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영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는데 그 안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많이 아팠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어머니도 없었기에 그들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안 좋은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행인 건 안상철이 최선을 다해 안지영에게 행복한 삶을 주려 했던 것이다. 어느덧 그들은 의식주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녀의 병도 거의 재발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활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강민혜가 그를 찾아오자 안상철은 처음으로 그들이 자신을 잡으러 온 거라고 털어놓았다.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안지영은 알고 있었다. 안상철의 행방을 아무한테도 알려선 안 된다는 걸 말이다. 잡히지 않기만 하면 계속 가족을 돌볼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소원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말했다. “지영 씨, 제가 왜 안 비서님을 찾고 있는지 아세요?” 그녀의 물음에 안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소원이 대답했다.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안 비서님이거든요. 저는 그냥 진실을 알고 싶을 분이에요.” 안지영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그게 저희 아빠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실은 저도 아무런 관계없길 바라고 있어요.” 소원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증거에 따르면 아버지는 자살이 아니라 살해당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안지영은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빠가 살인 사건이랑 연관이 있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디?’ 안지영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말도 안 돼요.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절대 사람을 죽일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아빠는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좋은 사람이라니까요? 언니,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절박한 표정으로 소원의 팔을 붙잡았다.“언니도 우리 아빠 잘 알잖아요. 아빠가 얼마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인데... 사람을 죽였을 리 없어요. 언니도 그렇게
그 노인은 안지영의 할머니인 박혜순이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휘두르더니 화를 내며 말했다. “너야? 우리 손녀를 유괴해 간 사람이?” 안지영은 깜짝 놀라 급히 박혜순의 지팡이를 붙잡으면서 말했다. “할머니, 그런 거 아니에요. 이 언니는 절 구해준 사람이라고요!” 박혜순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소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억나. 그날 우리 집에 찾아왔던 여자 아니야? 우리 아들을 찾더니... 해치려고 그러는 거지? 우리 아들을 못 찾아내니까 이젠 손녀까지 노리는 거야? 이 나쁜 년 같으니라고... 도대체 왜 우리 가족을 괴롭히는 거야?’ 소원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는 고집이 세고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성격 같았다. 안지영은 박혜순이 화를 내면 무섭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원을 떠밀면서 말했다. “언니, 먼저 가요. 우리 할머니는 진짜 화나면 때릴 수도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소원은 뒤를 돌아서 차에 올라탔다. 그녀도 더 이상 박혜순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돌나 가는 수밖에 없었다. 소원은 더 이상 안지영을 설득하지 않았다. 그녀는 믿고 있었다. 기억 속에 있던 착하고 순수한 소녀라면 반드시 도와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안지영에게도 가장 소중한 가족이 있었고 오직 안상철만이 그녀를 돌봐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누구나 다 이기적이었기에 자기를 위한 선택을 한다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하지만 소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진실이 밝혀내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반드시 안상철을 찾아야 했다. 소원이 떠나자 박혜순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안지영의 어깨를 붙잡고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지영아,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지? 할머니한테 거짓말하면 안 돼. 나간 지 오래됐는데도 안 돌아오니까 상철이한테서 전화가 왔어. 너한테 위험이 닥쳤다고 하더라고... 또 네가 돌아오면 절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했어.
”축하해요. 임신하셨습니다!”멍 때리고 있던 윤혜인 머릿속에는 오후에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만 계속 떠올랐다.그때, 조용하게 다가온 이준혁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물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한참 뒤, 이준혁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풀린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땀으로 젖은 머리와 글썽이는 눈망울은 조금 전에 많이 힘들었음을 설명해 주었다.겨우 숨을 고른 그녀는 서랍을 열어 임신 검사 보고서를 꺼냈다.요즘따라 계속 위에 통증을 느꼈던 윤혜인은 오늘 오후 병원에 찾아갔고 피검사를 한 결과, 의사는 그녀에게 임신 5주 차라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분명 매번 안전 조치를 확실하게 취했는데.다시 돌이켜보니 저번 달에 딱 한 번, 술자리를 마친 이준혁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뒤, 집 앞에서 갑자기 그녀에게 한마디 물었었다.“지금 안전하지?”그런데 안전기에도 임신할 수 있는 거구나…욕실 안에는 물소리로 가득했다. 안에 있는 남자는 2년 전에 윤혜인과 아무도 몰래 결혼한 그녀의 남편이자 그녀의 상사이기도 한 이산 그룹 대표 이준혁이다.그때 당시 술이 많이 취한 윤혜인은 뜻하지 않게 그녀의 상사와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 이준혁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이준혁은 그녀에게 가짜 결혼을 제안한 것이다. 이준혁 할아버지의 최대 소원이 손자가 하루 빨리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었다. 대외적 비밀 결혼으로 언제든 종료할 수 있는 가짜 결혼이었다.그때 당시 윤혜인은 그저 너무 행복했다. 그녀는 자신이 8년 동안이나 짝사랑해온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말에 고민없이 동의했던 것이다.결혼한 뒤에도 이준혁은 매일 너무 바빴다. 한달 동안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하지만 2년 동안
윤혜인은 우유를 마시면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는 연예 뉴스로 가득했지만 윤혜인은 이런 쪽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했다.그러던 중 갑자기 익숙한 이름이 보여서 그 기사를 클릭하게 되었다.기사와 함께 기재된 사진 속에서 임세희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함께 걷고 있는 남자는 흐릿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 눈에 봐도 몸매 비율은 완벽했다.사진을 확대한 윤혜인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렸다.사진 속 실루엣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준혁이다!그럼 오후에 갑자기 회의를 취소하고 외출을 했던 게, 그의 전 여자친구인 임세희를 데리러 공항에 간 거란 말인가?그 순간, 윤혜인의 가슴에는 큰 돌멩이 박힌 듯 답답했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다가 의도치 않게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고 다급하게 끊으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이미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유난히 다정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였다.너무나도 깜짝 놀란 윤혜인은 바로 핸드폰을 던져버렸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한참 뒤, 날이 밝아오자 윤혜인은 시간에 맞춰 회사로 출근했다.이준혁과 가짜 결혼을 한 뒤, 이준혁은 그녀가 집에 있길 원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이준혁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다른 회사가 아닌 이산 그룹에 취직해야 한다고 했고 그렇게 윤혜인은 이준혁 곁에 비서로 남아 물을 따르거나 간단한 심부름을 하는 등 소일거리 역할을 맡게 되었다.그리고 중요하고 핵심적인 비서 일은 이준혁의 수행 비서인 주훈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회사에 윤혜인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주훈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산 그룹의 이준혁 대표는 지금까지 계속 남자 비서만 채용했고 2년 동안 여자 비서는 윤혜인 한 명밖에 없었기에 다들 윤혜인과 회사 대표가 특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김성훈이었다. 그는 사무실을 떠나려는 듯했다.윤혜인은 주먹을 꽉 쥐고 감정을 숨긴 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김 대표님, 안녕하세요.”그러고는 김성훈을 지나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책상 앞에 앉아있는 이준혁은 고가의 정장을 입고 있었고, 윤혜인은 단번에 이 옷이 어젯밤 그가 입고 나갔던 옷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 마케팅 보고서입니다. 결재해 주세요.”이준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서류에 사인한 뒤 윤혜인에게 건넸고 서류를 받은 윤혜인이 사무실 밖으로 나와보니 김성훈이 여전히 사무실 입구에 서있었다.그녀의 모습이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김성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젠장, 혜인 씨가 우리 대화를 들은 거 아니야?”이준혁의 눈빛에는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는 김성훈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성격이 온순하고 착한 윤혜인은 질투 같은 걸 절대 안 한다. 그녀가 계속 지금처럼 조용하게 살아준다면 이준혁은 앞으로도 그녀에게 많은 걸 해줄 것이다.한편, 엘리베이터 안에서.윤혜인은 최대한 눈물이 흐르지 않게 고개를 높이 들었지만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녀는 2년이라는 시간이 충분할 줄 알았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모든 건 그저 그녀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였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전 여자친구의 복귀에는 역부족이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윤혜인이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눈 채, 탕비실로 향했다.커피로 정신을 좀 맑게 하고 싶었다. 탕비실 안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기사 봤어? 임세희 귀국했대.”“응? 그게 누군데?”“너 몰라? 임세희는 임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본인도 유명한 탑급
”뭐가 그렇게 잘나서 맨날 머리 치켜들고 다니는 거야? 다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거든. 부모도 없는 잡종 주제에…”팍!송소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혜인이 그녀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송소미는 평소에 고분고분하던 윤혜인이 감히 그녀에게 손찌검을 할 줄은 상상도 못해서 순간 멍한 표정이었다.한참 뒤, 송소미가 이를 꽉 깨물며 소리를 질렀다.“너, 너 지금 감히 날 때린 거야?!”“당신에게 예의를 가르친 겁니다.”윤혜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송소미를 보며 대답했다. 윤혜인은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아무나 그녀의 부모님을 모욕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송소미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준혁의 사촌 여동생인 그녀는 늘 타인의 아부를 받아왔기에 이렇게 대놓고 그녀와 맞서 싸우는 사람은 윤혜인이 처음이었다.“이 나쁜 계집애!”송소미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윤혜인에게 달려들었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할퀴려고 했지만 반응 속도가 빠른 윤혜인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은 채 송소미를 꿈쩍도 못하게 만들었다.윤혜인보다 체구가 작은 송소미는 어떻게든 윤혜인을 때리려고 발버둥을 쳤고 그 모습은 매우 추했다.화가 잔뜩 난 송소미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네가 뭐라도 되는것 같아? 넌 단지 우리 준혁 오빠가 침대에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일 뿐이라고! 넌 몸 파는 여자보다 더 천박해!”송소미는 갈수록 심한 욕을 입 밖에 꺼냈고 모여드는 직원도 점점 많아졌다.“지금 뭐 하는 거야!”낮게 깔린 이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는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난동을 부리고 있는 송소미를 발견했던 것이다.그의 등장에 순식간에 탕비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준혁 오빠?”송소미는 평소에도 이준혁을 조금 무서워했다. 이 사촌 오빠는 가차없는 성격이라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에게 이준혁 앞에서는 까불지 말라고 경고했었다.하지만 조금 전에 뺨을 맞은 게 생각나자 송소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을
송소미는 지금 이 순간, 윤혜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준혁 오빠, 저 나쁜 계집애가 하는 말 좀 들어봐요.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감히 계속 건방을 떨다니. 준혁 오빠, 저 여자 다시 불러와요! 난 오늘 화가 풀릴 때까지 저 여자를 때려야겠어요!”이준혁은 가녀린 윤혜인의 뒷모습을 보며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적당히 해.”이준혁이 차갑게 대꾸했다.평소에도 독하기로 소문난 송소미는 이준혁이 조금 전에도 윤혜인의 편을 들지 않았기에 이준혁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확신했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윤혜인의 뒷모습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다음에는 사람 불러서 저 여자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예요!”“송소미!”이준혁이 실눈을 살짝 뜬 채 송소미를 쳐다보았고 송소미는 그 눈빛에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딱 한 번만 얘기할게. 네 머릿속에 있는 꿍꿍이를 접어. 저 여자 건드리지 마.”송소미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기에 마음속에서 들끓던 복수심을 도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요…”이준혁이 싸늘한 표정으로 송소미를 힐끗 쳐다보다가 탕비실을 떠나면서 곁에 있던 주훈에게 명령을 내렸다.“앞으로 연관 없는 외부인은 회사에 들이지 못하게 해.”이준혁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송소미는 그의 뒤에서 계속 아부를 떨었다.“준혁 오빠 이렇게 큰 회사에 그런 명확한 규칙은 있어야 돼요.” 하지만 잠시뒤, 주훈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송소미 씨, 이만 나가주세요.”송소미는 그제야 그녀가 바로 그 연관 없는 외부인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단호하게 떠나는 이준혁을 쫓아가고 싶었지만 주훈이 부른 경호원에게 잡혀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송소미가 아무리 발악을 하고 발버둥을 쳐도 경호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한편, 자리로 돌아온 윤혜인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었고 차가운 이준혁의 얼굴이 생각나자 마음이 아팠다.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고, 회사를 나서려던 윤혜인 앞에
이준혁의 건장한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지다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윤혜인을 그대로 스쳐갔다.그녀를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윤혜인은 이준혁 품에 안겨 있던 여자의 얼굴을 정확하게 보았다. 그녀는 바로 얼마 전에 기사가 났던 임세희였다.윤혜인은 무거운 걸음으로 병원을 떠났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택시에 탄 윤혜인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고 목적지를 묻는 택시 기사의 말에 그녀는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스카이 별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거긴 이제 곧 그녀의 집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니까.한참 고민하던 윤혜인이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기사님, 청월 아파트로 가주세요.”청월 아파트는 윤혜인이 이준혁과 결혼하고 나서 구매한 집이었다. 그때 당시 그녀는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오기 위해 할부로 산 20평 남짓한 아파트였다. 집이 크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와 둘이서 살기에는 충분했다.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이준혁이 큰 별장을 하나 사주겠다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결정이 그녀가 지금까지 한 일들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아파트 단지에 도착한 윤혜인은 택시에서 내린 뒤, 바로 올라가지 않고 아파트 공원에 앉아 정신이 맑아질 수 있도록 잠시 바람을 쐬었다.지난 2년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달콤했던 순간도 있었고 서럽고 마음이 아팠던 때도 있었다.2년, 700일이 넘는 낮과 밤들, 그 마음이 아무리 얼음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이 시간이면 충분히 녹았을 텐데, 지금 그녀의 귓가에는 비웃음 소리만 들렸다.그 소리들은 그녀에게 이 모든 게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비웃고 있었다.어둠이 깃들고 나서야 윤혜인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문 앞에 기대고 서있는 이준혁을 발견했다.옷소매를 거둔 이준혁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서, 기다란 목과 섹시한 쇄골을 보일 듯 말 듯하게 드러냈다. 윤혜인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쯤 병원에서 임세희와 함께 하고
그 노인은 안지영의 할머니인 박혜순이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휘두르더니 화를 내며 말했다. “너야? 우리 손녀를 유괴해 간 사람이?” 안지영은 깜짝 놀라 급히 박혜순의 지팡이를 붙잡으면서 말했다. “할머니, 그런 거 아니에요. 이 언니는 절 구해준 사람이라고요!” 박혜순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소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억나. 그날 우리 집에 찾아왔던 여자 아니야? 우리 아들을 찾더니... 해치려고 그러는 거지? 우리 아들을 못 찾아내니까 이젠 손녀까지 노리는 거야? 이 나쁜 년 같으니라고... 도대체 왜 우리 가족을 괴롭히는 거야?’ 소원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는 고집이 세고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성격 같았다. 안지영은 박혜순이 화를 내면 무섭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원을 떠밀면서 말했다. “언니, 먼저 가요. 우리 할머니는 진짜 화나면 때릴 수도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소원은 뒤를 돌아서 차에 올라탔다. 그녀도 더 이상 박혜순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돌나 가는 수밖에 없었다. 소원은 더 이상 안지영을 설득하지 않았다. 그녀는 믿고 있었다. 기억 속에 있던 착하고 순수한 소녀라면 반드시 도와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안지영에게도 가장 소중한 가족이 있었고 오직 안상철만이 그녀를 돌봐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누구나 다 이기적이었기에 자기를 위한 선택을 한다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하지만 소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진실이 밝혀내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반드시 안상철을 찾아야 했다. 소원이 떠나자 박혜순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안지영의 어깨를 붙잡고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지영아,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지? 할머니한테 거짓말하면 안 돼. 나간 지 오래됐는데도 안 돌아오니까 상철이한테서 전화가 왔어. 너한테 위험이 닥쳤다고 하더라고... 또 네가 돌아오면 절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했어.
안지영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는데 그 안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많이 아팠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어머니도 없었기에 그들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안 좋은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행인 건 안상철이 최선을 다해 안지영에게 행복한 삶을 주려 했던 것이다. 어느덧 그들은 의식주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녀의 병도 거의 재발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활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강민혜가 그를 찾아오자 안상철은 처음으로 그들이 자신을 잡으러 온 거라고 털어놓았다.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안지영은 알고 있었다. 안상철의 행방을 아무한테도 알려선 안 된다는 걸 말이다. 잡히지 않기만 하면 계속 가족을 돌볼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소원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말했다. “지영 씨, 제가 왜 안 비서님을 찾고 있는지 아세요?” 그녀의 물음에 안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소원이 대답했다.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안 비서님이거든요. 저는 그냥 진실을 알고 싶을 분이에요.” 안지영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그게 저희 아빠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실은 저도 아무런 관계없길 바라고 있어요.” 소원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증거에 따르면 아버지는 자살이 아니라 살해당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안지영은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빠가 살인 사건이랑 연관이 있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디?’ 안지영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말도 안 돼요.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절대 사람을 죽일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아빠는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좋은 사람이라니까요? 언니,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절박한 표정으로 소원의 팔을 붙잡았다.“언니도 우리 아빠 잘 알잖아요. 아빠가 얼마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인데... 사람을 죽였을 리 없어요. 언니도 그렇게
차를 세우고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소원은 마음 한구석이 불안 해났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그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강민혜였다. 그녀는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주변에 동료들도 같이 있었다. 아마 안상철을 잡으러 온 것 같았다. 소원은 안지영이 여전히 차에서 내리지 않은 걸 보고 말을 걸었다. “다 왔어요. 아버지 찾으러 온 거 아니었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색 외투를 입은 한 남자가 강민혜와 그녀의 동료들에 의해 제압을 당한 것이다. 소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안상철을 잡은 걸까?’ 그녀는 급히 안지영을 말렸다. “내리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요. 앞에 아무도 없어요.” 소원은 그녀가 차에서 내리지 못하게 막았다. 솔직히 말하면 자기 아버지가 체포되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안상철이 정말 소진용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가 안지영을 사랑하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는 안지영을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처음 안지영의 어머니는 아이가 병약하다는 걸 알고 결국 지쳐서 집을 나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안상철은 끝까지 홀로 아픈 딸과 부모님을 돌봤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는 딸의 치료를 포기한 적 없었다. 그의 눈에는 언제나 딸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원은 그 장면을 본 것으로 안상철의 사랑이 물거품으로 되지 않길 바랐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안지영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소원은 앞쪽 상황을 주시하며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 강민혜가 그 남자에게 뭐라 말하다니 그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그 남자가 뒤를 돌려는 순간, 안지영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언니, 왜 다들 우리 아빠를 잡으려고 하는 거죠?” 소원이 깜짝 놀라 안지영을 돌아보자 그녀는 담담한 말투로 한 마디 덧붙였다.“소원 언니, 저 사람은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지나가던 언니라고?” 안지영은 안상철이 언니라는 단어에 포커스를 둘 줄은 몰랐지만 소원의 옆모습을 흘깃 보고는 대답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언니인데 신고도 도와줬어요.” 안상철은 나이가 있는 만큼 안지영처럼 경계심 없이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소원을 경계하며 말했다. “지영아, 너 괜찮아?” “네,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고요. 이 언니가 제때 와줘서 다행이에요.” 안지영은 이렇게 말하며 소원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녀 눈에 소원은 지금 영웅 같은 존재였다. “그래, 그럼 조심해서 와.” 안상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한편 소원은 그를 곧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린 듯했다. 안지영도 이제야 안정을 찾고 소원과 정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언니, 근데 언니는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엄청 외진 곳이잖아요. 너무 용감하신 것 같아요.” 그녀의 물음에 소원은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고만 대답할 뿐, 다른 건 밝히지 않았다. 너무나도 순진한 안지영을 마주하니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릴 때, 안지영은 소원을 무척 좋아했었다. 그녀만 보면 천사 언니라고 부르며 항상 곁에 붙어 있었고 소원도 시간만 나면 안지영을 보러 가곤 했었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두 사람은 점점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안지영이 소원을 전혀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놀란 상태인 데다가 차 안의 조명도 밝지 않아서 못 알아본 듯했다. 소원은 그녀가 뒷좌석에 앉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덕분에 쉽게 알아보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그녀는 한편으로 안지영에게 살짝 미안해하면서도 후회하지는 않았다.지금 소원에게 놓고 말해서 소진용의 죽음에 깃든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소진용이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안상철을 만나서 뭘 했는지, 그러고 나서
말을 마친 소원은 안지영을 끌고 본인의 차에 태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도 힘이 세지 않았고 안지영은 지금 너무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린 상태였다. 만약 이 운전기사에게 동료라도 있었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걸을 수 있겠어요?” 안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자 소원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원래도 몸이 약해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던 데다가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지라 겁에 질려 말을 더듬으며 겨우 입을 뗐다. “저, 저... 저도 모르겠어요. 흑...” 안지영은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원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업고 가기로 했다. 하지만 안지영을 막 업으려는 순간, 그녀가 흐느끼며 말했다. “제 핸드폰... 운전석 아래에 있어요.” 그래서 소원은 또 하는 수 없이 안지영을 내려놓고 운전석으로 가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운전기사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눈이 따가워서 앞을 제대로 못 보면서도 소원의 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려 했다. 하지만 소원은 이미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는 손목을 한 번 휙 비틀더니 운전기사를 그대로 차에서 끌어내려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쿵!” 운전기사는 바닥에 처박히며 큰소리로 욕을 지껄였다. “이 썩을 년아! 너 미쳤어?” 하지만 소원은 그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핸드폰을 찾았고 차 키까지 빼앗아버렸다. 운전기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 채 눈을 비비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개 같은 년, 두고 봐... 넌 반드시 내가 죽일 거야!” 그 말을 들은 소원은 운전기사를 실컷 노려보더니 앞으로 성큼 다가가 그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커헉!” 그는 배를 감싸고 바닥에서 몸부림을 쳤다. 몰려오는 통증 때문에 당분간 제대로 걷지도 못할 듯했다. 소원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경찰에 신고했으니까 그쪽 사정은 제 알바 아니에요. 알아서 경찰한테 가서 해명하세요.”그렇
그 운전기사는 상습범이었다. 전부터 항상 차에 약을 숨겨두고 지냈는데 적당한 대상을 찾으면 범행을 저지르곤 했다. 게다가 그는 실제로 택시를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는데 퇴근 후면 중고로 산 낡은 택시를 몰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른 듯한 손님이 보이면 그는 재빨리 다가가서 예약 택시인 것처럼 행세하며 승객을 태웠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하면 바로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해 범행을 저질렀다. 물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안지영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떨고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저 울면서 애원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를 생각을 가진 사람이 그녀의 눈물과 애원에 마음이 흔들릴 리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차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눈부신 불빛이 차를 비췄다. 운전기사는 깜짝 놀라서 당황하고 말았다. 이 정도로 한적한 시골길에 차가 올 리 없었으니 말이다. ‘충분히 지나갈 공간이 있는데 왜 불을 비추는 거지?’ 그는 짜증이 치밀어 욕을 내뱉으려 했다. 그런데 그 검은색 차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젠장!” 그러자 운전기사는 기겁하며 차에서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 차는 택시 바로 앞에 멈춰 서는 것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했다. ‘뭐 하는 거지?’ 그 순간, 차에서 한 여자가 내리더니 황급히 앞차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운전기사는 많이 당황했는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소원이 차 문을 열었을 때, 안지영은 옷이 반쯤 벗겨진 상태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소원은 재빨리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의 몸을 감싸주었다. “일단 절 따라오세요.” ... 사실 소원은 조금 전까지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나 차 안에 있는 사람이 안지영의 아버지인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두 사람이 만나는 중
안지영이 앞으로 갔다. 운전기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서 안지영을 지켜보았다.안지영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조금 옆으로 비켜주시겠어요?”“비켜달라고?”운전기사가 웃으면서 말했다.“어디로 비켜달라는 건지. 나 때문에 핸드폰을 못 줍는 것도 아니고.”운전기사는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지 않고 있었다. 안지영은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운전기사는 이런 연약한 여자가 좋았다. 목소리도 얇고 부드러우니 신음도 듣기 좋을 것이다.안지영은 운전기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좌석 밑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마음이 급해진 안상철이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안지영도 두려워서 얼른 안상철더러 본인을 데리러 오라고 하고 싶었다.하는 수 없이 안지영은 쪼그려 앉아서 손을 좌석 밑으로 뻗었다.하지만 그 자세로는 핸드폰에 닿을 수 없었다.안지영이 난감해할 때 운전기사가 물었다.“더 가까이 오지 그래요?”안지영은 더 가까이 가는 것이 두려웠다. 더 가까이 간다면 이 운전기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저... 됐어요. 아까 가로등이 있는 곳에서 아버지를 기다릴래요.”말을 마친 안지영이 바로 도망치려고 했다.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뒤에서 운전기사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홱 당겼다.“이 년이 좋은 말로 할 때 안 듣고!”안지영은 놀라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그녀는 엉엉 울면서 빌었다.“이러지 말아요. 아빠가 기다리고 있어요. 제발요...”“네 아빠는 널 만나지 못할 거야. 여기는 다른 길이거든. 이 길에는 네 아빠가 없어!”운전기사는 음흉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나를 아빠라고 불러봐. 잘 부르면 해치지는 않을게.”안지영은 놀라서 눈물을 터뜨렸다.“엉엉... 싫어요. 이건 범죄예요. 이러시면 안 돼요. 제발요. 제발 저를 놔주세요.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요, 네?”안지영이 운전기사 앞에 무릎 꿇고 빌고 있었다.“범죄?”기사는 피식 웃고 대답했다.“너 같은 여자가 이런 야심한 저녁에 나오는 건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잖아.
“기사님, 제발 세워줘요...”안지영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이 아가씨 정말 귀찮게 구네.”운전기사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여기서 멈추면 벌금이 얼만지는 알아요? 조금 있다가 주워요.”안지영은 마음이 불안했다. 핸드폰이 있어야 안전할 것만 같았다.안상철을 불러내 데리러 오라고 하고 싶었다.안지영은 결국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벌금은 제가 내드릴게요. 아버지가 전화할까 봐 그래요. 제가 전화를 안 받으면 아버지가 걱정하실 거예요.”안지영의 요구는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운전기사는 구겨진 표정으로 대답했다.“벌점은 얼마인지 알아요? 결국 내가 벌점을 받는 건데 그게 얼마나 시끄러운 일인데.”“저...”안지영이 뭐라고 하려고 하자 운전기사가 말을 끊었다.“여기서 벌점이 더 생기면 면허 정지예요. 그러면 벌금부터 시작해서 면허 정지 때문에 벌지 못한 돈까지 500백만 원은 될 텐데 아가씨가 책임질 거야?”“...”안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돈은 없었으니까 말이다.결국 안지영은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면 편한 곳에 세워주세요.”안지영의 핸드폰은 여전히 조수석 밑에 있었다. 그러다가 전화가 한 번 걸려 왔지만 안지영은 받지 못했다.그래도 안지영은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운전기사도 알았으니 안지영에게 몹쓸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던 중 안지영은 운전기사가 내비게이션을 끄는 것을 보고 약간 걱정되었다.“기사님, 이 길이 맞아요?”안지영이 물었다.“당연하죠.”기사가 대답했다.“여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안지영이 핸드폰으로 길을 확인했을 때는 이렇게 으슥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으슥하기도 하고 다른 차도 없어서 더욱 걱정되었다.안지영이 다급히 얘기했다.“내비게이션 한 번 켜보세요. 길 확인하게요.”“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운전기사는 안지영을 향해 화를 냈다.“난 눈 감고도 운전하는 사람이야. 내 집이 바로 이 근처에 있어서 이쪽 길은 훤히 잘 알고 있다고.”
안상철의 딸은 올해 20대 초반이어서 어린 티가 났다. 그녀는 검은색 후드티로 본인을 꽁꽁 감싸고 있었다.계단을 내려온 후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상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흰 차로 걸어갔다.흰 차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물었다.“콜택시 부르셨죠?”안상철의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타세요.”남자가 얘기했다.소원은 얼른 차에 시동을 걸었다. 소원의 차는 검은색인 데다가 불빛도 어두워서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안상철의 딸이 탄 차는 점점 으슥한 곳으로 향해갔다.소원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헤드라이트를 꺼버렸다. 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소원은 한 갈림길에서 그들을 놓치고 말았다.발각될까 봐 거리를 두면서 따라왔는데, 여기에서 놓쳐버린 것이다.소원은 차를 길옆에 대고 차에서 내린 후 바퀴의 흔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이런 으슥한 곳에는 다니는 차가 많지 않기에 흔적이 많지 않았다. 소원은 금방 난 흔적을 발견하고는 빠르고 방향을 확정했다. 이윽고 다시 차에 올라타 그들을 따라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본 흰 차가 나타났다. 다행히 소원의 차는 전기자동차여서 엔진 소리가 크지 않았다. 그리고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아 눈에 띄지 않았다.조심스레 차를 세운 소원은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차는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흰 차에서, 운전기사가 예쁘장하게 생긴 안상철의 딸을 보면서 장난스레 물었다.“이렇게 늦은데, 어디를 가는 거예요?”안상철의 딸, 안지영이 대답했다.“아버지를 찾으러 가요.”“아버지를 찾으러 간다고요?”운전기사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이렇게 늦었는데 아빠를 찾으러 간다니. 밖에서 놀려고 그러는 거죠?”안지영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운전기사의 미소가 이상하게 소름 돋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무시할 수도 없어서 억지로 대답했다.“아버지는 일하는 중이에요.”“아이고,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예쁜 딸이 직접 찾아오게 하다니. 너무 하네.”그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