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진들이 내려와 먼저 소원을 들것에 눕히고 이어 남자도 들것에 옮겨 눕혔다.구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 소원의 마음속은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들것에 누운 채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닦여진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날카롭게 솟은 눈썹,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 얇고 날렵한 입술.그 얼굴은 다름 아닌 육경한이었다.순간, 소원의 목에서는 감사 인사가 걸려 나오지 않았다.‘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왜 하필 육경한이...’동시에 커다란 절망감이 온몸에 퍼졌다.‘웃기네. 내가 내 원수를 직접 구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어이없는 농담이냐고.’하늘은 정말 잔인하게도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남자 역시 소원이 자신을 알아보았음을 눈치챘다.그러나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소원을 향한 그의 검은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그는 소원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였고 이 상황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소원이 자신을 구하려 했을 때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알았다.그녀는 육경한을 철저히 낯선 사람으로 여겼고 그런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구급차 문이 닫히면서 두 사람의 시야는 차단되었다.소원은 현실이 너무 잔혹하다고 느꼈다.왜 육경한이 여기 있는지, 왜 그녀를 구하려 했는지, 왜 결국 자신이 육경한을 구해야 했는지.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며 결국 그녀는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잠에 들었다.육경한도 깊은 잠에 빠져 하루 밤낮을 지나서야 깨어났다.눈을 떴을 때, 그의 침대 곁에는 소종이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는게 보였다.“대표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소종은 울먹이며 말했다.육경한은 여전히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그러나 소종
“안녕하세요.”달콤한 목소리의 여자가 병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육경한이 고개를 들어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여자는 육경한을 본 순간 눈빛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다가와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픽업트럭에 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모두를 대표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그녀는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자는 갈 생각도 없는 듯했다.구해준 사람이 이렇게 잘생겼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의 외모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음에도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가 돋보였다.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냉철한 대표님’ 같았다.날카로운 눈빛과 잘생긴 얼굴은 그녀 같은 평범한 여자들이 평생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제가 사과 깎아드릴까요?”여자가 먼저 제안했다.하지만 그녀가 사과를 집어 드는 순간, 육경한이 차갑게 말했다.“필요 없어요. 나가세요.”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여자는 순간 멈칫하며 사과를 손에 든 채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그러고는 이내 눈가가 붉어졌다.“저는 그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에요.”“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육경한은 냉담하게 대꾸했다.“나는 당신들을 구하려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이 말을 듣고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우리를 구하려 한 게 아니면 왜 목숨을 걸고 그런 위험한 싸움에 뛰어든 거지? 그토록 무모한 일을...’옆에서 육경한의 말을 듣고 있던 소종은 속이 답답해졌다.최근 구급차에서 찍힌 사진이 온라인에 퍼지며 언론은 육경한이 수많은 여성을 구한 영웅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그 덕분에 미우 그룹의 이미지는 하늘로 치솟았고 주식도 단기간에 급등했다.지금 병원 밖에는 그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이런 모습이 퍼지면 언론의 긍정적인 관심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하여 소종은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죄송합니다. 저희 대표님이 머리를 다쳐서 지금 조
”축하해요. 임신하셨습니다!”멍 때리고 있던 윤혜인 머릿속에는 오후에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만 계속 떠올랐다.그때, 조용하게 다가온 이준혁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물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한참 뒤, 이준혁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풀린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땀으로 젖은 머리와 글썽이는 눈망울은 조금 전에 많이 힘들었음을 설명해 주었다.겨우 숨을 고른 그녀는 서랍을 열어 임신 검사 보고서를 꺼냈다.요즘따라 계속 위에 통증을 느꼈던 윤혜인은 오늘 오후 병원에 찾아갔고 피검사를 한 결과, 의사는 그녀에게 임신 5주 차라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분명 매번 안전 조치를 확실하게 취했는데.다시 돌이켜보니 저번 달에 딱 한 번, 술자리를 마친 이준혁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뒤, 집 앞에서 갑자기 그녀에게 한마디 물었었다.“지금 안전하지?”그런데 안전기에도 임신할 수 있는 거구나…욕실 안에는 물소리로 가득했다. 안에 있는 남자는 2년 전에 윤혜인과 아무도 몰래 결혼한 그녀의 남편이자 그녀의 상사이기도 한 이산 그룹 대표 이준혁이다.그때 당시 술이 많이 취한 윤혜인은 뜻하지 않게 그녀의 상사와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 이준혁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이준혁은 그녀에게 가짜 결혼을 제안한 것이다. 이준혁 할아버지의 최대 소원이 손자가 하루 빨리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었다. 대외적 비밀 결혼으로 언제든 종료할 수 있는 가짜 결혼이었다.그때 당시 윤혜인은 그저 너무 행복했다. 그녀는 자신이 8년 동안이나 짝사랑해온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말에 고민없이 동의했던 것이다.결혼한 뒤에도 이준혁은 매일 너무 바빴다. 한달 동안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하지만 2년 동안
윤혜인은 우유를 마시면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는 연예 뉴스로 가득했지만 윤혜인은 이런 쪽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했다.그러던 중 갑자기 익숙한 이름이 보여서 그 기사를 클릭하게 되었다.기사와 함께 기재된 사진 속에서 임세희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함께 걷고 있는 남자는 흐릿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 눈에 봐도 몸매 비율은 완벽했다.사진을 확대한 윤혜인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렸다.사진 속 실루엣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준혁이다!그럼 오후에 갑자기 회의를 취소하고 외출을 했던 게, 그의 전 여자친구인 임세희를 데리러 공항에 간 거란 말인가?그 순간, 윤혜인의 가슴에는 큰 돌멩이 박힌 듯 답답했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다가 의도치 않게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고 다급하게 끊으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이미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유난히 다정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였다.너무나도 깜짝 놀란 윤혜인은 바로 핸드폰을 던져버렸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한참 뒤, 날이 밝아오자 윤혜인은 시간에 맞춰 회사로 출근했다.이준혁과 가짜 결혼을 한 뒤, 이준혁은 그녀가 집에 있길 원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이준혁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다른 회사가 아닌 이산 그룹에 취직해야 한다고 했고 그렇게 윤혜인은 이준혁 곁에 비서로 남아 물을 따르거나 간단한 심부름을 하는 등 소일거리 역할을 맡게 되었다.그리고 중요하고 핵심적인 비서 일은 이준혁의 수행 비서인 주훈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회사에 윤혜인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주훈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산 그룹의 이준혁 대표는 지금까지 계속 남자 비서만 채용했고 2년 동안 여자 비서는 윤혜인 한 명밖에 없었기에 다들 윤혜인과 회사 대표가 특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김성훈이었다. 그는 사무실을 떠나려는 듯했다.윤혜인은 주먹을 꽉 쥐고 감정을 숨긴 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김 대표님, 안녕하세요.”그러고는 김성훈을 지나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책상 앞에 앉아있는 이준혁은 고가의 정장을 입고 있었고, 윤혜인은 단번에 이 옷이 어젯밤 그가 입고 나갔던 옷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 마케팅 보고서입니다. 결재해 주세요.”이준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서류에 사인한 뒤 윤혜인에게 건넸고 서류를 받은 윤혜인이 사무실 밖으로 나와보니 김성훈이 여전히 사무실 입구에 서있었다.그녀의 모습이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김성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젠장, 혜인 씨가 우리 대화를 들은 거 아니야?”이준혁의 눈빛에는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는 김성훈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성격이 온순하고 착한 윤혜인은 질투 같은 걸 절대 안 한다. 그녀가 계속 지금처럼 조용하게 살아준다면 이준혁은 앞으로도 그녀에게 많은 걸 해줄 것이다.한편, 엘리베이터 안에서.윤혜인은 최대한 눈물이 흐르지 않게 고개를 높이 들었지만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녀는 2년이라는 시간이 충분할 줄 알았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모든 건 그저 그녀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였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전 여자친구의 복귀에는 역부족이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윤혜인이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눈 채, 탕비실로 향했다.커피로 정신을 좀 맑게 하고 싶었다. 탕비실 안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기사 봤어? 임세희 귀국했대.”“응? 그게 누군데?”“너 몰라? 임세희는 임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본인도 유명한 탑급
”뭐가 그렇게 잘나서 맨날 머리 치켜들고 다니는 거야? 다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거든. 부모도 없는 잡종 주제에…”팍!송소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혜인이 그녀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송소미는 평소에 고분고분하던 윤혜인이 감히 그녀에게 손찌검을 할 줄은 상상도 못해서 순간 멍한 표정이었다.한참 뒤, 송소미가 이를 꽉 깨물며 소리를 질렀다.“너, 너 지금 감히 날 때린 거야?!”“당신에게 예의를 가르친 겁니다.”윤혜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송소미를 보며 대답했다. 윤혜인은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아무나 그녀의 부모님을 모욕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송소미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준혁의 사촌 여동생인 그녀는 늘 타인의 아부를 받아왔기에 이렇게 대놓고 그녀와 맞서 싸우는 사람은 윤혜인이 처음이었다.“이 나쁜 계집애!”송소미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윤혜인에게 달려들었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할퀴려고 했지만 반응 속도가 빠른 윤혜인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은 채 송소미를 꿈쩍도 못하게 만들었다.윤혜인보다 체구가 작은 송소미는 어떻게든 윤혜인을 때리려고 발버둥을 쳤고 그 모습은 매우 추했다.화가 잔뜩 난 송소미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네가 뭐라도 되는것 같아? 넌 단지 우리 준혁 오빠가 침대에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일 뿐이라고! 넌 몸 파는 여자보다 더 천박해!”송소미는 갈수록 심한 욕을 입 밖에 꺼냈고 모여드는 직원도 점점 많아졌다.“지금 뭐 하는 거야!”낮게 깔린 이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는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난동을 부리고 있는 송소미를 발견했던 것이다.그의 등장에 순식간에 탕비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준혁 오빠?”송소미는 평소에도 이준혁을 조금 무서워했다. 이 사촌 오빠는 가차없는 성격이라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에게 이준혁 앞에서는 까불지 말라고 경고했었다.하지만 조금 전에 뺨을 맞은 게 생각나자 송소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을
송소미는 지금 이 순간, 윤혜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준혁 오빠, 저 나쁜 계집애가 하는 말 좀 들어봐요.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감히 계속 건방을 떨다니. 준혁 오빠, 저 여자 다시 불러와요! 난 오늘 화가 풀릴 때까지 저 여자를 때려야겠어요!”이준혁은 가녀린 윤혜인의 뒷모습을 보며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적당히 해.”이준혁이 차갑게 대꾸했다.평소에도 독하기로 소문난 송소미는 이준혁이 조금 전에도 윤혜인의 편을 들지 않았기에 이준혁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확신했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윤혜인의 뒷모습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다음에는 사람 불러서 저 여자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예요!”“송소미!”이준혁이 실눈을 살짝 뜬 채 송소미를 쳐다보았고 송소미는 그 눈빛에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딱 한 번만 얘기할게. 네 머릿속에 있는 꿍꿍이를 접어. 저 여자 건드리지 마.”송소미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기에 마음속에서 들끓던 복수심을 도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요…”이준혁이 싸늘한 표정으로 송소미를 힐끗 쳐다보다가 탕비실을 떠나면서 곁에 있던 주훈에게 명령을 내렸다.“앞으로 연관 없는 외부인은 회사에 들이지 못하게 해.”이준혁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송소미는 그의 뒤에서 계속 아부를 떨었다.“준혁 오빠 이렇게 큰 회사에 그런 명확한 규칙은 있어야 돼요.” 하지만 잠시뒤, 주훈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송소미 씨, 이만 나가주세요.”송소미는 그제야 그녀가 바로 그 연관 없는 외부인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단호하게 떠나는 이준혁을 쫓아가고 싶었지만 주훈이 부른 경호원에게 잡혀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송소미가 아무리 발악을 하고 발버둥을 쳐도 경호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한편, 자리로 돌아온 윤혜인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었고 차가운 이준혁의 얼굴이 생각나자 마음이 아팠다.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고, 회사를 나서려던 윤혜인 앞에
이준혁의 건장한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지다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윤혜인을 그대로 스쳐갔다.그녀를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윤혜인은 이준혁 품에 안겨 있던 여자의 얼굴을 정확하게 보았다. 그녀는 바로 얼마 전에 기사가 났던 임세희였다.윤혜인은 무거운 걸음으로 병원을 떠났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택시에 탄 윤혜인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고 목적지를 묻는 택시 기사의 말에 그녀는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스카이 별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거긴 이제 곧 그녀의 집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니까.한참 고민하던 윤혜인이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기사님, 청월 아파트로 가주세요.”청월 아파트는 윤혜인이 이준혁과 결혼하고 나서 구매한 집이었다. 그때 당시 그녀는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오기 위해 할부로 산 20평 남짓한 아파트였다. 집이 크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와 둘이서 살기에는 충분했다.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이준혁이 큰 별장을 하나 사주겠다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결정이 그녀가 지금까지 한 일들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아파트 단지에 도착한 윤혜인은 택시에서 내린 뒤, 바로 올라가지 않고 아파트 공원에 앉아 정신이 맑아질 수 있도록 잠시 바람을 쐬었다.지난 2년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달콤했던 순간도 있었고 서럽고 마음이 아팠던 때도 있었다.2년, 700일이 넘는 낮과 밤들, 그 마음이 아무리 얼음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이 시간이면 충분히 녹았을 텐데, 지금 그녀의 귓가에는 비웃음 소리만 들렸다.그 소리들은 그녀에게 이 모든 게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비웃고 있었다.어둠이 깃들고 나서야 윤혜인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문 앞에 기대고 서있는 이준혁을 발견했다.옷소매를 거둔 이준혁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서, 기다란 목과 섹시한 쇄골을 보일 듯 말 듯하게 드러냈다. 윤혜인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쯤 병원에서 임세희와 함께 하고
“안녕하세요.”달콤한 목소리의 여자가 병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육경한이 고개를 들어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여자는 육경한을 본 순간 눈빛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다가와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픽업트럭에 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모두를 대표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그녀는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자는 갈 생각도 없는 듯했다.구해준 사람이 이렇게 잘생겼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의 외모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음에도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가 돋보였다.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냉철한 대표님’ 같았다.날카로운 눈빛과 잘생긴 얼굴은 그녀 같은 평범한 여자들이 평생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제가 사과 깎아드릴까요?”여자가 먼저 제안했다.하지만 그녀가 사과를 집어 드는 순간, 육경한이 차갑게 말했다.“필요 없어요. 나가세요.”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여자는 순간 멈칫하며 사과를 손에 든 채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그러고는 이내 눈가가 붉어졌다.“저는 그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에요.”“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육경한은 냉담하게 대꾸했다.“나는 당신들을 구하려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이 말을 듣고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우리를 구하려 한 게 아니면 왜 목숨을 걸고 그런 위험한 싸움에 뛰어든 거지? 그토록 무모한 일을...’옆에서 육경한의 말을 듣고 있던 소종은 속이 답답해졌다.최근 구급차에서 찍힌 사진이 온라인에 퍼지며 언론은 육경한이 수많은 여성을 구한 영웅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그 덕분에 미우 그룹의 이미지는 하늘로 치솟았고 주식도 단기간에 급등했다.지금 병원 밖에는 그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이런 모습이 퍼지면 언론의 긍정적인 관심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하여 소종은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죄송합니다. 저희 대표님이 머리를 다쳐서 지금 조
의료진들이 내려와 먼저 소원을 들것에 눕히고 이어 남자도 들것에 옮겨 눕혔다.구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 소원의 마음속은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들것에 누운 채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닦여진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날카롭게 솟은 눈썹,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 얇고 날렵한 입술.그 얼굴은 다름 아닌 육경한이었다.순간, 소원의 목에서는 감사 인사가 걸려 나오지 않았다.‘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왜 하필 육경한이...’동시에 커다란 절망감이 온몸에 퍼졌다.‘웃기네. 내가 내 원수를 직접 구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어이없는 농담이냐고.’하늘은 정말 잔인하게도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남자 역시 소원이 자신을 알아보았음을 눈치챘다.그러나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소원을 향한 그의 검은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그는 소원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였고 이 상황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소원이 자신을 구하려 했을 때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알았다.그녀는 육경한을 철저히 낯선 사람으로 여겼고 그런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구급차 문이 닫히면서 두 사람의 시야는 차단되었다.소원은 현실이 너무 잔혹하다고 느꼈다.왜 육경한이 여기 있는지, 왜 그녀를 구하려 했는지, 왜 결국 자신이 육경한을 구해야 했는지.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며 결국 그녀는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잠에 들었다.육경한도 깊은 잠에 빠져 하루 밤낮을 지나서야 깨어났다.눈을 떴을 때, 그의 침대 곁에는 소종이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는게 보였다.“대표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소종은 울먹이며 말했다.육경한은 여전히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그러나 소종
남자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소원의 말을 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소원은 말했다.“우리에게 기회는 한 번뿐이에요. 반드시 호흡을 맞춰야 해요. 내가 그쪽 손을 잡고 하나, 둘, 셋 하면 그쪽은 그쪽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을 다해 저와 함께 나와야 해요.”남자는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협조하기를 꺼리는 듯했다.그 위험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만약 실패하면 두 사람 모두 죽을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지금 소원이 그냥 떠난다면 최소한 한 명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소원이 남자의 손을 잡으려 하자 남자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녀의 시도를 거부했다.그러자 소원이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요? 시간이 없어요!”뒷좌석은 여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차의 후미는 이미 골격만 남아 있었다.조금 전 절벽으로 떨어진 은색 미니밴은 검은 잔해로 변해버렸고 그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시간은 점점 다급해지고 있었다.남자가 끝내 협조하지 않자 소원은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제 손바닥에 하고 싶은 말 적어주세요.”남자는 소원의 말을 듣고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손바닥에 급히 글자를 적었다.“가.”그는 그녀에게 빨리 떠나라고, 도망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그러나 소원은 남자가 손을 빼려 하자 그의 손가락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날 믿어줘요. 우리는 반드시 함께 살아남을 거예요.”남자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지만 소원은 포기하지 않았다.“만약 그쪽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나도 여기 남아 있을게요. 5분도 안 걸려서 이 차는 절벽 아래로 떨어질 거예요. 함께 죽든지, 아니면 살아남든지 선택은 그쪽에게 달렸어요.”남자의 손가락이 갑자기 움찔했다.소원의 말이 그의 마음에 닿은 듯했다.마침내 그는 손을 돌려 소원의 손을 감싸 쥐었다.그것은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이었다.곧 소원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그럼 시작할게요.”손바닥과 등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어떤 여자들은 다리까지 심하게 다쳐 이미 상처가 곪아가고 있었다.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힘들게 나왔지만 현실은 그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다행히 아직 한국의 국경 안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다른 나라로 끌려갔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더 끔찍한 일이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고맙다는 말 필요 없어요. 빨리 가요!”소원은 이 말을 남기고 검은색 차량으로 혼자 달려갔다.몸에 상처가 있는 그녀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죽음과의 경주였다.단 한 걸음만 늦어도 차는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게 분명했다.겨우 차에 도달했을 때, 차 안이 짙은 연기로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다행히 차창이 조금 전 미니밴에서 발사된 총알로 인해 깨져 있었기에 연기가 일부 빠져나가고 있었다.만약 창문이 깨지지 않았다면 차가 추락하거나 폭발하기도 전에 차 안의 사람들이 연기에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차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운전석에는 한 남자가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얼굴이 옆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연기에 질식해 의식을 잃은 듯했다.소원은 조심스럽게 차 문을 당겼다.차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라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도 균형이 무너져 차가 추락할 수 있었다.자칫하면 그녀 자신도 함께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그러나 조금 전 이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해냈던 걸 떠올리며 소원은 자신도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녀는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짊어지고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그렇게 소원은 움직임을 최대한 부드럽게 하며 조금씩 차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마자 운전석의 남자가 의식을 잃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소원은 먼저 안전벨트를 풀기 위해 남자의 안전벨트 걸쇠를 손으로 더듬었다.그의 몸은 안전벨트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다행히 앞쪽에 충돌이 없어 에어백이 터지지 않았던 덕분에 상황은 상대적으로
은색 미니밴은 이제 주도권을 잡았고 더 이상 검은색 차량과 정면으로 맞붙지 않으려 했다.그들의 목표는 픽업트럭과 트럭에 타고 있는 사람들 전부였다.만약 그들이 구해진다면 자신들의 기지는 끝장날 게 뻔했다.은색 미니밴은 픽업트럭을 향해 추격하던 중, 다시 한번 총구를 들어 트럭을 조준했다.목표는 단 하나, 트럭을 전복시켜 절벽 아래로 추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소원은 뒤따라오는 차가 계속 자신들을 조준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손은 전보다 더 떨려 안정감을 잃었고 뒷좌석에서는 공포에 질린 듯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다들 다음 총알이 누구에게 향할지 몰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포 앞에서 아무도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소원은 뒤차에서 어떤 모션이 나올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필사적으로 차를 몰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멈추는 순간 위험은 더 커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은색 미니밴이 다시 픽업트럭을 조준하려는 순간, 검은색 차량이 갑자기 속도를 내어 커브 길에서 추월했다.그러고는 차체를 던져 승합차와 픽업트럭 사이에 끼어들며 총알을 막아냈다.하지만 이번 상황은 심각했다.총알을 막아낸 직후, 검은색 차량의 뒷좌석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더니 곧장 거센 불길로 번졌다.뒷좌석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차 안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미니밴 역시 이 광경에 놀라 멈칫했다.그러나 검은색 차량의 운전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불길이 치솟는 뒷좌석을 강제로 승합차에 밀어붙였다.결국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미니밴은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가 산 아래로 추락했다.곧이어 미니밴에서도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한편, 검은색 차량은 미니밴을 밀어붙인 여파로 인해 간신히 멈췄으나 뒷좌석은 절벽 밖으로 튀어 나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상태가 되었다.지금은 운전자가 움직이지 않아도 불길이 더 번지면 차체가 균형을 잃고 결국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게 뻔했다.SUV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
상대는 뛰어난 운전 실력으로 은색 미니밴을 압도하며 그를 몰아붙였다.검은색 SUV는 마치 밤의 사냥꾼처럼 두 개의 강렬한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자신의 먹잇감을 정확히 노렸다.은색 미니밴은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검은색 SUV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 같았고 그 틈을 타 소원은 잠시 숨을 고르며 다시 속도를 올렸다.소원이 검은색 SUV를 돕지 않은 것은 일부러가 아니었다.우선, 자신의 운전 실력이 명백히 검은색 SUV의 운전자에 미치지 못했고 괜히 멈췄다가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었다.게다가 소원은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닌 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을 짊어지고 있었다.이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소원은 반드시 그녀들을 넓은 도로까지 안전하게 데려가야 했다.검은색 SUV의 도움 덕분에 소원은 은색 미니밴과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하지만 백미러로 여전히 두 차량이 치열하게 맞붙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검은색 SUV가 교묘한 기술로 미니밴을 몰아붙였다면 은색 미니밴은 마치 물뱀처럼 교활하고 악랄한 움직임으로 대응했다.몇 차례나 검은색 SUV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려는 시도가 있었다.이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었다. 한쪽이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싸움이었다.상황이 매우 위태로웠지만 검은색 SUV의 운전자는 상당히 노련했고 미니밴의 계략을 여러 번 피하며 반격했다.오히려 미니밴을 바위로 몰아가 차체에 더 큰 손상을 입혔다.그 바람에 미니밴의 옆면에 있던 백미러가 부서지고 차체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검은색 SUV는 이를 계산이라도 한 듯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아 미니밴이 뒤에서 들이받도록 유도했다.그리고 곧이어 SUV는 날렵하게 방향을 틀며 다른 쪽 백미러도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게 만들었다.결국 은색 미니밴은 양쪽 백미러를 모두 잃었는데 이런 험난한 산길에서는 백미러가 없는 상태로 운전한다는 것은 눈 한쪽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검은색 S
소원은 마침 차 안에서 발견한 가위를 사용해 머리를 짧게 잘랐다.그리고 모자를 쓰고 얼굴에 흙을 조금 묻히니 얼핏 보면 그 남자와 닮아 보이기까지 했다.차에서 내리지 않기만 하면 충분히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후, 소원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열쇠를 꽂은 뒤 가속 페달을 밟아 시동을 걸었다.차량이 움직였지만 밖에 있는 경비원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졸음이 몰려오는 시간이라 동료가 돌아오지 않은 것조차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소원은 차량을 문 앞까지 몰고 가 남자의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경비원은 대충 한 번 보고는 손짓으로 통과를 허락했다.차량이 대문을 지나가는 순간, 소원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첫 번째 관문을 넘었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두 번째, 세 번째 관문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이 조직은 매우 교묘하게 여러 겹의 관문을 설계해 두었기에 혼자든, 둘이든, 무리로 도망치려고 해도 도보로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었다.첫 번째 관문조차도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뒤이은 두 번째 관문에서도 소원은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신분증을 보여주자 경비원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바로 통과시켰다.이 남자가 조직의 주요 인물들과 연관이 깊었는지 신분증만 보여주면 경비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열어줬다.생각해 보면 조직의 상층부와 관련이 없었다면 남자는 한밤중에 이런 곳까지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그 뒤로 검문하는 사람이 없었고 소원은 꿈에도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몰랐다.그러나 마지막 관문에서 문제가 발생했다.소원이 신분증을 보여주자 옆에 있던 경비원이 한 번 보고는 손짓으로 통과를 허락했다.그렇게 떠나려던 순간, 남자의 허리에 걸려 있던 무전기가 울리기 시작했다.무전기에서 무언가 급박한 말이 쏟아졌고 소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표정이 심각해지더니 경비원은 갑자기 사냥총을 들어 소원을 겨누며 말했다.“내려!”어설픈 한국어로 소원에게 명령한 것이다.소원
상대방은 소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녀의 손짓은 대략적으로 이해한 듯했다.그는 총으로 소원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고개를 한쪽으로 젖히고 말했다.“가!”그가 가리킨 곳은 나무 오두막이었다. 아마도 그곳에 가서 사실 확인을 해보겠다는 의미 같았다.소원의 심장이 곧 목을 뚫고 나올 듯 했다.나무 오두막 안에는 그 남자의 시체와 피로 물든 바닥뿐이었다.그곳으로 간다면 사실확인 같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상황을 보고 바로 총알이 자신의 머리를 뚫을 가능성이 컸다.마지못해 오두막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소원은 일부러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땅에 떨어뜨렸다.부드러운 흙바닥이라 소리는 나지 않았다.소원은 협조하는 척하며 이 감시자가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해 어색한 한국어로 차 안에 있던 소녀들에게 조용히 말했다.“열쇠, 땅에 있어요. 내가 이따가 잡을 테니까, 다들 도망쳐요. 뒤돌아보지 말고.”이 한마디는 거의 마지막 작별 인사와 다름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맨몸으로 총을 가진 사람과 맞서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소원이 생각하는 ‘붙잡는 방법’은 총을 빼앗아 이 경비원과 함께 죽는 길뿐이었다.결과가 좋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선택지가 없었다.소원에게 후회하냐고 물어본다면 그녀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할 것이다.열 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 말이다.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마음은 남아 있었다.유진이와 제대로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떠나야 한다니, 자신이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아프게 했다.‘유진아, 엄마를 용서해줘. 끝까지 널 되찾아 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소원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 발은 마치 수백 킬로그램의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무거웠다.경비원은 소원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총의 개머리판으로 그녀의 등을 툭툭 치며 성급하게 말했다.“빨리...”“쿵!”갑작스러운 소리에 경비원이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소
이 둘은 방심한 채로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문밖에 서 있는 두 경비는 달랐다. 그들은 진짜 총을 들고 있었다.만약 정면으로 뛰쳐나간다면 소원과 그녀의 일행은 접근도 못 하고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다.이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마당에 있는 픽업트럭이었다.소원은 조금 전에 처리한 경비원의 몸에서 열쇠를 빼냈다.모든 사람을 트럭 안에 숨겨 탈출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터무니없는 방법 같아 보이지만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유일한 선택이었다.산속으로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산속에는 이 지역 지형에 익숙한 경비원들이 있었고 소녀들은 안에서 물과 식량도 없이 있었기에 오래 버틸 수 없을 터였다.구조대가 오기 전에 발견되거나 굶어 죽을 가능성이 컸다.결국 이 계획은 소원이 깊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성공하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 실패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소원은 문밖에 서 있는 경비원 둘 중 한 명이 화장실로 가는 것을 보았다.큰일을 보러 간 듯했는데 이런 경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예의 따위를 따지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작은 일이었다면 어디서든 적당히 해결했을 것이었다.그들의 삶의 습성이 거의 야만인과 다름없었다.소원은 남은 경비원이 담배를 피우는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조용히 작은 초가집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바깥 문에 달린 자물쇠를 조용히 풀고 문을 열었다.안에서는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란 소녀들이 떨고 있었다.소원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조차도 그들은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소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랑 함께 나갈 사람 있어요?”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모두 얼어붙은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소원은 다시 한번 물었다.“저랑 함께 나갈 사람 있어요? 구조대를 기다리면 오래 걸릴 거예요. 그 전에 들킬 수도 있고 제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같이 나간다면 제가 목숨 걸고 여러분을 지킬게요. 완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