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민은 염정아를 품에 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운명은 어쩜 이렇게 잔인하고 불공평할 수 있을까.염정아도, 구은우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두 사람을 철저히 망가트린 현실이 너무도 가혹했다.염정아는 한참을 울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그녀의 눈에 식은 차가 보였다.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밖에서 뭐라도 먹자. 그리고 아이들한테 줄 것도 좀 사자.”염정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지민아, 네가 우리 집 주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한 번도 잊은 적 없어.”공지민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이곳에 오기 전, 그녀는 염정아를 이용해 연씨 가문에 접근하고 연승혁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렇게나 망가진 염정아의 모습을 보고, 그녀의 품에서 흐느껴 우는 친구를 보니 입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가 너무도 비열해 보였다. 복수라는 감정에 눈이 멀어 사람의 고통을 이용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염정아는 외출할 만한 옷 한 벌조차 없었다. 입고 있던 옷은 군데군데 헝겊으로 덧대어져 있었다. 그녀가 옷을 챙기는 동안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났다. 그는 순수한 눈빛으로 다가와 물었다.“누나, 어디 가?”“밥 먹으러 나가.”“나도 데려가 줄 수 있어?”늘 침을 흘리던 그는 지금 손수건을 들고 있었다. 아마 염정아가 그의 그런 모습을 싫어한다는 걸 알기에 조심하고 있는 듯했다. 염정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 같이 가자.”그녀는 이 동생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적 장애를 가진 그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부모가 약을 먹이고 강제로 그와 염정아를 함께 있게 했을 때도,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한 번도 그녀를 자발적으로 건드리지 않았고 단지 그녀 곁에서 잠을 잤다.염정아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돌보고 막내에게 분유를 타 먹이며 남편과 같은 동생을 데리고 공지민과 함께 집을 나섰
아이를 낳는다는 건 여성의 몸에 큰 상처를 남긴다. 염정아의 배가 어떤 상태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식사가 끝나자마자 염정아의 남동생은 옆에서 토하고 말았다. 너무 많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댄 탓이었다.염정아 역시 속이 더부룩해 고생했지만 토하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남동생은 토한 뒤에도 후회로 가득한 얼굴이었다.염정아는 그의 입가를 천천히 닦아주며 말했다.“그만 먹어, 안 그러면 내일은 아무것도 먹을 게 없을지도 몰라.”남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을 바라봤다.공지민은 계산을 마치고 포장한 음식을 들고 그들과 함께 염정아의 집으로 돌아갔다.집에는 아직 어린 다섯 아이들이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막내인 쌍둥이는 아직 품에 안겨 있어야 했고 제일 큰 아이도 겨우 일곱 살이었다.염정아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며 막내들에게 줄 분유를 타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반면 남동생은 몇몇 아이를 달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공지민은 그녀가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모든 일이 끝났을 때 염정아의 얼굴은 이미 피곤함으로 가득했다.“지민아, 네가 여기에 찾아온 건 무슨 일 때문이지?”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시점이었지만 공지민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염정아의 삶이 이미 이렇게 힘겨운데, 연씨 가문으로 엮이는 것이 옳은 일일까?염정아는 그녀의 망설임을 알아차린 듯 부드럽게 말했다.“그냥 말해. 지금 내가 돈이 절실하다는 건 너도 알잖아. 지민아, 나는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야. 네가 돈을 조금이라도 준다면 뭐든지 도와줄게. 아이들이 굶는 것만은 막아야 하니까. 집에 분유도 떨어졌고, 언제 또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내 몸 상태도 별로라 공사판에서도 받아주지 않으니, 하루하루가 불안해. 내가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아이들은 대체 어떻게 될까?”동생과 다섯 아이들은 온전히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정아야, 네 허벅지 근처에 빨간 꽃 모양의 반점이 있지
공지민은 염정아가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죄책감이 들었다. 원래라면 염정아는 이런 일에 휘말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제원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을 손쉽게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공지민 자신도 이런 선택이 옳은지 확신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정아야, 내가 카드를 줄게. 하지만 네가 나랑 제원에 가면, 너희 아이들은 누가 돌보지?”“동생이 돌볼 거야. 가끔 아래층 슈퍼 사장님도 와서 봐주실 거고. 슈퍼에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이 다 있으니까 걱정 없어. 내가 매일 일하러 나갈 때도 동생이 집에서 아이들을 돌봤거든.”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염정아를 데리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사계절 옷들을 한꺼번에 샀다. 아이들이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입을 수 있을 만큼 넉넉히 준비했다.그녀는 염정아와 남동생에게도 새 옷을 사주었다. 동생은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며 신나게 웃음을 터뜨리며 염정아를 연신 불렀다.염정아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공지민에게 물었다.“우리 내일 제원으로 출발해도 될까? 집에서 몇 가지 정리할 게 있거든.”“그래. 네가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해. 이건 내 카드야. 비밀번호는 네 휴대폰으로 보낼게. 필요한 돈은 언제든지 써.”“고마워.”염정아는 곧바로 동생을 옆으로 데리고 가서 세세히 일러주기 시작했다.동생은 비록 지적 장애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생활은 할 수 있었다. 다만 집 밖으로 나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잘 들어. 내가 몇 달 동안 집을 비울 거야. 아이들은 네게 맡길게. 아래층 미숙 이모가 정기적으로 먹을 걸 가져다줄 거야. 분유 타는 법은 이미 두 달 동안 가르쳤고, 기저귀 갈아주는 법도 배웠으니까 잘할 수 있지? 간단한 반찬 만드는 법도 알잖아. 아이들을 잘 돌봐줘.”동생은 순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입을 떼며 말했다.“누나가 너무 보고 싶을 것 같아.”“금방 돌아올 거야. 걱정하
다음 날 아침, 염정아는 어제 포장해 온 음식을 데워 동생에게 새로 산 옷을 입혀주었다.솔직히 말해 동생은 잘생긴 편이었다.염정아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깨달은 건 그들 모두가 피해자라는 사실이었다.“이제 갈게. 아이들 잘 돌봐줘.”“누나...”동생은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치 과거 그녀가 수없이 일하러 나갈 때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며 따라오는 모습이었다.염정아는 마음을 다잡고 문을 닫은 뒤, 공지민의 팔을 붙잡았다.“가자.”공지민은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정아야, 두 달은 제원에 있어야 할 텐데, 집에 더 할 말은 없어?”염정아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도 보다 시피 동생이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걱정 마. 큰애는 요리도 할 줄 알아. 동생이 못하면 애들이라도 버텨줄 거야.”그렇지 않다면 이 집이 지금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공지민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곧바로 제원으로 향했다.그들은 이번 여정으로 3일을 보냈다. 출발 전, 공지민이 온시환과 크게 다툰 후 3일 동안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그 사이 공지민은 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허벅지에 염정아와 같은 모양의 빨간 반점을 새겼다. 그뿐만 아니라 염정아 몸의 모든 점 위치를 기억해 자신의 몸에도 똑같이 재현했다.염정아는 소심하고 큰 도시에 익숙하지 않아 직접 연씨 가문에 들여보낼 수 없었다. 그녀가 연승혁을 만나게 된다면 금방 모든 것을 들킬 것이 뻔했다.그래서 공지민은 다른 계획을 세웠다.그녀는 실종된 연씨 가문의 딸인 척하며 가문에 들어가 연승혁의 누나가 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 위치에서 복수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온시환의 별장 근처에 염정아를 위한 집을 임대했다. 그리고 염정아의 머리카락과 혈액 샘플을 채취해 필요시 친자 확인에 대비했다.모든 준비를 끝낸 뒤, 공지민은 기회를 기다리며 조용히 움직였다.염정아는
신부가 이제 막 신부 대 앞에 다가가려는 순간, 예기치 못한 사고가 벌어지며 결혼식이 그대로 중단되었다.안정숙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다소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멍하니 뭐 하고 있어? 어서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구해!”온시환이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 방금 누군가의 시선이 그의 주의를 끌어, 물에 빠진 사람이 공지민이라는 사실을 놓쳤다.공지민을 물 밖으로 끌어 올리자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의 드레스가 위로 말려 올라가며 허벅지 윗부분에 있는 독특한 모양의 반점이 드러났다.안정숙은 지팡이를 꼭 쥐었다. 그녀는 공지민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그 반점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평소 자애로운 미소를 짓던 안정숙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격동에 휩싸였다. 그녀는 공지민을 살피러 다가가 그 반점을 확인하자마자 마음속에 놀라움과 희망이 떠올랐다.‘이 아이는 사찰에서 봤던 아이잖아?’안정숙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오랜 세월 동안 가문의 실종된 딸을 사칭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허벅지에 꽃 모양의 반점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녀뿐이었기에 사칭자들은 그 반점을 흉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그 반점이 분명히 있었다.안정숙의 입술이 떨렸고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스쳤다.“이보게, 온씨 가문 젊은이. 어서 이 아가씨를 안게! 상태가 어떤지 확인해야겠어.”공지민은 몇 모금 물을 뱉고 나서야 조금 안정을 찾았다. 그녀는 안색이 창백했고 온시환의 품에 힘없이 기대 있었다.온시환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일단 데리고 돌아가겠습니다.”그러나 안정숙은 공지민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오랜 세월 찾아 헤맨 사람을 겨우 발견했으니 그녀는 즉시 친자 확인을 하고 싶었다.안정숙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눈에 공지민의 목걸이에 엉킨 한 가닥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그녀는 마치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는 척하며 그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이 아이 이름이 뭐라고 했지?”“공지민입니다.”온시환이 대답하며 그녀
오예슬은 온몸이 굳어지며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역시나 바로 다음 순간 공지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등학교 때 괴롭히는 게 부족했나 봐? 이런 자리에서도 나를 가만두지 않다니. 혹시 또 원아정이 무슨 말을 했어?”‘원아정? 오늘 결혼식을 올릴 신부 아닌가? 신부와 이 사건이 무슨 관계라는 거지?’처음에는 단순한 해프닝이라 여겼던 사람들도 원아정의 이름이 언급되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멀리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원아정을 향했다.원아정은 공지민이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자신을 끌어들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은 그녀의 결혼식이었다.‘공지민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야!’“공지민!”원아정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공지민은 마치 놀란 듯 온시환의 품 안에서 몸을 살짝 움츠렸다. 그 모습은 그녀가 원아정을 몹시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원아정은 가슴을 들썩이며 화를 억누르지 못했다.“공지민, 오늘은 내 결혼식이야. 일부러 방해하려고 온 거라면 내가 경호원들을 불러 너를 쫓아내도록 할 거야!”공지민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온시환의 품에 기댔다.온시환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공지민은 목소리가 떨리며 말했다.“말해도 소용없을 거예요.”안정숙은 그 말을 듣자 곧바로 나섰다.“네가 어떻게 알아 소용없다고? 억울한 일이 있다면 지금 말해봐. 내가 너를 위해 나서줄 수도 있잖니.”안정숙의 이 한마디에 현장의 분위기는 한층 더 미묘해졌다. 그녀는 평소 원아정을 아낀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공지민의 편을 드는 듯했다.원아정은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여자는 속셈이 뻔해요. 제 결혼식을 일부러 망치려고 하는 거라고요. 결혼식을 계속 진행할 수 없을까요? 쟤가 할 말이 있다면 나중에 따로 대화하면 될 거예요.”그러나 안정숙은 단호했다.“지민이 맞지?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해. 난 듣고 싶구나
공지민은 오예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커다란 땀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공지민은 입가를 살짝 비틀며 말했다.“고등학교 시절, 저는 심각한 괴롭힘을 당했어요. 저를 괴롭힌 사람은 바로 원아정이었고, 오예슬은 원아정의 부하였죠. 그들은 제 옷을 찢고 사진을 찍어 협박했어요. 저는 평범한 가정의 아이였고, 부모님과 동생은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집에는 저 혼자만 남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괴롭힘은 점점 심해졌어요. 화장실에 저를 가두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고, 낯선 남자와 억지로 키스하게 만들거나, 제가 문란하다는 소문을 퍼뜨렸어요. 어디를 가든 비난과 조롱이 따랐지만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한 번은 무릎을 꿇고 제발 그만하라고 빌었지만 원아정은 점점 더 악랄해졌어요. 심지어 어느 날은 제 얼굴을 칼로 그어버리려고 했어요. 다행히 그 순간 누군가가 제때 막아줘서 가까스로 무사할 수 있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이어졌지만 특정 부분에선 잠시 멈추며 감정을 억누르는 듯 보였다.현장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이런 일이 대가문에서 벌어졌다면 돈으로 해결하려 했을 테지만 결혼식 한가운데에서 이런 폭로가 터지니 마치 가문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었다.원아정은 즉각 흥분하며 외쳤다.“거짓말이에요! 할머니, 쟤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요!”공지민은 눈을 감은 채 온시환의 슈트 끝자락을 단단히 붙잡았다.“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가서 조사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원아정은 그 당시 저를 괴롭히는 무리의 대장이었어요. 그 뒤에는 항상 졸개들이 있었고, 학교에서는 아무도 그 애들을 건드릴 수 없었죠. 모두 제가 괴롭힘당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어요. 선생님들조차 원아정 집안의 권력을 두려워해서 침묵했으니까요. 한 번은 용기를 내서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지만 결국 원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더 이상 진실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조사가 필요없을 정도로 분명했다.원아정과 오예슬은 평소에도 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자주 서로의 사진을 SNS에 올리거나 함께 쇼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 오예슬이 갑자기 원아정을 배신하며 폭로한 것은 분명 현장의 분위기에 겁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말이 거짓일 리 없었다.더구나 안정숙이 진위를 구별하지 못할 리 없었다.만약 공지민이 진짜 잃어버린 손녀라면 그녀가 이런 끔찍한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안정숙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안정숙은 지팡이를 단단히 쥐고 멀리 있는 원아정을 바라보았다.“아정아, 더 할 말 있어?”원아정은 속으로 오예슬을 한 대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현장에 사람이 너무 많아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게다가 그때 저질렀던 괴롭힘은 숨기지도 못할 만큼 노골적이었다. 조금만 학교에 조사를 요청하면 금방 드러날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부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그녀는 공지민이 이런 순간에 왕따 사건을 폭로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안정숙이 마치 홀린 듯 공지민을 편드는 모습에 어리둥절했다.“할머니, 그땐 제가 너무 어렸어요. 제가 잘못한 줄도 모르고 한 행동들이었어요.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안정숙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지난번 사찰에서 공지민과 원아정이 다투는 모습을 봤을 때는 공지민이 성격이 지나치게 급하고 공격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 공지민은 갑작스럽게 괴롭힘 가해자를 마주했기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원아정은 재빨리 다가가 안정숙의 손을 잡았다.“할머니, 용서해 주세요. 오늘은 제 결혼식이에요.”결혼식을 언급하며 그녀는 안정숙의 태도를 살폈다. 이 결혼식이 계속될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었다.그러나 안정숙은 그녀의 손을 홱 뿌리치며 단호히 말했다.“이 일은 내가 철저히 조사할 거야. 아정아, 그때 네 나이가 어리지도 않았을 텐데, 네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