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하준은 전화를 끊고 나서 긴 다리로 성큼성큼 병원 건물로 들어갔다.그대로 이주혁이 소개한 비뇨기과 의사에게로 갔다.하라는 대로 검사를 주르륵 하더니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 나왔다.이주혁도 특별히 짬을 내서 왔다가 하준을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그래, 뭐래?”하준은 어두운 눈으로 주혁을 바라보았다.“너희 병원 비뇨기과 안 되겠다, 진짜.”“어이, 그 분은 우리나라 최고의 비뇨기과 닥터신데….”이주혁이 안쓰럽다는 듯 하준을 바라보았다.“급할 거 뭐 있어. 천천히 하자.”하준의 목젖이 꿀렁 하더니 우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전에는 쓸 일이 없으니 급할 것 없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급하다고.”어젯밤 도발해 봤자 자신을 만족시킬 수도 없지 않냐던 여름의 말이 내내 뇌리에서 맴돌았다.그 바람에 여름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도 한 번씩 더 생각을 하게 되었다.이주혁이 의미심장하게 하준을 바라보더니 웃었다.“둘이 잘 되고 있구나?”“응.”하준이 조그맣게 답했다.이주혁은 피식 웃으며 하준의 하체를 한 번 훑어보았다.“진실된 사랑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네. 이 지경인데도 널 받아주다니.”“야, 지금 놀리는 거냐,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거냐?”하준이 이 사이로 뱉었다.“반반이랄까?”하준이 큭큭 웃으며 솔직하게 답했다.하준이 사람 잡을 듯 싸늘한 시선으로 이주혁을 노려보았다.“자, 자, 너무 그러지 말고. 너한테 줄 선물 있어.”이주혁이 두리번 거리고 살피더니 뭔가를 하준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의아해 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지 만져본 하준은 얼굴이 시퍼렇게 되었다.“야, 이 자식! 죽을래?”“너무 고마워 하지 말고.”이주혁이 눈썹을 찡긋했다.“여자라고 남자랑 다른 줄 아냐? 너무 독수공방하게 두었다가는 후회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네가 알던 여자들이랑 우리 여름이 비교하지 말라고!”하준은 그대로 굳어서 으르렁거렸다.“됐어. 어쨌든 너한테 준 거니까 이젠 네 마음대로 해.”이주혁이 어깨를 으쓱했다.“가자. 영식이
“아, 적당히 해라.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냐?”송영식이 의기소침해진 모습을 보고 이주혁이 중재에 나섰다.“그리고, 너도 백지안한테 십수 년을 당해 놓고. 그나마 영식이는 걔한테 돈은 안 잃었다고.”“……”하준은 이주혁이 대체 자기 편을 드는지 송영식 편을 드는지 알 수 없어 싸늘한 눈을 하고 바라보았다.이주혁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송영식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감격한 듯 말했다.“그래도 위로가 된다. 내 마음과 사랑은 농락당했지만 그래도 재산은 지켰네. 며칠 동안 내내 이러고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라. 그런데 갑자기 누구누구랑 비교해 보니 나는 그나마 행운이네. 이제 안분지족하려고.”“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지.”이주혁이 말을 이었다.“솔직히 생각해 보면 우리 셋 다 바보라니까. 백지안에게 그렇게 속아 넘어간 걸 보면.”“그러게나 말이다.”송영식이 씁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걔한테 난 그냥 어장 관리 대상이었는데, 나 진짜… 너무 멍청하지 않냐? 이제서야 나는 백지안에게 그렇게 무시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다니.”“걔가 뭔데 널 무시해?”하준이 뱉었다.“걔는 그냥 돈과 권력을 탐하는 허영쟁이일 뿐이야. 걔가 전에 나는 사랑했는 줄 아냐? 그리고… 이제 보니 백지안의 그냥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어.”“그게 무슨 소리야?”송영식이 멍하니 물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쳐다봤다.“여름이가 그러는데 전에 곽철규에게 사람을 붙여서 추적한 적이 있대. 그러다가 니아만의 킬러 손에 녀석이 죽는 걸 목격한 거야. 니아만의 킬러는 우리 나라에서 오로지 추신과 양유진이 명령만 들어. 그런데 추신도 양유진도 곽철규랑 딱히 연결고리도 없는데 죽일 이유가 없거든. 이유는 단 하나뿐이지. 곽철규가 죽기를 바랐던 사람은 백지안이라고. 백지안은 추신이나 양유진과 얽혀있는 거야.”송영식은 굳어버렸다.“그… 그렇지만 지안이는 곽철규에게 협박 당했다고 했잖아? 그 자식의 죽음은 자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넌 아직도 걔 말을 믿
“뭐? 너희 재결합했어?”송영식이 깜짝 놀랐다.“응.”하준이 씩 웃었다.“이제 우리 모이게 되면 제발 네 그 주둥이 좀 조심해 주라. 솔직히 우리 여름이가 너나 백지안에게 뭐 잘못한 거 하나도 없잖아? 나도 백지안을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전에는 네가 여름이에게 사사건건 말로 시비 걸어도 내가 가만 있어서 너랑 여름이랑 사이가 더 멀어진 것 같아. 그게 내가 제일 잘못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해. 이제 여름이랑 다시 시작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면 이제 나는 절대 망설이지 않고 너에게 주먹을 날리는 쪽을 택하겠어.”송영식은 울컥했다.“야, 병문안을 온 거야, 협박하러 온 거야? 나보다 강여름이 더 소중해?”“내가 친구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바람에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 아빠가 없이 살아야 했고, 난 그 귀여운 녀석과 가정을 잃었어.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두지 않을 거야.”하준은 잠시 멈추더니 화제를 돌렸다.“그리고… 여름이가 얼마나 현명한지 알아? 침착하고 지혜롭고 강인한 사람이라고. 여름이는 정말 많은 것들을 우리보다 훨씬 더 먼저 꿰뚫어 봤어. 게다가 비즈니스 방면에서도 경험이 많아. 난 이제 엶이 말을 듣는 게 더 나은 것 같아. 전에도 봐봐, 내가 와이프 말을 안 들어서 완전히 백지안의 사기극에 속아 넘어간 거 아냐?”송영식과 이주혁은 당황했다.“너 지금 네 여친 자랑하러 왔냐?”이제는 이주혁도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내 말이 틀리냐?”하준이 날카롭게 물었다.“너희가 그렇게 현명했으면 애초에 왜 다들 백지안이 그렇게 좋다고 다들 그랬냐? 나는 쓰레기를 보물인줄 알고 애지중지 했잖아. 그거 보라고, 난 옆에 현명한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해.”하준이 이주혁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너, 내가 진작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시아랑 결혼이라니 정신 나갔냐? 걔가 얼마나 표리부동한 앤데? 지훈이가 시아에 대해서 뭐라고 했는지 생각 안 나냐?”이주혁이 이마를 문질렀다.“내내 나랑 시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하더니 오
“아까 한 말 잊지 마라. 앞으로 형수님 깍듯하게 대해.”하준이 웃으며 나갔다.송영식은 울고 싶었다.‘난 환자라고, 환자! 환자에게 와서 경고나 하고 말이야!’******하준은 서둘러 화신으로 차를 몰았다.도착해 보니 여름은 로비에서 한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여름은 차에 타더니 기분이 안 좋은 듯 싸늘하게 노려보았다.“나 5분이나 기다렸어.”사실 여름이 그렇게 인내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재결합 첫 날인데 하준이 기다리게 하자 사귀자는 말을 하고 나니 더 이상 존중 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내가 잘못했어. 화 내지 마.”하준이 선수 쳐서 얼른 사과했다.“주혁이네 병원에서 오는 길인데 자기도 거기 길이 얼마나 막히는지 알지?”“거긴 왜 갔는데?”여름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하준이 어색한 듯 코를 문질렀다.“그게… 비뇨기과 진찰받으러 다녀왔지.”“……”여름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재결합 첫날부터 비뇨기과를 쪼르르 갔었다니 무슨 심산이었는지가 너무 투명하게 보이지 않나?“그래서… 좋아졌어?“크흠, 의사가…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하준이 긴장해서 여름을 바라보았다.“저기, 그런 거 너무 신경 쓰이진 않지?”“난 당신한테 그렇게 굶주리진 않았다니까.”여름이 당황한 듯 내뱉었다.민망한 듯 하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들어보니까 여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 원하게 된다고 하던데….”“누가 그딴 소리를 해!”여름은 귀까지 빨개지고 말았다.“그게… 전에 술자리에서 나이든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지.”하준이 더듬거렸다.“내가 자기들이랑 똑 같은 줄 알아? 정말 할 일들 되게 없나 봐? 그렇게 시간이 남아돌면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여름은 황당했다. 지금 이혼 생각만 해도 정신이 없는데 그런 일을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아, 알겠어. 내가 잘못했네. 그리고 병원 간 김에 영식이도 보고 왔어.”하준이 얼른 잘못을 인정했다.“앞으로는 당신에게 정중하게 대하라고 경고하고 왔어. 난 이제
“그래도 아기에게 아빠가 있으면 좋잖아…”하준이 용기를 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그것도 어떤 아빠냐에 따라 다르지. 머리에 쓰레기나 잔뜩 들어있는 아빠가 뭐 애나 키우겠어? 좋기는커녕 남의 애만 망치는 꼴이 되고 말지”여름이 반대 의견을 냈다.하준은 입을 다물었다.송영식이 집으로 돌아갈 길은 아무래도 요원한 듯했다.******운전을 하고 한참을 갔다.여름은 갑자기 하준의 차가 일부러 시내를 크게 한 바퀴 도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휘 돌더니 갑자기 속도를 내서 강변의 큰 길을 달렸다.“대체 누굴 만나러 가는데 이렇게 조심스러워? 미행 따돌리는 것 같네?”“우리 여름이는 정말 너무 똑똑하단 말이야.”하준이 한창 치켜세웠다.“곧 알게 될 거야. 궁금해도 잠깐만 참아.”하준이 그렇게까지 비밀스럽게 굴자 여름은 저 묻지 않았다.50분이 지나 차는 어느 별장으로 들어갔다. 별장은 강변에 지어지지 않았지만 정원에서 산 아래로 큰 강줄기가 보였다.“집을 새로 샀어?”여름이 의아해서 물었다. 하준이 막 차에서 내릴 때 경비가 아는 사람인 듯, 그러나 매우 정중하게 대했다.“아니.”하준이 보조석으로 와서 문을 열어 여름이 내리도록 부축해 주었다.한번 쓱 둘러보기만 해도 그 별장의 가격이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게 보였다.하준을 따라 별장으로 들어가자 어마어마하게 큰 테이블에 굉장히 덩치가 큰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마흔이 좀 넘은 것으로 보였는데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이였다.콧대가 곧고 온몸에서 성숙한 남성미가 느껴졌다. 다만 얼굴 한쪽에 깊은 흉터가 있었다. 그러나 굵직한 이목구비로 미루어보면 젊었을 때 꽤나 잘생긴 얼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잘 생긴 게… 옆에 있는 이 남자와 좀 닮은 것도 같고?’“왔구나.”한병우의 시선이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 떨어지더니 싱긋 웃었다.“자, 소개할게. 이쪽은 우리 아버지셔.”하준이 여름을 데리고 가서 소개했다.“그리고 가디언 그룹의 이사장이시기도 하지
“아주 현명하군요.”한병후가 여름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감격한 듯했다.“예전의 나보다는 훨씬 현명하니 두 사람의 결말은 나보다는 낫겠군.”‘추동현이 두려워서 20년이 훨씬 더 지나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던 나와는 달라.난 추동현에게 속아서 양하가 남의 아들인줄 알았으니까.그 바람에 하준이와 양하는 친형제면서 수십 년을 서로 미워했고 이제 양하는… 이 세상에 있지도 않지.’지금 한병후가 최양하의 일을 생각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여름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혼자 만의 잘못도 아닌데요.”“그렇지.”한병후가 고통스럽게 끄덕였다.“자네는 나보다는 현명하니 하준이를 그래도 빨리 정신차리게 만들었겠지. 둘이 잘 지내는 걸 보니 다행이야.”“맞습니다. 저와 여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비하면 운이 좋은 편이죠. 우리 이런 우울한 얘기는 그만 두고 식사나 하시죠.”하준이 두 사람을 위해 상을 차렸다.그러는 동안 한병후와 여름은 사업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다. 역시나 글로벌 시장에서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한병후가 가볍게 몇 마디 짚어준 것만으로도 여름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여행업을 키워보겠다는 생각은 적절한 것 같군. 아직 부동산이 잘 버티고 있긴 하지만 요 몇 년 성장 속도가 좀 정체기에 들어선 것 같단 말이지. 이제 슬슬 하락하는 시장이 될 거야. 내가 Y국 여행업계 거두를 좀 아니 소개를 해주지요. 나중에 협력해서 해외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지 보자고.”한병후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해외 거물들에게 연락처를 적어주었다.여름은 너무 기뻤다.“감사합니다. 정말 식견이 넓으셔서 많이 배웠습니다.”“나도 아는 거 많은데.”여름이 한병후를 보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하준이 질투했다.“그냥 여행업계 친구들 소개해 주신 거잖아. 나도 알아.”“적당히 해. 당신이랑 아버님 살아온 인생이 수십 년 차이가 나는데 수십 년의 경험이 아무것도 아니겠어?”여름이 하준을 흘겨보았다.“오늘 소개해주신 분 들 중 한 분은 전세
“엄밀히 말하면 어제 저녁 11시 28분부터 시작했는데.”하준이 지적했다.여름은 할말을 잃었다.한병후는 유치한 입씨름을 하는 한 쌍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며 웃었다.예전에 한병후과 최란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서로 아껴줄 줄을 몰랐다.이제 반 평생을 지나고 보니 자신은 이제 사업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외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여기서 잠깐 기다리거라.”한병후가 갑자기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3분 뒤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내려와 여름에게 넘겨주었다.열어보니 예전 하준의 본가가 있던 별장의 부동산 계약서와 열쇠 꾸러미였다.여름은 깜짝 놀랐다.“그 별장을 구매하신 미스터리의 구매자가 아버님이셨군요!”“만난 기념으로 그 별장을 선물로 주마.”한병후가 웃었다.“우리 손자 손녀 출생 선물이라고 하지.”여름이 펄쩍 뛰었다.“이렇게 귀한 것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여울이와 하늘이에게 주는 거네.”한병후가 손을 저었다.“받아. 애초에 FTT가 난관을 극복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샀던 것이라 들어가서 살 생각도 없었는걸. 솔직히 그 집에서 난 좋은 기억도 없지만 그 집 식구들에게는 다를 거 아닌가? 특히 두 어르신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게야.”하준은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었다.“아버지, 그러니까….”“그 별장은 괜찮은 곳이지. 과수원도 있고 승마장도 있어서 아이들 키우기에 좋은 곳이야. 난 아이들이 그 집을 아주 좋아할 것 같구나.”한병후가 덧붙였다.“내가 가지고 있어 봐야 내내 비워 놓고, 너무 낭비야.”“하지만….”“받아, 자기야.”하준이 말했다“우리 아버지께서 우리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이잖아.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날 부양하지 않았어.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대신 해주고 싶으신 거야.”“그렇다.”한병후가 인정했따.“정 그러시다면… 아이들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여름이 이제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밤 9시. 두 사람은 별장을 떠났다.뒤에서 한병후는
여름은 탄식했다.최란의 잘못은 정말 너무나 컸다.결혼을 했으면 추동현과 거리를 두었어야 하는데, 추동현과 얽히는 바람에 한병후와 사이에 계속해서 오해가 쌓인 것이다.부부 사이란 서로 너무 신경을 쓰다 보면 믿음이 약해지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하준과 여름의 사이도 그렇지 않았던가.그러나 최란-한병후 커플과 달랐던 점이라면 하준이 백지안과 관계를 가지거나 아이를 만들지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여름도 재결함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어머님도 양하 씨가 아버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여름이 물었다.하준이 고개를 저었다.“정확하게 말씀 드리지는 않았어. 너무 충격 받으실 것 같아서.”추동현 같은 인간 쓰레기와 결혼했다는 것보다 당시 생겼던 아이가 추동현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게 되면 최란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하긴, 어차피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런 사실을 하시게 되면 너무나 견디기 힘드시겠지?”여름은 최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나라면 추동현을 잡고 너 죽고 나 죽자하면서 덤빌 것 같아. 추동현을 위해 그 많은 일을 해주셨는데 완전 우스개거리가 되어 버렸잖아.”“그러니 그 일은 부디 비밀로 해줘.”하준이 부드럽게 여름의 손을 잡았다.“자기야, 사실 난 그나마 행운아라고 생각해. 아버지 말씀이 맞아. 당신이 현명해서 내가 결혼하는 걸 막아 준 거야. 내가 쉰, 예순이 되어서야 진상을 알게 되었다면 난 견딜 수 없었을 것 같아.”“착각하지 마. 당신을 말리려던 게 아니라 백지안이 뜻대로 사태가 흘러가는 걸 막으려고 했던 것 뿐이니까.”여름이 하준을 흘겨보았다.“그러면서 당신 여자가 바람 났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충격 받을 당신의 꼴이 보고 싶었던 거라고.”“요, 요… 못된…!”하준이 여름의 손바닥을 꾹 꼬집었다. 얼굴에는 쓸쓸한 기색이 있었다.“그때 당신 질투 같은 건 안 했어?”“전혀.”여름이 단호하게 말했다.“당신이 나를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