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전 검사 결과와 관련 자료입니다. 임윤서 씨는 최근 몇 달 동안 정기적으로 산전 검사를 받아왔습니다.”송영식이 산전 검사 관련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제가 충동적으로 반응한 것은 사실입니다. 잠시 완전히 이성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임신한 아내가 누군가에게 맞는 것을 보게 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을지 묻고 싶습니다.”기자가 연달아 물었다.“하지만 임윤서 씨가 먼저 윤후그룹을 공격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게 아니었다면 신아영 씨가 먼저 임윤서 씨를 찾아가서 귀찮게 하지 않았겠죠. 게다가 영상을 보면 바닥에 꿇어앉아서 애걸하던데요. 임윤서 씨는 완전히 기세등등한 모습이고요.”임윤서가 미간을 찌푸렸다.“현장 영상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는 처음부터 신아영 씨에게는 손끝도 대지 않았습니다. 신아영 씨가 갑자기 나타나서 다짜고짜 무릎을 꿇은 것뿐입니다. 저는 완전히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고요. 신아영 씨와 그렇게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심지어 사이도 안 좋은데 제가 왜 영문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쪽을 상대해야 합니까? 신아영 씨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입덧이 올라와서 자리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아영 씨는 계속 절 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듣고 보니 신아영이 너무했네.”누군가가 신아영을 질책했다.“그런 상황에서 제가 굳이 신아영 씨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써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건 좋은 거고, 싫은 건 싫은 거죠. 저와 윤상원 씨가 사귈 때 신아영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동생이라는 이름을 걸고 시시때때로 주변에 나타났습니다. 둘이서 쇼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데이트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신아영을 데리고 나타났을 때 기분이 어땠겠습니까?”임윤서가 너무나 싫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그렇게 늘 신아영을 달고 다녀야 하는 신세가 너무 싫어서 윤상원 씨와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그 점은 윤후그룹 직원들도 늘 목격한 사실입니다. 저와 윤상원 씨가 사귀는 동안 신아영 씨는 어딜 가도 윤상원 씨와 꼭 붙어 있고는 했습니다. 유
-윤상원, 임윤서랑 학교 같이 다녔는데요. 그때 임윤서가 윤상원한테 정말 잘 해줬습니다. 뭐든 윤상원에게 다 맞춰주고 그랬는데 윤상원은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임윤서가 되게 아팠던 적이 있는데 혼자 병원 가더라고요.-나도 그런 거 봤어. 윤상원 생일이라고 임윤서가 파티 해준다고 친구들 잔뜩 불러보았는데 윤상원은 막상 나타나지도 않았다니까.-그건 아무것도 아니지. 윤상원은 결혼 때문에 임윤서 부모님과 약속을 잡아 놓고 신아영을 만나러 가서는 임윤서 부모님을 바람 맞혔다고. 2시간 넘게 기다렸대.-진짜? 진짜 완전히 댕댕이네. 거의 양유진 수준 아니냐?-양유진은 비열하기가 아주 한도 끝도 없는 거고, 윤상원은 그냥 쓰레기네. 남의 청춘을 낭비하게 만들고.여름이 댓글을 달았다.-윤상원은 자기가 쓰레기인 것도 몰라요. 오히려 임윤서가 신아영에 대해서 예민하게 군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사귀는 동안 막상 임윤서랑 여행가고, 밥 먹고 영화보고, 데이트한 게 다 저였어요. 애초에 윤서는 하찮게 여기고 무조건 신아영만 싸고 돌았어요. 그러면서 윤서가 못돼서 그렇다고 뒤집어 씌웠죠. 그래 놓고는 뭐? 윤서가 자기를 못 잊어서 복수를 하려고 한다고?-맙소사. 강여름이 나한테 댓글 달아줌?-강여름이랑 임윤서랑 절친이니까.-왜 그렇게 신아영을 개무시했는지 알 것 같다. 나같았으면 진작에 줘팼을 거임. 다시 생각해 보니까 임윤서가 진짜 착한 거네.하준이 여름에게 대댓글을 달았다.-윤상원이 한 짓을 생각하니 정말 할 말이 없군.여름이 다시 하준에게 댓글을 달았다.-전에는 윤상원이 윤서더러 나랑 헤어지라고 한 적도 있어. 내가 자기들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한다면서. 한번만 더 그런 소리 하면 가만 안 둘 거야.하준이 여름에게 댓글을 달았다.-그런 일은 당신 손 더럽히지 말고 나에게 맡겨.-아니, 최하준이랑 강여름은 왜 여기서 러브러브야?******윤후그룹.윤상원의 부모는 송윤구가 아들, 며느리와 연 기자회견을 보고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신아영이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눈물을 쏟았다.“아버지, 아영이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제가 그렇게 한 거예요.”윤상원이 힘없이 말했다.윤한주이 소리를 질렀다.“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송태구 의원 집안을 모함했으니 이제 그 집안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송윤구 회장도 끝까지 싸우겠다잖아? 송태구 의원의 정적들은 죄 꼬리를 감추고 뒤로 빠지면서 이제 저만 앞으로 밀어낼 텐데, 윤후가 작살나는 게 너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게냐? 저쪽에서는 이제 네가 배후 조종자라고 생각할 이유가 충분하고, 저쪽 집에서 그런 모욕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것 같냐?”“송태구 의원은 지금 널 일벌백계로 삼아서 사람들에게 자기 집안을 건드리면 어떻게 된다는 걸 단단히 보여줄게다.”윤상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윤상원의 어머니가 울먹였다.“얘, 어쩌다 그런 짓을 했니? 이제 우리가 어떻게 저쪽을 상대한단 말이냐...?”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경찰이 들어왔다.“실례합니다. 윤상원 씨가 온라인에서 댓글을 조작해 송태구 의원과 딸인 임윤서 씨를 모함했다는 송태구 의원의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윤상원 씨, 같이 서로 동행해 주시죠.”경찰이 와서 양쪽에서 윤상원의 팔을 잡았다.“아닙니다.”윤상원은 완전히 당황했다.“폭행 영상을 이쪽에서 유출한 게 아닙니까?”경찰이 날카롭게 물었다.“이쪽에서 그 영상을 유출하는 바람에 송태구 의원의 가족이 갑질을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커질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면서 네티즌이 송태구 의원의 가족을 욕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그렇게 커지는 데도 이쪽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마치 그 의견이 사실이라고 인정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또한 익명으로 임윤서가 윤후그룹을 상대로 복수하려고 했다는 글을 올렸죠? IP를 조사해 보니 윤상원 씨 회사로 나왔습니다.”윤상원은 심장이 쿵 떨어졌다.네티즌들이 멋대로 윤서와 송태구 의원을 공격하도록 묵인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익명으로 글을 올린 적은 없었다.윤상원은 저도 모르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저쪽에서는 이제 우리 쪽을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아영이네라고 그냥 둘 것 같아? 일단 상원이부터 경찰서에서 꺼내 오고 나서 얘기하자고. 아무래도 저쪽에서는 상원이를 그냥 두지 않으려고 하겠지만.”윤한중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송영식의 본가.윤서가 막 밥을 다 먹고 난 참인데 송근영이 전화를 받더니 송태구에게 말했다.“윤상원은 구속됐답니다.”“그래.”송태구가 무거운 얼굴로 차를 마셨다.“공 의원 쪽은 어떻게 되고 있니?”“공 의원은 아프다고 드러누워서 외부와 접촉하지 않고 있습니다. 며칠 휴가를 신청했다고 하더군요.”송근영이 담담히 답했다.“아무래도 한동안은 얌전히 있지 싶습니다.”“얌전히 지낸다고 그게 며칠이나 가겠니?”송태구가 송정환을 바라보았다.“내가 그래도 공 의원 노후는 편안히 지내게 해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구나. 가서 며칠 안에 저쪽을 끝장내거라.”“네,”송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대답하는 송정환에게서 윤서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서늘함과 예리함이 느껴졌다.윤서는 깜짝 놀랐다. 송태구가 자기 앞에서는 늘 자상하고 온화한 모습만 보여와서 정계에 몸 담고 있는 사람의 참 모습을 몰랐던 것이다.“윤상원은….”송태구가 웃으며 윤서를 바라보았다.“우리 공주님에게는 좀 미안하게 되었네. 이제 우리 공주의 전 남친은 미안하지만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거야.”임윤서는 헉 했다.“평생을요?”송정환이 윤서를 쳐다봤다.“우리 집안을 건드릴 때는 최악의 사태까지 각오하고 덤볐어야지. 윤상원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우리 집안을 우습게 볼 거 아냐?”“지금까지는 우리 집안의 평판이 내내 좋았는데 이번에 윤상원이 아주 그 평판을 산산 조각 낼 뻔했다.”송우재가 끄덕이며 송정환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윤서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만 두었다.윤상원이 밉기는 했지만 평생을 감옥에서 썩히고 싶을 정
“내가 신났다고? 아닌데.”송영식이 당황했다.“……”이주혁이 풉하고 웃었다. ‘얼굴에 온통 헤벌레인데 저만 모르는구먼.’“어쨌든 결혼은 하고 볼 일이야. 윤서가 없었으면 우리 어머니가 끊임없이 선자리를 밀고 들어왔을 거야. 어쨌거나 내 아이도 가지고 있지, 일 똑 부러지게 잘하지, 식구들이 아주 그냥 다들 예뻐한다니까. 그러니까 아주 괜찮은 상대였다, 이런 말이야.”송영식이 생각에 잠겨서 말했다.“축하한다. 이번에 윤상원 일이 아니었으면 임윤서가 너랑 결혼해 주지도 않았을걸.”이주혁이 비죽거렸다.“덕 본 줄이나 알아라.”“왜 말을 그렇게 하냐? 남편감으로 나도 밀리는 거 없다고.”송영식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룸 문이 열리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최하준이 들어왔다.“무슨 얘기 하려고 불렀냐? 빨리 빨리 하고 끝내자. 집에 가서 와이프하고 애 봐야 해.”“밤일도 못하면서 일찍 가서 뭐 하려고?”송영식이 매정하게 공격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죽고 싶냐?”이주혁이 웃었다.“야야, 이제 막 결혼한 새신랑인데 봐 줘라, 좀. 자, 새신랑 한잔 받아. 신혼 첫날 뜨거운 밤 보내라.”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이주혁이 송영식의 귀에 대고 가만히 말했다.“너도 참 대단하다. 30년을 마법사로 지내 놓고 어떻게 그렇게 단 한 번에…. 그것도 정신도 멀쩡하지 않은 상태로 말이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제대로 좀 가르쳐줄까?”“이 자식이!”송영식은 귀까지 빨개져서 펄쩍 뛰었다.“우리끼리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그러냐?이주혁이 키득키득 웃었다.송영식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런 거 아니야. 결혼하기 전에 임윤서가 사인하라고 계약서를 줬는데 결혼하고 나서 자기 몸에 절대로 손대지 말래. 우린 그냥 명목상의 부부야.”“……”최하준은 신이 나서 놀렸다.“자~알 한다.”“뭔 소리야? 나도 정상적인 욕구를 가진 사람이거든.”“뭐, 전에도 안 하고도 잘 살았잖아. 그냥 그러고 더 살아.”이주혁이 피식 피식 웃었다.“전에는
여름은 하준의 대담한 애정표현에 얼굴이 발그랗게 되었다.“내일 윤서랑 영식 씨랑 동성으로 간대. 나도 같이 한번 다녀오려고. 내일 마침 할머니 생신 날짜라 간단하게 생신제사나 드리고 오려고.”“좀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며칠 동안 스케줄이 이미 다 잡혔을 건데….”“괜찮아. 혼자 다녀오면 돼. 윤서도 같이 있으니까….”여름이 달랬다.“윤서 씨는 윤서 씨고 나는 나지. 게다가 자기 할머니면 내가 당연히 가야 하는 거잖아?”하준이 여름이 목에 머리를 묻었다.“아아아~ 우리 있는 데서 그런 것 좀 막 하지 마요!’여울이 허리에 손을 얹고 화난 듯 말했다. 하늘도 인상을 찡그렸다.“이제 아주 혼자서만 엄마를 다 차지하고. 틈만 나면 아빠가 엄마한테 들러붙어 있다니까. 우리한테도 양보 좀 해요.”“그러니까 말이야!”여울이 맞장구를 쳤다.“이럴 줄 알았으면 다시 사귀라고 하지 말걸.”“……”쌍둥이의 성토에 하준은 매우 난감해졌다.“푸흡!”여름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하준을 밀어내고 쌍둥이를 안았다.“엄마, 우리도 따라갈래.여울이 애교를 떨었다.“안 돼. 아직은 좀 위험해서. 엄마도 갔다가 금방 돌아올 거야.”여름이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여름이 고개를 들어 하준을 바라보았다.“당신은 이제 너무 매일 나한테 붙어있지만 말고. 적당히 떨어져 있어야 더 예뻐 보이는 법이야.”“왜? 나한테 질렸어?”충격 받은 얼굴로 하준이 물었다.여름은 팔을 양쪽으로 펼쳤다.“허구한 날 봤더니 당신 미모가 와 닿지도 않는다고.”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반면 여울과 하늘은 재미있다는 듯 웃다가 여울이 한마디 했다.“엄마 말이 맞아. 전에는 나도 아빠가 엄청 잘 생긴 줄 알았는데 이젠 너무 많이 봤더니 별 느낌도 없어요.”“……”하준은 울화통이 터졌다. 내내 자기 외모에 상당한 프라이드를 갖고 있었는데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를 부정당하는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좋아. 가는 건 좋은데
먼저 공항에 도착한 송영식과 임윤서는 여름을 보더니 바로 다가와 덥석 손을 잡았다.“너무 잘 됐다. 여름이랑 같이 있으면 여기서도 심심하지 않겠다. 밤에는 우리 집에서 잘 거지?”“그래. 이젠 동성에 딱히 잘 데도 없고.”여름이 웃었다.“우리 여름이 잘 챙겨주라.”하준이 송영식에게 부탁했다.“야, 그 실력이면 여름 씨가 날 지켜줘야 하는 거 아니냐?”송영식이 놀리듯 말하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런데 왜 여름 씨를 우리랑 같이 가라고 했냐?”“왜? 싫어? 같이 가주는 걸 영광으로 알라고.”하준이 당당하게 말했다.송영식은 황당했다.“아, 됐어. 강여름이 너한테나 사랑스러운 여자지 나한테는 훼방꾼이거든. 난 이번 기회에… 윤서랑 관계를 좀 진전시켜 보나 했는데….”송영식은 말끝을 흐리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하준은 마땅찮은 눈으로 송영식을 흘겨보았다.“걱정 붙들어 매. 여름이가 같이 안 가도 어차피 네가 원하는 대로는 안 돼. 꿈 깨라고.”졸지에 찬물을 뒤집어 쓴 송영식은 하준을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우리 자기 조심해서 다녀 와.”하준이 여름 곁으로 다가와 작은 볼을 감쌌다.“나 놓고 바람 피우면 안 돼!”“그거 내가 할 대사거든.”여름은 한 마디로 하준을 물리고는 윤서와 손을 잡고 가버렸다.하준은 여름과 윤서의 꼭 잡은 손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았다.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여름이 다른 사람과 손을 잡는 것이 싫었다. 상대가 여자라고 다르지 않았다.******비행기에서 여름과 윤서는 같이 앉았다. 둘은 소곤소곤 재잘재잘 끊임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둘은 뒤에 앉은 송영식은 아랑곳 않았다. 송영식은 심심한 나머지 비행 내내 잠만 잤다. 비행기가 동성 공항에 착륙했다.임준서는 정장을 말끔히 차려 입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송영식을 보더니 싸한 얼굴이 되었다.“자네는 알아서 여기 저기 구경하게. 굳이 우리 집에 올 필요는 없어. 자네랑 내 동생이 상황에 밀려서 억지로 결혼한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구태여 장인 장모
여름의 미간이 깊은 주름이 잡혔다.강태환과 이정희를 잡아 넣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그런데 잡아 넣은 지 4년도 안 돼서 석방되다니.누구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뭘 했길래요?”여름이 물었다.“잘 모르겠다.”임준서가 고개를 저었다.여름의 미간이 확 모였다.“말도 안 돼요. 감옥에서 그 두 사람이 무슨 짓을 잘 했다고 20년 이상을 감형 받는대요? 아무래도… 강여경이랑 관련 있는 것 같네요.임준서가 깜짝 놀랐다.“강여경이 돌아왔다고 생각하니? 그럴 리가 있나? 강태환 부부가 감옥에 간 뒤로 강여경은 부모도 버리고 도망쳐서 몇 년 째 돌아오지도 않는걸. 그런 인간에게 그런 양심이 있을 리가 있나?”“모르죠. 하지만 이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나요?”여름이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강여경의 힘으로 강태환 부부를 꺼낼 수 있었을까?”“강여경은 뒤에 숨은 채로 몇 번이나 맞부딪혔지만 저는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어요. 정말 돌아왔다면 아마도 단단히 준비를 하고 왔을 거예요.”여름의 눈에 깊은 우려가 스쳤다.자신은 아직 양유진 일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하준은 추신과 대립하는 중에 강여경까지 돌아와 버리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다.송영식이 두리번거렸다.“대체 강여경이 누군데?”윤서가 송영식을 노려보았다.“여름이의 사촌 동생인데 완전 무서운 인간이야. 백지안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송영식은 어안이 벙벙했다.‘백지안에게 감쪽같이 속은 채로 우리가 십수 년을 보낼 정도인데 그거 보다 더한 인간이 있다고?’“그런 우울한 얘기 그만하자. 우리가 보통 사람이니? 이제 그 인간이 돌아온대도 겁날 거 하나도 없어.”임준서가 빙긋 웃었다.“그 말도 맞네. 송태구 의원의 딸로서 널 도와주지.”윤서가 여름을 와락 안았다.“잘 됐어. 강여경이 돌아왔으면 이제 우리가 하나하나 복수해 주자고. 이번에는 절대로 도망치지 못하게 할 거야.”“고마워.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냥 내 생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