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하준이 막 병원에 도착해 보니 최란은 이미 응급처치가 끝난 상태였다. 서로 앙숙 같던 여름과 최민 두 사람이 싸우지도 않고 사이 좋게 병실에 앉아 있었다.하준이 들어오자 최민이 다급히 물었다.“추동현은 잡았니?”“네.”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추신의 관련자도 모두 경찰에 잡혔습니다. 이번에 추동현의 납치건 뿐 아니라 그간 경쟁상대를 해쳐왔던 짓들이며 FTT의 신제품 데이터를 훔쳐낸 일이 모두 수면에 드러날 겁니다.”“너무 잘됐구나.”최민이 흥분했다.“훔쳐갔던 데이터는 랜들 쪽에서 되찾아올 수 있는 거니?”“그건 어렵습니다. 추신에서 랜들에 자기네 자료라고 했기 때문에 기껏해야 판매 중지 조치 정도를 얻어낼 수 있을 겁니다. 법적으로는 제재를 할 수 없다지만 이미 그 정도로도 큰 타격일 테고, 국제 사회에서 명성도 떨어져 재기하기 어려울 겁니다.”하준이 설명했다.최민이 끄덕였다.“아마도…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얘, 이번에 정말… 너무 잘해주었다. 솔직히 FTT가 그 지경이 되어서 나랑 네 삼촌은 다시는 FTT가 재기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사실 저도 연애하느라고 바빠서 회사 일은 거의 어머니께서 힘써주셨습니다.”하준이 병상에 누운 최란을 돌아보았다.최민은 깜짝 놀라더니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았다.전에는 그렇게 말 한 마디를 해도 신랄하게 하던 최민이었지만 집안에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스스로를 내정하게 되돌아보게 되었다.“하준아, 네 어머니가….”밖에서 최진이 뛰어들어오더니 산소호흡기를 꽂고 있는 최란을 보더니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추동현은 체포되었습니다. 추성의가 전에 윤형이를 해쳤던 일에 대한 복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하준이 최진을 보며 말을 이었다.“내내 저희 어머니를 원망하신 거 압니다. 어머니께서 애초에 추동현과 결혼해서 늑대를 끌어들인 게 아니라면 윤형이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시죠? 어머니께서 이번에 추동현을 잡아 넣을 증거를
최진은 눈이 충혈된 하준과 한 켠에 서서 아무 말이 없는 여름을 보더니 말했다.“여름이 데리고 가서 좀 쉬어라. 밤새 둘 다 고생했을 텐데 여기는 이제 나랑 이모에게 맡기고. 우리도 가족을 위해서 뭔가는 해야지.”하준은 살짝 망설였지만 여름은 이미 하준의 손을 잡아 끌어 당기고 있었다.“가자. 가서 좀 쉬고 오후에 다시 오면 되지.”“그래,”기왕 여름이 그렇게 말을 하니 하준도 여름과 함께 가기로 했다.“어머님은 오후나 저녁은 되어야 깨어나실 테니 여기 있어 봐야 소용 없어. 가서 좀 쉬어가 다른 일을 처리할 힘도 생기지.”여름이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하준은 큰 손으로 여름의 손을 꼭 쥐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안타깝게도, 양하는 이런 걸 하나도 못 보고 갔네.”짧은 한 마디였지만 여름은 어쩐지 씁쓸했다.최양하가 아니었다면 여름과 쌍둥이는 지금 살아 있지도 못했을 터였다.“추동현은 사형을 받을 거야.”한참 만에야 여름이 입을 열었다.“그 자가 저지른 짓을 보면 사형을 받고도 남지. 대체 나쁜 짓을 얼마나 더 많이 저질렀는지도 모르잖아.”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양유진이 추동현을 위해서 일을 했으니 적잖이 범법을 저질렀을 거야. 일부러 추동현의 아들을 들먹이며 협박을 해 놓았으니 분명 양유진을 우리에게 내놓을 테지.”여름의 눈이 반짝 빛났다.“양유진이 체포되면 민관이의 복수도 되는 셈이야. 나는 바로 이혼할 수 있고.”“그럼. 지금의 양유진은 추신이라는 배를 잡아탔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이제 추신이 무너졌으니 양유진의 좋은 날도 거이 끝난 거지.”하준이 여름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으며 웃었다.“강여경 쪽을 걱정했었지? 내가 곧 이전의 지위를 되찾으면 자기는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이제부터는 내가 지켜줄게.”“당신이 예전의 지위를 찾고 나면 다시 꿀 빨려는 것들이 몰려들지 어떻게 알아? 당신 손에 아무것도 안 남았을 때도 들러붙는 맹지연 같은 애가 있었는데. 다시 제2의 백지안 같은 인간이 나타날지도 모
하준의 동공이 화르륵하더니 입꼬리가 승천하더니 일부러 앞 단추를 풀어 쇄골을 드러냈다.“자, 집에 가서 날 당신에게 줄게.”“아, 몰라!”여름은 귀까지 빨개져서 하준을 흘겨보더니 하준의 가슴을 밀어냈다.“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아.”하준이 후다닥 따라가서 여름의 손을 잡았다.본가로 돌아가자 여울과 하늘이 바로 달려왔다.“어제 밤에 우리만 빼놓고 엄마 아빠만 어디 갔다 왔어요? 흥! 또 둘이서만 데이트했지?”“그런 게 아니야. 어젯밤에 할머니가 다치셔서 병원에서 간호하다가 왔어.”여름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명했다.“뭐라고? 할머니가 다쳤다고? 나도 할머니 보러 병원 갈래.”여울이 흥분해서 외치더니 마구 뛰쳐나갔다.“할머니가 왜 다치셨어요?”하늘은 역시 여울이보다는 침착했다.“나쁜 사람이 내내 아빠 회사를 곤란하게 했는데 어젯밤에 잡혔거든.”하준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부드럽게 설명했다.“오후에는 우리 둥이들 아빠랑 같이 할머니께 가보자. 며칠 지나면 둥이는 유치원도 갈 수 있을 거야.”“정말요?”하늘이와 여울이는 너무나 기뻤다. 매일 별장에서만 지내느라고 답답했던 것이다.“그럼, 정말이지. 일단 아빠 좀 쉬시게 해드리자. 어젯밤에 한 숨도 못 잤거든.”여름이 다정하게 아이들에게 말했다.“그럼 아빠는 얼른 쉬세요.”하늘이 공손하게 말했다.“엄마도 피곤하겠네요.”“가서 같이 한숨 자자.”하준이 여름의 허리를 안았다.여름은 아이들 앞에서 하준이 너무 애정 표현에 거침 없어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이 달아올랐다.그러나 하준은 여름이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고 그대로 침실로 끌고 들어갔다.“백주 대낮에 같이 자면 좀 그렇지.”여름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뭐가 좀 그래?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그러는 거야?”하준이 일부러 사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난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고. 힘이 하나도 없으니까.”“아우, 정말. 변태라니까!”여름이 하준의 허리를 확 꼬집었다.그러나 그렇게 힘을 꽉 준 게 아니라서
하늘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거짓말. 엄마 아빠가 같이 자면 새 아기가 생기는 거랬어요.”“아기를 가지고 싶어?”여울이 당황해서 묻더니 곧 눈가가 빨개졌다.“나하고 하늘이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 새 아기는 싫어!”여름과 하준은 난처했다.“하늘이 잘 들어 봐. 아빠하고 엄마는 그냥 잠만 잔 거야.”간신히 해명하는 하준의 입가가 경련을 일으켰다.“너희 둘만으로도 충분히 방해되는데 훼방꾼을 또 만들 생각은 나도 없다고.”“우리가 왜 훼방꾼이야?”여울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우리가 너무 나부대서 귀찮다는 거야.”하늘이 말했다.“그래서 엄마 아빠가 둘이만 있는 걸 방해한다는 거지.”“너무 해!”여울이 분노했다.“우리는 아빠가 엄마를 뺏어 가도 용서해 줬는데, 인제 비켜, 비켜!”꼬맹이가 기어올라 두 사람 사이를 파고 들어 여름의 품에 들어갔다.“인제 실컷 잤잖아? 우리 언제 할머니 보러 가요?”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3시였다.“지금 가자.”******출발하려고 준비하는데 경찰에서 하준에게 전화를 했다. “추동현이 뭔가 새로운 죄를 자백한 모양이야. 경찰에서 한번 와달라는데. 당신이랑 아이들은 먼저 가. 내가 김 실장에게 데려다 주라고 할게.”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서에 도착하자 사건 담담 형사가 하준에게 추동현의 자술서를 보여주었다.하준은 자술서를 보고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추동현이 저지른 죄상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추동현은 하준이 정말 자기 아이를 다치게 할까 봐 죄상을 낱낱이 밝혔던 것이다. “이제 추동현의 주변에 공범이 없었는지에 대해 심문을 좀 해주십시오.”하준이 말했다.“네, 그래야지요. 하지만 새벽에 체포할 때 부상을 심하게 입어서 지금은 심문을 견딜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며칠 쉬었다가 심문을 이어갈 생각입니다.”“고맙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하준은 자술서 사본을 받아 경찰서를 나왔다.차를 몰고 병원으로 가기는 했지만 최란의 병실 바로 가지 않고 이주혁이 사무실로 먼저 갔다
그 일은 여름이 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어느 정도는 믿을 만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 사실을 거부하고 있었다.일단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자신이 직접 백소영을 감옥으로 보내 형을 살게 만들었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뜻이었다.차라리 백소영이 살인을 저지른 악녀고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라고, 자기가 저지른 죄값을 받아 죽은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그러나 지금 사건의 주모자가 자신이 저지른 짓이라고 자백한 것이다.‘크흡, 틀렸어. 완전히 잘못 생각했어.”“추동현이 왜 백소영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지? 그 둘은 아무 관계도 아니잖아?”한참 만에 이주혁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소영이는… 희생양이었던 거야.”하준이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그때 백소영이랑 여름이, 윤서 씨가 가까이 지냈으니까. 우리는 백지안이랑 친해서 백소영을 아주 싫어했잖아. 그런 상황에서 백소영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면 우리와 여름이 사이에 갈등이 벌어질 수 있었지.”“여름이는 소영이가 무고하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우리는 여름이가 소영이를 일방적으로 감싼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결국은 나와 여름이 사이는 그때부터 악화하기 시작했잖아. 심지어 너도 여름이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생겼고, 강여경은 나에게 약까지 써서 내 병세는 점점 저 심해졌지.”“추동현의 수법은 정말이지 너무 악랄하군.이주혁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 동공 깊은 곳이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웠다.이주혁은 자기 자신도 꽤나 매서운 인간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지만 무고한 사람을 모함해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그래. 그때 내가 여름이를 조금 더 믿었으면 좋았을걸. 여름이가 당시 우리가 지다빈이라고 알고 있던 강겨경과 강태환의 친자확인 검사과 친자로 확인되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내가 믿지 않았거든.”그렇게 말하면서 하준이 자조적으로 웃었다.“백소영이 그렇게 되면서 간접적으로 백소영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돌아가시게 되었고 결국 그 집안 식구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서 이제는 속죄하고 싶어도 방법
이주혁이 팔을 휘둘러 테이블의 커피잔이 바닥으로 떨어졌ㄷ.그렇게 해야 마음 속의 답답함이 좀 풀릴 것만 같았다.******하준은 최란이 병실로 향했다.최란은 깨어났지만 이상하리만치 가만히 있었다.“마침 잘 왔다. 내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언니가 어쩐 일인 지 한 마디도 안 하는구나. 아무리 봐도 언니 같지 않아.”최민이 다가와서 소곤소곤했다.“설마 추동현에게 잡혔을 때 차라리 그대로…”“그런 거 아닙니다.”하준이 말을 끊었다. 병실에 있는 사람들을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양하가 추동현의 아들이 아니라 나랑 친형제라는 사실을 알게 돼서 그러실 거예요.”“뭐라고?”최민과 최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양하가 추동현이 아들이 아니라니?”여름도 미간을 찌푸리고 최란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 사실을 여름과 하준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최란에게 너무 충격이 될까 봐 알리지 않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추동현이 직접 말한 듯했다.“걔가 추동현의 아들이 아니래.”마침내 최란이 입을 열었다. 잔뜩 눌린 목소리에 비애가 느껴졌다.“내가 내내 잘못 알고 있었던 거야.”“아니, 어떻게 그런 걸 착각할 수가 있냐?”최진이 깊이 한숨을 쉬었다.“엄마라는 사람이 애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단 말이야?”그런 소리를 들어도 최란은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었다.“내내 내가 엄마로서 실패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난 애초에 엄마가 될 자격이 없었던 거야. 20여 년 전에 이미 남자 하나에 완전히 당했던 거지.”최란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울먹이더니 하준에게 말했다.“하준아, 정말 면목이 없구나. 양하에게도 너무나 미안하고. 추동현이 양하의 목숨을 빼앗았다니 난 정말 너무나 엄마로서 실격이야. 내가 어리석어서 양하가 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만들었어. “그러면서 손수건을 대고 엉엉 울었다.최란은 강한 사람이라 추동현이 그렇게 가버렸을 때도 울지 않았었다.다들 순식간이 할 말을 잃고 말았다.“그게
“이게… 어디서 났니?”최민이 얼른 가져가서 열어보더니 얼어붙었다. 위에 쓰인 이름이 여울이와 하늘이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우리 FTT가 위기였을 때 산장을 팔았는데… 그때 아버지께서 몰래 낙찰을 받아 두셨던 거예요. 우리 집이 위기를 넘기고 나면 다시 저에게 돌려주려고 하셨답니다. 나중에 손주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여울이와 하늘이에게 주기로 하셨습니다.”하준이 말을 이었다.“일이 끝났으니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제 다시 산장으로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원래 살던 곳에서 사시는 게 좋겠죠. 고모랑 삼촌도 다시 원하시면 다시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집도 넓은데 삼촌과 고모도 다 함께 하시면 어르신들도 좋으시겠죠.”“네 아버지 시간 좋으실 때 같이 식사라도 한 끼 같이 하자꾸나.”최진이 적극적으로 말했다.“감사 인사는 해야지. 이번에 그 양반이 우리를 너무 많이 도와주셨구나.”“아마도 아버지는 저희 식구와 그렇게 만나고 싶어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잠시 입을 꾹 다무록 있던 하준이 말했다.“추동현이 협박해서 우리나라를 떠난 데다 나중에는 외국까지 킬러를 보내 쫓았고 그 바람에 할머니는 목숨까지 잃으셨습니다. 그 때문에 저희 집에 원망하는 마음이 더 강한 편입니다. 애초에 저희집에 데릴 사위로 들어오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하시거든요.”최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최란은 이불을 꼭 움켜쥐었다. 씁쓸한 말이었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자기라도 그런 마음이 들 것 같았다.저녁이 되자 여름과 하준은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을 나왔다.차에 타자 여름이 가볍게 물었다“아까 경찰서 다녀왔잖아? 추동현이 뭔가 또 새로운 죄상이 나온 게 있대?”“아, 응.”하준의 눈이 반짝하더니 얼른 정면을 주시하며 답했다.“벨레스와 관련된 게 조금 있었어. 벨레스와 추신이 공동으로 투자회사를 설립했었잖아? 추신 쪽에서 계속 이중장부를 쓰고 주가를 조작했다고 하더라고. 투자사의 자금은 이미 동결되었지만 벨레스는 이중 장부나 주가 조작이랑은 관련이 없어서
통화가 끝나가 하준이 돌아보았다.“난 회사로 돌아가 봐야 해. 오늘 밤에는 야근할 테니까, 당신은 내일 애들 데리고 예전 별장으로 들어가 있어. 거긴 크니까 애들 놀기도 좋을 거야.”“좋아, 좋아! 아빠, 나 가서 말 타고 돼요?”여울이가 신나서 하늘이에게 말했다.“있지, 거기 산장이 얼마나 큰지 알아? 놀이터도 있고, 승마장, 개울, 아, 과일도 되게 많아. 진짜 재밌어.”하늘이는 하준의 본가였던 산장을 가본 적이 없지만 여울이가 하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당신 가족이 들어가는 거야 상관 없겠지만 난… 아직 양유진하고 이혼도 안 했는데.”여름은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따지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준과 붙어 있는 것이 역시 편안하지만은 않았다.“걱정하지 마. 추동현 사건은 분명 양유진에게까지 뻗칠 거라고.”하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이혼은 이제 시간 문제야.”“그래.”여름이 끄덕였다.지금 하준의 파워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여름도 굳게 믿었다.하준과 헤어지고 나서 여름은 아이들을 데리고 하준의 본가로 돌아갔다. 그때 육민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누님, 저랑 우형이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어떻게 된 거야?”여름은 깜짝 놀랐다.“무슨 일이 생겼어?”며칠 동안 여러 가지 큰 사건이 빵빵 터지면서 여름은 자기가 민관과 우형을 동성 교도소 앞에 보내놨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오늘이 강태환 내외가 출소하는 날이었다.“저녁에 강태환 부부가 풀려나서 번호판이 없는 고급 차량이 두 사람을 데려 가더라고요. 저는 누님이 시키신 대로 우형이랑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미행하고 있었는데 30분쯤 따라가다 보니 우형이가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인근을 한참 뒤지고 나서야 피투성이가 된 채로 골목에 버려진 우형이를 발견했습니다. 우형이를 구하려고 갔다가 저도 잠복하고 있던 놈들에게 당해서 좀 다쳤습니다. 다행히 제가 우형이를 데리고 인파가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