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주는 너무나 괴로웠다. 한동안 업계를 쥐락펴락했던 그인데 이제 주변 사람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신세라니…. ‘여름이에게 꼭 잘 갚아줘야지… 내 딸이 더 이상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다음날.여름은 서경주의 검진을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됐지만, 권위 있는 병원이었다. 검사 결과는 바로 나왔다.의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서 회장님 혈액에 독소가 발견되었습니다.”“뭐라고요?!”서경주는 깜짝 놀랐다.“하지만… 3개월 전에 검사받았을 때는 정상이었는데요.”의사가 고개를 저었다.“이건 만성입니다. 최소 2년 동안 차츰차츰 쌓였을 겁니다. 평소 기침, 두통, 가슴 답답함 같은 증상 없었습니까?”“아!”서경주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병원에 물어본 적 있는데 검사 후에 의사가 아마 차 사고 후유증에 노환이 겹친 걸 거라고….”“왜 그렇게 진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수치는 너무 명확합니다. 조금만 늦었다면 1년 후엔 몸이 완전히 망가졌을 겁니다. “의사가 동정 어린 눈길로 서경주를 바라보았다. 재벌 세계의 냉혹함에 대해선 익히 들어왔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너무나 충격적이었다.서경주는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선생님, 그럼 그 해독은 가능한 건가요?”여름이 물었다.“가능하긴 하지만… 몸이 예전 같지는 않으실 겁니다. 빨리 치료받으시는 게 좋고요.”“감사합니다.”여름은 인사하고 나서 충격에 멍해진 서경주를 부축해 나왔다. 그리고는 하얗게 질린 서경주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분명 측근에 있던 사람이 음식에 탔을 거예요. 회사 아니면 집이었겠죠. 전에 상담했던 의사나 검진 담당자도 모두 매수된 걸 거예요.”“매번 유인이가 데려갔었다.”서경주가 허탈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꿈에도 생각 못했다. 어쨌든 20년을 키운 딸이야. 최고로 좋은 것만 주었지. 경재가 친아버지란 것도 모르는 줄로만 알았어. 그리고 위자영… 이혼 후에도 내가 수천억을 주었는데… 정말 무서운 모녀구나. 분명
서경주와 헤어지고 나서 여름은 또 전화를 받았다.“백지안이 떠났습니다.”여름이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 반이었다.“이렇게 늦게까지… 정말 대단하군요.”“맞습니다.”전화 저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저도 궁금하네요. 최하준이 만족을 못 시켜주는 거 아닌가….”그때 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멈췄다. 최하준과 김상혁이 들어왔다. 거부하기 힘든 성숙한 남성 호르몬을 온몸으로 발산하면서 말이다.이렇게 우연히 마주치게 되자 하준은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하준 뒤로 ‘비뇨기과’ 표지를 본 여름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정말 만족을 못 시켜주는 걸 지도… 일이 있어서 끊을게요.”하준은 여름의 입에서 ‘만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순간 얼굴이 굳었다. “뭘 봐? 난 김 실장 진료에 같이 와 준거야.”의문의 1패를 당한 김상혁은 울고 싶었다. “…….”다른 누명은 다 뒤집어써도 이런 오명만은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하준의 눈짓에 상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맞습니다… 제가 요즘 잘 안돼서….”“…….”‘비서 진료에 따라오는 상사도 있나? 그 말을 누가 믿는다고….’여름의 붉은 입술이 예쁘게 싱긋 올라갔다. “그런 건 내가 잘 치료하는데.”“당신이 치료한다고? 당신이 의사야?”하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꾸했다.“비아그라 드세요.”여름이 눈웃음치며 고개를 들었다.“풉!”김상혁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하준이 상혁을 무섭게 노려보자 상혁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먹어봤는데… 소용없습니다.”“아… 그래요?”여름이 의미심장하게 하준 쪽을 보았다.“왜 쳐다보는 거지? 난 안 먹어봤어.”하준은 여름을 엘리베이터 밖으로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었다.“누가 뭐라 그랬나?”여름은 초승달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웃었다. 하준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과거 여름의 얼룩덜룩했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여름은 어떤 남자라도 홀릴 수 있으리만치 매혹적이었다.전에도 자주 이렇게 웃었더라면… 자신도 그렇게 여름을
”됐어!”최하준은 매섭게 상혁을 노려보고는 성큼성큼 떠났다.비뇨기과 앞에서 전 부인과 마주치는 것보다 난처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젠장!’………병원을 떠난 여름은 곧장 차를 몰아 화신으로 갔다.떠난 지 3년, 데스크 직원도 벌써 두 번이나 바뀌었다.여름이 들어가려는데 데스크에서 바로 붙들었다.“누구시죠? 약속하셨나요?”“아니요.”여름이 선글라스를 벗고 탄성이 나오도록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냈다.“하지만, 대표님 좀 만나야겠는데요.”데스크에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비웃듯이 말했다.“약속도 없이 대표님은 못 만나세요.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죠. 시아 같은 슈퍼스타도 아니고….”“시아?”강여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우리 회사 새 모델이잖아요. 얼른 돌아가세요.”직원은 짜증 내며 말했다.여름의 입가에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그럼 지금 대표는 누구죠?”“아니 대표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만난다고요? 백, 지, 안. 백 대표님시잖아요. 최하준 회장님 약혼자요. 곧 취임하실 거예요.”여름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보이지 않는 위엄을 느끼자, 안내 직원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이때, 등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강… 강 대표님?”여름이 몸을 돌렸다. 남자는 40세쯤으로 수염이 덥수룩하고 머리는 살짝 긴 편이었으며 초췌해 보였다.“엄 사무장? 왜 이렇게… 늙어버린 거예요?”여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정말 대표님이시네요.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가 진짜였어요. 돌아가신 게 아니었어요!”감정에 북받쳐 여름을 바라보는 엄기숙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네, 안 죽었어요.”여름은 그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대표 비서까지 맡으셨던 분이 어째서 창고 관리자가 되신 거죠?”엄기숙이 서럽게 말했다.“대표님, 3년 전 대표님 돌아가셨다는 소식 이후에 회사는 최 회장에게 넘어갔답니다. 법률상 배우자였으니까요. 전 이사장 구진철 무리가 최 회장을 믿고 날뛰었고
‘난 아무리 열심히 피부관리를 받아도 벌써 눈 밑에 잔주름이 생기기 시작하는데….’왜 하준이 여름에게 그렇게 푹 빠졌었는지 알 것 같았다.대체 어디를 다녀왔길래 얼굴이 그렇게 말끔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다 나았으면 뭐? 준은 이미 완전히 내 손아귀에 있는데… 저깟 게 뭐라고.’백지안은 입꼬리를 한껏 올린 채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강여름을 보지 못한 것처럼 꼿꼿하게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백지안, 어디 가? 여긴 내 회사 같은데?” 여름은 갑자기 백지안의 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여름이 이렇게 이미지 신경 안 쓰고 덤벼들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백지안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악’하고 소리질렀다.“뭐 하는 거야?!”곁에 있던 보디가드가 재빨리 여름을 제지했다.“어머, 고의는 아니었어요. 살짝 당겼다고 이렇게 넘어질 줄은 몰랐네요.”강여름이 뒤로 물러났다. 손을 놓자, 손에는 머리카락이 한 움큼 잡혀 있었다.“머리숱 많다고 부러워했더니… 다 붙인 거였어?”“강여름, 일부러 그런 거 다 알아. 민 실장. 얼른 잡아!”백지안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우아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머리숱이 적고 짧은 게 콤플렉스라 일부러 제일 유명한 헤어샵을 찾아가 시술받은 붙임머리인데 전부 떨어져 나가고 나니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왜 날 잡는 거야, 내가 무슨 범법 행위라도 했어?”여름이 몇 차례 민정화와 실랑이를 벌이더니 잠시 후 민정화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이 광경을 본 백지안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하준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붙여준 사람이었다. 그동안 여름은 무술까지 배워온 것이다. 이건 제법 골치 아픈 문제였다.“지룡파 사람인가?”여름이 잽싸게 일어나는 민정화를 보며 물었다.“차윤 알아?”“흥.”민정화는 이를 갈며 짜증 나는 듯 대답했다.“진작에 회장님께서 다른 곳으로 발령내셨어. 안 돌아온 지 몇 년 됐지.”여름은 어이가 없었다. 보아하니 이 민정화란 사람 역시 최하준이 파견한 사람이 분명했다. 예전
“어머, 늘 너무 기품있고 온화해서 내 롤모델이었는데….”“쉿, 조용히 말해. 그래도 대표인데 잘리면 어쩌려고.”“…….”백지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공개적으로 최하준의 여자 친구가 된 이래,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받들고 여신이라 칭송해왔는데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될 줄은….“강여름 씨, 한 마디만 더하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습니다.”“그러시던가, 나도 오늘은 그냥 내 회사 둘러보러 온 거니까요. 내일은 주주들을 모두 소집해 주주총회를 열 겁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연락해야지.”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검지 손가락이 백지안을 가리켰다.“당신은 첫 번째 해임 대상입니다.”백지안은 우습다는 듯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진짜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아시나 본데? 지금 화신은 이미 3년 전 화신이 아니라고. 흥, 열심히 연락해 보시지. 누가 나오나. 날 해임하시겠다고? 꿈 깨시지!”“그럼, 기대하세요.”강여름은 돌아서더니 엄 실장의 명찰을 ‘홱’ 떼어냈다.“창고관리원이 뭐예요? 나랑 가요.”“예.”엄 실장은 기꺼이 따라나섰다.하지만, 입구를 나서려는데 불안감이 엄습했다. “대표님,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듣고 화내지 마세요….”“최하준이 백지안을 아끼니 내가 승산이 없다고요?”여름이 웃으며 살짝 눈을 흘겼다.엄 실장은 당황하며 비위를 맞췄다.“대표님, 진짜 대단하시네요. 그걸 단번에 알아채시다니.”“괜찮아요. 난 이미 최하준이란 사람한테 미련 없어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게 대수인가요? 내가 살아있는 한 화신의 최대 주주는 나예요. 그 사람이라고 법을 이길 수 있겠어요?”여름은 시종 담담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엄 실장은 자신이 이 사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회사에 온 백지안이 비서 민정화에게 눈짓을 보내자 민정화는 바로 최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회장님, 방금 강여름 씨가 화신에 왔었습니다. 오자마자… 백 대표님 머리채를 휘어잡아서 머리카락이 끊어지고 두피도 다치셨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 지금 이 전화 몰래 드리는 겁니다. 백 대표님이 절대 말하지 말라고 그랬거든요.”청아가 속삭이다시피 조용히 말했다.“내내 3년 전 일로 미안해하시더라고요. 강여름이란 사람 정말 대단하다면서.”“걔가 너무 착해서 그러지.”하준의 말투에서 마음 아픈 것이 느껴졌다. 3년 전 백지안이 자신에게 여름에게 우울증이 있다고 속인 것은 아닌가 의심했던 것이 갑자기 미안하게 느껴졌다.“하지만 대표님은 강여름 씨를 만나고 나서부터 좀 정신이 나간 것 같습니다. 강여름 씨가 자기가 돌아왔으니 이제 백지안 씨와 최하준 씨는 부부가 아니라며 백지안 씨에게 내연녀라고 큰소리치더라고요.”“그 일은 내가 나중에 지안이랑 얘기하지.”하준은 여름의 후안무치함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전화를 끊고 나서 청아가 백지안을 돌아보았다.“잘했어.”백지안이 청아의 손을 잡더니 씁슬하게 말을 이었다.“이렇게 도와줘서 고마워.”“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때 제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대표님께서 덮어주지 않았으면 전 진작에 쫓겨나서 오늘날 이런 자리에 있지 못했을걸요.”청아가 연신 감사해했다.“전 차윤 같은 바보가 아닙니다. 잠깐 강여름을 따라다녔다고 그런 사람을 동정하다니. 강여름은 불륜녀잖아요? 백지안 씨랑 회장님의 사랑에 그런 불순한 여자가 끼어들면 안 되죠. 그건 대표님께 너무 불공평해요.”“그런 소리 마. 다 내가… 그때 사고만 나지 않았어도….”백지안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강여름이 저렇게 준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면 난 평생 최하준과 결혼을 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그런 말씀 마세요. 꼭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물심양면으로 도와드릴게요.”청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백지안이 끄덕였다. 이때 휴대 전화가 울렸다. 하준이 전 전화였다.백지안은 얼른 코를 문질렀다. 목소리에서 충분한 콧소리가 나게 한 다음에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준….”“목소리가 왜 그래?”하준은 즉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엄 실장이 돌아가자 여름은 곧 영상 통화를 켜서 귀여운 두 아이와 통화를 시작했다.“엄마, 보고 치퍼.”여울의 만두처럼 동그란 얼굴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입가에는 초콜릿이 묻어 있었다. 여름은 순간 울컥했다.“강여울, 또 윤서 이모 꼬셔서 초콜릿 사달라고 했어요?”여울은 눈을 깜짝였다.“아니요. 안 그랬는데요?”아무 말 없이 꼬맹이의 연극을 바라보다가 여름이 말을 이었다.“지금 강여울 입가에 초콜릿 다 보이거든.”여울은 깜짝 놀라더니 할짝할짝 알뜰하게 초콜릿을 싹 핥아 먹거니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내가 먹은 거 아니야. 이모가 초코 먹고 나한테 뽀뽀한 고예요.”“……”여름은 이마를 짚었다.‘어쩌다가 이렇게 거짓말이나 하는 먹깨비를 낳았어 그래.’“그런 어리석은 거짓말로 엄마를 속이면 엄마가 믿을 것 같아?”“흥! 엄마양 안 놀아!”여울은 흥 하더니 삐친 척하며 몸을 돌렸다.옆에서 하늘이 한숨을 쉬었다.“엄마, 우리나라 가니까 죠아요? 나쁜 사람이가 엄마 괴롭히지 않아쪄? 혼자서 다 잘할 수 이써요? 내가 가서 도와주까?”“……”여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들의 어른스러운 말투는 대체 누굴 닮은 건지 알 수 없었다.이때 밖에서 누군가 발로 문을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우리 둥이들, 엄마가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네 사랑해.”여름은 영상통화를 끊고 현관으로 나갔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하준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얼굴에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눈은 사뭇 흉악스러웠다.“강여름! 감히 지안이를 찾아가? 죽고 싶어?”하준의 손이 거침없이 여름의 양 팔을 와락 잡았다.그러나 이제 여름은 예전의 여름이 아니었다. 하준의 손이 닿기도 전에 유연하게 쓱 몸을 뺐다.하준이 여름의 동작을 보더니 비웃었다.“보아하니 민정화 말이 맞군. 그간 어디 나가서 호신술이라도 배운 모양이지? 하지만 그걸로 민정화는 상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별것도 아니야.”“그건 알아. 하지만 내가 내 몸을 지키겠다는데 문제없잖아?”여름이 작은
말을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몇 년 동안 스스로를 잘 억제할 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순간만큼은 아무래도 마음대로 통제가 잘 안됐다.화가 치밀어서 찾아왔던 하준도 이때는 여름의 기세에 조금 밀리고 말았다.“그걸 당신 엄마가 남겨준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여름은 웃었다.“그래, 당신은 모르겠지.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예전에는 분명 다 알던 것이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하준이었다.그러나 여름은 하준이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사람이 기억을 잃을 수는 있어도 여자 하나 때문에 남의 것을 진흙탕에 마구 집어 던지면 안 되지.’“그렇다고 지안이에게 함부로 손대면 안 되지.”하준이 불만스럽게 뱉었다.“누가 죽은 척하랬나? 그래도 지안이가 화신을 얼마나 열심히 관리했는데. 실적도 상당히 올려놨다고.”“그 큰 화신에 인재가 없었을까? 이전에도 오 사장이 관리 잘하고 있었거든. 백지안 같은 게 없어도 잘 굴러가던 회사였어. 백지안은 의학 전공이지 경영 전공도 아니잖아? 회사를 경영하고 싶었으면 영하나 경영할 것이지 왜 화신에 와서 난리야?”여름이 가식적인 웃음을 띠고 말했다.“그 인간은 그냥 내 것이 빼앗아 가고 싶었던 거야. 왜? 와서 우리 아버지도 빼앗아 가라고 그래. 벨레스도 빼앗아 가고!”“됐어. 지안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최하준이 이제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는 듯 말을 끊었다.“애초에 부동산 투자 쪽에 관심 있어 하는데 내가 가진 부동산 회사가 없어서 화신을 넘겨준 거야.”“아~ 그러면 이제 내가 당신들이 내 화신을 키워줘서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는 건가?”여름이 갑자기 입꼬리를 올렸다.“뭐, 공로상이라도 드려야 하나?”“난 당신 그 비꼬는 말투가 제일 마음에 안 들어.”최하준이 굳이 혐오를 감출 생각도 없는 듯 말했다.“그래. 내 이런 꼴이 보기 싫으면 하루빨리 화신을 내게 돌려주면 되겠네. 당신 그 백지안 빨리 내보내고. 내일은 내가 화신으로 돌아가서 정리 좀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