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씨 가문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어르신이 워낙 유명한 인물이었던지라 상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기에 절대 조촐하게 보낼 수 없었다.입관 날, 반승제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상부의 명망 높은 사람들이 속속 들어왔고 문 앞에는 붉은 깃발을 꽂은 차들이 가득했다.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빼지 않고 참석했다. 모두 반씨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그들은 종종 반씨 가문과 의례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그중 누구도 반승제의 행방은 알지 못했다.어르신의 부고 소식에 업계 내부가 떠들썩했지만 외부로 새 나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반씨 가문 소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어렴풋이 눈치챘을 것이다.성혜인은 여전히 작은 방에 갇혀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이틀 동안 이 작은 방에 들어오는 사람은 여러 차례 성격이 바뀌고 있었다. 어떤 날에는 다정한 사람이, 어떤 날은 괴팍한 사람이 문을 열었다.다정한 사람은 항상 노크 후에 조심스레 문을 열었고 괴팍한 사람은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다.이러한 이유로 성혜인은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어떤 사람이 들어오는 건지 미리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발소리가 멈추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그의 붉게 충혈된 눈이 성혜인을 향했다. 손에는 술 여러 병을 어수선하게 든 채로였다.성혜인이 뒤로 살짝 물러나며 인상을 찌푸렸다.배현우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오더니 술잔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술잔을 가득 채웠다.“혜인아, 나랑 술 한잔하자.”성혜인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침착하게 그를 응시했다.배현우가 단숨에 석 잔을 비우더니 과격하게 성혜인의 턱을 받쳐 들었다. 그녀가 얼굴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세게 고정한 뒤 술잔에 담긴 고농도의 술을 그대로 입안에 들이부었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성혜인이 사레에 들려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다. 다른 사람에게 술을 이렇게 무작정 들이붓는 것은 정말이지 위험한 행동이다.그러나 다행이라고나 해야
성혜인이 배현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가 없다.하지만 싸울 기력마저 없었기에 그저 배현우가 한잔 또 한잔 마시는 모습을 응시할 뿐이었다.무언가 그런 착각이 들었다. 어르신의 부고에 대해 배현우도 슬퍼하고 있다는 이상한 착각 말이다.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어르신의 죽음이 누구 때문에 초래된 건데.성혜인은 눈이 시린 느낌만 들었다. 그간 발생한 일들이 마치 이상한 가상공간에 들어온 듯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하지만 어르신이 임종 전 어떻게 행동하셨든 살아생전엔 그녀를 극진히 대해준 사람이다.그토록 업적 있고 대단한 분이 그토록 초췌한 모습으로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떠나셨다.심지어 무언가 고뇌에 시달린 것 같다. 임종 직전까지도 불안하고 지친 모습이었다.*반승제가 홀로 포레스트에 앉아 있다. 그 앞에는 할아버지의 흑백사진이 놓여있다.포레스트는 할아버지께서 성혜인에게 물려준 혼전 재산이고 포레스트 내의 고용인들도 직접 교육하셨었다.어르신의 부고 소식을 들은 이후 별장 전체는 슬픔에 빠졌다.게다가 성혜인도 실종되었으니 별장 안은 거의 인기척조차 없다.그저 이따금 겨울이가 주인을을 그리워하며 대문을 향해 짖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다.반승제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어르신의 입관 일이므로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있었지만 그는 한 통도 받지 않았다.휴대폰의 배터리가 다 할 때까지도, 그는 멍하니 있었다.배현우는 감정 동요 없이 차분하게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한 후 성혜인의 체향이 남아있는 그녀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가끔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웠다.반승제가 이불을 돌돌 말아 꼭 안았다.장장 이틀간 밤을 새운 그는 그제야 가까스로 잠에 들 수 있었다.그러나 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성혜인이 자기 아내라는 사실을 몰랐던 배현우가 할아버지께 이혼하겠다는 청을 올렸다가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그때는 이 여인과 얽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
잠시 침묵을 지키던 서주혁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승우 형은 그런 사람 아닌 거 같은데.”승우 형이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의 이름이 담긴 시 한 구절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숨기려는 노력도 없이 드러내는 사람이라고? 절대. 그럴 리가.반승제는 눈을 내리깔고 주먹을 쥔 채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좋아한다는 감정 자체가 원래 얄팍한 거야. 만약 그 사람이 정말 성혜인이라면 지금까지의 일들이 설명돼. 여태 우리는 방향을 잘못 잡았던 거야. 그래서 결과도 부진했던 거고.”“그런데 성혜인이 만약 정말 그 여자라면 네 곁에 나타난 것도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아닐까? 게다가 우리가 여태 승우 형을 찾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본인이라는 말은 절대 한 적이 없어. 이번에 어르신께서 승우 형 따라가시고 마침 성혜인도 종적을 감췄는데, 그럼 그때 절벽에 있었던 사람들도 전부 승우 형네 사람들인 거야?”이 말은 곧 반승우와 성혜인이 일을 꾸미고 어르신을 살해했다는 것이다.반승제에게 큰 타격을 줄 만한 사실이었다. 어르신은 반승제가 가장 아끼고 존경하던 가족이고, 그를 속인 사람들이 그의 친형과 사랑하는 아내이기 때문이다.더 이상 깊이 생각하다간 이성마저 잃을 것 같았다.반승제는 입술을 짓씹으며 사색하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성큼성큼 위층으로 향했다.반승제는 거침없이 걸어가 성혜인의 캐비닛 앞에서 멈춰 섰다. 캐비닛은 잠겨 있었고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 수 있었다.그가 망설임 없이 성혜인의 생일을 입력했다.캐비닛은 열리지 않았다.곧이어 그가 자신의 생일을 입력했다.여전히 열리지 않았다.반승제가 차갑게 조소하더니 반승우의 생일을 입력했다.“딸깍.”캐비닛이 우습게도 문을 열어주었다.비밀번호를 입력하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는 할 말을 잃었고 상자를 이대로 부숴버리고 싶다는 충동마저 들었다.하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캐비닛을 열자 보이는 건 작은 노트와 인장뿐이었다.서주혁이 처음 조사할 때 얻은 일기장과 색도 무늬도 같은 것이
반승제는 더 이상 말 얹지 않고 방문을 열고 자리를 떴다.반씨 저택으로 돌아가니 빈소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는 홀에 있는 사람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할아버지의 유골을 받으러 떠났다.이 모든 과정 동안 그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고 유골함을 조수석에 올려놓은 뒤 관련 인원에게 전화를 걸어 매장할 준비를 했다.점심에 매장하기로 되어있었고 반승제를 포함한 기타 반씨 가문 가족들은 산소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의 햇빛은 강렬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마지막 남은 흙까지 모두 관을 덮고 나서야 반승제는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세 번의 절을 한 후 어르신의 영정사진을 한동안 보더니 자리를 떴다.자리에 남은 사람들이 그가 냉혈한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입관 일에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더니 이 며칠간도, 오늘까지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다.“역시 승우에 비해 인간미가 너무 없어.”“이제 반씨 가문이 승제 손에 쥐어졌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참.”“이제 큰아버지도 작은아버지도 모두 떠나보냈으니, 누가 더 이상 승제를 이겨 먹겠어. 승우가 살아 돌아오면 얼마나 좋을까.”“그만해.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 돌아와.”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한군데에 모여 쑥덕거리고 있다.반승우가 얼마나 좋았었느니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들을 보는 임경헌은 다소 가소롭기까지 했다.사촌 형이 살아있을 때는 그렇게 시기 질투하더니. 그때는 한 집에 어떻게 천재가 둘이 나오냐며 뭐라 하지 않았던가.당시 어르신이 일찌감치 반승우를 후계자로 삼았을 때도 불만이 가득했었다. 그런데승우 형이 이미 떠나간 지금에 와서야 그들은 그리워하고 있었다.임경헌이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외할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큰 슬픔이었지만 더 걱정되었던 것은 사촌 형의 앞으로의 행보였다.외할아버지의 죽음에 성혜인이 한몫했다고 생각하는 업계 내의 사람들은 모두 반승제가 이후에 그녀와
한편.어젯밤 몽롱하게 잠들었던 성혜인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점심이었다.성혜인은 고개를 들어 머리 위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좋고 이쯤이면 어르신의 장례식도 끝이 났겠다.반승제는 어떻게 되었지?정말 배현우의 말대로 어딘가에 숨었을까?성혜인은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렇게 괴로울 순간에 자신이 곁에서 지켜줘야 하는데.방문이 누군가에 의해 곧장 열리더니 배현우가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보더니 아니나 다를까 빈정대기 시작했다.“승제 걱정하는 거야?”성혜인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배현우를 대할 때 그녀는 철옹성처럼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이를 알아챈 배현우도 기분이 상해 눈살을 찌푸렸다.“뭐야, 나랑 대화하기도 싫어? 아쉬워라. 앞으론 계속 나랑 있어야 할 텐데.”그가 짜증스럽게 컵라면 하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먹어. 이따 출발할 거야.”성혜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요즘 성혜인은 식사가 매우 불규칙적이었다. 배현우는 마치 의도적으로 괴롭히기라도 하듯 가끔은 음식을 제공해 주고 가끔은 배를 곯게 했다.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으로 본인에게 굴복시키려는 것도 같았다.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컵라면을 다 먹은 성혜인이 갑작스럽게 위에 통증을 느꼈다. 성혜인은 다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것을 죄다 토하기 시작했다.그녀의 괴로운 모습에도 배현우는 감정 없는 로봇처럼 밖에서 팔짱을 끼고 구경했다.“임신한 거야? 누구 애야? 나야, 반승제야?”그의 말은 성혜인을 더욱 구역질 나게 했다. 구토가 끝난 뒤 성혜인은 입을 헹구고 위를 손으로 감싸며 괴로워했다.그러나 아직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한 배현우는 여전히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몇 개월 됐는지 검사라도 해볼래? 마침 우리가 잤던 날 임신한 걸 수도 있잖아. 그날 난 피임 안 했는데, 네가 돌아가서 피임약을 먹었을지는 나도 모르니까.”그의 말에 성혜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날 그녀는
곧이어 의사가 수액 바늘을 성혜인의 손등에 꽂으려 했다.그러나 이에 반승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그리고 무언가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듯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의사는 조금 놀랐지만 그저 수액 바늘을 보면 일시적으로 어지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의사 생활을 하다 보면 종종 겪는 일이니까.“수액 바늘이 무서우시면 보지 마세요.”반승우는 눈을 내리깔고 손을 미세하게 떨었다. 견디기 힘든 괴로운 감정이 거미줄처럼 그를 옥죄여왔다.점차 숨을 쉬기 힘들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아 숨을 쉬려 해도 거미줄이 점점 더 단단하게 감겨오는 기분이었다.의사는 그를 신경 쓰지 않았고 성혜인의 손등에 주삿바늘을 꽂았다.반승우는 손이 떨리지 않도록 세게 주먹 쥐었다.의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입을 열었다.“수액이 끝나면 꼭 주삿바늘 빼주세요.”반승우가 막막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으나 눈치채지 못한 의사는 예의 있게 인사를 남긴 뒤 떠나버렸다.성혜인을 지극히 아끼는 그로서는 당연히 떠나지 않고 그녀의 곁을 지켜야 했다.그런데 지금 그는 성혜인이 있는 곳이 맹수 천지이기라도 한 듯 혼자서 싱글 소파에 멀리 떨어 앉았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혜인의 신음이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피가 역류하기 시작했다.그는 서둘러 성혜인에게로 가서 주삿바늘을 빼주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에 괴로운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손끝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떨려와 주삿바늘을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그는 마치 이상한 병에 걸린 것처럼 주삿바늘을 향해 손을 뻗어도 다른 엉뚱한 곳을 헛잡았다.계속해서 여러 번 시도했으나 여전히 무용지물이었고 그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반씨 가문의 천재라 불리던 반승우는 자신이 어느날 주삿바늘 때문에 이렇게 난감해질 줄은 절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문득 성혜인이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뜨인 것은 얼굴에 긴장감과 초조함이 가득한 반승우였다.성혜인의 시선이 위로 향했고 곧이어 수액 병 안으로 역류하고 있는
어둠 속에서 반승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30분이 지나서야 그는 천천히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집 밖의 불빛이 새어 들어오자 그는 그 불빛에 놀란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배현우가 비웃는 소리가 또 났지만 반승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송혜인이 소파에 누워 있는 걸 보았다.그녀는 잠을 자지 않고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반승우는 아픈 몸을 꾹 참고 링거병과 링거 바늘을 쓰레기통에 넣고 쓰레기 주머니를 들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온 그의 등은 온통 식은땀이었지만 주방으로 걸어가 능숙하게 좁쌀을 꺼내 죽을 쑤기 시작했다.소매를 위로 걷어 올리고 간단하게 반찬도 몇 가지 만들었다.한참을 바쁘게 일하며 죽을 다 끓이고 나서 다시 좀 식힌 후에야 성혜인 앞에 내놓았다.성혜인은 일어날 수 없었다. 위가 덜 아프기는 했지만 몸은 아직 힘이 없었다.“혜인아, 내가 일으켜줄게.”그는 걸어가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성혜인의 착각 때문인지 자꾸만 남자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손가락에 반창고가 감겨 있었는데 아까 채소를 썰다가 다친 건지 알 수 없었다.반승우는 아무 말 없이 죽과 반찬을 더 가까이 가져가더니 고개를 숙여 숟가락으로 죽을 좀 떠서 그녀의 입에 갖다 댔다.그러나 그의 손은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하게 떨렸고 숟가락의 죽은 모두 바닥에 떨어졌다.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끔벅거리더니 이내 숟가락을 그릇에 넣고 바닥에 떨어진 죽을 휴지로 닦아낸 뒤 쓰레기통에 버렸다.이 모든 것을 끝내고 난 그는 다시 죽 한 숟가락을 떠냈지만 그 손은 여전히 심하게 떨렸다.성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방금 이런 상태로 밥을 지은 건가?’반승우는 네다섯 번 노력하고 나서 결국 한숨을 내쉬며 수저를 내려놓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미안해. 내가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으니까 다른 사람을 보내서 먹여줄게.”그는 나가서 도우미 한 명을 불러들였다.성혜인은 자신의 위를 아꼈다. 지금
저녁 7시제원.반승제는 손에 든 자료를 보면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저녁 무렵, 그는 고택에 가서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했다.어르신의 유품은 매우 적었는데 후세에 남긴 것이 거의 없었다. 지금 BH 그룹 주식은 대부분 반승제의 손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애써도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의 실력이었다.반승제는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성혜인에 관한 일을 떠올리지 않기를 바랐다.하지만 상자를 열 수 있는 비밀번호는 바늘처럼 심장 깊숙한 곳을 찔렀다.성혜인을 구하러 갔다가 지진을 만났을 때, 그 문이 항상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는 혼수상태에서 성혜인이 허둥지둥 비밀번호를 시도하는 것을 보았는데, 결국 그 문이 열렸다.당시 그는 그녀를 너무 믿어서 그것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단지 몇 번의 시도만으로 정확한 암호를 풀 수 있으리라 생각하겠는가.그는 지금까지 그녀의 목적을 의심한 적이 없고 머릿속은 그들이 함께 겪었던 아찔했던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지금 생각해보니 그 비밀번호가 반승우의 생일이었고 그녀가 가진 상자의 비밀번호와 같았다.아마도 그녀의 모든 비밀번호는 그 숫자일 것이다.반승제는 생각만 해도 따귀를 얻어맞은 듯 얼굴이 달아올랐다.그날 소풍을 하러 갔을 때 숲속의 공기가 너무 싱그러웠다. 그녀는 그의 등에 업혀 속삭이며 그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끔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그의 등에서 다리를 흔들거리기도 하고 가슴 아파하며 그의 땀을 닦아 주기도 했다.그는 그 길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어 계속 걸을 수 있기를 바랐다.반승제는 자기도 모르게 허구픈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연기하고 있다면 연기력이 너무 대단하다.성혜인은 설레었던 적이 없었을까?그는 아픈 마음을 다잡고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지만 두 사람의 달콤했던 순간은 너무 적었다. 처음에는 거래 관계였고 나중에는 연애를 확정한 지 2주밖에 되지 않아
공지민은 섬에서 한 달을 푹 쉬었고 그 사이 연승혁의 상처도 조금씩 나아졌다.그녀는 텔레비전에서 염정아의 판결 결과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염정아는 카메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분명히 이는 그녀가 선택한 결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운명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니까.판결 결과를 본 날 공지민은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주변의 바람이 매우 거셌다. 그녀는 자신이 흘리는 눈물이 악어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염정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칼을 쥐여준 것처럼 느껴졌다.공지민은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소리가 흘러나오지 않게 참았으며 고통에 젖어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고 연승혁이 다가왔다.“지민아, 오늘 밤에 해산물 바비큐 할 건데 저번에 먹었던 킹크랩 또 먹을래? 이따가 나랑 시장에 가서 사 오자.”연승혁은 공지민 앞에 서서 그녀의 붉어진 눈을 보더니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울었어?”최근 며칠 동안 연승혁은 매우 부드러워졌고 이전의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친구들이 여기 있었다면 아마 그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바람이 너무 세서 눈에 모래가 들어갔어요.”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혹시 뉴스 때문에 그래? 봤었어? 사실 무기징역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법정 쪽에 말대로라면 법정에서 자기가 직접 자백하며 죽는 걸 원했대. 아무도 살릴 수 없었어. 지민아,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고 오늘 밤에 뭐 먹을지 생각해 보자.” 공지민의 눈빛에는 조롱이 가득했다. 오늘 밤 뭐 먹을지가 한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마음속에서 조롱이 커질수록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감동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목을 감싸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연승혁의 눈빛이 깊어지고 손은 그녀의 허리에 닿아 한껏 힘을 주었다. 공지민은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렸고
온시환은 일어나서 집을 나와 헬기를 타고 염정아의 집에 가기로 했다. 그녀의 집에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으니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옆에는 두 사람이 따라왔고 모두 그의 사람들이었다. 염정아의 집을 알아낸 후 그는 서둘러 그곳으로 갔다.아래층 슈퍼마켓 사장님은 그들을 보고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염정아에게 부탁받고 왔다는 걸 듣고 몇 마디 더 묻고 나서야 방 열쇠를 건넸다. 온시환은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문에는 작은 광고들이 잔뜩 붙어 있었고 집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그렇게 크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열쇠를 꽂고 들어갔을 때 방 안에 있던 몇 명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 일부는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었고 일부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온시환은 입을 열려고 하다가 이 아이들이 아마 죽음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아이만이 어느 정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저씨, 엄마 아빠가 우리 보러 오라고 하신 건가요? 우리는 언제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어요?”온시환은 웃어보려 했지만 어떻게 해도 웃어지지 않았다. 염정아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고 곧 처형될 예정이다. 그는 정말 이 아이들을 모두 복지관에 보내야 할까? 그는 잠깐 망설였다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아이들 챙겨. 제원으로 간다.”만약 아이들을 이곳 복지관에 두면 이곳은 너무 멀어서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해도 알지 못할 수 있다. 차라리 제원 복지관에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온시환은 이 아이들을 직접 돌볼 고민도 했었지만 그들을 보면 염정아의 인생이 떠올랐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고 그걸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했다.그는 제원의 복지관에 기부할 수 있었고 매주 사람을 보내 아이들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자라도록 챙기고 학교에 보내어 나중에 직장을 찾아서 스스로 먹고살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그는 늘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가장 막장 같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문득 공지민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속의 쓰라림도 점점 더 커졌다. 그때 VIP룸의 문이 열리고 반승제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우리 다 같이 시간 내서 놀러라도 가자. 마침 혜인이도 요즘 놀러 가고 싶어 하던데.” 한때 온시환은 노는 걸 가장 즐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갈 생각만으로도 힘이 빠졌다. 그는 멍하니 손에 든 술잔을 바라보다가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반승제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하게 될까?’ 그때 그는 우습게 느껴졌다. 반승제처럼 완벽한 남자가 여자의 사랑이 부족할 리가 있나? 세상에 여자는 넘쳐나는데 이 여자가 아니면 다른 여자를 찾으면 될 일 아닌가.하지만 세상일은 돌고 도는 법이라더니 그도 결국 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하물며 그 사람은 그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남자의 감정을 갖고 장난치려 들었다. 그날 경찰서 앞에서 연승혁을 봤을 때 온시환은 공지민의 대략적인 계획을 알 것 같았다. 그때 연승혁이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은 분명히 순수하지 않았고 연승혁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빠졌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온시환은 질투가 아니라 씁쓸함을 느꼈다. ‘연승혁 너도 참. 평생을 거만하게 살아온 네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가 오히려 네 목숨을 노리다니.” 온시환은 술을 또 한 모금 마시며 자신과 연승혁 중 누가 더 불행한지 가늠할 수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서주혁은 손을 천천히 내밀어 그가 마시려던 술을 가로챘다. “그만 마셔. 위 출혈 나서 병원에 실려서 가고 싶어?” 온시환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
연승혁의 상처가 조금 나아졌을 때 공지민은 그를 데리고 해변을 거닐었다. 마치 그들이 처음 섬에 왔을 때처럼. 연승혁은 체력이 좋아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연인처럼 보였다. 이 섬에 와서 부상을 당한 그날을 제외하고 그는 매일 자신과 공지민이 연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진실이 무엇인지. 그것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이 다시 여기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연승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민아, 여기서 돌아가면 나랑 함께할래?” 공지민은 잠시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우리가 이미 함께 있는 게 아니에요? 전에 우리가 미혼 부부였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긴 한데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네가 나를 선택한다면 그 문제들은 내가 모두 해결할 거야.” 김경자 쪽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가 한 일이 기존의 규범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그만이었다. 예전처럼 말이다. 어차피 김경자도 그가 하는 방식에는 이미 익숙해졌을 터였다. 그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 “너만 원하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공지민은 속눈썹을 내렸다. 머릿속에는 연승혁과의 일보다는 염정아가 떠올랐다.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사건이 그렇게 커졌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온시환은 염정아를 도왔을까?’ 그녀는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온시환은 슬퍼할까?’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예전부터 살고 싶은 의욕이 없었다. 그래서 제원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 연승혁이 자신과 함께 여기 남아있게 할 것이다. 마치 그때 구은우가 영원히 바닷가에 남았던 것처럼. 제원 쪽에서 온시환은 더 이상 공지민과 연락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가 들은 바에 따르면 공지민은 이미 연승혁과 함께 그 섬으로 갔고 그 섬에는 그가 배치해
공지민이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보였는데 연승혁이 말한 대로 안전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연승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지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연승혁의 부하들은 그녀가 나오는 걸 보고 격정스런 눈빛을 지었다. “공지민 씨, 괜찮으신가요?”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오빠는요?”“형님은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오빠 보러 가고 싶어요.”그때 그녀는 일부러 미친 척하며 그를 몇 번 밀쳤고 기억에 의하면 그를 불더미 속에 밀어 넣었다. 그의 등은 아마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하지만 연승혁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안고 탈출할 수 있었으며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잘 보호했다.공지민은 감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원래는 그와 함께 그곳에서 같이 죽을 생각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연승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연승혁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의사가 그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섬의 의료 수준은 제원에 미치지 못했다. 연승혁은 등 부상으로 인해 이미 이틀째 의식을 찾지 못했고 의사는 감염을 우려하며 그의 곁을 이틀 동안 지키고 있었다. 공지민의 눈빛에 조롱의 기색이 스쳤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왜 이 사람은 타 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곧 눈가가 붉어진 채 천천히 병상 옆에 앉았다.“오빠는 괜찮아졌나요?”의사는 그녀를 보며 공손하게 답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이제 깨어나기만 기다리면 됩니다.”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승혁의 손을 잡았고 그대로 병상 옆에 앉아 떠나지 않았다.의사는 곧 방을 떠났고 방 안에는 연승혁과 공지민 두 사람만 남았다.공지민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이 방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베개를 가져다 이 남자를 질식시켜 죽일 생각도 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녀가 그렇게 하려던 찰나
남자는 이미 죽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연승혁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옆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부하들에게 짧게 말했다. “정리해. 난 먼저 간다.” 호텔 쪽에는 이미 그의 부하들을 배치해 두었으니 원래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방금 그 남자의 말이 자꾸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직접 돌아가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승혁은 자신이 공지민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걸 단순한 게임으로만 여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만약 공지민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원래는 30분은 걸려야 할 거리였지만 그는 10여 분 만에 도착했다. 그가 머물던 호텔은 이미 짙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서둘러 앞으로 나가 자신의 부하를 붙잡고 물었다. “공지민 어디 있어!” “형님, 공지민 씨는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방 안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승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바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불길은 이미 너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고 섬의 소방은 아직 빠르지 않아 불은 이미 1층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번져 있었다. 지금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연승혁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밖에서 소식을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어쩌면 공지민이 운 좋게 스스로 탈출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성을 차릴 수 없었다. 곧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을 밀쳐내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이 자던 방으로 들어갔다. “공지민! 공지민!” 그는 큰 소리로 외쳤고 곧 방 한구석에서 공지민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짙은 연기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연승혁은 최대한 몸을 낮추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공지민은 방구석에 웅
연승혁은 즉시 공지민을 바라보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넌 이 방에 가만히 있어. 내가 가서 그 사람을 처리하고 나서 나랑 같이 제국으로 돌아가자.”공지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위험하진 않겠죠?”“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한잠 푹 자고 있어.”연승혁이 묵고 있는 호텔은 이 섬에서 가장 큰 호텔로 매우 호화로운 데다가 그의 부하들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공지민은 안전했다.공지민은 서서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연승혁은 겨우 몇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매우 불안했고 심지어 공지민이 그와 함께 움직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건 결코 안전하지 않았고 그 사람이 혹시나 손에 총이 있다면 공지민은 위험할 수 있었다.그는 신이 아니었고 공지민을 100%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약간의 과실로 그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감히 모험할 수 없었고 그녀를 호텔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은 차에 올라탔고 차는 30분 동안 달리다가 암초가 있는 곳에 멈췄다.근처의 암초는 크고 새까맣기 때문에 숨어 있기에 좋은 장소였다.연승혁은 옆에 있는 부하한테 물었다.“여기에 있는 게 확실해?”“네. 확실해요. 저희 쪽 사람들이 지금 수색하고 있어요. 늦어도 30분이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소매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의 옷차림과는 전혀 달랐고 휴가를 온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양측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연승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이제 그 사람은 도망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하들은 온몸이 새까만 남자를 붙들고 걸어왔다.어쩐지 이 남자가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 있더라니 그의 몸에는 검은 물감이 칠해져 있었고 마치 암초와 융합된 것처럼 보였으며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연승혁은 담배에 불을 붙였고 밤바다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그는 심호흡한 뒤 그 남자
연승혁은 한동안 그녀와 꽁냥꽁냥하다가 해변의 경치를 구경하러 가자고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공지민은 바다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구은우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후 그녀는 평생 악몽 속에서 살았다.그녀는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리기 시작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연승혁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모래 위를 걸었다.“지민아, 어때? 여기 달이 특별히 예쁜 것 같지 않아?”공지민은 얼굴에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뻐요. 이렇게 예쁜 달은 처음 봐요.”연승혁의 입꼬리는 올라갔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그는 정말로 여기의 달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와 함께 경치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뭔가 더 특별했고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공지민은 내내 연승혁한테 맞춰줬고 그가 바닷물을 만지고 싶다고 해서 그녀도 따라나섰다.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연승혁이 물었다.“이런 해변을 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공지민의 눈에는 의문으로 가득 찼고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연승혁은 구은우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공지민은 그때 구은우를 매우 사랑했고 그들이 서로를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할 때 구은우가 사망했는데 그녀가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이상우가 최면술을 사용했음에 불구하고 연승혁은 그녀가 갑자기 기억해 낼까 봐서 걱정이었다.하지만 공지민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연승혁은 안도감을 느꼈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기억 안 나면 됐어. 손 줘봐. 우리 여기 좀 둘러보다가 돌아가자.”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오빠가 잡으려는 그 사람은요?” “아마 일주일 안에 잡힐 거야. 이 섬이 제국만큼 크지는 않지만 숨을 수 있는 동굴이 많아. 그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후 바로 숨어버렸어. 그래서 내 부하들이 그를 찾아내려면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해.”그들이 며
공지민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연승혁한테 기대어 있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침대에 눕혔다.이곳은 작은 섬으로 보였고 원주민들도 꽤 많아서 야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공지민은 안겨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노점상들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또 30분이 지났을 때 음식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연승혁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야? 너 하루 종일 잠만 잤어.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따가 야시장 구경하러 가보자.”“사람 잡으러 왔다면서 야시장을 구경할 기분은 나요?”“그 사람이 지금 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어.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야. 이곳의 출입구는 이미 부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 사람이 함정에 빠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공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뽀뽀했다.“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연승혁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네 약혼자가 될 수 있는 걸 봐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네가 보는 눈이 있네.”“그럼요. 내가 안목이 높긴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연승혁은 기분이 더 좋아졌고 그녀를 품에 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인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봐봐.”연승혁은 많은 음식을 사 왔고 그녀는 확실히 배가 고파서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연승혁은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전부다 네 거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그러죠.”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눈이 깊어졌다.공지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야시장 구경하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나도 너무 구경하고 싶고 이곳의 풍습이 궁금해요. 여기 국내는 아니겠죠?”연승혁은 그녀가 어린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