, 윤소현.”그제야 박민정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것을 깨달았다.“남우 씨였어요?”박민정은 확신할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두 걸음 더 다가와 유남우의 팔을 단단히 잡은 윤소현이 말했다.“그럼 누구겠어? 유남준인 줄 알았어?”박민정은 자신이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지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유남우 역시 자신의 실수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박민정이 회사로 복귀한 후 긴장감이 감도는 사람은 윤소현뿐만이 아니었다. 이지원 역시 초조해하고 있었다.어렵사리 다시 연예계에 복귀한 그녀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이 박민정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드러날까 두려웠다.이지원은 종종 몰래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하곤 했다.그날도 촬영을 마친 뒤 그녀의 차는 PMJ 회사 앞에 멈춰 있었다.이지원은 차 안에 앉아 박민정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드디어 박민정이 회사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이지원은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하이힐을 신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도드라진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박민정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누군지 알아보기 전에 이지원은 그녀 앞까지 다가와 길을 막아섰다.“민정 씨, 드디어 돌아왔네요.”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박민정의 마음 한구석에 본능적인 반감이 피어올랐다.비록 그녀는 이지원이 저질렀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불쾌감을 느꼈다.이때 진서연이 재빠르게 박민정 앞을 막아섰다.“당신 누구에요?”이지원은 그제야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는데 필러로 채워진 얼굴이 드러났다. 시간의 흔적과 연예계의 생존 경쟁 속에서 그녀는 온갖 방법으로 외모를 유지하려 애썼다.진서연은 그녀를 알아보자 얼굴을 찌푸렸다.“이지원 씨, 여기 왜 온 거예요? 또 우리 보스한테 해코지하려는 거 아니에요?”이지원의 눈에 차가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천한 년!'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 씨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상태가 어떤지 보러 온 거예요.”박민정은 냉랭하게 대꾸했다.“그렇다면 고맙네요.”그녀의 말투는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졌다.이지원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박민정이 아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혹시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요. 부담 갖지 말고.”이지원은 친절한 척 덧붙였다.“우리 보스가 당신 같은 사람을 찾을 일은 없으니 그만 꺼져요!”진서연
“민정아, 엄마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말아줄래? 날 욕해도, 화를 내도 괜찮으니 제발 그렇게 차갑게만 하지 말아줘, 응?”정수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저는 화낼 이유가 없어요.”박민정은 솔직하게 말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과거에는 기억이 있었기에 정수미가 친모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도 냉대를 받을 때마다 깊이 상처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었다.그녀는 눈앞의 정수미를 낯선 사람처럼 느꼈고 그래서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았다.정수미는 목이 칼로 베인 듯한 고통을 느꼈다.“모두 내 잘못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어떻게 해야 박민정에게 사죄하고 보상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정수미는 눈을 떨구고 등을 살짝 구부린 채 방을 떠났다.그녀가 떠난 뒤, 진서연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이를 다치게 했다니, 무슨 소리죠?”박민정은 어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진서연에게 설명했고 진서연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분노를 터뜨렸다.“윤소현이 어떻게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죠? 제 생각엔 일부러 자기 아이를 다치게 한 게 틀림없어요.”그녀는 단 한마디로 진실을 꿰뚫었지만 박민정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설마. 그래도 자기 친딸인데.”“그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진서연은 단호히 말한 뒤 박민정을 위로했다.“보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래.”하지만 진서연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여러 차례 그녀에게 당부를 했다.박민정은 기억을 잃은 후 꽤 오랜 시간을 보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기억을 되찾으려 했지만 아직 성과는 없었다.그녀는 오늘도 진서연과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점심시간, 박민정은 모두가 쉬고 있을 때 잠깐 밖에 나가겠다며 자리를 떴다.그녀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주
가정부가 나가고 나자 정수미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 있지?”정수미는 깊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왜 하필 윤소현을 입양했을까?비서도 믿기 힘든 듯 고개를 저었다.“큰아가씨의 복수심이 너무 강해요. 자신의 딸마저 이용하다니요.”비서는 윤소현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정수미가 박민정, 그녀의 친딸을 미워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수미는 스스로 중얼거리며 비서에게 묻는 듯 자신에게 묻는 듯한 말을 했다.비서는 사적인 가정사에 대해 조언할 수 없었기에 침묵을 지켰다.오랜 고민 끝에 정수미는 윤소현의 방으로 향했다.윤소현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고열까지 나고 있는데도 이렇게 편안히 잠들 수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소현아!”정수미가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녀를 깨우자 윤소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다.“엄마, 이 시간에 무슨 일이길래 제 방에 오신 거예요? 쉬셔야 할 시간 아니에요?”정수미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얘기할 게 있어서 왔다.”윤소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무슨 얘긴데 내일 하면 안 돼요?”“다혜와 민정이에 대한 얘기야.”정수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그 말을 듣자 윤소현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엄마, 박민정한테 경고할 거죠?”흥분한 그녀의 말투에 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아니, 너한테 경고하려고 왔어.”정수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은 멍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정수미는 가정부가 털어놓은 모든 진실을 이야기했고 윤소현은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멍해졌다.“엄마, 그 여자의 헛소리를 믿지 마세요! 다혜의 친엄마인 제가 어떻게 제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처음엔 나도 네 말을 믿었다. 네가 민정이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네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민정이를 경찰에 넘긴 거였어. 그런데 네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정말 실망이야.”정수미는 깊이 한숨을
비서는 정수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에 둘째 아가씨는 아이에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사람 같지 않아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래. 하지만 소현이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내가 그때 민정이를 도왔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어떤 난리를 칠지 몰랐겠지.”정수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혜 일은 빨리 조사해 봐.”“알겠습니다.” 비서가 대답했다.정수미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외손녀를 바라보며 다짐했다.“다혜야, 걱정하지 마. 외할머니가 꼭 널 다치게 한 사람을 찾아낼게.”그녀는 윤소현을 편드는 것도, 박민정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윤소현을 달래며 조용히 진실을 파악하려 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밝혀내기 위해.밤이 깊었을 때, 정수미는 아이를 돌보던 가정부를 불렀다.“자, 말해 봐. 오늘 왜 거짓말을 했는지. 누가 너한테 뭔가를 줬니?”가정부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저는 거짓말 안 했습니다. 정말로 사모님께서 그랬어요.”정수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아직도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거야? 병원에서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민정이가 다혜를 안은 뒤로 다혜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대체 어떻게 그게 민정이가 했다는 걸로 바뀐 거지? 네가 직접 민정이가 아이를 해치는 걸 봤어?”가정부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얼버무렸다.“민정 아가씨가 다혜를 때리는 걸 희미하게 본 것 같아요...”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희미하게 봤다고? 그럼 왜 그 자리에서 막지 않았지?”가정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 그게 제가 혹시 잘못 본 걸까 봐...”그녀의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다.정수미는 확신했다. 이건 명백히 거짓말이었다.“분명히 말하는데 네가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면 용서해 줄 테지만 계속 거짓말을 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정수미의 위협에 가정부는 몸을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 이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곳을 떠날 생각하지 마.”윤소현은 박민정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며 소리쳤고 박민정은 아무리 해명해도 소용이 없었다.“그럼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예요?”“무릎 꿇고 사과해!”윤소현은 단호하게 네 글자를 뱉었다.그녀는 박민정이 기억을 잃은 틈을 타 그녀를 망신시키고 고통받게 하고 싶었다.‘무릎을 꿇으라고?’박민정은 아이를 해친 적이 없기에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그건 못 해요.”윤소현은 다시 정수미와 고영란을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보셨죠? 증거가 다 있는데도 저렇게 나오잖아요. 사과조차 하지 않겠다고요.”그녀는 이어 말했다.“이제 경찰서에 보내는 수밖에 없겠네요.”윤소현은 휴대폰을 꺼내 신고 전화를 걸었다.고영란과 정수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정말 박민정이 그렇게 어린아이를 해쳤다면 사과를 해야 하는 게 맞을 터였다.그러나 박민정은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고 결국 경찰에 연행되었다.아이의 상처는 모두 목격자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었고 박민정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만한 다른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그녀는 간단히 사건 경위를 설명한 뒤, 임시로 구금되었다.혼자 차가운 공간에 남겨진 박민정은 종종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마치 예전에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 때 유남준이 그녀를 보석으로 풀어주었다.“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 유남준이 물었다.그는 본가로 돌아갔다가 박민정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하인들에게 물어본 끝에 그녀가 병원에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이후 고영란과 연락을 취해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다.박민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당신도 내가 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내가 그 아이를 해쳤다고 믿어요?”유남준은 거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누가 뭐래도 네가 했을 리 없어. 넌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박민정은
박민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좋아요, 신고해요. 경찰이 와서 모든 걸 조사하게 해요. 제가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겁니다!”그녀는 나쁜 짓을 하기 않았기에 당당했다.윤소현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려 했지만 고영란이 그녀를 막아섰다.“소현아, 분명 이건 오해가 있을 거야. 민정이가 그렇게 어린 아이를 해칠 리가 없잖니.”정수미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 모두 한 가족인데 경찰까지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니?”그러나 윤소현은 눈가가 붉어진 채 항의했다.“엄마, 지금 제 딸이 이런 상태인데도 엄마는 저를 외면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리 아이 편을 들어주실 생각은 없으세요?”박민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그만해요. 차라리 신고해요.”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경찰 조사를 통해서뿐이었다.윤소현은 사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 없었다. 아이의 일은 박민정과 무관했으며 그녀 스스로 꾸며낸 일이었기 때문이다.“민정아, 흥분하지 마. 우리 가족 일이니 우리끼리 해결해.”정수미가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윤소현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비꼬듯 말했다.“좋아요. 우리끼리 해결하죠.”“그럼 말해봐, 박민정. 내 딸이 이렇게 됐는데 넌 어떻게 책임질 거야?”“제가 한 일이 아닌데 왜 제가 책임져야 하죠?”박민정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되묻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지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야? 우리 다혜는 늘 멀쩡했어. 그런데 네가 안은 뒤로 이렇게 됐다고!”박민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적 없어요!”그녀는 어린 다혜가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걸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런데도 윤소현은 여전히 공격적이었다.“엄마, 보셨어요? 얘는 끝까지 오리발만 내밀잖아요!”정수미는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유다혜는 너무 어리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고영란이 오늘 아이를 돌본 보모를 불러왔고 보모는 떨
박민정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일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고영란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해 윤소현이 말한 병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윤소현이 병실에서 달려나오더니 곧장 박민정에게 달려들었다.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주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박민정 역시 피할 겨를이 없었고 결국 윤소현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세게 내려앉았다.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증이 얼굴을 타고 번졌다. 그러나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박민정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박민정도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고 그렇게 둘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고영란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도저히 가로막을 수 없었다.“박민정, 네가 어떻게 다혜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다혜는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안 됐는데!”‘뭐?’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전 당신 딸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우리 다혜 몸에 이렇게나 많은 상처가 났는데도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고? 너 정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윤소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분노를 퍼부었고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방어에만 집중했다.고영란이 아무리 소리쳐도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다.“소현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둬!”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윤소현은 그제야 멈췄다.박민정도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정수미가 황급히 달려와 박민정의 얼굴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을 보고 안타까워했다.“민정아, 괜찮아?”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불만을 터트렸다.“엄마, 똑같이 엄마 딸인데 우리가 싸웠으면 두 사람 다 챙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박민정만 신경 쓰는 거예요?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정수미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돌아보았다.“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봐. 왜 둘이
박민정은 그 아기가 윤소현의 딸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죠?”보모는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경계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울기만 하고 어떻게 달래도 소용이 없네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따라온 보모에게 두 아들을 잘 돌보라고 지시한 뒤, 직접 아이를 안아 들어 달래기 시작했다.그러나 유다혜는 그녀의 품에서도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엄마가 된 경험 덕분인지 박민정은 아기를 돌보는 법을 잊었더라도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먼저 보모에게 아이가 충분히 먹었는지 물었고 이어 아이의 기저귀를 확인하며 배탈이 났는지 살펴보았다.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아기가 계속 울자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아기를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이렇게 계속 우는 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보모도 동의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보모가 아기를 다시 받으려던 찰나, 멀리서 윤소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내 딸을 저 여자한테 맡기라고 했어?”윤소현은 높은 굽의 힐을 신은 채 빠르게 걸어와 박민정의 품에서 아이를 거칠게 빼앗아 갔다.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보모를 질책했다.“내 딸을 당신한테 맡겼더니 이렇게밖에 돌보지 못해? 내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책임인 줄 알아!”그녀는 이어 박민정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너도 아이가 있잖아. 내 아이를 왜 안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은 그 아이가 윤소현의 딸임을 알았더라면 절대 안았을 리 없었다.보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작은 사모님, 다혜가 계속 울어서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잠깐 도와주셨던 것뿐이에요. 아무런 악의도 없었습니다.”“악의가 없었다고?”윤소현은 여전히 울고 있는 딸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 뿐이야.”그러다 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작은 사모님, 아이를 병
윤소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선두에 있던 여하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 한 하인을 거칠게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들어가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박민정과 유남준 가족이 함께 웃으며 화목하게 있는 모습이었다.그 광경에 윤소현의 눈빛이 질투로 뒤덮였다. 그녀는 곧바로 고영란을 향해 차갑게 비아냥댔다.“어머니, 저랑 남우 씨가 비록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건 아니지만 저도 유씨 가문에서 떳떳하게 맞아들인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모른 척하시겠다는 거예요?”고영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소현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유남우 역시 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큰 실수로 느껴졌다.“소현아,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어서 남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여긴... 당분간 환영받지 못할 것 같구나.”윤소현은 이 말을 듣고도 뻔뻔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왜요? 제가 여기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혹시 당신 아들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제가 다 까발릴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고영란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윤소현이 마지막 퇴로조차 거부하자 냉소를 띠며 대꾸했다.“우리 아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한번 말해 보렴.”윤소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뭘 말하냐고요? 당신 아들이 자기 형의 여자를 탐냈다는 거. 이게 바로 당신들이 자랑하는 유씨 집안의 가풍인가요?”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에 있던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은 옆에서 두 아이를 달래며 이 상황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유남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다들 뭘 보고 있어? 당장 저 여자를 끌어내!”윤소현은 유남준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자 더 큰 소리로 외쳤다.“유남준 씨, 이 말을 듣기 싫은 거죠? 뭐, 당연하죠. 형의 여자를 뺏어갔다니, 저라도 그런 꼴은 못 참겠어요!”만약 그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벌써 그녀에게 직접 손을 댔을 것이다.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