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흰 새가 육경한의 손안에 미동조차 없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소종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방민아 씨가 가장 아끼는 애완 새인데 이렇게 쉽게 죽여버리다니...’육경한은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놓인 하얀 새를 바라보았다. 새하얗게 빛나는 모습이 죽어서도 여전히 아름다웠다.‘안타깝네. 하지만 말을 듣지 않잖아. 그 여자랑 똑같이...’방민아가 오랫동안 길렀지만 아무리 잘해주고 아무리 조심해도 새는 결국 주인을 떠났다.말 안 듣는 새는 벌을 받아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육경한은 확신했다. 반드시 소원을 붙잡을 거라고.다만 어떻게 벌을 줄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소원이라는 여자는 정말 고집스러웠다. 전형적인,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도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새와 똑같이 말이다.때로는 그녀를 아예 부러뜨려 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육경한은 소종에게 차를 앞으로 몰라고 지시한 뒤, 작은 새의 사체를 정확히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다시 손에 넣게 된다면 절대 떠날 수 없게 만들거야. 죽는 순간까지도 내 손바닥에 벗어나지 못하게 할 거야...’...산기슭에 있는 한 작은 집.소원은 요즘 뜨개질을 배우고 있었다. 서현재에게 선물할 캐시미어 목도리를 뜨기 위해서였다.그녀는 신중히 고른 옅은 블루 컬러 실을 사용하고 있었다.이 색은 서현재에게 참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절제된 순수함에 남다른 매력을 더해주는 색이었다.마당에서 한참을 뜨개질하던 중, 까마귀 한 마리가 마당 벽에 앉아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소원은 불안감을 느끼며 소리를 내어 쫓으려 했지만 까마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울었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애처로워졌다.소원은 마음이 뒤숭숭해져 작은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돌에 맞은 까마귀는 그제야 날아갔지만 떠나기 전 검은 깃털 한 장을 떨어뜨렸다.그리고 그 깃털을 보며 소원의 마음속에서는 불안감이 더 커져갔다.마당을 서성이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좀처럼 차분해지지 않았다
소원이 웃으며 말했다.“여름에 더위 먹고 땀띠 나는 게 걱정되지는 않아?”그러자 서현재가 농담처럼 답했다.“그건 행복한 땀띠일 거예요.”뒤이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서현재가 자리를 뜨자 소원은 다시 매화떡을 내려놓고 목도리를 집어 들었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계속 더 빠르게 완성하고 싶었다.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함이 느껴졌고 서현재가 이 목도리를 사용할 날이 오지 않을까 봐 두려워서 말이다....방현수의 생일날.육경한은 방민아와 함께 파티에 참석했다.방현수는 과거 스캔들이 터졌을 때, 단호하게 방민아와 육경한의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사실 상류사회에서 조금 더 자유롭게 노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곤 했다.취미가 독특하거나 바깥의 여성을 스트레스 해소용으로만 여기는 남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집안의 아내는 절대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였다.방현수 본인도 젊었을 때는 육경한보다 더 방탕하게 놀았지만 방민아는 자신이 가장 사랑한 여자가 낳은 딸이기에 각별히 아꼈다. 그래서 스캔들이 터졌을 때 즉시 조사를 명령했다.조사 결과는 방현수를 충격에 빠뜨렸다.육경한이 얽힌 여자는 다름 아닌 이미 사라진 소씨 가문의 딸이었다.한때 소씨 가문의 몰락은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모두가 그 사건을 두려워했지만 방현수는 오히려 육경한의 수단과 결단력을 높이 평가했다.젊었을 때의 자신처럼 강력한 카리스마와 실행력을 지니고 있다 생각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소씨 가문이 이미 몰락했는데도 그 딸을 붙잡고 있는 것은 단순한 복수로 볼 수 없었다.복수에는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지만 육경한의 방식은 도저히 복수라고 하기 어려웠다.방현수는 경험자로서 단번에 알아차렸다.분명 그 여자에게 육경한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남자가 한 여자에게 이토록 집착하고 고집스러워질 때, 그 여자는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방현수는 육경한이 여자와 놀아나는 것은 허용할 수 있
이 말이 나오자마자 식탁의 분위기는 단번에 싸늘해졌다.다행히 방현수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지만 방민아의 약혼자인 육경한은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이런 민감한 질문에 답하는 상황 자체가 굉장히 난처한 일이었다.방민아는 날카롭게 오빠를 노려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들은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기에 별다른 형제애도 없었다. 게다가 방민아가 여자라는 이유로 방민기는 항상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다.술기운에 기분이 들뜬 방민기는 비웃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동생아,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 그냥 궁금해서 그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할 정도면 육 대표님은 꽤 잘 노시는 분 같던데 세 사람이 같이 한번 하는 건...”“오빠, 그만 좀 해!”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라 방민아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하지만 방민기는 그럴수록 더 말이 많아졌다.지난번 자신의 치부가 드러났을 때 느낀 분노와 억울함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사실 방민기도 여자 문제로 곤란을 겪은 적이 많았다.방현수도 그의 행동을 알고 있었지만 회사 내 규칙을 어기지 않는 한 눈감아주는 편이었다.그러나 이번에 손댄 여자가 하필이면 사촌 형수였고 그녀의 매혹적인 유혹을 이기지 못한 방민기는 선을 넘고 말았다.그 일로 방현수가 크게 화를 내며 그녀를 회사에서 다른 곳으로 발령냈고 방민기는 이에 대해 크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문제를 만든 건 결국 그 여자가 아니라 그 여자를 끌어들인 육경한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방민기는 노골적으로 말을 이어갔다.“육 대표님, 들리는 말로는 아직도 그 여자를 찾고 있다고 하던데요. 대체 뭐가 그렇게 좋았길래 잊지를 못하시는 겁니까?”이 말에 방민아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그 여자의 존재는 방민아에게 있어 가장 큰 상처이자 콤플렉스였다.이전에 방민아는 여러 차례 은근히 육경한에게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신호를 보냈다.두 사람은 약혼한 관계였으니 관계를 맺는 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지만 육경한은 끝내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
방민아는 방민기의 말에 담긴 비꼼을 바로 알아채고 얼굴빛이 급격히 창백해졌다.이 일이 다시 언급될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그녀는 그 영상 속 여자가 육경한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대학 시절부터 연애를 시작했지만 이후 큰 사건을 겪으면서 두 사람은 원수로 변했다.그러나 방민아가 예상치 못했던 것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얽히고설키면서도 그들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심지어 육경한이 그 여자에게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도 충격이었다.방민아는 그 영상을 여러 번 돌려봤다.누군가 방민아를 변태라 부를 수도 있고 병적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 육경한이 그런 순간에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었다.사실은 명확했다.육경한은 무엇을 하든 매력적이었다.그 과정이 거의 폭력적이었다 하더라도 육경한의 흐트러짐 없는 우아한 외모는 사람을 미칠 정도로 끌어당겼다.특히 마지막, 육경한이 모든 것을 쏟아내는 순간에 눈에 스친 그 만족감의 흔적은 방민아에게 깊은 충격을 남겼다.그런 표정은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순간, 방민아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육경한이 정말로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그 여자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방민아는 안심했다.그리고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제발 다시 돌아오지 마...’만약 돌아온다면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도련님, 저랑 민아 씨보다 본인 건강부터 챙기시는 게 좋겠습니다.”육경한의 차가운 말투에 방민기의 눈썹이 잔뜩 일그러졌다.“무슨 소리예요?”육경한은 태연하게 눈길을 들어 올려 말했다.“회장님은 손자를 보고 싶어 하시는데 도련님께서는 여자를 그렇게 많이 만나도 아직 아이가 하나도 없더군요. 혹시 건강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닌지...”순간 방민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는 과거에 성별을 가리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즐긴 탓에 약한 정자로 인해 아이를 갖기 어려운 상태였다.아무리 보호 장비 없이 관계
방현수는 방민아를 유독 아꼈다. 그녀가 그의 가장 잊지 못하는 여인,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와 똑 닮았기 때문이었다.그와 달리 방민기는 방현수에게서 사랑 같은 것을 받지 못했다.때문에 누구를 만나든 쉽게 사랑에 빠지고 금세 모두를 잊어버리는 사람이었다.“경한아, 화내지 마라. 이 녀석은 내가 너무 버릇없이 키웠어. 앞으로 네가 좀 챙겨줘야겠구나. 사업 쪽은 이 녀석이 너만큼은 못하잖아.”방현수는 나이가 들었고 집안 남자라곤 방민기뿐이라 그를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었다.육경한의 과거 행적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상업적 능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여자 문제만 아니면 육경한은 방민기보다 백 배, 천 배는 나은 사람이었다.게다가 이 계층의 남자들 중 여자 문제없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능력이 있는 한 그런 사소한 문제는 눈감아줄 수도 있었다.육경한과 혼인 관계로 묶이면 방민기를 어느 정도 돌봐줄 것이라고 방현수는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육경한은 원한은 반드시 갚는 사람이었다.지금껏 방민아와의 관계를 이간질하려 방민기가 벌였던 일들은 그저 우스운 장난 정도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그날 만찬이 끝날 무렵, 방민기의 한마디는 육경한의 분노를 넘어 살의를 불러일으켰다.“육 대표님께서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이해는 돼요. 몸은 깡마른데도 구석구석 꽉 차 있더라고요. 저도 처음 봤을 때 참기 힘들었으니까...”술에 취해 감정이 북받친 방민기는 일부러 육경한을 도발했다.육경한이 그 여자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기에 더 비열하게 말했다.“그 여자랑 찍힌 영상 말이에요. 저 그거 보고 나서 하면 매번 기운이 넘쳐요. 몸매며 곡선이며 진짜 약보다 더 기가 막히더라니까요? 덕분에 한동안 아주... 죽지 않고 단단하게...”육경한의 평온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매서운 살기가 그의 눈빛에 스치자 방민기는 본능적으로 한발 뒤로 물러났다.“뭘 그렇게 노려봐요? 난 겁 안 난다고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다행히 잘리는 건 피했지만 그 가위가 방민기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게다가 그의 집에 침입한 도둑은 컴퓨터와 핸드폰의 데이터를 전부 포맷해버렸다.복구가 아예 불가능한 방식으로 말이다.하여 컴퓨터와 핸드폰에 저장된 동영상들, 남의 것도, 본인의 것도 모조리 사라져버렸다.이걸 누가 했는지 방민기가 돼지처럼 멍청하더라도 알아챌 수 있었다.다음 날, 문란하게 노는 방민기의 영상이 서울 전역에 퍼져 누구나 하나씩 볼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그의 방탕한 행실로 인해 시원 그룹의 주가는 급락했고 그 결과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다.방민기가 방현수에게 이 일을 고자질했지만 방현수는 그를 전혀 감싸지 않았다.원래도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문에 불만이 많던 방현수였다.게다가 방민기가 육경한과 여성들이 찍힌 그런 영상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방현수는 자신의 미성숙한 아들이 정말 매부 육경한에게 관심이라도 있으면 조상님 앞에서 무슨 낯으로 얼굴을 들 수 있겠냐며 한숨을 쉬었다.결국 방민기가 고자질한 결과는 가택연금이었다. 그는 철저히 감시받으며 행동을 제한당했다.이에 방민기는 분노에 휩싸였다. 단순히 말 한마디 잘못했던 것뿐인데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말이다.억울하고 손해만 본 기분이었고 이 사건 이후 한동안 남자로서의 기능이 회복되지 않아 육경한에 대한 증오만 더 커져갔다....지하 주차장.육경한은 차 안에서 의자에 몸을 반쯤 기댄 채, 좌석을 끝까지 뒤로 젖혀 긴 다리를 곧게 뻗고 있었다.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기색과 함께 묘하게 매력적인 표정이 지어졌다.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에 육경한은 욕구도 강한 정상적인 남자였다. 매번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지만 말이다.차량 화면에는 소원이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간청하던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당시 그는 다른 남자를 위해 애원하는 소원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그녀에게 등을 돌리게 했다.그리고는 뒤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 유리창
방민기는 나름대로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패를 쉽게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하여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네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분은 제 매부잖아요. 서로 말다툼 좀 했을 뿐이지 결국 우린 한 식구입니다.”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조급해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조세진은 마치 의자에 바늘이라도 꽂힌 듯 벌떡 일어났다.“대표님, 육경한이 얼마나 야심 있는 사람인지 아십니까? 소씨 가문의 일을 기억하시죠?”‘소씨 가문이라면 그 여자네 집안 아니야?’이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소씨 가문은 과거에 육씨 가문과 얽힌 갈등이 있었고 육경한이 돌아오자마자 그 가문을 완전히 몰락시켰다.심지어 그는 소씨 가문의 재산을 빼앗고 그 집안의 딸을 곁에 두어 모욕하고 농락했다.그러니 소씨 가문의 딸이 육경한을 증오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재벌가 도련님으로 한평생을 산 터라 방민기는 그리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며 말했다.“소씨 가문의 일이 저랑 무슨 상관이죠? 제 매부가 야심이 있는 건 좋은 일 아닙니까?”조세진은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금수저인 줄 알았는데 언제 이렇게 교활해졌지? 이리저리 돌려 말하면서 결국 내가 직접 입을 열게 하다니... 육경한이랑 가까이 지내면서 그 교활함을 조금 배운 게 틀림없어.’하지만 조세진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방민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 같았다.방민기는 아무리 부족해도 아버지인 방현수가 든든히 지켜주지만 조세진은 이미 모든 걸 잃어버렸다.서울로 돌아가지 못하면 조세진의 인생은 끝난다. 그가 쌓아온 모든 기반과 인맥은 서울에 있으니 말이다.결국 조세진은 배수의 진을 치며 말했다.“육경한이 소씨 가문을 삼킨 것처럼 대표님은 그런 생각 안 해보셨나요? 대표님의 여동생과 결혼한 건 단순한 명분일 뿐이고 실제로는 시원 그룹을 삼키려는 의도일 수 있다는 걸요. 특히 이번에 육경한은 큰 손실을 봤잖아요. 유민 그룹의
방민기가 내쫓으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조세진은 더 이상 빙빙 돌리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대표님, 제가 보여드릴 게 좀 있습니다.”조세진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한 사진을 찾아 방민기 앞에 들이밀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육경한이 이 여자를 계속 찾고 있다 들었습니다. 근데 마침 제가 이 여자를 찾아냈습니다.”방민기는 사진 속 여자의 매혹적인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그녀는 누가 봐도 요염한 분위기를 풍기는 외모였다.남자라면 누구든 한 번쯤 탐낼 만한 모습이었고 그러니 육경한이 그렇게 집착하며 그 여자를 되찾으려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방민기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여유롭게 말했다.“이런 정보를 가지고 육 대표님을 찾아가셔야지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그 여자를 찾고 있는 건 제가 아니잖아요.”“저는 이미 육경한에게 크게 당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정보를 가지고 대표님께 먼저 온 겁니다. 제 진심을 보이려고요.”조세진은 아부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은 젊고 유능하시니 저보다 훨씬 현명하시죠. 이 정보를 어떻게 쓸지 대표님께서 결정해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앞으로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면 제가 대표님 곁에서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저는 언제나 대표님 편입니다.”조세진의 말은 방민기의 마음을 간질였다. 그의 자존심을 정확히 간파한 표현이었다.육경한과 비교된 이후로 방민기는 방현수에게 항상 하찮은 존재 취급을 받았다. 무엇을 하든 육경한에게 밀린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으니 말이다.게다가 육경한이 진심으로 자신을 돕는다면 모르겠지만 그는 너무도 가차 없었다.한마디의 말이 육경한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방민기는 다음 날 가위질 당할 뻔했고 코뼈가 부러질 정도로 얻어맞기까지 했다.이런 사람이 방민아와 결혼한다면 방민기 자신에게 아무 이득도 없고 오히려 해가 될 것이 뻔했다.그래서 방민기는 결심했다.‘미리 준비를 해야 해.’“그 말 진심입니까?”조세진은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기세로 고개를 끄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