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 백주대낮에 외국인이나 털어먹는 놈들은 이 누나한테 좀 혼나야 해.”여름이 차민우의 손을 홱 치우고는 유유히 놈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건달들이 손에 든 각목을 죄 빼앗고는 놈들을 멀찌감치 차내 버렸다.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동작에 차민우는 혀를 내둘렀다.여리여리하게 생겼는데 이란 싸움을 시작하니 어지나 호탕한지 무슨 무대를 보는 것처럼 시원스러웠다.차민우의 날카로운 눈에는 절대 그저 보기 좋은 기교만 배운 솜씨가 아니었다.더욱 놀라운 것은 손을 보는 사이에 건달들의 손을 다 꺾어 놓았다는 점이었다. 역시나 매우 깔끔한 솜씨였다.“너희 같은 녀석들은 며칠 구치소에 들어갔다 나오면 또 이런 짓을 할 녀석들이니까 이 참에 손이라도 꺾어 놔야 몇 달 얌전히 있을 거야.”툭 던지듯 뱉는 여름의 말에 건달들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우르르 도망치고 말았다.“고맙습니다.”차민우가 성큼 다가섰다. 흑발 아래 빛나는 파란 눈이 능청스럽게 빛났다.“대협께서 구해줘서 다행입니다. 여긴 처음인데 강도 맞을 뻔했네요.”‘대협이라니?’여름은 거의 뿜을 뻔했다. “꼬맹이, 어디 외국에서 왔니?”차민우는 흠칫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꼬맹이’같은 단어로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니아만이었다면 다들 깜짝 놀라서 여름을 쳐다봤을 것이다.감히 차진욱의 아들을 ‘꼬맹이’따위 말로 부르다니, 아마도 세계 최초일 터였다.“잘못 들었나? 날 뭐라고 불렀죠?”차민우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외국이 특유의 발음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목소리가 한층 더 매혹적이었다.“보니까 한 스무 살 정도 된 것 같은데, 맞지?”여름이 훑어보며 물었다.“네, 스물 하나예요.”차민우는 동그랗고 탄력 있는 여름의 얼굴을 보며 놀라서 되물었다.“나보다 나이 많아요?”“몇 살은 더 많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 꼬맹이라고 불렀지.”여름은 차민우가 손에 든 봉투를 흘끗 보았다. 안에 향이 잔뜩 들어있었다. 가게에서 고급 향을 모두 털어간 것은 분명
“난… 이대협?”여름은 씩 웃으며 답하더니 가버렸다.치민우는 멍하니 서 있었다.‘대협… 대협?진짜 이름이 대협이야? 재미있네?’치민우가 막 골목을 벗어나 차에 탔는데 강신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이 녀석아! 너 혼자서 몰래 동성에 간 거니?”“어제 막 도착했어요.”치민우가 헤헤거리고 웃었다.“먼저 와서 엄마 고향이 어떤지 보고 싶었어요. 제가 이쪽에서 먼저 싹 준비 해 놓으면 엄마랑 아빠가 오셨을 때 제가 마중 나갈 수 있잖아요. 아침에 외삼촌이랑 외숙모 면회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 묘가 어디 있는지 물어봤어요. 이제 성묘하러 가려고요.”강신희는 듣더니 야단 치던 것도 잊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물었다.“그래 삼촌이랑 외숙모는 다 괜찮으시더냐?”“아뇨. 너무 오래 갇혀있어서 늙으셨더라고요. 그래도 엄마랑 닮은 게 느껴졌어요.”치민우가 말을 이었다.“제가 혹시 몰라서 예전에 사셨다는 곳 주변에 가서 물어보니 그곳에 정말 강신희란 딸이 있었는데 20여 년 전에 외국에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강태환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강여름이고 하나는 강여경이라고 하더라고요. 강여름은 어려서부터 데리고 키웠고, 강여경은 어렸을 때 인신매매가 되었다가 나중에 되찾아 왔대요.”“여경이 말을 못 믿은 게냐?”강신희가 인상을 찡그렸다.“친자 감별은 네가 했잖니? 여경이가 내 친딸이라면서?”“알죠. 하지만 만의 하나라는 게 있잖아요.”치민우가 말을 이었다.“엄마! 동성이 미인이 나는 곳인가 봐요. 온지 하루도 안 돼서 거의 엄마 젊었을 때만큼이나 예쁜 사람을 봤어요. 제가 본 중에는 엄마 빼고는 진짜 제일 예쁜 사람인 것 같아요. 엄마도 미인이긴 하지만 이제 나이가…”“뭐라고! 이 녀석이 감히 네 엄마를 늙었다는 게냐? 어?”별안간 차진욱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차민우는 부르르 떨었다. 옆에서 최고의 강신희 광팬인 아빠가 듣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제가 말이 헛 나왔어요. 그 여자가 엄마보다는 확실히 좀 못하더라고요
“엄마, 죄송해요.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데도 엄마를 해친 범인을 찾지 못했어요.”여름은 한숨을 쉬며 성묘를 마치고는 떠났다.여름이 가고 나서 30분쯤 지나 차민우가 도착했다.차민우는 타고난 초와 꽃 등을 보고는 흠칫했다.‘명절도 아닌데 누가 와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성묘를 했나? 누구 다른 친척이 있었나?설마 강여름?하기만 강여름은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만든 가해자잖아? 그런데 성묘를 온다고?소시오패스인가?’성묘를 마치고 차민우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할머니 할아버지 묘 근처에 강신희의 묘가 있었다. 묘비에는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이 있었다.확실히 강여경과 닮은 느낌이었다.정말 엄마 이름은 강신희였다. 그러나 강신희가 죽지 않았으니 묘비는 필요 없다.보고 있자니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밤에 사람을 불러서 그 묘지를 없애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후 4시.강여름은 윤서네 집으로 갔다.윤서는 가족들에게 한창 우쭈쭈를 받는 중이었다. 반면 송영식에게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여름아, 정말 너무 오랜만이다. 못 본 사이에 얼굴 더 좋아졌다. 얘.”윤서의 어머니 안선희가 여름의 손을 꼭 잡았다.“외국 나가 있는 동안 우리 윤서를 돌봐줘서 고맙다.”“그런 말씀 마세요. 윤서도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여름이 담담히 웃었다.“아쉽다, 애.”안선희가 문득 웃었다.“전에 네가 선우랑 헤어졌을 때 나는 혹시 널 내 며느리 삼을 수 있을까 싶어서 기대했었단다.”그 말을 들은 송영식은 귀가 쫑긋했다.‘하준이에게 새로운 연적이 생기는 건가?”임윤서가 눈을 굴렸다.“아, 됐어요. 우리 오빠는 여자한테 완전히 관심이 없다니까.”안선희가 한숨을 쉬었다.“하긴, 내가 걔한테 선을 그렇게 주선을 했는데 한 번을 안 보더라. 정말 걔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어.”여름이 위로했다.“아이고, 아직 인연을 못 만나 거죠.”“그렇겠지?”안선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경비가 뛰어 들어왔다.“윤상원 대표 쪽
윤상원이 꼴 보기 싫기는 했지만 회사나 망하게 하는 정도로 끝나겠거니 했는데 사람을 평생 감옥에서 지내게 만들다니 뜻밖이었다. 윤상원의 미래가 날아갈 판이니 그 집 부모로서는 당연히 다급할 판이었다.송영식은 모두를 한 번 훑어 보더니 망설이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윤상원이 한 짓은 다들 아시죠? 삼촌은 이제 대통령에 바짝 다가섰는데 거기에 죽자 살자 달려들어 도발을 한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 많이 화가 나셨습니다.”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안 그래도 송태구 의원은 거의 제왕이나 다름 없는 위치였다. 그런 사람을 건드렸으니….“들어오시라고 하세요.”윤서가 한참 만에야 입을 뗐다.곧 윤한중과 박수희가 들어왔다. 마침 윤서와 송영식이 자리에 있는 것을 보더니 매우 반색했다.“잘 지냈니?”윤한중은 임윤서와 송영식 앞에 다짜고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우리 아들이 어리석다. 제발 제 아들을 좀 살려다오. 우리 윤후의 자산은 모두 내놓아도 상관 없다. 자식이라고는 그거 하나뿐이다. 제발, 내가 이렇게 빈다, 윤서야.”“그래.”박수희도 울먹였다.“정말 상원이가 그렇게 황당한 짓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애가 홀린 게야. 윤서야, 상원이는 사실 늘 너를 마음에 담고 있…”송영식이 확 미간을 찌푸리더니 저도 모르게 나서서 말을 끊었다.“윤상원 주변 사람들은 왜 이렇게 꿇어 앉는 걸 좋아하지? 말을 안 들어주면 절대로 안 일어 나시겠다, 뭐 그런 건 아니겠죠? 아, 혹시 녹음기도 가져오신 거 아닙니까? 나중에 우리가 또 갑질을 했니 뭐니 하고 그러시면….”“아니오. 절대 그럴 일은 없어요.”윤한중과 박수희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우리가 신아영도 아니고….”“강 회장, 그만 일어나요”임유환이 갑자기 끼어들었다.“그게….”박수희는 눈물 그렁그렁하며 한사코 일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윤한중이 한숨을 쉬며 박수희를 잡아 일으켰다.“임 회장, 솔직히 이번 일은 내가 전혀 몰랐습니다. 상원이가 그런 짓을 하려는 것을 알았더라면 반드
박수희는 윤한중에게 이끌려 꿈이라도 꾸는 듯한 걸음으로 윤서네 집에서 나갔다.박수희는 갑자기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아이고, 다 자업자득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영이네랑 그렇게 가까이 지내는 게 아니었는데. 상원이 회사에서 일하게 두지도 말았어야 해요.”“이제서 그런 소리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 다 지가 택한 길인데. 공 의원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공 의원이 그나마 가장 강력한 송태구 의원의 적수였는데 이틀 만에 공 의원 쪽은 지금 난리가 나버렸다고.공 의원 쪽에 줄 대고 있던 정계 요원들은 다들 이런 저런 이유로 잡혀갔다드만. 송태구가 반격에 나선 게요. 눈에 거슬리는 상대는 이번 기회에 싹 쓸어버리려는 거야. 우리는 그나마 상원이 하나만 말려들어간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박수희는 아직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대체 어떤 간 큰 녀석이 우리 상원이에게 송 의원네 집을 상대하라고 부추겼을까?”“다 지 팔자지, 뭐.”*******윤서네, 밤 8시.차가운 밤이었다.임유환이 말했다.“윤서는 피곤하면 방으로 가서 자거라. 송 대표는 1층 손님 방을 쓰게.”송영식은 흠칫해서 가만히 있다가 결국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아버님, 저랑 윤서는 부부인데….”“자네들은 진짜 결혼한 게 아니라 그저 송 의원이 이번 위기를 넘을 수 있도록 협조 하느라고 가짜로 결혼한 거라고 우리 윤서가 그러던데. 그러니 한 방에서 잘 필요가 없다고.”임준서가 싸늘하게 말을 끊었다. 말인즉은, 함부로 윤서와 한 방에서 잘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였다.송영식은 완전히 어이가 없었다.‘보통 자식이 결혼하면 이혼은 바라지 않을 텐데?’“진짜 결혼 가짜 결혼이든 결혼은 결혼이죠. 이혼하지도 않았고 이혼할 생각도 없습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제가 그간 많이 잘못한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앞으로 전 윤서와 아이에게 온전한 가족을 만들어 줄 겁니다. 이혼하게 되면….”“이혼이 뭐? 우리는 윤서가 이혼을 해도 상관 없네. 딸 하나 데리고 사는 거
“당신이야 뭘 하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내 아기는 얘기가 다르지.”송영식이 무뚝뚝하게 답했다.“둘이 몰래 야식 먹으러 나가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어떻게 알았지?”윤서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송영식이 입꼬리를 올렸다.“오기 전에 하준이가 둘이 밤에 돌아다니면서 겁나게 먹을 거라고 잘 지켜보라고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는데.”여름과 윤서는 땀이 삐질 났다.당황한 둘의 얼굴을 본 송영식은 추측이 맞아 떨어진 것을 알고 바로 여름의 손에서 차 키를 가져갔다.“나는 가끔 야식 먹는 것까지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따라가야겠어요. 어쨌든 오밤중에 다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보호도 해줄 수 있고.”윤서는 송영식을 흘끗 쳐다보았다.“그러면 잘 할 수 있는 기회를 한번 주던지.”송영식이 모는 차는 곧 어느 거리에 도착했다.차는 두 사람이 자주 다니던 치킨 집 앞에 멈췄다.몇 년 만의 방문인데도 주인은 바로 두 사람을 알아보았다.“아이고, 이게 몇 년 만이여.”“저희가 외국 나가 있었거든요.”여름이 웃었다“장사는 여전히 잘 되네요.”“그럼, 그럼. 옆집까지 세 내서 가게를 확장했잖아.”주인은 송영식을 흘끗 보더니 여름에게 은근한 눈짓을 했다.“남자친구야?”다들 얼어붙자 이번에는 윤서에게 물었다.“자기는 왜 남친도 안 데리고 왔어?”여름과 윤서는 민망해졌다. 송영식은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굳어진 얼굴로 윤서를 가리키며 말했다.“저는 이 사람 남편입니다.”이번에는 주인이 민망해했다.“아이고, 미안해요. 몇 년 동안 못 봐서 내가 몰라봤네. 그런데 남편이 전남친보다 훨씬 미남이여.”“괜찮아요.”윤서가 웃었다.“어여 앉어. 내가 서비스 잔뜩 넣어줄게.”주인이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휘 둘러보니 사람이 꽉 차있었다. 결국 여름은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골랐다.“전에는 윤상원 녀석이랑 왔었나?”송영식이 냉랭하게 물었다.“응. 아주 오래 전에. 헤어지고 나서는 온 적이 없네.”윤서가 답했다
검은 반팔 티를 입은 차민우는 짙은 속눈썹 아래 사람을 홀리는 파란 눈을 깜빡였다. 그 아래로는 사뭇 섹시한 목젖이 울렸다. 겨우 스물 남짓해 보이는 어린애가 숨 막히는 카리스마를 뿜어냈다.윤서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그렇게 매력적인 남자는 처음이었다.‘이건 뭐 완전히 그리스 조각상이잖아!’송영식, 최하준, 이주혁이 내뿜는 느낌과는 다른 것이 차민우는 딱 봐도 어린 것이 중후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소년과 어른을 오가는 그 나이 대 남자의 묘한 매력이 있어서 늑대개? 대형견? 같다고 할만한 매력이 있었다.게다가 검은 머리 아래 반짝이는 푸른 눈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나타난 꼬맹이를 멍하니 바라보는 임윤서가 송영식의 눈에 들어왔다.어쩐지 갑자기 기분이 확 안 좋아졌다. 송영식이 별안간 임윤서의 발을 꾹 밟았다.“누구얏!”윤서가 바로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미안, 실수!”송영식이 시침을 떼고 사과했다.“아우, 정말….”윤서가 막 뭐라고 하려는 찰라 베이스 저음의 목소리가 울렸다.“여기 두 분은 친구세요?”여름이 소개했다.“응. 내 친구랑…”“남사친!”윤서가 바로 말을 가로챘다.“……”‘내가 남편이라고 하면 죽나? 넌 배 속에 남사친의 아이를 가진 거냐고?’“친구분들도 아주 근사하신데요.”차민우가 초승달 눈을 하고 웃었다.“동성에 멋진 분들이 많다는 애기를 듣기는 했지만, 전혀 안 믿었는데, 이제는 믿을 수 있겠는데요.”“여기는 어쩐 일이야?”여름이 웃으며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인터넷에서 치킨 맛있는 집을 찾았더니 여기가 추천으로 뜨더라고요. 그래서 내비 찍고 왔죠. 그런데 여기서 대협까지 딱 만난 거예요.”차민우가 기대에 차서 물었다.“합석해도 될까요?”“그래.”어쩐지 그 귀여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여름은 친숙한 기분이 들어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여기 메뉴 있다. 매운 것도 먹을 줄 아니?”“조금 매운 정도는 괜찮아요. 그런데 이 집은 뭐가 맛있는지 모르니까 추천해 주실래요?”차
“저는 차민우요.”“차 씨야?”여름이 놀랐다.“흔하지 않은 성이네?”“네, 아버지가 외국 분이라서요. 이번에 어머니 대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묘소에 성묘하러 왔어요.”“그러면 곧 귀국하겠구나?”송영식이 불쑥 끼어들었다.“아니오. 엄마도 오실 거예요.”차민우가 웃었다.“여기 집을 한 채 사려고요. 엄마가 외국에서 너무 오래 계셔서 돌아와서 여기서 좀 지내고 싶어하시거든요. 한동안 여기랑 거기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내실 것 같아요.”송영식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끝장났네. 하준이 연적이 여기서 한동안 뭉개고 있을 모양인데?’주문한 음식이 하나하나 나왔다.차민우는 숯불치킨은 처음 보는지 신기해 했다.멍하니 보고만 있자 여름이 먹는 법을 가르쳐주었다.“젓가락질 할 줄 아나? 손에 묻는 게 싫으면 젓가락으로 먹어도 되고, 번거로우면 손으로 들고 먹어. 젓가락질이 힘들면 수저통에 포크 있을걸?”그렇게 말하면서 다리를 가져다가 살을 발라서 차민우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윤서와 송영식은 거의 턱이 떨어질 뻔했다.“고맙습니다.”차민우가 여름이 발라준 살을 먹어보니 너무나 맛있었다.곧 차민우도 치킨을 한 조각 가져다가 여름에게 발라주었다.“이제 저도 잘하죠? 저도 하나 발라 드릴게요.”“너나 먹으면 되지.”여름이 답했다.“왜요? 내가 해주는 게 싫어요?”실망한 듯 축 처진 차민우의 눈을 보고 있자니 여름은 심장이 녹아 내렸다.“아, 아니야. 고마워.”여름은 얼른 받아 먹었다.먹는 내내 송영식과 윤서는 마치 남의 데이트에 훼방꾼이 된 기분이었다.치킨을 먹고 나더니 차민우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윤서는 마침내 속에 있는 말을 쏟아놓을 수 있었다.“야, 너 어디서 저런 근사한 애를 만났냐? 완전 불공평하다. 왜 저런 절세의 미남은 다 너한테만 가냐? 둘이 얼마나 다정한지 눈꼴시어 못 봐주겠다, 증말.”“……”남편인 송영식은 듣자니 어이가 없어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뭐야, 난 이제 투명 인간 취급인가? 저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